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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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張俊河
大韓民國 大韓民國 第1共和國
大韓民國 문교부 國民精神啓蒙 擔當官
任期 1950年 3月 2日 - 1953年 4月 30日
大統領 李承晩
長官 안호상 문교부 長官
백낙준 문교부 長官
김법린 문교부 長官
次官 박종만 문교부 次官
최규남 문교부 次官
고병간 문교부 次官
허증수 문교부 次官

大韓民國 第2共和國 國土建設團 企劃部長
場面 內閣
任期 1960年 11月 28日 - 1961年 5月 20日
前任 新設
後任 廢止
大統領 윤보선
總理 場面 國務總理
장도영 內閣首班

大韓民國 第2共和國 國土建設團 團長
任期 1961年 5月 20日 - 1961年 12月 18日
前任 場面
後任 조성근
大統領 윤보선
議長 장도영 最高會議 議長
朴正熙 最高會議 議長
總理 장도영 內閣首班
송요찬 內閣首班

이름
別名 假名 김신철 (金信鐵)
身上情報
出生日 1918年 8月 27日 ( 1918-08-27 ) (戶籍으로는 1915年, 日本軍名簿 記錄으로는 1918年 7月 20日)
出生地 日帝 强占期 平安北道 義州郡 고성면 연하동
死亡日 1975年 8月 17日 ( 1975-08-17 ) (56歲)
死亡地 大韓民國 京畿道 抱川郡 李東勉 도평리 약사봉
學歷 對官普通學校 卒業
숭실중學校 轉學
神聖中學校 卒業
도요大學 豫科 哲學과 中退
日本神學校 中退
한신대학교 學士
經歷 新民黨 黨務委員 兼 最高委員
國民黨 常任顧問 兼 最高委員
正當 無所屬
配偶者 김희숙
子女 膝下 3男 2女
宗敎 改新敎 ( 長老會 )
웹사이트 장준하 記念事業會
軍事 經歷
1944년 초의 장준하
1944年 초의 장준하
服務 日本 陸軍
國民革命軍
大韓民國 臨時政府 光復軍
服務期間 1944年 1月 ~ 1944年 7月 7日(日本 陸軍)
1944年 8月 ~ 1945年 2月 (國民革命軍)
1945年 2月 20日 ~ 1945年 11月 23日 (光復軍)
最終階級 國民革命軍 準位
韓國 光復軍 大尉
主要 參戰 中日 戰爭
賞勳 建國訓長 愛國章

장준하 (張俊河, 1918年 8月 27日 ~ 1975年 8月 17日 )는 日帝 强占期의 獨立運動家 利子 大韓民國의 政治가 , 宗敎人 , 言論人 , 社會運動家 이다.

主要 履歷 [ 編輯 ]

本貫은 安東 으로, 日帝强占期 에 敎育 活動을 하였고, 日本軍 에 學徒兵으로 自願入隊 [1] [2] 하여, 1944年 1月 第65師團 7991部隊에 配置되었으나 그해 7月 장쑤省 쉬저우 에서 脫出, 中國 中央軍官學校에서 訓鍊을 받고 國民革命軍 準位가 되었다.

1945年 中國 쓰촨省 충칭 大韓民國 臨時 政府 를 찾아가 1945年 2月 부터 韓國光復軍 少尉로 服務하였다. 韓國光復軍으로 在職 中 美國 CIA 의 前身인 戰略諜報臺(OSS)에서 活動하면서 3個月間 國內 眞空作戰에 加擔하여, 國內 密派 特殊工作員으로 待機하던 中 8.15 光復을 맞이하였다. 1945年 11月 臨政 歸國 第1陣으로 歸國, 以後 金九 의 祕書로 있다가 이범석 民族靑年團 에서 活動하기도 했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 第1共和國 에서 公務員 에 採用되어 書記官 으로 任用되었고, 1950年 문교부 國民精神啓蒙 擔當官, 1952年 문교부 國民思想硏究院 企劃課長, 庶務課長, 事務局長 等을 지내고 《 思想界 》를 創刊하였으며, 1956年 東人文學賞을 制定하였다. 《사상계》는 當時 自由黨 政權을 糾彈하며 4·19 革命의 端初가 되었으며, 革命 以後 第2共和國 에서 場面 內閣의 문교부 大學敎育審議會 議員, 國土建設團 企劃部長, 國土建設團長 等을 지냈다.

5·16 쿠데타 以後 韓日會談 反對運動, 베트남 戰爭 派兵反對運動에 加擔했다. 6大 大選에서 윤보선 의 支持 遊說 中 朴正熙 의 親日派,남로당 經歷을 問題 삼았다가 選擧法 違反으로 獄苦를 치렀고 [3] , 以後 新民黨 윤보선 과 함께 國民黨 에서 活動했다. 1967年 부터는 7代 國會議員 을 지내 國防委에서 活動하였다. 1974年 大統領 緊急措置 1號 違反 嫌疑로 起訴돼 懲役 15年과 資格停止 15年 宣告에 對해 2013年 1月 24日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에서 無罪를 宣告했다. [4]

1975年 朴正熙 政權에 對抗하는 某種의 擧事를 準備 途中, 8月 17日 京畿道 抱川 약사봉에서 疑問의 最後 를 맞았다.

假名으론 김신철 (金信鐵)을 썼으며, 日本 創氏改名 이름은 '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이다. [5]

生涯 [ 編輯 ]

初期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915年 平安北道 義州郡 고성면 연하동에서 長老敎 牧師 이던 장석인 (張錫仁)과 김경문(金京文)의 5男 1女 中 둘째 아들로 出生하였으며 3살 즈음에 朔州郡 으로 移徙와서 解放 後 越南할 때까지 朔州에서 居住한 그는 어려서 兄이 夭折한 關係로 인하여 事實上의 長男이 되었으므로, 할아버지 장윤희(張潤熙)는 그에게 큰 期待를 걸었다고 한다. 以後 동생으로 장익하, 戕命하(張明河)와 장창하(張昌河), 女同生 장영하(張英河) 等이 태어났다. 할아버지 장윤희는 일찍 改名한 開化 人士로서, 基督敎 思想을 받아들여 改新敎 長老가 되었다. 學問 이 뛰어난 知識人 이었던 할아버지는 漢學 에 밝아, 中國語를 驅使할 수 있었으며, 韓醫師 와 漢學者로 活動하였다. 또한 故鄕 義州에 養成學校(陽成學校)라는 私立學校를 세우고 敎師가 되어 學生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장윤희는 상투 를 틀지 않았다 하며 過去를 보기 爲해 朱子學 을 工夫하였으며, 新學問의 影響으로 基督敎人 이 되어, 家族까지 傳道하여 基督敎 家庭을 이룩했다. 以後 깊은 信仰心으로 아들을 改新敎 牧師 로 길러냈으며, 이는 아들 장석인과 孫子 장준하에게도 影響을 주었다. 張俊河는 基督敎 壘手 집안이었지만 後에 아내가 된 김희숙을 따라 天主敎 로 改宗하게 된다.

아버지 장석인은 知識人으로 基督敎 學校인 神聖中學校를 卒業한 뒤 1926年 平壤의 숭실전문학교 入學하여 1930年에 卒業하였다. 그 後 朝鮮예수교長老會神學校 (一名 平壤神學校)를 卒業하여 長老敎 牧師按手를 받았고, 숭실중學校 의 敎師로 赴任하였다. 牧師 按手를 받았던 아버지 장석인은 숭실學校 喬木 外에도 後에 원동敎會( 大韓예수敎長老會(合同) ) [6] 와 連喜洞敎會( 大韓예수敎長老會(合同) ) [7] , 그리고 甘川中央敎會( 大韓예수敎長老會(고신) 內의 家庭敎會) [8] 等에서 擔任牧師로, 長老敎神學大學 의 講師를 지내기도 했다.

幼年期 [ 編輯 ]

1920年 아버지 장석인이 獨立運動에 加擔했다가 日本 警察 의 追跡을 받으면서 義州郡 을 떠나 朔州郡 으로 移徙하게 되었다. 敎育者이기도 했던 아버지 장석인은 自身의 私財를 들여 對官幼稚園 을 세우기도 했다. 後날 리영희가 이 對官幼稚園을 다녔다고 한다.

13살이 되던 해에 그는 朔州 對官普通學校 5學年에 들어갔다. [9] 1933年 朔州(朔州) 對官普通學校를 卒業한 뒤 아버지 장석인 敎師 로 勤務하던 평양부 숭실중學校 에 在學하였다.

그 後 아버지 장석인 이 先天(宣川) 神聖中學校의 喬木 이 되자 張俊河는 아버지를 따라 先天 神聖中學校로 轉學하였다. 1937年 神聖中學校 校長 장이욱 이 修養同友會 事件 關聯者로 檢擧되자, 이에 張俊河는 學生代表를 動員하여 校長 釋放을 위한 同盟示威 運動을 展開했다가 留置場에 갇히기도 했다. 아버지 장석인은 基督敎人의 良心으로 神社參拜를 拒否하여 神聖中學校 敎師를 辭退했으며 傳道師로 牧會하였다.

敎師生活과 渡日 遊學 [ 編輯 ]

張俊河는 1938年 3月 神聖中學校를 卒業한 後 숭실전문학교 를 거쳐 父親처럼 改新敎 牧師가 될 計劃이었으나 숭실전문학교가 神社參拜 拒否運動으로 閉鎖당하자, 1938年 平安北道 井州 에 있던 新安小學校 敎師로 赴任하여 3年 동안 敎師로서 活動하였다. 그 뒤 親舊인 마라톤 選手 김익준 의 勸誘로 日本 留學을 決心하게 되고 敎師를 그만두고 日本 에 留學하였다. [10]

1940年 日本으로 건너간 張俊河는 1941年 4月 도요 大學 哲學과 豫科를 거쳐 1942年 4月 長老敎 系統인 日本神學校 에 入學했다. 張俊河가 入學할 무렵 전택부 , 문익환 , 김관석, 박봉랑 等이 같은 學校에 있었다. [9] [11] 日本神學校 在學 中 張俊河는 先輩 박영출 牧師 가 擔任하는 崇德敎會( 大韓예수敎長老會(統合) )의 委員으로도 活動했다.

1943年 11月 張俊河는 신안小學校 時節 弟子이자, 같은 마을에 살던 김준덕 路線三 의 맏딸인 김희숙과 結婚하였다. 김희숙의 집은 父親 김준덕의 中國 亡命으로 朝鮮總督府 의 注目을 받았고, 김희숙은 이러한 事情을 장준하에게 알렸다. 結婚을 하는 것이 김희숙을 保護하는 길이라 確信하게 된 張俊河는 김희숙의 便紙를 받고 바로 歸國하여 김희숙과 結婚하였다. [週 1] 結婚式은 1944年 1月 5日 에 올렸다.

靑年期 [ 編輯 ]

日本軍 入隊와 脫出 [ 編輯 ]

1943年 , 日本軍 入隊를 拒否하고 勞動御用令으로 끌려가는 親舊 최기일 을 汽車驛까지 마중나가 餞送했다. 日本 警察의 監視를 避해 그는 김창정(金昌禎) 等 少數의 親舊들과 함께 최기일 을 餞送했다.

日帝 强占期 當時 그는 日帝에 依해 强制徵集된 것 [12] [13] 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故鄕 親舊 최기일은 自願 入隊. [14] 라고 陳述하였다. 최기일 은 張俊河의 일군 入隊를 熱心히 挽留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고 學徒兵 에 自願하여 入隊했다. [14]

後日 최기일 에 依하면 '그는 어떤 뜻을 품었는지 日本軍 에 入隊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4] '고 回顧하였다. 張俊河 亦是 自身이 自願 入隊했다고 밝혔다. 自願 入隊한 理由를 그는 自身의 自敍傳 《 돌베개 》에서 밝혔다. '도쿄의 日本神學校에 다녔던 張先生은 ‘우리 집안의 不幸을 내 한몸으로 代身하고자 이른바 그 支援에 나를 맡겨 버렸다’고 回顧했다. 그의 父親은 日本의 神社參拜를 拒否한 改新敎 牧師로 倭政의 要視察 人物이었다. 學兵을 忌避하면 自身의 約婚者가 挺身隊에 끌려가는 等 家族과 周邊에 加할 彈壓 때문에 學兵에 支援했다. [15] '는 것이 그의 說明이다. 또한, 學兵으로 支援한 다음 中國에만 派遣되면 일군을 脫出하고 重慶 臨時政府에 編入되기를 바랬기 [16]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이를 幻想 [16] 이라 表現할 程度로 어려운 일이 었으나, 그것만 믿고 支援했다.

脫出과 移動 [ 編輯 ]

左側부터 老能書 , 김준엽 , 장준하

1944年 1月 20日 日本 陸軍에 學徒兵 으로 入所하여 訓鍊을 받고 平壤 駐屯 第30師團 輜重隊에서 輜重兵으로 服務하였다.

