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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人間的인 工藝|新東亞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人間的인 工藝

莞草腸 이상재

  • 글·한경심 │韓國文化評論家 icecreamhan@empas.com 寫眞·박해윤 記者

    入力 2014-05-20 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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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골로 자리와 方席, 容器를 만드는 莞草 工藝는 풀의 色感과 感觸이 그대로 살아 있는 가장 自然스러운 工藝品이다. 特히 小品은 어떤 機構도 없이 사람 손으로만 만든 가장 人間的인 工藝品이기도 하다. 莞草 小品으로 이름난 喬桐島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莞草에 人生을 건 이상재(李祥宰·70) 名匠의 作品은 솜씨가 뛰어날 뿐 아니라 色感이나 形態가 매우 아름다워 單番에 重要無形文化財로 認定받았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이상재는 젊은 時節부터 새로운 形態의 作品을 많이 創作했다. 그는 傳統 技術과 創意性을 兼備한 匠人이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대나무를 쪼개 발을 엮고, 모시풀로 베를 짜는 것도 自然을 우리 삶으로 끌어들인 것이지만 풀로 엮은 器物만큼 自然美를 간직한 것은 없다. 벼를 닮은 왕골 풀로 엮은 莞草 工藝品은 마른 植物 줄기인 짚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自然을 가장 잘 간직한 器物이다. 대나무를 利用한 죽세공품처럼 가볍고 시원한 느낌도 주지만 쓸수록 누레지는 그 빛깔은 참으로 정다워 할머니가 쓰던 物品처럼 鄕愁를 불러일으킨다.

    “한여름 대나무로 만든 자리에 누우면 觸感은 시원하지만 오래 있으면 땀이 車니다. 그런데 왕골은 땀을 吸收해서 늘 爽快하지요. 또 왕골은 溫氣도 保存하기 때문에 겨울에도 차갑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골자리는 四時四철 쓸 수 있습니다.”

    왕골에 對한 自負心을 내보이는 이상재 名匠의 說明이 아니어도 어린 時節 大廳마루에 깔던 왕골 돗자리에 對한 記憶이 다사롭다. 다만 그런 자리가 더위를 식히는 用途로만 쓰인 줄 알았는데, 冷氣도 막아주었다는 事實이 새삼스럽다. 하긴 日本의 다다미度 골풀이나 부들로 만든 것임을 떠올리면 풀로 만든 자리가 四季節用이라는 게 納得이 간다.

    이처럼 왕골을 비롯한 骨, 볏짚, 밀짚 等 모든 植物 줄기로 짠 品目 中 가장 基本이 되는 것은 方席과 바닥에 까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江華島 花紋席이나 寶城의 龍紋席처럼 큰 자리는 발을 짤 때처럼 고드랫돌(失敗 비슷한 器具)을 利用하거나(강화 花紋席), 돗틀을 써서 織物을 짤 때처럼 바디에 끼워서 짠다(돗자리, 寶城 龍紋席). 이에 反해 方席이나 物件을 담아 保管하는 容器인 송동이 같은 比較的 작은 物品은 純全히 손으로만 엮어 完成한다. 이상재 丈人은 큰 자리는 짜지 않고 손으로 만드는 莞草 細工品만 專門으로 해왔다.

    “제 다리가 不便하니 큰 자리는 처음부터 짤 생각을 하지 않고 小品에 注力해왔습니다. 큰 자리는 江華島의 特産品이고 제 故鄕 喬桐島는 莞草 小品이 特産品이니 자연스러운 選擇이기도 하지요.”



    莞草 工藝의 故障 喬桐島

    李商在에게 莞草 工藝는 選擇이자 運命이었던 것 같다. 于先 그는 왕골 小品으로 有名한 喬桐島에서 태어났고, 그가 자라던 때 교동에서는 집집마다 왕골을 엮어 만든 方席이나 자리, 반짇고리, 송동이 等을 부지런히 내다팔았다. 只今은 貴한 自然親和的 工藝品으로 待接받고 있지만 그때는 그저 實生活에 없어서는 안 되는 日常用品이었다.

