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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通點은 ‘議員들, 工夫 좀 더 해라’|신동아

共通點은 ‘議員들, 工夫 좀 더 해라’

無所有적 人間 太宗, 欲望的 人間 世祖

  • 이상곤│甲山韓醫院 院長·韓醫學 博士

    入力 2014-05-20 1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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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2008年 5月 16日 열린 ‘太宗代王 傳統 文化行事’에서 御宴 行列 參席者들이 太宗의 祭祀를 지내기 위해 서울 瑞草區 內谷洞 獻陵 入口로 들어서는 光景. 獻陵은 太宗과 원경王后의 陵이다.

    朝鮮 建國을 위해 惡役을 마다하지 않고, 建國 以後에도 王權 中心의 權力 再編을 위해 피의 肅淸을 斷行했던 朝鮮 第3代 王 太宗(太宗·1367~ 1422, 在位 1400∼1418)은 어떤 體質이었을까.

    TV 드라마 ‘龍의 눈물’에서 太宗 役을 맡았던 탤런트 유동근의 후덕한 印象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事實은 다르다.

    太祖 3年 6月 1日, 靖安軍 李芳遠은 朝鮮에 對한 明나라 皇帝의 疑懼心을 풀려고 使臣으로 떠난다. 太祖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너의 體質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萬里의 길을 頉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격변의 建國 現場을 누비면서 鄭夢周와 鄭道傳을 죽이고 王子의 亂을 통해 兄弟를 殺戮한 太宗은 意外로 파리하고 허약한 體質이었음을 確認할 수 있는 대목이다.

    性格은 剛明(剛明)했다. ‘강’은 性格이 칼처럼 날카롭다는 것이고, ‘名’은 머리가 明哲했다는 이야기다. 太宗이 現職에서 물러난 世宗 2年 10月 28日의 記錄에 剛明하다는 말이 나온다.

    “일찍이 議員 원학(元鶴)李 上王前(上王殿)에 시종하였으므로, 上王이 宗下가 醫術에 매우 能하다는 말을 듣고, 또 양홍달(楊弘達)이란 議員이 너무 늙었으므로, 宗下로 하여금 願學科 더불어 번갈아 入直하게 하려고 원학을 보내어 宗下를 부르니, 宗下가 上王의 剛明(剛明)함을 꺼려서 가까이 모시기를 願하지 아니하고 自信할 만한 經驗이 없다 하여 나가지 아니하니, 원學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불렀으나, 또 가지 않으므로 곧 義禁府에 내려 新聞한즉, 宗下가 말하기를, ‘上監께서 명철下午신데 萬一에 房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對答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하였나이다’ 하므로, 곧 帶域으로 論罪하여 斬刑에 處하고 그 家産을 籍沒하였다.”



    實錄의 記錄에서 診療하길 꺼렸다가 斬刑에 處해진 唯一한 議員이 바로 정종하다.

    明哲하면서 古今의 書籍에 能通했던 太宗의 知的 能力은 여러 次例 醫學에 對한 論評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議員들, 工夫 좀 더 해라’는 오만으로 느껴질 程度다. 太宗 15年 1月 16日, 宮中에서 여남은 살 되는 아이가 病이 나자 造淸이라는 議員이 藥을 지었는데, 그게 어른 分量이었다. 小兒의 藥은 成人 分量의 半만 짓게 돼 있으므로 小兒를 몇 살까지로 規定하는지에 對해 묻자 造淸은 5, 6歲까지를 小兒라고 한다고 對答했다. 그러자 太宗은 ‘천금방’이란 冊을 찾아 2, 3歲를 嬰兒라 하고 10歲까지를 小兒(小兒)라 하며, 15世는 小兒(少兒)라고 區分한다는 대목을 直接 보여주면서 小兒의 範圍와 藥 使用量에 關해 造淸을 굴복시켰다.

