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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韓, 러시아 學者들의 ‘東北亞 古代國家의 歷史’ 國際學術大會|新東亞

南北韓, 러시아 學者들의 ‘東北亞 古代國家의 歷史’ 國際學術大會

“誇大妄想症 中國,‘文明 훔치기’ 自充手까지…”

  • 권재현 동아일보 文化部 記者 confetti@donga.com

    入力 2007-11-08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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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考慮學術文化財團과 러시아 極東國立大가 共同 主催하는 ‘東北亞 古代國家의 歷史’ 國際學術大會가 10月1日부터 3日까지 南北韓 및 러시아 歷史學者들이 參加한 가운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다. 이 學術大會는 세 나라의 學者들이 硏究한 高句麗-渤海 歷史 交流를 통해 다시 한番 中國 東北工程의 虛構性을 學術的으로 立證하는 場이 됐다.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高句麗와 渤海 歷史를 中心으로 學術討論을 하는 南北韓·러시아 學者들.

    “中國人들은 러시아가 스푸트니크號를 쏘아 올렸을 때 ‘中國이 이미 1000年 前 宋나라 때 開發한 것(火藥으로 쏘는 불화살)을 러시아는 이제 겨우 開發했다’고 主張했다는 事實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中國人들이 말하는 天下의 中心은 늘 中國이고 周邊 國家는 아무리 큰 나라라도 작은 섬에 不過할 뿐입니다.”

    러시아 考古學界의 元老인 70代의 다비드 브로디얀스키 극동대 敎授의 말이다. 10月2日 러시아 沿海州의 州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東北亞 古代國家의 歷史’ 國際學術會議 討論 現場에서였다. 南韓과 北韓, 그리고 러시아의 歷史學者와 考古學者가 모여 高句麗와 渤海에 對한 各國의 硏究 成果를 發表하고 討論을 펼치는 자리였다. 東北工程을 包含한 中國의 歷史歪曲이 1981年 本格化한 多民族統一國家論의 影響 아래 緻密하게 展開된 霸權論理의 産物이라는 서길수 서경대 敎授의 發表에 對한 支持였다. 中國의 至毒한 誇大妄想症에 對한 批判이기도 했다.

    “歷史가 歪曲한다고 歪曲되나”

    學術會議 末尾 討論에서 가장 年長者가 이렇듯 積極的 發言을 쏟아내자 中國의 歷史歪曲에 對한 聲討 雰圍氣가 달아올랐다. 서길수 敎授는 “예부터 中國은 ‘天下=世界’가 아니라 ‘天下=中國’이었다”며 다른 民族의 歷史를 잡아먹으면서 이를 自身들의 歷史로 둔갑시켜온 中國人들의 行態를 批判했다.

    그러나 이날 討論의 三角 軸 가운데 하나인 北韓 學者들은 沈默을 지켰다. 그들은 高句麗와 渤海가 中國의 地方政權이니 屬國이니 하는 主張에 對해 反駁하면서도 中國을 直接 擧名해 批判하거나 ‘東北工程’이란 單語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記者가 “서길수 敎授의 發表에 對해 러시아 側의 意見은 들었는데 北韓 側 意見도 듣고 싶다”고 質問을 던졌다. 잠깐 沈默이 흐르다가 7名의 北韓學者 中 最年長者인 김유철(66) 김일성綜合臺 歷史學部 敎授가 벌떡 일어났다. 溫和한 微笑를 짓고 있던 老學者의 얼굴이 붉게 上氣됐다.

    “歷史는 歪曲한다고 歪曲되는 것이 아닙니다. 歷史의 眞實은 變하지 않으며 반드시 客觀的으로 밝혀지게 돼 있습니다.”

