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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詩人 정호승|新東亞

人間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詩人 정호승

“외로움은 相對的이지만, 孤獨은 絶對的이죠”

  • 원재훈 是認 whonjh@empal.com

    入力 2007-11-08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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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른 새벽. 때론 看病으로 밤을 새우고 나와 便宜店에서 生水를 사는 女人의 모습으로, 牛乳 配達을 위해 自轉車를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가끔은 淸掃夫의 모습으로 정호승 詩人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詩人의 모습을 無心코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서 詩人은 祈禱한다.
    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初가을 즈음에 새벽祈禱를 다닌 적이 있다. 새벽잠을 꿀처럼 빨아먹고 살던 내가,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 새벽길을 나서면 무척 疲困했다. 하루 서너 時間밖에 잠을 자지 못한 한 달이었다. 하지만 그런 몸을 이끌고 禮拜堂에 가고, 거기에서 祈禱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平穩해지고 가끔은 휘몰아치는 感情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佛家의 修道僧이 夏安居나 冬安居에 들면서 自身을 바라보는 時間이나, 日常에 지친 凡夫가 새벽祈禱를 하는 時空間은 日常의 담牆을 暫時 헐어내는 時間이다.

    1時間 程度의 祈禱를 마치고 새벽담배를 피운다. 敎會에서 내려와 漸漸 밝아오는 太陽을 보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벽의 ‘본 모습’을 본다. 새벽은 내가 깨어야 할 나의 ‘자아’이며, 他人에 對한 ‘사랑’이고, 懇切한 ‘기도’다. 그렇게 새벽은 깨어 있는 者들의 몫이다. 이제 아침이 오면 저 고요한 거리는 人波로 북적댈 것이다.

    나는 새벽祈禱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침을 오게 하는 빛을 보았다. 그것은 豫感이었고, 祝福의 햇살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다른 空間에 살면서도 같은 時間을 품고 있으며, 그 時間의 境界線이 무너지는 곳에 가끔 가을날 감나무처럼 詩가 서 있기도 하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瞬間은 刹那다. 그 刹那에 정호승(鄭浩承·57) 詩人은 서 있다.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關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四散한 그 女人에 對하여 祈禱하고

    불빛 없는 窓門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靑年의 愛人을 위하여 祈禱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市 ‘슬픔을 위하여’ 中에서

    時人은 때론 看病으로 밤을 새우고 나와 便宜店에서 生水를 사는 女人의 모습으로, 牛乳 配達을 하기 위해 自轉車를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가끔은 淸掃夫의 모습으로 새벽에 나타난다. 그를 본 적이 있는가? 讀者는 어쩌면 그런 詩人의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정호승 詩人은 祈禱한다.

    祈禱하는 詩人 정호승. 土曜日 午後에 긴 이야기 자리를 벗어나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정호승 詩人을 ‘祈禱하는 人間’으로 보았다. ‘道具를 使用하는 人間’이 나타났을 무렵엔, 分明 祈禱하는 人間들도 같은 땅 위에서 살았을 것이다. 네안데르탈人이거나 或은 우리가 分類해낼 수 없는 原始 人類로서 나는 ‘祈禱하는 人間’李 저 原始의 空間을 數萬年 支配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氷河期에 매머드나 주라기의 恐龍과 같은 存在로서의 人類는 ‘祈禱하는 人間’인 巨人이 支配했을 것이다. 先生의 端正하고 자그마한 體軀, 그 몸 안에는 巨人이 살고 있다. 큰 키에 대단한 몸을 가진 마음의 巨人이 世上事의 자잘한 모습을 읽고 안타까워한다.

    “先生님은 抒情詩人입니까?”

    뜬금없이 抒情詩 이야기를 꺼냈다. 先生은 허허 웃으면서 抒情이란 詩의 本質 中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 ‘나의 抒情은 人間을 이야기하는 抒情’이라고 敷衍 說明해주었다.

    “꽃 하나를 보아도, 그 自然물 속에서 제가 보는 건 人間이지요. 저에게 다가오는 모든 象徵이나 꽃과 별과 같은 自然物은 모두 人間을 理解하기 위한 媒介物입니다. 詩는 人間을 理解하기 위해 存在하고, 나를 包含한 모든 人間을 理解하는 過程입니다.”

    詩란 人間을 理解하는 過程

    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雌雄同體의 生命처럼, 詩는 人間을 理解하는 길인 同時에 目的地이다. 그런데 先生은 人間의 삶을 悲劇으로 點綴된 過程으로 본다. 釋迦牟尼의 6年 苦行, 예수의 골고다 언덕이 바로 人間의 바다이고 人間의 길이다.

