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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의 봄이여 秦의 榮光이여|신동아

한 글字로 본 中國 산시省

長安의 봄이여 秦의 榮光이여

? - 中國을 世上에 알리다

  • 글 · 寫眞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6-05-04 14: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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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萬人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長安의 話題’라 한다. 여기서 ‘長安’은 산시省 試案의 옛 이름이다. 산시省은 中國 初期 統一王朝 週, 陳, 한, 唐나라가 根據地로 삼은 땅이다. 唐나라 때 試案은 外國의 人材도 欣快히 登用하며 開放과 자유로움의 精神을 具現했다. 오늘날 옛 榮光을 다시 찾으려는 試案은 ‘산시 速度, 시안 效率’을 내세우며 달린다.
    ‘週·辰·韓·黨(周秦漢唐)’

    큰 글字 몇 個가 셴양(咸陽) 國際空港에서 시안(西安)으로 가는 道路邊에 威風堂堂한 碑石처럼 줄지어 서 있다. 셴양에서 試案으로 가는 길은 곧 陳(秦)의 首都 咸陽에서 黨(唐)의 首都 長安으로 가는 길이다. 中國 初期 統一王朝는 모두 이 땅을 根據로 삼았다. 中華의 人文學을 胎動시킨 周나라, 最初의 統一帝國 秦나라, 大統合을 통해 한족 文化를 만든 한나라, 世界로 열린 大帝國 唐나라. 마오쩌둥 亦是 이 땅을 根據地 삼아 끝내 장제스를 물리치고 新中國을 세웠다. 산시省은 革新의 바람을 일으키며 天下를 制霸한 땅이다.



    商周革命=人文革命

    산시(陝西)省의 略稱은 ‘땅 이름 섬(?, 繁體는 陝)’字다. ‘陜’字는 ‘언덕과 언덕(阜/?) 사이에 끼어(夾) 있는 골짜기가 좁다’는 뜻으로 ‘좁다/골짜기 協’으로 쓰기도 한다. 地圖를 살펴보면 그 뜻대로 산시省이 골짜기 사이에 끼인 盆地임을 알 수 있다.

    산시(陝西)는 허난省 散見(??)의 西쪽으로, 여기서부터 地形이 크게 달라진다. 허난省이 黃土平原이라면 산시省은 黃土高原이다. 산시의 東쪽으로는 진진大峽谷(秦晉大峽谷), 南쪽으로는 北中國과 南中國을 가르는 秦嶺山脈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놓인 觀衆平原(關中平原)은 3萬9000㎢(韓國의 約 39%)의 面積에 黃河 最大의 支流인 衛戍(渭水)가 흘러 農事가 잘된다.



    遊牧民族인 북적(北狄)과 西戎(西戎)으로부터는 重要 戰略資源人 말을 얻을 수 있다. 東쪽의 函谷關만 막으면 산시는 鐵壁의 要塞다. 弱할 때는 굳게 防禦하고 觀衆에서 着實히 힘을 키우다가, 剛할 때는 不時에 밖으로 치고 나왔다. 산시에서 팽팽하게 壓縮된 空氣는 函谷關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颱風이 되어 中原을 삼키고 大陸을 휩쓸었다. 週·辰·韓·黨은 산시에서 일어나 天下를 號令했다. 18로 제후군에게 몰린 동탁이 再起한 곳도, 8個國 聯合軍을 避해 西太后가 달아난 곳도 산시다.

    산시의 中原 攻略史를 살펴보자. 중원의 賞나라는 剛한 國力과 높은 文化 水準을 갖췄지만 時代의 限界 亦是 컸다. 끊임없는 戰爭을 통해 奴隸를 確保했고, 喪制(上帝)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숱한 사람을 祭物로 바쳤다. 그 結果 周圍를 온통 敵으로 만들었다. 周나라는 周邊 勢力을 糾合하고 牧野大戰 한 판의 싸움으로 강대한 商나라를 물리친다.