    파리하고 허약한 體質

    破古紙(破古紙)는 ‘東醫寶鑑’에서 腎臟의 機能이 떨어져 精液이 절로 나오고 허리가 아프며 무릎이 차고 陰囊이 축축한 症狀을 治療하는 性機能 改善 藥材다. 이름 自體가 ‘오래된 門窓戶紙를 뚫는다’는 뜻을 지녀 壁紙와 錯覺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太宗은 塗壁紙(塗壁紙)를 破古紙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으니 醫學者들이 約傍書에 밝지 못하다고도 指摘했다.

    王權을 强化해 國家 理性이 되기를 願했던 太宗은 宮中 生活을 좋아했을까. 太宗 2年 9月 19日의 記錄은 宮中 生活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는지 잘 보여준다. “今年에는 腫氣가 열 番이나 났다. 醫師 양홍달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깊은 宮中에 있으면서 外出하지 아니하여 기운이 막혀 그런 것이니, 湯浴(湯浴)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諫官(諫官)들은 王에게 지지 않고 溫泉行을 反對한다. 太宗의 反應은 그의 性格을 다시 한 番 잘 드러낸다. “諫官들이 ‘傳하는 春秋가 젊어서 반드시 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20~30歲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病이 없는가, 諫官이 내 病의 治療를 못하게 막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

    溫泉行을 抛棄하면서 講武(講武)를 가겠다고 하자 諫官들은 다시 王의 講武를 막는다. 講武는 사냥을 통해 武藝를 익히는 行事인 만큼 말달리기를 包含하는데 太宗은 말을 過激하게 몰아 速力을 내는 스피드狂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末尾에 조영무가 나서서 臣下들의 걱정을 代辯한다. “여러 아랫사람이 사냥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은 眞實로 殿下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太宗 8年의 記錄은 이런 事實을 더욱 分明히 立證한다. “太上王이 갑자기 風疾(風疾)을 얻었는데, 賃金이 이때에 寢具의 잘못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 消息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곧 便服으로 大闕 東쪽 작은 門을 나와 말을 달려가니, 示威(侍衛)하는 者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醫學에 對한 論評

    實錄은 太宗 卽位 13年이 지나도록 具體的인 病名을 記錄하지 않았다. 앞에 自身이 指目한, 腫氣가 자주 發生했다는 것 外에 注目할 만한 疾病 記錄이 없다.

    太宗은 在位 8年이 지나면서 本格的으로 病이 나기 始作한다. 世子에게 文昭殿의 祭祀를 代行하게 하고 날씨가 陰散해지자 藥酒를 停止하게 하는가 하면, 고기飯饌을 먹도록 請하기도 한다. 13年 8月 11日 記錄에선 自身의 疾病을 具體的으로 밝힌다. “내가 본디 風疾이 있었는데, 近日에 다시 發作하여 痛症이 甚하다. 지난밤에 조금 差度가 있었으니, 卿들은 憂慮하지 말라.”

    太宗은 風疾 症狀이 여러 次例 反復되자 이를 具體的으로 呼訴한다. 같은 해 11月 16日 “임금의 손이 回復되지 않아 흘을 잡기가 어렵다고 하였다”거나 世宗 1年 4月 29日 “오른팔이 시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것에 差度가 있어 速히 돌아갈 것을 命했다”는 句節도 있다. 世宗 1年 5月 5日엔 上王이 목이 뻐근하고 아파서 돌아가는 길에 官員들이 나타나지 말 것을 付託한다.

    太宗의 風疾 症狀을 綜合하면 只今의 목 디스크와 類似한 疾患이다. 風疾에서 풍은 어떤 意味일까.

    ‘黃帝內經’ 太素(太素)의 28卷 第風水類에 보면 ‘바람은 氣(氣)와 하나인데 빠르고 多急하면 風이 되고 천천히 秩序가 있을 때는 風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氣에는 두 가지가 있다. 自然에서의 大氣와 人體 內部에서 흐르는 元氣가 그것이다. 自然의 大氣가 風이 되면 感氣 症狀을 誘發해 惡寒 發熱하는 것이고, 內部의 元氣가 風이 되면 腦血管 疾患이나 關節炎 等 風病을 發病케 한다. 예전엔 名醫의 資質을 바람을 잘 觀察하는지를 基準으로 評價했다. 傳說的 名義였던 편작(扁鵲)의 作(鵲)은 까치 作이다. 까치는 집을 지을 때 그해 불어올 바람을 豫想해 짓기 때문에 나뭇가지 끝에 지어도 바람에 떨어지는 法이 없다. 編作은 바람을 잘 觀察하는 사람이고, 여기서 바람의 原形은 氣로써 氣의 흐름을 잘 아는 사람이 名義라는 뜻이고 보면 韓醫學의 本質과 잘 맞아떨어진다.

