亂中日記

李舜臣 亂中日記 및 西間諜 임진장初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Nanjung ilgi (War Diary), Imjin jangcho (Drafts of the Imjin War Reports) and Letters by Yi Sun-sin)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國寶
種目 國寶 第76號
( 1962年 12月 20日 指定)
數量 合 8冊
時代 朝鮮時代
所有 大韓民國 政府, 덕수 李氏 忠武公派 宗中
位置
아산 현충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아산 현충사
牙山 顯忠祠
牙山 顯忠祠(大韓民國)
住所 忠淸南道 牙山市 顯忠祠길 48
( 염치읍 , 顯忠祠 )
座標 北緯 36° 48′ 27″ 東京 127° 1′ 35″  /  北緯 36.80750° 東經 127.02639°  / 36.80750; 127.02639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亂中日記
유네스코 世界遺産
英語 名*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登錄 區分 記錄遺産
地域 ** 아시아 · 太平洋
指定 歷史
2013年   (37次 政府間委員會 )
* 世界遺産目錄에 따른 正式名稱.
** 유네스코에 依해 區分된 地域.

亂中日記 (亂中日記)는 朝鮮 中期의 武臣(武臣) 李舜臣 (李舜臣)李 壬辰倭亂 7年( 1592年 ~ 1598年 ) 동안 群衆에서 쓴 日記 이다. 1962年 12月 20日 大韓民國의 國寶 第76號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으로 指定되었다가, 2010年 8月 25日 李舜臣 亂中日記 및 西間諜 임진장初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로 名稱이 變更되었다. [1]

日記 7冊과 鉏間諜 1冊, 임진장初 1冊까지 總 9卷이 國寶 第76號로 指定되어 있으며, 2013年 6月 18日 光州 에서 열린 '第11次 유네스코 世界記錄遺産 國際諮問委員會'의 勸告를 유네스코 가 받아들여, 새마을運動 記錄物과 함께 李舜臣 亂中日記 및 西間諜 임진장初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世界記錄遺産 으로 登載되었다. [2]

開設 [ 編輯 ]

朝鮮 中期의 武臣으로서 壬辰倭亂에서 朝鮮의 水軍을 指揮해 閑山島 , 鳴梁 等地에서 倭兵을 擊退하고 戰亂의 傳貰를 朝鮮의 勝利로 이끌어, 事後 朝鮮 朝廷으로부터 忠武公(忠武公)의 諡號를 받았던 여해(汝諧) 李舜臣이 壬辰倭亂이 勃發하는 朝鮮 宣祖 25年( 1592年 ) 陰曆 1月 1日 (陽曆 2月 13日 )부터 露梁海戰 에서 戰死하기 이틀 前인 宣祖 31年( 1598年 ) 陰曆 9月 17日 (陽曆 10月 16日 )까지의 2,539日間의 群衆에서의 生活과 戰亂의 情勢에 對해 보고 들은 內容을 적은 日記이다.

《亂中日記》라는 題目은 朝鮮 正祖 19年( 1795年 ) 王命으로 刊行된 《 李忠武公全書 》(李忠武公全書)에서 처음 붙여졌다. 元來 題目은 年度別로 《壬辰日記》(壬辰日記), 《繫辭日記》(癸巳日記) 等으로 日記가 다루는 해의 干支를 붙여 表記하였다. 現存하는 亂中日記의 版本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親筆 原本은 草書로 되어 있으며, 《李忠武公全書》 編纂과 함께 元本 日記의 草書를 亭子(正字)로 脫서(脫草)한 全書本이 世上에 傳해지게 되었다. 全書本은 親筆 原本을 脫鉏編輯한 것이나, 元本 日記에 빠진 部分(乙未年 日記의 境遇 全書本에만 存在)을 담고 있어 相互 補完 關係에 있으며, 1935年 朝鮮史編修會 에서 全書本과 親筆本을 合本하여 《亂中日記初》를 刊行하였다.

7年 間의 戰爭 동안 出征한 낱, 李舜臣 本人이 抗命罪로 漢陽으로 押送되어 있던 時期에는 日記를 쓰지 못한 境遇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干支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內容은 試取(時趣)에 넘치는 日常生活, 同僚 · 親戚과의 往來 交涉, 李舜臣 本人의 個人的인 집안일은 勿論 當時 朝鮮 水軍(水軍)의 指揮에 關한 祕策(秘策), 國家 및 調整에 對한 忠誠과 강개, 倭軍에 對한 憤怒의 感情 吐露 等이 실려 있으며, 上官과 長壽 및 部下들間의 葛藤 問題를 비롯해 當時의 政治, 經濟, 社會, 軍事 等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記錄하고 있다.

壬辰倭亂 硏究에 없어서는 안 될 飼料(史料)이다.

內容 [ 編輯 ]

두 個의 丁酉日記 [ 編輯 ]

《亂中日記》에서 鳴梁海戰 이 있었던 해인 丁酉年( 1597年 )의 日記는 두 個의 寫本이 存在한다. 모두 李舜臣 本人이 쓴 것으로 丁酉年 4月 1日부터 10月 28日까지 쓴 제5책(전 27枚)와 丁酉年 8月 5日부터 이듬해 戊戌年 1月 4日까지의 일을 記錄한 第6冊(前 20枚)의 寫本이다. 丁酉年 8月 4日부터 10月 8日까지의 日記가 重複되어 있는데 兩者를 比較하면 第5冊에서 간지의 錯誤가, 第6冊에서 記事의 詳細한 擴充이 確認된다. 김경수는 이에 對해 李舜臣이 처음 쓴 丁酉年 日記의 잘못된 部分을 發見하고 時間의 餘裕를 틈타 李舜臣이 記憶을 더듬어 다시 쓴 것으로 推定하였다. [3] 鳴梁海戰을 치르던 날인 9月 16日의 日記는 亂中日記 分量 가운데서도 가장 긴 分量의 日記이기도 하다.