2月 17日 中止나 駐屯 日本軍 第65師團 輜重隊(센(?) 7991部隊)에 倍速 [5] 되었고, 같은 해 7月 7日 中國 장쑤省 (江蘇省) 쉬저우 (徐州)에서 脫營하였다.

1944年 7月 에 經費가 허술한 틈을 타 少數의 同志들과 함께 쉬저우 市內에서 日本軍 을 脫營, 中國 八路軍에서 김준엽, 老能書 等 亦是 日本軍 을 脫出한 朝鮮人 靑年들을 만나 함께 걸어서 안후이省 林泉 까지 걸어갔다. 日本軍 에게 發覺될 念慮가 있었으므로 車輛을 利用하지 못하고 걸어서 갔다. 脫營하면서 手配를 避해 民間人 服裝을 갖추고 충칭까지 向했다. 이때 하늘의 별을 보고 聖經 에 나오는 돌베개를 생각하며,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先祖들의 모습을 보고 反省하며 後孫에게 부끄럽지 않은 先祖들이 되자고 다짐했다. 後日 그의 自敍傳 돌베개 는 이때 떠올린 야곱의 돌베개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한다.

脫營後 만난 김준엽 과 平生 友情을 나눈다. 軍入隊 前 張俊河는 牧師 志望生으로 니혼神學校에, 김준엽 게이오기주쿠大學 文學部 豫科에 在學中이었다. 그들은 도쿄 留學生이었지만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최기일 은 이 둘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었는데 최기일 김준엽 과 新義州高普와 게이오기주쿠 大學 同窓이었고, 장준하와는 朔州郡 대관동에서 어린시절부터 같이 살아온 故鄕親舊였다. 하지만 그들은 日帝의 學兵 要求에 가장 積極的으로 抵抗하는 方式을 選擇했다는 點에서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合意라도 한 듯이 '숨거나 避하지 않고 學兵에 應하되 곧 脫營하여 光復軍에 合流한다'는 方針을 미리 굳히고 떠났던 것이다. 1944年 3月 29日 새벽, 김준엽 이 脫營을 했고, 1944年 7月 7日 張俊河가 脫營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으로 뛰어나가 보니 日本軍服 차림의 靑年들이 있었는데, 그 知性的인 얼굴과 느낌으로 대번 나는 나와 같은 韓國의 學兵日 것으로 斷定했다. 韓國분들이시죠?" 그렇다는 對答을 듣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그들을 次例로 꽉 끌어안았다. 나는 이때처럼 感激에 차고 喜悅에 넘친 일은 없었다. (中略) 나와 장준하 兄과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인데 이로부터 그와 나는 親兄弟 以上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年 8月에 別世할 때까지 戀人처럼 一生苦樂을 함께 하게 된다. - 김준엽 回顧錄, <章程> 1卷, 249쪽"

충칭 到着과 光復軍 入隊 [ 編輯 ]

1944年 시안 에서 脫出한 장준하, 김준엽 等 50名이 노하구에 到着하자 이 情報를 入手한 金元鳳 은 張俊河와 一行을 光復軍 第1地帶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金元鳳 은 사람을 보내 장준하 一行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脫營하여 노하구까지 왔던 이들이 충칭 으로 떠나려 하자 제1지대의 한 中隊長을 통해 이들의 離脫을 막으려 努力했다. 說得의 內容은 '노하구에 繼續 머물러서 제1지대를 補强하자는 것이었다. [17] ' 그러나 장준하 等은 拒絶했다. 張俊河는 이를 두고 '靑年同志 50名을 結束시켜 노하구의 基盤을 確固히 하겠다는 野心인데, 이것은 實狀 임정의 김약산의 속셈이었다. 이 大將이라는 사람을 통해 김약산은 그의 獨自的인 勢力을 擴張 構築해 보려고 工作을 편 것이다. [17] 라고 했다.

金元鳳 共産主義者 라고 確信했던 張俊河는 그가 충칭까지 飛行機便을 周旋해준다는 約束조차 疑心했다. '우리에게 愛好와 지나친 親切을 베풀고, 헛된 約束으로 飛行機 篇까지 斡旋해주겠다는 虛風은 全部 그들의 酬酌. [17] '이라 했다.

金元鳳 의 迎入 提議를 拒絶하고 一行들과 함께 걸어서 안후이省 임천에 到着, 中國 中央軍官學校 林泉分校(臨川分校)의 韓國光復軍 幹部 訓鍊班에 들어갔다. 이때 〈燈불〉을 發行했다. [11] [18] 1944年 8月 中國 中央軍官學校 林泉軍官學校(分校)에서 3個月間 軍事敎育을 받았고, 1944年 12月 中國 中央軍 準位 로 任官되었다. [19] 그 뒤 張俊河와 김준엽 等은 無事히 쓰촨省 충칭에 到着하였다.

光復軍 活動 [ 編輯 ]

韓國光復軍 隊員들 (1939年 4月 4日)

그 後 1945年 쓰촨省 충칭 (重慶)으로 가 1945年 1月 31日 重慶 大韓民國 臨時政府 에 到着하였다. 한便 金元鳳 은 장준하 等을 끌어들이려고 努力하였는데, 뒷날 張俊河는 조선민족혁명당 金元鳳 系列이 甚至於 美人計를 쓰기도 하였다고 批判하였다. [20] 이어 大韓民國臨時政府 內部의 派閥 다툼에 厭症을 느끼고 이를 批判하기도 했다. 臨時政府 의 固着化된 派閥다툼에 厭症을 느낀 그는 臨政 要人들의 分裂相을 糾彈하며 다시 日本軍 으로 돌아가 臨政을 爆擊하겠다며 要因들을 批判하였다. 한便 그는 金九 의 挽留로 金元鳳 批判을 그만두기도 했다.

1945年 2月 20日 충칭 (重慶)에서 光復軍 에 編入하여 光復軍 將校로 任官, 光復軍 所謂 가 되어 충칭 土交代(土橋隊)에 居住하였다. 그는 親舊인 김준엽 等과 함께 臨政 要因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回顧談을 듣기도 했다. 또한 여기서 燈불3·4·5號를 發刊하였다.

以後 1945年 11月까지 충칭에 滯留하다 歸國하였다. [11] 張俊河는 1945年 4月 29日 18名과 함께 書案에 있던 光復軍 第2地帶에 配屬되어 活動하던 中, 李承晩 , 金九 , 이범석 等의 主導下에 韓國 光復軍과 美國 陸軍의 合同訓鍊 協定이 締結되면서 美軍 戰略諜報臺(OSS) 隊員이 되어 3個月間 國內 眞空作戰에 加擔했다. 5月 1日 光復軍 陸軍 中尉로 進級, 以後 中國 시안 (西安)에서 美國 陸軍 軍事敎育을 받고 國內 密派 特殊工作員으로 待機하였다.

申翼熙와 葛藤 [ 編輯 ]

한便 臨政 要因 中 光復軍이나 脫出 靑年을 빼가 勢力을 構築하려던 신익희 와 갈등하였다. 신익희 는 臨政이 聯立內閣으로 發足할 때 신익희는 韓國靑年當 의 代表로 立脚 [21] 하였다. 張俊河는 '그러나 그 靑年黨은 事實 1人 1黨의 孤獨한 黨이어서 新內務部長이 외로웠던 것은 事實이다. [21] '라고 證言하였다.

장준하 等 日本軍 脫營兵들이 光復軍으로 編入되어 移動해갔으나 신익희 는 이들 靑年들을 自身의 側近으로 迎入하려 努力했다. 신익희는 日本軍이나 學徒兵을 脫出하여 臨政으로 찾아오는 젊은이들 外에, 光復軍 訓鍊場에도 直接 訪問하여 靑年들 中 一部를 包攝하려 努力했다. 張俊河는 自身의 自敍傳 돌베개 에 이를 記錄하였다.

張俊河에 依하면 '우리가 一旦 臨政을 떠나 土窖에 와 있는데도 신익희 內務部長은 우리 隊員을 한둘씩 불러내어가곤 했다. 한두 次例 불리어 간 同志가 있었을 때 우리는 그 意圖를 알 수가 있었지만, 그것이 相當히 隱密한 計劃으로 進行되는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왜냐하면 불리어 갔다온 隊員들이 왜 불려갔는지를 똑똑히 말해주지 않고 그저 어물어물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 次例 다녀온 隊員들이 늘고 그 回數가 늘어 마침내는 數十 名이 되자, 그들은 마침내 우리로부터 離脫해, 다시 臨政에 되돌아갈 것을 正式으로 提議하기 始作했다. [22] 간다는 理由는 臨政 內務部 管轄로 '警衛隊'라는 것이 새로 組織되는데, 그 經緯隊員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22] ' 한다.

장준하 等은 經緯隊員이 되려고 다시 臨政으로 가겠다는 同志들을 붙잡았으나 失敗했다. '우리들 全體는 그동안 같이 苦生해온 情을 呼訴, 몇 番이나 말렸으나 그들은 이미 新 內務部長官과 關係가 깊어진 듯 끝내 固執을 부렸고 마침내는 가고 말았다. [22] '한다. 申翼熙의 流暢한 達辯에 매료당한 젊은이들은 申翼熙를 따라 충칭 으로 갔다.

同志들이 신익희 를 따라 가자 張俊河는 憤怒했다. 張俊河는 一旦 그들을 보내놓고 밤새워 謄寫를 專斷했다. 謄寫를 傳單韓 內容은 신익희 내무부장을 비롯한 其他 政黨의 政黨人들을 糾彈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燈불 雜誌의 號外 形式으로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장준하外 20名은 그것을 안고 몽둥이까지 하나씩 들고 臨政을 向해서 出動했다. [21] 젊은이들이 몽둥이를 들고 自身을 찾아온다는 消息을 듣고 신익희는 避身했다. 臨政 廳舍에 닿은 장준하 一行은 '警衛隊를 解體하라', '젊은이는 戰線에 나가 죽게 하라'는 等의 口號를 외치고 申翼熙를 찾았다. 그러나 신익희 는 어느새 재빠르게 사라져버렸다. [21] 結局 이들은 糾彈對象을 놓치고 말았다.

光復 以後 [ 編輯 ]

解放과 歸國 [ 編輯 ]

國內 정진군
(左側 네番째부터 장준하, 老能書, 김준엽 , 한사람 건너가 이범석 )

1945年 8月 15日 日本 이 '無條件 降伏' 宣言을 하는 바람에 모든 軍事作戰이 白紙化되었다. 光復 直後 그는 光復軍 大尉로 進級했다.

앞서 8月 14日 이범석 , 장준하, 김준엽 , 老能書 等은 서울 로 向하는 美軍機에 便乘해 西海 上空을 날았으나 美國과 日本의 妨害로 回航했다. 장준하 一行은 다시 中國 試案으로 되돌아갔다가, 그해 11月 23日 臨時政府 主席 金九 等 臨政要人들과 함께 飛行機를 타고 京畿道 金浦郡 金浦空港 에 내렸다. [11] 以後 그는 金九 의 祕書로 政治, 社會活動을 始作하였다.

1945年 9月 初旬 光復軍 將校인 張俊河는 中國 西安 에서 [23] [24] 朴正熙를 만났다는 主張이 있다. 張俊河의 側近인 李喆雨 의 證言에 따르면 張俊河는 朴正熙 를 叱咤했다고 한다. [24] [25]

朴正熙는 典型的인 日本式 軍隊 方針을 獨立軍에게 强要했다. 이에 張俊河 先生이 ‘너 뭐야’하고는 半말로 辱을 했대요. 그랬더니 이 사람이 나와서는 敬禮를 딱 붙이더랍니다. 하도 火가 나서 아무 생각없이 帽子를 휙 벗겨서 땅에다 밟고는 ‘너는 獨立軍 帽子를 쓸 資格이 없어, 獨立軍 訓鍊을 日本式으로 해?’ 하고 惹端을 쳤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푹 꺾고서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日本말로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더 깜짝 놀라서 上部에 報告를 했답니다. 日本 軍隊 出身들이 避難民 隊列에 끼어 있다가 光復軍에 들어왔는데, 이 사람들이 日本軍의 密偵일지 모르니 全部 除去하자는 案을 내놓았습니다. ... 張俊河 先生이 그 사람이 朴正熙였다는 것을 어떻게 記憶하냐면, 잘못했다는 말을 日本말로 했다는 것, 딱 한가지예요.

5·16 軍士政變 後에 朴正熙가 張俊河를 만나자고 請해 왔어요. 그런데도 張俊河 先生은 ‘내가 왜 軍隊 叛亂을 일으킨 놈을 만나느냐’면서 만나지 않았는데 新聞에 난 朴正熙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더랍니다. 그래서 咸錫憲 先生 等 몇사람을 思想界 事務室로 불러서 ‘이 사람은 내가 옛날 滿洲에서 만나본 日本軍이다. 行跡을 알아보자.’고 發言을 한 겁니다. 이 이야기가 朴正熙에게 들어갔고, 그것이 個人的으로 張俊河를 싫어하게 된 理由 中의 하나였답니다.

