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記憶하라! 人間的 삶 위해 기울여온 努力을|신동아

記憶하라! 人間的 삶 위해 기울여온 努力을

물의 都市, 春川

  • 정윤수│文化評論家 prague@naver.com

    入力 2014-05-21 15:50: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온통 물이었다. 물빛이 번들거렸다. 끝도 없는 물의 連續이었다.
    • 우리의 마음속에 무겁게 내려앉은 물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라! 인간적 삶 위해 기울여온 노력을

    北漢江과 南漢江이 만나는 양수리.

    이렇게 말해도 될까. 우리의 日常은 歲月號 以前과 以後로 나뉘고 말았다고. 슬프고 슬픈 일이 生中繼의 畵面 속에서 赤裸裸하게 펼쳐졌다. 그날 以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시커먼 구멍 하나씩 생기고 말았다.

    歲月號 以前에 우리의 日常은 그럭저럭 幸福하고 安全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더러 深刻한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참을 만했고, 되는대로 解決할 만한 일들을 되는대로 解決하면서 살아왔다. 競爭 一邊倒의 이 殺伐한 社會를 살아내는 게 너무 힘들고, 그런 만큼 견디고 버티는 일은 거룩하기까지 했다.

    이 談話는 小說家 金訓의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을 나 나름대로 옮겨본 것이다. 오래前, 金訓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밥벌이에는 아무 對策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目標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各自 携帶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道理가 있겠는가. 아무 道理 없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自體가 이제는 奇跡이 되고 있을 程度다.

    무슨 얘기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은 달리 表現해 ‘日常의 嚴肅함’이다. 그렇다면 삶은? 그것은 모르겠다. 기나긴 人生의 참다운 價値? 한 番뿐인 삶의 超越的 意味? 그러한 것이 果然 있는가? 모를 일이다. 그러나 日常은 嚴肅하다.

    日常 앞에서 누구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나든 當身이든 또 누구든, 삶을 살기 보다는 日常을 살아간다. 日常을 最小限의 水準으로 건사하고 그것을 平坦하게 持續하고 더러 그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만나거나 만드는 일의 所重함 또는 嚴肅함은, 무거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말하고 싶다. 삶보다 日常이 무겁다고. 金訓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밥벌이라든지 돈이라든지 健康이라든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世俗的인 價値들을 無視하는 사람들을 認定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人間에게 所重한 거예요. 돈은 엄청나게 所重한 겁니다. 돈을 熱心히 벌고, 아껴 쓰고, 잘 쓸 줄 알아야죠. 돈을 하찮게 알고, 돈벌이를 우습게 알면서, 自己는 마치 高邁한 精神世界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나는 信賴도 안 하고 輕蔑해요. 그러니까 나는 밥을 熱心히 誠實하게 벌고, 그 안에서 道德을 實現하는 것이 가장 重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 韓半島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率直히 말하자면, 굳이 金訓의 말을 빌릴 必要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20世紀의 韓半島를 그렇게 살아왔으며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젊은 世代라고 다를 것도 없다. 누구는 ‘아프니까 靑春’이라고 했지만, 글쎄 새벽 3時쯤 便宜店에 가서, 그 時間에도 서서 일하는 ‘아픈 靑春’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自身 없다. 염치없고 未安하다. 브레히트 式으로 말해 이 韓半島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時間은 그렇게 흘러간다.

    기억하라! 인간적 삶 위해 기울여온 노력을

    江原 春川市 KT&G 想像마당.



    살얼음 위의 平和

    기억하라! 인간적 삶 위해 기울여온 노력을

    경춘가도는 많은 이에게 사랑의 場所였다.

    그랬는데, 한瞬間에 우리의 삶이 세월호와 함께 沈沒하고 말았다. 아, 勿論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搜査일 따름이다. 어찌되었든, 慘事의 現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安全하고 平坦한 가운데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나의 뒷덜미를 꽉 움켜쥔다. 저 南道의 앞바다에서 끔찍한 思考가 發生한 지 겨우 20餘 日 지났을 뿐인데, 겉보기에는 우리의 삶이 ‘不安한 安定’ 위로 다시 調節되는 듯하다. 프로野球도 繼續되고 드라마도 續續 再演되고 있고 어린이날에 釋迦誕辰日에 어버이날까지 이어지는 5月 初의 連休는, 그 며칠 동안은, 비록 살얼음板 위에서나마 平穩해 보였다.

