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백상
(閔百祥,
1711年
~
1761年
)은
朝鮮
時代 後期의
文身
로, 字는 이지(履之), 諡號는 정헌(正獻)이다. 本貫은
餘興
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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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年
增廣文科에 及第,
1745年
淸나라
에 派遣되는
冬至使
의 書狀官(書狀官)으로 北京에 往來했다. 그 뒤 東來府使,
慶尙道
觀察使
,
大司成
等을 지냈다.
辛壬士禍
때 아버지에게 身元(伸寃)을 입힌
少論
에 對해 重罰을 主張하다가 逆으로 彈劾을 받고
慶尙南道
巨濟島
로 流配되었다.
1751年
釋放되었다. 以後
大司憲
,
吏曹判書
를 거쳐 右議政으로 特診했다.
1761年
莊獻世子
平壤原油事件이 터지자 이에 對해 責任지고 領議政
이천보
, 左議政
以後
와 함께 同伴自殺했다. 그러나, 實錄에는 病死로 記錄돼 있어 論難의 餘地가 남아있다. 高宗 36年 思悼世子에 對한 莊祖 追尊問題로 全面再調査를 벌인 結果 自殺설이 確定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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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
민진원
(閔鎭遠, 1664 ~ 1736)
- 叔父 : 민통수(閔通洙)
- 아버지 : 민형수(閔亨洙)
- 어머니 :
龍仁 李氏
, 이세항의 딸
- 동생 : 민백흥(閔百興, 1714 ~ 1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