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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國의 慰安婦’ 박유하 “故배춘희 等 할머니들 挺對協 두려워 대놓고 批判 못해”|신동아

‘帝國의 慰安婦’ 박유하 “故배춘희 等 할머니들 挺對協 두려워 대놓고 批判 못해”

[허문명의 SOUL] 15年 前부터 挺對協 批判한 박유하 세종대 敎授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06-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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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挺對協 批判하다 ‘魔女사냥’ 當해…빨갱이보다 무서운 親日派 烙印

    • 挺對協 運動, ‘돈’ 아닌 ‘人脈 30年’으로 들여다봐야

    • 돈 받은 할머니들은 非難하고, 自身들 따르는 할머니들만 代辯해

    • 할머니들, 挺對協 批判한 事實 알려질까 두려워해

    • 謝罪보다 補償 怨恨 할머니들 목소리 묻혀

    •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져

    • 정대협이 日 良心的 知識人과 連帶 막아…위안부 運動 이대론 안 된다

    누구나 힘든 時期를 사는 것 같습니다. 안팎으로 뒤숭숭하고 먹고살기가 漠漠한 이런 때야말로 精神 줄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허문명의 SOUL’은 삶을 뒤흔들어대는 여러 難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靈魂과 精神 줄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編輯者 週>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尹美香 事態’로 시끄럽습니다. 이番 事態의 本質은 正義記憶連帶(正義連)의 前身인 挺身隊問題對策協議會(挺對協)의 會計 處理 不正 疑惑이기도 하지만 被害者를 代辯한다는 市民團體가 오히려 被害者들의 목소리를 歪曲해 왔다는 點일 겁니다. 그것도 우리 現代史의 가장 아픈 部分인 慰安婦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말이죠. 이番 일이 벌어지기 15年 前부터 정대협의 運動 方向에 問題를 提起해 온 박유하 세종대 敎授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할까요.

    尹美香의 逸脫과 ‘人脈 30年’

    - 表情이 밝지 않은 것 같다 

    “心境이 複雜하다. 連絡이 많이 오는데 立場 表明을 自制해 왔다. 나까지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番 일이 政治나 陳永 싸움으로 흐르지 않고 鎭靜 할머니들을 위한 쪽으로 結末이 나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 이용수 할머니 記者會見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나. 

    “個人的으로 오래前부터 因緣을 맺어온 할머니들로부터 들은 말들과 다르지 않았다. 뒤에서 좀 더 仔細히 말하겠지만 내가 만난 할머니들 中 나눔의 집과 정대협에 對해 批判的인 말을 할 때 그런 생각이 알려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을 나타낸 분들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直前까지 交流한 배춘희 할머니가 代表的이다. 할머니는 生前에 이용수 할머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끝내 혼자 가슴에 묻고 世上을 떠났다. 

    그런 雰圍氣를 잘 알기에 나는 이용수 할머니가 얼마나 큰 勇氣를 냈는지 가늠이 된다. 그런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形態의 逆攻을 받고 계시다. 內部 告發을 한 나눔의 집 職員들의 身邊까지 위태롭다는 報道를 接하면서 내가 어떤 式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保護하고 싶다. 어렵사리 터져 나온 목소리들이 이대로 묻혀버려서는 안 된다.” 



    - 이番 事態에서 注目할 것은 ‘돈’보다 ‘人脈’이라고 페이스북에 썼는데 무슨 뜻인가. 

    “돈 問題도 明確하게 밝혀져야 하겠지만 正義連이 첫 番째 記者會見에서 言及한 ‘代議’에 注目했으면 한다. 그들이 말하는 ‘代議’가 果然 무엇이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挺對協 運動은 簡單한 問題가 아니다. 無慮 30年 동안이나 넓고 깊게 關與한 많은 사람이 있다. 나눔의 집 內部에서는 告發者가 나왔는데 挺對協에서는 內部 告發이 없는 것을 넘어 政權까지 나서서 保護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용수 할머니를 向해 서슴없이 非難 發言을 내뱉는 사람들은 그 人脈의 中心이 아니라 周邊人들日 것이다. ‘周邊’에 있었기 때문에 問題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다. 團地 尹美香 한 사람의 逸脫 問題가 아니라 人脈 30年으로 理解해야 한다고 본다.” 