倭將 마다시(馬多時) [ 編輯 ]

《丁酉日記》(丁酉日記) 厚眷(後券) 陰曆 9月 16日子에 記錄된 鳴梁 海戰 의 날, 12隻의 배를 이끌고 鬱陶項에서 300餘 尺에 達하는 日本 艦隊와 맞닥뜨려 敵船의 31隻을 부수고 日本 艦隊를 擊退하는 全勝을 거둔 李舜臣에게 앞서 안골포 海戰 때 朝鮮軍에 投降했던 降倭 俊士(俊沙)가 바다에 떠다니던 倭將의 屍體를 가리켜 "저기 무늬 있는 緋緞옷을 입은 놈, 안골眞(安骨鎭)의 敵將 마다시(馬多時)라는 者입니다."라고 報告했고, 李舜臣은 師傅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마다시를 갈쿠리로 건져올려 再次 俊士에게 확인시킨 뒤, 마다시의 屍體를 토막내어 敵 앞에 보임으로써 敵의 氣勢를 꺾었다고 적고 있다.

안골포에서 降伏한 降倭人 準社가 알아보고 李舜臣에게 가리켜 알렸다는 마다시라는 이름의 倭將에 對해서는, 丁酉再亂 當時 구루시마 水軍을 거느리고 參戰했으나 鬱陶項에서 戰死한 俚謠 出身의 水軍 長壽 구루시마 미치後嗣 (?島通?)라고 알려져 왔으나, 《兩國임진실機》(??壬辰?記)의 贊者 야마자키 히社나가(山崎?長)는 脚註에서 아와지섬 을 中心으로 活躍한 또 다른 水軍 勢力인 간 씨(菅氏)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子弟 가운데 마타詩로(又四?)라는 通稱으로 불렸던 간 마사카게(菅正陰)를 마다시로 擧論하고 있다. 間 마타詩로 마사카게 또한 鬱陶項에서 죽었고 '마타詩로'와 '마다시'의 日本語 讀音度 서로 같다는 點이 主要 根據로, 《 懲毖錄 》乙 일역하기도 한 在日 史學者인 박종명(朴鐘鳴)도 이 설을 支持하였다. 日本側 資料로 鳴梁 海戰 當時 日本 水軍 長水의 한 名이었던 도도 다카토라 의 行長 記錄인 《孤山공實錄》(高山公??)에는 "先鋒에 섰던 배들이 積善에 當해 부서진 것이 몹시 많았다. 그 渦中에 구루시마 이즈모老逃奴(?島出雲殿) [4] 도 戰死(討死)하였다."고 적고 있다.

周邊 人物들에 對한 評價 [ 編輯 ]

李舜臣은 日記 속에서 自身 周邊의 人物들에 對한 評價를 남기고 있다.