    내 最終의 目的地는 春川에 새로 開館한 KT&G 想像마당이었다. 이 익숙한 文化的 實驗 空間은 홍대 앞 非對稱 建物 속의 다양한 公演, 展示, 映像, 講義 等으로 文化藝術界에 널리 알려졌다. 非主流 및 新進 藝術家들의 創作活動을 支援하고 一般 大衆에게는 폭넓은 文化 經驗을 提供하려고 KT&G가 2007年 서울 홍대 앞에 첫 番째 想像마당을 開館했고, 2011年에는 忠南 論山에 두 番째 想像마당을 열었는데, 올봄에 그 세 番째 空間으로 春川 어린이會館 一帶를 리뉴얼해 開館한 것이다.

    公式 이름이 ‘KT&G想像마당 春川’李 되는 그곳에 公演場, 스튜디오, 갤러리, 講義室, 카페 等의 ‘아트센터’와 客室, 演習室, 세미나室을 具備한 ‘스테이’ 두 空間을 마련했다 하여 찾아가게 된 것이다. 더불어 그곳의 開館 記念 講義까지 맡게 되어 내친김에 하룻밤을 공지천을 내다보며 보내기 위해 나는 連休가 本格的으로 始作된 土曜日 낮에 움직이기 始作한 것이다.

    車輛이 山더미처럼 막힌다는 消息에 일부러 時間을 넉넉히 잡고 양수리 쪽으로 行路를 잡았다가 다시 高速道路에 올랐다가 차라리 꽉 막힌 高速道路에 있을 거라면 國道邊으로 融通性 있게 움직였다가 쉬었다가 다시 움직일 料量으로 청평, 加平 쪽의 경춘가도를 다시 選擇해 대낮에 出發해 저녁 어스름에 공지천에 이르는 旅程이 되고 말았다.

    漫畫家는 ‘漫畫와 想像力’을, 童話作家는 ‘童話와 想像力’을, 建築 專門記者는 ‘建築科 想像力’을 맡았고, 나는 ‘人文學과 想像力’이라는 主題를 맡았는데, 春川까지 가는 동안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人文學과 想像力이라고 하면, 손쉽게, 그러니까 말하기 좋고 듣기 좋은 近似한 말을 이리저리 엮어 한두 時間쯤 푸짐한 語彙의 盛饌으로 채울 수 있으련만, 歲月號 以後의 時間을 견디는 過程에서 그러한 말이 果然 무슨 意味가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 어떤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는 狀況이 되었으며 아마도 내 講義를 들을 사람들 또한 예전처럼 평화롭고 한가롭게 ‘私有’니 ‘省察’이니 ‘상상’이니 하는 말을 듣고 있을 狀況은 아닐 듯싶었다. 모든 日常이 判斷 中止된 狀況, 歲月號 以前이었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些少한 弄談이나 환한 웃음도 모조리 停止 狀態에 놓였으므로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 내게 주어진 講義 時間을 보낼 수 있을지, 꽉 막힌 道路 위에서도 오로지 그 걱정뿐이었다.

    경춘가도의 쓸쓸함

    온통 물이었다.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다가 팔당大橋를 건너고 양수리까지 내려갔다가 暫時 高速道路를 탔다가 다시 北漢江을 끼고 달리는 경춘가도를 利用해 공지천에 이르러 最終의 브레이크를 밟았으니, 끝도 없는 물의 連續이었고 물빛이 번들거리는 旅程이었다. 오래前에, 그러니까 1992年 是認 윤중호는 ‘양수리에서’라는 詩를 썼는데, 夭折한 이 참된 詩人은, 짧지만 正確한 言語로 양수리를 다음과 같이 그린 적 있다.

    北漢江 南漢江이, 서로

    살을 섞어도, 티눈처럼, 서로 서글프게, 등 돌리고 누워

    풀섶이나 더듬는 모진 바람으로

    끼룩끼룩, 철새 몇 마리 띄워보내는,

    양수리에

    늦장마 들어, 길이란 길은

    다 쓸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길을 내며

    흘러드는 江

    기억하라! 인간적 삶 위해 기울여온 노력을

    春川市 공지천에 어스름이 깔렸다.