    ‘當事者’는 挺對協 생각에 따르는 할머니들로 限定

    그가 가벼운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數千 名을 ‘動員’해 치러진 김복동 할머니의 巨大한 葬禮式은 바로 그런 情況의 象徵이었다. 故人은 정대협이 가장 가까이에서 保護한 분이고 돌아가시기 直前까지 가장 旺盛하게 活動한 분이었다. 尹美香 前 代表는 金 할머니 葬禮를 위해 大大的인 市民委員會를 組織했고 寄附金도 많이 모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조차 存在조차 모르는 할머니가 많다는 것을 記憶해야 한다. 정대협이 代辯한다고 말해왔던 ‘當事者’는 어디까지나 挺對協 생각에 따르는 이들로 限定됐다. 그들과 意見을 달리하는 할머니들의 存在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最近 몇 年 동안 가장 걱정해 온 건 ‘水曜集會’에 많은 靑少年이 參與했는데 ‘正義連 思考方式’이 이들에게 影響을 미친다는 거였다.” 

    - 正義連 思考方式이란? 

    “日本이 慰安婦 問題에 對해 全혀 謝罪를 안 했다는 式의 主張으로 憎惡를 擴大 再生産하는 것이다. 事實 慰安婦 問題가 글로벌化한 것은 이른바 ‘良心的 日本人’들의 努力도 있었기에 可能했다. 慰安婦 最高 硏究者인 요시미 요시아키 敎授를 비롯해 1980年代부터 유엔에서 人權運動을 한 日本人들이 있다. ‘性奴隸’라는 單語도 日本人 辯護士가 1990年代 初부터 쓴 말이다. 挺對協 創立 멤버인 윤정옥 이화여대 敎授도 自身의 著書에서 1970年代 日本에서 나온 ‘從軍慰安婦’라는 冊에서 影響을 받았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을 爲한 運動이 정대협이 내건 ‘代議’라면 日本 政府를 說得하고 日本 內部에 더 많은 市民的 共感帶를 만드는 일에도 邁進했어야 하지 않을까. 韓日關係가 갈수록 나빠진 게 挺對協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事實과 關聯한 內容을 조금씩 바꾸고 日本人들이 納得하기 힘든 主張을 해온 정대협의 運動 方式이 韓日關係 惡化에 큰 影響을 미친 것은 事實이다. 慰安婦 運動 方式 自體를 苦悶하고 轉換하지 않으면 안 되는 時點이다. 하지만 30年 동안 우리 社會에 定着된 認識이 너무 깊고 鞏固해 그게 可能할까 싶다.” 

    記者의 同意를 求하는 듯한 그의 表情에서 津한 疲勞感과 無力感이 스쳤습니다.

    民族主義와 女性運動

    박유하 세종대 교수(왼쪽)는 “위안부 운동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해윤 기자]

    박유하 세종대 敎授(왼쪽)는 “慰安婦 運動이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强調했다. [박해윤 記者]

    그는 本來 日本 近代文學 專攻으로 博士學位(와세다大)를 받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慰安婦 問題에 關心을 갖게 됐을까요. 

    “儒學 막바지였던 1990年代 初 도쿄에서 열린 慰安婦 할머니 證言 集會에서 通譯 自願奉仕를 한 적이 있다. 當時 衝擊을 받아 할머니들의 證言集을 찾아 읽으면서 關心을 갖게 됐다. ‘運動’에는 別로 關心이 없었다. 慰安婦 運動이 民族主義 形態로 進行되는 것에 선뜻 同意할 수 없었고, 反(反)페미니즘的 要素가 多分한 民族主義와 女性運動이 합쳐지는 것도 納得하기 힘들었다. 