權慄
宣祖 27年( 1594年 ) 李舜臣은 傳胤으로부터 "水軍을 巨創으로 잡아왔는데 怨讐 權慄 이 妨害한다"는 傳言을 들었다. 그는 이를 日記에 적고, "예전부터 남의 功을 猜忌하는 것이 이랬으니 恨歎해 뭐하겠는가" [5] 라고 權慄을 批判했다. 6月에는 光陽縣監이 두치에서 水軍을 옮겨 伏兵시켰는데, 都元帥 權慄의 庶出 妻男인 兆臺項이 權慄에게 無辜하는 말만 믿고 光陽縣監에게 私的인 感情이 있는 게 아니냐고 問責하는 일이 있었는데, 李舜臣은 이에 對해 "사사로이 行한 것이 이리 甚하니 痛歎을 비길 데 없다"고 評했다(나중에 權慄은 이러한 自身의 行動을 後悔). 乙未年 日記에서도 李舜臣은 南海懸鈴 기효근 等을 供招한 權慄의 草案을 보고 "根據도 없이 妄靈되게 告한 말이 몹시 많으니 반드시 失手에 對한 問責이 있을 것"이라며, 怨讐의 任務를 맡아 行하는 게 怪異하다고 評한다. [6]
김응서
經常右兵士로 있던 김응서 는 宣祖 28年( 1595年 ) 5月 1日, 朝廷의 名도 없이 사사로이 倭將 고니시 유키나가 와 交涉하면서 고니시를 向해 '大人(大人)'이라고 稱하는 等의 일이 問題가 되어 司憲府 의 彈劾을 받고 있었다. 김응서에게 備邊司郎廳 김용이 찾아와 口頭로 先祖의 維持를 傳한 날 日記에 李舜臣은 "김응서라는 者는 어떤 者인데 스스로 改善하고 힘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는가. 쓸개가 있는 者라면 自決이라도 할 것이다" [7] 라고 評하고 있다. 그런 한便으로 晉州城의 廢墟를 함께 둘러보기도 한다. 後날 고니시 유키나가의 諜者 요시라로부터 傳해들은 가토 기요마사 의 朝鮮 圖解에 對한 거짓 情報를 朝廷에 報告하고, 朝廷으로부터 出兵해 가토 기요마사를 잡으라는 命을 받은 李舜臣이 情報의 信憑性이 弱하다고 出動 命令을 拒否한 것이 問題가 되어 李舜臣은 三道水軍統制使職을 내놓게 된다.
류몽인(柳夢寅)
류몽인의 有名한 이야기집 《 於于野談 》에는 李舜臣에 關한 逸話가 몇 篇 登場한다. 류몽인은 宣祖 28年에 暗行御史 로 南道에 派遣되었는데, 暗行御史로써 그는 任實縣監 이몽상과 武裝縣監 이충길, 靈巖郡守 김성헌, 落雁郡守 信號를 罷免海 내치고, 順天府使를 貪官汚吏의 으뜸이라고 評하고 潭陽郡수 이경로나 羅州牧使 이순용, 將星縣監 李貴 , 창평현감 백幽巷 等의 惡行을 덮어주고 調整에 褒賞을 要請했는데, 李舜臣은 이에 對해 "나라의 危急한 亂離를 생각도 않고 南쪽 地方의 抑鬱하다는 辨明만 믿고 있다"며, 中國 宋의 艱辛이었던 秦檜 무목 (武穆)한테 하던 짓이나 다름없다 [8] 고까지 非難하고 있다.
류성룡(柳成龍)
壬辰倭亂 當時 領議政에 都體察使를 겸해 群舞와 政務를 두루 收拾하였던 류성룡 은 어린 時節부터 李舜臣과는 가까운 사이였다. 壬辰倭亂이 일어나기 前인 壬辰年 3月 5日에 李舜臣은 류성룡(當時 左議政)으로부터 曾孫全數方略이라는 冊을 받았음을 적고, 그 冊에 對해 "水陸戰과 불로 攻擊하는 戰術 等에 關한 것이 낱낱이 說明되어 있다"며 "참으로 萬古에 보기 드문 뛰어난 著述"이라고 評價하였다. 以後 甲午일機 2月 12日子에 李舜臣은 漢陽에서 온 宣傳官으로부터 領議政(류성룡)의 便紙를 傳해받고, 다음날 류성룡에게 答信을 썼다. 이때 李舜臣은 日記에서 "위에서 밤낮으로 애쓰신다는 消息을 들으니 고맙고 그립기가 끝이 없다"고 所懷를 적고 있다. 7月 12日子에 李舜臣은 "류 政丞(柳相)李 죽었다는 訃音이 巡邊使(이일)가 있는 곳에 到着했다고 한다."는 自身이 들은 消息을 적고(실제 류성룡은 丁酉再亂이 끝나고 9年 뒤인 1607年 에 死亡) "이는 流 政丞을 嫉妬하는 者들이 말을 지어내서 毁謗하려는 것이리라. 痛憤을 이길 수 없다."고 自身의 感想을 적고 있다. 류성룡은 後날 懲毖錄에서 特別히 李舜臣의 生涯와 前科 等을 比重있게 言及하였다.
元均(元均)
元均 은 李舜臣의 日記 속에 120回 言及되어 있다. 年度別로 따지면 繫辭年(49回)과 甲午年(46回)에 集中되어 言及되는데 [9] 大部分 原菌의 떳떳하지 못하고 稚拙한 모습에 對한 非難과 憤怒가 主를 이룬다. 珍島 의 指揮船이 倭敵에게 包圍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본 척 하는 經常 座僞裝과 于部長에 對한 非難과 함께 輕傷搜査(元均)를 怨望하고 있으며 [10] 죽은 倭敵의 受給을 거두려고 敵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輕傷搜査의 軍官과 嘉德僉使의 事後線을 잡아 보냈더니 李舜臣에게 火를 내더라는 記錄과, [11] 狀啓를 거짓으로 꾸며 올리면서 群衆을 괜히 동요시키는가 하면 [12] 脫營한 格軍들을 데리고 自身의 駐屯地로 숨은 麾下 包作(漁民)들을 숨겨주느라 그들을 잡아 오라고 金毛布 萬戶가 보낸 管理들을 거꾸로 捕縛하기도 하고 [13] 明나라 의 經略 송응창이 經常右兵士 최경회 에게 보낸 1,530代의 불화살을 혼자서 다 쓰려고 計策을 꾸미기도 하고 [14] 李舜臣에게 날 밝는 대로 나가 倭敵과 싸우자고 公文을 보내놓고 다음 날 李舜臣이 倭敵을 討伐하는 問題에 對해 公文을 써서 보내자 醉氣에 精神없다고 핑계를 대며 對答하지 않기도 한다. [15] 李舜臣에게는 伏兵을 同時에 보내자고 해놓고 自身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16] 이밖에 술에 醉해 헛소리를 하더라는 等의 非難도 있다. 李舜臣은 原菌에 對해서는 거의 "陰險하고 凶惡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17] , "議論에서 원 搜査가 하는 말은 每番 矛盾이다. 참 가소롭다" [18] 라고, 怨讐 權慄의 叱責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原菌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19] 비웃기도 하는 等, 賣渡에 가까운 非難을 숨기지 않는다. 어머니의 喪을 當한 李舜臣에게 問喪을 보냈을 때조차 "陰凶한 原菌이 便紙를 보내 弔問한다만 이는 怨讐의 名이다" [20] 라고 表現할 程度로 原菌에 對한 感情의 골은 깊었다.
이원익(李元翼)
이원익 은 體察使가 되어 全國을 巡廻하던 中이던 1595年 8月에 李舜臣과 만났다. 8月 22日에 晉州에 들어온 李元翼은 다음날 李舜臣과 대면했는데, 李舜臣은 이원익과 對話를 나누고 나서 "그는 百姓의 苦痛을 없애려는 일에 뜻을 둔 것 같다."고 日記에 적었다. 28日까지 體察使 李元翼은 체札部社 김륵, 從事官을 데리고 李舜臣과 함께 南海를 돌며 陣을 합칠 곳, 倭敵과 싸울 만한 곳을 둘러보며 群衆을 弊端을 議論하고 헤어졌다. 12月 18日에도 體察使 李元翼은 統制使 李舜臣과 泗川의 洑에서 만나 새벽 두 時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李舜臣이 三道水軍統制使에서 罷職되어 서울로 押送되고 審問받을 때 李元翼은 鄭琢과 함께 李舜臣의 救命에 나섰던 人物이었다.
정경달(丁景達)
정경달 은 壬辰倭亂 當時 先山郡守로써 義兵을 모아 김성일, 조대곤 等과 함께 金烏山 에서 倭兵을 相對로 勝利를 거두었고, 1594年 부터 李舜臣 幕下에서 從事官으로 活躍하였는데, 屯田 經營과 管理에서 頭角을 드러냈다. 壬辰日記 마지막 張에 실려 있는 李舜臣 本人이 쓴 西間의 草案에서 前 觀察使로부터 逃走(道主, 觀察使) 外에는 屯田을 繼續 耕作할 수 없으니 一切 檢査하지 말라는 公文에 對해, 從事官 정경달은 이제껏 屯田 監督에 心力을 다하였음을 呼訴하고 秋收하는 동안만이라도 그대로 맡겨둘 수는 없겠느냐고 적은 것이 確認된다. 정경달 또한 戰爭 中에 쓴 日記가 文集 《反曲集》(盤谷集, 1800年 刊行)에 실려 傳하며, 《反曲集》에 실린 정경달의 日記 또한 '亂中日記'라는 篇名으로 실려 있다.
鄭琢(鄭琢)
甲午일機 2月 4日子에는 贊成(贊成) 鄭琢 으로부터 온 便紙를 받았다는 記錄이 있다. 鄭琢은 李舜臣이 三道水軍統制使職에서 罷職되고 서울로 押送되어 審問을 받게 되었을 때 이원익 과 함께 그의 목숨을 救命해 줄 것을 請하는 次子를 올린 사람이었다. 丁酉年 4月 1日에 李舜臣이 獄에서 풀려났을 때 鄭琢은 류성룡 等 다른 朝臣들처럼 사람을 보내 李舜臣을 慰勞하였다. 한便 李舜臣을 救命해 줄 것을 要請한 鄭琢의 次子는 《新舊李舜臣車初》(伸救李舜臣箚草)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戰場에서의 讀書 [ 編輯 ]