    주는 ‘德이 있는 者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千名(天命) 思想을 내세우고 武力 支配보다는 德治와 敎化를 重要視했다. 賞은 偶然히 불에 갈라지는 痕跡으로 吉凶을 점치는 甲骨點(甲骨占)을 愛用했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하늘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주는 64가지 狀況 속에서 最善의 길을 찾는 主役(周易)을 썼고, “祖上을 믿지 말고 스스로의 德을 닦으라”는 노래를 時頃에 남겼다. 이 같은 合理性, 人本主義, 德治敎化의 思想은 孔子의 油價에 依해 더욱 發展한다. 이처럼 喪主革命(商周革命)은 單純한 王朝交替를 넘어선 人文革命이었다.



    秦, ‘近間’을 세우다

    그러나 武王·住公 等 思慮 깊은 創立멤버가 世上을 뜨자, 못난 後孫들은 不必要하고 消耗的인 遠征戰爭으로 國力을 浪費했다. 中原이 弱해지자 邊方이 나래를 폈다. 산시·간수 一帶의 융(戎)은 이름 그대로 ‘甲옷(甲)과 窓(戈)’을 能手能爛하게 다루는 戰士였다. 幽王 때 戎族이 州의 首都 好景(오늘의 시안)을 陷落해 週가 洛陽으로 遷都하자, 西周(西周) 時代가 끝나고 同舟(東周) 時代가 始作됐다. 동주가 地方에 對한 統制力을 잃고 地方政權이 亂立한 春秋전국時代가 到來했으니, 當時를 그린 小說이 바로 ‘東柱熱局地(東周列國志)’다.

    戎族이라고 다 같은 戎族은 아니다. 週에 協力的이던 戎族 一派는 牧畜 專門家로 인정받아 地域 政權인 陣을 세웠다. 株價 亡할 때 秦의 指導者는 王室을 護衛한 功勞로 晉나라 最初의 諸侯인 진양共(秦襄公)으로 봉해져 戎族으로부터 州의 西쪽을 지키는 울타리가 됐다. 일찍부터 燦爛한 發展을 이룬 中原은 陣을 오랑캐로 여겨 ‘진융(秦戎)’이라 불렀다.

    그러나 秦나라는 逆說的으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果敢하게 革新할 수 있었고, 中原에서 剩餘 取扱받던 人材들을 宰相으로 삼았다. 25名의 晉나라 宰相 中 外國 出身이 17名, 平民 出身이 9名이었다. 商鞅의 變法改革, 張儀의 連衡策, 범저의 遠交近攻(遠交近攻)에 秦始皇의 雄大한 비전과 推進力이 더해져 戰國七雄 中 가장 落後國이던 晉은 6國을 멸망시키고 天下統一의 偉業을 達成한다.

    眞意 天下統一은 中國史에서 가장 重要한 事件 中 하나다. 黃河 中流에 局限된 中國은 眞부터 비로소 廣闊한 大陸 全域에 勢力이 미쳤다. 엄청난 變化를 苛酷하게 밀어붙인 탓에 진 自體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津이 創造한 秩序는 中國 歷代 王朝의 根幹이 됐다. 司馬遷은 말한다. “배운 者들은 自己들이 보고 들은 것에만 얽매여 眞意 統治期間이 짧은 것만 보고 陣을 嘲弄할 줄만 알았지 眞摯하게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도 않으니, 이야말로 歸路 飮食을 먹으려는 格이다.”

    殘忍했지만 勤勉誠實韓 君主 秦始皇이 죽자마자 晉은 破局으로 치달았다. “王侯將相에 씨가 있더냐”라고 외친 陳勝·오광의 뒤를 項羽·劉邦이 이어 晉은 滅亡한다. 霸權을 차지한 項羽는 涵養을 버리고 故鄕인 康男과 가까운 팽성(장쑤省 쉬저우)을 根據地로 擇했다. 臣下 한生은 鐵壁 要塞인 데다 觀衆平原에서 人力과 資源을 豐富하게 調達할 수 있는 산시를 根據地로 擇해야 한다고 主張했지만, 項羽는 “成功하더라도 故鄕에 돌아가지 않으면 緋緞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錦衣夜行)”며 固執을 꺾지 않았다. 한生은 事理分別을 못하는 項羽를 “帽子 쓴 원숭이”라고 비웃다가 끓는 물솥에 삶겨 죽었다.