    내가 工夫하던 時期 日本에서는 植民 支配에 對한 謝過와 懺悔가 있어야 한다는 談論이 形成됐다. 日本의 一般 市民들도 共感하는 바가 컸다. 韓日 間 和解의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相對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슨 말을 하는지부터 귀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點에서 慰安婦 問題와 關聯해 日本의 良心的 知識人들이 主軸이 돼 1995年 日本 政府의 出資金과 日本 國民 募金을 바탕으로 만든 ‘女性을 위한 아시아平和基金’(以下 國民基金)을 注目할 必要가 있었다. 限界도 있었지만 日本 政府와 國民의 努力을 認定해줄 만한 대목이 分明히 있었는데 정대협의 無條件的 反對로 어그러지는 過程을 지켜보면서 韓國이 너무 民族 感情에만 치우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不正確한 情報를 傳達해 反日 感情만 심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그러던 次에 2003年 김군자 할머니 等 나눔의 집의 몇 분이 慰安婦 問題에 韓國 政府가 너무 無關心하다며 國籍을 抛棄하겠다고 밝힌 內容이 담긴 記事를 보게 됐다. 記事를 읽으며 ‘問題가 解決되지 않고 있는 것이 正말 韓國 政府의 無關心 때문인가, 日本 內 良心 勢力의 努力을 果然 할머니들은 알고 있는가, 挺對協 같은 支援 團體의 運動 方式은 問題가 없는가’ 이런 疑懼心이 들었다.”

    個人의 自由意志를 團體 이름으로 統制

    그는 日本의 社會學者이자 代表的 페미니스트로 일찍이 慰安婦 問題에 關心이 많았던 우에노 지즈코 敎授가 마침 韓國에 오는 길에 할머니들을 直接 만나고 싶다고 해 京畿 光州市 나눔의 집을 함께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朴 敎授의 腦裏에는 當時 訪問이 强烈한 記憶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 어떤 記憶인가. 

    “할머니들로부터 率直한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우리 죽고 난 다음에 補償하면 무슨 所用이냐’는 거였다. 나눔의 집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혼자 나와 살고 있던 分도 만났는데 ‘나눔의 집이 싫다’고 했다. 또 우에노 敎授를 비롯해 많은 日本人이 나눔의 집 建立에 많은 寄附金을 냈다는 것, 그곳에서 宿食하며 自願奉仕하던 이들 大部分이 日本人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 그리고 2年 뒤인 2005年 정대협 活動을 本格的으로 批判한 첫 冊 ‘和解를 위해서’를 펴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傳하고 싶었다. 또 정대협이 言論과 國民에게 내보내는 情報가 正確하지 않고 一貫性이 없는 狀況에서 正確한 情報를 알리는 것이 必要하다고 생각했다.” 

    - ‘國民基金’을 中心으로 한 日本 政府의 對應이 冊에 强調돼 있었다. 

    “當時만 해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國民基金’의 肯定的 要素와 限界를 나 나름대로 條目條目 짚으려 했다. 알다시피 日本은 처음에는 軍의 關與를 否定했지만 1993年 고노 官房長官, 이듬해 무라야마 總理가 强制 連行을 認定하고 ‘謝罪와 反省’을 表明했다. 그리고 具體的 實踐을 위해 ‘國民基金’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當時 글에 ‘日本 知識人들이 植民地 支配에 對한 反省을 앞장서 해왔고 國民基金 1代 理事長이 議會 議長, 2代 理事長이 무라야마 前 總理라는 點, 補償金을 傳達할 때 總理의 便紙를 添附하기로 한 點’ 等을 들어 國民基金이 日本 政府와 密接한 關聯이 있다고 썼다. 勿論 國會 同意 代身 國民基金이란 形態를 選擇한 것과 關聯해 日本 政府의 消極的 態度를 批判하기도 했다. 

    어떻든 ‘國民基金’은 戰後 日本 社會의 嚴格한 自己批判과 自省의 목소리가 합쳐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韓國에서는 ‘國家 責任을 면하기 위한 꼼수’로만 看做하거나 基金의 存在 自體를 國民에게 알리지 않았다.” 