    含蓄的 意味가 담긴 두 마디였다. 北韓의 오랜 血盟이자 主要 에너지源 供給處인 中國에 對해 直接的 批判을 加할 수 없지만 學者的 良心을 外面할 수 없다는 苦悶의 一端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便으론 學問의 自由조차 政治에 從屬된 北韓의 서글픈 現實을 斟酌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러시아 極東國立大 韓國學大學 設立 12周年을 記念해 그 設立基金을 支援한 韓國의 考慮學術文化財團과 러시아 極東國立大가 共同 主催한 이番 學術大會에선 모두 15篇의 論文이 發表됐다. 考慮學術文化財團의 장치혁 會長이 이끈 南韓 代表團에선 서울대의 노태돈·宋基昊 敎授와 高句麗硏究會 理事長인 서길수 서경대 敎授, 沿海州 渤海遺跡 發掘專門家人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敎授가 發表를 맡았다. 北韓에서는 政治건 김일성綜合臺 歷史學部長이 이끈 7名의 김일성綜合臺 敎授 中 김유철, 남일龍, 전동철, 리광희 敎授가 發表에 나섰다. 러시아에서는 브로디얀스키 極東國立大 敎授와 에右게니아 겔만 러시아科學아카데미 極東支部 硏究員 等 7名이 發表했다.

    김유철 敎授는 ‘北緯(北魏)와의 關係에서 본 高句麗의 높은 對外的 地位’ 發表文에서 435~534年까지 高句麗와 中國 北方의 敗者였던 북위의 外交關係가 徹底히 高句麗 主導로 이뤄졌음을 糾明했다.

    東北亞의 霸者(覇者) 高句麗

    高句麗는 386年 建國된 北緯와 半世紀 가까이 交流가 없다가 435年 6月 먼저 使臣을 北魏에 派遣해 兩國 關係의 架橋를 놓기 始作한 以後 100餘 年間 主導權을 놓지 않았다. 金 敎授는 그 根據로 △북위의 라이벌이던 北燕(北燕)李 滅亡하자 북위의 抗議에도 不拘하고 數萬 大軍을 動員해 北燕王 風興의 高句麗 亡命을 貫徹시킨 點 △高句麗 長壽王과 문자명왕이 死亡했을 때 北緯 皇帝들이 喪服차림으로 直接 哀悼式을 擧行한 點(다른 나라 王의 死亡에 對해 이 같은 措置를 取한 것은 高句麗에 對해서가 唯一) △反面 高句麗는, 北魏는 勿論 中國의 어느 나라 王에 對해서도 喪服차림으로 哀悼式을 擧行한 前例가 없었다는 點 △510年에는 淸州(山東省 狂효현)에 高句麗 建國始祖를 祭祀지내는 ‘考慮墓’라는 祠堂을 세운 點 △高句麗에 對해서 한 番도 武力行使를 못한 點 等을 꼽았다.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南北韓, 러시아 歷史學者들은 “中國이 高句麗와 渤海를 自國 歷史로 編入하려는 것은 自己矛盾”이라고 입을 모았다.

    金 敎授는 “高句麗는 封建 中國 王朝들에 얽매인 存在가 아니라 그와 堂堂히 맞서 東邦의 政局을 움직인 東아시아의 强大國이었다”며 “이런 高句麗를 두고 屬國이니 地方政權이니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김일성대 歷史學部의 考古學 講座長(學科長)으로 高句麗城 專門家인 남일龍(60) 敎授는 只今까지 北韓에서 이뤄진 高句麗城 發掘 成果를 綜合 整理한 論文을 發表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進行한 高句麗城郭 遺跡發掘과 硏究 成果’였다.

    南 敎授는 平壤 一帶에 集中된 大城山城과 안학궁城, 청암동土星, 청호동土星, 고방산性과 黃海道 황주성, 鵂鶹山城, 太白山城, 長壽山城 等의 發掘을 土臺로 高句麗城의 築造 時期, 該當 郡縣의 이름, 高句麗城의 特徵을 紹介했다.

    特히 高句麗城의 特徵으로 △돌로 쌓은 山城 △치(雉·城壁 밖으로 突出해 敵軍에게 側面攻擊을 加할 수 있도록 한 構造物)와 甕城(甕城·城門 周邊을 ㄷ字 形態로 構築해 敵軍에게 包圍攻擊을 加할 수 있는 構造物) 等 獨特한 性 築造方法의 創造 △平時龍 平地 王宮成果 展示用 防衛酸性의 二重 道聖諦 導入 △여러 性을 連結한 防禦體制로서 전연성(前緣城), 種心性(縱深城), 衛星(衛城), 海岸性(海岸城) 防禦體制의 構築 等을 꼽았다.