《亂中日記》 속에는 李舜臣이 戰爭 가운데, 或은 戰爭 前에 읽었던 冊에 對한 言及도 있다. 《丁酉日記》 末尾에 李舜臣은 中國의 歷史冊 《 訟事 》(宋史)를 읽고 느낀 所感을 적어두었고, 歷史 속의 人物의 行跡을 되새기며 救國에 對한 忠情을 다시금 想起한다. 李舜臣의 오랜 知友인 류성룡이 보내준 《曾孫全數方略》(增損?守方略)에 對해 "水田과 肉煎, 化工法에 對한 戰術을 一一이 說明한 참으로 萬古에 뛰어난 理論" [21] 이라며 稱讚하고, 韓國의 옛 歷史를 읽고 개탄스럽게 느낀 自身의 생각을 日記에 적기도 했다. [22]

또한 《甲午일機》末尾에서는 '亂刀(難逃)',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人材가 없고 안으로는 計策을 세울 人材가 없으니 배를 더욱 늘리고 武器를 만들어 敵들을 不利하게 하고 나는 그 便安함을 取하리라(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增蓋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와 같은 《 三國志演義 》(三國志演義) 속에 登場하는 句節들이 確認되어, 李舜臣이 일찍 《三國志演義》를 接하고 읽었던 것이 아닌가 推定하기도 한다.

한便 《丁酉日記》에는 白衣從軍 途中 閑山島의 原菌이 이끄는 朝鮮 水軍을 支援하기 위해 마침 南쪽으로 내려온 博川郡守(博川郡守) 류海(柳海)로부터, 果川 座首 (座首) 안홍제(安弘濟)라는 人物이 罪도 없이 抑鬱하게 棺에 잡혀가 여러 次例 刑杖을 맞아 거의 죽을 地境이 다 되었는데 과 스무 살 된 계집종을 賂物로 바치고 풀려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 안팎에서 賂物의 많고 적음을 갖고 罪의 輕重을 定한다고 氣가 막혀 하며 "이런 게 '百 前의 돈이 죽은 魂도 살린다'(一陌金錢便返魂)는 것인가?" 라고 恨歎하였는데, [23] 이 句節은 (明)의 瞿佑가 지은 《 剪燈新話 》(剪燈新話)에 실린 '영호生命몽록' 中 內容의 部分으로, 李舜臣이 《剪燈新話》를 接하고 읽은 적이 있었음을 暗示한다. 류해는 李舜臣을 만난 다음날 全羅右水使 李億祺와 經常右水使 排泄 및 가리포僉使에게 보내는 李舜臣의 問安 便紙를 갖고 昇平(順天)을 거쳐 閑散으로 갔고, 두 달 뒤인 7月 16日 새벽, 三道水軍統制使 原菌이 指揮하는 朝鮮 水軍은 巨濟 앞바다의 漆川梁에서 日本 水軍의 奇襲을 받아 潰滅的人 被害를 입었다.

亂中日記의 寫本 및 刊本 [ 編輯 ]

《亂中日記》의 代表的 寫本과 刊本은 李舜臣 本人이 草書로 쓴 親筆 原本과, 親筆本을 土臺로 朝鮮 貞操帶에 草書를 正書하는 作業을 통해 整理한 全書本이 있다. 1932年 原本과 全書本의 內容을 합친 形態의 刊本이 朝鮮史編修會 에 依해 刊行되었는데, 빠졌던 部分과 漏落된 部分이 繼續해 以後 發見되면서 內容에 對한 追加 硏究와 飜譯이 이루어졌다.

