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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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
朴鍾鴻
大韓民國 大統領 祕書室 敎育文化擔當 特別補佐官
任期 1969年 11月 30日 ~ 1972年 1月 31日
大統領 朴正熙 大韓民國 大統領
總理 정일권 大韓民國 國務總理
백두진 大韓民國 國務總理
金鍾泌 大韓民國 國務總理 署理
金鍾泌 大韓民國 國務總理
長官 김정렴 大韓民國 大統領 祕書室 室長

身上情報
出生日 1903年 7月 1日 ( 1903-07-01 )
出生地 大韓帝國 平安南道 平壤
死亡日 1976年 3月 17日 ( 1976-03-17 ) (72歲)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經歷 서울大學校 名譽敎授
成均館大學校 碩座敎授
한양대학교 碩座敎授
正當 無所屬
本館 평산 (平山)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침례회 )

박종홍 (朴鍾鴻, 1903年 7月 1日 ~ 1976年 3月 17日 )은 大韓民國 의 敎育者, 哲學者 , 思想家이며, 號(號)는 열암(冽巖)이다. 서울대학교 哲學科 敎授, 大統領 敎育文化擔當 特別補佐官 等을 歷任했다. 안호상 等과 함께 國民敎育憲章 을 기초하고 制定하는 데 參與하였다.

1920年 平壤高普 卒業 後 敎師로 敎壇에 섰다. 光復 以後에는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敎授, 文學副長, 文理科大學 大學院長 等을 歷任했으며 그밖에 獨逸 哲學 觀念論 의 影響을 받아 實存主義, 分析哲學, 韓國 哲學 等 多樣한 分野를 硏究, 涉獵했다. 그밖에 哲學 關聯 著述 執筆을 하였다. 朴正熙 執權 以後 敎育文化擔當 特別補佐官이 되었다. 그밖에 그는 朝鮮 時代의 性理學 者들의 精神世界觀에 對한 硏究도 하였다.

生涯 [ 編輯 ]

普通學校, 高等學校 敎師 生活 [ 編輯 ]

光武 7年( 書記 1903年 ) 平安南道 평양부 에서 태어났다.

1920年 平壤高等普通學校를 卒業하고 바로 敎員 任用試驗에 바로 合格, 1921年 18歲에 全羅南道 敎育廳에 發令되어 最年少 敎師가 되었다. 1921年 3月 1學期부터 寶城普通學校에서 敎師生活을 始作하면서, 1922年 雜誌 《開闢 開闢》誌에 <韓國美術史>를 連載하였다. 그 해에 大邱 首唱普通學校 敎師로 옮겼고, 1924年 哲學論文 '退溪의 敎育思想'을 發表하였다. 1926年 高等普通學校 敎師資格檢定試驗에 合格하여 大邱高等普通學校 敎師로 奉職하였으며, 1929年 경성제국대학 법문學部 哲學科에 進學하여 칸트 헤겔 哲學 功利主義 를 硏究하였다. 1932年 경성제국대학 哲學科를 卒業하고, 경성제국대학 大學院 哲學科로 進學했다.

1933年 雜誌 《哲學》誌에 '哲學하는 것의 出發點에 關한 일(一)의 문(問)'을 發表하고, 1934年 경성제국대학 大學院에서 哲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그해 경성제국대학 大學院 卒業과 同時에 母校인 경성제국대학 哲學科의 助敎가 되었다.

大學 敎授 生活과 著述 活動 [ 編輯 ]

1935年 李花女子專門學校 講師로 옮겼고 다시 경성제국대학 哲學科 講師로도 出講하였다. 1937年 李花女子專門學校 文科 哲學敎科 擔當 敎授, 1939年 이화여전 文科 課長을 歷任하였다.

1940年 朝鮮總督府 學務局으로부터 創氏改名 齡이 떨어지고 猶豫期間을 거친 뒤 1941年 創氏改名이 斷行되자, 그는 自己 所信을 公開的으로 밝혀 朝鮮人에게는 朝鮮人의 것이 最高라며 創氏改名을 拒否하였다. 以後 一切의 政治的인 活動을 삼가고 學問 硏究와 敎育 活動, 讀書 奬勵 運動, 文風 진작에 盡力하였다.

1945年 경성대학 敎授가 되고, 光復 後부터는 本格的인 著述活動을 始作하여, 그 동안 《일반논리학》(1948)·《認識論理學》(1953)·《哲學槪論講義》(1953)·《哲學開設》(1954)·《知性의 方向》(1956)·《哲學的 摸索》(1959)·《새날의 知性》(1962)·《現實과 構想》(1963)·《知性과 摸索》(1967)·《韓國의 思想的 方向》(1968)·《韓國思想史-佛敎思想便-≫(1972)·《知覺과 意欲》(1972) 等 많은 著作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敎授 活動 [ 編輯 ]

1946年 경성대학 서울大學校 로 校名을 變更하면서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敎授가 되어 1968年 까지 奉職했다. 以後 1968年 停年退職 때까지 그는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文學副長, 大學院長 等을 歷任하면서 人材養成에 힘썼다.