    그 江물을 한참이나 보다가 南漢江 쪽 길을 물리고 北漢江 쪽 길을 擇했다.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春川 사이, 北漢江을 끼고 도는 柔軟하고 그윽한 行路가 直線의 大路와 複線의 快速으로 인해 많이 變했지만 물은 그대로였다. 2009年 7月 서울과 春川 사이 民資高速道路가 開通돼 京畿 東北部와 講院 地域 一部가 서울과 ‘30分 生活圈’으로 좁혀졌고 快速의 靑春列車 ITX도 달리고 있지만 대성리에서 始作해 청평, 南怡섬을 지나 加平 자라섬을 거쳐 京江, 江村, 그리고 男春川으로 이어져 의암호와 공지천과 소양호까지 이어지는 물의 抒情은 如前했다.

    京春線은 1939年 7月 22日 開通됐다. 私設 鐵道會社인 경춘鐵道株式會社에 依해 성동역(城東驛)에서 春川 사이 87.3㎞가 完工되어 그 正式 運行을 앞두고 그해 7月 22日 開通式을 한 것이다. 1970年代 初盤까지도 성동역에서 汽車가 出發했다. 1970年代 中盤 以後에는 京春線 汽車가 성북역에서 出發했다. 성북역에서 汽車를 타면 1時間쯤 걸려서 대성리驛이나 청평역에 이르고 거기서 더 가면 강경역 지나 春川으로 들어간다. 90㎞도 채 안되는 距離지만, 그 사이의 江과 酸으로 因해 京春線은 저 京釜線이나 湖南線에 밑지지 않는 文化의 堆積層을 이룬다.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는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 밤새 當身 머릴 짓누르고 間 아침 /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江에 /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하는 奬勵한 消滅意識을 남겼다.

    그뿐인가. 수많은 詩人이 이 江을 노래했고 수많은 젊은이가 이 江邊에서 成年式을 치렀으며 수많은 戀人이 애틋하든 不倫이든 낮이든 밤이든 이 江邊의 컴컴한 房에 몇 時間쯤 머물렀다. 아, 무엇보다 경춘가도는 한 줌의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릴, 그런 사랑의 場所였다.

    春川, 안개 都市

    기억하라! 인간적 삶 위해 기울여온 노력을

    想像마당은 文化藝術 인큐베이터를 志向한다.

    마침내 春川에 이르렀다. 꽉 막힌 道路에서 時間을 많이 버렸고 양수리와 加平의 물을 보기 위해 또 時間을 虛費해 四圍가 어두워진 다음에야 공지천에 이르렀다. 나는 隱隱한 照明과 皎皎한 달빛에 依支해 于先 春川 想像마당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連休가 이제 막 始作됐으므로 늦은 밤에도 찾아온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 有名한 이디오피아 카페를 始作으로 공지천을 따라 걷는 春川 市民의 밤 散策 소리 또한 끊이지 않아서 春川 想像마당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場所에 碇泊했구나 하는 생각이 于先 들었다.

    宿所는 想像마당의 宿泊施設 ‘스테이’, 그곳의 4層이었고 窓밖으로 공지천이 보였으며 그 위로 春川을 굽어보는 山들과 또 그 위로 눈썹달이 떠올라 있었다. 몇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안개 都市 春川, 想像마당, 소양호, 이 地域을 背景으로 애틋한 詩를 쓴 詩人 최승호, 短篇 ‘안개 視程距離’로 春川의 여린 속살을 그린 한수산, 그리고 來日 해야 할 講義 主題, 곧 人文學과 想像力 같은 말들이 어수선하게 머릿속에 들어앉았다가 다른 말들에 밀려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물. 여지없이 물이 떠올랐다. 아마도 오랫동안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무겁게 내려앉은 물의 무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春川, 물의 都市, 그리하여 곧 안개의 都市이기도 하다. 소양호와 의암호에서 안개가 늘 피어오르고 공지천 一帶를 안개가 完全히 掌握하는 날도 많다. 1967年 北漢江 줄기의 新軟鋼을 막아 義菴댐이 생겨났는데, 이때부터 안개가 짙어졌고 1973年 昭陽江댐이 完工되면서 四時四철 안개가 壓倒하는 都市가 됐다.