    “기쁨은 暫時 피었다 지는 봄날의 꽃 같은 거고, 삶은 우리들이 밥 먹는 것처럼 아주 具體的인 悲劇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人間의 삶을 詩로 적어놓은 거지요. 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인가. 先生이 直接 뽑은 先生의 詩選集 題目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副題가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이다. 先生은 人間의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간 그늘의 詩人이다. 우리가 共感하는 것은 그 그늘이 바로 나의 그늘이고, 어쩌면 앞으로 나의 그늘이 될 수도 있다는 豫感과 더불어, 그 그늘을 떼어버리고는 살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先生의 슬픔은 自身의 기쁨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所重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橘 몇 個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橘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는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平等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市 ‘슬픔이 기쁨에게’ 中에서

    새벽祈禱를 하면서 나는 祈禱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大部分 울고 있었다. 불 꺼진 敎會堂은 사랑보다 所重한 슬픔의 空間이다. 나는 祈禱를 하지 못하고 그들의 슬픔만을 보고 슬펐다. 새벽에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깨어 있는 者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쩌면 밤새워 슬픔의 길을 걸어온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꽃밭

    日常에 지쳐 來日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달콤한 꿈의 기쁨에서 깨어난 나에게 새벽은 언제나 祈禱하면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時間이었다. 그들은 오늘이 바로 어제의 슬픔이 드러나는 날이라는 걸 알려주었지만, 그건 기쁨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기쁨은 슬픔의 길을 걸어가다 暫時 드러나는 물거품 같은 것이다.

    先生은 그 물거품을 그냥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론 꽃으로 피어나고, 盲人夫婦가 求乞하기 위해 어설픈 演奏를 하는 길거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만이 先生의 詩가 아니다. 거기에 배어 있는 아름다운 것들, 先生은 그걸 그대로 쓰고 우리에게 읽어주는 것이다. 詩를 읽어주는 先生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그 떨림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기뻐한다. 逆說的으로 先生을 읽는 瞬間 나는 기쁘다. 나도 모르게 나의 가슴에 웅크리고 있는 傷處 입은 짐승을 달래주는 先生의 詩는 따뜻한 손길이다.

    初期 詩集인 ‘슬픔이 기쁨에게’에 담긴 슬픔과 눈물의 詩篇, 그 시원은 어디인가. 當然히 모든 詩人이 그러하듯 先生의 幼年時節을 알아야 한다. 先生에게 幼年時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마치 짧은 詩를 쓰듯이 몇 場面을 이야기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暫時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짧게 눈을 감기도 했다. 이제 六旬에 가까운 先生은 아주 먼 옛날의 일들을 鮮明하게 펼쳐 보여주었다.

    “제가 살던 시골집 마당에 꾸며진 꽃밭이 떠오릅니다. 어머닌 거기에 꽃을 많이 심었지요. 菜松花, 百日紅, 水菊 같은 꽃들, 그리고 감나무 같은 有實樹들이 있던 空間입니다. 거기에 꽃을 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 꽃밭이 내 幼年의 記憶에 남아 있고.”

    꽃을 심는 어머니의 모습은 슬픔을 심고 있는 詩人의 모습과 다름없다. 先生의 슬픔은 單純한 슬픔이 아니라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라면 詭辯이거나 過言일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先生의 그 어린 空間에 어머니가 심어놓은 것은 菜松花나 水菊 같은 꽃이라기보다, 나중에 先生이 그 꽃의 이름을 詩로서 呼名하는 그런 이름 모를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世上의 모든 어머니는 自身의 마당에 꽃을 심는 存在다. 그 아이의 눈에만 보이는 그런 숨겨진 意味가 아이의 마음에 자란다.

    “그리고 눈사람이 떠오르네요. 제가 살던 大邱는 盆地이기 때문에 저 어릴 땐 눈이 무척 많이 내렸지요. 그래서 아이들과 눈사람을 많이 만들었는데, 只今처럼 따뜻한 掌匣이 드물던 時節이라 고무신에 손을 넣어 눈을 굴리고 밀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찍은 黑白寫眞이 한 張 있는데, 四寸누나, 兄들과 함께 엄청 크게 눈사람을 만들고 그 곁에서 찍은 寫眞입니다. 아주 印象的인 場面이었어요.”

