懲毖錄

懲毖錄
(懲毖錄)
(Jingbirok: The Book of Corrections)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國寶
懲毖錄 元本
種目 國寶 第132號
( 1969年 11月 12日 指定)
數量 1冊
時代 朝鮮
管理 韓國國學振興院
位置
住所 慶尙北道 安東市 도산면 退溪路 1997 韓國國學振興院
座標 北緯 36° 42′ 08″ 東京 128° 48′ 39″  /  北緯 36.70222° 東京 128.81083°  / 36.70222; 128.81083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懲毖錄 (懲毖錄, 英語 : Jingbirok: The Book of Corrections )은 朝鮮 宣祖 류성룡 이 쓴 壬辰倭亂 에 對한 1592年 (宣祖 25)에서 1598年 (宣祖 31)까지 7年 동안의 일을 手記(手記)韓 으로, 著者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著述하였고 1604年 (宣祖 37年) 著述을 마쳤다. 1969年 11月 12日, 大韓民國의 國寶 第132號로 指定되었다.

著述의 動機 [ 編輯 ]

懲毖 란 《詩經(詩經)》의 消費便(小毖篇)의 “미리 懲戒하여 後患을 警戒한다(豫其 後患)”라는 句節에서 따온 것이다. 懲毖錄은 壬辰倭亂 戰亂社로서, 1592年(宣祖 25)부터 1598年까지 7年에 걸친 戰亂의 原因, 戰況 等을 記錄한 冊이다.

『懲毖錄』의 첫 章에서 류성룡 은 수많은 人命을 앗아가고 肥沃한 疆土를 疲弊하게 만든 慘酷했던 電話를 回顧하면서, 다시는 같은 戰亂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朝廷의 여러 失策들을 反省, 앞날을 對備하며 倭亂을 겪은 後 後世에 길이 남길 쓰라린 反省의 記錄으로 『懲毖錄』을 著述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目的意識을 가지고 著述되었다는 點에서, 『懲毖錄』은 우리나라에서 쓰인 여러 記錄文學 中에서도 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이 冊의 內容에는 壬辰倭亂 의 原因과 經過 그리고 自身의 잘못과 朝廷의 失策,百姓들의 調整에 對한 批判 等을 담고 있다.
《懲毖錄》은 以後 朝鮮時代에는 壬辰倭亂의 功過를 評價하는 데 使用되었다.

特히 류성룡 은 스승인 退溪 李滉 의 學說에 따라 理氣論 (理氣論)을 펼치고 陽明學 을 批判했으며 李滉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基(氣)는 이(理)가 아니면 生(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氣보다 앞서 있는 實體로서의 이를 規定했다.

류성룡 은 陽明學의 核心的 理論인 知行合一 설(知行合一說)과 致良知 설(致良知說)李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弊端에 빠진 것으로 佛敎의 學說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斷定하고 하나에 置重됨이 없이 竝進해야 한다는 지杏餠陳設(知行竝進說)을 主張했다. 왜 만들어졌냐면 壬辰倭亂이 잘못한 것을 밝히기 위해

그가 남긴 著作 中 『懲毖錄』(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行하여야 한다’는 지杏餠陳設이 잘 反映된 冊으로 알려 있다. 慘酷한 國難의 하나였던 壬辰倭亂에서의 아픈 經驗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受難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後世를 警戒하기 위하여 남긴 著述이다. 壬辰倭亂의 全貌를 正確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壬辰倭亂에 關한 많은 記錄 가운데서도 貴重한 飼料 (史料)로 評價되고 있다. [1]

일화 [ 編輯 ]

《懲毖錄》에는 壬辰倭亂 直前, 그리고 勃發 및 展開 過程에서 있었던 逸話들이 收錄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代表的인 것은 다음과 같다.