    春川 사람들에게는 이 안개는 답답하고 짜증나는 氣候 現象일 수도 있는데, 他地 사람들에게 안개는 夢幻的인 抒情과 浪漫的인 憂鬱의 表象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안개를 보러 春川을 찾기도 했고 그런 文化的 旅程이 안개寫眞 展示會 같은 것으로 集約되기도 했다. 春川에서 오랫동안 活動해온 小說家 한수산과 詩人 최승호가 안개를 素材로 하여 숨 막힐 듯한 靑春의 한 時期를 作品으로 남긴 것도 各別히 記憶할 만한 일이다. 春川을 代表하는 小說家 전상국의 作品 中 ‘썩지 아니할 씨’가 있는데, 그 作品에서 전상국은 春川에서 華川으로 이어지는 높은 고개 背後嶺을 描寫하면서, 春川의 안개를 더불어 그린 바 있다.

    “짙은 안개가 우욱우욱 덮치고 있었다. 正말 대단한 안개였다. 이런 濃密한 안개가 두렵게 認識되면서 나는 數十萬 길 깊디깊은 물 밑에 가라앉은 것 같은 斷絶感에 휩싸였다.

    버스가 背後嶺의 8部 稜線쯤에 이른 地點에서 사람들은 모두 아~하고 歎聲을 쏟아냈다. 그 짙은 안개에다 千길 낭떠러지의 가파른 고갯길 曲藝에 질려있던 얼굴들이 한꺼번에 활짝 펴지고 있었다. 버스가 느닷없이 그 깊은 안개의 늪에서 햇빛 속으로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겨울산이 이처럼 鮮明한 色彩를 띠고 아름다워 보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春川의 小說家 오정희가 있다. 韓國型 中産層의 일그러진 肖像, 비틀린 倫理意識, 假面을 쓴 世俗의 삶, 그 속에서도 한 줌의 人間性을 놓치지 않으려는 作品 世界가 오정희의 小說이다. 短篇小說 ‘夜會’는 春川을 背景으로 한다. 敎授를 男便으로 둔 主人公 명혜가 春川의 저녁 파티, 곧 夜會에 간다. 한때는 新春文藝에 佳作에 當選된 적 있어서 사람들은 명혜에게 늘 “요즘은 뭐 쓰세요”하는 社交的인 人事말을 건넨다. 그 人事말이 명혜를 살아가게 하는 自存의 힘이다. 명혜가 參席한 ‘夜會’는 이 都市에서 어느 程度 名銜을 내밀고 사는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近似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實은 저마다의 利속을 計算하는, 그런 幻滅의 時間이다. 그래서 명혜는 ‘夜會’를 빠져나온다. 하지만 안개에 사로잡힌 小都市의 ‘夜會’가 던지는 誘惑으로부터 完全히 자유롭지는 않다.

    “명혜는 方今 떠나온 곳이면서도 이미 自身에게는 발 들여놓는 것을 頑强히 拒否하는, 즐거움과 歡樂에 가득 찬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머지않아 불이 꺼지고 얇은 옷으로 아름답게 成長한 女子들은 느닷없는 寒氣에 어깨를 떨며, 또한 그들은 그들이 먹은 달콤하고 흰 게의 살과 수북이 뱉어 놓은, 아직도 鮮明한 朱紅빛의 껍질에 분명치 않은 背反感과 부끄러움을 느끼며 부산히 作別의 握手를 나누리라는 것을, 疲困한 안主人은 성마른 소리로 일보는 女子들을 採根하고 終乃는 單숨에 잘라 버린 薔薇의 그루터기만 凶하게 남을 즈음 庭園은 곧 갇힌 個의 낮은 그르렁거림, 빈 胃腸을 훑어 내는, 미친 靑年의 부질없는 嘔逆질 소리로 가득 차게 될 것을 알면서도 명혜는 돌아가고 싶었다.”

    春川 想像마당

    그런 생각들 사이를 헤매다가 깊은 잠에 들었다. 日曜日 아침에 깨어난 後, 나는 春川 想像마당 一帶를 둘러보았다.