親筆本 [ 編輯 ]

全書本 日記가 正月 初하루부터 始作하는 것과 달리 親筆本은 5月 1日부터 始作하고 있다. 專門 7卷 8冊으로 群衆에서의 日課를 비롯해 朝廷에 바치는 狀啓와 謄本, 別冊, 附錄 等이 草書로 적혀 있다.

壬辰年에서 繫辭年, 丁酉年 日記는 日記의 量이 일정하지 않고, 甲午年에서 丙申年의 日記는 比較的 一定하다. 緊迫한 狀況에서 甚하게 흘려 적은 것으로 削除에 修正을 反復한 痕跡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判讀이 어려울 程度로 흘려쓴 草書 글씨들은 全書本 等 後代 活字本에서도 該當 部分의 五毒 乃至 脫字가 確認되기도 한다. 《亂中日記》를 硏究한 노승석은 筆記 狀態가 유난히 甚하고 毁損된 部分이 많은 것에서 當時 三道水軍統制使 罷職에 投獄, 白衣從軍에 이어 母親喪까지 當하는 惡循環 속에 있었던 李舜臣의 心理를 反映하고 있다고 指摘하였다. 그런 만큼 李舜臣의 感情을 가장 자연스럽고 穩全한 形態로 傳하는 日記로써의 性格을 제대로 간직한 刊本이라 할 수 있다.

全書本 [ 編輯 ]

朝鮮 正祖 는 在位 12年( 1788年 ), "우리 나라를 再建하게 한 큰 恩惠를 길이 생각하고 忠武公 李舜臣의 工業을 表彰하고자 한다"며, [24] 李舜臣의 事績을 모아 內閣에 내려 全書를 編纂하고 活字로 印刷되는 대로 한 本을 三道水軍統制使 本營이 있던 統營 忠烈祠 에 간직해두고 祭祀지낼 것을 命했다.

《李忠武公全書》에는 李舜臣의 報告書, 陣中에서 남긴 7年間의 日記와 詩文 等 李舜臣의 行跡과 關聯 記錄에 正祖 本人이 李舜臣을 追慕해 쓴 글이 더해졌다. 刊行은 윤행임과 柳得恭 等이 맡았으며, 草書로 쓰여 있던 親筆本 日記의 內容을 正字體로 바꾸고 板刻하는 脫初 作業이 이때 처음 이루어졌으며, 흔히 알려진 亂中日記 라는 題目도 이때 처음 붙여졌다.

《李忠武公全書》는 初刊本을 비롯해 後代에 이르기까지 總 6次例 刊行되었고, 內容은 刊本 모두 同一하다. 《李忠武公全書》權5에서 卷8에 該當하는, 이른바 全書本 《亂中日記》의 內容은 날짜面에서 親筆本보다 많으며, 總 7年 2,539日의 分量 가운데 1,593日의 記錄이 실려 있고 946日은 漏落되어 있다. [25] 親筆本에 실려있던 內容 相當數가 省略된 한便으로 親筆本에 없는 乙未年 日記 全文과 壬辰年 正月 初하루에서 4月 22日, 戊戌年 10月 8日부터 12日, 11月 8日부터 17日까지의 日記 內容이 收錄되어 있다는 點에서 《亂中日記》의 正本을 製作하는데 必須的인 것으로 評價받고 있다.

亂中日記初 [ 編輯 ]

1935年 12月 20日 京城 朝鮮總督府 傘下 朝鮮史編修會에서 判讀한 版本을 日本人이 經營하던 지카者와 印刷部(近澤印刷部)에서 刊行된 刊本이다. 《朝鮮史料銃刊》第6에 '亂中日記初 임진장初'라는 題目으로 收錄되었는데, 그 以前인 1928年 5月에 李舜臣에 關한 遺物 一切의 撮影은 朝鮮史編修會에서 모두 마친 狀態였으며 [26] 1934年 年次計劃案 속의 史料銃刊目錄 속에서 亂中日記 抄本과 임진장初(活판)가 包含되어 있는 것을 確認할 수 있다.

親筆本과 全書本의 內容을 합치되, 親筆本의 形態와 滯在를 그대로 살려 날짜別로 羅列, 親筆本에서 磨滅, 判讀이 不可能한 글字는 未詳記號로 處理하였다. 修正된 內容은 오른便에 빠짐없이 表示하고, 關聯 內容은 위에, 人命과 地名은 옆에 註釋을 달아 놓았다. 後代 硏究者들은 이 亂中日記秒를 가장 代表的 典範으로 삼았으며, 比較的 完璧에 가깝게 編輯된 刊本으로 評價받고 있다.

그 以前인 1916年 , 朝鮮硏究會(朝鮮?究?)의 主幹을 맡고 있던 아오야나기 難메이(靑柳南冥)가 全書本 《亂中日記》를 土臺로 日本語 解釋과 함께 《원文化歷代組 李舜臣全集》(原文和譯對照 李舜臣全集)에 收錄한 刊本이 存在하나, 이는 壬辰年 正月 初하루부터 乙未年 5月 29日까지의 一部 內容만을 실은 拔萃本이었다(이듬해 亂中日記에 현토를 단 《亂中日記腸》李 《李舜臣全集》에 실려 刊行됨).

