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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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원 (林春元, 1938年 3月 1日 ~ )은 大韓民國 의 政治家이다. 全羅北道 群山市 出身이며, 本貫은 朝陽 (兆陽), 號는 해정(海汀)이다. [1] 第 12·13·14代 國會議員, 新民黨 總裁, 最高委員, 事務總長, 院內副總務, 副代辯人, 黨務委員과 國民黨 , 평민당 , 民主黨 의 黨務委員 等을 歷任했다.

學歷 [ 編輯 ]

非學位 修了 [ 編輯 ]

略歷 [ 編輯 ]

評價 [ 編輯 ]

過去 軍事政權 當時 黨僚, 在野人士, 學生運動圈 出身들이 主流였던 野黨에서 매우 드문 經濟分野 專門家로, 朴正熙 政權에 反對하던 장준하 를 後援하다가 그의 勸誘로 政治에 入門하였고 장준하 死後에는 金大中 의 野黨 總裁 時節 오랜期間 동안 그의 最側近 經濟特報를 지냈다. [16] 1985年 第12代 國會議員 當選 以後 내리 3選 國會議員을 連任하면서 줄곳 經濟關聯 部處와 金融監督機關들을 牽制하고 監視하는 財務委員會(現 企劃財政委員會), 豫算決算特別委員會 等에서만 議政活動을 하며 그 以前 金大中 , 이중재 議員 等에 이어 傳統野黨 經濟通의 命脈을 이었다는 評價를 받는다. [8] [9] [18] [22] [25] 軍事政權 時節 與野의 極限 對決로 大部分의 野黨 國會議員들이 政治攻勢에만 置重했던 것과 달리, 政治에 投身하기 前에 얻은 豐富한 實物經濟 經驗을 바탕으로 經濟民主化를 위한 代案을 提示하고 政策批判을 하는 等 野圈의 核心 經濟 브레인으로 活躍했다. [29]

기타 [ 編輯 ]

  • 1960年代 서울 鍾路 화신百貨店 앞에 大韓民國 入試學院의 嚆矢格이라 할 수 있는 象牙塔學院을 設立하고 成功的으로 運營하였다. 當時 學生數 8,000餘名, 講師數 250餘名으로 웬만한 綜合大學보다도 그 規模가 클 程度였다. 그때 當時 每月 純益이 8,000萬원 以上으로 그 當時 財閥들을 제치고 銀行預金 順位 全國 1位를 할 程度로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當時 朴正熙 政權의 彈壓 속에 時事敎養地 思想界 를 힘들게 出版하고 있던 장준하 가 當場 종잇값을 내지못할 程度로 어려운 狀況에 處하게 된 것을 알고 自身의 保證手票로 사상계 運營資金을 남몰래 대주던 것이 빌미가 되어 朴正熙 政權의 彈壓을 받아 監獄에 가게 되었고, 結局 政治에 投身하는 契機가 되었다. [5]

"나는 政治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先生님 때문이다. 當時 나는 象牙塔學院을 鍾路에서 잘 運營하고 있었다. 學生數가 8,000名이 넘었고, 講師酬價 250名이 넘는 大學校와 같은 엄청난 規模였다. 나는 그때 많은 돈을 벌었다. 그때 當時 每月 順 利益이 8,000萬원 以上이었으니, 그때 銀行預金 順位가 全國 1位를 할 正午로 學院이 잘 運營될 때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보고 돈벼락을 맞은 사람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先生이 當時 어둠을 밝혀주는 燈불의 役割을 하겠노라고 하시며 『思想界』에 心醉되어 어려운 時節 돈을 빌려준 것이 保證手票를 드려서 그것이 그만 내가 朴正熙 政權에 當하게 된 것이다. 그 當時 先生이 종이 값을 주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그 종이 장사에게 준 手票가 나를 政治마당에 끌어낸 契機가 되었다. 勿論 나는 逃亡 다녀야 했고, 結局에는 監獄에 갔다. 그러나 只今도 그 當時 내가 했던 일을 생각하면 正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勿論 우리 집사람은 그때부터 차마 말로 形言할 수 없는 苦生이 始作되었다. 그 서슬퍼런 維新時節에 나는 9番을 監獄에 갔는데 只今 생각하면 너무나 悽絶했던 時節이었던 것 같다." 張俊河記念事業會, <<內 속에 살아 숨쉬는 燈불>>, '아, 장준하' 追慕의 글 母音에서. [5]