 
— 백기완, 《韓國現代史의 라이벌》(역사비평사, 1991) 211~212페이지

張俊河와 朴正熙가 解放 前에 舊面이었다는 이들에 따르면, 張俊河는 이때 日本軍 將校라는 過去를 別로 懺悔하지 않고 行動하는 朴正熙에게 日本이 敗亡하기까지 自進해서 일군을 脫出하지 않은 點, 日本이 敗戰하지 않았다면 일군 將校로서 如前히 韓國 獨立鬪士를 虐殺했을 것이라는 點, 유난스럽게 機會主義的인 姿勢 等을 들어 크게 面駁을 주었다고 한다. [24] [25] 하지만 言論인 조갑제 와 張俊河의 아들 장호권 等은 이러한 主張이 事實이 아니라고 한다. 조갑제에 依하면 張俊河와 朴正熙는 이 무렵 만난 적이 없다고 하며, [25] [26] 장호권은 프레시안 과의 인터뷰에서 張俊河와 朴正熙는 全혀 모르는 사이라고 剛하게 말했다.

張俊河와 朴正熙는 全혀 모르는 사이다. 張俊河가 日本軍에서 脫出할때, '日本軍 將校로 나라를 背信하고 光復軍을 때려잡는 將校들이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장준하가 朴正熙라는 存在를 알게 된 것은 남로당事件 때였다.
 

光復 直後 [ 編輯 ]

光復 直後 金元鳳 一派는 장준하 等과 새로 日本軍 出身 脫營, 轉役者 等을 다시 迎入하려 했으나, 張俊河는 金元鳳 의 迎入 努力을 拒絶하였다. 뒷날 張俊河는 '그가 美人計를 써서 眩惑시키려 했다.'고 批判하였다. [27] [28] [29]

이때 金元鳳 은 自願 徵集 또는 强制 徵集으로 日本軍으로 入隊, 日本軍에서 脫出한 韓人을 積極 迎入하려 하였는데, 張俊河는 그의 冊 돌베개 에서 그가 日本軍 出身 韓人들에게 臨時政府 光復軍 에 對한 不信을 助長하고 이소민 等을 派遣하여 姻戚인 日本 所謂 出身 황용주 等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 [30] 張俊河는 金元鳳 等이 計略을 써서 日本 軍 出身 韓人에게 大韓民國臨時政府 光復軍 에 對한 不信任을 助長한다 하여 이소민 等에 對한 資料를 이청천 에게 報告하였다. [30] 이청천 은 光復軍을 直接 査閱하였다. [31]

光復軍 一部의 橫暴가 繼續되자 金元鳳은 이를 利用하려 했다. [32] 臨政과 光復軍에 對한 不信作用을 日本軍 出身 部隊에 加했다. [32] 45年 10月 7日 충칭 의 光復軍 司令官 이청천 상하이 로 왔는데 日本軍 出身 部隊는 司令官 이청천에 對한 査閱을 拒否하였다. 장준하 等은 그들 가운데 某 將校, 某 將校 等을 直接 찾아다니면서 이 問題에 對한 議論을 始作했다. [32] 後日 張俊河는 이를 두고 '議論을 始作했지만 實은 懷柔作戰이었다. [32] '고 하였다.

張俊河는 金元鳳의 計劃을 '奸計 [32] '라고 評하였다. 장준하 等은 金元鳳 의 計劃을 알려주고 그 代理人노릇을 했던 責任者 黃毛와 이소민에 對한 資料를 주어 그들을 不信任시켰다. [32] 說得은 奏效했고 이청천 이 直接 査閱을 받게 되었다. [31]

解放 政局 活動 [ 編輯 ]

金九
(그는 解放直後 金九의 祕書로 活動했다.)
이범석

解放後, 11月 臨時政府 還國 第1陣에 包含하여 歸國하여 金九 의 祕書로 活動하였다. 이때 그는 李承晩 의 側近인 윤치영 의 公報祕書로 있던 최기일 과 함께 李承晩 金九 의 合作과 連帶를 위해 努力하였으나 失敗로 돌아가고 말았다. 1946年 金九 非常국민회의 를 召集하자 參與, 非常국민회의 書記에 選出되었고, 2月 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이 開院되자 2月 26日 그는 민주議員 祕書로 選出되었다.

1946年 4月 26日 그는 尤史 金奎植 이 設立한 韓國靑年團 에 加入하여 活動한다. 김규식 은 張俊河를 韓國靑年團 調査部長에 임명했다. 그러나 張俊河는 京橋莊 을 나오면서 韓國靑年團 에서도 脫退하게 된다.

以後 張俊河는 李承晩 의 側近이었던 윤치영 의 祕書로 있는 故鄕親舊 최기일 과 接觸, 李承晩 金九 量子의 協力과 協調를 위해 努力하였으나 이들의 努力은 失敗로 돌아가고 만다.

1946年 여름 歸國한 光復軍 이범석 은 張俊河를 찾아 自身을 도와줄 것을 거듭 付託했다. 張俊河는 苦悶하였고 臨時政府 主席 金九 에게 事實대로 말하고 諒解를 求하자, 金九 는 그를 보내주었다. 金九 의 京橋莊을 나와 1947年 12月 이범석 朝鮮民族靑年團 에 參加, 中央訓鍊所의 敎務處長職을 맡았다. 그러나 張俊河는 곧 族靑을 떠나고 말았다. [33]

官僚, 言論 活動 [ 編輯 ]

政府 樹立 直後 [ 編輯 ]

以後 1946年 부터 1947年 2年間 李承晩 의 公報祕書가 된 親舊 최기일 과 만나 李承晩 金九 사이의 意見 一致와 合作을 위해 上衣, 努力하였으나 장덕수 의 暗殺 事件을 契機로 李承晩 - 金九 의 合作은 失敗하고 만다. 合作 失敗 以後 그는 金九 , 김규식 의 南北協商에는 參與하지 않고 政府樹立을 支持하는 立場을 取하였다. 以後 張俊河는 當分間 별다른 政治的 活動을 取하지 않고 있었다.

1949年 1月 圖書出版 한길사를 設立했다. [34] 出版活動을 하던 그는 1949年 2月 韓國神學大學 에 編入學, 같은해 6月 韓國神學大學 을 卒業( 學士 )하였다. [34] 以後 言論 活動에도 參與하여 東亞日報 等에 社說이나 칼럼을 發表하기도 했다.

第1共和國 官僚 活動 [ 編輯 ]

이범석 의 곁을 떠난 張俊河는 6·25 戰爭 前 李承晩 政府에서 公務員 으로 任用되었다. 1950年 3月 大韓民國 行政府 行政 書記官 (4級)에 任官되어, 문교부 國民精神啓蒙 擔當官이 되었다.

1952年 3月 문교부 傘下 國民思想硏究院 企劃科長이 되었고, 以後 國民思想硏究院 庶務課長, 事務局長 等을 歷任했다. [34] 大韓民國 政府 樹立의 不可避性을 認識한 그는 思想的, 이념적인 正當性을 獲得하는 길만이 北韓 을 이기는 길이라 確信하고 國民 啓蒙을 위한 칼럼, 講演活動 等을 하였다.

1952年 12月 思想界 12月號 (4號)까지 發刊 後, 戰爭 中 資金 調達이 如意치 않자 財政問題로 一時的으로 發行을 中斷하였다. 그 後 1953年 4月 문교부 國民思想硏究院을 辭退, 짧은 公務員 生活에서 退職하였다. 1953年 4月에는 雜誌 思想界 를 創刊하여 活動하였다. [35] 1952年 休戰으로 다시 서울 로 올라왔다. 그는 韓國 戰爭 에서 休戰이 된 것을 肯定的으로 解釋했다.

"6·25街 일어났다. 當然히 받을 채찍이 땅에 臨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아 그래도 이 百姓을 公算力道( 共産逆盜 )들의 손아귀에 아주 넣지는 않은 것이다. [36] "

休戰이 되자 그는 서울로 上京하였다.

言論 活動 [ 編輯 ]

1953年 9月 思想界 1953年 9月號를 끝으로 釜山時代를 마감, 서울 鍾路 韓淸빌딩에 事務室을 入住하고 思想界를 繼續 發行하였다.

1956年 '東人文學賞'을 制定하여 第1回를 發表하였다. [37] 東人文學賞은 小說家 김동인 을 追慕하여 만든 金東仁 文學賞이었다. [10] 東人文學賞을 통해 張俊河는 鮮于煇, 吳尙源, 손창섭, 이범선, 서기원, 남정현, 전광용, 이호철, 송병수, 김승옥, 崔仁昊, 이청준 等의 文人들을 發掘했다. [37]

1957年 10月 10日 , 최남선 이 "內鮮一體", "皇國文化 선양" 따위 口號를 외치면서 日帝로부터 職位나 金錢的인 惠澤을 받아 누리다 享年 68歲로 死亡하자, 發行人인 張俊河는 서둘러 六堂 의 하세(下世)기념 特輯을 냈고 [38] 그를 擁護하는 글을 思想界에 揭載하기도 하였다. [39]

思想界 編輯委員會는 뜻을 文化의 所長(消長)과 民族의 命運에 두는 모든 人士와 더불어 衷心으로 故 六堂 崔南善 先生을 哀悼하고 그 出衆한 人格과 生前에 남기신 業績의 偉大性을 銘感(銘感)하여 이를 領洗에 傳하고자 先生이 逝去하신 이 해 1957年 送年號를 六堂 記念號로 삼아 在天(在天)의 靈前에 드리나이다. [38] [40]

? 장준하, 최남선 憲政史

한 때 先生의 志操에 對한 世間의 誤解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先生의 本意가 어디까지나 이 民族의 運命과 이 나라 文化의 所長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事實로서 밝혀진 바요, 巷間에 떠도는 搖動父女(妖童浮女)들의 臆說과는 全面 그 櫃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法이 없고 人材를 自己 눈瞳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事物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風潮 때문에 우리는 解放된 後에도 先生에게 榮光을 돌린 일이 없고 그 勞苦를 致賀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實로 온 民族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38] [39] [40]

? 장준하, 卷頭言
第1回 東人文學賞 受賞者들에게 賞狀을 傳達하는 《 思想界 》 社長 장준하

1958年 8月 思想界 에 올린 칼럼들 中, 함석헌 의 '생각하는 百姓이라야 산다'는 글로 함석헌 과 함께 連行되었다가 풀려났다. 1958年 9月 小說家 김동인 (金東仁)을 追慕하는 東人文學賞을 制定하여, 每年 神인 小說家들을 選拔하여 授與하였다. 1959年 2月 2.4 保安法 波動 關聯, 그는 白紙卷頭言으로 自由黨 政權에 抗拒하였다.

1958年 , 1959年 그는 李承晩 政權의 獨裁를 批判的인 立場의 칼럼을 發表하며 李承晩과 自由黨 政權을 糾彈했다.

1960年 3月 3·15不正選擧를 恣行한 自由黨 에 對해 自身의 思想界 卷頭言에서 執權 自由黨 의 橫暴를 辛辣하게 糾彈했다. 4·19 革命 을 거쳐, 5月 유네스코 韓國委員會 中央執行委員에 被任되었다. 以後 유네스코 弘報分課委員長을 歷任했다.

第2共和國 官僚 生活 [ 編輯 ]

1961年 2月 國土建設團 修了式
第2共和國 의 大統領 윤보선 (오른쪽에서 두 番째)과 總理 場面 (왼쪽 끝)

1960年 4·19 革命 以後, 7月 場面 (張勉) 內閣 이 出帆한다. 以後 그는 國務總理 場面 의 後援으로 國際問題硏究所를 組織, 民主黨 政權의 硏究費 支援을 받고 經濟政策 硏究 開發을 하였다. 國務總理 場面 은 여러番 그에게 사람을 보내 自身을 도와줄 것을 要請했다.

張俊河는 自身을 도와달라는 場面 의 거듭된 付託을 받아 立脚한다. 張勉 政權의 實力者인 財務 長官 利子 思想界 同人 이던 金映宣 (金永善)의 支援으로 사상계사의 負債를 廳傘下祈禱 했다. [41] 1960年 10月 場面 內閣의 문교부 大學敎育審議會議員, 1961年 1月 大韓民國 國土建設團 企劃部長에 拔擢되었다. [34] 그 뒤 國土建設團 團長을 맡기도 했다. [週 2]

國土建設團 의 企劃部長으로 있으면서 그는 事實상의 國土建設團의 運營을 責任, 總括, 指揮하였다. 또한 大卒 美就職 靑年들의 國家觀과 社會觀 敎育을 위해 함석헌 , 주요한 , 박순천 等을 講師로 招聘하여 學生들의 心性修鍊과 敎育을 擔當하였고, 張俊河 自身도 國土建設團 講師로서 精神敎育을 맡았다.