韓國 戰爭 으로 避難갔다가 1952年 다시 서울 로 돌아와 칼럼, 講演 活動을 繼續하였으며 1953年 學術院 會員이 되고 그해 終身會員으로 被選되었으며 1954年 韓國哲學會 會長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敎授로 奉職하면서 그는 韓國哲學會長, 韓國思想硏究會長, 學術院 會員, <國民敎育憲章> 基礎委員 等을 兼職하였다.

1960年 <不正에 關한 硏究>로 서울대학교에서 哲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64年 韓國思想硏究會 會長이 되었다.

退任 以後 [ 編輯 ]

1968年 停年退職 後에도 서울大學校 名譽敎授에 招聘되었고 1968年 성균관대학교 留學大學 學長과 1969年 遊學大學院長, 도산書院腸(陶山書院長), 1970年 한양대학교 文科大學 學長 等을 두루 歷任하면서 學術活動과 言論 活動, 講演 活動, 社會 活動을 繼續하였다. 그는 直接 서울과 山골 奧地까지 손수 自己 車輛과 自費를 負擔하여 다니면서 人文學의 必要性과 哲學이 무엇인가를 直接 講演하여 人文學의 重要性과 讀書의 必要性을 說破하고 다녔다. 1970年 12月에는 大統領 敎育文化擔當 特別補佐官에 任命되었으며 文化勳章 大統領章을 받았다.

初等學校에서 中學校를 거쳐 大學校에 이르기까지 一生을 오직 後進敎育에 바치면서, 또한 學者로서 著述活動을 통하여 哲學과 政治 分野에 對해 業績을 남겼다. 또한 生活의 不便과 生計를 理由로 외면당하던 哲學에 對한 關心을 다시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最後 [ 編輯 ]

76年에는 病으로 擧動이 不便하였으나 靑瓦臺로 出勤하였다. 大統領 朴正熙 는 特別히 그에게 自宅에서 구두와 有線으로 自身, 或은 靑瓦臺 官僚들과 大膽하는 것을 許諾하였으나, 그는 管理된 道理로 自宅에 있을 수 없다며 出勤을 强行했다. 1976年 3月 17日 大統領 特別補佐官 在職 中 老患과 過勞 로 病死하였다. 事後 國民勳章 無窮花腸이 追敍되었다.

學術, 敎育活動 [ 編輯 ]

號는 열암이고 平壤 出生이다. 平壤高等普通學校를 卒業(8回로, 함석헌 , 양주동 科 動機)하고 19歲에 敎師에 任用되어 全南 寶城普通學校에서 敎師生活을 始作하였다. 以後 大邱高等普通學校 敎師를 거쳐 京城帝大 哲學科에서 學事, 碩士學位를 받고 이화여전 講師로 任用된 後 서울대 哲學科 敎授로 停年退任할 때까지 40餘 年間 敎育活動을 하였으며 [1] 이화여전, 京城帝大, 서울大 敎授, 學術院 會員 等을 歷任했다. [2] 1961年 5ㆍ16 軍士 政變 朴正熙 國家再建最高會議 企劃委員, 國民敎育憲章 基礎委員으로 任命되어 日帝의 敎育勅語를 본떠 만든 國民敎育憲章 基礎에 一翼을 擔當하게 되었다. [1] 1922年 開闢 ≫誌에 〈韓國美術史〉를 連載하였다. [3]

기타 [ 編輯 ]

1970年 애그뉴 美國 副統領 訪韓 以後 김정렴 祕書官은 朴正熙 에게 國際政治擔當 特別補佐官 新設을 建議했다. 國際政治分野 뿐 아니라 國內의 政治, 文化와 敎育, 經濟, 社會 等 各 分野의 實力있고 德望있는 人事를 特別補佐官으로 起用하여 社會 各界의 아이디어와 輿論을 收斂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4] 朴正熙는 特別補佐官에 可及的이면 旣成의 代價보다는 한참 硏究成果를 올리는 젊은 敎授와, 兵役該當者에 있어서는 兵役을 畢한 人士 中에서 大學別, 出身地別 按排도 考慮해서 起用하라고 하였고, 김정렴은 1968年 12月 5日 國民敎育憲章을 頒布하는 데 參與한 50餘 名의 學者를 搜所聞하던 中 박종홍을 特別補佐官으로 推薦하였다. [5]