    缺乏의 瞬間

    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이 幼年의 두 場面은 매우 幸福하다. 어머니의 꽃밭, 四寸 兄弟들과 만든 巨人 눈사람과의 追憶. 슬픔의 씨앗이 떨어지지 않은 幸福한 幼年時節은 銀行員이던 아버지가 事業을 始作하면서 눈사람처럼 녹아내렸다. 아직 人生의 봄꽃이 피어 있던 中學校 2學年 즈음, 아버지가 事業을 하면서 꽃은 지고 만다. 믿었던 사람에게 속고, 詐欺를 當하는 이야기들. 미루어 斟酌할 수 있는 아버지의 不幸은 곧 家庭의 不幸으로 밀려온다. 그러한 不幸 속에서 先生은 꽃밭에 꽃을 심던 가냘픈 어머니가 漸漸 剛해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沒落으로 어머니가 日數 돈을 쓰신 것 같아요. 日數 돈 알아요? 목돈을 빌리고 每日每日 利子를 붙여서 갚아 나가는 거지요. 요즘에도 장사하는 사람들은 每日 現金이 생기니까 그걸 쓰기도 하지만, 그땐 家庭집에서 그런 돈을 빌려 쓰곤 했지요. 日數 돈을 받으러 오는 日收쟁이에게 시달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只今도 떠올라요. 어머닌 마치 罪人처럼 그 日收쟁이 할아버지가 오기만 하면 고개를 숙이면서….”

    아무리 歲月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記憶이 있다. 어떤 場面은 黑白寫眞처럼 남아 있고, 어떤 場面은 動映像으로 남아 있다. 先生을 幸福하게 한 눈사람은 寫眞으로 남아 있고, 어머니의 고단함은 動映像으로 남아 아직도 先生의 가슴에서 움직이고 있는 模樣이다.

    或是나 이 ‘作家 列傳’을 繼續 읽은 讀者는 이미 다음 文章을 斟酌할지도 모르겠다. 敷衍하면 내가 만난 作家나 藝術家들은 모두 缺乏의 瞬間을 共有하고 있다. 苦痛은 마치 놀이터의 시소처럼 作家의 맞은便에 앉아 있다. 그 作家가 成長해서 몸무게가 늘고, 名譽나 富가 蓄積되어도 그 苦痛과 缺乏은 같은 무게로 늘어난다. 그래서 그 시소가 움직이는 것이다. 정호승 先生 亦是 例外는 아니었다.

    先生 또한 靑少年期를 至毒한 가난 속에서 보낸 것 같다. 그것은 이렇게 문득 찾아온 것일까. 先生에게는 어린 時節에 갑자기 當한 暴力의 記憶이 있었다.

    “初等學校 高學年 때인 걸로 記憶합니다. 어떤 집 大門 앞을 지나는데 어른이 나오더니 갑자기 내 멱살을 잡고 ‘너 돌 던졌지’ 하면서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선 마구 패는 거야. 아마도 어떤 애들이 그 집에 돌을 던지면서 몇 番을 지나간 模樣인데 내가 공교롭게 그 앞을 지나가다 逢變을 當한 거지요. 아픈 거도 아픈 거지만, 甚한 侮蔑感과 抑鬱한 생각에 눈물이 났지요. 그때 일이 잊히지 않아요.”

    團欒한 家庭에서 幼年을 보낸 先生에게 찾아온 가난은 어느 날, 大門 앞을 지나다 끌려가 마구 暴行을 當한 것처럼 先生의 삶을 ‘霸氣’ 始作한다. 하지만 文學에 눈을 뜨기 始作하면서 찾아온 집안의 가난은 以後 展開되는 先生의 日常, 卽 敬虔하고 模範的이라고 할 수 있는 職場人의 美德을 갖추게 한다.

    “詩人이 詩를 쓴다는 理由로 家族이나 周圍 사람에게 身世를 지면서 사는 時代는 천상병 先生 以後로는 그만 해야 된다는 생각이에요.”

    까까머리에 傳해진 따스한 손길

    마침 先生과 만난 場所가 인사동이었다. 菩提樹라는 茶집에서 茶를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다음에 술자리를 옮기듯이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이 바로 천상병 先生의 夫人이 運營하는 茶집 ‘귀천’이었다. 天生 少年 같은 천상병 先生의 生前 모습을 보면서, 詩人이기 때문에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한 親舊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호승 先生의 詩는 별을 보고 쓴 詩들이다. 卽 晝耕夜讀, 낮에는 職場에서 熱心히 일하고 市는 별빛을 보고 썼다. 그래서인지 先生의 詩는 늘 밝게 빛난다. 그리고 그 별들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빛나고 있다.

    먼 하늘의 별빛을 노래하기에 그의 낮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래서 그는 太陽 아래서 본 사람들의 모습을 그 별빛으로 끌어당겨 原稿紙에 적어놓았던 것이다. 한 사람을 보기 위해 하나의 별을 탄생시키는 詩의 밤은 미루어 斟酌만 해도 눈물이 난다. 苦生해본 놈이 苦生한 사람의 表情을 읽을 수 있는 法이다.

