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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位西方·강혜림을 아십니까?” 華僑 出身 6·25戰爭 英雄들|新東亞

“位西方·강혜림을 아십니까?” 華僑 出身 6·25戰爭 英雄들

階級·軍番도 없이 中共軍으로 僞裝해 敵陣에서 게릴라전

  • 최창근 客員記者

    caesare21@hanmail.net

    入力 2020-06-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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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현충원에 永眠한 두 위의 華僑

    • 華僑들도 同族에게 銃부리 겨눠

    • 6·25戰爭 勃發 後 反共華僑 自願入隊

    • ‘서울 차이니스’ 部隊 創設…特殊戰 任務 遂行

    • 韓政府 ‘外國人’이라는 理由로 푸待接

    1971년 한국전 참전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 사진. 왼쪽부터 유국화(劉國華), 김재명(金在命), 나아통(羅亞通). 원 안이 위서방(魏緖舫)이다. [국가기록원]

    1971年 韓國戰 參戰 華僑 從軍기장 授與式 寫眞. 왼쪽부터 유국화(劉國華), 김재명(金在命), 나牙痛(羅亞通). 圓 安易 位西方(魏緖舫)이다. [國家記錄院]

    ‘護國의 달’인 6月, 서울 銅雀區 국립현충원에는 護國 英靈을 기리는 이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2019年 基準 7萬3096位(位)가 安葬된 總面積 322萬㎡(97萬4000坪)의 墓域 中 ‘外國人 墓域’도 있다. 이곳에 純粹 外國人 3位가 安葬돼 있다. 日帝强占期 제암리 虐殺 事件을 世界에 알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1889~1970) 前 연세대 敎授, 강혜림(姜惠霖·奬詡이린), 位西方(魏緖舫·웨이쉬팡). 강혜림과 位西方은 華僑(華僑) 出身 6·25戰爭 參戰勇士다. 두 異邦人이 국립현충원에 永眠한 事緣은 무엇일까.

    華僑들도 同族끼리 銃부리 겨눠

    韓民族에게 6·25戰爭은 ‘同族相殘의 悲劇’이다. 理念·體制葛藤으로 分斷되고 곧바로 戰爭으로 이어졌다. 6·25戰爭은 ‘韓國의 오랜 이웃’ 華僑에게도 悲劇이었다. 南北 分斷 後 韓半島 化敎 社會도 分裂됐고, 戰爭의 悲劇은 이들도 덮쳤다. 血緣上 ‘同族’이라 할 수 있는 中共軍과 銃부리를 겨누기度 했다. 

    1950年 6月 25日, 北韓의 全面 南侵으로 戰爭이 勃發했다. 大韓民國의 友邦이던 中華民國(臺灣)은 大韓民國 支持 意思를 밝혔다. 서울 鳴動 所在 駐韓國 중화민국대사관은 戰爭 勃發 後 “韓國 政府와 行動을 같이한다”는 基本 方針을 樹立했다. 韓國 政府의 天道에 따라 大使館도 大田, 大邱, 釜山으로 移動했다. 중화민국대사관은 大使館 移轉 時 서울·仁川 居住 華僑에게 避難을 勸誘했다. 多數 化敎는 財産 保存 等을 理由로 殘留를 擇했다. 大使館 側은 大使館 建物 等 外交 資産, 化敎 社會 保護를 위해 ‘臨時管理委員會’를 設立했다. 

    北韓軍 占領 期間 조영덕(趙令德·者오링더)이라는 人物이 臨時管理委員會를 接受했다. 1950年 7月 16日 臨時管理委員會는 한성화교聯合會(漢城華僑聯合會)로 再編됐다. 조영덕은 北韓 平壤에서 派遣한 華僑共産組織 責任者였다. 같은 時期 仁川에서는 共産主義者라는 理由로 投獄된 정만리(程萬里·淸婉리)가 釋放돼 華僑解放聯盟(華僑解放聯盟)이라는 親共(親共) 組織을 結成했다. 

    1950年 9月 15日 仁川上陸作戰 成功으로 戰勢는 逆轉됐다. 北韓軍과 더불어 韓國 內 親共 華僑 組織 幹部들도 北韓으로 撤收했다. 유엔軍의 서울·仁川 收復 後 北韓軍 占領期 共産主義 協力者를 對象으로 이른바 ‘附逆者’ 檢擧가 實施됐다. ‘賦役 嫌疑者’ 中에는 20餘 名의 華僑도 包含됐다. 이항련(李恒連·리헝롄) 漢城自治區 球場, 장도춘(張道春·腸多오춘) 貿易公會 會長 等이었다. 



