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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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李福男
別名 者는 修補(綏甫), 諡號는 充壯(忠壯)
出生日 1555年 陰曆 8月 28日
出生地 朝鮮 江原道 溟州郡
死亡日 1597年 9月 26日(陰曆 8月 16日, 42歲)
死亡地 朝鮮 全羅北道 南原郡 西峯面 남원성
國籍 朝鮮
學歷 1588年 (宣祖 21年) 式年武科 甁과 18位 及第
父母 이준헌, 全州李氏 이명복
配偶者 淸州韓氏, 한곤의 딸
子女 이경여 , 李京洙, 이경보 , 최시환의 妻
親戚 移轉 (할아버지), 이인남 (동생), 이덕남 (동생), 이광식 (曾祖父), 利用 (從祖父), 移監 (從祖父), 이승헌 (異腹 三寸), 李性憲 (5寸 堂叔), 이희헌 (5寸 堂叔), 이명남 (6寸 再從弟), 한곤(匠人), 한덕원 (妻男), 이九鍼 (外祖父)
宗敎 儒敎 ( 性理學 )
服務 朝鮮 陸軍
服務期間 1588年 ~ 1597年 9月 26日 ( 陰曆 8月 16日 )
最終階級 折衝將軍 數 全羅道 兵馬節度使
指揮 全羅道 兵營
主要 參戰 羅州 戰鬪, 웅치 戰鬪 , 웅縣 戰鬪, 남원성 戰鬪 / 壬辰倭亂 , 丁酉再亂
기타 履歷 1588年 (宣祖 22) 式年武科 甁과 及第, 事後 增 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加症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徐薰 1604年 (宣祖 37)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
이복남
한글 表記 : 이복남
漢字 表記 : 李福男
改正 로마字 表記 : I Boknam
매큔-라이샤워 表記 : I Poknam
예일 表記 : I Poknam

이복남 (李福男, 1555年 [1] 陰曆 8月 28日 ~ 1597年 9月 26日 ( 陰曆 8月 16日 ) [2] )은 朝鮮 時代 中期의 武臣, 軍人이며, 本貫은 雨季 (羽溪)로 者(字)는 修補(綏甫), 諡號는 充壯(忠壯)이다. 武科 及第後 宣傳官 에 初任된 뒤 折衝將軍 全羅道 兵馬節度使 (折衝將軍 全羅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1588年 (宣祖 21年) 武科 式年試(武科 式年試)에 丙科로 及第, 宣傳官 , 別莊을 거쳐 1592年 (宣祖 25) 羅州 判官 (羅州判官)李 되고, 그해 4月 羅州 判官 在職 中 壬辰倭亂 (壬辰倭亂)李 터지자, 兼 道服兵長에 任命되어 全州 웅치 戰鬪 에서 勝利를 거두었다. 勝戰의 공으로 그해 12月 堂上官 에 昇進했다. 팔輛神聖을 守備하다가 1593年 (宣祖 26) 全羅 조방장 , 全羅 防禦使 (全羅防禦使)를 거쳐 忠淸 조방장 (忠淸助防將)李 되었다. 그해 7月 病으로 遞職되었으나 바로 復職, 全羅防禦使에 任命되고, 1593年 10月 訓鍊 道政 (訓鍊都正), 12月 다시 忠淸 조방장 에 再任命되었다. 1594年 8月 南原 府使 (南原府使), 이듬해 1月 全羅道 兵馬節度使 , 이듬해 3月 羅州 牧師 (羅州牧使) 等을 歷任했다. 1597年 (宣祖 30年) 1月 다시 全羅道 兵馬節度使에 任命, 그해 丁酉再亂 (丁酉再亂)이 일어나 8月 海岸가로 올라오는 日本軍을 막으러 順天 으로 내려갔다가, 남원성 이 包圍되자 말머리를 돌려, 그해 8月 9日 7百의 軍士를 이끌고 남원성 에 들어갔다. 남원성 戰鬪 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等의 5萬 軍士를 對敵하다가 敗하고, 조방장 (助防將) 김경로 (金敬老), 接伴使 정기원 (鄭期遠), 교룡산性別長(蛟龍山城別將) 信號 (申浩) 等과 함께 戰死하였다.

事後 바로 (贈) 資憲大夫 兵曹 板書 知義禁府事 贈職 (贈職)되고 1604年 (宣祖 37)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錄勳되었으며, 뒤에 다시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追贈 (追贈)되었다. 1612年 (光海君 4年) 南原 漆충신사 에 祭享(祭享)하고 七충신사는 後에 광해군 때에 忠烈祠 (忠烈祠)의 賜額이 내려졌다. 1711年 (肅宗 37年) 肅宗 때 充壯(忠壯)의 諡號를 받았다. [3] 그의 동생 이덕남은 壬辰倭亂 初期 金化縣監으로 戰死했고, 동생 이인남 南道 虞侯 로, 叔父 이경헌, 이승헌 申砬 將軍의 副官으로 忠州 彈琴臺 戰鬪 에서 戰死하였다. 江原道 江陵 出身.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少年期 [ 編輯 ]

璿源錄 中 정종대王維附錄, 수도군 德生 子孫錄 58페이지
(李福男의 아버지 이준헌, 外할아버지 이九鍼 의 姓名 外에 어머니 이명복의 이름과 生年이 收錄되어 있다.)

이복남은 江原道 名酒 (現, 江陵市 ) 出身으로, 1555年 (明宗 10) 6月 28日 興德 縣監 甲山 都護府 紗를 歷任한 이준헌 (李遵憲)과 全州李氏 이명복(全州李氏 李明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 이광식 (李光軾)의 曾孫이며 移監 (李戡)의 宗孫이다. 그가 태어날 當時 曾祖父 이광식 이 生存해 있었다.