    “중원을 차지하라”

    燭(쓰촨)에 갇혀 있던 乳房은 名將 韓信을 起用해 項羽의 세 名將을 擊破하고 산시를 얻었다. 觀衆과 鏃의 豐富한 物資 德分에 乳房은 霸王 項羽를 물리치고 恨을 建國할 수 있었다. 다만 乳房도 首都를 定할 때 葛藤을 겪었다. 臣下들이 觀衆波와 樂洋파로 갈렸다. 華麗한 文化를 꽃피우고 四方으로 탁 트인 中原은 首都로서 매우 魅力的이었다. 그러나 論議를 最終 整理한 丈量은 觀衆의 손을 들어줬다. “觀衆은 沃土가 千里에 펼쳐져 있고, 한 面만 막으면 東쪽으로 諸侯들을 모두 制壓할 수 있습니다. 諸侯들이 安定되면 黃河와 衛戍를 통해 都邑으로 天下의 物資를 供給하고, 諸侯들이 變亂을 일으키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니 쉽사리 軍需品을 댈 수 있습니다. 이를 金城千里(金城千里)요, 天府之國(天府之國)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漢나라 初期 아직 황실이 安定되지 않았을 때, 地方 諸侯들의 叛亂이 있었다. 그러나 丈量의 慧眼대로 觀衆의 中央政府는 地方 叛亂을 수월하게 鎭壓할 수 있었다. 最大, 最後의 叛亂인 吳楚七國의 亂을 平定한 後 韓銀 廣闊한 大陸을 統治하고 90餘 民族을 融合해 한족을 탄생시키며 大帝國의 威容을 뽐냈다.

    그러나 興亡盛衰는 덧없이 흘러간다. 오래 나눠져 있으면 반드시 합쳐지고, 오래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갈라진다(分久必合 合久必分). 400年 閑室이 衰退하고 中國史에서 가장 熾烈한 群雄割據의 歷史가 펼쳐진다. 劉備·曹操·孫權의 三國이 定立했지만, 세 나라의 國力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중원을 차지한 曹操가 斷然 最大·最强의 勢力이었고, 강동乙 掌握한 孫權이 2等, 燭(쓰촨) 하나만 차지한 劉備가 꼴찌였다. 가장 弱한 勢力으로 어떻게 가장 强한 勢力을 꺾을 수 있을까. 諸葛亮의 打開策은 산시 攻掠이었다. 鏃과 觀衆을 아우르면 다시 한 番 津한(秦漢)의 統一을 再現할 수 있다.

    物量이 豐富한 位(魏)가 持久戰으로 鏃의 侵攻을 거듭 막아내자 諸葛亮은 아예 산시 南部의 五丈原(五丈原)에서 農事를 지으며 駐屯했다. 섬남(陝南) 地域을 實效支配하면서 틈만 생긴다면 바로 觀衆을 掌握하고 餘勢를 몰아 중원을 차지한 後 天下를 統一한다는 遠大한 構想이었다. 그의 戰略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鏃의 丞相으로서 나라와 大規模 遠征軍의 크고 작은 일까지 도맡아 處理하니 몸이 배겨낼 才幹이 없었다. 結局 큰 별은 五丈原에서 스러졌다. “공명은 여섯 番이나 起算으로 나아갔으나(孔明六出祁山前)” “出仕하여 이기기 前에 몸이 먼저 가니(出師未捷身先死)” 諸葛亮은 산시省을 차지하려 애쓰다가 結局 산시省에서 生을 마감했다.

    司馬炎의 津이 三國을 統一하자마자 5號 16國의 亂世를 맞았고, 수(隋)가 天下를 再統一했지만 基盤이 다져지기 前에 高句麗 遠征, 大運河, 宮殿 建設 等 無理한 事業을 한꺼번에 벌이는 바람에 亦是 곧 亡했다. 漢나라 以後 眞正한 安定期를 確立한 것은 黨(唐)나라였다.