    韓國 政府는 韓國人 附逆者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軍事裁判을 거쳐 處罰할 豫定이었다. 샤오위린(邵毓麟·1909~1984) 初代 駐韓國 中華民國代謝 等 中華民國大使館 側은 “共産 組織에 協助한 華僑 中 一部가 北韓 工作員일 수는 있으나 化敎 社會에서 重要한 位置를 차지하지 않았던 點에 비춰 볼 때 生存을 위한 機會主義者日 可能性이 높다”는 趣旨로 韓國 政府를 說得했다. 結果的으로 賦役 嫌疑로 逮捕된 化敎들은 釋放됐다.

    中共軍 相對로 心理戰 展開

    1951年 中共軍의 參戰으로 6·25戰爭 傳貰는 再(再)逆轉됐다. ‘抗美援朝(抗美援朝·朝鮮을 도와 美國에 對抗한다)’를 名分으로 參戰해 유엔軍의 主敵이 된 中共軍에 맞서 美國 政府는 새로운 戰略을 樹立할 必要가 있었다. 中共軍을 相對로 心理戰을 展開하는 것도 그中 하나였다. 

    1949~1951年 駐韓國 中華民國 大使를 지낸 샤오위린은 回顧錄 ‘샤오위린 大使의 韓國 外交 回顧錄(原題 使韓回憶錄·韓國大使 回顧錄)’에서 “1951年 1月 30日 美國 政府로부터 大(對)中共軍 心理戰 提案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初期 段階 心理戰은 航空機를 利用해 傳單을 뿌리고, 擴聲器 放送을 통해 投降을 勸誘하는 것이었다. 

    化敎 硏究 權威者 王言메이(王恩美) 國立臺灣師範臺 東아시아學科 敎授는 “국·공內戰 敗戰 後 投降한 國民黨 軍 出身이 相當數였던 中共軍에 心理戰의 效果는 相當했다. 北韓 人民軍의 監視 때문에 集團 投降은 할 수 없었지만 個別 投降者는 續出했다”고 말했다. 臺(對)中共軍 心理戰에는 서울·仁川 所在 華僑學校 敎師·學生이 動員됐다. 以後 中共軍 歸順者, 捕虜 數字가 늘어나면서 華僑學校 敎師·學生들은 通譯 任務에 投入되기도 했다. 

    心理戰, 捕虜 審問 業務에 投入된 化敎들은 戰鬪部隊로 參戰하기도 했다. 主軸은 越南(越南) 華僑들이었다. 1949年 4月 20日, 平壤에서 朝鮮人(北韓人) 520名, 在北(在北)華僑 50名 等 總 570名이 參與해 韓中反共愛國靑年團(韓中反共愛國靑年團)이 結成됐다. 初代 團長으로 華僑 位西方, 副團長으로 北韓人 김명국, 華僑 강혜림이 就任했다. 位西方, 강혜림 모두 戰爭 經驗者였다. 

    位西方은 1923年 中國 랴오닝(遼寧)省 단둥(丹東)에서 태어났다. 平安北道 新義州에 居住하다 1945年 안둥(安東·縣 단둥)警察學校 卒業 後 國·공內戰 時期 國府軍(國府軍·國民黨政府群) 上位(上尉·大尉 該當)로 參戰했다. 1949年 國·공內戰에서 國民黨이 敗北하자 新義州로 돌아왔다가 平壤 隣近 萇山炭鑛 勞動者로 일했다. 1925年 中國 산둥(山東)省 치샤(栖霞)縣에서 태어난 강혜림은 국·공內戰 時期 國府軍 部隊員으로 共産黨의 人民解放軍과 戰鬪를 치른 經驗이 있었다. 國·공內戰 後 平壤에 定着해 中華料理點을 運營했다. 두 사람 모두 反共 意識이 透徹했다.

    中共軍으로 僞裝해 敵陣에 浸透

    韓中反共愛國靑年團은 結成 後 北韓 內 代(對)人民軍 게릴라전을 遂行했다. 6·25戰爭 勃發 後에도 게릴라전을 持續했다. 戰爭 勃發 直後 團員 數는 朝鮮人 800名, 華僑 200名 等 1000名에 達했다. 

    1950年 10月 20日 유엔軍이 平壤을 占領했다. 位西方은 國軍 第1師團長 白善燁 准將을 만나 “韓國軍 作戰에 참여시켜 달라”고 付託했다. 參與를 許可 받은 위西方은 韓中反共愛國靑年段을 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으로 再編해 情報 蒐集 業務를 遂行했다. 

