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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은 速度가 아니라 方向이다”|신동아

“人生은 速度가 아니라 方向이다”

‘뱀直球의 熱血男兒’ 임창용

  • 이영미│스포츠 칼럼니스트

    入力 2014-05-21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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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신수 日記’ ‘류현진 日記’를 네이버에 連載하는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영미 氏가 이달부터 내로라하는 前·現職 스포츠 스타들의 숨은 뒷이야기를 紹介하는 ‘스포츠ZOOM 人’을 連載한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5月4日 大邱球場에서 意味 있는 記錄이 誕生했다. 三星의 守護神 임창용(38)의 韓日 通算 300세이브 大記錄이 그것이다. 1995年 해태(現 KIA)에 入團한 임창용은 2007年까지 해태와 三星을 거치며 168세이브를 記錄했고, 2008年부터 2012年까지 日本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128세이브를 記錄했다. 올 시즌 前까지 韓日 通算 296세이브를 記錄한 그는 메이저리그가 아닌 三星으로 復歸해 300세이브를 올리게 된 것이다.

    ‘돌直球’ 오승환이 떠난 자리에 ‘뱀直購’ 임창용이 바통 터치를 했다. 三星의 든든한 마무리 投手로 자리매김하며 最適의 投球 밸런스를 선보이는 임창용을 ‘스포츠ZOOM人’에서 만나본다.

    5月 初, 大邱球場에서 마주한 임창용은 如前히 語塞한 微笑를 지었다. 不過 두 달 前까지만 해도 美國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시카고 컵스 所屬 選手로 示範競技를 뛰며 메이저리그 進出을 애타게 渴望하던 그였다. 그러나 懇切한 바람과 달리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行을 通報받았고, 單 하루도 마이너리그에 있는 건 意味가 없다고 말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三星으로 復歸하게 된다. 狀況이 이렇다보니 世上에서 가장 便한 親庭팀으로의 復歸가 그는 不便할 수밖에 없었고, 메이저리그 門턱을 넘지 못하고 돌아온 現實이 씁쓸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내 運이 여기까지인가보다 싶었다. 2002年부터 메이저리그 舞臺를 밟기 위해 갖은 努力을 다 기울였는데, 迂餘曲折 끝에 그곳에 到達해선, 또다시 온갖 風波를 겪었고, 結局엔 아무 所得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 三星行이 決定됐을 때는 마음이 썩 좋을 수만은 없었다.”

    임창용은 인터뷰 때마다 自身의 運命에 對한 얘기를 끄집어내곤 한다. 野球選手로 이름을 알리기 始作하면서 그는 平坦한 길을 걷지 못했다. 野球社와 個人事 모두 꼬일 대로 꼬였고, 日本으로 進出하기 前까지만 해도 해마다 스토브리그의 핫이슈로 떠오른 뉴스메이커였다. 그런 自身의 過去가 메이저리그에서도 ‘不運’으로 이어지면서 손대면 잡힐 듯했던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눈으로만 품고 돌아오는 心境은 錯雜하기만 했을 것이다.



    “時間이 必要했다. 三星의 마운드가 싫은 게 아니라 메이저리그에 挑戰만 하고 그냥 돌아왔다는 自愧感, 喪失感을 克服하기 위해선 어느 程度 마음 整理할 時間이 必要했다. 그래서 2軍에 머물렀고, 2軍 選手들과 함께 訓鍊하면서 메이저리그를 떠나보내려고 努力했다.”

    임창용은 4月 11日 大邱 SK戰을 앞두고 1軍에 登錄됐다. 이날 復歸 後 처음으로 大邱球場 마운드에 선 임창용. 그는 三星 팬들이 運動場이 떠나갈 듯이 ‘임창용’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暫時 울컥했다고 한다.

    “妙하더라. 暫時 잊고 있던 喊聲이었다. 觀衆席의 거의 모든 팬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 내가 韓國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들리는 내 이름이었다. 美國에선 어느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生硬했고, 그 다음에는 氣分이 漸次 좋아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시카코 컵스와의 惡緣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3月 27日 三星 復歸 記者會見을 한 임창용.