    文學에 눈을 뜬 契機는 아버지였다. 大邱 계성中學校 2學年 때 아버지가 어떤 理由인지는 몰라도 민중서관 판 ‘한국문학전집’을 집안에 들여놓았고, 그 德에 小說을 읽기 始作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少年의 눈에 새로운 世上으로 보였다. 겨울放學 내내 房바닥에 엎드려 冊을 읽었는데, 어머니가 짜준 털옷 팔꿈치가 해져 ‘빵꾸’가 날 地境이 되도록 읽었다고 한다. 한겨울 이불을 쓰고 어두운 불빛 아래 엎드려 읽는 姿勢는 視力을 나쁘게 했고, 以後로 眼鏡을 써야 했다. 그때 朴啓周의 ‘殉愛보’ 같은 作品을 흥미롭게 읽었다고 한다.

    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그 무렵 文學少年들에게 꿈의 紙面이던 ‘學院’誌에 散文 ‘席의 心情’을 投稿해 優秀作으로 뽑혔다. 하지만 文學에 對해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럼 先生은 어떻게 詩를 쓰게 됐을까. 그를 詩人으로 만든 이는 當時 계성中學校 國語擔當 金鎭台 敎師가 아닐까 싶다. 小說家 金鎭台 先生 얘기를 하면서 정호승 先生은 自身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只今도 先生님의 따뜻한 손길이 머리칼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授業時間에 宿題로 쓴 詩가 정호승이 쓴 最初의 시다. 題目은 ‘자갈밭에서’. 大邱에는 자갈이 많다. 한 少年이 守城川邊의 자갈밭을 걸어가면서 한 생각들, 卽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 같은 思春期의 感情的인 생각을 짧게 적은 것이다. 金鎭台 先生은 授業時間에 敎卓에 오르지 않고,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授業을 했다고 한다. 그날도 如前히 아이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다가 정호승 옆에 와선 “네가 쓴 詩를 읽어봐”라고 했다. 少年 정호승은 떨리는 목소리로 詩를 읽었고, 두 눈을 감고 朗誦을 다 들은 先生님은 자리에 앉은 少年의 까까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너는 熱心히 努力하면 좋은 詩人이 될 수도 있겠다.”

    金鎭台 先生의 寡默한 性品으로 보아 이것은 宏壯한 稱讚이었다. 정호승 先生은 ‘좋은 詩人이 될 수 있겠다’는 말보다는 ‘熱心히 努力하면’에 더 意味를 둔다. 그는 이 얘기를 하면서 “詩는 才能으로 쓰는 게 아니라 努力으로 쓰는 것이다. 才能이란 다름 아닌 努力이다”라고 强調해서 말한다. 우리는 神의 恩寵을 받은 大天才 모차르트가 아니라, 努力하고 天才를 嫉妬하는 살리에르와 같은 存在라는 것이다.

    文藝奬學生으로 入學

    이것은 先生의 詩에 매우 重要한 要因이다. 先生의 詩는 그 努力의 痕跡이다. 그 努力으로 삶의 외로움과 괴로움과 그리움을 견디고 써내는 것이다. 누구의 가슴속에나 天下의 絶唱이 숨어 있고, ‘罪와 벌’ 같은 傑作이 숨어 있다. 作家는 그것을 써내기 위해 努力하는 사람이다. 써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過程을 견디지 못하고 自殺해버리는 浪漫主義 詩人들도 不知其數다.

    그때 先生님의 손바닥에서 까까머리로 傳해지던 溫氣가 還甲을 바라보는 只今까지 머리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白日場만 되면 親舊들이 自身의 등을 떠밀어 나가게 되었는데, 처음엔 白日場이 百日 동안 어디에 가서 場보는 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百日 동안이나 어디에 가고 싶지 않아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百日은커녕 校內 숲에 모여서 原稿紙 몇 張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 나간 中學校 白日場에서 받은 題目은 ‘불’이었고, ‘燈불’이라는 詩를 써서 壯元을 한다. 아이들과 先生님의 豫感이 的中한 것이다. 계성중學校는 文藝的인 雰圍氣의 學校였다. 그래서 每달 學生들의 文藝作品을 募集했고, 1等 한 學生에게는 商品을 주었다.

    商品은 學校 賣店에서만 쓸 수 있는 商品券이었다. ‘森立 크림빵’李 10원 하던 時節이었는데, 每달 應募해서 탄 商品券으로 賣店에서 아이들과 빵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가끔은 體育服도 사 입어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됐다.

    時間이 흘러 정호승은 高等學校 3學年 때 ‘學院’誌에 ‘譯(驛)’이라는 詩를 應募해 詩 部門 最優秀賞을 受賞한다. 이 賞을 받으면 高校生 사이에는 旣成 文人 못지않은 待接을 받았다. 散文과 詩를 同時에 쓰다가 時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先生이 다니던 大輪高等學校 文藝班의 影響이다. 大輪高等學校에는 박해수 是認, 이성수 詩人 等이 있어 정호승 詩人의 詩밭에 거름을 줬다.

