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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俊錫 大解剖] “謙遜하고 착한 隻이 政務 感覺은 아냐…경쟁 잣대 세워야”|신동아

[李俊錫 大解剖] “謙遜하고 착한 隻이 政務 感覺은 아냐…경쟁 잣대 세워야”

叛亂과 挑發의 아이콘,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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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1-06-1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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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家는 競爭 環境 만들어주는 플랫폼”

    • “保守主義보다는 不干涉主義”

    • 2030, 게임 캐릭터처럼 李俊錫 消費

    • “禮義 갖추며 討論하기 어렵다”

    • “慣性에 따라 아저씨들 얘기 들어주는 게…”

    • “左衝右突하는 性格 아니었다면 못 떴다”

    • 상계동 都市勞動者 家庭의 正體性

    • 사람의 善意(善意)는 믿지 않는다

    • 競爭에 對한 날것 그대로의 確信

    • 리허설 없는 勝負, 大選 게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6월 10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진행된 ‘신동아’ 인터뷰에서 “국가는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플랫폼”이라고 했다. [홍중식 기자]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는 6月 10日 서울 西大門區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에서 進行된 ‘신동아’ 인터뷰에서 “國家는 競爭할 수 있는 環境을 마련해 주는 플랫폼”이라고 했다. [홍중식 記者]

    政治人은 에어쇼의 飛行機와 같은 存在다. 滑走路에 있을 때 別般 特別할 게 없는 쇳덩어리는 구름 위로 날아오르며 存在感을 誇示한다. 멋들어진 模樣새로 太陽을 向해 突進하고, 맵시 있게 曲藝飛行을 하며 테크닉을 뽐낸다. 그러나 祝祭가 끝난 뒤에는 垂直 下降이 宿命이다. 地表面에 닿으면 曲藝의 追憶은 滑走路 옆 雜풀 속에 파묻힌다. 뒤로는 數十餘 臺 飛行機가 ‘이番엔 내 次例요’ 하며 줄줄이 늘어서 있다. 大衆은 必要에 依해 政治人을 띄우고, 쓸모가 다하면 냉혹히 廢棄處分한다. 이것이 政治人의 運命이다.

    1987年 民主化 以後 執權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盧武鉉, 李明博, 朴槿惠 그 누구도 이 運命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것은 政治報復”이라며 無數히 抗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運命을 淡淡히 直視한 사람도 있다. 逝去 直前 노무현은 “只今 나를 支配하고 있는 것은 成功과 榮光의 記憶이 아니라 失敗와 挫折의 記憶”이라고 썼다.(‘성공과 挫折’ 中) 盧武鉉의 同志였던 文在寅은 盧武鉉의 遺訓을 알면서도 같은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것이 文在寅의 運命이다.

    ‘문재인 時代’의 黃昏期에 1985年生 李俊錫이 飛上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가 全黨大會에 出馬하겠다고 했을 때, 흔한 反應은 “勇氣는 嘉尙하다”는 것이었다. 政治的 體級을 높이기 위한 戰略的 行步에 不過하다는 冷笑도 튀어나왔다. 그러나 6月 11日 온라인으로 進行된 國民의힘 全黨大會에서 그는 最終 得票率 43.82%를 記錄해 羅卿瑗(37.14%), 朱豪英(14.02%), 조경태(2.81%), 洪文杓(2.22%) 候補를 따돌렸다. 輿論調査 得票率 58.76%는 다른 네 候補의 得票率 合計(41.25%)보다 17.51%포인트 높았다. 選擧는 黨員 投票(70%)와 輿論調査(30%)를 合算하는 方式으로 進行됐다.

    民心(民心)은 黨心(黨心)과의 줄다리기에서 壓倒的 氣勢를 보였다. 安定과 經綸을 重視하는 黨員 中에도 民心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에게 票를 던졌다. 張性哲 共感課論爭 政策센터 所長은 “周圍의 國民의힘 中壯年層 黨員 中에도 黨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李俊錫을 찍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及其也 憲政 史上 最初로 30代 院內 交涉團體 政黨 代表가 誕生했다. 國會議員 經驗이 없는 그가 都合 18線(羅卿瑗 4線, 朱豪英 5線, 조경태 5線, 洪文杓 4線)의 巨物들을 꺾었다. 李俊錫에게 只今은 ‘高空飛行의 時間’이다.

    나는 不干涉主義子

    2011년 12월 27일 당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첫 회의에서 이준석 비상대책위원이 회의가 시작되자 태블릿PC를 꺼내 검색을 하고 있다. [동아DB]

    2011年 12月 27日 當時 한나라당 非常對策委員會 첫 會議에서 李俊錫 非常對策委원이 會議가 始作되자 태블릿PC를 꺼내 檢索을 하고 있다. [東亞DB]

    國民의힘 全黨大會가 열리기 하루 前날인 6月 10日. 初여름 햇빛이 아스팔트 道路의 表面을 刺戟했다. 午前 9時 48分,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當時 候補)에게서 “1層 로비에 到着했다”는 電話가 걸려왔다. 그는 백팩을 멘채 홀로 동아일보 忠正路社屋에 나타났다.

    꾸밈없는 맨얼굴에서 疲勞가 묻어났으나 平穩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人間 李俊錫의 맨얼굴을 들여다볼 참이다. 그의 過去와 現在를 넘나들고, 내친김에 未來까지 달려나갈 것이다. 그의 生涯가 빚어낸 世界觀이 오늘날 韓國 社會의 어떤 欲求와 上昇 作用해 颱風으로 進化했는지 分析해 볼 作定이다. 野黨 代表 李俊錫을 理解하는 것은 어쩌면 時代의 斷面을 解剖하는 作業인지도 모른다.

    午前 첫 日程은 隨行祕書 없이 主로 혼자 다닌다고 했다. 이날은 自宅이 있는 서울 蘆原區 상계동에서 地下鐵을 갈아타고 왔다.

    “市內로 나오면 普通 4號線 타고 5號線이나 2號線으로 갈아타는 境遇가 많아요. 그런데 4號線 타는 어지간한 분들은 몇 年째 李俊錫을 봐서 別로 놀라지 않아요.(웃음)”

    그의 너스레에 함께 웃었다. 검정 세단 뒷座席에 앉아 書類綴을 뒤적이는 任員의 모습이 아니다. 더위에도 부지런히 外勤(外勤) 나온 課長의 모습이다. 그가 政界에 入門한 지 滿 10年이니, 企業이었다면 課長 職級에 있을 時期다. 서울市 公共 自轉車 ‘따릉이’도 그가 愛用하는 出·退勤 手段이다. 權威意識이나 距離感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當選 直後,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文在寅 大統領과 領袖會談을 할 때도 백팩을 멘채 地下鐵 타고 갈 것이냐는 ‘質問性’ 揭示物이 올라왔다. 흔한 ‘셀럽’의 自意識이 없다.