政治 活動 [ 編輯 ]

5·16 軍士 政變 前後 [ 編輯 ]

5·16 軍士쿠데타 直後 軍人들

1961年 5月 16日 朴正熙 · 장도영 · 金鍾泌 等에 依해 5·16 軍士 쿠데타 가 發生하자 《 思想界 》地 卷頭言은 쿠데타 支持 聲明을 發表했다. [42] [週 3]

絶頂에 達한 國政의 紊亂, 痼疾化한 腐敗, 痲痹 狀態에 빠진 社會的 紀綱 等 累卵의 危機에서 民族的 活路를 打開하기 위하여 最後 手段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軍事革命이다.
4·19革命이 立憲政治와 自由를 爭取하기 위한 民主主義 革命이었다면, 5·16革命은 腐敗와 無能과 無秩序와 共産主義의 策動을 打破하고 國家의 進路를 바로잡으려는 民族主義的 軍事革命이다.
따라서 5·16革命은 우리들이 育成하고 開花(開花)시켜야 할 民主主義의 理念에 비추어 볼 때는 不幸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危急한 民族的 現實에서 볼 때는 不可避한 일이다.

? 1961年 6月, 《사상계》 卷頭言 [42]

윤보선 大統領이 5·16을 追認하면서 5月 20日 場面 內閣은 總辭退를 하였고, 第2共和國 崩壞 以後 張俊河는 主로 言論活動에 從事하였다. 軍政 初期에 張俊河는 軍事政變을 支持하였다. 그러나 後에 朴正熙 가 民間政府로 移讓하지 않고 執權을 推進하게 되자, 張俊河는 이에 對한 反撥로 路線을 바꾸어 朴正熙 를 批判하는 立場에 서게 된다. 軍政에서 그가 태완선에게 1千萬 圜을 빌린 것을 물고 늘어져 그를 腐敗 言論人으로 規定, 政治活動 禁止對象者로 묶어버리자 그는 軍事政變에 對한 支持를 撤回하게 된다.

강원용 牧師의 證言에 따르면 그 뒤 思想界 가 經營難에 빠지자 강원용 을 찾아 引受해줄 것을 要請하였으나 강원용 으로부터 거절당하였다. 그 뒤 朝鮮日報 出身 言論人 부완혁 에게 思想界 를 넘겼으나, 그 後에 부완혁 과 갈등하게 되었다. [11] [35] 1962年 필리핀 에서 막사이사이상 을 受賞했다.

5·16 軍士쿠데타 支持와 撤回 [ 編輯 ]

軍政에 對해 支持를 表明하였으나 張俊河는 곧 軍政과 衝突을 겪게 된다. [44] 1961年 7月號에 張俊河의 卷頭言 〈緊急을 요하는 革命 課業 完遂와 民主 政治에로의 復歸〉, 함석헌 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가 나간 뒤 張俊河는 軍事政權에 불려간다. [44]

5·16 直後인 《사상계》 1961年 6月號 卷頭言은 “4·19 革命이 立憲 政治와 自由를 爭取하기 위한 民主主義 革命이었다면, 5·16 革命은 腐敗와 無能과 無秩序와 共産主義의 策動을 打破하고 國家의 進路를 바로 잡으려는 民族主義的 軍事革命이 [41] [45] 다”라고 하며 5·16 쿠데타를 事實上 支持했다. [46]

다만 《사상계》 卷頭言은 1955年부터 50年代 말까지 張俊河의 이름으로 쓰여졌고, 그 以後 장준하 外의 사람이 代筆했을 境遇에는 筆者를 無記名으로 하여 밝히지 않았다. [47] [48] 問題의 1961年 6月號 卷頭言과 編輯後記는 無記名으로 되어 있어, 이것이 張俊河의 글인지 쿠데타 勢力의 壓迫에 依해 다른 사람이 代筆한 것인지는 確實하지 않다. [49] 하지만 發行人 張俊河의 責任을 免罪할 수는 없으며, 《사상계》 1961年 6月號는 卷頭言 뿐 아니라 朴正熙와 장도영의 寫眞 畫報를 싣기까지 했다. 장준하 評傳을 쓴 김삼웅은 《사상계》 1961年 6月號는 사상계 精神을 가장 크게 毁損했다고 批判했다. [50] 以後 7月號에서 咸錫憲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軍事革命을 迂廻的으로 批判하는 글을 실었지만 《사상계》는 그 以後에도 相當期間 동안 쿠데타의 不可避性을 認定했다. [46]

張俊河가 이같이 5·16 軍士 政變 을 " 民族主義 軍事革命 "이라며 極讚을 아끼지 않은 理由는 5·16으로 登場한 軍事政權이 親美(親美) 路線을 걸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44] 事實 張俊河는 積極的인 親美主義者였다. 後에 그가 모든 統一은 다 좋다고 말한 것과는 달리 張俊河는 이 當時만 해도 反共을 最優先에 두고 있었으며, '親美'를 가장 重要하게 생각했다. [44] 때문에 張俊河는 極度의 混亂으로 치닫던 場面 政權을 一擧에 무너뜨리고 反共論理로 武裝한 채 登場한 軍事政權에 支持를 보내게 된 것이다. [44] 또 여기에 美國이 軍事政權을 支持한 것이 張俊河가 軍政을 支持한 主要한 動機로 作用했다. [44] [51]

張俊河는 軍政 初期에 軍政 勢力과 美國 勢力間의 만남을 周旋하기도 했다. [44] 이는 張俊河는 쿠데타의 主役들과 美國과의 關係 改善을 圖謀하기 위한 파티 [46] 였었다. 當時 軍政 勢力은 軍 內에서 非主流 勢力이었기 때문에 美國과의 關係가 좋지 않았는데 張俊河는 이들의 關係를 改善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 [44] 1961年 7月 初 昌慶苑에서 열린 이 파티에는 美國 側에서는 버거 大使와 하비브 政治參事官이 參席하고 軍政 勢力에서는 장도영 一波만이 參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4] [52] 그러나 파티에 朴正熙 系列 人士들은 參席하지 않았고, 이는 나중에 장도영과의 關聯說이 나오는 原因이 되었다.

朴正熙 를 비롯한 쿠데타 主役들은 大部分 軍隊 내 疏外된 非主流勢力이었고 따라서 美國 特히 現地 關係者들과의 關係가 圓滿하지 못했다. 美國이 쿠데타를 現實로 認定했지만 쿠데타 直後에도 兩者의 關係가 좋지 않았다. [46] 그래서 美國 通引 張俊河는 사상계사의 이름으로 7月 初에 昌慶苑 파티를 통해 兩側의 核心 人士들을 招請하여 關係 改善을 試圖하기도 했다. [46] 또 一部 人士들(李廷煥, 박동묘)을 쿠데타 主體들에게 推薦하기도 했다. [46]

筆禍 事件 前後 [ 編輯 ]

金鍾泌

早速한 民政 移讓을 促求하는 咸錫憲의 글이 실린 《사상계》 7月號가 나가고 4,5日 뒤, 退勤時間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社에 軍人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革命軍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時까지 社長과 編輯 責任者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時刻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用件을 傳했다. [53] 다음날 張俊河는 編輯 責任者인 取材部長 고성훈과 함께 指定한 時刻인 아침 7時에 會社로 나갔다. 검정 지프車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軍人 2名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車는 張俊河와 고성훈을 싣고 가 南山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層 집의 한 房에다 내려놓았다. [53]

20分뒤 김종필이 나타났고 [54] 김종필은 《사상계》 7月號에 실린 咸錫憲의 5·16 軍事政變을 迂廻的으로 批判한 칼럼을 問題 삼았다. [55]

精神分裂者 같은 令監쟁이의 이 따위 글을 都大體 무슨 底意로 여기에 실었소? 聖스러운 革命 課業 遂行에서 當身은 우리 軍事革命을 冒瀆하자는 거요? 이걸 싣게 된 經緯와 目的을 말하시오. [56] [57]
 
— 金鍾泌
이 글은 내가 直接 함 先生께 付託해서 내손으로 받아다 내가 읽어 보고 실은 것이오. [56] [57]
 
— 장준하

張俊河는 말을 繼續했다.

여러분은 이 글을 좋지 않게 보는 模樣이오만 내 나름으로는 이 글이야말로 軍事革命을 일으킨 여러분을 위하고 革命 課業을 遂行하는 데 [57] 있어 가장 時宜에 맞는 忠言이라고 確信하여 실은 것이외다. 좋은 藥은 입에 쓴 法으로, 當場은 多少 거슬리는 데가 있을지 모르지만 내 確信이 틀리지 않는 限 여러분을 위하고 나라의 將來를 위하는 忠情이 들어 있는 글인 것만은 틀림없소. 只今 우리나라의 모든 言論 機關이 革命 課業을 遂行하는 過程에서 잘한다는 말 以外의 다른 말들은 一切 하고 있지 않소.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나라의 向方이 옳은 길로 걸어가는 것 같지가 않고, 또한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말로는 못하지만 생각은 나와 같기 때문에 忠告로 이 글을 실은 겁니다. 나와 함 先生 外에는 이런 時期에 이런 忠告를 할 사람이 없소. [58]
 
— 장준하

張俊河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冊을 急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問題의 글과 卷頭言을 펴 여기저기 한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58]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忠告냐는 式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張俊河는 抗議했다. [58]

왜 남의 글을 그런 대목만 部分的으로 떼어서 問題 삼으십니까? 全體를 가지고 말 하시오. [58]
 
— 장준하
어디 雜誌를 읽는 사람들이 앞뒤를 다 읽고 맞추어 解釋해요? 大部分이 이런 刺戟的인 部分의 文句들에 依해 眩惑되기 마련 아니오? [58]
 
— 金鍾泌

그러나 金鍾泌 은 그가 장도영과 같은 故鄕이라는 點을 問題 삼았다. 그러나 張俊河는 장도영 과의 關聯을 否認하였다. [56] [59]

장도영과 나는 같은 平北 出身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龍泉 出身이고 나는 朔州가 故鄕이외다. 日本軍에 잠깐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알고는 있지만 그 사람과 無關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지난 行跡을 그다지 좋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람과 나를 聯關시키는 것은 나를 冒瀆하는 것입니다. [59]
 
— 장준하

張俊河의 對答에 김종필은 興味를 느껴 繼續 꼬치꼬치 캐물었고, 張俊河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自身이 平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對한 追憶을 陳述하였다.

張俊河와 장도영은 中國 序奏에서 같이 있었다. 그곳에서 韓人 脫營 事件이 자주 일어나자 學徒兵들에 對한 監視와 逼迫이 甚했다. 그때 장도영은 日本刀를 빼들고 脫走하는 者는 自己가 먼저 處斷하겠다고 설치다가 張俊河와 衝突했다. 그리고 脫出이 어려운 쓰카다 部隊로 같이 옮겨가서는 張俊河가 벌인 '殘飯 拒否 運動'으로 두 사람은 反目한다. [56] [59] [60] 性이 같고 故鄕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呼吸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59] 같은 西北人 出身이라 하지만 張俊河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糖으로 牟尼 참을 수가 없었다. [61]

? 張俊河의 陳述 整理

김종필이 張俊河와 장도영의 사이를 疑心할 만한 理由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死傷文庫 100卷 出刊 記念 리셉션을 昌慶宮(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當時 思想界의 國際的인 名聲 때문에 그날이 7月 4日 美國 獨立 記念日인데도 美國 大使가 直接 參席하고 內外 貴賓이 數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軍部에서도 장도영 最高會議 議長 以下 그 一派가 모두 枉臨했다. 그때 朴正熙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56] [61] 그리고 7月 5日 장도영 一派는 모두 逮捕되었다.

1961年 7月 中旬, 張俊河가 南山에 다녀온 지 2週 後 서울市廳에 자리잡고 있던 軍事政權의 不正蓄財者 處理委員會에서 出頭 命令이 날아왔다. [62] 處理委員會를 訪問하자 陸軍 少領은 그에게 半말을 하며 侮辱的으로 追窮하였다.

너 金映宣이한테서 돈 얼마나 받았어? [62]
金映宣이가 네게 돈 줬잖아? 그게 얼마냔 말이다! [63]

김영선은 張俊河를 어떻게든 自己들 政府의 일에 參與시키고자 說得하던 中 張俊河의 빚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것을 재무부 長官인 自己가 責任을 지고 融通해주겠다고 하였다. [63] 內閣의 總理 場面 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出勤할 만큼 가난한 政府의 財務部 長官 金映宣 은 사상계사의 빚 3千萬 圜을 解決해 주겠다고 豪言해 놓았으나 다음날 사람을 시켜 보내온 것은 1千萬 환이었다. [63] 金映宣 의 意圖는 '于先 이 돈으로 急한 불부터 먼저 끄고 나머지는 또 어떻게 周旋해 보겠다. [63] '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선은 돈을 더 求해 보내지 않았고 張俊河도 더以上 採根해 조르지 않았다. [63] 그러나 돈을 받았으므로 張俊河는 事實대로 對答하였다. 그러나 陸軍 少領의 半말 追窮은 繼續되었다.