    12月 5日 유엔軍이 平壤에서 後退했다. 位西方과 平壤華僑反共愛國保衛團 團員 30名도 함께했다. 位西方은 韓國에 到着한 華僑團員을 中國搜索隊로 再編했다. 유엔軍과 韓國軍 側은 이들의 參戰에 反對하지는 않았다. ‘外國人’이라는 理由로 階級·軍番은 附與받지 못했다. 中國搜索隊는 中共軍과 實戰(實戰)을 벌이기도 했다. 化敎 47名으로 編成된 部隊는 1950年 12月 24日, 京畿道 漣川 高浪浦里에서 中共軍 4名을 射殺하고 1名을 生捕하는 戰果를 올렸다. 이는 中共軍이 38線 以南까지 進出했다는 最初 證據였다. 

    1951年 1月, 國軍 第1師團 情報參謀 김안일 中領이 大領으로 昇進해 第1師團 第15聯隊長을 맡았다. 中國搜索隊 所屬·名稱도 第1師團 第15聯隊 中國人特別搜索隊로 바뀌었다. 2月 2日, 中國人特別搜索隊는 京畿道 果川戰鬪에 投入됐다. 相對는 中共軍 精銳部隊였다. 搜索隊員들은 中共軍으로 僞裝해 敵陣에 浸透했다. 敵 陣地 8곳을 擊破하는 活躍을 펼쳤다. 이에 힘입어 國軍은 冠岳山을 占領할 수 있었다. 部(副)大將 강혜림은 實彈이 다 떨어진 狀態에서 白兵戰을 벌이던 中 中共軍의 銃彈에 絶命했다. 강혜림은 平壤 出身으로 遺骨을 引受할 遺家族이 없었다. 遺骸는 釜山華僑小學校 敎員에 臨時 安置됐다. 後날 韓國 政府가 駐韓國 중화민국대사관과 華僑戰友들의 要請을 받아들여 1964年 12月 12日 國立墓地(現 國立顯忠院) 第24墓域으로 移葬했다. 그에 앞서 1959年 은성花郞武功勳章이 追敍됐다.

    敵陣 浸透해 砲擊 標示用 信號機 揭揚

    1951年 4月, 中國人特別搜索隊는 녹번리(現 서울 은평구 녹번동)戰鬪에 投入됐다. 隣近 野山에 中共軍·北韓軍 混成 1個 大隊 兵力이 殘留하고 있었다. 國軍 第1師團 第15聯隊에 殲滅 命令이 떨어졌다. 4月 28日, 中國人特別搜索隊는 敵陣 浸透 作戰에 投入됐다. 主 任務는 敵陣 要所要所에 砲擊 標示用 信號旗를 揭揚하는 것이었다. 

    位西方 大將과 隊員들은 5個 分組(分組)로 나눠 敵陣에 浸透했다. 信號旗를 揭揚하고 赤軍 3名을 生捕하는 成果를 올렸다. 곧 正體가 發覺돼 銃擊戰이 벌어졌다. 敵陣 한가운데 孤立된 搜索隊의 被害가 커졌다. 位西方은 中共軍 搏擊砲彈 破片에 왼쪽 가슴, 오른쪽 다리 等에 傷處를 입었다. 다른 隊員 6名도 重輕傷을 當했다. 이들은 我軍에 救出돼 大邱 第27陸軍病院으로 後送됐다. 位西方은 4時間餘 手術 끝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位西方은 이 같은 功勞로 金星花郞武功勳章을 授與받았다. 

    位西方은 6·25戰爭이 끝난 後 韓醫師가 돼 江原道 江陵에서 活動했다. 極貧者 無料 診療, 奬學事業 等 社會貢獻 活動에 힘쓰다 1989年 6月 25日 世上을 떠났다. 그해 12月 韓國 政府는 國務會議 議決을 거쳐 1990年 3月 20日 국립서울현충원 第12墓域에 位西方의 遺骸를 安葬했다. 2012年 5月 15日, 顯忠院 內 강혜림 墓所를 위西方 墓所 옆으로 移葬하면서 別途 外國人 墓所로 꾸몄다. 6·25戰爭 때 生死가 엇갈린 戰友가 나란히 永眠(永眠)에 든 것이다. 

    1951年 3月, 展示 首都 釜山에서 正式 華僑部隊가 創設됐다. 陸軍諜報部隊(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HID) 傘下 正式 中國人部隊인 4863部隊 SC地帶가 그것이다. ‘SC’라는 名稱은 ‘서울 차이니스(Seoul Chinese·韓國 華僑)’에서 由來했다. 

