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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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훈제
出生 1921年 12月 31日 ( 1921-12-31 )
日帝强占期 平安北道 宣川郡
死亡 1999年 3月 14日 ( 1999-03-14 ) (77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道峰區 방학동 에서 拷問後遺症으로 인하여 兵士( 京畿道 南楊州市 화도읍 月山里 모란공원 遺骸 安葬)
本館 수안 (遂安)
學歷 서울大學校 政治學科 學士
職業 言論人
獨立運動家
民主化 運動家
社會運動家
經歷 新民黨 黨務委員
父母 稽封집(簿), 異形저(某)
配偶者 김진주(再婚)
子女 界여곤(아들)
正當 無所屬

계훈제 (桂勳梯, 1921年 12月 31日 ~ 1999年 3月 14日 )는 大韓民國 獨立運動家 이며 民主化 運動家 , 解放 以後 民族守護協議會 運營委員, 民主憲法爭取 國民運動本部 常任共同代表 等을 歷任한 社會運動家이다. [1]

平安北道 宣川郡 出身이다.

生涯 [ 編輯 ]

1921年 平安北道 宣川(宣川)에서 아버지 稽封집(桂鳳集)과 어머니 李兄저(李亨姐)의 5男妹 中 막내로 태어났다.

1943年 경성제국대학 1學年 在學 中 日帝의 學兵 徵集을 拒否하고 臨時政府로 갈 計劃으로 國境을 넘다 日本 憲兵에 붙잡혀 志願兵 訓鍊所로 押送됐다.평양 隣近의 採石場에서 重勞動을 하면서도 建國同盟 과 連繫했던 抗日 獨立運動 團體인 '朝鮮民族解放協同團'에 加入해 抗日 活動을 벌였다.

解放以後 장준하 의 勸誘로 白凡 金九 밑에서 일을 했다. 白凡의 影響 아래 信託統治 反對 鬪爭에 나섰고, 白凡의 南北協商을 支持하며 削髮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文理大 政治學科 學生會長 때는 美軍政에 依한 서울대학교의 國立化에 反對하는 ‘ 국대안 反對鬪爭’을 이끌었다.

學生委員長이었던 時節 李姬鎬 를 만나 夫婦의 緣을 맺을 뻔 했지만, 後날 계훈제가 肺結核에 걸리고 李姬鎬가 美國 留學길에 오르면서 因緣이 엇갈렸다. [2]

5·16 쿠데타 가 일어난 뒤 民主化運動의 가시밭길을 걷기 始作한다. 1963年 韓日會談 , 1968年 越南 派兵 , 1969年 3選改憲 朴正熙 政權 時節 政治的 고비마다 反對鬪爭에 앞장섰다. 敎育者로 일하기도 하고 言論人으로서 思想界 編輯長과 씨알의 소리 編輯委員을 맡으면서 軍事獨裁에 反對하는 民主化 運動과 統一運動을 이끌었다.

1980年 ' 서울의 봄 ' 때는 戒嚴令 解除를 促求했고, ' 김대중內亂陰謀事件 '에 휘말려 15個月 逃避生活 後 逮捕되어 拘束되었다. 第5共和國 時節 내내 民主化鬪爭을 이끌었고, 1987年 ‘民主憲法爭取 國民運動本部’의 常任共同代表를 맡아 1987年 6月 民主抗爭 을 先導했다.

以後에도 全國聯合 常任顧問 等을 歷任하며 民主化와 統一을 위해 平生 동안 鬪爭을 繼續했다.

1999年 3月 14日 拷問後遺症으로 인한 合倂症으로 享年 77歲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그의 遺骸는 大韓民國 京畿道 南楊州市 화도읍 月山里 모란공원 에 安葬되었다.

著述 [ 編輯 ]

病床에서 自敍傳인 "나의 鬪爭, 나의 一生"을 執筆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였다. 이 유고는 2002年에 "흰 고무신-계훈제, 未完의 自敍傳" (삼인)으로 出版되었다.

略歷 [ 編輯 ]

學歷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李姬鎬 女史 自敍傳 '同行' 出刊” . 《聯合뉴스》. 2008年 11月 8日 . 2019年 6月 24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