    2月 애리조나에서 임창용을 만났을 當時, 임창용은 실낱같은 希望을 붙잡고 있었다. 임창용은 招請 選手 身分으로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進入했다. 스프링캠프에 있는 동안 빅리그 로스터에 들어가야 하는 狀況이었다. 스프링캠프에 모인 選手는 모두 66名. 그中 投手는 35名이다. 投手 中 旣存의 메이저리그 選手를 除外하면 남은 選手는 25名. 25名이 비어있는 두 자리를 놓고 熾烈한 競爭을 벌이는 中이었다.

    招請 選手 身分으로 메이저리그 開幕展 25人 로스터에 包含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임창용度 그 事實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或是나’ 하는 期待感이 그를 繼續 刺戟했다. 그러면서도 開幕展 로스터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다른 팀으로 移籍을 해서라도 메이저리그에 남고 싶었다.

    시카고 컵스는 結局 임창용에게 마이너리그行을 通報했다. 하지만 임창용이 마이너리그行을 受容할 수 없다는 態度를 取하자,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三星 라이온즈와 直接 連絡을 取해 높은 移籍料를 받고 임창용을 돌려보내는 方案을 擇했다. 임창용으로선 億丈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三星으로 온 것은 내 意志가 아니었다. 나의 權利를 가진 시카고 컵스에서 放出하자마자 미리 連絡을 取했던 三星으로 돌려보내는 方案을 擇한 것이다. 그것은 移籍料를 챙기는 同時에 메이저리그의 다른 팀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컵스의 確固한 생각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컵스에 甚한 背信感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宿所에서 짐을 챙겨 하루빨리 美國을 떠나야만 했다. 未練과 아쉬움이 많이 남은 스프링캠프였다.”

    임창용은 2012年 12月 契約金 10萬 달러와 함께 시카고 컵스와 2年間 最大 500萬 달러(藥 54億 원)에 스플릿 契約을 맺었다. 팔꿈치 手術을 받고 再活 訓鍊을 하던 임창용은 애리조나 루키리그에서부터 始作해 싱글 A, 하이싱글 A, 더블 A, 트리플 A까지 段階를 밟아 올라갔다. 마이너리그 競技에선 22와 3分의 1이닝 동안 13被安打, 4失點, 平均 自責點 1.61을 記錄했다. 시카고 컵스 球團에서는 擴大 엔트리제가 施行된 2013年 9月 5日 임창용을 메이저리그로 昇格시켰다.

    山戰水戰 다 겪은 1976年生 韓國의 野球選手가 열일곱, 열여덟 살 먹은 選手들을 相對하며 마이너리그를 轉轉한 그 時間은 임창용의 野球社에 津한 자국을 남겼다.

    “마이너리그 팀이 있는 地域이 大部分 都市가 아닌 시골이다. 遠征競技를 하려 移動하려면 直航이 없어 飛行機를 타고 都市로 나왔다가 다시 시골로 向하는 飛行機를 타야 했다. 아이오와 컵스에선 遠征 가려면 無條件 새벽 4時에 出發했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 나름 재미도 있었다. 하이 싱글A가 있는 플로리다에선 쉬는 날 波濤타기를 하며 時間을 보냈다. 한 番은 앨라배마로 遠征을 갔다가 偶然히 韓國 食堂을 發見했는데 3日 동안 蔘鷄湯과 김치찌개 等을 먹으면서 幸福했다. 삶이 참으로 單純해지더라. 野球하고 쉬고 먹고 移動하고…. 美國의 넓은 땅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여러 地域을 돌고 돌았다. 내 人生처럼.”

    루키리그에서 만난 相對 팀의 코치나 監督의 年齡帶가 임창용과 비슷했다고 한다. 임창용이 野球場에 나가면 相對 팀 選手들은 그를 選手가 아닌 코치로 알고 人事를 했다. 日本 리그에서 다섯 시즌을 뛰며, 128세이브와 防禦率 2.09를 記錄한‘미스터 제로’가 루키리그에서 어린 選手들을 相對로 공을 던지는 場面은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目標가 있었기에 그조차 색다름으로 품었고, 새로운 挑戰으로 包裝했다.