    그의 選擧 캠프에서 일한 公報 擔當者는 이런 말을 傳해줬다. 리더의 影響인지 參謀도 率直하다.

    “(李 代表와) 같이 다니면 맨날 길거리에서 김밥 사 먹죠. 選擧運動 스케줄이 끝나면 밤 10時가 넘으니 갈 때가 없잖아요. 그러면 便宜店 찾아서 김밥 사고 나온 뒤 벤치에서 먹어요. 어두운 데서 둘이서 먹으니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요.(웃음). (李 代表는) 같이 다니면 특별한 사람은 아니에요. 보통의 30代 中 조금 똑똑하고, 自己 哲學이 있는 사람이랄까. 새 人物은 아니잖아요. 變化에 對한 只今의 바람이 꼭 李俊錫이어야만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이 바람에 가장 符合했던 人物이 아닌가 싶어요.”

    李俊錫의 世界觀을 떠받치는 기둥은 不干涉이다. 自身은 ‘保守主義者’라기보다는 ‘不干涉主義者’라고 한다. 全體主義的 性向과는 相剋이다.

    “國家는 國民이 自由롭고, 또 競爭할 수 있는 環境을 마련해 주는 플랫폼이죠. 國家가 國民을 위해 動作하는 데 重點을 둬야지, 우리가 國家를 위해 뭘 해야 하느냐고 자꾸 묻는 것은 全體主義的 發想이죠.”

    이른바 ‘愛國保守’와 衝突이 잦았다. 민경욱 前 未來統合黨(現 國民의힘) 議員은 그를 두고 “左派諜者”라며 이죽거렸는데, 太極旗部隊의 情緖가 오롯이 담겨 있다. 只今은 그가 ‘愛國進步’라고 規定한 더불어民主黨과 586(50代·80年代 學番·60年代 出生) 政治人들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 陳重權 前 東洋代 敎授와도 尖銳한 論爭을 벌였다. 물어보니 “晉 前 敎授와 意思疏通하는 데 아무런 問題가 없다”고 한다. 晉 前 敎授가 自由主義者라는 理由에서다. 國民의힘 代表가 閔庚旭보다 陳重權에게 同質感을 느끼는 게 재밌다.

    그는 “누군가 찍어 누르려 하면 두들겨 부수고 싶다”고 했다. 表現의 水位가 높지만, 억지로 둥글둥글하게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 대목은 오프더 레코드(Off the Record)로 處理해 달라”는 말은 單 한 次例도 하지 않았다.

    “準스톤, 슈퍼루키 登場”

    그는 不干涉이 2030世代와 周波數가 通하는 코드라고 생각한다. 輿論調査機關 한길리서치가 쿠키뉴스 依賴로 6月 5~7日 全國 滿 18歲 以上 成人男女 1001名에게 ‘政治 性向’을 물은 結果, 進步層은 26.7%, 保守層은 26.3%로 나타났다. 18~29歲에서는 保守가 34.9%를 記錄해 進步(21.3%)를 壓倒했다. 다른 年齡帶와 比較해도 20代의 保守層 比率이 가장 높았다. 60代 以上의 保守層 比率은 30.8%였다.(해당 調査의 응답률은 5.2%, 標本誤差는 95% 信賴水準에 ±3.1%포인트다. 仔細한 內容은 中央選擧輿論調査審議委員會 홈페이지를 參照하면 된다.)

    “保守도 宏壯히 다양해요. 60代 以上의 傳統的 保守는 愛國保守에 가깝죠. 國家에 對한 苦悶이 많고, 國家가 잘되기 위해 個人이 犧牲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程度의 생각을 裝着하고 政策을 判斷하죠. 20~30代 젊은 保守는 그게 아니에요. 個人의 自由와 人權, 權利라는 걸 抛棄할 수 없는 世代거든요. 그래서 아마 거기(한길리서치 輿論調査)에 잡힌 젊은 保守와 60代 保守는 完全히 다른 생각을 하고 살 겁니다.”

    記者가 보기에 그는 또렷한 保守主義者다. 그는 “代案的 世界觀을 提示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고 했고 “社會制度나 文化의 變化는 期待하지 않던 部(否)效果를 낳게 돼 있다”고도 했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革命에 關한 省察’에서 變革이 秩序 破壞와 混亂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에 暫定的 解決策과 漸進的 變化를 志向해야 한다고 했다. 李俊錫의 保守는 버크의 正統 保守主義와 脈이 통한다.

    그런 그에게 中道는 理念이 아니다. 그는 社會現象이나 政治 懸案의 境遇 中間 地帶는 없다고 본다. 代身 支持層의 幅을 넓히기 위한 ‘擴張 戰略’을 펴야 하는데, 그것이 李俊錫式 中道다. 假令 “20代의 言語로 20代의 問題를 20代의 方式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各種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그는 ‘準스톤’으로 불린다. ‘스톤(stone)’, 卽 돌이라는 意味다. 漢文으로 바꾸면 ‘돌 席(石)’이다. 才致와 親近感이 두루 묻어난다. 會員 數가 84萬 名인 한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支持率이 繼續 上昇하자 “準스톤, 아무도 못 막는다. 슈퍼루키 登場”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2030 世代는, 이를테면 그를 게임의 캐릭터처럼 消費한다. ‘K를 생각한다’를 쓴 1994年生 임명묵 作家는 6月 6日 政治文化 플랫폼 하우스(How’s) 세미나에서 “國民의힘 黨代表 討論을 實時間으로 봤는데, 채팅窓이 재미있더라. 인터넷 게임 放送과 비슷했다”면서 “靑年들이 移入할 수 있는 ‘캐릭’으로 李俊錫을 消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깅할 때 洋服 입은 것과 비슷”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6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뉴스1]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가 6月 14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議員總會에서 國旗에 對한 敬禮를 하고 있다. [뉴스1]

    李俊錫은 젊은 報酬의 比率이 上昇한 理由로 “그들의 言語로 이야기했다”는 點을 꼽았다. 그러면서 論證과 論理 展開 方式, 話法을 包括하는 槪念이 그들의 言語라는 說明도 덧붙였다. 大學 敎材의 說明처럼 明快하나, 또 그만큼 抽象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李俊錫答紙 않은 심심한 答辯이다. 反應을 豫想했다는 듯 그가 添言을 달았다.