*장준하 : 當身 그 語套는 좀 고치시오. 엊그제 金鍾泌 氏를 만났는데 그분도 當身 같은 그런 語套는 쓰지 않았소. 그런데 여기서는 왜 다르오?

  • 少領 : 뭐라구? 잔말 말고 어서 묻는 말에 對答 못해?
  • 장준하 : 하리다. 받은 건 事實이고 1千萬 환이오.
  • 少領 : 그것뿐이야? 더 있을 텐데? 똑바로 臺. 이것들 모조리 죽여버린다. [63]

少領은 部下들에게 "사상계社에 가서 文書, 帳簿 모두 押收해 오라. [63] "고 指示했고 그 뒤 民間人 調査官에게 넘겼다. 金映宣度 審問 끝에 장준하에게 1千萬 圜을 준 것을 發說하였다. 이 돈이 김영선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보내준 돈인가는 모르지만 張俊河는 本來 남의 돈을 거저 얻어 쓰고 안 갚는 그런 爲人이 아니므로 1千萬 圜에 對한 車用 擔保로 自己가 살던 집의 文書를 갖다주었었다. [64]

民間人 調査官에게 넘겨진 張俊河는 쓰라는 대로 經緯의 陳述書를 쓰고 나왔다. 그러나 그날 實際로 軍部에서 사상계社에 나와 帳簿를 入手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後에도 張俊河는 그 일로 인해 네 次例나 더 불려갔다. 市廳의 不正蓄財處理委員會에 한番 더 불려가고 革命檢察部와 革命裁判所, 그리고 서울地方國稅廳 에 各各 한 次例씩 불려다녔다. 그 돈 1千萬 圜을 1961年 年末까지 갚기로 하고 겨우 불려가는 일이 끝났다. [64] 그러나 그때 張俊河는 타임, 라이프의 빚이 如前히 그대로 남아 있는 等 泰山 같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加算 差押을 當해 사는 집이 넘어갔으며, 1962年 3月 빚을 淸算한다. [64] 金映宣 에게 1千萬 圜을 받으면서 그에게 갖다 준 집文書는 다시 되찾지 못한 채 그대로 집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64]

政治淨化法과 野黨化 [ 編輯 ]

1962年 張俊河가 서울 성동稅務署 에 1千萬 換衣 돈을 갚자, 1962年 3月 16日 軍政에 依해 政治活動淨化法이 發表되었다. 그런데 張俊河가 이 政治淨化法에 걸려 政治 活動을 금지당했다. [65] 政治와 상관없는 그가 政治淨化法에 걸린 것은 '腐敗 言論人'에 包含되었기 때문이었다. 金映宣 에게서 받은 돈 1千萬 圜 때문에 집이 넘어가고 했는데도 그도 政治行爲 禁止者 4,734名 속에 들게 된 것이었다. [65]

政治에 뛰어들 생각을 못해본 張俊河로서는 政治淨化法이 무슨 相關이냐 싶겠지만 그가 腐敗 言論人으로 指彈의 對象이 되어 訂正法에 묶였다는 事實이 新聞에 나자 가장 敏感한 反應을 보인 것은 思想界의 獨子였다. 그리하여 販賣 部數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腐敗 言論人 딱紙는 장준하에게 恥辱的인 멍에였는데 그게 事實이 아니라고 누가 讀者들에게 解明해줄 것이며 또 解明한들 한番 난 所聞인데 쉽게 생각을 바꿀 [65]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以後 그는 윤보선 을 政治的으로 支持하였다.

그해 8月 필리핀 으로 가서 막사이사이 賞 (賞)을 받고 歸國하였다.

第3共和國 [ 編輯 ]

韓日會談 反對와 朴正熙 批判 [ 編輯 ]

1963年 軍事政權이 出帆하면서 張俊河는 윤보선 , 장택상 , 함석헌 , 계훈제 等과 함께 野黨 活動에 뛰어든다.

윤보선 , 장택상 , 박순천 等이 朴正熙 政府의 韓日會談을 '대일屈辱外交'로 規定하고 韓日會談 反對運動을 벌이자 張俊河도 이들의 活動에 同參한다. 以後 1964年 3月 張俊河와 《사상계》는 韓日會談 反對示威의 先鋒에 섰다. 윤보선 , 장택상 을 中心으로 대일屈辱外交 反對鬪爭委員會가 設置되자 1964年 3月 부터 그는 대일屈辱外交 反對鬪爭委員會의 招請演士로 全國을 巡廻 講演하며 70餘 會議 演說을 통해 朴正熙 , 金鍾泌 等과 韓日會談 主體勢力을 批判하였다.

大選에서 張俊河는 日本 帝國主義 軍隊에 있었던 사람이 大統領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主張했다. [66] 張俊河는 朴正熙 政權의 韓日 協定을 日本 帝國主義 軍人 出身이 侵略者이며 戰犯者 集團인 日本 자민당과 賣國協商을 하는 것으로 判斷하고, 1964年 4月號를 緊急 臨時增刊號로 내놓았다. [11] '韓日會談의 諸問題'는 韓日會談을 反對하는 이 나라 知識層의 醫師를 批判的으로 담아낸 韓日會談 反對陣營의 敎科書가 됐다. 이어서 1965年 7月 에 '新(新) 乙巳條約 의 解剖'를 또다시 緊急 增刊號로 發行해 韓日會談 反對陣營의 理論的 橋頭堡가 됐다. [11] 朴正熙 政權은 ‘사상계’를 ‘返品作戰’으로 되돌리는가 하면, 1965年에는 두 次例에 걸쳐 물샐틈없는 稅務査察을 恣行해 ‘사상계’를 枯死狀態로 몰아갔다. [11] [11]

1966年 사카린 密輸 事件 이 일어났다. 이 過程에서 執權層과 三星의 李秉喆 사이에 癒着이 있었다는 情報가 새어 나왔고, 野黨과 大學生들이 全國的인 糾彈大會를 열었다. 1966年 10月15日 大邱市 輸城川에서 열린 민중당 主催 '特定財閥 密輸眞相 暴露 및 糾彈 國民大會' 時局 講演 演士로 參席했다. 張俊河는 糾彈大會에서 財閥總帥와 政府 高位層 사이에 오간 內容을 暴露하면서 “우리나라 密輸 王초는 바로 朴正熙”라고 批判하였다. [11] 이어 "존슨 大統領이 訪韓하는 것은 朴正熙 氏가 잘났다고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韓國靑年의 피가 더 必要해서 오는 것"이라는 發言도 注目을 받게 됐다.

張俊河는 朴正熙 와 財閥들을 辛辣하게 批判하다가, 朴正熙 密輸王초 發言 等이 問題되어 10月 26日에 拘束되자 "行政首班으로서 特定財閥 密輸에 關한 責任을 져야 한다"며 "政治資金 收受 운운한 것은 드러난 事實에 따라 自己의 主觀대로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12月 24日에 朴正熙 를 證人으로 申請했으나 서울刑事地方法院 10單獨 안우만 判事는 이를 棄却하였다. 한 달間 收監됐다가 1966年 12月 30日 保證金 5萬원과 自宅으로 住居를 制限하는 條件으로 保釋 을 許可받아 釋放되었다. 그 뒤 1967年 2月 20日 열린 結審公判에서 정명래 檢査는 "政治的 發言이라고 하더라도 國家元首를 冒瀆한 것은 言論의 自由 限界를 벗어난 것"이라며 懲役2年을 求刑하였고 [67] 2月 28日에 "政治人의 政治的 發言이라고 해도 實定法에 抵觸되면 規制받아 마땅하다"면서 "被告人의 演說 內容은 그 眞實을 立證할 수 있는 具體的인 證據가 없어 犯意를 認定할 수 있다"며 懲役 6月을 宣告했지만 寶石을 維持했다. [68] [69] [70]

野黨 團結 및 候補單一化 運動 [ 編輯 ]

1967年 選擧 때는 朴正熙 가 東南亞와 美國 을 다녀오더니 靑年들을 베트남 에 팔아먹을 것을 構想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拘束되었다. [71]

1967年 3月 그는 野黨의 候補 單一化를 위해 4者會談( 백낙준 - 윤보선 - 유진오 - 이범석 )을 周旋하였으나, 各 政黨 大選候補 間의 異見으로, 意見 調律에 失敗했다. 그러나 野黨 統合을 推進하여 新民黨 에 入黨하였고 新民黨 中央黨 黨務委員, 新民黨 서울特別市 第4지구당 委員長 等을 지냈다. 1967年 新民黨 公薦으로 國會議員 總選擧에 出馬하여 當選, 國會議員 을 지내기도 하였다. 選擧 遊說에서 “朴正熙氏는 日本 天皇에게 忠誠을 盟誓하고 日本軍 將校가 되어 우리 光復軍에게 銃부리를 겨눴다. 朴正熙氏는 過去 남로당 軍事組織策으로 南韓에서 地下組織 活動을 한 사람으로 自己 목숨을 救하기 위해 組織員을 팔아 희생시켰다” 라고 朴正熙를 批判하였다. 1971年 張俊河는 自身의 學兵 脫出과 光復軍 參與時節을 回顧하면서 自敍傳 ‘돌베개’를 編輯하였다. ‘돌베개’를 내면서 著述의 理由로 ‘現代史의 證言’임을 밝히면서 “光復軍 出身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一部 人士들이 光復軍 帽子 하나를 얻어 쓰고 其實 果然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것도 歷史 앞에 밝히고자 함”이라고 밝혔다. [11] 1967年 4月 野黨 大統領 選擧運動 中 選擧法 違反으로 한달間 投獄되기도 하였다. [72] 1971年 出版社 思想史를 設立, 自敍傳 돌베개를 出版하였다. [34]

6大 大選-베트남戰 反對와 小說 光復軍에 激憤 [ 編輯 ]
윤보선
(63年 大選 以後 그는 政治的으로 尹潽善을 支持하였다.)

6大 大選 遊說期間 中 張俊河는 윤보선 을 支持했다. [73] 윤보선 은 選擧 遊說 中에 越南戰 派兵을 美國 의 '廳夫 戰爭'이라고 批判했고 [73] , 이어 윤보선 을 支持하던 張俊河는 " 日本 天皇에게 忠誠을 盟誓하고 日本 軍 將校가 되어 우리 獨立 光復軍에 銃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朴正熙 의 親日 經歷 疑惑을 爭點으로 꺼냈다. [73] 윤보선과 張俊河는 朴正熙의 越南派兵 强行은 國益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파는 賣國行爲이며, 國民的 輿論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欺瞞術이라며 批判을 加한다.

또, 張俊河는 "우리나라 靑年들을 남베트남 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政權을 維持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派兵 을 批判했다. [73] 서중석 에 依하면 當時 윤보선 과 장준하만 베트남 派兵을 猛烈히 非難했다 [74] 한다. 第6代 大統領 選擧에서 그는 윤보선 을 支持하여, 支持 遊說를 다니던 中 親日派 發言이 問題가 되어 1967年 4月 그는 大統領 選擧運動 中 選擧法違反으로 [75] 拘束되어 3個月間 투옥당하였다. 1967年 7月 에 釋放되었다. 釋放된 뒤에도 그는 越南戰 에 韓國軍 派兵을 反對하였다.

光復軍 出身인 張俊河는 1967年 大選에 맞추어 나온 小說 光復軍(著者 朴盈滿)에 激忿한다. 親日派 朴正熙 大統領을 祕密光復軍으로 遁甲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年 當時에 野黨 大統領 候補 尹潽善을 支持하며 全國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批判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記錄한 장준하’ 冊에도 言及돼 있다. ‘只今 現在 一角에서 朴正熙 候補가 光復軍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冊이 있는데 이것은 全部 다 거짓말이다. 내가 光復軍이기 때문에 正確히 안다. 그는 當時에 滿洲에서 日本軍 將校로 있었다’ 이같은 言及에 對해서 當時 中央情報部가 重要狀況 報告로 張俊河의 發言을 다 一一이 記錄했다. [76]

萬軍ㆍ日本軍 出身들이 中國(滿洲)에서 解放과 함께 光復軍에 編入된 事緣을 日本軍을 脫出하여 光復軍이 된 張俊河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새로운 事實이었다. 日本이 降伏하기 直前까지 通譯이 아니면 一線 地球를 돌아다니는 阿片 장사나 일군 慰安所의 抱主들까지도 하루 아침에 光復軍 帽子 하나씩을 얻어 쓰고 獨立運動家, 亡命家, 革命家를 自處하는 目不忍見의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他國에 있는 同胞 財産을 이런 者일수록 앞장서 沒收하기가 일쑤였고, 光復軍도 1,2,3 地帶로 나뉘어 對立을 보이고 있었다.(……)이런 狀態에서 過去를 不問하고 獨立運動者의 이름을 마구 나눠주었던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면 貴히 맞아들여(?) 光復軍 帽子를 하나씩 씌워주었다.》 [77]

1967年 11月 國會에 登院하여 議政活動을 始作하였고, 國會 議政活動期間 中 張俊河는 國會 經濟 科學 分課 委員會 委員과 國會 國防 分課委員會 委員으로 活動했다. 議政活動을 하게 되면서 1968年 1月 1日 思想界 (思想界) 發行人職을 一時的으로 부완혁 에게 委任하였다.