  • 各界에 布陣한 人士들이 장준하 를 中心으로 祕密裏에 維新政權에 抵抗하는 擧事를 進行하던 中 監視의 標的으로 運身이 어려운 장준하 의 祕密連絡責으로 金大中 과 因緣을 맺었다. 1975年 8月 17日 장준하 가 登山途中 疑問의 墜落死를 當한 날에도 擧事와 關聯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장준하 의 집에서 마지막 아침食事를 함께 했다. 그 後 장준하 의 失足死 發表에 疑問을 提起하며 抗議를 하다가 南大門 警察署에 拘禁되기도 하였다. [5]

"나는 8月이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인다. 8月에는 光復節이 있고 先生께서는 祖國 光復이 있던 8月달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先生은 1975年 8月 17日 京畿道 抱川郡 이동면 도평3里 險峻한 約四骨 한켠에서 悲痛하게 떠나셨다. 先生이 떠나시던 그 날, 先生은 아침에 나를 집으로 불러 아침食事를 함께 했다. 그 날 따라 날씨가 몹시 더웠다. 負債도 잘 부치지 않는 先生의 師母님은 異常한 扇風機를 갖다 놓고 돌렸는데, 덜그럭 덜그럭 하는 소리마저 나서 더 더운 것 같았다. 先生은 나에게 손을 펴보이면서 엊그제 망우리 山所를 다녀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손바닥이 갈라져 있는 모습을 펴 보이셨다. 그런데 그 며칠 뒷날, 先生께서 登山을 하다가 失足하여 山에서 떨어질 때 소나무를 붙잡아서 손바닥이 갈라졌다고 하는 歪曲된 言論報道를 보고, 나는 그들의 虛無孟浪한 報道에 抗議하다가 또다시 붙잡혀 가서 一週日동안 南大門 警察署에 갇혀 있었던 記憶이 새롭다. 그 날 아침에 先生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름 前이라고 하시던가, 아니면 20餘日 前이라고 하셨던가는 正確하지 않지만 當身이 가지고 있던 獨立과 關聯된 太極旗나 金九 先生으로부터 받은 보든 것들을 이화여자대학교에 다 주셨다고 했다. 또 天主敎에 入敎했다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참으로 異常하게 생각했다. 그렇게도 基督敎 信仰에 빠져 계시던 분이 왜 天主敎에 入敎하시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先生이 돌아가신 以後에도 왜, 生前에 自身이 貴하게 간직하던 重要한 것들을 그렇게 虛妄하게 떠나시기 며칠 前에 모두 學校에 寄贈하고, 天主敎에 入敎하셨는지 只今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張俊河記念事業會, <<內 속에 살아 숨쉬는 燈불>>, '아, 장준하' 追慕의 글 母音에서. [5]