    잘못된 契約

    2013年 9月 8日. 임창용은 이날을 決코 잊을 수가 없다.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 마운드에 처음으로 오르며 韓國人으로는 14番째 메이저리거의 誕生을 알렸다. 밀워키戰에서 3-4로 뒤진 7回 秒에 登板, 3分의 2이닝 1被安打 1볼넷 無失點을 記錄했다. 最高 球速은 93마일(150km), 14具를 投球(스트라이크 7個)했다.

    임창용은 이날 등판을 앞두고 當時 에이전트와 시카고 컵스, 그리고 選手가 微妙한 神經戰을 벌였다고 말했다.

    事緣인즉 임창용은 球團과의 2年 契約 中, 1年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면 2年째에는 自動으로 메이저리그에 오르는 것으로 理解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에이전트가 球團과 맺은 契約은 1+1年이었고, 남은 1年은 自動으로 빅리그로 올라가는 게 아닌, 球團의 選擇에 따른다는 內容이었다는 것.

    “루키리그부터 始作해 오로지 한곳만 보고 모든 苦生을 甘受하며 달려왔다. 그리고 빅리그 데뷔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에이전트의 理解할 수 없는 行動으로 인해 빅리그 데뷔에 빨간불이 켜졌고, 球團은 契約書를 提示하며 우리를 壓迫했다.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狀況에서 單 한 番이라도 빅리그 마운드에 서보고 싶은 欲心 때문에 球團의 提案을 따랐고, 球團은 修正된 契約書를 다시 가져와서 그곳에 사인을 하라고 要求했다.”

    임창용은 修正된 契約書에 사인했고, 마침내 9月 8日 밀워키戰에 登板할 수 있었지만, 契約 問題로 마음이 複雜한 터라 메이저리그 데뷔를 마음껏 즐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13年 시즌을 메이저리그에서 마친 임창용은 以後 球團과 마이너리그 契約을 다시 맺었고, 그즈음 當時의 에이전트와 訣別 手順을 밟게 된다. 임창용의 日本行을 도왔던 박유현 氏였다. 5年 넘게 因緣을 맺었지만, 마지막은 서로 傷處만 안은 채 안타까운 離別을 해야 했다.

    선동열과의 不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임창용은 “앞으로도 5年은 거뜬히 選手生活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임창용의 메이저리그 도전사는 12年 前인 2002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창용은 三星 所屬이던 當時 포스팅시스템(非公開 競爭入札)을 거쳐 메이저리그 進出을 노렸다. 하지만 入札金額이 期待에 못 미친 65萬 달러에 그치자 스스로 挑戰을 抛棄했다. 以後 2007年까지 韓國에서 活躍하며 13年間 通算 104勝66敗 168세이브를 記錄했다. 2007年 12月 日本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契約을 맺으며 그의 첫 海外 生活이 始作되었다. 契約 期間은 2年에 球團 옵션 1年이 包含됐고, 年俸은 2008年 30萬 달러로 始作해서 다음 해에는 50萬 달러를 받는, 多少 複雜한 契約을 맺었다. 임창용이 韓國에서보다 적은 金額을 받고 海外 進出을 敢行한 데에는 當時 三星 라이온즈 監督을 맡았던 선동열 監督과의 不和說도 한몫했다.

    “2005年 팔꿈치 痛症을 느끼면서도 팀에서 要求할 때는 핑계 대지 않고 登板했다. 하지만 負傷 탓에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었고, 이런 내 모습에 失望한 선동열 監督이 人情事情없이 엔트리에서 바로 除外하더라. 그래서 바로 美國으로 건너가 LA 조브클리닉의 조브 博士로부터 팔꿈치靭帶接合手術을 받았다. 再活을 겸한 2軍 生活 동안 人生 工夫를 많이 했다. 선 監督이 엔트리에서 除外해주신 德分에 팔꿈치 手術을 받았고, 2軍에 머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苦悶할 수 있었으며, 日本 야쿠르트와 歇값으로라도 契約을 맺은 것이다. 韓國에선 더 以上 내가 설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韓國을 떠나지 못했다면 只今의 임창용度 없었다. 當時 韓國 言論에선 내가 30萬 달러에 야쿠르트와 契約을 맺었다고 하니 걱정과 非難 섞인 記事를 쏟아냈다. 하지만 난 自信 있었다, 實力으로 인정받은 뒤 2年 後에는 더 많은 몸값을 받아낼 自身이. 結局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나.”