    內部의 元氣가 風이 되어 風疾이 생겼다면 어떤 原因으로 風이 생겼고, 어떤 帳簿와 關係가 있을까. 難境(難經)에선 풍은 肝과 관계있으며 끈氣 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火를 자주 내고 機가 興奮해 가라앉지 않으면 間의 穴이 虛해지면서 神經痛, 神經痲痹, 五十肩 等의 節六通(節肉痛)이 생긴다고 警告했다. 애肝腸을 태우는 게 風의 原因이 된다는 意味다.

    風疾 다스리려 溫泉行

    太宗은 自身이 國家 異性으로서 國家의 生存 强化라는 큰 目的을 위해 兄弟, 妻家, 社가(私家) 모두에게 피를 뿌린 人物이다. 이 때문에 個人이 겪어야 할 人間的 苦痛을 避할 수 없었다. 太宗 16年 5月 19日, 極甚한 가뭄 속에서 祈雨祭를 準備하며 보낸 電池에는 “가뭄의 緣故를 깊이 생각해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無人(戊寅)·競進(庚辰)·壬午(壬午)의 事件이 富者·兄弟의 道理에 어긋남이 있었음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가뭄을 하늘이 주는 罰로 생각한다는 말은 自身의 選擇에 따른 負擔感이 얼마나 甚했는지를 보여주는 激情的 吐露다.

    太宗은 風疾 治療를 위해 藥물보다 溫泉行을 擇했다. “나의 風疾에 藥이(藥餌)의 效驗이 없으니, 溫泉에서 沐浴하여 病을 고치는 것이 비록 醫書에는 보이지 않으나, 내 將次 利川(伊川) 溫泉에 가서 沐浴하여 試驗하려는데, 어떠하겠는가?” 以後 평산溫泉을 오가면서 太宗의 風疾은 好戰果 惡化를 反復했다.

    太宗은 드라마 ‘龍의 눈물’로 잘 알려진 人物이다. 權力爭取 過程에서 骨肉을 除去하며 흘린 피눈물을 龍의 눈물로 定義하겠지만, 眞짜 用意 人間的 눈물은 막내아들인 성녕대군의 죽음 過程에서 흘렸다. 太宗 12年 6月 23日 中宮인 원경王后 閔氏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出産 後 內醫院에 勤務한 語義들에게 賞을 厚하게 내린 건 勿論이고 自身의 感情을 숨김없이 表現했다. “내가 甚히 기뻐한다.”

    太宗 18年 성녕대군은 갑자기 傳染病인 豌豆瘡에 걸려 危篤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朝鮮 前期 醫療의 實相이다. 醫學(醫學)의 漢字인 ‘醫’는 本來 받침이 ‘酉’가 아니라 ‘巫’다. 醫學의 起源을 巫俗으로 본 것이다. 古代에는 무당을 醫師의 役割을 代行하는 治癒者로 判斷했다. 歷史 記錄도 이런 見解를 反映한다. “只今 世上은 病이 나면 占치고 祈禱를 드린다. 그러므로 疾病이 더욱 심해진다. ‘呂氏春秋’ 眞髓便(盡數篇)에서 무당인 無意는 皇帝에게도 接近했다. 한(漢) 武帝가 病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祭祀를 지내고 난 뒤 病이 나았다. 以後 武帝는 무당의 勸誘에 따라 自身을 감추고 그림자 政治를 펼친다.