  • 장준하 의 勸誘로 政治에 投身했다가 1970年代 初 朴正熙 獨裁政權을 反對하는 民主回復국민회의 活動 當時 장준하 金大中 間에 祕密連絡責을 擔當했던 因緣으로 金大中 의 野黨 總裁 時節 그의 財政 및 經濟分野 核心 브레인으로 活躍했으나,1992년 金大中 과 그의 家臣들의 民主黨 私黨化 및 非民主的 政黨運營 等을 批判하고 訣別하였다. [5] [30]
  • 金大中 과의 訣別 後 無所屬 議員으로 議政活動을 하던 中, 民主自由黨 內에서 少數派로 孤立되어 있던 金永三 의 오랜 三顧草廬 끝에 1992年 大選 直前 金永三 의 大選캠프에 參與하였고, [31] 基督敎界 代表로 支持運動에 나서 金永三 의 第14代 大統領 當選 및 文民政府 樹立에 貢獻을 하였다. [32] 하지만 大選 直後 金永三 에게 아들 김현철 을 權力에서 排除하라는 直言을 했다가 오히려 김현철 라인을 中心으로 한 當時 新主流 執權勢力의 타깃이 되었고, 結局 政權 初 歷史上 처음으로 實施된 公職者財産公開의 大混亂 속에 朴浚圭 國會議長 等과 함께 黨을 떠났다. [33]
  • 全斗煥 政權 當時 現役議員으로서 同僚 野黨議員들 및 市民들과 함께 거리에서 催淚彈을 맞아가며 6月 民主抗爭에 앞장 섰으나, 그 結果로 1987年 10月 12日 '第9次 大韓民國憲法改正案'李 當時 與野 4黨의 合意로 國會 本會議에 上程되자 身上發言 形式으로 壇上에 올라 反對討論에 나섰다. 于先 當時 執權 與黨인 民主正義黨 이 먼저 "6.29 以前의 問題들에 對해 잘못을 認定해야 한다"고 主張하고 "改憲案이 國會에서 通過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赦免 復權되지 않은 民主人士와 良心囚들이 있다"며 문익환 牧師와 在野人士 李富榮 , 民主化 運動으로 手配 收監되어 있는 數 百名의 愛國靑年學生들을 "國民投票 以前에 手配解除와 함께 赦免 復權 시켜야 한다고 主張했다. 또한 野黨 同僚였던 統一民主黨 議員들에겐 비록 " 金大中 先生 等 많은 분들이 사면 復權되고 釋放된 바 있으나" 이들 政治人 外에 아직도 다른 數 많은 在野의 民主人士, 良心囚, 靑年學生들이 矯導所와 拘置所에 收監되어 있는데 이런 懸案의 解決 없이 急하게 憲法改正에 合意해준 理由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이재형 國會議長에겐 國會法에 따른 深衣나 反對討論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點과 憲法改正특위委員長 名義로 改憲案을 發議하지 않았다는 點 等 節次的 瑕疵들을 條目條目 指摘했다. 또한 憲法改正 論議가 民政-민주 兩黨의 利害關係에 따라 拙速으로 進行되어 多數 國民들의 意思가 제대로 反映되지 못해 結局 제10차 憲法改正이 必要하게 될 것이라 主張했다. 憲法改正의 大前提인 "大統領直選制에는 全的으로 同意하는 바이지만 이와 같은 方法의 憲法改正에는 贊成할 수 없다"고 밝히고 抗議 表示로 改憲案에 反對票를 던졌다. [35]
  • 12代 國會 5共非理調査特委 委員으로 活動하던 當時, 朴正熙 大統領 弑害事件이 發生한 1979年 10月 26日 當時의 "靑瓦臺 備品目錄과 主要 財産目錄, 預金 殘高 및 朴正熙 前 大統領의 家族預金 殘高, 1980年 5月 17日 當時 靑瓦臺의 備品目錄과 主要財産目錄, 預金 殘高 및 朴正熙 前 大統領의 家族預金 殘高" 等 關聯資料 提出을 大統領 祕書室에 要求해, 追後 全斗煥 前 大統領이 聽聞會에 直接 出席하여 10.26 以後 事件搜査過程에서 靑瓦臺祕書室에서 發見된 資金 "銃 9億6千萬원 中 2億 원은 鄭昇和 當時 陸軍參謀總長에게, 5千萬 원은 노재현 當時 國防長官에게 주어 活用토록하고 1億 원은 戒嚴司令官의 承認을 받아서 合同搜査本部의 搜査費로 使用하였으며 나머지는 遺族에게 傳達한 것으로 記憶하고 있습니다"라는 證言을 하도록 만들었다. 結局 이 證言은 全斗煥 當時 合同搜査本部長이 朴槿惠 에게 傳達한 6億원이 朴正熙 前 大統領의 個人財産이 아니라 靑瓦臺 祕書室의 公金인 만큼 이 돈을 國庫에 返納해야 한다는 主張의 事實的인 根據가 되었고, 2012年 大選에서 朴槿惠 새누리당 候補를 괴롭히는 主要 이슈 中에 하나가 되었다. [36]

論文, 學術記事, 著書 및 曆書 [ 編輯 ]

  • 1. 私設學院의 敎育的 地位와 社會敎育의 問題點 (韓國敎育生産性硏究所敎育硏究社, 1969)
  • 2. 3低時代의 通貨政策 (月刊 不動産, 1986)
  • 3. 民衆과 함께 (金文堂, 1986)
  • 4. 社會正義의 認識과 實踐 (國會議員 同友會, 1987)
  • 5. 指導者: 現代 世界史를 움직인 政治指導者들의 生涯와 哲學 (Richard M. Nixon, 金文堂, 1987)
  • 6. 銀行法 改正 이렇게 본다: 大企業 經濟力集中 解消에 焦點맞춰야 (金融經濟 154, 金融經濟社, 1989)
  • 7. 改革政策을 要求한다 (金融經濟 159, 金融經濟社, 1990)
  • 8. 金融制度의 改善方案: 豫金保險制의 內容과 導入 可能性 檢討 (國會報 306, 國會事務處, 1992)
  • 9. 經濟力集中의 實態와 改善方向;與信管理制度 改編을 中心으로 (國會報 317, 國會事務處, 1993)
  • 10. 宗敎의 自由와 宗敎立法의 課題: 基督敎財産管理法案을 中心으로 (國會報 332, 國會事務處, 1994)
  • 11. 基督敎財産管理法制定 이루어져야 한다 (月刊牧會 216, 1994)
  • 12. 宗敎의 自由와 宗敎立法의 課題;基督敎財産管理法案을 中心으로 (國會報 332, 國會事務處, 1994)
  • 13. 基督敎財産管理法(案) 세미나 提案說明 要旨書 (1994)
  • 14. 世界經濟의 地域主義化와 韓國經濟 (國會報 339, 國會事務處, 1995)