    정호승 詩人은 경희대에 文藝奬學生으로 入學했다. 詩가 아니라 評論이었다. 詩人이 評論으로 入學하게 된 것은 高3 때이던 1967年 9月 慶熙大 白日場에서 先生이 4等으로 入賞했기 때문이다. 3等까지만 文藝奬學生이 될 수 있었다. 조병화 先生의 심사평을 보니 ‘정호승 軍의 作品은 等數에 넣자니 그렇고, 떨어뜨리자니 아까워 4等을 준다’고 되어 있었다. 高校生 정호승은 조병화 先生이 내 詩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싶어 청계천 헌冊房에서 사 읽은 文藝誌의 評論 스타일을 模倣하며 쓴 ‘高校文藝의 省察’이라는 原稿로 文藝奬學生으로 入學한다. 文藝奬學生에 戀戀한 것은 學費 때문이었다. 奬學金을 못 받으면 大學을 다닐 수 없는 形便이었다. 하지만 文藝奬學生 學費는 1年만 支給됐다. 繼續 學校에 다니기 위해서는 奬學金이 必要했는데, 그 唯一한 方法이 新春文藝로 文壇에 登壇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3年 내내 奬學金으로 學校를 다닐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그때 어려운 집안 事情에도 父母님이 每달 5000원을 보내주셨는데, 2500원이 房값이었어요. 油腐국수가 30원 했는데, 房값 내고 남은 돈으로 每日 油腐국수 세 그릇 사 먹으면 바닥나게 돼 있었죠. 한창때라 밥을 많이 먹고 싶은 나머지 전농동에 있는 勞動者들을 위한 밥집에서 한 달 2500원을 내고 밥을 먹으면서 學校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그 무렵 校庭에서 어떤 女學生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記憶이 납니다.”

    땡錢 한 푼 없는 苦學生 정호승. 하지만 文藝奬學生이라선지 그의 남루한 옷차림도 女學生의 눈에는 浪漫的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女學生을 先生은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車費가 없어 집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떡하긴 어떡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갔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筆者는 40代 中盤, 先生은 50代 後半(12年 差異의 소띠 띠동갑이다). ‘우리 기쁜 젊은 날’엔 그렇게 못 들은 척하면서 지나간 일들이 많았다. 先生이 大學을 繼續 다니려면 新春文藝에 當選하는 길밖에 없어 學校 圖書館에서 新春文藝 準備를 考試 工夫하듯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해 조선일보에 應募했는데 最終審 4便에만 이름이 오르고 落榜했다. 2學年을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休學을 하고 登錄金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當時 東大門 電車 終點 자리가 헐리고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 호텔 사우나에서 카운터를 봤습니다. 6寸 아저씨의 配慮였어요. 그런데 異常하게 計算이 每日 틀리는 거야. 늘 조금씩 모자라 아저씨가 ‘好승아, 니는 이런 것도 못하나’ 하면서 눈치도 주고, 到底히 안 되겠더라고. 그렇다고 나를 생각해주신 아저씨 處地를 생각하면 無作定 그만둘 수 없고 해서 父母님께 便紙를 썼지. 여기에 있기 힘드니까 그냥 아버지가 危篤하다는 電報 한 張 보내달라고 말이야. 그래서 서울을 떠날 수 있었어요. 1969年이었지요.”

    정호승 先生은 電報를 받자 그 길로 慶州 外할머니 宅으로 갔다. 吐含山 기슭에 寶德庵이라는 初가 庵子가 있었다. 客室과 부처님을 모셔놓은 작은 房이 있는 草幕이었다. 奬學金을 받기 위해 그곳에서 詩를 써서 新春文藝에 應募했지만 또 落榜이었다. 이제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經驗이 後날 ‘瞻星臺’라는 詩를 쓴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정호승은 軍에 自願入隊했다.

    軍에서도 어떻게 詩를 써야 하나 窮理하다, 軍 幕舍 밖에 있는 軍 敎會 軍宗들의 生活이 좀 餘裕가 있어 보여 軍宗士兵이 되었다. 軍 敎會의 시멘트 바닥에 해진 매트리스를 깔고 戰友들이 잠자리에 들며 全 部隊가 消燈을 하면 그 敎會에서는 별이 떠올랐다. 軍宗士兵 정호승은 올빼미처럼 일어나 詩를 썼다. 그때 별빛이 아니라면 무엇을 보고 詩를 썼을까. 그에게 詩는, 그리고 新春文藝 登壇은 浪漫的인 일이 아니었다. 學校를 다니느냐 못 다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特別한 크리스마스 膳物

    除隊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72年 12月24日.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한일보 文化部’ 發信 消印이 찍힌 노란 電報用紙 한 張이 軍宗士兵 정호승 兵長의 손에 쥐어졌다. 應募한 時 ‘瞻星臺’가 當選된 것이다.