아버지 이준헌은 武科 (武科)에 及第하여 行 興德 縣監 甲山都護府 사 兼 甲山眞 兵馬僉節制使를 지냈으나 일찍 死亡하였다. 高麗 말의 長壽 異議 (李?)의 後孫으로, 高祖父 이지방 (李之芳)의 大魚 武科에 及第하여 武班 家計를 形成했다. 高祖父 이지방 , 曾祖父 이광식 (李光軾), 할아버지 移轉 (李?), 從祖父 利用 은 모두 武科 에 及第하여 邊方의 將帥로 活動하였다. 壬辰倭亂 當時까지도 生存해 있던 그의 할아버지 移轉 1592年 (宣祖 25) 4月 30日 播遷이 決定되자, 宣祖 의 漁家를 護衛하여 그해 5月 平壤 을 거쳐서 6月 義州 에 到着했다. 할머니는 하빈李氏(河濱李氏)로, 部長(部將) 이윤우(李允?(手+愚))의 딸이며, 할아버지는 辭職 이귀손(李貴孫)이고, 曾祖父는 節制使 이맹례 (李孟禮)이다.

어머니 全州李氏 이명복(全州李氏 李明福)은 平安道 兵馬節度使 이九鍼 (李龜琛)의 4女 1男 中 長女로 [5] , 할아버지는 群山附隨 이금손(群山副守 李金孫)이고, 曾祖父는 심곡수 이숙인이며 定宗 의 王子 首都情 이덕생 (守道正李德生)의 5代孫이다. 그의 親庭어머니는 濟州고씨로 兵馬節度使 高自謙의 딸이다. 어머니 이명복(李明福)은 璿源錄 에 이름이 傳하는데, 수도군 德生의 6貸損으로서 璿源錄 中 정종대王維附錄에 그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慰勞는 兄 이귀남(李貴男)이 있었고, 동생 이덕남 (德男), 이인남 (仁男)李 태어났다. 兄 이귀남은 43歲에 일찍 死亡했고, 두 동생 이덕남 이인남 은 모두 武科 (武科)에 及第하였다. 처음에는 글을 배웠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아 그만두고 孫吳(孫吳)의 兵法(兵法)을 익혀 無關(武官)이 되기로 決心한다.

그는 校山 許筠 (許筠) 等과 가깝게 지내며 交遊하였다. 許筠 에 依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非分 慷慨하는 큰 뜻이 있었다. 처음에는 글을 배웠는데 마음에 내키지 않아 그만두고 孫吳 (孫吳)의 兵法(兵法)을 배워 그 大義를 통하였고, 平生 나라를 위해 몸바칠 것을 다짐하였었다. 그리고 將順 (張巡)ㆍ 岳飛 (岳飛)ㆍ 文天祥 (文天祥)의 電氣를 읽을 적마다 반드시 冊을 덮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6] 許筠 은 그의 재주를 稱讚했는데, 詩文 (詩文)을 지으면 나는 듯한 機略(氣略)이 있었지만 詩 짓기를 眈眈잖게 여겼다. 남을 對해서 古今(古今)의 興亡 成敗를 談論하는 대목은 시원스러워서 들을 만하였으므로 남들이 다 奇異하게 여겼다 [6] 한다. 연경재 성해응(成海應)은 그가 每日 옛 忠臣烈士에 對한 書籍을 耽讀하고 한時도 눈물흘리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傳한다. [7]

科擧 及第 [ 編輯 ]

許筠 惺所覆瓿藁 에 依하면 그는 詩文(詩文)을 잘 지었지만 詩 짓기를 眈眈잖게 여겼다 한다. 許筠에 依하면 그는 文科 (文科)에 應試하려다가 斷念하고 武科에 應試하였다 한다.

송재(松齋) 한곤(韓梱)의 딸 淸州韓氏와 結婚했는데, 韓氏夫人의 曾祖父는 禮賓寺別除(禮賓寺別提) 韓兄(韓泂)이고, 義警世子 의 丈人 韓確 의 조카이며 成宗~연산군 때의 政丞 한치형 (韓致亨)의 兄인 한치량(韓致良)의 5代孫이다.

보인 (保人) 身分으로 1588年 ( 朝鮮 宣祖 21年 ) 3月 16日 式年武科 (式年武科)에 甁과(丙科) 18位로 及第 [8] , 宣傳官 (宣傳官), 別莊(別將)을 거쳐 1589年 (宣祖 22) 備邊司 (備邊司)에서 無人을 불車 採用할 때 辯協 (邊協) 等의 薦擧를 받고 備邊司 郎官이 되었다. [9] 그後 宣祖임금이 漢江 을 譏察할 때 別莊에 任命되어 宣祖를 遂行하였다. [10] 1592年 (宣祖 25) 羅州 判官 (羅州判官)에 任命되었다. 官吏 노릇을 하면서 매우 꿋꿋하여 남에게 阿諂하지 않았다 한다.

1592年 (宣祖 25) 4月 壬辰倭亂 이 터지자 1592年 (宣祖 25) 7月 羅州 判官 兼 度伏兵長(都伏兵將)에 任命되었고, 義兵將 황박 (黃璞), 李珖 (李珖), 金堤 郡守 情談 (鄭湛) 等과 함께 全州城 을 占領하러 올라오는 倭敵을 맞아 全州 웅치 (熊峙)에서 싸웠다.