    - 當時 一部 慰安婦 할머니들은 그 基金의 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過程에서 돈을 받으려 한 할머니들 中 一部가 挺對協으로부터 ‘화냥년’ 소리를 들었다는 證言도 있다.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묻힌 代表的인 事例다. 基金의 趣旨나 內容이 全혀 紹介가 안 된 狀態에서 정대협은 돈 받은 할머니들을 非難했다. 이들은 以後 우리 政府가 支給한 慰勞金 對象에서도 빠졌다. 나는 이런 過程이 ‘個人의 自由意志를 團體 이름으로 統制하고 政府로부터 報償받을 權利까지 빼앗은 越權的人 行爲였다’고 冊에 썼다.”

    할머니들 權利 빼앗은 ‘國民基金’ 事態

    實際로 2004年 女性學者 김정란 博士의 論文에는 “더러운 돈을 받으면 화냥년 된다”며 정대협 活動家가 돈을 받지 못하게 했다는 석복순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證言이 나옵니다. 

    “아무 거고 몇 千萬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먹게 내버려두지,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정대협이)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 

    - 尹美香 議員을 直接 만나본 적이 있나. 

    “冊 ‘和解를 위해서’를 내고 두 달 뒤 내가 主導해 만든 韓日 知識人 모임 ‘韓日, 連帶 21’ 主催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當時 정대협 事務局長이던 尹美香 氏를 招請해 對話를 試圖했다. 하지만 見解差만 確認한 채 심포지엄이 끝났다. ‘國民基金’ 誕生의 中心 人物이던 日本의 代表的 進步 知識人 와다 하루키 敎授의 趣旨 說明이나 우에노 지즈코 敎授의 評價는 完璧하게 無視됐다.” 

    - ‘和解를 위해서’가 出刊된 이듬해인 2006年 末, 日本에서 飜譯版이 發刊되면서 當身에 對한 批判이 公開裡에 나오기 始作한 걸로 알고 있다. 

    “冊이 나왔을 때만 해도 肯定的 書評들이 있었고 文化관광부 優秀圖書로까지 選定됐다. 日本에서는 아사히신문사가 주는 論壇商道 받았다. 安堵와 기쁨을 느낀 것도 暫時, 내가 日本 右翼들의 使嗾를 받고 썼다는 둥, 典型的 右翼 論理라는 둥 根據 없는 歪曲과 斷定이 始作됐다. 豫期치 않은 反應에 많이 당혹스러웠다.” 

    - 只今이야 정대협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지만 當時만 해도 日本 立場을 說明하는 글이 던진 衝擊이 얼마나 컸을지 斟酌이 간다. 그런데도 움츠러들기는커녕 本格的인 硏究를 繼續했다. 그 結果가 ‘帝國의 慰安婦’ 아니었나. 

    “國民基金이 2007年 解散되면서 日本에서는 慰安婦 問題에 對한 關心이 急激히 식어갔다. 特히 2010年은 庚戌國恥 100周年이 되던 해인데 韓日 兩國 政府는 이 問題를 一切 言及하지 않았다. 나는 日本 媒體에 칼럼을 싣고 ‘올해 日本이 가장 먼저 할 일이 慰安婦 問題를 둘러싼 對話’라고 했지만 狀況은 繼續 惡化됐다. 及其也 2011年 末 駐韓日本大使館 앞에 少女像이 만들어졌다. 2012年 봄쯤으로 記憶하는데 ‘日本이 試圖한 謝罪와 補償 움직임에 對해 靑瓦臺 人士가 被害者 支援 團體가 反對할 것이라며 日本案을 拒否했다’고 말했다는 言論 報道를 接하고 이대로 가면 慰安婦 問題 解決은 永遠히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慰安婦 問題에 對한 關心을 불러일으키는 게 重要하다고 생각해 이 問題에만 集中한 冊을 쓰기 始作했고, 그게 2013年에 나온 ‘帝國의 慰安婦-植民地 支配와 記憶의 鬪爭’이다.”