    “只今까지 政治權에서는 ‘젊은 世代를 理解하라’는 말을 (20代가 쓰는) 單語에 對한 理解 程度로 생각했어요. 流行語 하나가 뜨면 政治權에서 流行語 學習해서 쓰면서 ‘우리도 젊어졌다’ 이러고 있는데, 그게 아니죠. 가장 克明하게 드러난 것이 (4·7 再·補闕選擧에서) 朴映宣 민주당 候補와 吳世勳 서울市長의 TV討論이었는데, 제가 그걸 執拗하게 파고들었죠. AI(人工知能)니 4次 産業革命이니, 渗透壓이니 이런 單語 하나만 쓰면 自己가 마치 대단해 보이는 듯 錯覺 속에 빠져 있는 政治人들을 젊은 사람들은 嘲弄하고 있던 거예요. 便宜店 가서 無人 便宜店 (運營 提案을) 얘기하는 모습 自體를 輕蔑했던 거예요. 왜냐면 웃기거든요.”

    記者는 1986年生이다. 2月生이라 初等學校를 7살에 入學해서 그와 같은 時期에 初·中·高校를 다녔다. 그런데 20代의 感受性과 關心事를 잘 모른다. 으레 ‘2030’으로 퉁値지만, 1980年代生과 1990年代生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文化的 隔差가 있다. K팝에 빗대자면 H.O.T 世代와 빅뱅 世代가 다르고, 이 둘과 BTS 世代는 또 다르다. H.O.T 世代인 그가 BTS 世代를 理解하는 方式이 나름대로 있을 것이다. 혹 온라인 커뮤니티에 熱心히 接續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럴 必要가 없단다.

    “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이것 좀 읽어달라’는 메시지가 넘쳐나요. 저랑 河泰慶 議員이 2~3年 前부터 젊은 사람들 이슈를 챙기기 始作하면서 저희는 인터넷을 할 必要가 없어요. 이슈가 될 만한 重要한 事案이면 自動으로 쏟아져요. 제가 커뮤니티 사이트를 다 모니터링할 수는 없거든요. 그들이 重要하다고 생각하는 걸 모아서 보내주는 게 고맙죠.”

    ‘準스톤’의 속살이 궁금해 일부러 事前 質問地圖 안 보냈다. 學習된 맞춤型 答辯만 듣기 위해 그를 만나자고 한 게 아니다. 그런데 어떤 質問을 해도 막힘이 없다. 單語를 고르는 데 時間을 虛費하지 않는다. 머릿속 데이터베이스(DB)에서 하나씩 答辯을 꺼내놓는 듯한 印象마저 든다. 이런 재주는 타고나는 것 같은데, 本人은 努力한 結果라고 생각한다. 努力과 競爭, 自己啓發을 强調하는 사람이니 ‘타고났다’는 말은 自己否定이 될 테다.

    位階秩序 面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保守政黨에서 그는 趙子龍처럼 槍을 휘둘렀다. 말끝은 날이 갈수록 뾰족해졌다. 10年間 여러 戰場(戰場)을 거쳐 老鍊한 戰士로 成長했다.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階級章 떼고 외치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50代·서울大·判檢事·官僚’가 主流인 組織에서 30代 留學派 工學徒가 階級章을 뗐으니 오죽했을까 싶다.

    “싸가지 없다”는 말에 쉽사리 窓을 내려놓는다면 趙子龍이 아니다. 窓을 내려놓는 瞬間 自己 色깔이 사라지고 靈魂마저 죽는다는 걸 몸으로 알기 때문이다.
    “討論 나가면 ‘젊은 사람이면 젊은 사람답게 해라’ 이런 이야기를 宏壯히 많이 듣거든요. ‘젊은 사람이면 깍듯이 禮儀를 갖추라’ 이러는데, 저는 아직까지 그렇게 放送을 많이 했음에도 不拘하고 깍듯하게 禮儀를 갖추면서 論理를 展開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건 조깅할 때 洋服 입은 것과 비슷한 거죠. 禮儀바른 게 아니라 그러면 ‘또라이’ 取扱當해요. 論爭的이면서도 禮儀 바른 사람들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大衆이 모르잖아요.”

    李俊錫은 ‘靑年’이라는 單語도 階級章이라고 본다. 靑年이기 때문에 槍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靑年이라는 理由로 남보다 두꺼운 防牌가 주어지는 것도 싫다. 靑年은 政治 行步를 構造的으로 制約하는 單語라고 그는 생각한다.

    “靑年이 카르텔化하는 瞬間 끝나요. 少數者(正體性)에 더해 閉鎖的 集團으로 突變할 수밖에 없거든요. 저는 그래서 靑年 내세워 政治하는 사람들 싫습니다. 제가 그랬을 거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가 只今까지 靑年 特惠를 하나도 안 받았어요. (國會議員) 公薦받을 때도 故鄕 險地 突破했지, 언제 제가 좋은 데 달라고 했습니까. (靑年) 比例 준다고 했을 때 받겠다고 했습니까. 結局 競爭力이고, 階級章 떼고 붙는 姿勢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朴 大統領에게 感謝하나 彈劾은 正當”

    適正線에서 休戰하자는 생각이 애當初 이 사람에게는 없다. 相對가 누구건 執拗하고 毒하게 물고 늘어진다. 타고난 싸움꾼이다. 李在明 京畿知事가 城南市長 時節 단박에 全國區 스타로 떠오른 모습과 妙하게 닮았다. 그는 論爭을 避하는 瞬間 卑怯者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選擧 캠프에서 일한 公報 擔當者에게 물으니 平素에도 “卑怯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고 한다. 一旦 論爭을 만들어낼 줄 안다. 이것은 고구마 같은 言語에 지친 大衆에게 巨大한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輿論調査에서 1等을 한 뒤부터 周邊에서 電話와 文字가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이제 네가 有利한 高地에 갔으니 살살 하고 깍듯이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요. 羅卿瑗 候補가 選擧 막판으로 갈수록 저한테 막말 프레임을 씌우려 했거든요? 거기서 ‘先輩님 새겨듣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막말 프레임을 認定하는 꼴이 돼요. 꼭 싸워야 할 땐 싸워야 하는데 保守政黨은 그게 卑怯한 거예요. 그러니까 (相對 政黨이) 그런 式의 프레임, 이미지 씌우기를 하죠. 그 狀況에서 政務 感覺이라는 건 意圖를 明確히 把握하는 거지, 謙遜한 모습을 보이고 착한 척하는 게 아니에요. 慣性에 따라 아저씨들 하는 얘기를 다 들어주는 게 政務 感覺은 아니라는 거죠.”