    大唐長安의 靈光

    試案은 四角形 城壁이 穩全히 남아 있는 것으로 有名하다. 둘레 14km에 達하는 城壁 위에선 每年 11月 시안 城壁 國際 마라톤 大會가 열린다. 1993年부터 開催된 이 大會는 빼어난 遺跡을 十分 活用하는 文化商品이다. 마라톤이 힘든 一般人은 自轉車로 城壁 위를 달린다.

    한 初老의 美國人은 試案에 反해 英語敎師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저 城壁을 보라고. 눈療飢龍 觀光地일 뿐인 베이징의 紫禁城에 比하면, 試案은 傳統이 生活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야. 스케일도 더 크고. 中國에서 가장 아름다운 大都市野.” 시안 土박이 中國人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和答했다. “唐나라 때의 長安城은 이보다 열 倍는 더 컸답니다. 只今 城壁은 明나라 때 縮小해 지은 것이에요.” 10倍는 課長 아니냐고? 正確히 말하면 9.1倍 컸다.

    週·辰·韓·黨 모두가 자랑스러운 歷史다. 그러나 그中에서도 山詩人들이 가장 자랑스러운 歷史로 꼽는 것은 唐나라다. 시안 市內 곳곳에 ‘臺當長安(大唐長安)’을 기리는 痕跡들이 있다. 시안人은 臺當부용원(大唐芙蓉園)으로 나들이 가고, 쇼핑하러 臺當序詩(大唐西市)에 가고, 아프면 臺當議員(大唐醫院)을 찾는다.

    中國의 中心이 東部로 옮겨간 後 試案은 西쪽 邊方이 되어 이름에 ‘徐(西)’字가 붙었다. 그러나 唐나라 때는 中國의 中心을 넘어 世界의 中心인 長安이었다. 萬人의 입에 오르내리면 ‘長安의 話題’라고 할 만큼, 長安은 首都의 代名詞였고 世上의 中心이었다.

    우리는 高句麗를 치고 백제를 멸망시킨 唐나라에 對해 그다지 好意的이지 않다. 軍紀 빠진 軍隊를 ‘唐나라 軍隊’라 부르고, 高句麗를 치다 失敗한 唐太宗을 隋煬帝와 마찬가지로 여긴다. 그러나 唐太宗 李世民은 ‘막장 君主’ 隋煬帝와 全혀 다르다. 그는 高句麗 侵攻 以外에는 戰爭에서 져본 적이 거의 없고, 中國의 오랜 亂世를 끝내고 太平聖代의 代名詞인 定款至治(貞觀之治)를 열었다. 德分에 國力이 伸張된 唐나라는 華麗한 聖堂氣象(盛唐氣象)을 자랑할 수 있었다.

    黨의 榮光을 뒷받침한 것도 산시다. 산시는 辰王(秦王) 李世民의 根據地였고, 府兵制(府兵制)의 核心이었다. 60% 以上의 不病이 首都圈 觀衆에 集中돼 觀衆 以外의 모든 兵力으로도 觀衆을 當할 수 없었다. ‘觀衆의 힘으로 四方을 다스리는’ 戰略이 天下를 안정시키자 “救主(九州)의 道路에는 盜賊이 없어 먼 길을 떠나는 데 吉日을 擇할 必要가 없었다.”


    活力, 開放, 自由

    名宰相 魏徵, 적인걸 等의 人材가 나라를 튼튼히 하자 唐나라의 國力은 世界 으뜸이 됐다. 當律(唐律)의 律令格式(律令格式)은 東아시아 法典의 典型이었고, 長安城은 東아시아 都城의 模範이었다. 新羅의 徐羅伐, 渤海의 上京용천부, 日本의 나라·교토가 모두 長安城을 본받아 朱雀대로를 中心으로 한 四角形 都城을 세웠다.

    5號 16國은 中國史 最高의 混亂期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民族이 서로 섞이며 새로운 文化를 創出한 活力의 時期이기도 했다. 黨은 王族·貴族들이 모두 한화(漢化)韓 號인(胡人)들로서 外來 文化에 拒否感이 없었다. 그 結果 黨은 놀라운 開放性과 자유로움을 보여줬다.