    日本 良心的 知識人들의 應援

    그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冊이 나왔을 때 肯定的 評價를 해준 書評이 많았다. 韓日 兩國에서 稱讚도 많이 받았다. 日本에서 내 冊을 높게 評價해 준 사람들은 右翼들이 아니라 日本의 戰爭 責任을 누구보다 깊이 認識해 온 知識人들이라는 點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過分하리만큼 높은 評價를 해준 곳이 아사히新聞이었고, 더 進步的이라는 評을 받는 도쿄新聞, 中途인 마이니치新聞이 書評, 칼럼, 社說을 통해 肯定的 言及을 해줬다. ‘帝國의 慰安婦’가 할머니들의 名譽를 毁損한 嫌疑로 起訴됐을 때 反對 聲明을 낸 분들이 고노 談話를 發表한 고노 前 關防長官, 무라야마 談話를 發表한 무라야마 前 總理, 日本의 良心的 知識人을 代表하는 노벨文學賞 受賞 作家 吳에 겐자부로 等이라는 것만 봐도 冊의 指向點이 어디를 向하는지 알 수 있다.” 

    - 어떻든, 冊 出版 以後 裁判이 始作됐고 韓國 社會에 커다란 論爭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優先的으로 試圖한 건 體驗을 드러내 말하지 못한, 잊힌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거였다. 그런 할머니들 목소리만 眞짜라고 말하려 한 게 아니라 當事者를 제쳐놓고 일이 進行되는 건 問題이며, 萬若 當事者들 間에 생각이 다르다면 周邊 사람들도 함께 苦悶해 보자, 오로지 그런 趣旨였다. 

    그러면서 旣存 硏究 談論과는 다른 接近法을 試圖하려 했다. 戰爭 犯罪로만 다뤄지던 것을 帝國主義 問題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慰安婦는 植民 支配가 惹起한 問題인데 日本은 그 部分을 제대로 認識한 적이 없다는 것, 이를 明確히 한 뒤 그것을 基盤으로 한 謝罪와 補償이 必要하다는 거였다. 

    또한 業者나 마을 사람, 或은 父母 等 우리 안의 責任에 對해서도 물었다. 내가 그렇게 不便한 일을 試圖한 건 挺對協 運動을 妨害하고 싶다거나 日本의 罪를 묻지 않고 싶어서가 아니라 事態를 明確히 알아야 日本의 責任을 正確하게 물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다시 直接 들어야겠다고 나선 것도 그즈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 왜? 

    “水曜集會에서도 할머니들에게 다가가는 게 禁止돼 있었다. 그러던 中 日本 言論人의 周旋으로 할머니 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때 다시 한番 一部 할머니들이 願하는 謝罪와 補償이 溫度差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분들은 日本의 法的 責任에 對해서는 아는 바도 없었고 關心도 없었다. 그저 살아生前 補償金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心情이었다. 나는 이런 목소리들이 如前히 無視되고 있다는 것에 또다시 甚한 無力感과 絶望感을 느꼈다. 그러다 한 할머니와 因緣을 맺게 됐다.”

    마지막까지 지켜주지 못한 배춘희 할머니

    2014년 6월 8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일본군 위안
부 피해자 고 배춘희 할머니의 노제가 6월 10일 오
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열렸다. [동아일보 원대연 기자]

    2014年 6月 8日 老患으로 世上을 떠난 日本軍 慰安 部 被害者 고 배춘희 할머니의 路祭가 6月 10日 吳 前 京畿道 光州市 나눔의 집에서 열렸다. [동아일보 원대연 記者]

    - 배춘희 할머니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할머니들을 호텔에서 만난 後 ‘나눔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호텔에서 만난 분을 包含해 또 다른 몇 분과 點心 食事도 했다. 倍 할머니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日本말이 流暢했다.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내게 ‘日本을 容恕하고 싶다’고 했다.” 