    그는 “高句麗에 쳐들어온 한·數·唐나라를 비롯한 外來 侵略者들은 튼튼한 城 防禦體系와 이를 土臺로 용감히 싸운 高句麗 사람들에게 慘敗를 면치 못했다”며 高句麗를 中國史의 一部로 보려는 視角에 맞섰다.

    亦是 高句麗城 專門家로 南 敎授와의 첫 만남을 뛸 듯이 기뻐한 서길수 서경대 敎授는 ‘中國의 高句麗 侵奪과 東北工程’ 發表文을 통해 ‘高句麗史=中國史’라는 中國 側 論理를 條目條目 批判하는 것으로 和答했다.

    徐 敎授는 먼저 中國의 論理를 △高句麗는 中國 땅에 세워졌다(영토) △高句麗는 獨立國家가 아니고 中國의 地方政權이었다(주권) △高句麗가 亡한 뒤 高句麗人은 모두 中國 땅으로 들어갔다(인구)는 3가지 範疇로 묶을 수 있다고 指摘했다.

    그는 이에 對해 “高句麗가 存續한 705年間 中國에선 35個國이 明滅했는데, 그렇다면 高句麗가 그 수많은 나라 中 都大體 어느 나라의 屬國이란 말인가”라는 質問을 筆頭로 反論을 提起했다. △中國人 스스로 高句麗를 해동三國으로 부른 點 △中國의 어떤 情事(正史)에도 없는 高句麗本紀가 韓國의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있는 點 △광개토太王碑文에 中國의 天子와 같은 뜻의 ‘天帝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밝힌 點 △獨自的 年號를 쓴 點 △天子만의 特權인 하늘에 對한 祭祀를 지낸 點 等이었다.

    强力한 主權國家 渤海

    宋基昊 서울大 敎授는 ‘渤海의 高句麗 繼承性’이란 論文에서 △渤海 武王이 日本에 보낸 國書에서 ‘高句麗의 옛 터전을 收復하고 扶餘의 風俗을 所有하게 됐다’고 밝힌 點 △日本의 歷史서 ‘속일본기’에 ‘渤海는 옛 高句麗’라고 밝힌 記錄 外에 高句麗를 繼承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記錄을 公開했다.

    渤海 滅亡 後 渤海 流民이 세운 定安國이 981年 宋나라에 보낸 國書에서 “高句麗 옛 땅에서 살던 渤海 流民”이라고 밝힌 點과 宋나라가 그 答書에서 “定安國은 本來 馬韓(高句麗의 別稱) 種族”이라고 밝힌 點이다. 宋 敎授는 이를 통해 渤海의 高句麗繼承性이 建國 時期부터 滅亡 以後까지 繼續됐음을 確認할 수 있다고 强調했다.

    또한 宋 敎授는 渤海의 文物制度에서 唐나라 文化는 後代에 影響을 준 것이고 말갈 文化는 基層民의 文化인 反面 瓦當 文樣, 佛像 樣式, 溫突 等의 高句麗 文化要素는 初期에서 後期까지 主導權을 잃지 않았다는 點에서 渤海는 高句麗 傳統文化의 基盤 위에 세워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主張했다.