    “없어서 못 팔 만큼 만드는 족족 팔려나가던 때였지요. 솜씨가 시원찮으면 自己 집에서 쓰고 솜씨 좋게 엮은 것은 팔려나갔고요. 돈이 되니 누구든 이 技術을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의 집도 할아버지를 비롯해 父母 兩親, 위로 두 누이와 男동생까지 모두 왕골을 엮었다. 여느 교동 아이들처럼 그에게 왕골은 자연스럽고 익숙한 環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왕골 엮기가 흔한 일이라 해도 다 좋아할 수는 없는 法이고, 또 솜씨는 제各各이기 마련. 그의 빼어난 솜씨를 생각하면 特別히 才能 있는 핏줄을 타고났을 법하다. 하지만 그의 첫 스승인 어머니는 特別한 솜씨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普通 사람들처럼 副業 삼아 엮어 파는 程度의 솜씨였지요. 아버지도 特別한 솜씨는 아니었고요. 할아버지가 솜씨가 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봤자 담뱃값을 버는 程度였지만요.”

    할아버지 솜씨를 이어받았으니 굳이 핏줄을 따지자면 隔世遺傳의 才能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前에 돌아가셨고, 그는 ‘普通 솜씨’의 어머니에게 基礎를 배웠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별함이 있었다. 初等學校를 卒業하고 本格的으로 왕골 副業에 뛰어든 그의 첫 作品이 썩 잘 나온 데다 今方 팔려나갔으니. 그러나 眞짜 그가 특별한 것은, 自身의 솜씨에 滿足하지 못했다는 點일 것이다.

    “한洞네 사는 喩形式 할아버지가 솜씨가 좋았는데, 어머니에게 付託해서 그분께 배우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普通 솜씨로 만든 作品도 잘 팔리는 마당에 더 나은 實力을 갖추고자 하는 發心과 이 일을 平生의 業으로 삼겠다는 積極的인 選擇이 있었기에, 오늘날 많은 莞草 丈人 가운데 그만이 唯一하게 重要無形文化財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한 面을 만들 때 쉬었다 하면 결이 달라지므로 한 呼吸으로 끝내야 한다. 莞草 工藝는 原形이 大部分인데, 이상재는 四角形 作品을 많이 創作했다.

    3年 만에 競進大會 1等

    그가 왕골作業을 自身의 業으로 積極 받아들이게 된 데는 當時 왕골이 잘나가던 時期였기도 하지만 다리가 不便한 點도 影響을 끼친 것 같다. 두 살 때 小兒痲痹 熱病을 앓은 뒤 그는 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이 일이 제겐 잘 맞았습니다. 하도 오래 앉아서 일하다보니 只今은 몸이 많이 아프지만요.”

    왕골을 배우는 데는 솜씨도 重要하지만 忍耐心이 없으면 견뎌내지 못한다고 한다. 한자리에 진득이 앉아서 한 呼吸으로 해나가야 하는 왕골 엮기는 그의 不便한 다리가 아무런 障礙가 되지 않는 일이었으니, 이 또한 運命인가 싶기도 하다.

    喩形式 할아버지 밑에서 3年 동안 技術을 익히면서 솜씨가 익어갈 무렵, 드디어 그의 솜씨가 빛을 發하는 瞬間을 맞게 된다. 當時 校洞에서는 해마다 왕골競進大會를 열었는데, 그는 이 大會에 參加해 어린 10代의 나이에 堂堂히 1等을 차지했다.

    “柳 할아버지 밑에서 배울 때도 잘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大會에서 1等을 한 것은 저를 公式的으로 認定한 것이잖습니까. 그 뒤로 사람들이 제게 배우러들 많이 왔지요.”

    洞네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왕골 일 하는 게 風習이었던 만큼 사람들은 自然히 솜씨 좋은 그의 周邊에 몰려들었다.

    “處女總角, 새宅까지 모여서 밤에 감도 먹고 無挑 먹으면서 재미나게 作業을 하곤 했습니다. 저한테 어느 程度 배우면 또 自己네끼리 모여 만들기도 했고요.”

    스승이나 弟子라는 槪念 없이 그저 솜씨 좋은 사람 곁에 모여들어 묻고 배워가며 함께 만드는 風俗은 왕골作業이 祕法으로 傳授돼야 하는 獨占的인 技術이나 單純한 돈벌이가 아니라 洞네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方法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有 할아버지에게서 ‘獨立’한다거나 하는 생각도 없었다.

    “제가 사람들을 가르치던 時節에도 제게 不足한 點이 있으면 언제든 할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곤 했습니다. 한洞네 사람인데요 뭐.”