    그는 復棋(復棋)하기보다 내지르고 보는 사람이다. 競爭 候補들은 그의 性格을 ‘不安定’으로 規定하며 攻掠했으나, 그럴수록 그의 差別性만 浮刻됐다. 최진 大統領리더십硏究院 院長은 “大衆은 次期 指導者로 現職 大統領과 다른 사람을 願하게 된다”면서 “李 代表가 차분하고 얌전하고 用意周到했다면 絶對로 뜰 수 없다. 左衝右突하고 튀는 性格이기 때문에 빠르고 시원시원한 指導者를 願하는 時代精神에 符合했다”고 말했다.

    그가 5月 20日 全黨大會 出馬 宣言을 하며 내건 일성은 “單刀直入的으로 말하겠다. 黨代表가 되고 싶다”였다. 卽刻的이고 率直하다. ‘戰略的 模糊性’이라는 名分下에 속내를 감추는 게 美德으로 評價받는 政治 文法과 다르다. 敏感한 事案에는 한발 비켜난 채, 듣기에 거북하지 않고 말하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메시지만 내놓는 ‘禪問答 政治’의 모습도 아니다.

    그러니 그에게서는 남이 끌어주지 않고 自己 實力으로 只今의 자리에 왔다는 自信感이 차고 넘친다. 그는 5月 21日 페이스북에 “내 拔擢에 있어서 朴槿惠 大統領에게 感謝한다. 그런데 彈劾은 正當하다”고 썼다. 6月 3日 ‘保守의 牙城’ 大邱에서 열린 國民의힘 大邱·慶北 合同演說會에서도 “박근혜 大統領이 저를 迎入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도 “統治 不能의 事態에 빠졌기 때문에 彈劾은 正當했다”고 말했다. 빚진 게 없고 손 벌린 게 없다고 생각하니 堂堂함을 숨길 理由도 없다.

    眞情性을 ‘表現하는 政治學’

    “저는 (새누리당 非常對策委원이 되기) 前부터 社會活動을 많이 했고요. 제가 만든 團體가 大韓民國 最大 規模의 敎育奉仕 團體였기 때문에 그 成果를 인정받아 非對委員에 간 겁니다. 그게 어떻게 特惠일 수가 있겠어요. 特惠이려면 제가 朴槿惠 大統領의 親戚이라도 된다든지 해서 迎入됐어야 하는 것이죠. 그걸 認定하기 싫은 사람들이 유승민 議員이 저를 推薦했다고 그러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朴槿惠 大統領이 제가 運營하는 敎育奉仕團體에 와서 直接 저를 픽업(pick-up)韓 것이고, 그건 제 成果에 對한 認定입니다.”

    李俊錫式 커뮤니케이션 方式이 呼應받는 理由에 對해 안병진 慶熙大 未來文明원 敎授는 “旣成政治에 對한 反作用”이라고 診斷했다. 直答을 避하고 슬쩍 찔러만 보는 ‘肝 보기 政治’에 對한 大衆의 反撥인 셈이다. 이것은 安 敎授가 보기에 眞情性을 ‘表現하는’ 政治學이다. 安 敎授는 進步 性向 政治學者로, 2012年 總選 때 民主統合黨(現 民主黨) 中央選擧對策委員會 인터넷疏通委員長으로 일했다.

    “旣得權 政治의 典型的인 모습은 지나치게 計算하고 談合하고 말 바꾸는 거잖아요. 이와 달리 李俊錫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툭툭 내뱉으니까 市民들에게 新鮮함을 주는 거죠. 旣存 政治 文法과 다른 겁니다. ‘眞情性’이라는 單語에 對해 進步的인 사람들이 자꾸 誤解하던데, 제가 李俊錫이 眞情性이 있어서 멋있다고 한 게 아니거든요. 例를 들면 트럼프(前 美國 大統領)가 計算을 안 하고 速射砲로 마구 내뱉잖아요. 그게 사람들에게 사이다를 주는 거죠. 그런 뜻입니다.”

    李俊錫과 비슷한 年輩의 政治權 人士들이 보는 視角도 大同小異하다. 國民의힘 所屬 백경훈(37) 靑寫眞 共同代表는 “旣成 政治人들은 모두 包容하고 統合하겠다는 式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두루뭉술한 話法을 쓰는데 이 代表는 直說話法을 쓰니 젊은 層의 呼應이 크다”고 말했다.

    努力이건 幸運이건, 어쨌든 그는 없는 길을 만들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길을 開拓하는 데는 討論이 要緊한 道具로 쓰였다. 그는 平素 ‘討論 배틀’이라는 表現을 많이 쓰는데, 强豪의 高手들과 日合(一合)을 겨루며 成長했다는 自負心이 엿보인다. 하버드대에서 글쓰기를 통해 論證하는 法을 體得했고, 이것이 討論의 滋養分이 됐다고 했다. 政治權에 와서는 故(故) 노회찬 前 精義堂 議員, 金富謙 國務總理 같은 巨物들과 實戰 大連(對鍊)했다. 出演한 放送 討論을 모니터링하면서 어떤 形態의 論客으로 進化할지 苦悶했다고 한다.

    特히 盧會燦式 討論法을 借用하는 데 애썼다. 같은 地域區(怒怨丙)에서 活動한 點 말고는 두 사람 間 共通點이 없는데, 그에게는 盧會燦에 對한 愛情이 제법 깊어 보였다. 그는 陳重權을 極度의 論理型 論客, 盧會燦을 共感型 論客이라고 分類했다. 길게 말하지 않으면서 論旨를 展開하려면 比喩가 最適의 武器다. 盧會燦은 比喩로 當代 討論판을 平定했다. 그가 왜 盧會燦을 典範(典範)으로 삼았는지는 理解할 만하나, 率直히 말하면 아직은 陳重權型에 가까워 보인다. 빈틈이 없지만 저잣거리의 구수함이 不足하다. 그가 盧會燦의 長點까지 吸收하면 첫 손가락에 꼽힐 煽動家가 誕生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比喩와 返禮가 주된 討論 스킬”이라고 했다. 6月 2日 朱豪英 國民의힘 議員은 라디오 인터뷰에 나와 “(李 代表의) 아버지와 (劉承旼 前 議員이) 親舊인 특별한 親分이 있는 狀況에서 공정한 大選 官吏가 되겠나”라고 말했다. 李俊錫의 父親과 兪 前 議員은 高校와 大學 動機다. 記者가 ‘아빠 찬스’ 프레임을 話題로 올리자 特有의 泮隷(counter example) 論法이 登場한다.