1969年 4月 19日 에는 4.19 10周年 記念 講演을 마친 뒤 沈默 示威에 들어가기도 했다.

第4共和國 [ 編輯 ]

國民黨 創黨에 參與 [ 編輯 ]

1970年 2月 頃부터 그는 새로운 政治勢力의 糾合을 위해 新黨 結成 運動을 推進한다. 1970年 윤보선 民主黨 舊派 人士들이 新民黨 을 脫黨할 때 장준하 亦是 新民黨 을 脫黨, 한동안 無所屬 議員 으로 活動하였다. 1971年 1月 6日 윤보선 , 박기출 等과 함께 國民黨 (國民黨) 創黨에 參與한다. [78] 1971年 大選을 앞두고 新民黨 大統領 候補者에 金大中 이 選出되자 反撥한 윤보선 은 신민당을 脫黨하여 박기출 ·張俊河와 함께 國民黨 을 創黨하게 된 것이다.

大統領 選擧를 앞두고 윤보선 과 함께 民族主義 를 標榜하면서 國民의 黨을 만들고 靑年學生들에게 相當한 影響力을 週 [79] 게 되었다. 71年의 大選에서 尹潽善은 大統領 候補로 나섰다. 그러나 候補職을 辭退하는 代身 다른 政治人에게 讓步하기로 했다. [80] 當時 汎野圈에서는 野黨 候補 單一化라는 이름으로 野黨 人士들은 그에게 候補 單一化를 위한 候補者 勇退를 繼續 要請하였다. 張俊河는 熱心히 尹潽善을 支持하였고 支援 遊說를 다녔다.

한便 國民黨의 總裁였던 尹潽善은 張俊河를 別로 좋아하지 않아, 한때 進步黨 에 參與했던 박기출 을 大統領 候補로 指名 [80] 하였다. 한때 張俊河는 國民黨 의 對案으로도 設定되었지만 그가 한때 金九 의 祕書였다가 이범석 의 族靑을 거쳐 場面 에 依해 拔擢된 人事였다는 點 亦是 윤보선이 張俊河를 탐탁지 않게 보는 하나의 理由였다. 그러나 尹潽善의 否定的인 視角에 關係없이 張俊河는 熱心히 尹潽善을 도왔다. 그러나 國民黨 10月 維新 以後 强制로 解散당하였다.

10月 維新 前後 [ 編輯 ]

1972年 民主守護國民協議會에 參加하였다. 1972年 7月 4日 7·4 南北共同聲明 이 發表되자, 張俊河는 '모든 統一은 선(善)'이라며 歡迎하였다.

民族主義者의 길

모든 統一은 좋은가? 그렇다. 統一 以上의 至上命令은 없다. 統一로 갈라진 民族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民族史의 前進이라면 當然히 모든 價値있는 것들은 그 속에서 實現되어야 한다. 共産主義는 勿論 民主主義, 平等, 自由, 繁榮, 福祉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統一과 對立되는 槪念인 同 안은 眞正한 實體를 獲得할 수 없다. 모든 眞理, 모든 道德, 모든 線이 統一과 對立되는 것 일 때에는 그것이 거짓 名分이지 眞實은 아니다.

韓半島 周邊 列强, 美·蘇·日·中의 要求에 따라 南北韓이 平和 共存으로 凍結되고 그 以上의 統一을 向한 努力을 事實上 抛棄한다면 民族 分斷은 더욱 港口化하고 統一과는 反對쪽으로 치달리게 될 것이다. 民族 統一은 처음부터 끝까지 民衆이 할 일이다. 統一은 感傷的 渴望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하루하루의 生活과 直結된 것이다.

모든 統一은 좋은가. 그렇다. 統一 以上의 地上 命令은 없다.

7·4 南北共同聲明 의 숨겨진 背景도 監視해야 한다며 警戒하였고 實際로 7·4 南北共同聲明 은 北韓에 屈辱的인 會談으로 드러났다. [ 出處 必要 ] 그러나 그는 朴正熙 의 南北會談 代表職은 拒絶했다. 朴正熙 는 그에게 繼續 南北會談 代表職을 맡아줄 것을 提議하고, 國家功勞上, 年金 支給을 提議하였으나 拒絶했다.

1973年 2月 張俊河는 民主통일당 創黨에 參與, 最高委員에 뽑혔다. 1973年, 緊急措置가 基本權 彈壓이라며 批判하고 改憲이 必要하다고 主張한 嫌疑로 起訴돼 懲役 15年에 資格停止 15年을 宣告받았다. [81] 3月 第9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民主통일당 公薦을 받고, 통일당 候補로 總選에 出馬했으나 落選하였다.

出所와 病院 入院 [ 編輯 ]

1973年 12月 24日 YMCA會館에서 電擊的으로 改憲請願運動本部를 발족시켜 ‘憲法改正 百萬人 署名運動’을 벌였다. 이로 因해서 [11] 1974年 4月 大統領 緊急措置 第1號 違反嫌疑로 拘束되었으며, "憲法改正을 憑藉하여 國論을 분열시키고 社會의 不安을 造成"했다는 罪目으로 懲役 15年, 資格停止 15年型을 宣告받았으나, 그해 12月 心臟狹心症과 肝硬化 症勢 惡化로 인한 刑執行停止로 出監하였다.

高血壓과 狹心症 等으로 10個月 20日 만에 出監 [82] 한 그는 鍾路區 견지동에 있는 曺廣鉉內科 203號室에 入院하였다. [82]

죽어서야 나올 줄 알았는데 學生들을 놔두고 혼자 나오니 가슴이 아프다. [82]

出監 直後 夫人 김희숙과 家族 外에 김옥길 等이 矯導所에 訪問했고, 入院 後에는 함석헌 의 訪問을 받았다. [82]

生涯 末期 [ 編輯 ]

某種의 擧事 試圖 [ 編輯 ]

1975年 4月 民主통일당을 脫黨하였다. [34] 死亡日인 1975年 8月 17日을 며칠 앞두고 30年 넘게 保管해 온 重慶(충칭)臨時政府의 太極旗를 大學 博物館에 寄贈하는가 하면, 아내와 갑자기 天主敎式 婚禮儀式을 치르고, 白凡 墓所와 망우리에 있는 父母의 墓所를 찾아 參拜했다. 뭔가 重大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身邊 整理를 서둘렀다는 얘기다. [83]

張俊河는 1975年 들어 平素 잘 만나지 않던 金大中 과 만나고, 함석헌 · 홍남순 과 接觸하며 8月 15日, 光復節 30周年을 맞아 某種의 擧事를 計劃했다. 마침 金永三 이 東南亞 旅行中이라 그가 歸國한 뒤인 8月 20日로 計劃은 延期되었다. [84] 張俊河의 아들 장호권 은 이 當時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李 計劃되고 있었으며, 張俊河가 “ 朴正熙 를 깨는 것은 民衆의 힘으로 力不足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朴을 除去해야 한다. 軍部 쪽에도 相當한 連繫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證言한다. [85] [86] 또한 1976年 4月에 自身이 테러를 當했을 때 駐韓 美 大使 하비브가 찾아와 “當身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操心하고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 [87]

이런 情況으로 볼 때, 張俊河는 在野와 野黨 全體를 아우르고 軍部 一部가 同調하는 어떤 擧事를 計劃中이었으며, 여러 가지 證言으로 미루어 8月 20日 頃으로 豫定된 것은 確實해 보인다. [88] 또한 張俊河는 國會議員 在職 時節 私的인 因緣이 있던 김재규 와 만났는데, [週 4] 當時 2軍團長이던 김재규는 張俊河의 國防委 議政活動과 淸廉上에 感動하여 張俊河의 죽음 以後 박선호 를 시켜 家族들을 돌봐주었다. [89] [90] 1976年 末, 김재규 는 장호권을 南山 으로 불러 “父親의 死亡事件은 언젠가 眞實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10·26 3個月 前에는 美國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美國行을 勸誘했다. [85] [91] 2005年 11月 한 言論과의 인터뷰에서 장호권은 張俊河의 計劃에 包含되었던 軍內 同調 勢力이 김재규 等이며, 10·26 도 張俊河의 影響을 입은 것이 確實하다고 主張하였다. [92]

最後 [ 編輯 ]

朴正熙 政權의 監視가 더욱 심해지던 1975年 8月 17日 , 張俊河는 維新政權에 抵抗하는 擧事와 關聯해 當時 祕密裏에 金大中 等 다른 野黨 人士들과의 連絡을 돕고 있던 自身의 側近 임춘원 을 집으로 招待해 아침食事를 했다. 食事를 마치고 張俊河는 호림산악회 會員 約 40餘名과 함께 京畿道 抱川 移動面의 약사계곡 入口에 到着하여 약사봉에 올랐다. 그리고 이날 午後 약사봉에서 약사계곡 方向으로 뻗은 絶壁 아래에서 김용환 및 호림산악회 會員들에 依해 死體로 發見되었다. [93] 이날 形式的인 事故 調査와 屍身 收拾이 이뤄진 以後, 屍身은 遺族들에게 引繼되었다.

임춘원 은 1960年代 서울 鍾路에서 象牙塔學院을 設立해 運營하며 큰 財産을 모은 財力家로 張俊河의 思想界 出版을 남몰래 財政的으로 도와주다가 朴正熙 政權의 彈壓을 받아 苦楚를 겪고 張俊河의 側近이 된 人物이었다. 그의 證言에 依하면 張俊河는 天主敎에 入敎하였다는 말과 臨時政府 太極旗 等을 이화여자대학교 博物館에 寄贈했다는 말을 하였고, 며칠前 망우리에 있는 父母의 山所에 다녀왔다며 伐草로 갈라진 自身의 손바닥을 펴보이며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伐草로 생긴 이 손바닥의 傷處는 나중에 警察에 依해 張俊河가 山에서 墜落하는 途中 소나무 가지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며 그의 墜落死를 뒷받침하는 證據로 歪曲되어 發表되었다. [83]

"나는 8月이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인다. 8月에는 光復節이 있고 先生께서는 祖國 光復이 있던 8月달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先生은 1975年 8月 17日 京畿道 抱川郡 이동면 도평3里 險峻한 約四骨 한켠에서 悲痛하게 떠나셨다. 先生이 떠나시던 그 날, 先生은 아침에 나를 집으로 불러 아침食事를 함께 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몹시 더웠다. 負債도 잘 부치지 않는 先生의 師母님은 異常한 扇風機를 갖다 놓고 돌렸는데, 덜그럭 덜그럭 하는 소리마저 나서 더 더운 것 같았다. 先生은 나에게 손을 펴보이면서 엊그제 망우리 山所를 다녀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손바닥이 갈라져 있는 모습을 펴 보이셨다. 그런데 그 며칠 뒷날, 先生께서 登山을 하다가 失足하여 山에서 떨어질 때 소나무를 붙잡아서 손바닥이 갈라졌다고 하는 歪曲된 言論報道를 보고, 나는 그들의 虛無孟浪한 報道에 抗議하다가 또다시 붙잡혀 가서 一週日동안 南大門 警察署에 갇혀 있었던 記憶이 새롭다. 그 날 아침에 先生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름 前이라고 하시던가, 아니면 20餘日 前이라고 하셨던가는 正確하지 않지만 當身이 가지고 있던 獨立과 關聯된 太極旗나 金九 先生으로부터 받은 보든 것들을 이화여자대학교에 다 주셨다고 했다. 또 長老會에 入敎했다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참으로 異常하게 생각했다. 그렇게도 基督敎 信仰에 빠져 계시던 분이 왜 長老會에 入敎하시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先生이 돌아가신 以後에도 왜, 生前에 自身이 貴하게 간직하던 重要한 것들을 그렇게 虛妄하게 떠나시기 며칠 前에 모두 學校에 寄贈하고, 長老會에 入敎하셨는지 只今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임춘원, <<內 속에 살아 숨쉬는 燈불>>, '아, 장준하' 追慕의 글 母音에서, 張俊河記念事業會. [83]

事後 [ 編輯 ]

遺族에 依해 運柩된 屍身은 8月 18日 午前에 上鳳洞 自宅 안房에 마련된 殯所에 安置되었다. 訃告를 接한 함석헌 , 양호민, 김준엽, 계훈제 等이 8月 17日 부터 자리를 지켰고, 8月 18日 에는 金大中 , 양일동 , 고흥문 , 정일형 等 政治人들과,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總長, 김동길 敎授 等 1百餘 名이 殯所를 다녀갔다. 新民黨 金永三 總裁는 外遊 中이어서 弔花를 보냈다. [94]

8月 21日 午前 8時에 自宅에서 家族 發靷禮拜가 嚴修되었다. 이어 遺骸는 靈柩車로 長老敎會 로 옮겨져 午前 10時에는 牧師님 들 이 執典하는 永訣禮拜가 擧行되었다. 新舊 合同으로 열린 이 葬禮式에는 백낙준 , 유진오 , 金永三 , 金大中 , 박순천 , 함석헌 , 양일동 , 金弘一 , 김준엽 , 김동길 , 천관우 等 各界 知人들과 市民 1,500餘 名이 參禮했다. 永訣式 後 遺骸는 市廳앞, 國會議事堂, 中央廳 을 거쳐 西大門刑務所 앞을 지나 京畿道 坡州郡 광탄면 의 나사렛 墓地에 옮겨져 安葬되었다. [95]

장준하 死後 1週日 뒤에 호림산악회 會員 및 知人들이 事故 現場에서 追慕登攀 行事를 가졌다. 事後 1個月 뒤인 9月 17日 에는 後學 및 民主化運動 同志 80餘 名이 參席한 가운데 事故 現場에서 追慕碑 除幕式이 열렸다. 碑文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오호 張俊河 先生!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民主主義 爭取, 고루 잘 사는 社會, 民族의 自主平和, 統一運動의 偉大한 指導者 張俊河 先生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 손으로 돌을 파 碑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餘! 먼 後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證言하리라.