    서로 솜씨는 뽐냈을지언정 다투지 않고 어울려 일하며 또 作品도 잘 팔려나가던 그때, 이상재는 젊었고 幸福했다. 工藝니 藝術이니, 親環境이니 하는 巨創한 말도 없었고 그런 意識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이상재는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神 나던 時節이었으니까. 只今 國家가 認定하고 保護하는 重要無形文化財가 돼 匠人으로서 最高 名譽를 누리고 있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여 젊은 指導者로 살던 그 時節과 比較할 수는 없다. 只今도 한마디씩 寸鐵殺人의 弄談을 던질 줄 아는 그는 往年에는 술도 즐겼다고 하니 젊은 時節엔 風流 넘치는 丈人이었을 것 같다.

    實力과 카리스마를 갖춘 젊은 先生님 곁에는 洞네 處女도 많이 와서 배웠다. 只今 아내인 유선옥 氏도 그에게 배우러 온 學生이었다. 두 사람은 洞네 處女 總角이기도 했지만 한便으로 스승과 弟子 사이기도 한데, 어떻게 사랑이 싹텄을까?

    “열네 살에 처음 배우러 왔으니 그때야 뭘 모르고, 열아홉 살에 눈이 맞아 스물두 살에 結婚했지요.”

    아직도 少女 같은 유선옥 氏는 수줍으면서도 귀여운 印象 그대로 얌전하게 있다가도 말할 때는 才致가 반짝인다. 이런 魅力을 지닌 處女와 實力派 總角 先生은 ‘눈이 맞아’ 1970年 結婚했다. 少女가 女人이 되고, 젊은 스승이 男便이 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로맨틱하다. 스승으로서 李商在가 記憶하는 유선옥 氏는 ‘가르쳤던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弟子’다. 實際로 1999年 傳承工藝大展에서 多科그릇 세트로 大統領賞까지 받은 유선옥 氏는 이상재 莞草醬의 全數敎育助敎이기도 하다. 이 名匠의 作品이 힘과 氣品이 있는 데 비해 유선옥 氏의 作品은 아주 섬세하고 고와서 女子의 솜씨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强化로 돌아오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딸 정민이가 태어나고, 딸이 네 살 되던 무렵인 1970年代 末 이상재는 처음 校洞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江華島에서 齒科를 했던 할머니를 알았는데, 그 딸이 莞草 工藝에 關心이 있다고 紹介를 해주어서 그 따님 되는 분과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교동 애들 열댓 名 데리고 서울 안암동에서 作業을 했지요.”

    이상재 夫婦가 弟子들과 함께 살림집 兼 工房에서 作業을 하면, 물主人 齒科院長 따님은 百貨店에 낸 가게에서 作品을 팔았다. 이 時期 그는 새로운 作品을 많이 創作했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李商在 氏는 本名의 ‘상서로울 上(祥)’ 者를 ‘箱子 上(箱)’으로 바꿔 藝名으로 삼았다.

    “傳統的으로 莞草 小品은 方席과 송동이, 바구니 程度였습니다. 그런데 百貨店에서 팔려니 多樣한 商品이 必要했지요. 그래서 裝飾用 缸아리, 幣帛이나 四柱單子를 넣는 函, 色깔을 넣은 동고리 같은 그릇과 帽子, 구두, 가방 等 여러 作品을 開發하게 됐습니다.”

    교동에 있을 때부터 이상재는 남과는 다른 作品을 늘 새로 선보였고, 다른 사람이 그의 作品을 흉내 내어 그 形式이 퍼지게 되면 그는 또 새로운 것을 創作해내곤 했다. 그와 아내가 만든 作品을 보니 풀로 이런 것도 만들 수 있구나 싶을 程度로 다양하다. 그런데 한창 잘되던 이 事業은 物主가 다른 事業까지 손대는 바람에 困境에 處했고 나중에는 弟子 몇 名만 데리고 釜山에 내려가 作業을 해야 했다.

    “어디서 作業하든 왕골은 江華島 것을 써야 해요. 事實 왕골은 교동 것보다 强化山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 釜山에서 作業하기란 쉽지 않았지요. 釜山에서는 1年도 채 못 있다 올라왔습니다.”