    “아버지가 경북고, 서울대 經濟學科 出身이기 때문에 민주당에 가도 엮일 분들이 있어요. 當場 金富謙 總理와 엮일 겁니다. 굳이 따지면 柳時敏(사람사는세상 盧武鉉財團 理事長) 氏도 경북고 出身은 아니지만 大邱 出身에 서울대 經濟學科를 나왔으니 아버지 1年 後輩거든요. 엮으려면 無窮無盡합니다.”

    直說的이고 自由奔放하며 挑發的인

    李俊錫은 當代의 水災가 모인 서울과학고를 早期 卒業했다. 暫時 카이스트(韓國科學技術院·KAIST)에 다니다가 하버드대 入學 許可를 받고 美國으로 건너갔다. 애初 카이스트와 하버드대에 同時 支援을 했는데, 3月에 學期가 始作하는 카이스트가 먼저 合格 通知를 보내와서 2~3週 程度 다녔다. 하버드대에서는 經濟學科 컴퓨터科學을 複數專攻했다.

    學窓 時節부터 政治人의 싹이 보였다. 高校 2學年 때 學生會 副會長을 했다. 大部分 早期 卒業하는 과학고의 特性上, 2學年 副會長이 實質的으로 學生會를 總括했다. 하버드대에서는 韓國人留學生會 會長을 맡았다. 5名 中에서 뽑혔다며 겸연쩍어했지만, 願하지 않는데 周邊에서 採根해 어쩔 수 없이 나섰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組織에서 存在感을 드러낸 사람이다. 등 떠밀려 先鋒에 선 적이 없다. 오랫동안 熟成돼 알을 깨고 나온 타고난 政治人이다.

    歸國 後에는 課外 奉仕團體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과 소프트웨어 開發 벤처企業 ‘클라세 스튜디오’를 運營했다. 그러다 26歲 때인 2011年 朴槿惠 前 大統領에 依해 새누리당 非常對策委員으로 拔擢돼 政界에 入門했다. 그 뒤에는 미디어를 통해 存在感을 限껏 키웠다. 政治 懸案이 있을 때마다 言論은 그에게 意見을 물었다. 放送에서 그의 모습은 ‘물 만난 고기’였다. 세 次例 總選에서 落選한 게 人生에서 唯一한 失敗 經驗이 아닐까 싶을 程度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그의 삶에 對해 이런 式으로 斟酌할 테다. ‘裕福한 環境에서 온갖 私敎育을 다 받으며 컸을 테고, 父母의 徹底한 管理下에 ‘工夫 機械’로 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뻔한 시나리오로는 그에게 엿보이는 直說的이고 自由奔放하며, 挑發的이기까지 한 言行을 解釋할 道理가 없다. 野心家라는 點은 분명하나, 茶筅 議員을 目標하는 삶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이 단단히 뿌리박혀 있다. 단단함의 根源이 궁금하다.

    解答의 실마리는 成長期에 對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父親은 베이비부머 世代(1955~1963年生)다. 1955年부터 1963年 사이에 韓國에는 902萬 名이 태어났다. 이들은 大學 卒業 뒤 곧장 職場에 들어가고, 서른이 되기 前 結婚해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누구나 4人 核家族을 꾸렸다. 보통의 베이비부머는 이렇게 살았다. 政府는 분당·一山·평촌 等을 비롯해 首都圈 一帶에 新都市를 建設하면서 住宅 普及을 늘렸다. 熱心히 살면 20坪臺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는 時代였다. 上溪洞에도 1990年代 들어 상계住公아파트를 비롯한 아파트 開發로 인해 人口가 急增했다. 李俊錫에게는 中産層 都市勞動者의 子息이라는 正體性이 또렷하게 刻印돼 있다.

    “제가 上溪洞 出身인 理由는 簡單해요. 아버지 就業하시고, 어머니는 敎師 하시다가 結婚하셨어요. 當時 아버지 職場이 待遇上司였고, 서울驛 대우빌딩에서 勤務하셨어요. 서울驛에 地下鐵 4號線이 갓 開通했을 때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出·退勤할 수 있는 데 中 가장 싼 데가 어디냐가 基準이죠. 當時에는 4號線 당고개驛도 없었어요. 상계역이 4號線 終點이었거든요. 서울驛 待遇商社에 勤務하게 된, 上京(上京)韓 20代 젊은 사람이 定着할 수 있는 곳은 當時 막 開發되던 상계 新都市 程度죠.”

    “두루뭉술하게 少數者 위한다? 詐欺!”

    2006년 7월 26일 하버드대 학생들이 서울 신당동 유락사회종합복지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이 당시 21세이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다. [동아DB]

    2006年 7月 26日 하버드대 學生들이 서울 신당동 遊樂社會綜合福祉館에서 自願奉仕를 하고 있다. 앉아 있는 사람이 當時 21歲이던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다. [東亞DB]

    이참에 그의 成長 背景에 對해 集中的으로 質問했다.

    - 經濟 資本이 아니라, 學歷 資本을 통해 階層 上昇을 이룬 셈이네요.

    “할아버지도 저는 몇 級인지도 正確히 모르는 稅務署 末端 公務員으로 사셨어요. 아버지가 都市勞動者로서 첫 삶을 始作한 上溪洞이라는 게 제 正體性의 大部分을 차지하죠. 그래서 제가 상계동에서 國會議員 選擧에 나오고 있는 겁니다.”

    - 父母로부터 배운 價値는 무엇입니까. 勤勉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는 經濟觀念이라고도 하죠. 李 代表 父親은 證券界에서 일하셨으니 經濟觀念을 强調하셨을 것 같은 느낌인데요.

    “아니요. 家庭敎育이 經濟로 構成되는 境遇는 거의 없을 거고…. 아버지와 큰아버지 두 분 다 金融 쪽에 계셔서 저는 오히려 그게 너무 마음에 안 들었어요.”

    - 왜요?

    “金融은 제가 그 當時에 봤을 때는 흥미롭지 않은 分野였죠. 저는 工學을 專攻하겠다고 해서 科學高 가고 컴퓨터를 專攻하게 됐죠.”

    - 特異하네요. 집안에는 工學 쪽 背景의 분이 없는데요.

    “只今도 집값 별로 오르지 않은 상계5洞 한신아파트 3次에 살았거든요. 한신아파트 3次 앞에 있는 唯一한 私敎育 機關이 當時 갓 생겨나기 始作한 컴퓨터學院이었어요. 저는 上溪洞 살면서 跆拳道場 가고 컴퓨터學院만 다녔어요. 제 記憶에 10살 때인가, 9살 때인가…. 프로그래밍 資格證이라는 게 있었어요. 프로그래밍 3級인지 4級인지를 땄어요. 그때 그냥 그런 데(컴퓨터) 興味가 많이 생겼죠.”