    朝鮮 電氣만 해도 傳染病은 무당과 醫師의 治療가 共存하는 領域이었다. 豌豆瘡의 豫後를 알아보는 方法은 醫師가 아니라 무당과 占쟁이가 主導했다. 太宗은 承政院에 明解 點을 잘 치는 사람을 모아 病의 豫後를 알아봤다. 점치는 盲人들은 點을 보고 모두 吉하다고 豫測했다. 世宗 임금이 되는 忠寧大君度 여기서 登場한다. 鄭琢을 시켜 主役點을 쳐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충녕大君이 나와 主役點을 풀이하자 모두가 感歎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占의 結果와는 無關하게 성녕대군은 죽고 말았다. 太宗은 성녕대군이 놀던 곳을 지켜보기 힘들어 開城 留後司로 이어(移御·임금이 居處하는 곳을 옮김)할 것을 議論하면서 속마음을 내비친다. “내가 옮겨 擧動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哀痛하고 울울히 맺힌 情을 씻으려는 것이다.” 여러 날 동안 穀氣를 끊자 水剌 들기를 請하는 臣下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大軍이 病을 얻은 날부터 여러 날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더구나 只今 有名(幽明)의 길이 막혀 있으니 비록 水剌를 들려 해도 얼굴 모습이 선하여 잊지 못한다.”

    朝鮮 電氣에 豌豆瘡을 治療하던 方法은 議員들의 罪를 묻는 下敎에서 드러난다. 꼼꼼하면서도 明哲한 太宗답게 경안공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對해 分析한다. “乙未年에 경안 弓奏(慶安宮主)의 病 症勢가 熱이 나고 괴로움이 甚하여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니, 양홍달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病의 症勢는 醫街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養胃湯·平胃散을 바쳤다. 내 마음에 普通 症勢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남에게 알려질까 부끄러워했으나, 卒(卒)한 뒤에 내가 方書를 보니,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는 것은 바로 發熱하는 症勢에 있었다. 성녕군의 창진(瘡疹)李 發하던 처음에 허리와 등이 아팠는데, 造淸·원학 等이 風症(風症)이라고 아뢰어서 인삼순起算을 바쳐 땀을 흘리게 하였다. 뒤에 醫書의 두陣門(痘疹文)을 보니, 또한 허리와 등이 아픈 것이 실려 있었다. 또 病이 危篤하던 날에 이미 增稅가 變하게 되어 顔色이 灰白色이 되었는데, 剝去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순조로운 增稅입니다. 顔色이 黃蠟色(黃蠟色)이 되면 最上의 症勢입니다’라고 했다. 이 사람들이 비록 故意로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實로 이것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問題가 된 인삼순起算은 風을 治療하는 藥이다. 惡寒이 나고 뒷머리와 목이 뻣뻣하면서 아플 때 허약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處方이다. 땀을 내는 마황과 氣를 고르게 하는 眞皮, 天宮, 白紙, 白朮, 厚朴, 吉慶, 甘草, 葛根, 人蔘이 들어간다. 韓醫學에서 傳染病의 原因을 陰液(陰液)李 마르면서 乾燥해져 바이러스나 細菌이 人體에 깊이 浸透하는 點으로 보는 걸 勘案하면, 溫病으로 땀을 내서 더 乾燥하게 만드는 治療 方式은 分明 失手였다. 같이 投與한 對金飮子나 감應援도 消化器 疾患에 두루 쓰는 汎用 處方으로 豌豆瘡 治療와는 距離가 먼 藥材였다.

    理性的 醫療 最初 導入

    太宗은 성녕대군의 죽음 以後 密敎 方式 遁甲術로 疾病을 治療하는 摠持宗(摠持宗)에 對한 國家的 支援을 끊음은 勿論 판수 巫女들도 모두 내쳤다. 自身의 죽음을 目前에 두고서도 信念은 變하지 않았다. “世上을 惑하게 하고 百姓을 속이는 것에 神仙과 部處와 같은 것이 없다.”