壬辰倭亂 [ 編輯 ]

全州, 안덕원 戰鬪 [ 編輯 ]

1592年 (宣祖 25) 7月 안코쿠地 에케이 (安國寺惠瑗)가 이끄는 日本軍 은 全州로 上陸하기 위해 웅치로 몰려들었다. 이때 光州牧使 權慄 光州 地方에서 募集한 軍事 1,500餘 名을 直接 이끌고 理致를 지켰다. 이 部隊에는 日本에 가서 氣槪를 떨친 동복현감 黃進 도 加擔하고 있었다. [11] 金堤 郡守 情談 (鄭湛)李 웅치(熊峙)를 막는 任務를 맡았으며 羅州 判官 이복남軍이 先發隊에 配置되었다. 황박 (黃璞) 等 義兵도 多數 加擔했다. [11] 日本軍 先鋒(先鋒) 數千 名이 銃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正面으로 突進했으나, 활로 쏘아 抵抗, 日本軍이 一旦 물러났다. [12] 7月 7日 日本軍 先鋒隊가 鳥銃을 쏘아대며 웅치로 올라왔으나 頑剛한 抵抗에 부딛쳐 一旦 後退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日本軍 은 兵力을 總動員해 進擊했다. 1線을 맡은 황박 軍이 沮止하다가 밀려나자 2線을 맡은 이복남 軍(軍)이 나섰다. 적은 2線까지 제치고 밀고 올라와 頂上에 이르렀다. [11] 이복남 等은 안코쿠地 에케이 가 이끄는 日本軍의 一介 陳(陣)을 무찔러 싸웠으나 結局 當해내지 못하고 退却하였고, 황박의 軍事도 힘이 다하여 무너져 退却했다. 화살 이 다 떨어져 戰勢가 不利해지자 그는 一旦 안덕원 (安德院) 溪谷으로 後退하였다가, 溪谷 안으로 들어오는 倭軍을 모두 殲滅하였다.

8月 9日 羅州 判官으로 全羅 조방장(助防將)에 兼任되었다. [13]

12月 웅치 戰鬪 勝戰의 공으로 堂上官 으로 昇進하여 雲峰(雲峰)의 팔輛新星(八良山城)의 守備를 名 받았으며, 1593年 (宣祖 26年) 全羅 조방장 , 全羅 防禦使 에 任命되었다. 1593年 4月 日本軍 은 朝鮮軍과의 和議를 깨고 晉州城 을 攻擊하였다. 巡邊使 이빈은 雲峯을 거쳐 宜寧에 駐屯했고, 全羅防禦使 선거이 忠淸 兵士 黃進 , 全羅防禦使 이복남은 權慄 의 指揮 아래 昌寧 等地에 分散 駐屯했다. [14] 그해 5月 27日 에 그가 精銳兵 2萬 名을 가려 뽑아 嶺南(嶺南)으로 向하였다고 備邊司 에 報告되었다. [15]

壬辰倭亂 後半 [ 編輯 ]

그 뒤 忠淸 조방장 에 任命되었다. 1593年 5月 兵力을 이끌고 忠淸道兵馬節度使 黃進(黃進)의 軍士와 만나 集結하였다. [16] 같은 5月 조방장(助防將) 弔意(趙誼) 等과 함께 軍士를 거느리고 宜寧 으로 갔다. [17] 그러나 病을 얻어 1593年 (宣祖 26) 7月 5日 病으로 李施彦 (李時言)과 交替되었다가, 그해 7月 20日 다시 全羅防禦使에 任命되어 장수현 (長水縣)에 駐屯하였다. [18] 1593年 (宣祖 26年) 10月 訓鍊 道政 (訓鍊都正)에 任命되었다가 [10] , 1593年 12月 다시 忠淸 조방장 이 되었다. 1594年 (宣祖 27年) 7月 17日 搖動 으로 보낼 軍官을 推薦할 때 류성룡 의 推薦을 받았으나 [19] , 選拔되지 못했다.

1594年 8月 2日 南原府使 弔意(趙誼)가 罷免되자 그가 南原 府使 兼 全羅조방장이 되었다가 [20] , 그해 10月 20日 司諫院 으로부터 술에 醉해 酒酊을 한 日課 刑罰을 지나치게 濫用한다는 理由로 彈劾을 當했으나, 宣祖 가 천천히 苦悶해보겠다며 返戾시켰다. [21] 1595年 1月 27日 全羅道 兵馬節度使 에 任命되었다. 이때 그는 妻外四寸 남궁율(南宮?)의 請을 듣고 홍우치(洪禹治)를 監禁한 뒤 長兄을 加害 杖殺한 일로 그해 8月 23日 司憲府 로부터 南兄(濫刑)하였다는 彈劾을 받고 罷職되었다. 그를 逮捕하라는 命을 받은 禁府都事가 8月 24日 에 出發했는데 9月 14日 에 늦게 돌아왔다는 理由로 追告받기도 하였다. 그 뒤 復官, 1596年 1月 備邊司 에서 羅州 牧師(羅州牧使)에 薦擧되고 [22] , 그해 3月 7日 備邊司 의 建議로 羅州牧師에 任命되었다. [23]

