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에 對해서는
葬送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葬送
(
中國語
正體字
:
張松
,
簡體字
:
?松
,
병음
:
Zh?ng S?ng
腸쑹
[
*
]
, ?~
212年
)은
中國
後漢
말
유장
麾下의
政治가
로
者
는 自校(子喬)이며 儒將과
劉備
의 連繫를 推進하였다. 아예
法廷
·劉備와 共謀하여 익주를 劉備에게 넘긴다는 計劃을 짜고 儒將에게는
長老
征服을 위함이라 속여 劉備를 內部로 끌어들였다.
小說
《
三國志演義
》에서는 엄청난 醜男으로 設定되었다.
生涯
[
編輯
]
작은 葬送을 건드리면
[
編輯
]
익주
觸群
성도현(成都縣)
사람
이다.
[1]
키
가 작았으며
[2]
익주
의 別加從事(別駕從事)로서 益
注目
유장
을 섬겼다.
曹操
가 張差
형주
를 치려 한단 消息에 유장은 여러 次例 使者를 보내 禮를 표하였다.
208年
(
建安
13年),
[3]
세 番째로는 葬送이 派遣되었다. 曹操는 이미 형주까지도 平定한 狀況이라 그 待遇에 誠意를 다하지 않았고 官職도
영창군
[4]
의 砒素
縣令
(比蘇―) 자리만을 주었다.
[5]
葬送이 不滿을 품었다. 以內 曹操가
赤壁 大戰
에서 깨졌다. 曹操와의 關係는 끊고
劉備
와 提携할 것을 儒將에게 勸하였다. 누가 가면 좋겠냐는 물음에 平素 親한
法廷
을 推薦하였다. 이로써 유장은 劉備와 聯合하였고 이어서 法廷과
猛달
을 통해 守備할 兵士 數千 名을 支援해주었으며 前後로 膳物도 莫大하게 하였다. 法廷이 돌아와 葬送에게 이르길 劉備에겐 雄大한 計略이 있다고 稱讚하였다. 둘은 以前부터 儒將과는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남몰래 歎息해왔던 터라 劉備를 받들 謀議를 하고는 때를 기다렸다.
[6]
法廷·劉備와의 陰謀
[
編輯
]
211年
, 드디어 機會가 왔다. 曹操가
한녕
태수
長老
를 征伐하려 한다는 所聞에 유장이 두려워하였다. 葬送이 說得하기를, “曹操軍은 天下無敵입니다. 長老의 資源을 利用해 鏃을 經略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劉備는 儒將의 宗室이고 曹操의 오래된 元首이며 傭兵度 잘합니다. 劉備라면 長老를 틀림없이 쳐부술 것이고 그러면 翌週는 튼튼해져 曹操라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只今
방희
, 李珥(李異) 等은 自身의 공을 믿어 교만하며 그 마음도 外部 勢力에 기운 것 같습니다. 劉備를 부르지 않는다면 안팎에서 亂을 接해 必敗할 것입니다.”라 했다. 主婦(主簿)
皇權
과 從事
王루
가 頑强히 反對하는데도 유장은 法廷을 시켜 劉備를 불러들였다. 法廷이 劉備에게 유장 몰래 獻策하기를, “將軍의 뛰어난 能力으로 유장의 懦弱함을 틈타십시오.
週
의 股肱(股肱)인 葬送이 內應하겠습니다. 然後에 翌週의 富裕함을 바탕으로 險한 地勢에 기댄다면 大業도
손바닥
을 뒤집는 것처럼 쉽게 이룰 것입니다.”라 하였다. 劉備가 이에 應하였다.
[6]
陰謀 發覺
[
編輯
]
劉備가 三派(三巴)를 거쳐
狂漢群
부현(?縣)에 이르렀다. 유장이 直接
步兵
과
起兵
3萬餘 名을 이끌고 마중 나가 盛大한 歡迎 行事를 벌였다. 葬送이 法廷으로 하여금 ‘이 자리에서 바로 儒將을 덮치는 게 可能하다’고 劉備에게 告하게 하였다.
旁通
亦是 같은 進言을 하였으나 劉備는 重大한 일이니 倉卒間에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代身 街맹현(?萌縣)에 눌러앉아 長老 討伐은 放棄한 채 大衆의 마음을 사는 데에 注力했다.