    長安의 봄은 華麗했다. “都城의 대로마다 꽃피는 時節, 萬 마리 말과 千 臺 수레가 牡丹을 보러”가니 “緋緞수레 구르는 소리, 마른천둥이 치는 듯” 했다. 꽃놀이하던 이들은 落花를 즈려밟으며 페르시아 女子의 술집으로 向했다. “皮膚는 玉 같고 콧날은 송곳 같”은 호인이 “흰 뿌리 잘린 다북쑥이 회오리바람에 구르듯” 빙빙 도는 弧燈무(胡騰舞)를 췄고, “푸른 玉처럼 빛나는 두 눈瞳子, 黃金빛 곱슬머리에 붉은 구레나룻”의 好人이 피리를 불었다. 舊唐書(舊唐書)는 民官(民官)을 超越한 아랍文化 사랑을 이렇게 傳한다. “開院 以來 太上(太常, 國家儀典 執行部署)의 音樂은 號哭(胡曲)을 崇尙하고, 貴人의 밥床은 모두 虎食(胡食)을 올리며, 士女(士女)는 全部 胡服(胡服)을 입는다.”

    女性들도 外出할 때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즐겨 타는 等 자유롭고 豁達한 氣風을 限껏 누렸다. 中國 唯一의 女皇帝人 則天武后가 이때 나타난 것도 決코 偶然이 아니다.

    活力이 넘치는 雰圍氣에서 人材도 쏟아져 나왔다. 唐 太宗과 魏徵은 定款至治를 열었고, 則天武后를 輔弼한 적인걸은 1萬7000餘 件의 長期 未決 課題를 1年 안에 解決했는데 單 한 名도 抑鬱함을 呼訴하지 않았다. 歷史는 神話가 됐다. 玄奘法師가 佛經을 얻어온 旅行談은 中國 4代 寄書人 ‘西遊記’가 됐고, 黨 玄宗과 楊貴妃의 로맨스는 白居易의 ‘長恨歌(長恨歌)’가 됐다. “봄에는 봄놀이에 밤에는 잠자리에, 後宮에 美人이 3000이나 되지만, 3000名에 내릴 寵愛를 한 몸에 받았네.”



    ‘밥그릇 모임’

    開放的인 唐나라는 中國人뿐만 아니라 世界 各國의 人材를 품에 안았다. 世界 70餘 個 國과 交流하며 外國 商人이 中國에 長期間 머무르고 中國人과 結婚하는 것을 許容했고, 外國人 留學生들도 過去로 採用했다. 黨에는 3萬 名의 留學生이 있었고, 黨 末期 崔致遠 等 過去 及第한 新羅 선비가 50餘 名이었다. 新羅의 衣裳, 日本의 엔닌 等 僧侶들도 黨에서 佛法을 닦았다. 高句麗系 高仙芝 將軍은 岸曙寫眞節度使(安西四鎭節度使)가 되어 西域 戰線을 管轄했고, 안사의 亂을 일으킨 河東節度使 안록산은 이란系였다. 臺當長安은 百萬 人口를 자랑하는 世界 最高의 大都市였다.


    그러나 成長은 極에 達하면 衰退한다. 長安의 봄은 成長의 限界 亦是 明確하게 보여줬다. 觀衆平原은 肥沃하긴 해도 中國 基準으로는 그리 넓지 않아 唐나라 때 불어난 人口를 堪當할 수 없었다. 黨 前半期人 高宗 때부터 이미 皇帝들은 이따금 文武百官을 이끌고 허난省 洛陽까지 行次해서 穀食을 얻어갔기에 ‘食糧을 쫓아다니는 天子(逐糧天子)’란 말을 들었다. 結局 宋나라가 開封을 首都로 삼은 後, 長安은 더 以上 天下의 中心이 되지 못했고, 西쪽의 大都市인 ‘시안(西安)’은 中心에서 멀어져갔다.

    따라서 山詩人들이 21世紀에도 世界의 中心이었던 옛날을 그리는 것은 人之常情이다. 그러나 冷靜히 따져보면, 나라의 榮光이 民草에겐 얼마나 實質的으로 李瀷이었을까. 國家의 大業을 이루기 위해 民草들은 큰 犧牲을 甘受하고 劣惡한 삶을 견뎌야 했다.