壬辰亂(壬辰亂)을 當하여 날마다 軍馬(戎翰)를 訓鍊시키어 죽을 힘을 다하여 여러 番 敵을 베고 氣를 베어 바치니, 그 功으로 붉은 緋緞옷을 下賜받았다. [6] 1597年 (宣祖 30) 1月 27日 다시 全羅道 兵馬節度使 에 任命되었다. 한便 日本 에 捕虜로 끌려갔던 姜沆 (姜沆)은 的中奉疏(賊中封疏)를 올릴 때, 이를 두고 이복남(李福男)은 아침에는 南原 府使이었다가 저물녘에는 羅州 牧師가 되고, 오늘은 防禦使 이었다가 來日은 節度使 가 되곤 하니, 不可하다고 指摘하기도 했다. [24] 1597年 (宣祖 30) 4月 倭軍 15萬 名이 釜山에 上陸하자 海岸가로 올라오는 倭軍을 막으러 全羅南道 順天 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戰爭이 그치지 않은 때문에 그는 腕力 있고 勇敢한 사람으로, 透析(投石) 잘하고, 拔去(拔距) 잘하고, 활 잘 쏘는 者들을 特別히 모아 5百 人을 얻었다. [6] 그는 이들을 幕下(幕下)에 隸屬시켜 번갈아 宿直시켰다. 그리고 밤낮으로 같이 起居하면서 맛있는 飮食을 안 먹고, 적은 것도 나누어 먹으니 麾下 兵士들이 感動하였다. [6]

丁酉再亂 [ 編輯 ]

倭軍의 남원성 侵攻 圖面

1597年 (宣祖 30年) 8月 明나라 와 日本의 會談이 決裂되어 丁酉再亂 이 發生하자, 海岸가로 들어오는 倭敵을 殲滅하려 軍士를 이끌고 海岸가로 내려갔다. 順天 , 光陽 까지 내려갔다가 8月 4日 日本軍이 光陽으로 上陸하자, 玉과(玉果)에 駐屯하며 交戰을 準備하였다. 그러나 남원성 에서 救援을 要請하는 明나라 부총병 兩院 (陽元)의 請을 듣고, 回軍하였다. [25] 贍賑(蟾津) 一帶를 防禦하며 席만(石蠻)ㆍ행장(行長)과 막으려 하던 次였다. [6] 이에 檄文을 받고는 곧 떠나려면서 軍吏(軍吏)를 불러 軍士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따를 사람은 따르라고 하였다.

敵은 많고 應援은 끊어졌으니, 性의 陷落은 旣定事實이다. 나는 나라의 中은(重恩)을 입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안 갈 수는 없다. 이제 數千 名의 軍事로 그 많은 敵을 當해내기란 마치 큰 鎔鑛爐 기러기 털(鴻毛)을 사르氣와 같아, 形便上 僥倖이 없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帳簿가 危急한 때를 當하여 신명을 바치는 데 있어 죽음을 辭讓할 수 없다. 오늘은 내가 죽는 날이다. 그러나 諸君(諸君)은 부질없이 함께 죽을 것은 없다. 가고 싶은 者는 가도 되나, 남고 싶은 者는 머물러 있거라. [6]

이에 그를 따르던 軍卒 7百은 그를 따라 죽겠다고 盟誓하고 함께 남원성 으로 올라갔다. 8月 7日 全羅 兵使 李福男이 順天에서 옥과에 到着하니 縣監 洪僚佐(洪堯佐)가 單身으로 變故에 對備하고 있었다. 복남이 거느리고 왔던 軍士들도 흩어졌으므로 將校 50餘 名만 거느리고 나아가다가 길에서 조방장 李舜臣의 麾下將軍 양건當 [황대중] 김경로 (金敬老)와 山城別莊 信號 (申浩)를 만나 매우 기뻐서 손을 잡고 함께 죽기를 盟誓하고 [26] , 合流하였다. 回軍 中 倭敵이 차지할 憂慮가 있는 食糧倉庫를 모두 불태워 燒却했는데, 現地의 官僚들, 衙前들은 숨어있다가 統制使 李舜臣 에게 이를 알리며 그를 誣告하였다.

남원성 潛入 [ 編輯 ]

8月, 南原 戰鬪 에서 그가 冬服(同福)에서 올 때 이미 倭軍은 남원성에 當到하였다. 그가 千 餘名의 軍士를 이끌고 남원성 에 到着하였을 때는 이미 倭軍이 城郭을 包圍하였다. 城으로 오는 길에 接伴使 정기원 , 防禦使 김경로 , 교룡산性 別莊 信號 (申浩) 等을 만나, 죽음으로서 戰鬪에 臨할 것을 다짐하였다.

사나이 國恩을 갚을때가 이날이 아닌가

라며 同行하였다. 남원성 北門 앞에 이르러 죽음으로서 싸울 것을 宣言하고, 살고 싶다면 떠나도 좋다고 宣言한다. 兵士들은 그를 따라 行軍하였다. 남원성 入口에 이르러 그는 3千餘 名의 兵士들을 이끌고 죽음을 覺悟하고 性 南門 앞으로 集結, 行軍하였다. 피리와 喇叭을 불고 行軍하는 그의 部隊를 본 고니시 柳키나카 의 兵士들은 少數의 兵力으로 行軍하는 그들을 보고 城門을 열어주었다.

그는 죽음을 覺悟하고 性 南門으로 들어가 城안에 있던 官民 1萬 名, 兵力 4千 名과 함께 奮戰하였다. 隣近에 있던 그의 從事官 태우(太宇)의 親族 胎귀生(太貴生), 泰川生 等도 種族 數十 明과 稼動 數百 名을 거느리고 그를 돕기 爲해 남원성 으로 들어왔고, 문기방(文紀房) 等 義兵將들度 남원성 으로 들어왔다.