1985年 8月 '張俊河先生 10周忌 追慕行事'가 열렸다. 노태우 政府 出帆 以後인 1991年 8月 15日 建國訓長 愛國章 이 追敍되었고, 1993年 4月 15日 第1回 阪神床이 追敍되었다.

1995年 8月 16日 20周忌 追慕行事 및 追慕文集 出版記念會가 열렸다. 1999年 11月 1日 金冠文化勳章이 追敍되었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안병욱 은 ‘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 1969年 12月號)에서 다음과 같이 著述했다. [11]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對抗했다. 知性의 武器를 가지고 權力의 牙城에 肉薄했다. ‘사상계’에는 啓蒙의 메시지가 있었고, 批判의 言語가 있었다. 獨裁에 抗拒하는 自由의 絶叫가 있었고 官權에 對決하는 民權의 筆鋒이 있었다.” [11] 咸錫憲은 ‘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글에서 張俊河를 “張俊河의 사람됨을 보면 舊約의 야곱 같은 데가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無畏(無畏)의 德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습니다. 怯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評價하였다. [11]

高麗大學校 敎授이자 張俊河의 親舊였던 김준엽 은 新靑年이라는 이름의 中國 雜誌를 例로 들면서 ' 思想界 '는 自由·民權運動, 統一 問題, 經濟發展 問題, 새로운 文化의 創造, 정의로운 福祉社會를 줄기차게 追求했고, ‘사상계’를 中心으로 우리 나라의 代表的인 知性人들이 모여 現代史에 큰 足跡을 남겼다고 評價하였다. [11]

지명관 은 ‘사상계’가 우리나라 知識人들에게 앙가주망의 傳統을 만들어주었다는 點에서 높이 評價했다. 그는 “張俊河 先生 같은 분은 우리나라 歷史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11] 英文學者 여석기는 ‘사상계’는 ‘좋은 雜誌’였고 ‘잘 팔리는 雜誌’였다고 하면서, “이런 境遇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11] 言論學者 鄭鎭奭은 1950年代부터 60年代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雜誌를 代表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張俊河는 雜誌 言論人으로는 第1人者로 이 나라 言論과 民主主義 發展에 劃期的인 業績을 남겼다고 評價했다. [11]

한便 한겨레 21 에서 實施한 設問調査 에서는 8.15 解放 以後 民族主義 의 脈을 이었다 [96] 는 評價와 50∼60年代 瘠薄한 知的 風土 속에서 <사상계>를 創刊하며 當時 知識人들에게 커다란 影響을 끼쳤다는 點이 높게 評價됐다. [96]

否定的 評價 [ 編輯 ]

강원용 은 그가 尊敬받아 마땅하나 그의 思想界 等의 活動에 對해 政治的인 目的이 强했다고 評하였다. [35] 政治的인 目的으로 思想界 等을 創刊하였으며 第3共和國 出帆 뒤에는 朴正熙에 反對하는 것으로 政治的 目標를 바꿨다고 評하였다. [35] 한便 5·16 軍士 政變 初期 5·16 軍士 政變 을 支持한 것에 對한 批判的인 視角도 있다. [週 5] 그가 '金九한테 붙었다가 場面 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 을 따라다니며 色깔論爭에 熱 올렸다'는 批判도 있다. [97]

또한 張俊河는 이범석 族靑 을 통해 發號하자 獨立軍 時節 司令官이었던 그와 因緣을 끊을 程度로 청렴했지만, [98] 한便으로는 金元鳳 이 日本軍을 脫出한 韓國人 靑年들을 美人計로 買收하려 한다고 非理性的인 非難을 한 바 있다. [99] [100] 여기에는 金九 의 祕書로서 그 影響을 받은 反共主義的 視角이 作用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마하 피아노가 一齊라고 廣告를 싣지 않을 程度의 [101] 潔癖적 배일주醫자면서 代表的인 親日 文人 김동인 을 기리는 東人文學賞 을 制定하고, [102] 《사상계》 1957年 12月號에는 亦是 親日派인 최남선 을 追慕하는 〈六堂 記念號〉를 發行하며 崔南善을 ‘親近한 벗이요 敬愛하는 스승’이라고 讚揚하는 卷頭言을 쓰는 等 [103] 理解할 수 없는 行動을 보였다. 張俊河의 이런 矛盾된 모습들은 그의 視角이 어느程度 歪曲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冷戰 時期 反共主義 知識人의 어쩔 수 없는 限界라고 할 수 있다.

기타 [ 編輯 ]

윤보선 , 場面 , 이철승 , 유진산 , 金永三 , 金大中 外에 3共, 4共 時節 朴正熙 의 强力한 政治的 競爭者들 中의 한사람으로 指目되었으며 一部에서는 그를 現職 大統領인 朴正熙 에 對備하여 재야 大統領이라는 別名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들이자 美國 코네티컷에 居住 中인 장호준 牧師가, 朴正熙 아들이며 朴槿惠 男동생 박지만 에게 公開 書翰을 썼다. "張俊河 先生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내는 글" [104]

兵籍 記錄簿 發見 [ 編輯 ]

장준하 等이 日本軍 을 脫營했다는 主張의 眞實을 찾기 爲해 2004年 열린우리당 所屬 國會議員 전병헌 은 直接 日本軍 側 資料를 調査하던 中 張俊河의 日本軍 脫營 證據와 兵籍記錄簿(유수명部)를 發掘해냈다. 이는 2004年 10月 國會 政務委員會에서 言論에 公開했다.

當時 열린우리당 전병헌 國會議員은 6日 "<유수명部(留守名簿)>에 남겨진, 張俊河 先生이 1944年 1月 日本 學徒兵으로 徵集되었다가, 그해 7月 7日 中國 序奏에서 脫出해 6000里 大長程 끝에 重慶에 到着, 韓國 光復軍에 合流했다는 記錄이 發見됐다"며 "이 記錄은 張 先生의 自敍傳 <돌베개>의 記錄과도 一致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張俊河 先生의 日本軍 徵集 및 脫出 記錄이 公開되었다. 0

前 議員에 依해 公開된 資料에 따르면, <유수명部>에서 찾아낸 張俊河 先生의 이름(하리야스 슌가·張安俊河), 所屬部隊(第7991部隊), 生年月日 및 本籍地(平安北道 朔州郡 외남면 대관동 258), 父親의 聲明(장석인·張錫仁), 役種·丙種 및 階級, 供託金 番號와 上段에 脫出일자 및 脫出地 等이 記載돼 있다. 全體 114卷으로 構成된 '유수명部'는 日本軍 의 海外派遣 軍人·軍屬의 名簿로 脫出(逃亡) 및 離脫, 死亡 等 行方不明된 者의 記錄을 날짜와 場所와 함께 記錄돼 있으며, 日本軍으로부터 離脫하거나 脫出한 韓國人 兵士들에 對한 記錄이 各 卷 뒷部分에 따로 整理돼 있다.

兵役 內容에 依하면 1944年(消化 19年) 1月 20日 日本軍 第65師團 7991部隊에 配置됐으며, 같은 해 7月7日 中國 장쑤省 (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脫營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부는 上段에 ‘逃亡(逃亡) 쉬저우’라고 記載, 張 先生의 脫營 事實을 밝히고 있다. [5] 이는 張俊河가 生前에 自敍傳 ‘돌베개’에서 밝힌 內容과 一致한다. [5]

金元鳳에 對한 否定的인 視角 [ 編輯 ]

張俊河는 조선의용대 의 受領이자 韓國光復軍 1支隊長이었던 金元鳳 을 否定的으로 評價하였다. 張俊河는 金元鳳 을 가리켜 '版에 박힌 共産主義者 . [17] ', ' 共産黨 路線을 取한 者 [105] '라며 酷評을 加하기도 했다.

1944年 日本軍 脫出 直後의 장준하, 김준엽 等을 迎入하려는 提議를 拒絶했다. 그러나 金元鳳 은 繼續 사람을 보내 이들을 說得하려 했는데, 張俊河는 金元鳳 日本軍 脫營兵, 學徒兵들 사이에 離間질을 劃策했다고 한다. '김약산의 部下로 派遣된 分遣隊長의 說得公爵이 失敗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離間工作을 始作했다. [17] 는 것이다.

張俊河는 日本軍 이나 學徒兵 脫營者들을 包攝하는 過程에서 ' 金元鳳 一派에서는 美人計까지 쓰고 나서는 形便 [106] '이라 하였다. 또한 張俊河는 金元鳳 光復軍 의 信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計略을 꾸몄다고 非難했다. '金元鳳이 熱心히 臨政과 光復軍에 對한 不信作用을 日本軍 出身 部隊에 加했다. [32] '고 陳述했다.

張俊河는 金元鳳 의 民族唯一黨 結成 運動의 意圖 亦是 疑心하였다. '김약산은 그때 김규식 博士를 黨首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副黨首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版에 박힌 公算 分子의 한사람이었다. 아마 聯立政府 內閣에 參與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 을 組織했던 것 같다. [17] '는 것이다. 그는 金元鳳 을 否定的으로 評價했고, 金元鳳이 越北함으로써 그의 主張은 信憑性을 얻게 되었다.

또한 張俊河는 1945年 光復 直後에도 그가 離間질을 劃策했다는 疑惑을 提起했다. 光復軍 隊員들의 無知와 行悖가 繼續될 때 그가 이를 利用하려 했다는 것이다. '日本軍 出身 部隊로 하여금 臨政 이나 光復軍 에 對한 不信을 부채질하면서 그 漁夫之利를 노리는 金元鳳의 計算이었다 [32] '고 했다. 光復軍 編入을 拒絶하고 버티던 日本軍 出身 部隊의 責任者 格으로 있던 黃某에게 金元鳳이 直接 이소민을 派遣, 光復軍 第1地帶로 끌어들일 工作을 했다 [32] 는 것이다. 또한 張俊河는 ' 金元鳳 이 熱心히 臨政 光復軍 에 對한 不信作用을 日本軍 出身 部隊에 加했다. [32] '고 했다.

學歷 [ 編輯 ]

기타 略歷 [ 編輯 ]

  • 1932年 4月, 平壤 숭실중學校 入學. 東亞日報 社의 ‘브나르도 運動’에 參與
  • 1941年, 親舊인 마라톤 選手 김익준의 勸誘로 日本 留學을 決心, 日本 도쿄 에 遊學
  • 1941年 4月, 도요大學 豫科 入學
  • 1943年 11月, 新安小學校 時節의 弟子이며 下宿집 딸이었던 김희숙(黨 17歲)과 結婚. 그女가 挺身隊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뜻도 있었다고 함.
  • 1945年 1月, 中國 충칭에서 光復軍 에 編入, 光復軍 大尉에 任官되어 獨立 鬪爭에 몸바침.
  • 1945年 8月 18日, 獨立軍 身分으로 서울에 들어왔으나, 日本軍의 沮止로 다시 돌아감.
  • 1946年 4月 26日, 김규식 이 만든 韓國靑年會 에 加入함. 그러나 곧 韓國靑年會를 脫退하고 李範奭의 民族靑年團으로 건너갔다.
  • 1947年 12月, 이범석 民族靑年團 에 加入하다.
  • 1952年 9月, 月刊 《 史上 》을 創刊함.
  • 1962年 8月, 막사이사이상 言論 文學賞을 받음.
  • 1965年 '曺國 守護 協議會'에 參與하여, 한-日 條約 反對 鬪爭을 벌임.
  • 1966年 아버지 牧師 장석인 死亡
  • 1967年 6月, 獄中 出馬로 서울 東大門 乙區 國會 議員에 當選됨.
  • 1970年 2月, 새로운 民族 勢力의 糾合을 위하여 新黨 運動을 推進함.
  • 1970年 4月, 윤보선 等이 新民黨 을 脫黨할 때 함께 脫黨, 以後 無所屬 國會議員으로 活動. 著書 돌베개 出刊.
  • 1970年 윤보선 , 박기출 等과 鮮明與黨 國民黨 創黨에 參與
  • 1971年 '民主 守護 國民 協議會'에 參與함.
  • 1973年 양일동 等과 民主통일당 創黨에 參與하고, 통일당 最高委員에 選出되다.
  • 1975年 4月 民主통일당 脫黨.
  • 1975年 8月 某種의 擧事 計劃 中 疑問死.
  • 1991年 8月 15日, 建國訓長 愛國章이 追敍됨.
  • 1993年 4月 15日, 第1回 阪神床이 追敍됨.
  • 1999年 11月 1日, 雜誌의 날을 맞아 金冠文化勳章(1級)李 追敍됨.