    - 할머니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는 篤實한 佛子(佛者)였다.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뭔가 좋은 일 하나 하지 않고 世上을 뜬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도 마음을 나눌 수가 없다고도 했다. 日本 總理가 TV에 나오면 다들 辱하는데 가만히 있는 自己에게 ‘왜 가만히 있느냐, 日本이 좋으냐’고 몰아붙인다는 거였다. 이런 이야기가 그들 귀에 들어가면 ‘敵은 100萬, 나는 혼자가 된다’는 말도 했다. 나는 할머니와 津한 同病相憐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 孤獨과 두려움은 내가 韓日關係 冊을 낼 때마다 가졌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誠金을 職員이 가져간다”

    - 以後 繼續 만났나. 

    “자주 내게 電話를 걸어왔다. 두 番째 만나러 갔을 때는 對話를 나누는 동안 職員들이 露骨的으로 警戒하는 것이 느껴졌다. 以後에는 事前에 할머니와 約束까지 했는데도 面會를 막았다. 나는 배 할머니를 통해 모든 할머니가 日本에 對해 怨恨과 憤怒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나눔의 집에서의 만남이 霧散된 後 露骨的 境界를 當하면서 電話 通話가 疏通의 中心이 됐다. 할머니는 ‘추운데 커튼도 안 달아준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誠金을 職員이 가져간다’는 말도 했다. ‘따로 나가 살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다 病院에 入院한 걸 알고 問病을 갔는데 看護師가 어딘가와 通話하더니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以後 나눔의 집에 찾아갔지만 門前薄待를 當했다. 그러곤 通話를 몇 番 더 했지만 할머니 몸이 衰弱해져 길게 對話를 나눌 狀況이 아니었다. 얼마 後 할머니가 作故했다는 걸 뉴스를 통해 들었다. 끝내 할머니를 도와주지 못했다는 自責 때문에 눈물이 쏟아졌다. 殯所에도 갔지만 나를 不便해하는 視線이 느껴져 靈前에는 짧게 人事하고 複道에 오래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이番 事態가 터진 後 나눔의 집 職員들이 ‘後援金을 數十億 쌓아두고 있었으면서도 할머니들한테는 거의 쓰지 않았다’ ‘後援金으로 購入한 땅 一部를 所長 名義로 해놓았다’ 等의 疑惑이 提起됐는데, 배 할머니 생각에 사무쳤고 이런 僞善과 欺瞞 위에서 우리 社會가 굴러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괴로웠다.” 

    - 裁判 이야기를 해보자. 當身을 告發한 건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었다. 

    “‘帝國의 慰安婦’를 내고 ‘慰安婦 問題 第3의 목소리’라는 題目으로 심포지엄을 열었고 할머니들의 映像 인터뷰를 公開했다. ‘日本에서 돈을 주려면 할머니들 손에 直接 쥐여주어야지, 왜 정대협을 끼느냐’ ‘法的 責任이고 뭐고 우리는 于先 補償부터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公開됐다. 이분들 모두가 世上에 自身들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해 얼굴과 목소리는 變造했다. 

    當時 심포지엄은 속내를 숨겨야만 했던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世上에 내보낸 거였다. 私費를 털어 치렀고 期待 以上으로 韓日 兩國 言論들이 크게 注目했다. 그리고 한 달 半 後 告發當했다. 倍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一週日 만이기도 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낸 告訴狀에는 “박유하의 冊과 活動을 이대로 놔두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內容이 적혀 있었다. 冊에 對해서도 無慮 109곳이 問題가 된다며 出版 및 販賣 禁止와 할머니들에 對한 接近 禁止를 要求한 假處分이 申請됐다. 生涯 처음 겪는 精神的 肉體的 苦痛의 始作이었다.” 

    朴 敎授는 2015年 11月 ‘帝國의 慰安婦’에서 慰安婦의 自發性을 言及했다는 名目으로 被害者 名譽毁損 嫌疑로 起訴됐습니다. 1審 裁判部는 無罪를 宣告했지만 2審 裁判部는 有罪(罰金 1000萬 원)를 宣告했습니다. 裁判은 現在 大法院에 3年째 稽留하고 있습니다. 한便 販賣 禁止 部分에 對해서는 假處分 審議 法院으로부터 정대협을 批判한 內容 等을 一部 削除하고 재출판하지 않으면 販賣할 수 없다는 判決을 받았습니다.