남원성 戰鬪와 戰死 [ 編輯 ]

남원성 內部 簡略度

1597年 (宣祖 30年) 8月 9日 全羅 兵士 로 있던 이복남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包圍를 뚫고 千餘 名의 軍士를 이끌고 남원성 으로 들어온다. 毅然한 姿勢로 喇叭과 號角을 불며 남원성 南門을 통해 包圍된 남원성 內로 들어온다. 그 後 5日 동안의 남원성 守備를 위한 悽絶한 戰鬪가 繼續된다. 8月 12日 兵力 多數는 죽고 그는 生存 將兵에게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許諾하였다. 모든 將兵은 最後의 一角까지 決戰에 臨하라"고 命令하고 交戰하였다. 이때 軍器寺 所屬 파진군(破陣軍) 兵力 12名도 남원성 에 들어와 함께 싸웠다. [27] 8月 15日 이복남은 配屬된 防禦使 오응정·조방장 김경로 와 함께 北門을 지키고 있었다. 戰勢가 기울자 明나라 부총병 兩院 은 사람을 보내 李福男에게 手下의 軍卒을 보내와 같이 脫出할 것을 勸誘하였으나 그는 斷乎히 拒絶하였다. 그리고 部下에게 命令하여 땔나무로 쓰던 풀을 그의 周圍에 쌓게 하여 城안에서 죽을 覺悟를 하였다. 부총병 兩院은 序文(西門)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오응정 · 김경로 等과 함께 大檢을 빼어 들고 軍卒들의 싸움을 督勵하면서 死力을 다하며 奮戰하였다.

北門의 교룡산性 別莊 信號 (申浩)는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 들고 同門과 西門으로 오가며 敵을 베었다. 加服이 脫出을 勸誘하였으나 오히려 家族에게 傳하라며 를 빼어 加服에게 주었다. 官民 1萬 名, 全羅道兵營 兵力 4千 名과 함께 5萬 8千의 倭敵과 必死抗戰을 하였으나 衆寡不敵으로 敗하였다. 古墳群妬悍 보람 없이 接伴使 정기원 (鄭期遠), 府使 任鉉 (任鉉), 判官(判官) 이덕회(李德恢) 등이 죽고, 兵士 多數를 잃고 性은 陷落, 8月 16日 그는 軍卒을 시켜 볏짚을 가져다가 自身의 둘러싸고 불을 지르게 하여 焚身自決하였다. 當時 그의 나이 43歲였다.

그의 加服들은 그의 頭髮과 衣類를 收拾하여 돌아갔고, 이것으로 光州 신원리 山에 葬禮를 치루었다. 그가 타던 愛馬가 그의 甲옷과 투구를 물고 京畿道 光州 신원리 집에 나타나 이것 亦是 그의 두發, 衣類와 함께 醫館長을 하였다. 後日 그와 交分이 있었던 校山 許筠 惺所覆瓿藁 에서 李福男을 追慕하는 腦死를 지었다. 파진군 兵士 12名 中 生存한 김효의 1名이 홀로 빠져 나와서 남원성이 陷落된 事情을 西厓 류성룡 에게 傳하였다. [28] 宣祖 는 原野에서 忠誠을 다하다 죽었으니 壯하도다며 綠공贈職을 命하였다.

死亡 直後 [ 編輯 ]

그가 남원성 에서 殉節한 것은 1615年 (光海君 7)부터 1617年 (光海君 9) 弘文館 副提學 異性 (李惺) 等이 編纂한 東國新續三綱行實圖 (東國新續三綱行實圖) 18卷 中 第1卷 복남수性(福男守城)篇에 실렸다. [29]

한便 그의 家族들은 한때 平安道 寧邊 에 流浪했다고 한다. 妻 淸州韓氏는 1597年 (宣祖 30) 11月 28日 備邊司 에 正裝을 올려 救恤을 請하였는데, "家翁(家翁)李 戰死한 뒤로 갈 곳이 없어서 平安道 寧邊 (寧邊)에 流浪하고 있는데, 굶주림에 시달려 哀痛하기 그지없다. 여느 戰死한 長官(將官) 妻子의 例에 依據하여 料米(料米)를 주어 戰死한 넋을 달래달라."고 하여 宣祖가 쌀을 支給하였다. [30] 셋째 아들 이경보 는 戰亂 中 日本軍 에게 拉致되어 야마구치 縣 조슈번 에 보내진다.

屍身은 萬人義塚 (萬人義塚)에 安葬되었으며 屍身을 代身한 투구와 甲옷은 京畿道 廣州郡 낙생면 대장리 先塋下에 千益壯 으로 장사되었다. 後日 다시 京畿道 廣州郡 언주면 원지리(現 서울特別市 瑞草區 원지동 산83-2번지) 철曲部落 山에 安葬되었다. 墓所 近處에는 曾祖父 이광식 , 6寸 동생 이명남 , 再從孫 이서우 等의 墓所가 있고, 墓域 東南쪽 山아래에는 2011年 建立된 서울追慕公園 이 素材海 있다.

事後 [ 編輯 ]

宣祖 임금이 이르기를 原野에서 忠誠을 다해 殉國하였으니 壯하도다 하며 바로 贈職을 내려 바로 資憲大夫 兵曹判書 (贈資憲大夫兵曹判書)謙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贈職되었으며 1604年 (宣祖 37年) 宣撫 原從功臣 1等(宣武原從功臣一等)에 追敍되었다.

뒤에 加症(加贈)되어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贈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義禁府社 五衛都摠府 都摠管(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追贈하였다. 바로 旌閭하여 堤川 靜慮 衝新聞 (忠臣門)을 세웠다. 李福男의 靜慮 門은 堤川 봉양면 에 세워졌으나, 後에 돌보는이 없이 허물어져서 1971年 8月 忠北 中原郡 酒德면 당우리(現, 忠州市 주덕읍 당우리) 당우리 521-1番地, 새터(或은 원堂宇)마을로 옮겨져 再建, 復元되었다.