    北韓의 전동철(45) 敎授도 ‘渤海는 强力한 主權國家’라는 發表文에서 渤海를 中國의 屬國으로 보는 中國 側 見解를 迂廻的으로 批判했다. “大陸의 盟主로 自處하던 强大한 唐나라와 맞서 勝利한 矜持와 自負心, 堂堂한 姿勢에서 國家 創建을 宣布한 渤海 建國의 基本勢力인 高句麗 遺民들은 처음부터 獨自的인 强大國 建設을 志向했으며 짧은 期間 內에 强力한 主權國家를 일떠세웠다”는 主張이 代表的이다. △발해국王들이 ‘하늘의 子孫(天孫)’意識을 表明했고 △獨自的 年號를 使用했으며 △‘皇上’을 稱했고 △황제국의 官職制度人 ‘3社(太社, 太傅, 太保) 3共(太尉, 사도, 沙工)’ 度를 運營했고 △726年 唐나라와 提携한 黑手靺鞨을 懲罰하고 732年 張文休의 黨의 등주를 攻擊한 點을 그 根據로 提示했다.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極東 國立大學校 韓國學大學 學生들이 韓國學大學 設立 12周年 記念公演을 하고 있다.

    이들 論文처럼 直接的이진 않지만 渤海와 韓半島의 連繫性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論文도 發表됐다. 中國을 비롯한 다른 漢字文化圈에는 없고 韓國에만 있는 姓氏인 朴氏에 對한 歷史的 記錄을 土臺로 渤海와 新羅의 活潑한 交流 可能性을 打診한 노태돈 서울大 敎授의 ‘高麗로 넘어온 渤海 朴氏에 對하여’라는 發表文이 그것.

    盧 敎授는 朴赫居世에서 비롯한 新羅 眞骨 貴族의 姓氏로만 登場하던 朴氏가 ‘高麗史’ 中 渤海 流民의 이름에서 發見된다는 點을 指摘했다. 高麗 太祖 8年과 21年 各各 1000號와 3000號를 이끌고 高麗로 건너왔다는 渤海 流民 박어(朴漁)와 縛繩(朴承)이다.

    盧 敎授는 高麗로 넘어온 渤海의 高官 貴族의 境遇 王이 性을 내려줬을 때는 어김없이 關聯 記錄이 남아 있다는 點에서 이들의 性이 처음부터 朴氏였을 可能性이 크다고 指摘했다. 盧 敎授는 渤海人뿐 아니라 高麗人 中에서도 高麗王이 朴氏 姓을 하사했다는 記錄은 發見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新羅에서만 發見되던 朴氏가 渤海까지 넘어간 것은 그동안 渤海와 新羅가 黨의 以夷制夷(以夷制夷) 戰略에 말려 敵對的 關係로 지냈다는 旣存 通念과 달리 相當한 交流가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盧 敎授는 이 境遇 新羅의 천정군(只今의 咸南 덕원군)에서 渤海 柵城府(只今의 中國 지린省 훈춘시) 사이에 39個의 驛을 뒀다는 新羅道(新羅道)를 통해 新羅人이 渤海로 건너갔을 可能性과 733年 新羅와 黨이 聯合해 渤海와 戰爭을 벌였을 때 捕虜가 된 朴氏 誠意 貴族이 渤海 上層部로 編入됐을 可能性을 提起했다.

    러시아의 3代 渤海 遺跡

    이番 學會에선 沿海州의 3代 渤海 遺跡地로서 크라스키노 性, 體르나치노 古墳群(群), 고르바트카 性에 對한 發掘 成果도 集約됐다. 크라스키노 成果 體르나치노 古墳群은 블라디보스토크 위에 位置하고 고르바트카 姓은 블라디보스토크 南西쪽 豆滿江에 隣接해 있다.

    渤海時代 古墳群으로는 沿海州에서 처음 發掘된 體르나치노 古墳群을 共同 發掘한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敎授와 有利 니키틴 러시아科學아카데미 硏究院은 이 무덤 떼에서 只今까지 170餘 基의 무덤을 發掘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點은 다양한 무덤 樣式과 分布. 北쪽엔 全體 무덤의 68%를 차지하는 靺鞨系 널무덤(土壙墓·흙구덩이를 파고 直接 遺骸를 安置하거나 나무棺에 넣어 埋葬한 무덤)李 集中 分布했고, 南쪽에선 高句麗系 돌房무덤(石室墓·官을 安置하는 돌房을 設置한 무덤)이 나왔다. 그 가운데에는 돌을 屍身 아래에 깐 돌깐무덤(部석墓)李 分布했고 돌房무덤 사이사이에서 屍身 周邊에 돌을 둘러싼 돌돌림무덤(位석墓)李 發掘됐다.