    事實이었다. 그는 2年 後에 야쿠르트와 3年, 209億 원의 契約을 맺게 된다. 三星에서 退物 取扱을 받다시피 했던 選手가 日本으로 건너가 2年 만에 200億 원臺의 再契約에 成功했다는 事實은 말 그대로 ‘人生逆轉’이었다.

    임창용은 첫 시즌부터 時速 160㎞에 肉薄하는 强速球로 突風을 일으키며 日本 프로野球 最高의 마무리投手로 발돋움했다. 特히 속謳歌 뱀처럼 휘어 들어온다고 해서 ‘뱀直購’라는 別名까지 얻었다. 日本에서 5시즌 동안 11勝13敗 128세이브 平均 自責點 2.09를 記錄했다. 임창용은 2012年 7月 日本에서 또다시 팔꿈치 靭帶接合手術을 받았다. 그리고 再活 中 메이저리그 挑戰을 宣言했다.

    “異常하게 팔꿈치 手術만 받으면 生活터전을 옮기게 됐다. 三星에서도 手術 後 日本으로 건너갔고, 美國 球團 契約도 日本에서 手術받은 後 맺은 것이다. 모두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할 때 나는 挑戰을 選擇했다. 모두가 反對할 때 난 내 생각을 實行에 옮겼다. 그래서 後悔가 없다. 하지만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 남지 못한 部分은 아쉬움이 크다. 나이가 있기 때문에 재도전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메이저리그 挑戰을 抛棄하거나 斷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三星에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아직은’ 決定하고 싶지 않다는 그이다.

    김응용, 李承燁, 오승환…

    임창용의 野球史에는 決코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이 登場한다. 그中에서 김응용 한화 이글스 監督과 愛憎의 關係로 얽혀 있다.

    1995年 해태(現 KIA)에 入團하면서부터 맺은 因緣이 三星으로 移籍 後 또 다른 因緣으로 이어졌다.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김응용 監督은 해태 時節, 임창용을 꽤 예뻐했다.

    “하와이 轉地訓鍊을 갔을 때 訓鍊 마치고 宿所로 들어가자, 監督님이 나를 불러 세워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손에 쥐여주셨다. 펼쳐보니 100달러 紙幣였다. 間食 사먹으라고 꼬깃꼬깃해진 100달러를 選手들 몰래 쥐여주시는 모습이 낯설고 재밌었다. 그러나 그런 ‘허니문’은 아주 잠깐이었다. 2002年 때였나? 大邱 한화戰에서 8回 降板당한 後 분한 感情을 主體 못하고 더그아웃에 들어와서 글러브를 내팽개치며 監督室 門을 발로 걷어찬 以後부터 監督님과의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던 것 같다.”

    同甲내기이자 三星에서 한솥밥을 먹는 이승엽과는 異常하게 엇갈렸다고 한다. 임창용은 2004年 自由契約選手(FA)가 됐을 때 三星에 “이승엽처럼 100億 원을 달라”는 提案을 했다. 三星이 이승엽을 붙잡기 위해 提示한 몸값 100億 원을 自身도 받고 싶다고 말한 게 큰 話題를 불러일으켰다. 이승엽은 먼저 日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移籍했고, 임창용은 2008年부터 야쿠르트 유니폼을 입고 日本 리그를 누볐다.

    “日本에서 처음으로 승엽이와 맞붙은 날, 마침 競技가 야쿠르트 홈구장에서 열린 터라 승엽이에게 時間 나면 밥이나 먹자고 얘기를 했지만, 以後 승엽이로부터 連絡이 없었다. 그 後로 日本에 있는 내내 승엽이와 만나지 못했다. 승엽이는 ‘國民打者’로 最高의 株價를 올린 狀態였고, 난 問題兒 이미지를 가졌던 터라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들끼리는 아주 親하셨다는 點이다.”