같이 보기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71年 總選 8代 國會議員 全國區 國民黨 454,257票
4.1%
全國區 4番 落選
1985年 總選 12代 國會議員 全國區 宸翰민주당 5,843,827票
29.3%
全國區 2番 初選
1988年 總選 13代 國會議員 서울 西大門區 을 平和민주당 35,478票
38.43%
1位 再選
1992年 總選 14代 國會議員 서울 西大門區 을 民主黨 40,762票
42.86%
1位 3選

各州 [ 編輯 ]

  1. 임춘원 - 大韓民國헌정회
  2. '國民黨' - 네이트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東亞日報, 1971年 3月 27日子, 國民黨 運營委員 任命
  4. 京鄕新聞, 1971年 5月 7日子, 8代 國會議員 立候補者 名單
  5. “張俊河記念事業會, <<內 속에 살아 숨쉬는 燈불>>, '아 장준하' 追慕의 글 모음” . 2013年 11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6月 26日에 確認함 .  
  6. '宸翰민주당' - 네이버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 京鄕新聞, 1985年 2月 13日子, 12代 國會議員 當選者 名單
  8. 京鄕新聞, 1985年 5月 15日子, 國會 常任委別 議員名單
  9. 매일경제신문, 1985年 8月 26日子, 國會豫決위 構成
  10. 京鄕新聞, 1986年 1月 15日子, 消息: 民推協 國際問題委員長 選任
  11. 매일경제신문, 1986年 4月 12日子, 東橋洞 民主人權年 開設
  12. 京鄕新聞, 1987年 1月 22日子, 臣民 강삼재 副代辯人 辭表, 後任에 임춘원 議員
  13. 京鄕新聞, 1987年 5月 4日子, 臣民 副總務 任命
  14. 東亞日報, 1986年 11月 29日子, 催淚가스 덮힌 서울都心
  15. 京鄕新聞, 1986年 11月 29日子, 者구본능 市民은 賢明했다
  16. 매일경제신문, 1992年 3月 2日子, 서울 總選現場 與野 바람보다 人物對決 樣相
  17. 東亞日報, 1988年 4月 27日子, 13代 國會議員 當選者 名單
  18. 東亞日報, 1988年 6月 21日子, 16 上位 첫 會議 幹事選出
  19. 한겨레新聞, 1988年 7月 5日子, 平民 共和 特委委員 確定
  20. 한겨레新聞, 1989年 3月 9日子, 5共 不實企業調査班, 장영자 氏等 陳述들어
  21. 京鄕新聞, 1988年 7月 11日子, 美 민주당 全黨大會 代表團 派遣
  22. 京鄕新聞, 1990年 7月 3日子, 與野 豫決委員 確定
  23. 한겨레新聞, 1990年 10月 6日子, 保安司 主要 民間人 査察 名單
  24. 한겨레新聞, 1992年 3月 10日子, 제14대 地域區 議員 當選者 및 得票現況
  25. 한겨레新聞, 1992年 7月 8日子, 無所屬 12名 常任委 配定
  26. 京鄕新聞, 1994年 7月 2日子, 新民黨 總長 임춘원
  27. 한겨레新聞, 1995年 3月 28日子, 臣民 새 代表
  28. 東亞日報, 1995年 6月 24日子, 신민당 創黨大會 總裁에 임춘원
  29. 매일경제신문, 1992年 3月 26日子, 經濟不安 反映 大幅 물갈이
  30. 東亞日報, 1992年 5月 27日子, 임춘원 議員 民主黨 脫黨
  31. 京鄕新聞, 11月 13日子, 임춘원 議員 민자당 入黨
  32. 한겨레新聞, 1992年 12月 2日子, 김영삼 支持 祈禱會 잇달아
  33. 京鄕新聞, 1993年 3月 30日子, 朴 議長, 임춘원 議員 脫黨
  34. 京鄕新聞, 1995年 2月 13日子, 野圈統合 本格化
  35. 第137回 國會本會議會議錄 第5號, 大韓民國 國會, 1987年 10月 12日子
  36. 眞實의 길, 2012年 9月 28日子, 朴槿惠에 건넨 6億은 公金, 國庫 返納해야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