    回顧談이 드라마틱하긴 한데, 뜯어보면 結局 成功 敍事다. 서울 邊두리에 터전을 꾸린 中産層 家庭에서 하버드까지 내달렸다는 뜻으로 들린다. 많은 靑年이 롤 모델로 삼을 人生이기는 하나 ‘2%’ 不足하다. 우리는 只今 事業家가 아닌 野黨 代表 李俊錫을 만나고 있다. ‘懸賞’이라는 낱말이 붙는 政治人치고는 사람 냄새가 덜 난다. 新派調(新派調)는 陳腐하나, 政治人의 삶에 너무 눈물 자국이 없어도 困難하다. 멋진 삶이지만 가슴에 확 와닿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逸話가 있을 법한데, 記者가 끌어내지 못하는 걸까.

    或是나 하는 마음에 “疏外나 差別 같은 問題에 敏感해 본 적은 없느냐” 물었다. 그러니 “두루뭉술하게 少數者를 위하겠다거나, 差別을 없애겠다는 것은 政治人들이 有權者에게 詐欺 치는 것”이라고 答한다. ‘亦是 乾燥한 사람이구나’ 싶어 다른 質問으로 넘어가려던 刹那, 그가 생뚱맞게 ‘障礙人 移動權’을 話題로 꺼냈다. 들어보니 물氣가 어린 事緣이 있다.

    “問題 解決을 하려면 사람은 무언가에 꽂혀야 해요. 2003年부터 하버드를 다녔는데 한 해 위 先輩 中 공승규 兄님이 있어요. 이분이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그 휠체어를 제가 하버드 다니면서 3年 동안 끌었어요. 美國에는 當時에도 모든 버스에 障礙人이 탈 수 있는 리프트가 있고, 모든 建物에 傾斜路와 엘리베이터가 設置돼 있었어요. 1800年代에 지은 하버드 寄宿舍도 엘리베이터와 傾斜路 工事를 했죠. 兄과 放學 때 韓國에 와서 無限한 不便함을 느꼈어요. 技士도 꺼리고 乘客도 바빠 죽겠는데, 障礙人이 搭乘하기 위해 버스를 세우고 리프트 내리는 걸 宏壯히 싫어했어요. 제가 가끔 인터뷰마다 뜬금없이 障礙人 移動權을 確保하기 위해 建築 規定을 强化하자든지 等의 主張을 하는데, 眞짜 제가 꽂힌 거예요.”

    “몇百 원 더 벌려고 信號 지키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운데)가 6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李俊錫 國民의힘 代表(가운데)가 6月 14日 서울 汝矣島 國會에서 열린 最高委員會議에서 모두發言을 하고 있다. [뉴스1]

    택시 運轉 經驗도 그에게 强烈한 記憶으로 남은 듯하다. 그는 2019年 2~3月 서울 蘆原區 所在 한 運輸業體에 택시技士로 就職해 正式으로 勤務했다. 週 6日, 하루 12時間씩 일했다. 말이 쉽지, 自信感 넘치는 政治人이 挑戰하기에는 碌碌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討論 本能’은 어떻게 참았을까 싶다. 듣고 있는 記者도 짧은 歎息이 나올 만큼 고약한 經驗도 있다.

    “새벽 2時에 어떤 분을 태웠어요. 食堂에서 일하는 女性분이었는데, 일 끝나고 집에 돌아가시는 길이었어요. 노원역에서 창동驛 쪽으로 가는데 信號燈이 몇 個 있어요. 제가 信號燈에 칼같이 서니까 뒤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요즘 같은 世上에도 몇百 원 더 벌어보려고 信號 다 지키면서 가는 사람이 있네.’ 그때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두 가지였거든요. 첫째, 宏壯한 侮辱感을 느꼈죠. 둘째, 나도 信號燈을 無視하고 가야 하는 것인가…. 그게 택시 技士를 對하는 大韓民國 大衆의 水準이에요. 이용구 前 法務部 次官처럼 택시 技士 목 조르는 사람도 있겠죠. 이용구라는 사람도 法務部 次官 할 때는 그런 모습 보이겠어요? 택시 技士는 自己가 下臺해도 되고, 속된 말로 조져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어요?”

    記憶은 사람의 世界觀에 依해 編輯되는 것이다. 그는 先輩의 휠체어를 끌 때 느낀 버스 乘客들의 不便한 視線을 記憶한다. 택시 運轉席에서 받은 侮辱을 腦裏에 새겨 넣었다. ‘民衆의 뜻에 따르겠다’거나 ‘國民이 옳다’ 같은 앞선 世代 政治人들의 自意識이 이 사람에게는 없다. 그는 사람의 善意(善意)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政治家는 善意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 行動의 8割 以上은 善하지도 않고 合理的이지도 않은 判斷에 따라 이뤄진다고 봐야죠. 어쩌면 가장 不幸한 건 投票가 그 領域에 놓인다는 點일 수도 있어요.”

    그와 對話하다 보면 이따금 테크노크라트(技術官僚)의 모습이 비친다. 地域 行事場에 날마다 얼굴 비치는 政治人보다는 政策 立案과 豫算 編成 等을 擔當하는 實務 官僚가 어울려 보인다. 그러잖아도 어릴 적 테크노크라트의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단다. 하버드대 入學 에세이에도 엔지니어 觀點을 가진 사람들이 政策 決定에 參與해야 한다는 內容을 썼다. 大衆 政治人은 애當初 人生 設計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政治權에 安着하는 데 ‘하버드 卒業張’의 影響이 없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韓國에서 社會的 層位를 가르는 잣대는 敎育이다. 敎育은 利害關係가 다른 다양한 集團 間의 角逐場이다. 敎育 成就는 個人的 努力의 結果다. 이와 同時에 成就를 이뤄낼 環境을 提供할 父母의 存在도 큰 變數다. 努力과 環境, 무엇의 比重이 높은지는 計量的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날선 칼로 베어낸 듯 또렷한 斷面이 드러나는 問題가 아니다.

    注目할 만한 硏究는 있다. 社會福祉學者 신명호는 高學歷 中産層과 低學歷 勞動者層을 深層 인터뷰한 뒤 學業 成績과 養育 慣行의 關係를 硏究했다. 그렇게 나온 冊 題目이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工夫를 더 잘하나?’다. 冊에는 네 가지 類型이 나온다.