《忠武公類似》본 日記抄 [ 編輯 ]

李舜臣의 집안인 덕수 李氏 집안에는 《忠武公類似》(忠武公遺事)라는 이름의 文獻이 傳해져 왔다. 著者도 確實하지 않은 이 文獻은 李舜臣 집안과 관계있는 사람이 記錄한 것으로 推定되며, 《 在朝番防止 》(再造藩邦志)에서 抄錄한 內容이 包含되어 있어 題目이 在朝番房支礎(再造藩邦志抄)라 알려지기도 했다. 成立 時期는 《在朝番防止》가 完成된 肅宗 42年( 1716年 ) 以後로 보인다. 親筆本 《亂中日記》를 옮겨 적은 唯一한 版本이자 325日値의 分量 가운데 親筆本과 全書本에 漏落된 32日치(乙未年 30日, 丙申年 1日, 戊戌年 1日치 分量)의 日記가 收錄되어 있는 것이 確認되었다는 點에서 價値를 지닌다.

1967年 亂中日記 盜難 事件이 일어나고(후술) 이듬해 3月, 韓國의 文化財管理局은 《亂中日記》와 함께 《忠武公類似》를 英人 發行하였다. 2000年 《정신문화연구》봄號 第23卷 1號에 실린 박혜일(서울대 原子核工學科) 敎授 外 3人의 ‘李舜臣의 日記 日記抄의 內容 評價와 親筆抄本 缺損部分에 對한 復元’이라는 論文에서 처음 《忠武公類似》의 原文 日記抄 內容의 一部가 發表되었으며, 《亂中日記》의 毁損된 部分을 復元할 수 있는 版本으로 評價되었다. 分量이 적긴 하지만 親筆本意 磨耗되고 確認不能 글字, 빠진 部分이 正確히 적혀 있으며, 全書本 製作 過程에서 漏落된, 上官과 同僚에 對한 李舜臣 本人의 個人的이고 家族的인 內容이 들어 있다는 點에서 重要한 價値를 지닌다. 2008年 6月 顯忠祠에서는 《忠武公類似》의 飜譯文과 영인問議 合本을 刊行하였다.

亂中日記 盜難 事件 [ 編輯 ]

1967年 12月 31日에 顯忠祠에서 保管되고 있던 《亂中日記》 盜難되는 事件이 發生하였다. 도난당했던 亂中日記는 이듬해 1968年 1月 9日, 事件 發生 10日만에 釜山에서 回收되었다.

事件 終結 以後 朴正熙 當時 大統領 指示로 《亂中日記》의 影印本 5百 部가 製作되어 全國 公共圖書館 및 博物館으로 보내졌으며 [27] 《亂中日記》 原本은 閱覽 自體가 禁止되었다.

亂中日記의 飜譯 [ 編輯 ]

《亂中日記》의 가장 오래된 國譯本은 1960年 4月에 이은상 이 親筆本의 原文校閱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刊行한 《이충무公亂中日記》라는 題目의 國譯本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보다 앞서 1953年 동아일보 記者 出身의 言論인 薛義植이 首都文化史에서 刊行한 《李舜臣 수록(手錄) 亂中日記》의 存在가 알려졌다. 2年 뒤인 1955年 11月 30日에 北韓 에서 越北文人 벽초 홍명희 의 아들 홍기문이 《리순신將軍全集》이라는 題目으로 飜譯, 平壤 所在 國立出版社 主筆을 맡고 있던 以上呼價 5千 部를 刊行하였다.

홍기문의 飜譯은 新聞官本과 統營本, 두 個의 《李忠武公全書》 版本을 基礎로 朝鮮史編修會에서 刊行한 《亂中日記初》를 土臺로 하여 飜譯한 것으로, 《李忠武公全書》의 內容 가운데 忠武公의 著作이 아닌 것을 削除하고 飜譯하였다. 홍기문은 이 飜譯本에서 "親筆本보다 全書本이 簡略하게 된 것은 尹行恁이 削除하고 이두문을 任意로 修正한 것이다."라며, 亂中日記의 版本上의 問題點을 指摘하였다. 홍기문의 飜譯은 親筆本과 全書本의 最初의 合本 飜譯이라는 意義가 있지만, 北韓에서 發行한 德分에 北韓 사투리가 包含되어 있으며, 親筆本 《亂中日記》를 確認하지 않은채 活字本만을 土臺로 飜譯해 親筆本意 未詳, 誤讀 部分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限界도 있었다(이후 重刊本이 刊行).

李殷相은 1960年 亂中日記 刊行本에서 "공의 草稿와 全書 中의 採擇되어 있는 亂中日記의 內容과는 相當한 差異가 있다"고 指摘하면서, 10月 7日까지만 남아 있던 武術日記의 빠진 部分을 장예抄本 別冊(《忠武公類似》日記抄)에서 10月 7日부터 11月 7日까지의 親筆 日記抄 2面을 찾아내 收錄했고, "공의 親筆草稿를 完全 採錄했다"고 自負하였다(다만 李殷相은 장예抄本 別冊이 《忠武公類似》日記抄와 同一한 것임은 몰랐다). 李殷相이 《亂中日記》를 飜譯한 1960年 부산대학교에서 總長 윤인구에 依해 忠武公硏究室이 設置되어, 當時 親筆 亂中日記 草稿 7冊 215張을 모두 寫眞으로 찍어 當時 景武臺(靑瓦臺)와 부산대 圖書館, 顯忠祠에 各各 한 部씩 備置했었다. [28]

1968年 에 李殷相이 飜譯한, 親筆本과 全書本이 合本된 《亂中日記》가 현암사에서 크라운판(版)으로 刊行되었다. 工巧롭게도 指紋角에서 이석호가 力走한 《亂中日記》도 이은상 飜譯本과 같은 날(1968年 4月 2日)에 發行되었는데, 이석호 譯註本은 甲午年 7月 13日과 丙申年 8月 2日, 丁酉年 7月 2日 等 全體 分量 가운데 126一致가 빠졌고 李舜臣이 지은 漢詩가 附錄되었고, 價格도 현암사판(8百 원)보다 低廉한 390원이었다. 한便 이은상 飜譯本 《亂中日記》는 原文과 함께 《亂中日記》 속 地名과 現代의 地名을 對照해 票로 整理한 것을 附記하였다.