    정석배 敎授는 “渤海 百姓 中 貴族階層人 高句麗系와 平民層人 靺鞨系가 한데 어울려 살았지만 거기에 뚜렷한 位階秩序가 存在했음을 보여주는 遺跡”이라고 說明했다. 무덤의 머리方向이 大部分 北西쪽을 向한 點도 特記할 點이다.

    고르바트카 性을 發掘한 에右게니아 겔만 러시아科學아카데미 硏究員은 2150m 길이의 이 城이 沿海州 地域 渤海의 最高 地方 所在地였을 可能性이 크다고 主張했다. 防禦用 外에 洪水를 막기 위해 建設됐으며, 그 內部에서 溫突을 갖춘 住居施設은 勿論 12種의 栽培植物과 29種의 軟體動物 殘骸, 그리고 生活에 必要한 各種 鑛物質이 大擧 發掘됐다는 點에서다.

    1980年 처음 發見된 以後 沿海州에서 가장 많은 發掘調査가 이뤄진 크라스키노 性에 對해선 알렉산더 이블리에프 러시아 科學아카데미 硏究院이 發表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14基의 가마와 종루, 法鼓, 樓閣을 包含한 절터가 나왔으며 渤海 동경성(現在의 中國 훈춘)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點에서 相當 規模의 都市였을 것으로 推定된다고 說明했다. 그는 最近 몽골 考古學者들과 共同 發掘한 몽골 東쪽 친톨고이 발가스 城터에서 遼나라 時代 遺物과 함께 渤海時代 기와와 土器, 溫突 等이 發掘됐다며 이 遺跡이 遼나라가 渤海를 멸망시킨 뒤 그 流民 700餘 號를 西쪽으로 强制 이주시켰다는 정주성日 可能性을 提起했다.

    北韓 學者의 發表 中에 가장 새로운 情報를 담고 있는 것은 考古學者인 리광희(43) 敎授의 ‘새로 發掘된 高麗王宮-大花宮터에 對하여’다. 김일성綜合臺는 지난해 創立 60周年을 맞아 12世紀 初 高麗의 平壤 遷都 推進計劃에 따라 建立된 평양시 용성區域 용추1洞의 大花宮(大華宮)터에 對한 發掘調査를 펼쳤다.

    高麗의 高句麗 繼承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中國 산시省 윈청視 關帝廟(關羽의 墓)에 걸려 있는 中國 三國時代의 全國地圖. 韓半島 地域을 뺀 高句麗의 領土가 그려져 있어 高句麗(오른쪽 위)를 中國의 一部로 여기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리 敎授는 “大花宮은 海拔 160m의 나지막한 山봉우리를 鎭山으로 삼고 거기에서 左右로 뻗어 나간 2個의 稜線과 그 사이의 짧은 稜線으로 이뤄진 ‘明堂’에 자리 잡았다”며 “大花宮이라는 이름도 當時 風水說에 따르면 크게 蕃盛할 地勢라는 對話地勢(大華之勢)에서 따온 것”이라고 說明했다.

    大花宮은 앞에 位置한 第1宮殿 區域과 뒤쪽으로 300m假量 들어간 區域에 位置한 第2宮殿 區域으로 나뉜다. 이들 宮殿은 稜線을 따라 總길이 2.5km의 城壁으로 둘러싸였을 것으로 推定되는데 現在 西쪽에 1個, 北쪽에 2個의 城門이 發掘됐다.

    리 敎授는 “大花宮은 高句麗의 안학궁과 마찬가지로 基本 建物을 配置하고 그 兩옆에 나래 채를 곁붙이는 建築方式으로 지어졌으며, 이는 渤海의 上京용천부부터 高麗의 滿月臺에서도 나타난다는 點에서 渤海와 高麗가 高句麗를 繼承했음을 알리는 物質的 證據”라고 했다.