    첫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工夫하는 類型이다. 타고난 競爭心에 依해 勝負 根性이 剛한 性向이다. 둘째, 父母의 要求와 期待에 副應하기 위해 工夫하는 類型이다. 셋째, 父母의 壓迫이 子女의 意志와 態度를 全혀 바꾸지 못하고 외려 反撥을 誘發하는 境遇다. 넷째, 工夫와 距離가 먼 瘠薄한 家庭環境에서 자라 일찍부터 工夫에 對한 興味와 關心을 喪失한 境遇다.

    하버드 卒業張

    신명호의 硏究에서 低學歷 勞動者 및 低所得層 中 名門大에 들어간 事例는 一貫되게 첫째 類型에 屬했다. 父母라는 變數 없이 個人의 努力에 焦點이 맞춰진 類型이다. 나머지 세 類型은 父母의 社會經濟的 基盤에 依해 運動場이 기울어져 있다는 點을 暗示한다. 이 대목에서 保守와 進步의 色이 갈린다. 李俊錫은 첫째 類型에 注目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自身의 冊 ‘公正한 競爭’에서 이렇게 말했다.

    “中學生에 不過한 아이들 700名이 等數를 두고 다투었어요. 좀 殘忍한 側面도 있지만 저는 그 時節의 工夫가 내 人生의 重要한 轉換點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只今 생각하면 完璧하게 公正한 競爭이었고요.”

    이탄희 民主黨 議員이 6月 7日 自身의 페이스북에 反駁 글을 올렸다. 要旨(要旨)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完璧하게 公正한 競爭이었다? 나는 한 番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나에겐 수많은 親舊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큼 父母 잘 만나지 못한 親舊들, 나만큼 健康하지 않았던 親舊들, 나만큼 工夫 잘하게 訓鍊받지 못한 親舊들, 나만큼 自己 일에 集中할 수 없었던 親舊들, 나만큼 施行錯誤를 堪當할 餘裕가 없었던 親舊들, 나만큼 周邊의 도움을 받지 못한 親舊들, 危機를 딛고 다시 일어날 機會가 없었던 親舊들, 나만큼 幸運이 따르지 않았던 親舊들이 내 周邊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李洛淵 前 民主黨 代表는 6月 11日 聯合뉴스 인터뷰에서 “(李 代表가) 能力主義의 信奉者이기 때문에 相當히 論爭的 狀況이 벌어질 것”이라면서 “민주당은 旣存의 包容主義를 抛棄할 수 없다. 能力主義와 包容注意가 한바탕 論爭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能力主義의 槪念이 어떠하며, 무엇이 問題인지에 對해서는 別말이 없다.

    이탄희의 글은 ‘政治的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그뿐이다. 李洛淵의 말은 고구마처럼 답답하고, 또 模糊하다. 무엇보다 민주당은 ‘曺國 事態’의 職·間接的 當事者다. 曺國 前 法務部 長官의 딸은 入試 過程에서 虛僞 인턴 確認書 發給, 高校 時節 醫學 論文 第1著者 登載 等의 疑惑으로 論難이 됐다.

    卽 能力主義 談論의 擴散은 文在寅 政府 4年에 對한 反(反)作用이다. 政治는 옳고 그름 以前에 情緖의 領域에 있다. 李俊錫은 “來年 地方自治團體選擧부터 ‘公職候補者 資格試驗’을 導入하겠다”고 公言했다. 이 대목에서 大衆은 副作用 可能性을 따지기보다, 旣得權 秩序에 對한 挑發이라는 데서 痛快함을 맛본다. 나이와 影響力, ‘알짜’ 地域區를 燃料 삼아 소영주(小領主)처럼 行世하는 旣成 政黨 秩序에 비토權을 行使하는 셈이다. 民主黨에 愛情을 갖고 批判하는 안병진 敎授도 이 대목을 꼬집었다.

    “마이클 센델이 ‘공정하다는 錯覺’에서 이야기한 內容이나 저의 생각이나 비슷해요. 能力主義가 기울어진 運動場에서 不平等을 擴散시킨다는 게 進步主義者들의 基本 立場이죠. 저 亦是 本質的으로는 李俊錫에 對해 批判的 立場은 갖고 있죠. 다만 그렇다면 旣存 韓國 社會가 能力主義만으로 運營됐느냐 反問할 수 있죠. 오히려 能力主義보다는 더 後進的이고 前近代的인 行態가 있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게 部族主義죠. 特히 ‘曺國 事態’ 같은 게 ‘李俊錫 突風’을 불러온 거죠. 예컨대 트럼프 現象은 宏壯히 안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旣存 美國 리버럴 勢力이 오히려 旣得權을 鞏固히 하는 모습을 보이니 市民들이 워싱턴을 한番 흔들어보자고 해서 나타난 일이잖아요. (‘李俊錫 突風’은) 그것과 비슷한 側面이 있죠.”

    그러니 李俊錫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 競爭이 가져올 弊害도 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敗者에 對해 어떤 接近法을 取해야 하느냐”고 물어도 “나누자는 論理를 만들기보다는 成長을 통해 機會를 늘려야 한다”는 答이 돌아온다. 또 “뒤처진 사람들을 競爭의 出發線에 다시 세워야 한다”고도 했다. 競爭에 對한 이 사람의 確信은 날것 그대로다.

    “700名 줄 세웠을 때 不滿 크게 없다”

    李俊錫에게서 이해찬 前 民主黨 代表의 이름이 나온 것은 이 대목에서다. 1998年 10月 19日 李海瓚 當時 敎育部 長官은 “2002學年度 大學入試부터 特技·才能·特別活動 等으로 뽑는 無試驗銓衡이 大幅 擴大될 것”이라고 發表했다. 點數 爲主의 大入銓衡이 創意力을 떨어뜨리니 修能 比重을 낮추고 學校生活記錄簿, 論述考査 等 다른 資料를 反映해 特技와 適性을 涵養하겠다는 趣旨였다. 時期上 李俊錫이 中學校를 다닐 때다. 2002學年度 大學修學能力試驗을 보게 될 當時 中3(1983年生)은 ‘이해찬 世代’로 불렸다. 1984·1985年生은 ‘李海瓚 2世代’와 ‘李海瓚 3世代’로 分類됐다. 李俊錫은 ‘李海瓚 3世代’다.

    “‘工夫 안 해도 돼’라는 ‘李海瓚注意’의 結果物이 뭡니까. 그때 工夫 안 했던 사람들이 只今 成功했나요? 그건 無責任한 發言이죠,”

    그는 進步 敎育의 빈틈을 指摘하면서 ‘代案 不在論’을 言及했다. 診斷만 提示하니 國民에게 訴求力이 없다는 얘기다. 인터뷰 當時에는 ‘代案이 없으니 次惡을 擇하자’는 意味로 理解했는데, 헤어지고 錄取를 整理하다 보니 ‘닥치고 競爭이 最善’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後者라면 그는 純度 100%의 競爭主義者다.