한便 2004年 부터 文化財에 對한 디지털 情報化 事業의 一環으로 亂中日記 原文과 原本寫眞이 國家記錄遺産에 揭載되고, 親筆本 탈초와 原文 解讀을 맡았던 노승석이 10餘 곳의 誤謬를 發見하였다. 노승석은 自身이 發見한 誤謬의 修正을 反映하여 2005年 《李舜臣의 亂中日記 完譯本》(동아일보사)을 出刊하였고, 《忠武公類似》解讀 過程에서 찾아낸 32日치를 添加한 表情交感本 壬辰日記를 順天鄕大學校 李舜臣硏究所를 통해 2007年 3月에 刊行하였다. 5月에 박해일 敎授 外 3人이 親筆本을 活字로 옮긴 《李舜臣의 日記抄》를 刊行하였는데, 原文에 구두를 넣지 않았고 本署 속에 收錄된 狀啓와 書簡文의 出處를 밝히고 內容과 形式을 親筆本 形態로 詳細編輯하였다.

文學으로써의 亂中日記 [ 編輯 ]

5萬 名의 朝鮮 郡民이 倭兵과의 分前 끝에 몰살당한 第 2次 晉州城 싸움(1593年)이 있었던 해에 쓴 《繫辭日記》 7月 2日子에서 李舜臣은 晉州城 (晋州城)李 倭兵에 包圍되어 위태롭다는 消息을 김득룡으로부터 傳해 듣고 놀라고 걱정스럽다면서도 그럴 理 없다고 애써 否定하는 套로 적었지만, 7月 6日에 光陽으로부터의 報告를 통해 晉州城 陷落의 消息을 傳해듣고, 9日에는 光陽 順天 이 倭兵에 陷落되었다는 悲報가 이어지고 난 뒤에 "이 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色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듯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고 썼다. 小說 《 칼의 노래 》( 2001年 發行)를 發表한 韓國의 小說家 金薰 은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다"는 이 《亂中日記》 文章을 두고 「 이것은 죽이는 文章입니다. 슬프고 悲痛하고 曲을 하고 땅을 치고 울고불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그 物理的 事實을 客觀的으로 陳述한 것이죠. 거기에 무슨 形容詞 修辭學 을 動員해서 수다를 떨어본들, "나는 밤새 혼자 앉아 있었다"를 當할 道理가 없습니다. 이것은 全然 修辭學의 世界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强力한 主語 凍死 의 世界죠. 내가 사랑하는 主語와 動詞의 世界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분은 事實에 立脚해 있습니다.」 [29] 라 評했다.

李舜臣은 또 日記에다, "오늘 어떤 녀석이 軍律을 어겼기로 베었다"고 썼습니다. 기막히지요. 軍律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게 목을 베었다는 거지요. 그것이 그가 글을 쓰는 方式입니다. 그렇게 頑强한 事實에 立脚하는 것이죠. 軍律을 어겼기로 베었다. 그 머리를 베어서 長대에 끼워서 城 앞에 걸었다. 그래놓고 그 다음 文章을 繼續 써요.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海軍들은 바람 부는 게 가장 큰 問題죠. 배들을 바닷가에 나란히 自動車 세우듯이 대놓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배들이 서로 흔들려서 배들끼리 부닥칩니다. 바람이 불면 海軍은 배를 끌어서 뭍 위로 올려놔야 배가 부숴지지 않죠. "저녁 때 바람이 불었다. 者는 兵士들을 깨워서 물가로 내려 보내서 배를 끌어올리라고 指示했다"고 씁니다. 이 部下 놈 하나를 죽였다는 것 그게 뭐 別거 아니라는 듯이 써버립니다. 數詞, 形容詞, 副詞가 하나도 안 나오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지만, 部下를 죽였다는 文章과 바람이 불었다는 文章 사이에서 그의 文章은 森嚴한 緊張에 到達합니다. 그것은 아주 電壓이 높은 文章입니다. 볼트가 높은 高壓 電流가 흐르는 文章입니다. 만지면 轉機가 올 것처럼 찌르찌르하는 文章이죠. [30]

韓國語 飜譯 [ 編輯 ]