    春川 想像마당이 特別히 注目하는 事業은 音樂 分野다. 거의 完璧한 水準으로 造成된 公演場과 라이브 스튜디오는 제대로 된 音樂 環境에서 作品도 만들고 곧장 觀客과도 만나고자 하는 音樂人이라면 기꺼이 歡迎할 만한 場所다. 갤러리, 講義室, 카페 等의 附屬 施設이 最高의 音樂 作業을 支援한다. 58個의 客室에 200餘 名이 머물며 文化藝術 作業을 함께 할 수 있는 ‘스테이’ 施設에도 音樂 演習室, 公演藝術 演習室, 세미나室 等이 있어 一旦 하드웨어의 側面에서 ‘올인원’의 條件을 갖췄다. 여기에 350席 規模의 室內 公演場과 2000席 規模의 野外 公演場까지 마련되어 든든한 背後가 되고 있다. 뮤지션 支援事業 ‘써라운드’ 等을 통해 野心 찬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創作, 音盤 錄音, 公演 等을 一直線으로 展開할 수 있다.

    이미 홍대 앞 想像마당에서 大衆의 關心과 支持를 받아온 獨立 디자이너들의 作業이 다채롭게 펼쳐질 수 있도록 準備한 것도 이채롭다. 新進 디자이너를 發掘하고 그들의 實際 作品이 大衆에게 直接的으로 紹介되는 프로젝트다. 이러한 過程이 豫備 藝術家를 위한 프로젝트, 卽 크리에이티브 워크숍, 미디어아트 워크숍, 디자이너 워크숍, 마스터링 워크숍 等을 바탕으로 해 그 뿌리를 키워 열매를 맺는 쪽으로 設計돼 머지않아 注目할 만한 成果가 안개 都市 春川에서 피어오를 것으로 期待된다.

    그런 일들과 關聯된 主要 施設을 살펴보는 동안, 나의 눈은, 如前히 놀라운 造形 感覺과 空間 設計를 보여주는 金壽根 建築家의 솜씨에 거듭 驚歎을 했다. 1980年의 作品으로 全盛期의 金壽根 建築 美學이 이 空間, 卽 옛 춘천시 어린이會館 곳곳에 適用돼 있었다. 이를 오늘의 感覺과 새로운 機能에 맞게 全面的으로 리뉴얼해 開館한 것이 想像마당이다. 리뉴얼했다고 했지만, 建築家 金壽根의 숨결만큼은 지우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돋보였다.

    언뜻 不規則해 보이는 窓들은 저마다의 機能과 造形性을 維持하며 바깥의 빛을 끌어들여 室內에 다양한 빛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基本的으로 2層 構成의 建物이지만 어떤 地點에서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位置는 瞬息間에 다른 位相을 갖곤 했다. 室內의 곳곳이 迷路처럼 構成돼 있으나 그것은 混雜하고 어수선한 迷路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과 같았다. 게다가 開館을 記念해 準備한 展示가 ‘記憶하다’였다. 6月 15日까지 열리는 展示會 ‘春川寫眞 記錄 프로젝트·岐嶷하다’는 春川 市民의 追憶을 바탕으로 하되, 單純히 옛 記憶을 浪漫化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오늘의 삶을 어떻게 떠받치는지를 證明하는 作品들이었다.

    그렇게 迷路 같은 空間과 오래된 春川의 記憶을 훑어보다가, 나는 그제야 내 몫의 講義를 어떻게 해야 할지 決定할 수 있었다. ‘人文學과 想像力’, 내게 주어진 主題는 그렇게 큰 말들이었다. 그 말들을 큰 부피로 큼직하게 얘기한다는 것은, 歲月號 以後, 너무 한가로워 보였다. 나는 몇 가지 講義 主題를, 몇 個의 파워포인트로 構成해 一旦 春川으로 내려왔는데, 그中 어느 것도 決定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두리번거리고 헤매다가 迷路 같은 空間 안에서 決定을 내렸다.

    ‘記憶하라!’

    그것이 내가 選擇한 主題 속의 主題였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忘却의 삶을 거침없이 살아왔다. 記憶을 毁損하고 削除해왔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人間的 삶을 위해 기울여온 努力마저 滅失하고 말았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 있었으니, 이제라도 記憶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떤 삶, 아니 어떤 日常을 가꾸고자 했던가. 巨大해진 都市와 矮小해진 삶, 이것이 우리의 랜드마크였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人間的 삶에 對한 强烈한 欲望, 그것을 記憶하는 것, 그로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힘겨운 時間을 버텨내야 하는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