    “當選을 祝賀한다는 노란 電報用紙, 只今도 아마 書齋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正말 그때 氣分은 말로 表現할 수 없습니다.”

    그 노란 電報用紙는 詩人에게 기다림이란 무엇이고, 懇切히 願하고 祈禱하면 응답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聖經冊 한 쪽과 같았으리라. 그래서인지 先生의 e메일 住所는 ‘瞻星臺’다. 그의 瞻星臺는 눈물로 쌓아올린 花崗巖이었다.

    할머니 눈물로 瞻星臺가 되었다.

    一平生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瞻星臺가 되었다.

    -市 ‘瞻星臺’의 첫 年

    先生은 以前에 韓國日報 新春文藝에 同時도 當選됐다. 賞金 7萬원. 이 돈으로 어머니께 틀니를 해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春川 우두동에 있는 軍隊 敎會에 聖幕을 만들어 寄贈했다. 그 聖幕의 맨 아래에는 ‘兵長 정호승 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남루한 이야기이지만, 가난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派出婦를 나가기 위해 當身 이름 代身 職業紹介所에서 附與받은 番號로 自身을 紹介하며 電話를 거는 모습. 그야말로 ‘숟가락 몽둥이’ 하나 없이 가난하게 살던 일. 그때 저는 나는 絶對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家族 扶養은 하겠다는 決心을 했지요. 그리고 富者는 아니지만 그렇게 살았어요, 허허.”

    市는 돈과 絶對 連結되지 않는다. 그래서 先生은 職場을 選擇한다. 첫 職業은 崇實高等學校 國語敎師. 하지만 3年 程度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當身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于先 나를 위해 工夫해야겠다는 생각으로 辭任을 하고 ‘주부생활’ ‘여성동아’ ‘월간조선’ 等의 雜誌社 記者 生活을 한다. 先生의 珠玉같은 詩集들은 모두 이 時期에 出刊된 것들이다.

    “絶對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그리고 샘터사에 勤務할 때 商社로 만난 作家 정채봉 先生과는 ‘族譜에 없는 兄弟’로 呼兄呼弟하는 平生知己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文學世界에 많은 影響을 주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事實이지만, 先生은 小說家로도 登壇했다. 醫大에 다니던 親兄이 當時 在來式 解剖學敎室을 구경시켜준 적이 있는데, 그때 衝擊을 받고 解剖室의 風景, 死體가 포르말린에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를 가지고 그대로 小說을 써 ‘慰靈祭’라는 作品이 誕生했다. 이 作品은 조선일보 新春文藝 短篇小說 部門에 當選됐다. 以後 長篇小說을 出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왠지 小說家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詩世界는 이미 一家를 이루었다. 詩와 人生에 對한 그의 箴言的인 말 몇 가지를 紹介한다.

    “時間은 自己 自身에게 自己가 주는 겁니다. 自己가 주지 않으면 그냥 휙 지나가는 게 時間이라는 거지요. 人生은 時間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物理的인 時間들을 自身만의 絶對的인 時間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의 均衡이 重要합니다. 그 均衡이 깨어지면 拙作을 쓰게 되지요.”

    “저의 스승인 황순원 先生은 小說 以外에 雜文을 쓰지 말라고 했고 當身도 그렇게 했지만, 그건 그 時代의 이야기입니다. 詩人으로 小說도 쓸 수 있고, 또 詩人이 쓸 수 있는 小說이나 散文이 있을 겁니다. 그런 欲心은 가지고 있어요.”

    “詩 쓰는 일은 自己 삶을 表現하는 한 樣式입니다. 詩人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自己 삶을 表現하는 樣式이 있습니다. 그 삶의 樣式으로 저는 詩를 選擇했을 따름입니다. 누구나 自己 삶의 樣式을 忠實히, 그리고 熱心히 表現한다면 그의 人生이 바로 詩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끔 새벽에 일어나 淸掃하는 사람들을 보면 果然 내 삶의 樣式이 저들 삶의 樣式보다 더 眞情性이 있는 것일까 反問합니다. 아마 내 眞情性이 그들보다 더 떨어질 겁니다. 淸掃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한 자리와 안 한 자리가 너무나 明澄하게 드러나지요. 果然 나의 詩도 그러할까요?”

    밥은 별이고 별은 밥이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自身의 삶의 樣式이 있는 것이다. 詩 쓰는 일은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한 樣式일 따름이다. 漁夫가 고기를 잡듯이. 先生은 다른 삶의 樣式에 비해 詩가 오히려 더 劣等한 것이라고 말했다. 他人의 삶에 對한 이러한 敬畏心은 先生의 詩에 絶唱으로 빛난다. 모든 삶의 樣式에는 밥床이 있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해 산다.