後日 南原에서 함께 戰死한 信號 , 정기원 , 오응정 , 任鉉 等의 位牌를 모신 祠堂이 마련되었으며, 漆충신사라 하였다. 1612年 (光海君 4年) 忠烈祠 (忠烈祠)의 賜額 이 내려졌다. 忠烈祠는 大院君 執權 때 書院撤廢令 에 依해 祠堂이 헐렸다가 1964年 全羅北道 南原郡 남원읍 향교리 王鳳山 아래에 다시 祠堂을 再建하고 墓域을 再建하였다. 1615年 (光海君 7年) 編纂된 《 東國新續三綱行實圖 (東國新續三綱行實圖)》 3輯, 忠臣도 卷1에 그의 行跡이 收錄되었다. 1653年 (孝宗 4) 잠곡 金堉 은 黃塵의 향사(鄕祠)에 李福男을 追加 配享할 것과, 그때까지도 褒賞받지 못한 이원춘(李元春)의 褒賞을 함께 上疏하기도 하였다. [31]

1711年 ( 朝鮮 肅宗 37年) 6月 16日 充壯(忠壯)의 諡號가 내려졌다. [32] 1790年 (正祖 14年) 2月 에는 正祖 思悼世子 의 顯隆園으로 向할 때, 輦路(輦路) 近處에 있는 窓빈(昌嬪)의 墓所와 고(故) 領議政 정태화(鄭太和), 고 忠臣(忠臣) 이복남(李福男), 고 衝木工(忠穆公) 이상집의 墓所와 淸海백(靑海伯) 이지란(李之蘭)를 致祭하였다. [33]

全南 咸平郡 금송리의 금우사 (錦宇祠)에 金은 김수연(金壽淵) 5父子와 함께 配享되었다가 大院君 의 書院撤廢令때 毁撤되었다.

咀嚼 [ 編輯 ]

  • 《參判이공전조손주복첩 (參判李公-?-祖孫往復帖)》, 忠淸道 에 있던 이복남과, 避難가는 漁家를 護衛하는 할아버지 移轉 이 주고받은 便紙書札을 李福男의 4代孫 이봉채 가 엮은 것이다.

家族 [ 編輯 ]

  • 妻祖父 한巨碑(韓去非, 한치량(韓致良)의 曾孫, 한치형 의 從曾孫)
  • 丈人 한곤(韓梱, ? - ?年 1月 5日 , 本貫은 淸州, 號는 송재(松齋))
  • 장某 함열 南宮氏(咸悅南宮氏, ? ~ ?年 10月 9日 ), 參判 남궁후(南宮厚)의 딸
    • 妻男 한덕원 (韓德遠, 1550年 - 1630年 5月 28日 ), 한덕원의 孫子 韓公億(韓公億)의 딸은 그의 6寸 동생 이길남의 曾孫 이일관 (李日觀)과 結婚하였다.
      • 妻조카 한섭(韓王+燮), 妻조카이자 査頓
    • 妻男 한덕구(韓德久)
    • 妻男 한덕수(韓德脩, 1562年 - 1641年 )
  • 査頓 윤근수 (尹根壽)
  • 査頓 윤두수 (尹斗壽)

評價 [ 編輯 ]

官吏 노릇을 하면서 매우 꿋꿋하여 남에게 阿諂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몹시 좋게 여겼다. [6] 地方官으로 있을 때 그 다스림이 嚴正하고 밝고 仁慈하고 寬大하여 敎化(敎化)가 크게 이루어졌었다. [6]

기타 [ 編輯 ]

丁酉再亂 때 그가 直接 남원성 戰鬪 의 作戰本部를 設置하였던 용성관 은 城이 陷落되기 前, 太祖 의 位牌가 倭敵에게 凌辱을 當할까 念慮하여 용성관을 訴却下였다.

許筠 은 惺所覆瓿藁에서 그가 詩를 잘 지었다고 한다. 權慄 은 1596年 3月 4日 先祖를 引見할 때 "文筆(文筆)도 갖추었습니다. 일찍이 羅州 通判(羅州通判)李 되어 淸白함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다만 氣勢가 너무 지나쳐 윗사람들을 蔑視합니다. 이것이 그의 病통입니다"라고 하였다. [37] 그는 글을 잘 짓고, 詩도 썼으나 大部分 紛失되었고, 南原 廣寒樓 에 時調 한 首가 傳한다.

壬辰倭亂과 家族 [ 編輯 ]

壬辰倭亂 當時 知中樞府事였던 할아버지 以前은 平安道 義州로 夢陽가는 漁家를 義州까지 扈從하여 호성 原從功臣 3等에 녹선되었고, 叔父 이경헌, 이승헌과 동생인 南道 虞侯 이인남 (李仁男)은 忠州 彈琴臺 에서 申砬 의 副官으로 戰死하였고, 동생 이덕남 (李德男)은 武科 及第後 江原道 金化縣監 在職 中 1592年 壬辰倭亂 을 만나 올라오는 日本軍과 交戰 中 戰死했다.

日本軍에게 拉致되어 日本 乳質 (留質)로 끌려간 아들 이경보 (李慶甫)는 里노이에 씨(李家氏)로 昌盛하고 이름을 成俔(聖賢)이라 改名하고 日本 女人과 婚姻하여 子孫을 두었다 [38] . 以後 警報의 後孫들은 죠슈 番 에서 代代로 醫師 (醫師)로 活動하였다.