    “高麗 政府의 平壤 遷都 試圖는 하루 이틀 사이에 計劃되고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高麗 太祖 王建 以來로 高句麗를 繼承한 强力한 나라를 세우려는 意志에서 出發해 擧行된 平壤 重視 政策의 延長이며 高句麗의 옛 首都에 首都를 옮김으로써 繼承關係를 더욱 뚜렷이 하고 그에 따라 高句麗와 같은 强大國을 일떠세우려는 高麗 사람들의 一貫된 志向의 産物인 것이다.”

    그러나 리 敎授는 “回廊이 建物 앞面에 配置된 것은 이 時期에 새롭게 보이는 獨特한 建築形式이라는 點”이라면서 “이런 建築形式의 出現 時期는 大花宮이 지어진 12世紀 初 以前으로 봐야 할 것 같다”고 指摘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事實은 大花宮이 不過 몇 個月 사이에 急速하게 지어진 것처럼 그 破壞 또한 人工的으로 徹底히 破壞됐다는 點. 리 敎授는 “이番 發掘에서 高級 自己나 貴金屬 細工品 關聯 遺物이 全혀 發見되지 않았고 特定 建物터에 기와를 集團 埋沒했으며 發掘된 기와와 雜商이 單 1點도 성한 것이 없는 것으로 봐서 妙淸의 난 直後 組織的으로 破壞됐을 可能性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서길수 敎授는 ‘中國의 高句麗 侵奪과 東北工程’ 發表文에서 中國의 東北工程에 對해 本格的으로 批判했다. 이 部分에 對해선 北韓 學者들뿐 아니라 러시아 學者들도 큰 關心을 보였다. 北韓 學者들은 公式席上에선 말을 아꼈지만 學術大會 中間 休息時間이나 學術大會가 끝난 뒤 晩餐場에서 國內 學者들에게 이에 對한 詳細한 內容과 關聯 資料를 要請하며 큰 關心을 表明했다.

    東北工程의 虛構

    徐 敎授는 1981年 탄지샹(潭其·#53284;) 當時 상하이 푸단대 敎授가 ‘統一的 多民族國家論’을 提起한 以後 中國의 一連의 歷史歪曲이 그 延長線上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詳細히 紹介했다. 統一的 多民族國家論이란 淸나라 때 確定된 領土에 存在한 모든 民族의 歷史는 곧 中國의 歷史라는 主張을 말한다.

    이 理論은 “오늘날 中華人民共和國의 範圍를 바탕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이 土地에 살던 選民들을 硏究해야 한다”는 바이서우이(白壽彛)의 主張을 발전시킨 것으로 1980年代 以前까지는 注目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徐 敎授의 說明이다.

    그런데 이 理論이 國家 次元의 注目을 받게 된 것은 1979年 改革開放에 들어가면서 中國 政府가 한족을 除外한 55個 少數民族에 關心을 돌리면서부터였다. 이들 少數民族은 全體 人口의 8.41%밖에 안 되지만 그 數가 1億을 넘는데다, 그들이 차지한 땅이 中國 國土의 60%를 차지한다. 따라서 改革開放으로 느슨해진 雰圍氣를 타고 이들 少數民族이 分裂의 움직임을 보일 境遇 中國의 統合이 危機에 處할 수 있다는 危機意識이 作用한 것이다.

    中國은 이를 막기 위해 于先 그 實踐機構로서 중국사회과학원 傘下 邊疆사지연구중심을 1983年 設立한다. 이 機構는 中國과 陸地로 國境을 接한 14個國과 日本, 臺灣, 필리핀 等 隣近 海域國家와 國境 問題를 專門的으로 다룬다는 名分 아래 關聯 少數民族의 歷史를 中國 歷史로 바꿔치는 作業을 펼친다. 2002~2007年까지 이뤄진 東北工程度 그 一環이었다.

    2002~2005年 韓國古代史 關聯 東北工程 論文이 高句麗 關聯 5篇, 渤海 關聯 6篇 等 12篇이지만, ‘北方文物’ ‘博物館硏究’ ‘東北사지’ 等 中國 東北 3代 學術誌에 發表된 論文은 高句麗 關聯 150篇, 渤海 關聯 50篇 等 219篇에 이른다는 點은 東北工程이 一廻的이거나 地方政府 次元의 것이 아니라 中國 政府 次元의 組織的 움직임임을 뒷받침한다.