    밥床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市 ‘밥 먹는 法’ 中에서

    그래도 先生의 가난은 따뜻하다. 先生은 時 ‘별들은 따뜻하다’에서 배고픔과 더불어 그 하늘에 떠오른 따뜻한 별들을 노래한다. 그것은 죽음마저 따뜻하게 바라본다. 先生의 詩와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나는 日本 作家 아사다 지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萬若에(이런 家庭은 부질없긴 하지만) 정호승 詩人이 小說을 쓰고 아사다 지로가 詩를 썼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호승은 아사다 지로의 小說을, 아사다 지로는 정호승의 詩를 쓰지 않았을까. 國籍과 言語는 달라도 作品 속에 떠오른 별들엔 國籍이 없다. 아사다 지로는 長篇小說 ‘地下鐵’에서 現實은 醜하고 現實을 살아가는 人間 亦是 決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런 世上에도 아름다운 것은 늘 確實히 存在한다면서 이런 文章을 남긴다.

    ‘그 아름다운 것을 나는 아름다운 그대로 쓰고 싶다.’

    이 文章은 정호승 先生의 詩 世界인 밥과 별과 다를 게 없다. 정호승 詩人의 밥은 별이고, 별은 밥이다. 이 둘은 두 바퀴처럼 정호승의 몸을 굴리고 민다. 先生의 詩는 바퀴다. 밥과 別로 만들어진 바퀴. 그걸 읽으면 그런 바퀴를 굴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事實이 ‘늘 確實히 存在한다.’

    孤獨의 領域

    禁煙 茶집인 ‘귀천’에서 暫時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왔다. 先生은 茶집 主人과 환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는 천상병 先生의 貴賤을 마음으로 읽으니, 귀동냥으로 들은 천상병 先生의 逸話들이 낮게 날아오는 잠자리 날개처럼 떠오른다. 그 쓸쓸한 이야기들이 頹落하는 가을날의 햇살 속으로 스며든다. 距離에 놓인 돌확에 고인 물방울들, 천상병 先生의 눈물이었을까 싶다. 빨리 담배를 피우고 들어갔다.

    先生이 詩人으로서 影響을 받은 스승이 궁금하다.

    “내 詩의 스승들은 내가 살고 있는 同時代의 詩人들이에요.”

    그래도 尹東柱, 萬海, 서정주와 같은 별들을 이야기한다. 이름만으로도 詩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었던 幸福한 사람들. 그 다음엔 亦是 金洙暎, 신동엽과 같은 詩人들이다. 그리고 孤獨하게 先生의 精神에 자리하고 있는 詩人이 김현승 先生이다.

    “金顯承 先生의 詩를 熱心히 읽었어요. 우리 詩에서 孤獨의 領域을 넓히셨지요. 先生의 詩가 좋아서 先生에게 個人的으로 詩를 보내기도 했지요. 누군가에게 個人的으로 詩를 보낸 건 先生이 처음이에요. 軍宗士兵으로 있으면서 打字機로 정성스럽게 整理해서 보낸 거죠. 先生이 答狀을 보내셨는데 ‘休暇 나오면 한番 들르라’고 했지요.”

    김현승 先生은 當時 숭실대에 勤務하고 있었다. 先生의 答狀을 받고 나서 先生의 硏究室을 들렀다고 했다. 그를 환하게 반겨줬다. 別 말씀은 없었지만 冊 속에 파묻혀 있는 尊敬하는 詩人의 모습만으로도 많은 靈感을 얻었을 것이다. 基督敎的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었다고 回顧한다. 그리고 김현승 詩人의 이 말씀.

    “孤獨의 領域은 神도 人間도 아닌 第3의 領域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정호승 詩人의 話頭다. 이 가을날 孤獨한 詩人의 孤獨에 對한 箴言은 우리 모두가 한番쯤 품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相對的이지만, 孤獨은 絶對的이지요.”

    그리고 先生은 當身의 詩가 尹東柱나 金顯承의 詩처럼 明徵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때 저는 詩가 사랑이라고 한 적도 있고, 名譽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只今 생각하니 그게 아닌 거 같아요. 詩가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든 일이겠지만, 제 생각에 苦痛 없이는 詩가 없을 겁니다. 그 苦痛이 詩로 나타날 때 내 市價 明徵해지지 않을까요? 中學校 恩師님 말대로 熱心히 살면 드러나는 充實한 삶의 ‘거시기’가 詩가 아닐까 합니다.”

    아련한 첫 키스의 追憶

    先生은 문득 어린 時節을 追憶하면서 첫 키스 이야기를 했다. 어린 時節 먼 親戚 누나에게 느낀 戀情이었다. 親戚 누나 亦是 自身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自身이 질겅질겅 씹어 먹던 오징어 다리를 錚盤에 올려놓았는데 누나가 그걸 거리낌 없이 집어 먹는 모습을 보고 ‘아, 누나도 나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더럽지 않게 여기는 것. 그것이 키스이고 사랑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窓가 쪽 冊床에 앉아 工夫를 하고 있는데 누나가 窓밖에서 自身을 불렀다.