    빨갱이보다 무서운 親日派라는 烙印

    - 法廷 싸움을 하면서 뭘 느꼈나. 

    “學術 討論에 나올 內容이 法廷에서 이야기되는 너무나도 消耗的인 싸움에 虛妄함을 많이 느꼈다. 部分만 갖고 全體인 것처럼 糊塗하거나 日本을 批判하기 위해 言及한 대목을 마치 내 主張처럼 몰아가거나 全體的 意味를 歪曲하는 主張에 넌덜머리가 났다. 

    一部에서는 내 著作을 ‘學問의 自由’로 擁護하지만 난 그런 表現을 쓰고 싶지 않다. 아무렇게나, 異常하게 썼어도 學問의 領域에서는 容恕돼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발 물러서서 그 틀로 생각하더라도 가장 슬펐던 건, 學問의 自由를 가장 擁護해야 할 學者들이 할머니들을 앞장세워 學問의 自由를 抑壓하는 모습이었다.” 

    始終一貫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기 始作했습니다. 

    “나는 只今도 믿고 있다. 내 冊은 虛僞가 아니다. 내가 告發당한 건 冊이나 심포지엄 때문만도 아니요, 할머니들과 가까워지는 것, 그에 따라 나눔의 집과 挺對協 問題가 世上에 드러나게 될 것을 그 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尹美香 事態가 터지면서 “처음부터 나에 對한 告發이 正말 나눔의 집 할머니들 뜻이었는지 궁금했는데 疑懼心이 더 커졌다”고 했습니다. 

    “정대협은 市民權力, 學界와 言論權力, 유엔과 世界女性 市民連帶에 이르기까지 莫强한 힘을 갖고 있다. 尹美香 氏 以前에 代表를 지낸 한 분은 有數한 學會의 會長을 지냈고, 有數 言論의 前 主筆 師母님이고 서울對 敎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오랜 歲月 運動을 통해 만들어진 끈끈한 紐帶 關係뿐 아니라 長官과 國會議員들을 輩出한 人脈이 있다. 나아가 國民, 政府, 企業이 모아준 資金이 있고 裁判을 도와줄 사람들까지 있다. 

    告發을 當한 以後 나는 오로지 혼자 團體 사람들, 關係者들, 批判者들이 集團으로 내놓는 모든 攻擊 글을 分析하고 反論을 내놓아야 했다. 그런 作業 以上으로 힘들었던 건 그 안에 담긴 歪曲과 敵對, 嘲弄이었다. 이들은 오로지 自己들 생각을 지키기 爲해, 그동안 國民들을 向해 해온 말들의 수많은 矛盾을 그저 덮기 위해, 運動에 妨害가 된다는 理由로 나를 似而非 學者, 賣國奴, 親日派로 몰아갔다. 

    冊에 分明히 日本 右派를 批判한 대목이 있는데도 全혀 注目하지 않았다. 내 冊이 慰安婦를 歪曲하기 위해 意圖的으로 巧妙하게 敍述됐다면서 ‘惡辣’ ‘殘忍’ ‘利己的’ ‘惡意的’ 이란 모진 單語들을 서슴지 않고 썼다. 이게 魔女사냥 아니면 뭔가. 더 슬픈 것은 知識人들조차 國民의 魔女사냥을 誘導했다는 것이다.” 

    - 어떻게 버티고 있나. 

    “多數는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支持해 주고 있다. 내가 尊敬하는 사람들의 應援이 큰 힘이 됐다. 페이스북에서 새롭게 만난 擁護者들은 韓國 市民社會의 새로운 可能性을 보여주고 있다. 내 唯一한 收穫이라고 할까. 거듭 말하지만 韓日關係가 나빠진 것이 挺對協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偏狹함, 强勁함으로 韓日 相互 間 理解의 動力이 사라지고 政府가 運身할 幅은 좁아졌다. 뻔뻔한 日本, 謝罪 않는 日本人들이란 이미지가 定着됐고, 良心的 日本人들과의 폭넓은 年代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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