    장치혁 考慮學術文化財團 會長

    “中國도 首肯할 수 있는 歷史 硏究의 張 만들 것”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제학술대회
    이番 國際學術大會의 産婆는 장치혁(張致赫·75) 考慮學術文化財團 會長이다. 張 會長은 韓國과 러시아 民間友好 外交의 산證人이다. 그는 러시아 極東國立大에 地上 5層, 地下 1層짜리 建物을 建立, 寄贈함으로써 1995年 10月2日 最初로 海外에 正規 5年制 韓國語學科, 韓國歷史學과, 韓國經濟學과 3個 學科로 이뤄진 韓國學大學이 設立되는 기틀을 提供했다. 또한 沿海州와 아무르주에 2億8000萬坪의 農場 造成事業 推進, 沿海州 一帶 渤海 遺跡地 調査 및 保存事業 支援, 1994年 러시아 大洪水 때 30餘萬달러 支援 等의 功勞를 認定받아 1996年 러시아 政府로부터 友好勳章, 블라디보스토크時로부터 名譽市民證, 極東國立大로부터 名譽國際經濟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고합그룹 創業主인 張 會長과 沿海州의 因緣은 그의 父親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張 會長의 父親은 抗日獨立鬪爭을 펼친 言論人이자 歷史學者이며 光復 後 단국대를 設立한 山雲 장도빈(汕耘 張道斌) 先生. 山雲은 ‘大韓每日申報’ 論說委員 및 主筆로 活動하며 抗日 祕密結社 組織인 新民會의 一員으로 活動했고, 1912年 北間島를 거쳐 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亡命해 勸業會(勸業會)의 機關紙 ‘권업新聞’에 抗日 論說을 寄稿하며 獨立運動을 펼쳤다. 山雲은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內陸으로 100km쯤에 位置한 우수리스크의 옛 地名이 雙聖者(雙城子)인 것에 注目해 踏査하다 1913年 크라老야르 城터와 절터를 發掘했다.

    張 會長은 父親과 沿海州의 이런 因緣을 살려 韓國과 러시아 間 學術文化 交流를 活性化하는 데 앞장섰다. 아버지의 遺志를 받들기 위해 1981年 設立한 山雲學術文化財團의 名稱을 1991年 考慮學術文化財團으로 바꿔 그 架橋로 삼은 것도 러시아人에게 좀 더 익숙한 名稱(高麗)을 活用하기 위해서였다. 極東國立大에선 이런 張 會長의 뜻을 기리기 위해 韓國學大學 建物의 名稱을 ‘山雲 장도빈 記念館’으로 定했고 2005年 韓國學大學 內 渤海硏究所를 設立하고 運營하는 데도 積極 協力했다.

    張 會長은 “學問의 領域에선 民族主義를 一切 排擊하고 客觀的, 科學的인 事實만을 통해 眞實을 追求해야 한다”며 “南北과 러시아, 그리고 이番에 參席하지 못한 中國과 日本의 學者들도 모두 이런 精神으로 東北亞 古代史의 實體를 밝히는 硏究에 邁進해주기 바란다”고 希望했다.

    그는 또 이番 學術大會가 各國의 民族主義 性向을 刺戟하거나 政治的으로 利用되는 것을 警戒했다.

    “제 父親 時節에는 인디펜던스(independence·獨立)가 가장 重要했지만 21世紀는 인터디펜던스(interdependence·相互依存)의 時代라는 것이 제 信念입니다. 흔히 21世紀가 國境 없는 時代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沿海州야말로 20世紀的 國家主義를 脫皮해 未來志向的 共存과 繁榮을 꿈꾸는 보더리스(borderless)의 空間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제 꿈입니다.”장 會長은 이番 學術會議가 그런 土臺를 構築하기 위한 前哨作業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說明했다. 霸權主義에 기초한 歷史가 아니라 客觀的 事實에 기초한 共通의 歷史를 土臺로 東北亞人들이 모두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있는 굳건한 土臺를 構築하자는 뜻이라는 것.