日本 의 前 言論人이자 아사히 新聞 사 社長이며 文學博士(文學博士)인 里노이에 마사後尾 (李家正文)는 自身의 性이 이街氏라는 特異한 성氏에 疑問을 품고 80年間 資料를 追跡 調査하여 自身의 祖上이 丁酉再亂 때 고니시에게 拉致된 李福男의 셋째 아들인 이성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作家이자 言論人, 아사히신문 , 요미우리新聞 에서 勤務한 이가정문(李家正文)은 朝鮮式 性이라 朝鮮人이라 놀림당하였다. 自身의 性이 二價氏인 것에 疑問을 품었으나 아버지는 이를 알려주지 않고 死亡했다. 百部를 졸라 우리 집안은 朝鮮에서 와 幕府의 全義(醫師)로 活動했으며 朝鮮의 王族이라고 말해주었다. 이가정문은 自身의 뿌리를 찾으려 했고 三星그룹 李秉喆 會長이 事緣을 듣고 도움을 주게 되었다. 李秉喆은 78年 日本에 온 길에 이가 正門을 만나 所藏하고 있던 이복남姜君의 墓碑文 拓本을 선뜻 내주었다. 또한 이가정문은 삼중당 서건석 社長에게서도 朝鮮의 族譜 萬世帶洞報를 膳物로 받았다. [39] 王族의 後孫이라던 傳說과는 달리 그는 李福男을 거쳐 알평까지 이어지는 血統이었다.

顔面痲痹 로 韓國에 올 수 없었던 [40] 里노이에 마사後尾 1980年 《찾아낸 2千年 前의 뿌리》라는 冊을 出刊하여 이 事實을 發表하였다. 1982年 里노이에 마사後尾 은 家族을 帶同하고 韓國 에 入國하여 慶州 慶州李氏 이알평 祠堂과 票암봉, 江陵 雨季 祠堂과 李福男의 墓所, 남원성 , 南原 忠烈祠 를 參拜하여 話題가 되었다.

惺所覆瓿藁 [ 編輯 ]

그는 校山 許筠 과 平素 親分關係가 있었는데, 李福男이 戰死하자 許筠 은 그를 追慕하는 長篇의 腦死를 지어 그를 追悼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기타 [ 編輯 ]

그의 사위 최시환(崔時煥)은 文科 (文科)에 及第하였다.

[ 編輯 ]

그가 지은 詩로 中 南原 廣寒樓 懸板에 걸려 있다.

二載登臨寒上樓 / 두 해에 걸쳐 廣寒樓 위에 올라

故園歸夢大刀頭 / 머리맡에 큰 칼 두고 歸鄕을 꿈꾼다.

裳聞四海徵兵急 / 全國에 들리는 急한 徵兵 消息

已道三京指日收 / 이미 3景이 倭兵의 手中에 있다고 하네.

末路知心黃石在 / 最後까지 黃石의 兵法 마음에 두었으매

暮年歸計赤松遊 / 老年에나 돌아가 神仙놀음 하리라

白雲天末無消息 / 하늘 끝 흰 구름은 消息조차 없으니

傳世靑氈底處求 / 世上에 傳하는 名譽는 죽어서나 얻을까.

各州 [ 編輯 ]