    아이가 네 살 때 떠났던 强化로 돌아온 것은 아이가 일곱 살 되던 해인 1982年. 이番에는 校洞이 아니라 强化邑內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그는 物主도 없이 예전처럼 弟子들을 가르치며 함께 作業해서 팔아야 했다. 그런데 販賣가 漸漸 어려워지기 始作했다.

    “플라스틱이 急速度로 퍼지면서 왕골 小品이 잘 안 팔리게 된 겁니다. 그래도 1980年代까지는 帽子가 잘 나갔는데, 나중에 中國産이 大量으로 들어오면서 中國産에 밀려났죠.”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소파를 들여놓게 됐고, 예전처럼 바닥에 왕골자리나 方席을 잘 깔지 않게 됐다. 物件을 담아 保管하는 송동이度 플라스틱 受納箱子에 자리를 내주게 됐다. 設或 왕골製品을 쓴다 해도 값싼 中國産을 選擇하니, 國産은 販路를 잃고 만 것이다.

    “왕골은 强化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부드럽고 潤이 나고, 耐久性도 强해서 質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國産品은 中國 것과 比較할 수 없이 솜씨가 뛰어나지요. 日本 것은 보지 못해 잘 모르겠지만 왕골자리는 南北交流戰에서 보니 北韓 것이 참 좋더군요.”

    1980年代 末이 되자 正말로 왕골 小品 팔아서 먹고살기 힘들었다. 그가 工藝展에 나서게 된 것도 參加 奬勵金이라도 받아볼 料量에서였다.

    “傳統 工藝니까 參加하면 얼마 나오는 데다 賞을 받으면 賞金도 받을 수 있으니 弟子들 데리고 出品하게 된 거지요.”

    重要無形文化財가 된 오늘날도 形便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의 세련된 作品에 傳統文化 硏究者들은 讚辭를 바치지만 大衆이 알아주지 않으니, 그의 말마따나 “作品 만들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作品으로 먹고 살기가 어려운” 地境에 이르렀다.

    “한番은 어느 記者가 取材해서 記事를 썼는데, 房바닥이 冷골이었다는 內容이 나오더라고요.”

    이 말을 하는 유선옥 氏의 목소리가 참 쓸쓸하다. 그래도 工藝展에 꾸준히 나간 德澤에 ‘참 쉽게’ 文化財가 됐다.

    “우리는 文化財가 뭔지, 그런 데 關心 가질 餘裕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賞도 많이 타고, 弟子도 여럿 기르다보니 郡廳에서 文化財 申請하라고 連絡을 해 와서 한 거예요.”

    다른 工藝 分野에서 文化財, 그것도 國家가 指定하는 重要無形文化財가 되려면 몇 十 年을 기다리기도 하고, 文化財로 選定되기까지 丈人 間에 競爭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재 名將이 無形文化財가 되는 길은 이렇게 저절로 쉽게 열렸다. 그만큼 이 分野에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貴한 日用品

    왕골로 만든 作品이 土俗美 물씬 풍기는 自然親和的인 工藝品인 건 맞지만 예부터 왕골로 만든 器物은 貴한 物品이었다. 特히 자리는 三國時代 記錄부터 朝鮮時代 말 金삿갓의 詩에도 登場할 만큼 오랫동안 王室부터 一般 庶民까지 使用해온 貴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必需品이었다. 풀로 엮은 物品 가운데 記錄上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亦是 바닥이나 卓子, 椅子에 까는 方席과 자리다. ‘三國史記’ 新羅便에 6頭品과 5頭品은 莞草 자리를 쓰되 가장자리는 緋緞과 가죽, 베 等으로 區分한다는 記錄이 나와 있다.

    高麗의 風物을 記錄한 宋나라 徐兢의 ‘高麗圖經’에는 大廳 위에는 緋緞 보료를, 兩쪽 行廊에는 단을 두른 자리를 깔았다는 記錄이 보인다. 또 平牀 위에는 緋緞 보료를 깔고 다시 큰 자리를 깔았으며 椅子에는 푸른色 단을 두른 자리를 깐다고 했으니, 果然 工藝家 꽃피던 考慮답게 다양하고 華麗한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特히 땅에도 자리를 깔았고 자리의 테두리 段은 靑瓷色을 主로 썼다는 記錄이 보여 興味롭다.