    강혜림·位西方이 이끌던 中國人特別搜索隊가 災旱(在韓)華僑들이 結成한 ‘自願軍’이라면, SC地帶는 韓國·中華民國(臺灣) 政府 次元에서 結成한 特殊戰 部隊였다. 1951年 1月, 中國國民黨 海外工作會는 現役 將校이던 왕스油(王世有), 류궈화(劉國華)를 韓國에 派遣했다. 두 사람은 韓國 陸軍情報本部에 華僑情報部隊 創設을 提案했다. 박경원 陸軍諜報部隊腸은 提案을 受諾했다.

    退潮海上 浸透作戰

    韓國·臺灣 合作으로 創設된 SC地帶에 韓國 側은 武器·軍服·彈藥·車輛 等을 支援하고, 臺灣은 人件費와 工作費를 負擔하기로 했다. 初代 大將으로 臺灣軍 現役 將校 뤄야퉁(羅亞通), 部隊長으로 韓國軍 이백건, 政治委員으로 류궈화가 任命됐다. 뤄야퉁은 1949年 황푸軍官學校(陸軍士官學校) 砲兵과 卒業·任官 後 國·공內戰에서 中共軍 捕虜가 됐다. 6·25戰爭 勃發 後 中共軍 砲兵 敎官으로 參戰했던 그는 脫營을 敢行해 韓國軍으로 歸順한 履歷의 所有者였다. 

    SC地帶는 서울 鍾路와 京畿道 坡州에서 10週 基本 訓鍊을 받았다. 本部는 西海의 喬桐島에 뒀다. 初期 隊員은 200名, 그中 武裝隊員 70名은 敵 後方에 浸透해 諜報 蒐集, 要因 拉致, 赤軍 施設 破壞 工作 等을 遂行했다. 이들은 流暢한 中國語·韓國語 實力을 武器로 中共軍을 만나면 北韓 人民軍으로 行世하고, 人民軍을 만나면 中共軍으로 假裝했다. 後方隊員 130名은 中共軍 捕虜 審問, 宣撫(宣撫) 放送, 心理戰 任務를 遂行했다. 

    初期 200名 線이던 SC지대원 數는 漸次 늘어나 500名에 達했다. 그中 200名은 電線, 300名은 後方에 配置됐다. 진유광(秦裕光·親衛狂) 前 한성화교協會長은 이렇게 回顧했다. 

    “SC地帶員들은 12名 單位로 組를 編成해 前方에 分散 配置됐다. 主 任務는 敵 後方에 浸透, 諜報를 蒐集하는 것이었다. 陸·海·空 루트를 利用해 浸透했다. 黃海道 鉛白·海州, 江原道 鐵圓·金化, 平安南道 成川·順天, 咸鏡南道 咸興 等 敵 後方 各地에 浸透해 縱橫無盡 活躍했다.” 

    SC地帶의 最後·最大 作戰은 1953年 7月 停戰協定 直前의 ‘退潮海上(退潮海上)’ 浸透作戰이었다. SC地帶 工作隊 2個 分臺(分隊)를 動員해 咸鏡南道 甲山 等 白頭山 一帶에서 遊擊·諜報 活動을 計劃한 것이다. 華僑隊員 30名, 韓國軍 通信技術者 10名 總 40名이 參加했다. 뤄야퉁이 引率한 部隊는 7月 18日, 工作船으로 咸鏡南道 咸興 附近 退潮 浦口에 上陸했다. 目的地는 咸鏡南道 甲山이었다. 7月 23日, 白頭山에 이르렀을 무렵 工作隊는 北韓軍에 發覺됐다. 中隊 規模 敵과 交戰이 벌어졌지만 衆寡不敵이었다. 隊員 大部分이 射殺·생포됐다. 生存者는 뤄야퉁 外 오중현(吳中賢(雨中셴)·전학림(傳學林·촨쉐린) 等 5名에 不過했다. SC地帶의 마지막 作戰은 大失敗로 끝났다.

    1971年에야 參戰 事實 公式 認定

    국립서울현충원 외국인 묘역 위서방(왼쪽), 강혜림 묘.

    국립서울현충원 外國人 墓域 위西方(왼쪽), 강혜림 墓.

    1953年 7月 27日, 停戰(停戰) 協定이 締結됐다. 2個月 後인 9月, SC地帶도 解體됐다. SC地帶 設立 初期 武裝工作隊員 70餘 名 中 生存者는 20餘 名에 不過했다. 나머지는 戰士, 行方不明 處理됐다. 大部分 浸透 活動 中 射殺되거나 逮捕돼 고문당한 後 處刑됐다. 따라서 有害조차 찾을 수 없는 隊員이 大部分이었다. 