    山詩人은 豪放하다. “국수 麵발이 허리띠만 하고 밀煎餠 하나가 웬만한 가마솥 뚜껑만 하며 찐빵은 큰 沙鉢만 하고 沙鉢은 洗手대야만 하다.” 그러나 그 豪放함은 豐饒와 餘裕가 아니라 劣惡함에서 나왔다. 산시의 飮食에 얽힌 傳說을 들어보자.

    量러右派오모(羊肉泡?)는 찢은 빵을 羊고기 탕에 넣고 끓여 먹는 料理다. 一說에 따르면, 秦나라가 天下統一을 할 때 6國의 軍隊는 每番 밥을 짓고 飯饌을 하느라 時間을 많이 虛費한 反面, 秦나라는 빵을 羊고기 국물에 넣어 잽싸게 食事를 마치고 戰爭해서 6國을 制壓할 수 있었다. 솥뚜껑만한 밀煎餠 궈쿠이(鍋?)의 傳說도 비슷하다. 唐高宗의 무덤 健陵(乾陵)의 工事 時間 規律은 매우 嚴했다. 한 兵士가 料理하고 밥 먹을 時間이 없어서 急한 김에 밀가루 반죽을 투구에 넣고 구워 먹은 게 궈쿠이의 由來라고 한다.

    요즘도 산시 시골사람들은 洗手대야만한 待接(老碗)을 든 채 쪼그리고 모여앉아 수다를 떨며 食事를 한다. 이를 ‘밥그릇 모임(老碗會)’이라고 한다. 밥을 量껏 먹은 다음에 農事일을 나가면 밥 먹으러 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卓子에 그릇을 놓고 椅子에 앉아 食事하지 못하고, 그릇을 든 채 쪼그려 앉아 밥을 먹는다니, 얼마나 마음이 急하면 그럴까.

    이를 綜合해보면 山詩人들은 自己 自身을 돌보지 못하고 戰爭, 土木事業, 農事 等 바깥일에 쫓기며 살아왔다. 德分에 性格 亦是 急하다.



    산시 사람들은 直說的이므로 이쪽에서도 迂廻戰略 代身 正攻法으로 對해야 한다. 그들은 할 말이 있으면 忌避하지 않고 바로 해버리며, 이야기를 하다가 뜸을 들이는 것을 絶對로 참지 못한다. 周邊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조바심이 나서 견디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뜸 들이는 사람은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멀리한다.

    -왕하이팅, ‘넓은 땅 中國人 性格地圖’

    일은 바쁘고 性格은 急하니 한가롭게 美食을 만들고 즐길 餘裕가 없다. 代身 最大限 時間을 節約하며 生存할 수 있는 飮食을 開發했다. 워낙 劣惡하게 살다보니 웬만한 일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것이 山詩人의 豪放함이라고 할까.

    2010年 시안 旅行을 할 때 宿所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마트에서 찐빵과 오리구이를 샀다. 店員이 찐빵을 꺼내고 슬라이드式 琉璃덮개를 옆으로 닫으려 할 때 덮개가 쪼개지며 떨어지다 말았다. 元來 금이 쩍 가 있는 琉璃덮개를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놨는데, 테이프의 接着力이 弱해서 떨어지다 만 것이다. 이제 덮개와 빵을 모두 치우겠지? 그런데 웬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빵 위에 떨어진 比較的 굵은 琉璃 破片 한두 個 골라내고는 덮개를 다시 닫았다.

    아니 世上에, 微細한 琉璃 破片이 떨어졌을 텐데, 顧客이 그걸 먹고 다치면 어쩌려고?! 허름한 시골 구멍가게도 아니고, 大都市 시안市 中心의 큰 쇼핑몰에 있는 번듯한 마트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벌어지다니!!! 그다음부터 中國에서 物件 살 때 琉璃陳列臺가 穩全한 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多幸히도 숱한 中國 旅行 中 이런 일은 單 한 番만 겪었지만, 中國의 安全不感症은 如干 衝擊的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山詩人의 劣惡함에 對한 忍耐力, 豪放함이 한몫하기도 했으리라.