    “‘完璧하게 公正한 競爭’이라는 건 딱히 異議를 提起할 수 없을 程度의 룰(rule)이라는 이야기예요. 例를 들어 700名을 學校 成績으로 줄 세웠을 때 不滿은 크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競爭主義에 對해 指摘하는 분들이 果然 그러면 어떤 代案을 갖고 있느냐. 單 한 名도 제대로 된 代案을 提示하지 못했습니다. 公正의 價値를 抛棄하고라도 多樣性을 追求하기 위해 뭘 어떻게 하겠다는 具體的인 액션 플랜이 없어요. 普通 代案으로 나오는 게 淫書(蔭敍)로 歸結되는 政策이거나, 말 그대로 主觀的 評價에 依存하는 方法이죠.”

    - 20代 사이에 ‘公正한 競爭’ 談論이 內在하는데, 이 代表가 끌어낸 것이라고 보나요.

    “저희 윗世代는 就業에 對한 苦悶이 없었기 때문에 年俸 얼마짜리 企業에 就業하느냐 이것에 對한 競爭을 했어요. 只今은 (就業을) 하느냐 마느냐의 問題거든요. 그러니 젊은 世代는 競爭에 對해 더 많이 생각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自己 나름의 잣대도 세우고 있는 거예요. 모두 就業이 된 狀態에서는 非正規職을 正規職化해도 배가 아프기야 하겠지만 내가 나빠지는 件 없거든요. 그런데 仁川國際空港 事態 때부터 봤겠지만, 非正規職 空港 勞動者들이 正規職으로 올라가면 내가 支援하려는 公採 人員이 줄어드는 건 自明한 거예요.”

    - 上層 正規職의 讓步 없이 靑年 일자리가 劃期的으로 늘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큰 걱정이에요. 文在寅 政府가 파이를 키우는 데 全혀 投資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눠 먹기에 依存해야 해요. 人口 減少로 競爭이 줄어들 거라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千萬에요. AI(人工知能)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드는 速度가 더 빠를 겁니다. 競爭은 갈수록 深化할 것이고, 競爭의 잣대를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큰 社會的 葛藤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 割當制에 反對하는 理由는 公正한 競爭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까.

    “長官도 30%를 (女性에게) 割當했는데 長官감이 안 되는 사람이 많이 들어갔고요. 國會議員은 몇十 年째 比例代表 50% 女性 割當制를 하고 있어요. 比例代表 女性 議員이 다음에 地域區 進出하고 繼續 政治하는 境遇는 드물어요. 持續 可能하지 않은, 그냥 數値로 생색내기 爲한 制度가 많다는 생각을 하죠.”

    리허설 없는 大選 게임

    黨內에도 그의 ‘急進的 생각’에 異見(異見)이 있다. 國民의힘 所屬 백경훈 靑寫眞 共同代表의 말이다.

    “國民의힘은 旣成 政治人에게 기울어진 運動場이었는데, 李俊錫 代表 體制에서는 (나이에 相關없이) 공정하게 機會가 열릴 것이라는 期待가 있어요. 다만 各論으로 들어가면 이 代表가 가진 公正한 競爭이나 能力主義, 割當制에 對한 생각 안에 論爭거리가 많습니다. 政治的 스탠스로 보면 餘他의 黨代表 候補들과 큰 差異點을 發見하기는 어렵습니다.”

    30代 野黨 黨首의 登場이 來年 3月 大選에 미칠 波長은 焦眉의 關心事다. ‘李俊錫 突風’을 통해 變化를 바라는 輿論의 흐름이 確認된 만큼 李在明 京畿知事와 尹錫悅 前 檢察總長 간 兩强 構圖로 짜인 大權 地形圖 요동칠 可能性이 있다. 金炳玟 경희대 行政學科 客員敎授(前 國民의힘 非常對策委員)는 “政黨史(史)에서 찾기 어려울 程度의 異例的 現象이 나타났기 때문에 旣存 大選 構圖가 다 무너질 수 있다”면서 “(李 代表처럼) 自己 言語와 自己 생각으로 大選판을 휘저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짧은 時間 안에 大權 構圖의 틀이 바뀔 것”이라고 밝혔다.

    大選 局面에서 揮發性이 큰 政治 懸案은 세 덩어리로 要約된다. ① 國民의힘과 國民의黨 間 合當 ② 尹錫悅 前 總長의 國民의힘 入黨 ③ 김종인 前 非常對策委員長의 復歸. 一旦 이 代表가 6月 12日 서울 蘆原區 상계동의 한 카페에서 安哲秀 國民의黨 代表와 만난 事實이 確認됐다. 이튿날에는 그가 尹 前 總長과 文字메시지를 주고받은 事實이 알려졌다.

    問題는 ③이다. 그는 黨代表가 되면 金 前 委員長을 大選 選擧對策委員長으로 迎入하겠다고 여러 次例 强調한 바 있다. 그런데 金 前 委員長과 安 代表 사이의 關係는 껄끄럽다. 또 金 前 委員長은 最近 尹 前 總長과 距離를 두는 모습도 보였다. 따라서 그의 政治的 試驗臺는 金鍾仁이라는 大選 局面의 ‘키맨’과 大權走者 사이의 關係를 어떻게 調律하느냐에 달려 있다. 懸案에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그가 이 問題에는 愼重히 接近하는 게 興味롭다.

    “그분(金 前 委員長)李 가진 메시지 能力이나 政策 能力은 어느 黨이든 貪을 내고 싶어 할 테고요. (그래서) 朴槿惠·文在寅 두 政權 創出에 役割을 했고, 이番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제가 選對委員長 얘기했던 理由는요. 委囑할 수 있는 다른 자리가 없어요. (金 前 委員長이) 選對委員長을 하신다고 하면 充分히 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다만 選對委員長은 候補가 人選하는 겁니다. 제가 앞서나갈 수는 없고요.”

    國民의힘이 大選에서 지면 任期와 相關없이 그는 代表職을 내려놔야 한다. 國民의힘이 執權하면 ‘與黨 밀어주자’는 雰圍氣를 등에 업고 來年 6月 地方選擧도 勝利로 이끌 蓋然性이 크다. ‘某 아니면 度’일 수밖에 없는 한판 勝負다. 리허설이 없는 게임. 이것이 그가 堪當해야 할 運命인지도 모른다.

    #李俊錫 #國民의힘 #公正한 競爭 #能力主義 #尹錫悅 #金鍾仁 #新東亞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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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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