    무당으로부터 벗어나 理性的 治療 方式을 適用한 最初의 名義는 亦是 編作이다. 그는 ‘무당을 믿고 醫師를 믿지 않는 者의 病은 낫지 않는다’는 名言을 남겼으며, 生理와 病理를 陰陽理論에 맞춰 合理的으로 說明했다. 王室 醫療는 朝鮮 醫療의 中心이다. 太宗은 朝鮮에 巫俗을 排擊하고 理性的 醫療 方式을 자리 잡게 한 最初의 君主였다.

    太宗을 治療한 어의중 平圓해는 獨特한 履歷의 所有者다. 日本의 中으로 우리나라로 歸化해 語義로서 太宗을 오랫동안 진료했다. 實錄에서 太宗은 그의 功勞를 이렇게 致賀한다. “네가 의(義)를 思慕하여 歸順해 와서, 내가 潛邸(潛邸)에 있을 때부터 只今에 이르기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症狀을 診察하고 藥을 調劑하되, 날로 더욱 謹愼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또 나라 사람이 病이 있으면 卽時 醫療하여 자못 效驗이 있었으니, 功勞가 賞을 줄 만하다.”

    太宗은 어떤 疾病으로 死亡했을까. 實錄엔 이에 對한 한 마디의 說明도 없다. 世宗의 下敎를 보면 太宗의 病患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임을 斟酌할 수 있다. 世宗 4年 4月 22日, 太宗과 世宗은 東郊에 나가 매사냥을 구경하고 왔는데 太宗이 갑작스럽게 몸이 不便하면서 危重해진 것으로 記述했다.

    世宗은 한글과 科學技術을 발달시킨 明敏한 王이지만 巫俗과 佛敎에 心醉한 것은 世宗篇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太宗의 病患이 심해지자 다시 한 番 土俗信仰人 性療法(星曜法)으로 吉凶을 점쳤다. 하지만 自身의 陵을 만드는 마지막 瞬間까지 儒學者인 太宗의 信念은 確固했다. “이 陵은 내가 들어갈 데인데 더러운 중들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다.”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世祖의 무덤인 광릉. 遺言에 따라 石槨을 쓰지 않았고 무덤 둘레에 屛風石이 없다.

    줄初喪 恐怖에 시달린 世祖

    朝鮮 第7代 王 世祖(世祖·1417~1468, 在位 1455~1468)는 太宗과 비슷하지만 다른 人物이다. 太宗은 한때 自身의 革命同志였던 功臣들, 원경왕후와 妻家, 가까운 兄弟, 史家의 사람들을 王權을 위해 희생시켰다. 朝鮮이라는 國家權力을 維持하려고 自身의 周邊을 희생시킨 無所有的인 外向型 人間이다. 反面 世祖는 自身의 革命에 同參한 貢臣들을 위해 權力을 분점하거나 私有化한 欲望的 內向型 人間이다. 世祖처럼 自身의 行爲에 對한 正當性이 確保되지 않으면 사람을 죽였다는 罪意識은 當然히 恐怖로 마음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世祖 3年 7月 27日, 義警世子가 갑자기 病에 걸렸다. 젊은 나이에 걸린 病이었지만 症勢는 好轉되지 않았다. 世子는 그해 9月 2日 世上을 등지고 말았다. 둘째인 海洋大軍이 世子가 되고 世子嬪으로 韓明澮의 셋째 딸이 揀擇됐다. 世祖 7年 11月 1日, 不安하게도 이番에는 世子嬪이 병들었다. 世子嬪은 11月 30日 原子를 낳고 5日 만에 죽고 말았다. 原子 또한 世祖 9年 10月 24日에 世上을 떠났다.

    줄初喪의 슬픔은 世祖에게 癸酉靖難 過程에서 죽은 金宗瑞, 皇甫仁 等 大臣과 殺生簿로 죽어간 수많은 冤魂을 떠올리게 하고 마음의 恐怖로 다가왔을 것이다. 一部 好事家들은 이런 點을 擴大 解釋해 野史(野史)로 潤色했다. 世祖가 上院寺에 묵고 있을 때 文殊菩薩의 도움으로 皮膚病을 治療했다는 이야기나 端宗의 生母였던 顯德王后가 침을 뱉어 皮膚病이 생겼다는 이야기, 或은 世祖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들이다.