    劣惡해서 豪放하다

    觀衆平野는 肥沃하되 그 産出物은 民衆에게 돌아가지 않고 軍糧米로 쓰인 것처럼, 산시의 歷史는 燦爛하되 그 榮光은 民衆의 것이 아니라 權力自意 것이었다. 眞意 征服戰爭, 阿房宮·兵馬用·萬里長城 等의 大規模 建築 等으로 가장 큰 犧牲을 한 것 亦是 山詩人들이었다. 그럼에도 山詩人에게 津이 黑歷史人 것만은 아닌 듯하다. 산시의 또다른 略稱이 바로 ‘晉(秦)’이다. 山詩人은 노래한다. “八百里 鎭川(秦川)에 흙먼지 휘날린다. 三千萬 民衆이 進講(秦腔, 民謠)을 불러댄다. 국수 한 그릇에도 氣分은 그만이야. 고춧가루 안 넣어도 후룩후룩 잘도 먹네.”

    사람이란 참으로 妙한 存在여서 꼭 나 自身이 直接 겪어야만 欲求를 充足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眞意 天下統一을 떠올리면 雄壯한 霸氣가 용솟음친다. 劣惡함 속에서도 大業을 成就했음을 떠올리면 自信感이 넘친다. 黨의 榮光은 오래前에 사라졌어도 그 時節의 映畫를 想像하면 나 自身도 페르시아 女子와 술을 마시던 富者처럼 느껴진다. 長安의 봄은 이미 오래前에 끝났지만, 山詩人들은 아직도 따뜻하던 봄날의 꿈을 잊지 못한다.

    꿈은 藥일까, 毒일까. 둘 다 된다. 꿈은 現實逃避의 夢想이기도 하고, 現實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理想이기도 하다. 關鍵은 어떤 現在를 만들어가느냐에 있다. 그렇다면 산시가 만들고 있는 오늘은 어떤 모습인가.



    三星이 試案으로 간 理由

    黨 以後 산시의 全盛期는 끝났지만, 이 땅에 서린 王氣(王氣)는 죽지 않았다. 산시에서 叛亂을 일으킨 李子晟은 明나라를 멸망시켰다. 비록 그는 軍律을 바로잡지 못해 民心을 잃고 淸나라에 敗해 사라졌지만, 마오쩌둥은 그를 農民叛亂 指導者로 높이 評價했다. 正規軍이 아닌 共産黨의 紅軍을 이끈 마오에게는 週·辰·韓·黨보다 이자성의 中院 征服이 더 많은 힌트를 줬으리라.

    場市의 징강산에서 梁山泊을 再現하려던 마오는 장제스의 討伐을 避해 逃亡 다녔다. 마오가 9600km의 大長程을 마치고 定着한 곳은 산시의 옌안(延安)이다. 한便 장쉐량은 華淸池에 있던 장제스를 年金하고 國共合作을 慫慂했다. 大長程이 끝나고 시안事變이 일어난 산시는 共産黨의 奇跡的인 勝利가 始作된 땅이 됐다.

    이때 活躍한 傑出한 山詩人이 시진핑 國家主席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다. 그는 1913年 산시의 푸핑현 侍者좡(富平縣習家莊)에서 태어나 13歲 때 農民運動에 參與했고, 14歲 때 共産黨員이 됐으며, 17歲에 兩堂 武裝蜂起(兩當兵變)를 일으켰다. 42歲의 젊은 革命家 마오도 22歲의 시중쉰을 처음 만나고 깜짝 놀랐다. 錚錚한 名聲을 날리고 着實한 基盤을 닦은 시중쉰이 이토록 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시중쉰은 西北 地域을 號令하던 西北王이었으며, 副總理로서 저우언라이의 오른팔이었다.