  • 1586年 , 쓰시마 逃走(島主) 귤강광(橘康廣, 유즈野 야스히로 柚谷康?)李 히데요시의 書信을 갖고 朝鮮을 訪問했을 때, 그의 行列 左右에 늘어선 朝鮮軍 兵士들이 들고 선 을 보고 「當身네들의 窓은 참 짧군요 그래」하고 비웃었다.
  • 1591年 에 日本에 派遣된 通信社 (通信使)의 情事(正使) 황윤길 (?允吉)과 府使(副使) 김성일(金誠一)은 日本을 視察하고 나서 宣祖에게 日本의 事情을 報告했는데, 黃允吉이 「반드시 兵亂의 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과 달리 金誠一은 「神은 倭國에서 그런 徵候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對答했다.
  • 1592年 4月 15日, 朝鮮을 侵攻한 倭軍이 東萊(東?)로 쳐들어갔을 때, 府使 송상현 (宋象賢)李 分傳하다 죽었다. 宋象賢은 倭兵에 목숨을 求乞하는 것도 마다한 채 죽는 것을 擇했고, 倭人들은 그러한 송상현의 節義에 感歎하며 그의 屍身을 棺에 넣어 鄭重히 埋葬하고 그의 무덤에 墓表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
  • 名의 沈惟敬 (沈惟敬)과 倭將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는 서로 親한 사이로, 事事件件 서로 감싸주었고, 臨時變通의 措置로 戰爭을 멈추려 했다.
  • 1598年 10月, 露梁 앞바다에서 退却하는 倭軍을 追擊해 벌어진 海戰에서 統制使 李舜臣(李舜臣)李 날아오는 彈丸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直前, 「싸움이 아직 多急한 판인데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 倭軍은 朝鮮에서 수많은 殺掠을 恣行하였고, 이는 《懲毖錄》 속에 고스란히 描寫되었다. 1597年 에 벌어진 丁酉再亂(게이初의 驛)에서 專攻을 證明하기 위해 잡은 捕虜나 屍身의 목에서 코를 베어내는 場面도 詳細히 描寫되어 있다. 그러나 懲毖錄의 主題가 倭軍의 實態보다도 朝鮮軍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國防意識에 對한 批判에 무게가 실려있는 만큼, 주된 內容은 倭軍에 對應하는 朝鮮側의 허술함 또한 批判하고 있다.

冊의 歷史 [ 編輯 ]

懲毖錄의 成立 年代는 確實하지 않지만, 7年의 戰爭이 끝나고 류성룡이 官職에서 물러나 故鄕 安東으로 落鄕했던 1598年 부터 그 執筆이 始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宣祖 37年( 1604年 )에 執筆이 끝났다. 仁祖 11年( 1633年 ) 류성룡의 아들 留陣(柳袗)李 아버지의 文集 《西厓集》(西厓集)과 合本된 形態로 懲毖錄을 刊行하였고, 1647年 다시 獨立된 16卷 7冊으로 刊行했다. [2]

오래된 懲毖錄의 刊本은 「16권본」과 「2권본」의 두 가지가 있다. 앞서 登場한 것이 「16권본」이고, 나중에 「2권본」이 나왔는데, 「16권본」의 構成은 다음과 같다.

  • 第1卷~第2卷 : 總論(?論)
  • 第3卷~第5卷 : 《跟捕집》(芹曝集) - 答(?) ? 繫辭(啓?)
  • 第6卷~第14卷 : 《眞사錄》(辰巳?) - 雉鷄(馳啓) ? 復命(復命)
  • 第15卷~第16卷 : 《軍門謄錄》(軍門謄?) - 啓礎(啓草) ? 文吏(文移)
  • 《綠後잡기》(?後?記)

《懲毖錄》은 朝鮮 뿐 아니라 日本에서까지 傳해져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초량 倭館을 通해 日本으로 流入된 懲毖錄은 「2권본」으로 1695年 日本 교토의 야마토野(大和屋)에서 야마토野 이베에(大和屋伊兵衛)가 日本語 訓讀을 달아 刊行하였다. 이로써 日本은 臨津, 丁酉年의 倭亂(分路쿠 ? 게이初의 驛)에서의 朝鮮側의 事情을 알 수 있었다. 晉州城 (晋州城)에서 倭兵을 相對로 벌어진 두 次例의 激戰에서 倭軍에게는 「某쿠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두려움의 對象이었던 朝鮮의 武裝 김시민(金時敏)李 實은 제1차 晉州城 싸움에서 戰死했었다는 事實도 《懲毖錄》의 日本 刊行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肅宗은 1712年 《懲毖錄》李 日本에서 刊行된 것에 對해 朝鮮의 情報가 流出될까봐 警戒하여 禁斷하였다고 한다.

1936年 朝鮮史編修會 에서 慶尙北道 安東郡 풍산면 하회리 宗家(宗家)의 所藏本인 著者 自筆의 筆寫本(筆寫本)을 《朝鮮史料銃刊(朝鮮史料叢刊)》 11輯에 《抄本懲毖錄(草本懲毖錄)》이라 하여 300部를 影印하여 出刊하였다. 1958年 성균관대학교 大東文化硏究院에서 影印한 《西厓集(西厓集)》 끝에도 영인되어 있다. 《狂死(廣史)》 3집에도 《懲毖錄》과 《綠後잡기》가 合쳐 收錄되어 있다.

2003年 英譯本 《The Book of Corrections》 을 최병현 敎授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東아시아 硏究所에서 出刊했다.

寫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류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서해문집, 2003年, ISBN   89-7483-174-0 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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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文化콘텐츠닷컴》, 文化原形百科 傳統民俗마을, 韓國콘텐츠振興院(2008年版)
  2. 文化財廳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