    實錄은 類似한 이야기를 記錄했다. 世祖 8年 11月 5日의 記錄엔 賃金이 上院寺에 擧動할 때 文殊菩薩은 아니지만 觀音菩薩이 現像하는 異常한 일이 있어 殺人, 强盜 以外의 罪를 赦免했다는 記事도 있다. 世祖 3年 9月 7日 記錄엔 현덕왕후의 墓所에서 一部 毁損이 있었음을 證據하는 대목이 실렸다. “현덕왕후(顯德王后) 權氏의 新株(神主)와 儀物(儀物)을 일찍이 撤去하였으니, 그 고명(誥命)과 冊褓와 아울러 裝身具를 該當 官司로 하여금 首長(收藏)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世祖는 太宗과 비슷한 點이 많다. 醫學에 對해 한 手 가르치려는 點도 닮았다. 世祖 9年, 醫師를 8種으로 分類하고 그中 첫 番째로 마음을 고치는 審議(心醫)를 꼽은 것은 自身이 마음病에 걸린 反證은 아닐까. “審議는 사람으로 하여금 恒常 마음을 便安하게 가지도록 가르쳐서 病者가 그 마음을 움직이지 말게 하여 危殆할 때에도 眞實로 큰 해가 없게 하고, 반드시 그 願하는 것을 곡진히 따르는 者이다. 마음이 便安하면 기운이 便安하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2011年 放映된 KBS 2TV 水木드라마 ‘公州의 男子’ 製作發表會. 朝鮮時代의 代表的 事件인 癸酉靖難을 새로운 視角으로 再解釋한 作品이다.

    世祖는 平素 自身의 健康을 自信했다. 그러나 世祖 9年 9月 27日엔 효령대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方壯한 血氣로써 病을 이겼는데, 여러 해 前부터 疾病이 끊어지지 않으니, 일찍이 溫泉에 沐浴하자고 하였습니다.” 疾病으로만 記錄하고 분명한 病名이나 症狀은 記錄하지 않았다.

    世祖는 溫泉浴에 對해서도 한 수 짚고 넘어간다. 世祖 10年 4月 16日 “내가 只今 溫泉浴을 試驗하여 보니, 그 效力이 神通한 것 같아서 風習(風濕)의 病이 낫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出入(出入)할 즈음에 減風(感風)李 實로 많아서 예전의 病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뒤의 病이 바야흐로 始作되는데, 지나치면 어지럽고 程度에 미치지 못하면 效驗이 없으니 마땅히 氣를 가지고 스스로 調節하고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大抵 늦봄의 初期에 해가 높이 떠오르고 날씨가 바람氣가 없으며, 마침 배 속이 오히려 不足한 듯하면서 많이 먹고 싶지 않을 때를 틈타 나가서 沐浴한다.… 이 折木(節目)을 가지고 길이 兩方(良方)으로 삼도록 하라.”

    韓醫學에서 濕熱은 皮膚疾患을 의미하고 風習은 大部分 關節病을 가리키는 用語임을 勘案하면, 當時 溫泉浴은 神經痛 治療를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斟酌할 수 있다.

    世祖의 疾病이 분명하게 드러난 건 世祖 12年 10月 2日의 記錄이다. “賃金이 한계희(韓繼禧), 임원준(任元濬), 김상진(金尙珍)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꿈속에서 생각하기를, 玄胡索(玄胡索)을 먹으면 病이 나을 것이라 여겨 이를 먹었더니 果然 가슴과 배의 아픈 症勢가 조금 덜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藥인가? 이에 玄胡索을 加味한 漆器湯(七氣湯)을 올렸더니 果然 病患이 나았다.”