  • 현암사 《亂中日記》 이은상 驛, 1968年
    • 1984年과 1993年에 현암信書 第34卷으로써 다시 刊行(譯者는 同一) ISBN   89-323-0033-X
  • 指紋角 《亂中日記》 이석호 驛, 1968年
  • 金自覺 《國寶 76號 亂中日記》 伊飡도 驛, 1969年
  • 삼중당 《 삼중당文庫78 亂中日記》 1975年
    • 1986年 다시 베스트북스 第119卷으로써 刊行(譯者는 同一)
  • 동서文化史 《 東西文高25 亂中日記》 1977年
  • 經文出版社 《韓國古典 亂中日記》 이웅렬 驛, 1977年
  • 大學書林 《亂中日記》 1977年
  • 범우사 《亂中日記》(범우에세이선88) 이민수 驛, 1979年
    • 2007年에 범우文藁239 隨筆部門에 包含 再刊行(譯者 同一). ISBN 978-89-8-06-239-9
    • 《李忠武公 陣中日記》 임기봉 譯註해, 2007年 ISBN|978-89-91167
  • 千字文出版社 《亂中日記 忠武公 李舜臣 將軍》 이웅렬 驛, 1980年
  • 큰손 《亂中日記》 한창수 驛, 1982年
  • 문공사 《 자이언트文庫21 亂中日記》 1983年
  • 마당 《 마당門高79 亂中日記》 1984年
  • 一身書籍工事 《亂中日記》 신동호 譯註, 1987年
    • 1995年에 《韓國南北文學100線》第55卷으로써 再刊行(譯者는 同一). ISBN   89-366-1675-7
  • 학원사 《亂中日記》(한卷의책150) 장홍재 驛, 1989年
  • 집문당 《이충무公의 亂中日記》 이석호 驛, 1993年
  • 학민사 《새飜譯 亂中日記》 최두환 옮김, 1996年 ISBN   89-7193-078-0
  • 한양출판 《 漢陽苦戰散策11 亂中日記》 허경진 驛, 1997年 ISBN   89-85247-78-6
  • 慧遠出版社 《hae wan world best 48 亂中日記》(김중일, 윤광원 譯註) 1999年 ISBN   89-344-0149-4
  • 소담출판사 《 베스트셀러古典文學선7 亂中日記》 설중환 編輯, 2003年 ISBN   89-7381-771-X
  • 서해문집 《亂中日記 - 壬辰年 아침이 밝아 오다 》(오래된책방07), 송찬섭 엮어 옮김, 2004年 ISBN   89-7483-223-2
  • 幸福한책읽기 《評役 亂中日記》 金慶洙 驛, 2004年 ISBN   89-89571-28-6
  • 東亞日報社 《亂中日記 完譯本》 노승석 驛, 2005年 ISBN   89-7090-438-7
  • 중앙북스 《亂中日記 - 人間 李舜臣을 만나다》 허경진 驛, 2008年 ISBN|89-6188-316-0
  • 河西出版社 《亂中日記》(河西名作選43) 박광순 譯解, 2010年 ISBN   978-89-6259-048-7
  • 민음사 《交感完譯 亂中日記》 노승석 驛, 2010年 ISBN   978-89-374-2686-5
  • 돋을새김 《評役 亂中日記》(푸른책장시리즈19) 金慶洙 編著, 2011年
  • 지식공작소 커뮤니케이션북스 《亂中日記》 2014年 ISBN   9791130400808
  • 올재 《亂中日記》(올재클래식스46) 2014年 ISBN   978-89-978765-3-2
  • 圖書出版 여해 《校監 完譯 亂中日記》 노승석 옮김, 2019年 11月 25日 ISBN   9791195315284
    • 飜譯·指名 誤謬를 解決한 것으로, 《校監 完譯 亂中日記》(圖書出版 여해, 2016年 12月 26日)의 改訂版이다.
    • 遺跡地 寫眞을 실은 《亂中日記 遺跡便》(圖書出版 여해 2019年 10月 15日, ISBN   9791195315277 )도 出刊했다.
  • 圖書出版 여해 《新完譯 亂中日記 敎主本》, 2021年 3月 22日, 原文이 같이 收錄되어 있다.
  • 더클래식 《亂中日記》(東洋古典컬렉션13) 김문정 옮김, 2015年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文化財廳考試制2010-89號(國家指定文化財 寶物指定) , 第17328號 / 官報(程顥) / 發行日 : 2010. 8. 25. / 63 페이지 / 1.2MB
  2. 도재기 (2013年 6月 19日). “‘亂中日記’·‘새마을運動 記錄物’ 世界記錄遺産 登載” . 京鄕新聞 . 2013年 6月 20日에 確認함 .  
  3. 金慶洙 ‘李舜臣의 亂中日記’ 《韓國史學史學報》第10輯, 2004. 9, pp.46
  4. 구루시마 미치後嗣의 官位는 種5爲하 이즈모노카美(出雲守)였다.
  5. 《甲午일機》 甲午年(1594年) 正月 18日子.
  6. 全書本 《乙未日記》乙未年(1595年) 4月 30日子.
  7. 全書本 《乙未日記》 乙未年(1595年) 7月 7日
  8. 《甲午일機》甲午年(1594年) 2月 16日子.
  9. 金慶洙, 같은 論文, pp.55
  10. 《繫辭日記》繫辭年(1593年) 2月 22日子.
  11. 《繫辭日記》繫辭年(1593年) 2月 28日子.
  12. 《繫辭日記》繫辭年(1593年) 5月 21日子.
  13. 《甲午일機》 甲午年(1594年) 5月 13日
  14. 《繫辭日記》 繫辭年(1593年) 5月 27日/30日子.
  15. 《繫辭日記》繫辭年(1593年) 6月 10日/11日子.
  16. 《繫辭日記》 繫辭年(1593年) 8月 26日子.
  17. 《繫辭日記》繫辭年(1593年) 2月 23日
  18. 《繫辭日記》繫辭年(1593年) 8月 6日
  19. 全書本《乙未日記》乙未年(1595年) 8月 17日子.
  20. 《丁酉日記》丁酉年(1597年) 5月 8日子.
  21. 《壬辰日記》 壬辰年(1592年) 3月 5日子.
  22. 《丙申日記》丙申年(1596年) 5月 25日子.
  23. 《丁酉日記》 丁酉年(1597年) 5月 21日 신해
  24. 《正祖實錄》正祖 12年(1732年) 8月 19日子
  25. 박을수, '李舜臣의 亂中日記 硏究' 《順天鄕語文學硏究會》2001, 10쪽
  26. 《朝鮮史料銃刊》第6, 解說
  27. 《東亞日報》 1968年 2月 20日子 社會面 7面.
  28. 《경향신문》1968年 1月 10日子.
  29. 金薰, '回想' 《바다의 奇別》 생각의 나무, 2008, 141쪽~142쪽.
  30. 金薰, '回想' 《바다의 奇別》 생각의 나무, 2008, 143쪽~144쪽.

外部 링크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壬辰倭亂〉"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