212年
, 曹操가
동오
를 치려 하자 劉備는 방통의 計策 中 두 番째 것을 選擇해
[7]
孫權
을 돕겠단 口實로 東쪽으로 돌아가겠다고 儒將한테
거짓말
하였다. 葬送은 劉備의 眞意를 몰라 劉備와 法廷에게
便紙
를 써 ‘이제 막 臺詞가 實現될 참인데 어찌 관두고 가버립니까!’라 하였다. 葬送의 兄인 狂한태수
장숙
은 禍가 미칠까 怯이 나 그 凶計를 儒將에게 告發하였다. 그제야 유장은 葬送을 斬首하고 劉備에게로 向하는 交通을 遮斷하였다. 劉備가
南進을 開始하였다
.
葬送은 劉備를 만났는가
[
編輯
]
配送地
가 《
三國志
》船主展에 註釋을 달며 引用한
危巢
(圍繞)의 《五署》(吳書)에서는
法廷
이
劉備
와 密約하기 前에 葬送이 먼저 劉備를 대면해 極盡한 待接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
익주
의 倂記·物資·人馬의 數量, 各 要害處의
거리
等 그 虛實에 對해 劉備가 묻자 모든
情報
를 알려주고
地圖
까지 그려주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有裝塡〉, 〈船主展〉, 〈法廷展〉에 依하면 葬送은 劉備한테 派送된 적이 없다.
司馬光
은 이를 《五署》의 誤謬로 보아 《
資治通鑑
》에 揷入하지 않았다.
[8]
評價
[
編輯
]
放蕩하고 節操가 없었지만 識達하면서도 果斷性이 있었으며 才幹도 뛰어났다. 푸待接한
曹操
와 달리 主婦
羊水
로부터는 높은 評價를 받았다. 曹操가 지은 兵書(兵書)를 宴會 자리에서
술
을 마시면서 한番 보고는 暗誦해내니 羊水가 더욱 남다르게 여겼다.
[2]
三國志演義
[
編輯
]
醜男 設定과 曹操의 거만
[
編輯
]
司書가 아닌
小說
《
三國志演義
》에서는
者
를 永年(永年)으로, 外貌는
이마
가 좁고
머리
는 뾰족하며
코
는 들窓코에
이
는 뻐드렁니인데
키
마저 5尺(尺)도 안 되는 醜한 人物로 設定하였다. 다만
목소리
만큼은 구리鐘처럼 우렁차다고 하였다. 第59回에
韓中群
의
長老
가
동관 戰鬪
에서 西凉 勢力을 박살 낸 曹操에 對備해 南下 準備를 한다. 근심하는
유장
에게 安心하라며 葬送이 自身 있게 나서는 것으로 첫 登場한다.
第60回, 曹操로 하여금 長老의 背後를 치게 하자고 提案하여 그 獅子로 가는데 실은 익주를 바칠 目的에서 地圖를 챙겨 간다. 當時 曹操는
마초
를 무찌른 後로 傲慢해져 阿諂하지 않는 葬送을 冷待한다. 葬送의 살살 비꼬는 말솜씨에 羊水가 場所를 옮겨 大膽한다. 葬送이 曹操는
孔子
와
孟子
의 도[孔孟之道, 孔孟之道]를 理解하지 못하고
孫子
와
誤字
도 通達하지 못한 채 武力이나 權謀術數로 높은 地位를 차지했다고 들었다고 하자 羊水가 曹操가 쓴 兵法書인 《
맹덕信書
》(孟德新書)를 보여준다. 葬送이 이는
戰國 時代
에 누군가 쓴
冊
으로 鏃의 三尺童子도 暗誦한다며 밑밥을 깔고는 冊 內容을 모조리 외워버린다. 그 科目不忘(過目不忘)
[9]
에 놀란 羊水가 曹操와의 再만남을 周旋해준다.
曹操는 偶然히 옛사람과 맞아떨어진 것 같다며 《맹덕信書》를 불태우고는 閱兵하는 것을 葬送에게 구경시킨다. 葬送은
복양 戰鬪
,
完成 戰鬪
,
赤壁 戰鬪
와 華容道(華容道), 동관 戰鬪에서 曹操가 겪은 受侮를 羅列하며 戱弄한다. 火가 난 曹操한테 죽을 뻔하다가 羊水와
순욱
이 말린 德分에 매질을 當하고 쫓겨난다.
劉備와의 內通過 죽음
[
編輯
]
유장 앞에서 큰소리는 치고 왔는데 빈손으로 歸還해 비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어
형주
의
劉備
를 떠보러 간다.