    더욱 흥미로운 事實은 現在 三星에서 이승엽이 치면, 임창용이 틀어막는 構造로 競技가 進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只今은 過去의 語塞함을 털고 親分을 維持하고 있을까. 임창용은 微笑를 지으며 對答을 건너뛴다.

    임창용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後輩는 오승환이다. 오승환도 임창용 얘기만 나오면 가장 尊敬하는 先輩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三星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이어진 因緣은 오승환이 日本으로 넘어가면서 色깔을 더해가고 있다. 오승환은 筆者와의 인터뷰에서 임창용에 對해 이렇게 말했다.

    “窓用이 兄은 投手로서, 人間的인 面에서, 배울 게 많은 先輩다. 나한테는 窓用이 兄이 最高의 投手, 最高의 選手다. 그 兄이 言論親和的인 이미지가 아니어서 大衆的으로 露出되지 않은 部分이 많지만, 實際 그 兄의 참모습을 알게 되면 늪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選手 處地에서 窓用이 兄을 凌駕할 만한 消防手는 없다고 본다.”

    當時 오승환은 日本 韓信 타이거즈와 契約을 맺은 狀態였고, 임창용은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리그 再契約을 맺으며 또 다시 메이저리그 挑戰을 앞둔 狀態였다. 오승환은 임창용이 메이저리그 進出에 成功하길 바랐고, 自身도 언젠가는 메이저리그로 籍을 옮겨 임창용과 멋진 對決을 펼쳐보고 싶다는 속내를 끄집어냈었다.

    임창용은 이와 關聯해 “승환이가 비운 자리를 내가 메우려고 三星으로 온 거 아니냐. 승환이의 돌直球보다는 못하겠지만,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도록 熱心히 던질 覺悟는 돼 있다”고 말했다.

    “隱退하기엔 몸이 아주 싱싱”

    임창용이 外國에서 活躍하는 동안 韓國 프로野球도 變化와 進化를 거듭했다. 임창용度 國內 選手들의 實力이 한層 向上된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投手들의 實力도 뛰어나지만, 打者들이 엄청난 發展을 이룬 것 같다. 잘 맞추는 것은 勿論 파워도 대단하다. 그냥 툭 건드린 것 같은데 홈런이 나오더라. 精神 바짝 차리고 던지지 않으면 크게 얻어맞을 수 있을 것 같다.”

    5月 12日 現在, 임창용은 아홉 競技에서 平均 自責點 0의 行進을 이어갔다. 6세이브 外에 2勝도 챙기면서 오승환의 空白을 完璧히 메웠다. 最高球速 152㎞를 찍으며 只今까지 세 次例의 팔꿈치 手術을 받았다는 걸 믿을 수 없게 했다. 그동안 스피드를 높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 그는 “球速이 조금씩 올라가는 게 第一 반갑다”며 환한 微笑를 보였다.

    그는 目標로 三星의 統合 4連霸 達成을 꼽았다. 自信이 없을 때도 3連霸를 이뤘는데, 올 시즌에 成跡을 내지 못하면 面目이 없을 거란 얘기도 덧붙였다.

    “人生은 速度가 아니라 方向”이라면서 많은 스토리를 만들어낸 임창용. 2002年 結婚에 失敗한 後 只今까지 ‘싱글남’을 固守하고 있지만, 그는 如前히 野球 外的인 部分에는 全혀 關心 없는 모습을 보인다.

    韓國 나이로 39歲인 그에게 隱退와 關聯한 얘기를 꺼내니 이런 對答이 돌아왔다.

    “隱退를 擧論하기엔 몸이 아주 싱싱하다. 只今 狀態로는 5年은 거뜬히 選手 生活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술도 담배도 멀리하며 體力 管理에 精誠을 기울였다. 던질 수 있을 때까진 現役으로 뛰고 싶다. 但, 내 공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뱀直球의 威力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깨끗이 접을 것이다. 그래야 人生이 速度가 아닌 方向이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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