    SC地帶 解體 後 지대원 一部는 中共軍 砲로 歸順 說得 作業, 對北 中國語 放送 아나운서, 對北 心理戰 要員으로 活動했다. 나머지는 生業으로 돌아갔다. 

    莫大한 犧牲을 치르고도 SC地帶 華僑部隊員들은 參戰 有功者로 인정받지 못했다. 1952年 오중현이 忠武武功勳章을 授與받은 것이 全部다. 20年이 지난 1971年에야 韓國 政府는 SC地帶의 參戰 事實을 公式 認定하며 53名에게 從軍기장을 授與했다. 以後 1975年 保國褒章을 授與했다. ‘國家有功者’ 禮遇는 없었다. 

    SC地帶가 犧牲해야 했던 것은 人命(人命)李 다가 아니었다. 臺灣이 派遣한 SC地帶 責任者 왕스油·류궈화는 負債까지 짊어졌다. SC地帶는 모든 工作費用을 自費로 負擔해야 했다. 臺灣 政府가 約束을 어기고 支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隊員들이 한푼 두푼 보태기는 했고 류궈화 等이 化敎 社會에서 巨額을 빌리기도 했다. 2年 半 남짓한 活動 期間 使用한 費用이 當時 貨幣로 1億7000萬 원에 達했다. 停戰 後 負債 償還은 왕스油·류궈화 두 사람 몫으로 남았다. 이들은 20餘 年에 걸쳐 빚을 償還했다. 

    이房(異邦)을 위해 莫大한 人的·物的 犧牲을 했지만, 華僑 出身 參戰勇士들에게 돌아온 것은 푸待接이었다. 理由는 ‘韓國 國籍者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SC地帶員들은 國家報勳處 等 關係機關으로부터 生前에 參戰勇士 待接을 받지 못했다. 死後에도 國立墓地(顯忠院)에 安葬되지 못했다. 韓國 政府는 “國立墓地에 安葬되려면 國籍이 大韓民國이어야 하고 國家有功者 資格과 參戰勇士 要件을 갖춰야 한다”는 原則論을 앞세워 “죽어서 國立墓地에 묻히고 싶다”는 參戰勇士들의 要求를 拒絶했다. 

    金肉眼(金育安·眞위안) 餘恨(旅韓·災旱)華僑參戰同志會承繼會長은 2001年 作故한 SC지대원 김성정(金聖亭·眞性팅)의 아들이다. 김성정은 1973年 保國褒章을 받았다. 金肉眼 會長의 堂叔 金淨의(金亭義·진팅이)도 SC地帶원으로 敵 後方에 空輸 落下하다가 失踪됐다. 金 會長은 “1973年 當時 朴正熙 大統領이 아버지에게 保國褒章을 授與하면서 다른 것은 못해도 나이가 들어 便安하게 살 수 있도록 大韓民國 政府가 最善을 다해 돕겠다고 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傳해 들었다”고 밝혔다. 朴 大統領의 約束은 只今껏 지켜지지 않고 있다. 化敎 參戰勇士들은 하나둘씩 世上을 떠났다.

    ‘國籍 다르다’ 外面 옳을까

    京畿 파주시에서 漣川郡으로 이어지는 37番 國道邊에 이른바 ‘赤軍(敵軍)卯’가 있다. 公式 名稱은 北韓軍·中國軍 墓地다. 韓國 國防部가 管理한다. 6·25戰爭 參戰 北韓 人民軍·中共軍, 南派 間諜이 잠들어 있었다. 2013年 朴槿惠 當時 大統領은 中國 베이징을 訪問해 中國 側에 中共軍 遺骸 送還을 提議했다. 中國이 提議를 받아들여 都合 589具의 中共軍 遺骸가 中國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랴오닝省 선양(瀋陽)의 抗美援朝烈士陵(抗美援朝烈士陵)에 安置됐다. 지난해 坡州 敵軍妙에서 開催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軍人 追慕祭’에 與黨 地域區 議員이 參席해 物議를 빚기도 했다. 

    ‘赤軍’의 墓까지 챙기고 赤軍 追慕祭까지 擧行하는 오늘날 大韓民國이 ‘國籍이 다르다’는 理由로 大韓民國을 위해 싸운 華僑 出身 6·25戰爭 參戰勇士들을 外面하는 理由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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