    시진핑은 金수저를 물고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週末이면 온 家族이 權力의 心臟 중난하이(中南海)에 놀러갔다. 중난하이는 黨政 主要 機關, 最高 指導部의 居住地와 執務室이 있는 곳으로, 民草들은 絶對 갈 수 없는, 現代版 紫禁城이다. 그러나 시중쉰이 하루아침에 失脚하며 家族들도 苦難을 겪게 된다. 마오쩌둥이 시중쉰을 謀陷하고 政治事件을 일으켜 大躍進運動 後 잃은 權力을 되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反動家族의 一員으로 몰린 시진핑은 15歲 때 生産臺에 自願入隊해 산시에 갔다. “밭을 매러 가려면 20里 길은 족히 걸어야 밭이 나오고, 땔감을 주우려면 30里 길을 걸어야 숲이 보이며, 소금을 사려면 40里 길을 걸어야 市場이 나오”는 깡촌에서 7年을 보내며 周圍의 信任을 얻었다. 父親이 태어나고 묻힌 故鄕인 데다 가장 感受性이 銳敏한 靑少年期를 보내고 人生의 커리어를 本格的으로 始作한 곳이기에 시진핑은 “산시는 나의 뿌리이고, 옌안은 나의 靈魂”이라고 했다.

    三星이 70億 달러를 投資해 試案에 半導體 工場을 세우고, 連달아 大規模 배터리 工場을 세운 것은 偶然이 아니다. 糖이 國家를 이끄는 中國에서 共産黨 最高權力者의 歡心을 사는 것은 매우 重要하다. 그렇다고 대놓고 賂物을 주는 것은 水準 낮은 일이다. 뭘 하면 시진핑이 좋아할까. 現在 中國의 課題는 全 國土 均衡開發이고, 산시는 시진핑의 故鄕이다. 따라서 試案에 最尖端 半導體 工場을 建設한다면 國家施策人 西部 大開發에도 符合하고 最高權力者의 愛鄕心도 만족시킬 수 있다.



    ‘China’와 ‘唐人街’

    最高權力者가 좋아하는 것은 部下도 좋아하기 마련이니, 事業하며 생기는 온갖 問題에 對해서 中國의 全幅的인 協助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산시의 人件費가 相對的으로 低廉하고, 西部 開發에 協助하며 이미지도 높일 수 있으니 누이 좋고 妹夫 좋은 일이다. 2015年 三星電子 시안 半導體 工場은 年間 生産額 100億 위안(藥 2兆 원)을 突破했다. 中國은 2年도 안 되는 사이에 거둔 大成功을 두고 ‘산시 速度, 시안 效率’이라고 부른다.

    산시는 文化·外交基地로도 脚光받는다. 시라크 前 프랑스 大統領이 병마용을 보고 “피라미드를 못 봤다면 鎭靜 이집트에 간 것이 아니고, 병마용을 보지 않고는 鎭靜 中國을 본 것이 아니다”라고 讚辭를 보낸 後, 中國은 레이건, 클린턴, 朴槿惠 等 숱한 外國 頂上들을 ‘兵馬用 外交’로 맞이했다. 지난해 시진핑은 引渡의 모디 總理를 試案에서 迎接하고 者恩師 대안탑을 찾았다. 대안탑은 玄奘法師가 印度에서 求해온 佛經을 保管한 곳으로, 中國과 印度의 뿌리 깊은 交流와 協力의 歷史를 보여준다. 비록 最近 들어 兩國 關係는 서먹했지만, 오랜 親舊이던 歷史를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으냐는 메시지가 읽힌다.

    中國의 一對一로(一帶一路) 戰略에서 산시는 核心的 位置에 있다. 中國의 落後한 西部地域을 開發할 뿐만 아니라, 中央아시아의 資源과 유럽의 市場을 차지하려는 大戰略은 黨의 실크로드를 再現하려고 한다.

    오늘날 中國의 英語 이름 ‘China’는 秦나라의 中國式 發音 ‘親(秦)’에 起源을 뒀다. 또한 ‘차이나타운’의 中國式 名稱은 ‘黨인가(唐人街)’다. 일찍이 中國을 海外에 알린 산시는 다시 海外를 向해 기지개를 켜는 中이다.

    金 龍 한



    ● 1976年 서울 出生
    ●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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