    “中國의 東北工程이 問題가 되는 것은 歷史를 共存共榮의 土臺로 삼기보다는 中國의 霸權主義를 維持, 擴大하기 위한 手段으로 삼고 있다는 點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學術會議를 南北韓과 러시아 學者들에게만 局限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올해는 아쉽게 時間이 안 맞아 不拔했지만, 來年에 平壤 또는 서울에서 열릴 學術大會에는 中國과 日本 學者들도 참가시켜 모두가 首肯할 수 있는 客觀的 歷史 硏究의 場을 만들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單大公正(連帶가 不確實한 下-商-注意 歷史年表 만들기)-탐원공정(전설시대인 三皇五帝 時代의 歷史畫)-遼河文明論(中國 文明의 最初 起源을 黃河文明에서 遼河文明論으로 바꿔치기)으로 이어지는 一連의 ‘歷史 만들기’의 背後에 淸나라 때 最大 版圖를 自國의 歷史로 삼으려는 霸權主義가 作動하고 있다는 것이다.

    徐 敎授는 이 過程에서 끊임없이 理論的 矛盾이 發生하고 있다고 指摘했다. 當初 中國은 仰韶文化-龍山文化로 이어지는 黃河文明이 世界에서 가장 오래된 文明이라 자랑해왔다. 그러나 그들이 동이족의 根據地로 分類했던 滿洲 地域에서 그보다 時代的으로 앞선 興隆와문화-홍산문화로 대표되는 遼河文明이 登場하자 이를 中國 文明으로 훔쳐가기 始作했다.

    “歷史에서 强者보다 센 것은 眞實”

    그 渦中에 쑤빙치(蘇秉琦)로 대표되는 一群의 學者들이 Y字 文明論을 펼쳤다. 산서(山西)省 北東部에서 河北(河北)城으로 흐르는 相姦下(桑干河)를 境界로 北쪽 네이멍구(蒙古)自治區 大淸(大靑)山 一帶의 北方草原文化(匈奴文化)와 東쪽 대릉하(大凌河) 一帶의 홍산文化, 그리고 그 南쪽 黃河文明의 仰韶文化가 Y字 꼴로 만나 中華文明을 이룬다는 理論이다. 이에 따르며 中華文明은 北方草原文化, 홍산文化, 仰韶文化를 3大 要素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 3大 要素가 遼河文明論으로 건너가면 염제 神農氏 集團의 중원文化(仰韶文化), 皇帝 集團의 홍산文化, 禹(虞)集團의 東南沿海文化(揚子江文明의 大門舊文化)로 탈바꿈한다. 中國 古代神話에 歷史를 끼워 맞추려다 보니 벌어지는 相互矛盾이다.

    10月2日은 마침 盧武鉉 大統領이 陸路로 軍事分界線을 넘어 平壤의 김정일 國防委員長을 만나러 간 날이었다. 南北韓 學者들은 모두 “오늘같이 뜻 깊은 날 南北의 歷史學者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얼마나 좋으냐”며 德談을 나눴다.

    이날 學術大會에는 午前엔 南韓의 전대완 블라디보스토크 駐在 總領事가 參席했고 午後엔 北韓의 심국龍 나홋카 駐在 總領事가 參席했다. 軍港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는 1992年까지 一般에 開放되지 않았다. 그래서 北韓의 總領事館은 渤海 때부터 日本과 배便이 오가던 港口가 있던 나홋카에 設置된 反面 韓國 總領事館은 1992年 10月에 생겨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를 잡게 됐다고 한다.

    學術會議가 끝날 무렵에 찾아온 北韓의 審 總領事는 晩餐席上에서 “歷史에선 强者가 센 것이 아니라 眞實이 세다. 南北頂上會談을 하는 瞬間 歷史를 論議하고 討論하는 것은 重要한 意義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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