著書 [ 編輯 ]

  • 《돌베개》
  • 《民族主義者의 길》
  • 《知識人과 現實》 (世界史, 1992)

放送 [ 編輯 ]

  • 2004年 1月9日 KBS 人物現代史26篇 장준하 1部 民族主義者의 길 [107] [108]
  • 2004年 1月17日 KBS 人物現代史27篇 장준하 2部 擧事와 죽음의 眞實 [109] [110]
  • 1999年 8月 15日 MBC 다큐멘터리 아!장준하 救國章程 6千里


賞勳 [ 編輯 ]

기타 [ 編輯 ]

家族의 生活苦 論難 [ 編輯 ]

家族들은 死後에도 朴正熙 政權에 依한 壓迫에 시달렸다. 長男 장호권 1976年 에 테러를 當해 鬪病生活을 하기도 했으며, 情報機關의 壓力으로 就業이 곤란해져 家族이 흩어지는 結果로 이어졌다. 反面 朴正熙 政權 末期 中央情報部 部長이었던 김재규 는 遺族에게 美國行을 勸誘하는 等 一部 便宜를 提供했다. [111] 2012年 에 長男 장호권 은 老母와 일원동의 月貰집에서 年金 月 100餘萬원에 依支하여 生活苦에 시달리고 있다고 證言하였다. [112] 이에 對해 國家報勳處 는 獨立有功者禮遇에 關한 法律 施行令 第6條에 依據하여 未亡人에게 月 143萬 1千원의 補償金이 支給되고 있으며, 일원동 아파트도 同 法律에 따라 特別供給받은 住宅이라고 밝혔다. [113]

家族 關係 [ 編輯 ]

두 姑母는 아버지 장석인보다 聯想이었다.

張俊河를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註解 [ 編輯 ]

  1. 當時 朝鮮總督府 는 慰安婦를 募集 或은 供出해갈 때 結婚한 女性은 데려가지 않았다.
  2. 國土建設團은 大卒 美就職者들의 職業 擴充을 위해 場面 內閣에서 設置한 機關이었다.
  3. 이는 第2 共和國 政府의 與黨勢力人 民主黨 내 新,舊派 싸움( 윤보선 勢力과 場面 勢力)에 失望感과 싫症을 느껴서 처음에 그랬던것으로 推測된다. [43]
  4. 김재규의 兄이 張俊河의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장호권의 證言
  5. 張俊河는 場面 內閣의 官僚였다.

關聯 資料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67年 總選 7代 國會議員 서울 東大門區 을 新民黨 57,119票
59.62%
1位 初選
1973年 總選 9代 國會議員 서울 東大門區 民主통일당 25,270票
9.33%
3位 落選

各州 [ 編輯 ]

  1. 故鄕 親舊 최기일의 證言
  2. 최기일, 自尊心을 지킨 한 朝鮮人의 回想 (생각의나무, 2002) 75페이지
  3.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42600329201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4-26&officeId=00032&pageNo=1&printNo=6625&publishType=00020
  4. 故 張俊河 先生 再審서 39年만에 無罪 YTN 2013-01-24
  5. ‘유수명部’서 張俊河先生 記錄 發見 文化日報 2004年 10月 6日子
  6. “원동敎會 沿革” . 2013年 11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4月 27日에 確認함 .  
  7. 演戱敎會 沿革
  8. “甘川中央敎會 沿革” . 2016年 4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10月 9日에 確認함 .  
  9. “東亞日報 매거진::新東亞” . 2011年 11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8月 15日에 確認함 .  
  10. "張俊河 先生은 왜 何必 東人文學賞 制定했을까" - 오마이뉴스
  11. 사상계와 장준하
  12. 亡國의 젊은이들은 다른 길을 걸었다 오마이뉴스 2005年 9月 14日子
  13. 뮤지컬로 還生 '靑年 장준하'… 世宗文化會館 18~21日 公演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亞日報 2004年 8月 13日子 記事
  14. 최기일, 《自尊心을 지킨 한 朝鮮人의 回想》 (생각의나무, 2002) 75페이지
  15. [餘滴] 學兵(學兵) 京鄕新聞 2007年 3月 4日子
  16. 돌베개, p23
  17.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205페이지
  18. 쉽게 읽는 돌베게
  19. 장준하 《張俊河 文集 3卷, 사상계地 受難史》(張俊河 저, 張俊河先生 10周忌 追慕文集 刊行委員會 篇, 1985.8, 圖書出版 史上) 473쪽 年譜
  20. 박경수 (2006). 《장준하(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165쪽.  
  21.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266페이지
  22.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265페이지
  23.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60年代篇 1》 (人物과사상사, 2006) 124페이지
  24. 김삼웅, 《韓國現代史 뒷얘기》 (嘉藍企劃, 1995) 268페이지
  25.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 1960年代篇 1》 (人物과사상사, 2006) 125페이지
  26. 조갑제, 《內무덤에 침을 뱉어라2:전쟁과 사랑》 (조선일보사, 1998) 161페이지
  27. 民族主義者의 길(張俊河 저, 世界史, 2002.05.02) 140페이지
  28. 장준하(民族主義者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出版社, 2006.11.30) 165 페이지
  29. (26) 派爭 속의 亡命政府
  30. 장준하全集 1 : 돌베개(張俊河, 世界史, 2001) 94~95페이지
  31.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329페이지
  32.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328페이지
  33.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 人物과사상사 , 2004) 167쪽
  34. 장준하 《張俊河 文集 3卷, 사상계地 受難史》(張俊河 저, 張俊河先生 10周忌 追慕文集 刊行委員會 篇, 1985.8, 圖書出版 史上) 474쪽 年譜
  35. (강원용 牧師의 體驗 韓國 現代史 ④) 12·12 直後 만난 DJ, "軍人들은 내게 충성할 것" Archived 2007年 8月 31日 - 웨이백 머신 新東亞 2004年 3月號(534號)
  36. “先生의 글 :: 社團法人 張俊河記念事業會 ::” . 2011年 11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17日에 確認함 .  
  37. “保管된 寫本” . 2011年 11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8月 14日에 確認함 .  
  38. 홍일식 (2004年 9月 10日). “(詩論) 張俊河와 최남선” . 中央日報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9. “進步에겐 '崔南善'도 달리 볼 視野가 必要” . 프레시안. 2009年 6月 30日.  
  40. 短期 4290年(1957年) 12月 1日 發行 《사상계》
  41. 歷史問題硏究所, 1950年代 南北韓의 選擇과 屈折 (역사비평사, 1998) 182페이지
  42. 사상계地 1961年 6月號
  43. 김삼웅. 《장준하 評傳》.  
  44. 示唆人物事前 7 康俊晩 外 지음 | 人物과사상사 | 2000) 150페이지
  45. 示唆人物事前 7 康俊晩 外 지음 | 人物과사상사 | 2000) 149페이지
  46. 歷史問題硏究所, 1950年代 南北韓의 選擇과 屈折 (역사비평사, 1998) 183페이지
  47. 유경환, 〈기둥 잘린 나무―사상계 15年 素砂〉, 《光復 50年과 장준하》, 張俊河先生20週期秋麰文集刊行委員會, 1995年, 276쪽
  48. 《張俊河 評傳》 381쪽
  49. 《張俊河 評傳》 425쪽
  50. 《張俊河 評傳》 423쪽
  51. 歷史問題硏究所 篇, 1950年代 南北韓의 選擇과 屈折 183페이지
  52. 박경수, 在野의 빛 장준하 (해돋이, 1995) 183페이지
  53.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0페이지
  54.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1페이지
  55. 《張俊河 評傳》 431쪽
  56. 《張俊河 評傳》 432쪽 ~ 434쪽
  57.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2페이지
  58.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3페이지
  59.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4페이지
  60. 《張俊河 評傳》 129쪽
  61.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5페이지
  62.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8페이지
  63.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09페이지
  64.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10페이지
  65. 박경수, 《張俊河:民族主義者의 길》 (돌베개, 2003) 311페이지
  66. <김삼웅 저, 장준하 評傳>
  67. 京鄕新聞 1967年 2月 20日子
  68. 京鄕新聞 1967年 2月 28日子
  69. 1966年 12月 12日子 京鄕新聞
  70. 京鄕新聞 1967年 1月 1日子
  71. 大韓民國 選擧이야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8) 147페이지
  72.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42600329201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4-26&officeId=00032&pageNo=1&printNo=6625&publishType=00020
  73. 朴正熙와 開發獨裁時代 (조희연 저, 歷史批評史, 2007) 92페이지
  74. 서중석, 大韓民國 選擧이야기(역사비평사, 2008) 147페이지
  75.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42600329201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4-26&officeId=00032&pageNo=1&printNo=6625&publishType=00020
  76. " 朴正熙 祕密光復軍?…虛無孟浪한 小說 이야기 " . 노컷뉴스. 2015.10.23.  
  77. “[朴正熙 人物評傳 20回] 日帝敗亡 後 光復軍 中隊長” . 2018.01.06.  
  78. '國民黨' - 네이트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9. 歷史批評:1991年 겨울號 (歷史問題硏究所 지음, 역사비평사, 1991) 413페이지
  80. 강원용 , 《歷史의 언덕에서 3:Between and Beyond》(한길사, 2003) 290페이지
  81. 張俊河 先生 '緊急措置 事件' 再審 請求
  82. "張俊河氏 어제 出監", 京鄕新聞, 1974年 12月 4日子
  83. “임춘원, <<內 속에 살아 숨쉬는 燈불>>, '아 장준하' 追慕의 글 모음, 張俊河記念事業會” . 2013年 11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12月 14日에 確認함 .  
  84. 《張俊河 評傳》 37쪽
  85. 장호권, 〈아버님은 암살당했다〉, 《신동아》 1983年 8月號
  86. 《張俊河 評傳》 46쪽
  87. 《張俊河 評傳》 48쪽
  88. 윤재걸, 〈장준하 그 疑問의 죽음〉, 《신동아》 1985年 8月號
  89. 《張俊河 評傳》 487쪽
  90. 情, 喜上 (1993年 10月 14日). “김재규는 왜'維新의 心臟'을 쏘았나” . 시사저널 . 2012年 2月 3日에 確認함 .  
  91. 《張俊河 評傳》 50쪽
  92. 金, 名局 (2005年 11月 6日). ““張俊河-김재규 ‘擧事’ 密約 했다”” . 日曜新聞 . 2012年 2月 3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3. 함석현 評傳
  94. “나뭇가지 휘청… 미끄러져”. 朝鮮日報. 1975年 8月 19日. 7面.  
  95. “故張俊河氏 永訣式”. 朝鮮日報. 1975年 8月 22日. 7面.  
  96. “한겨레 21” . 2000年 10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4月 15日에 確認함 .  
  97. 歷史法廷 (함규진 저, 포럼, 2006) 310페이지
  98. 《張俊河 評傳》 301쪽
  99. 장준하, 《돌베게》 268쪽
  100. 《張俊河 評傳》 263쪽
  101. 《張俊河 評傳》 391쪽
  102. 《張俊河 評傳》 361쪽 ~ 364쪽
  103. 《張俊河 評傳》 365쪽 ~ 368쪽
  104. 오마이뉴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05.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201페이지
  106. 장준하, 《돌베개》 (圖書出版 世界史, 2005) 254페이지
  107. 틀:放送 認容
  108. 틀:放送 認容
  109. 틀:放送 認容
  110. 틀:放送 認容
  111. 장호권 (1983年 8月). “아버님은 암살당했다”. 新東亞.  
  112. 박경만 (2012年 8月 15日). ““주검 보자마자 ‘脚本이구다’ 생각 들어”“두개골 傷處에 성냥개비 넣으니 다 들어갔다“” . 한겨레新聞 . 2012年 8月 16日에 確認함 .  
  113. “民主 "張俊河 他殺疑惑" 朴 "調査이뤄져 " . 聯合뉴스. 2012年 8月 17日 . 2012年 8月 17日에 確認함 .  
  114. 代를 이은 惡緣, '박근혜 審判' 廣告로 旅券 返納당한 故 張俊河 아들 장호준 牧師 京鄕新聞, 2016-03-14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場面
第2代 國土建設團 團長
1961年 5月 18日 ~ 1961年 12月
後任
조성근
(國土建設廳長이 兼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