1970年 12月 10日 大統領 敎育 文化擔當 特別補佐官 이 되었다. [2] [6] 김정렴 은 혜화동 朴鍾鴻의 自宅을 直接 찾아 特報制度의 目的과 朴正熙의 뜻을 傳하였으나 朴鍾鴻은 高齡이라는 理由와 밤새 硏究하고 새벽에 就寢하는 生活習慣을 들어 김정렴의 推薦을 辭讓하였다. 그러나 朴正熙 가 朴 先生에 한해서는 午後에 出勤해도 좋으니 꼭 모셔오라고 指示한 것을 김정렴에게 傳達받자 朴鍾鴻은 特別配慮를 傳해듣고 補佐官職을 承諾, 첫날부터 一般 公務員과 같은 時間에 出勤하였다. [5] 大統領 特別補佐官에 就任한 얼마 後 朴鍾鴻은 朴正熙 에게 國民 精神文化의 啓導와 硏究, 振興을 위한 目的의 國民精神硏究院 設立計劃書를 作成하여 김정렴에게 協助를 求하고 朴正熙에게 建議하였다. [7]

思想家이자 民族運動으로는 韓國 思想 硏究가 全無하던 1972年 여름에 朴鍾鴻은 韓國思想에 無關心한 當代의 知識人들을 叱咤하는 글을 <韓國思想史>에 發表하였다. [1] 1968年 안호상 等과 함께 國民敎育憲章 樹立에 參與하였다.

事後 [ 編輯 ]

敎育文化擔當 特別補佐官으로 國民精神硏究院 設立은 반드시 成就하고자 하였으나 國家才情 上 實現하지 못하였다. 그 後 朴正熙는 헬리콥터와 自動車便으로 候補地를 物色, 探査한 뒤 1978年 6月 京畿道 板橋와 安養으로 가는 길목인 국사봉 기슭 現 位置에 朴鍾鴻의 有志대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을 創立開館하였다. [8] 事後 朴正熙는 內閣에 特別 指示를 내려 國民勳章 無窮花章의 追敍를 손수 指示하였다 [9]

賞勳 經歷 [ 編輯 ]

  • 韓國學術院賞
  • 1970年 12月 大韓民國文化勳章 大統領章
  • 3·1文化相
  • 國民勳章 無窮花章

評價와 批判 [ 編輯 ]

열암記念事業會의 소광희 서울대 哲學科 名譽敎授는 박종홍을 '韓國哲學 硏究의 開拓者'로 評價하였다. [1] 一生을 學問에 바쳤던 敬虔한 삶과 篤實한 人品에 수많은 弟子가 尊敬했다고도 한다. [10] 韓國 實存主義의 嚆矢라는 評價도 있다. [11] 김정렴은 西洋의 哲學思想을 우리나라에 올바로 紹介했고 韓國 思想硏究를 本格的으로 體系化했으며 李退溪와 李栗谷의 學問에 精通했고 實學을 깊이 受容했다고 하였다. [5]

朴正熙 政府에 參與하였다 하여 反對便으로부터 國民敎育憲章 파시즘 敵 文書라는 酷評을 받기도 하였고, 朴正熙 政府에서 活動한 經歷을 놓고 軍部獨裁에 協力한다, 朴正熙의 푸들이라는 批判을 받기도 하였다. [2] 그러나 열암 朴鍾鴻의 初期 哲學 思想을 發表한 경남대 김재현 敎授는 우리의 傳統 哲學과 西洋 哲學을 綜合하려 試圖했던 朴 敎授의 哲學에 對한 硏究는 韓國現代哲學의 歷史的 硏究 뿐만 아니라 韓國 知性史의 理解를 위해서도 必須的인 作業이라 하며 그에 對한 批判은 신중해야 한다고 하였다. [2]

物質에 邁進했던 朴正熙가 精神文化 硏究院을 만들었다는 것 自體가 方向의 轉換이었다. 問題는 精神 文化가 거기에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朴鍾鴻의 또 하나의 失敗는 弟子를 키우지 못 했다는 것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우리 時代의 名著 50)<44> 朴鍾鴻의 '韓國思想史', 韓國日報 2007年 11月 7日 記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東亞 文化” . 2004年 12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7月 8日에 確認함 .  
  3. 박종홍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김정렴 , 《아! 朴正熙》( 中央M&B , 1997) 29, 30쪽 參照.
  5. 김정렴 , 《아! 朴正熙》( 中央M&B , 1997) 30쪽 參照.
  6. 김정렴 , 《아! 朴正熙》( 中央M&B , 1997) 29,30쪽 參照.
  7. 김정렴 , 《아! 朴正熙》( 中央M&B , 1997) 30,31쪽 參照.
  8. 김정렴 , 《아! 朴正熙》( 中央M&B , 1997) 31,32쪽 參照.
  9. 김정렴 , 《아! 朴正熙》( 中央M&B , 1997) 32쪽 參照.
  10. 權力 參與 知識人이 '失敗'하지 않으려면
  11. 우리들의 일그러진 實踐哲學 : 冊 : 文化 : 뉴스 : 한겨레

參考 文獻 [ 編輯 ]

  • 박종홍, 知性의 方向 (白靈沙, 1956)
  • 박종홍, 韓國의 思想的 方向 (박영사, 1968)
  • 일지사, 스승의 길(일지사, 1977)
  • 손인수, 韓國敎育思想加平展 Ⅱ(문음사, 1990)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