    疾病과 苦痛을 不審으로 달래

    東醫寶鑑은 漆器湯의 漆器를 이렇게 說明한다. 漆器란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 漆器가 서로 어울려 淡然이 뭉친 것이 솜이나 엷은 膜 같기도 하고 甚하면 梅花氏 같다. 이러한 것이 목구멍을 막아서 뱉으려 해도 뱉어지지 않으며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는다. 속이 그득하면서 飮食을 먹지 못하거나 機가 치밀어서 숨이 몹시 차게 된다. 심해지면 덩어리가 되어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기며 痛症이 發作하면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이럴 때 漆器湯을 쓴다.

    世祖의 疾患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한 마음病이었다. 줄初喪을 當해 큰 衝擊을 받으면서 野史가 傳하는, 구천의 冤魂이 詛呪하는 恐怖에 시달렸다.

    世祖는 恐怖를 不審으로 이기려고 했다. 世祖의 아버지 世宗은 自身의 疾病과 苦痛을 辛未스님을 통해 慰勞받았다. 世宗 32年 1月 26日 實錄은“임금의 病患이 나았는데도 情根(精勤)을 罷하지 않고 그대로 크게 佛寺를 일으켜, 중 辛未를 불러 寢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를 베풀게 하였는데, 높은 禮節로써 待遇하였다.”

    世祖도 辛未를 통해 自身의 罪業을 막고자 했다. 世祖 10年 2月 18日 疾病 治療를 위해 溫陽溫泉으로 向한다. 實際로 俗離山 福天使에 있는 辛未를 만나기 爲해 辛未의 동생 金守溫을 데리고 忠淸道로 向한 것이다. 2月 27日 辛未를 만나 諮問을 한 後 世祖 11年에 國家에서 物資를 支援해 重建한 절이 五臺山 상원사다.

    世祖의 不審은 性理學의 나라 朝鮮에서 佛敎에 對해 異議를 걸었다는 理由로 皇甫仁의 孫壻 김종련 本人과 子孫 모두 內需所(內需所·朝鮮時代에 王室 財政의 管理를 맡던 官衙. 世祖 12年에 內需司로 이름을 고침)의 奴婢로 전락시켜버릴 程度였다. 實錄은 “賃金이 일찍이 김종련에게 不屑(佛說)을 물으니, 김종련이 논대(論對)하는 것이 자못 임금의 뜻에 거슬리었다”고 記錄했다.

    佛敎와 關聯해 믿기 어려운 奇跡도 여러 次例 나타났다고 實錄은 적었다. 例를 들면 辛未를 만나는 福天使에서도 佛敎에서 奇跡으로 여기는 現象인 膀胱(放光)이 있었고, 世祖 12年 法會하는 날에는 서기가 光彩를 내쏟고 꽃비와 舍利의 奇異함이 있었다고 記述했다.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이상곤

    1965年 慶北 慶州 出生

    前 大邱한의대 안耳鼻咽喉皮膚科 敎授, 大韓韓醫師協會 外觀科學會 理事

    現 甲山韓醫院 院長, 韓醫學 博士, 東亞日報·農民新聞·프레시안 칼럼 執筆

    著書 : ‘콧속에 健康이 보인다’ ‘코 博士의 코 이야기’ ‘낮은 韓醫學’ 等 多數


    實錄엔 世祖의 疾病에 對한 記錄이 43回에 걸쳐 나타난다. 世祖 10年부터 本格的으로 疾病에 시달렸는데, 12年에 50歲가 되면서 病이 相當히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世祖 14年 7月 19日엔 신숙주, 구치관, 韓明澮를 불러 自身의 前衛를 深刻하게 議論하지만 大臣들의 反對에 부딪히자, 7月 22日 14名의 大臣을 4番으로 나눠 世子를 도와 政務를 處理하게 하는 元喪制를 導入했다. 世祖는 14年 9月 8日 52歲를 一期로 壽康宮에서 世上을 떠난다.

    實錄의 記錄에서 野史에 擧論되는 皮膚病은 根據를 찾기 어렵다. 實錄은 但只 疾病 有無의 事實만을 記錄해 關節病이나 神經痛으로 推定되는 風習兵科 唯一하게 處方名이 나오는 漆器湯을 根據로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한 世祖의 內面을 斟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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