조운
이 榮州(?州) 入口서부터 마중 나와있다. 형주 境界에서
날
이 저물어 관驛으로 가니
關羽
가 미리 와있어 迎接한다. 다음 날 劉備가
諸葛亮
과
旁通
까지 帶同해 城밖에서 親히 맞이한다. 河馬(下馬)도 劉備가 먼저 한다. 사흘間 主演이 繼續되는데 劉備는 익주 얘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阿附를 해봐도 謙遜하다. 作別할 땐 劉備가 10
리
밖 章程(長亭)까지 나와 送別宴을 베푸는데
눈물
乙 줄줄 흘린다. 葬送이 感服하여 劉備에게 익주를 醉해 基盤으로 삼으라 助言하고 內應을 約束하며 地圖도 獻上한다.
益主로 復歸해 親舊인
法廷
과
猛달
부터 만나 劉備를 翌週의 새 君主로 모시기로 뜻을 모으고 그 둘을 劉備에게 使者로 보내기로 한다. 이튿날,
曹操
및 長老 防禦를 위한답시고 儒將에게 劉備 招請을 勸誘해 성사시킨다.
皇權
과 王壘의 反對는 所用이 없다. 劉備가 軍士를 몰아 益週로 들어온다. 皇權,
이회
, 王루 等이 如前히 諫言하므로 葬送은 鏃의 文官들이 그 處子들만을 緯割 뿐 住公에겐 충성하지 않는다고 謀陷한다. 유장이 副省에서 歡迎宴을 開催하고 劉備한테 滿足하여 成道에 남아있던 葬送에게 입고 있던
옷
과
黃金
500兩을 褒賞한다. 정작 葬送은 儒將을 饗宴場에서 곧장 해치란 密書를 法廷한테 發送한 뒤이다. 第61回에서 劉備는 그 襲擊을 拒否하고 加盟官으로 가 適當한 時期를 노린다.
第62回, 劉備가 거짓으로 兄週로 돌아간다고 成都에 通報한다. 葬送이 眞짜인 줄 알고 말리는 便紙를 쓰는데 兄
장숙
이 訪問한다. 書札을 急히
옷소매
에 숨기고 서로 對話하는데 장숙이 보기에 精神이 없는지라 마음속에 疑惑이 생긴다. 술자리 中에 書信이 떨어져 장숙의 종인이 줍는다. 그 書信을 읽은 장숙이 儒將에게 밝힘으로써 葬送의 一家가
處刑
된다.
家計
[
編輯
]
- 兄
:
장숙
- 아들
: 莊票(張表)? - 《翼部機構前》(益部耆舊傳)에서는 장숙의 아들, 《
華陽局地
》에서는 葬送의 아들이라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明確하지 않다.
[10]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 ↑
相距
, 《華陽局地》12卷 양익영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梁益寧三州先漢以來士女目錄) 或은 익양영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益梁寧三州先漢以來士女目錄)
- ↑
가
나
《翼部機構잡기》(益部耆舊雜記) ; 配送地 主席, 《三國志》32卷 蜀黍 第2 船主 劉備에서 引用
- ↑
《
後漢書
》75卷 列傳 第65
遺言
에서는 모든 使臣 派遣을 208年條에 一括的으로 묶은 反面, 《華陽局地》5卷
公孫述
유이목地에서는 첫 番째 派遣은 205年, 두 番째는 207年, 세 番째는 208年으로 細分하였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
《華陽局地》 原文은
月收
(越?)라 하였으나 非소현은 영창군에 屬한다. 《
속韓紙
》23卷 軍國 第5
- ↑
《華陽局地》5卷 公孫述유이목地
- ↑
가
나
《三國志》37卷 蜀黍 第7 法廷
- ↑
《三國志》37卷 蜀黍 第7 旁通
- ↑
《資治通鑑고이》(資治通鑑考異) 3卷
- ↑
《
陳書
》114卷 再起 第14
苻堅
下 不융(?融)에서 由來한 말. 不융은 들으면 외우고 스쳐본 것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 ↑
配送地 主席, 《三國志》43卷 蜀黍 第13
麻蟲
參考 文獻
[
編輯
]
- 《
三國志
》31卷 蜀黍 第1 유이目前 有裝塡
- 《三國志》32卷 蜀黍 第2 船主展(有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