    “好승아, 뭐 하노?”

    少年 정호승은 窓門으로 누나의 예쁜 얼굴을 보았다. 少年이 對答했다.

    “응, 工夫한다.”

    그러자 누나가 그 窓門에 입술을 대었고, 少年 정호승度 그 窓門에 입술을 댔다. 그게 詩人의 첫 키스다. 窓門이라는 透明한 마음을 媒介로 한 이 키스는 六旬이 되는 只今까지도 잊히지 않는 場面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그 누나 相當히 美人이었어” 하는데, 少年보다 더 純粹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누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일찍 世上을 떠났다고 했다. 아,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永遠性을 지닐까.

    “사랑은 根本的으로 母性의 空間이라고 생각합니다. 無條件的인 그 무엇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苦痛 받는다고 느끼는 건, 條件이 많아서 그런 겁니다. 條件이 없는 狀態, 어미가 아이에게 母乳를 먹이는 心境. 그런 게 사랑입니다.”

    先生은 領洗를 받은 天主敎 信者이면서, 마음속에는 部處가 살기도 한다. 明洞聖堂의 聖母 마리아賞 앞에 ‘장괘臺’라는 자리가 있다. 무릎을 대고 앉는 姿勢를 固定시켜주는 祈禱 道具인데, 先生이 한番은 그 章卦臺에서 몸을 낮추고 祈禱를 드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더라는 것이다. 祈禱하는 사람의 마음을 글로 쓸 수는 없으리라, 갑자기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넘치는 눈물은 새벽祈禱 하는 사람들의 靈魂의 모습이다.

    그리고 浮石寺 無量壽殿에 있는 阿彌陀佛을 보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처에게 절을 올렸다고 했다. 부처 앞에 몸과 마음을 낮추고 절을 할 때 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雲住寺의 못생긴 부처들

    이미 ‘서울의 예수’와 같은 作品으로 當代 慘酷한 現實의 十字架를 지고 가는 詩人은 많은 詩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者들의 便에 서서 울고 그 눈물로 詩를 적어내는 삶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다가 雲住寺의 못생긴 部處들 사이에 허름하게 앉아 있는 三尊佛을 보았다. 세 部處 가운데 있는 부처. 이 땅의 百姓처럼 허름하고 남루한 모습. 게다가 歲月의 風波에 磨耗된 그 彫刻像 앞에서, 삶과 詩人을 凝視하는 부처의 눈길 앞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感動과 그 무너진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慰安을 同時에 느꼈다.

    “그건 손바닥을 내려놓고 永遠을 바라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힘들 때마다 그 部處 寫眞을 봅니다. 雲住寺 三尊佛 가운데 부처의 微笑는 내가 힘들 때마다 바라보는 삶의 위안이지요.”

    마치 무거운 짐을 들고 가다가 그 짐을 내려놓고 部處를 바라보는 心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詩 ‘少年부처’가 誕生한다. 우리 모두는 부처의 本性을 타고났다는 釋迦牟尼의 가르침은 정호승 詩人에게 목 잘린 부처를 바라보게 하고 이런 詩를 쓰게 한다.

    慶州 博物館 앞마당

    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花壇가

    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

    햇살에 눈부시다.

    여름放學을 맞은 初等學生들

    조르르 觀光버스에서 내려

    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

    自己 머리를 얹어본다

    少年부처다

    누구나 一生에 한 番씩은

    부처가 되어보라고

    부처님들 일찍이 自己 목을 잘랐구나.

    -市 ‘소년 部處’ 專門.

    인간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 시인 정호승
    원재훈

    1961年 서울 出生

    중앙대 文藝創作科 大學院 卒業

    1988年 ‘世界의 文學’에 時 ‘恐龍時代’로 登壇

    詩集 ‘딸기’, 小說 ‘바다와 커피’, 散文集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來日이다’ 等


    이 詩를 읽으면서 나는 정호승의 市價 少年 部處와 같은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先生은 微笑를 잃지 않았다. 先生의 詩는 그런 微笑로 다가온다. 나는 患者와 같은 心境이 되어 先生의 이야기를 들었다. 先生은 醫師가 되어 微笑로써 나를 맞아주었다. 그때 先生의 微笑를 보고 나의 患部는 이미 治療된 것이다. 先生의 微笑가 내게는 慰安이고 慰勞였으며, 말씀은 治癒였고, 時였다. 仁寺洞에서 安國電鐵驛까지 先生과 같이 걸어가면서, 나는 수많은 部處가 우리 곁을 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微笑로 내가 살고 詩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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