  1. 《萬曆戊子文武放牧》(萬曆戊子文武榜目), 이복남
  2. 許筠, 《惺所覆瓿藁》 卷15, 고 全羅道 兵馬節度使 增 兵曹判書 이 공 腦死
  3. 肅宗實錄 肅宗 50卷, 37年(1711 辛卯 / 靑 康熙(康熙) 50年) 6月 16日(甲戌) 1番째記事 / "한배주·권이진·송택상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고, 尹煌·尹兄 等에게 諡號를 내리다."
  4. 이준헌은 뒷날 다시 增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으로 다시 追贈되었다.
  5. 璿源錄 中 정종대王維附錄
  6. 惺所覆瓿藁 제15권, 고(故) 全羅道 兵馬節度使(全羅道兵馬節度使) 增 兵曹 判書(贈兵曹判書) 李公(李公)의 腦死
  7. 연경재집 54卷, 〈草?談獻一〉 中 李福男,任鉉,金敬老
  8. 萬曆戊子文武放牧(萬曆戊子文武榜目) 이복남 便
  9. 宣祖實錄 23卷, 1589年(宣祖 22年, 名萬曆(萬曆) 17年) 1月 21日 記事 1番째記事, "備邊司에서 無人을 불車 採用한다고 하자 各 臣僚들이 올린 名單"
  10. 宣祖實錄 43卷, 1593年(宣祖 26年, 名 萬曆(萬曆) 21年) 10月 3日 癸未 12番째記事, "兵曹가 刷馬·驛站·護衛·譏察·京畿 水軍 等에 關해 아뢰다"
  11.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1:朝鮮과 日本의 7年戰爭 이이화 지음》(한길사, 2000) 208페이지
  12. 國朝寶鑑 第31卷 / 宣祖朝 8卷 宣祖 25年(壬辰, 1592)
  13. 亂中雜錄 2(亂中雜錄二) 壬辰年 下卷, 萬曆 20年, 宣祖 25年(1592年)
  14.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1:朝鮮과 日本의 7年戰爭 이이화 지음》(한길사, 2000) 286페이지
  15. 宣祖實錄 38卷, 1593年(宣祖 26年, 名 萬曆(萬曆) 21年) 5月 27日 競進 10番째記事, "尹根壽를 引見하고 이 提督의 撤軍, 經略과 提督의 葛藤, 倭敵 追擊 等을 論議하다"
  16. 國朝寶鑑 第31卷 / 宣祖朝 8 宣祖 26年(癸巳, 1593)
  17. 亂中雜錄 2(亂中雜錄二) 繫辭年 商圈 萬曆 21年, 宣祖 26(1593年)
  18. 宣祖實錄 40卷, 1593年(宣祖 26年, 名 萬曆(萬曆) 21年) 7月 20日 妊娠 10番째記事, "鄭崑壽 等이 全羅道의 救援 要請과 李如松의 微溫的인 反應을 報告하다"
  19. 宣祖實錄 53卷, 1594年(宣祖 27年, 名 萬曆(萬曆) 22年) 7月 17日 繫辭 3番째記事, "柳成龍이 搖動의 諮問에 對한 일, 城門을 지키며 擲奸하게 하는 일, 軍糧에 關한 일, 이요를 請對한 일 等을 아뢰다"
  20. 亂中雜錄 3(亂中雜錄 三), 甲午年 萬曆 22年, 宣祖 27年(1594年)
  21. 宣祖實錄 56卷, 1594年(宣祖 27年, 名 萬曆(萬曆) 22年) 10月 20日 甲子 2番째記事, "司諫院이 南原 府使 李福男의 罷職을 請하다"
  22. 宣祖實錄 71卷, 1596年(宣祖 29年, 名 萬曆 24年) 1月 18日 乙酉 1番째記事, "備邊司에서 羅州 牧使로 文身 한덕원과 무신 李福男을 薦擧하다"
  23. 宣祖實錄 73卷, 1596年(宣祖 29年, 名 萬曆 24年) 3月 7日 甲戌 2番째記事, "이용순을 經常 監査로 李福男을 羅州 牧使로 삼다"
  24. 姜沆, 看羊錄(看羊錄) 中 的中 奉疏(賊中封疏)
  25. 8月 9日 倭敵 10萬 名이 남원성 을 侵攻하여 明나라 부총병 兩院 等이 이끄는 明나라 救援軍이 이를 막았으나 兵力 多數를 잃었다. 그러나 倭軍은 5萬 名이 生存했고 남怨聲(南原城)은 陷落됐다.
  26. 燃藜室記述 第17卷 / 宣祖朝 古寫本말(宣朝朝故事本末), 明 나라 軍事가 再次 救援하다
  27. 懲毖錄
  28. 懲毖錄
  29. 異性(李惺) 外, 東國新續三綱行實圖]](東國新續三綱行實圖) 第1卷, 忠臣圖 卷之一 88 복남수性(福男守城)
  30. 宣祖實錄 94卷, 1597年(宣祖 30年, 名 萬曆 25年) 11月 28日 乙卯 2番째記事, "죽은 兵士 李福男의 妻家 救恤을 要請하다"
  31. 잠곡遺稿 第8卷, 囚衣(收議) 便, "黃進(黃進)과 이복남(李福男)의 향사(鄕祠)에 賜額(賜額)하는 데 對한 의(議) (黃進, 李福男鄕祠賜額議)"
  32. 肅宗實錄 肅宗 50卷, 37年(1711 辛卯 / 靑 康熙(康熙) 50年) 6月 16日(甲戌) 1番째記事 / "한배주·권이진·송택상 等에게 官職을 除授하고, 尹煌·尹兄 等에게 諡號를 내리다."
  33. 正祖實錄 29卷, 1790年(正祖 14年, 靑 乾隆 55年) 2月 12日 癸亥 2番째記事, "窓빈·고 領議政 정태화·高 忠臣 이복남·高 衝木工 이상집의 墓所와 淸海백 李之蘭의 祠堂에 致祭를 命하다"
  34. 明宗實錄 14卷, 1553年(明宗 8年, 名 家庭 32年) 5月 14日 幾微 1番째記事, "司憲府에서 원的·新種·노경린·조숭조 等을 罷職하도록 請하다"
  35.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5529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6.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5436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7. 宣祖實錄 73卷, 1596年(宣祖 29年, 名 萬曆(萬曆) 24年) 3月 4日 辛未 1番째記事, "都元帥 權慄을 引見하다"
  38. 以後 그의 後孫들은 조슈 里노이에 씨(長州李家氏)로 姓氏를 精誠(定姓)하고 日本에 歸化하였다
  39. "60年間 외로운 追跡 끝에 "韓國人"뿌리 찾은 일 言論인", 中央日報 1980年 10月 4日子
  40. "60年間 외로운 追跡 끝에 "韓國人"뿌리 찾은 일 言論인", 中央日報 1980年 10月 4日子

參考 文獻 [ 編輯 ]

  • 宣祖實錄
  • 先祖修正實錄
  • 國朝寶鑑
  • 燃藜室記述
  • 大東野乘
  • 臨津弼록
  • 亂中雜錄
  • 亂中日記
  • 江原道地
  • 연경재집
  • 惺所覆瓿藁
  • 南原 忠烈祠地
  • 南原雜錄
  • 三綱行實圖
  • 임영지
  • 金星日記

參考 資料 [ 編輯 ]

  • 이街園, 《李朝名人列傳》 (을유문화사, 1965)
  • 김수민, 《한국기동악부주해》(신장섭 驛, 국학자료원, 1997)
  • 이덕일, 《류성룡》 (歷史醫아침, 2011)
  • 李舜臣, 《亂中日記》 (허경진 驛, 중앙북스, 2008)
  • 류성룡, 《懲毖錄》 (두산동아, 2010)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編輯部, 《譯註 東國新續三綱行實圖 3輯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5)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