    자리에 꽃무늬를 새긴 花紋席과 採石(色깔이 있는 자리)은 이미 高麗時代에도 있었는지 元나라와 明나라에 보낸 記錄(‘高麗史’)이 있다. 花紋席으로 有名한 江華島에서 언제부터 자리를 集中的으로 짰는지는 明確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高麗 王室이 江華島로 건너왔을 때부터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朝鮮時代로 들어오면서 자리를 만드는 일은 全國的으로 퍼졌고 種類도 한결 다양해졌다. 各 道에서 바친 자리가 5000張이 넘는다는 記錄(‘世宗實錄’)과 함께 雜菜花紋席(여러 色깔의 꽃文樣을 넣은 자리)과 滿花方席(여러 꽃文樣으로 가득 채운 方席)에 花紋席, 龍紋席(用을 수놓은 자리), 文樣이 없는 白紋席 等 자리類가 매우 다양하게 發展했고, 地方마다 特産品으로 내놓은 자리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莞草 製品이 地方마다 달리 發展하게 된 것은 그 地方에서 잘 자라는 골풀이나 부들, 왕골 等을 골라서 쓰고, 作品에 따라 씨실로 選擇하는 種類나 處理하는 過程도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인간적인 공예

    거북 模樣으로 엮은 그릇은 旣存 송동이 箱子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풀마다 色깔이 若干씩 差異가 나기 때문에 풀을 골라 쓸 수 있지요. 흰色을 낼 때는 바닷가에서 나는 馬鈴풀(풀피리 부는 풀)을 썼어요.”

    特히 씨실은 三으로 만든 어저귀나 칡에서 나온 청올치 等을 쓰기도 하고 요즘에는 面이나 종이를 꼬아서 쓰기도 하지만 이상재 丈人은 언제나 씨실 날실 모두 왕골을 쓴다. 다만 날실은 꼬아 써야 完成했을 때 彈力性이 생겨 잘 망가지지 않게 된다.

    왕골은 漢字로는 主로 莞草(莞草), 현완(懸莞), 석룡初(石龍草) 等으로 記錄하고 골풀은 龍鬚草(龍의 鬚髥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燈心草(줄기 속을 말려 等 心지로도 썼다) 等으로 記錄했는데, 자주 混同을 일으키며 正確히 어떤 풀을 가리키는지 確實치 않다. 다만 高級 자리로 쳤던 등메(또는 등매라고도 한다)는 龍鬚草로 짜서 數를 놓고 部들로 뒤를 댄 것이 남아 있다.

    “柳 할아버지 때만 해도 花紋席은 왕골로 짰지만 小品은 골풀로 짰습니다. 골풀은 거칠지만 물들이기가 쉽고, 왕골은 부드럽지만 天然染色이 잘 안 돼 化學染料를 써야 해요. 제가 어릴 때 이미 왕골로 바뀌기 始作했습니다.”

    “힘들다 생각하면 끝이 없고…”

    小品까지 材料가 왕골로 바뀐 것은 아마 化學染料가 나오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 골풀로 많이 짰던 것은 왕골처럼 栽培할 必要 없이 아무 데서나 잘 자라던 것을 그냥 뽑아 쓰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골을 쓰기 始作하면서 왕골 栽培에 注力하자 골풀은 漸次 사라지게 됐다. 한便 왕골 小品은 안팎을 같이 짜서 두 겹으로 만드는데, 예전에는 안쪽에 들어가는 것은 輿梁이라는 풀로 짰다고 한다.

    “輿梁은 거무튀튀한 빛을 냅니다. 한番은 왕골 小品을 좋아하는 西洋 神父님이 안쪽도 왕골로 하라고 힌트를 주셔서 제가 왕골로 하기 始作했지요. 只今은 모두 안도 왕골로 엮게 됐습니다.”

    江華에 와 있던 西洋 新婦들은 왕골 小品의 아름다움에 일찍이 눈을 떠 많이 收集해갔다고 한다.

    莞草 工藝는 只今 轉換期를 맞은 것 같다. 한창 잘나가던 時節에 비하면 돈이 되지 않지만, 이것이 貴한 것이라는 名譽는 얻었다. 하지만 아직은 專門家나 몇몇 눈 밝은 멋쟁이의 사랑만 받고 있을 뿐이다. 先進國에서는 털실이나 짚으로 만든 自然親和的인 옷과 帽子, 裝身具 等이 脚光을 받고 브랜드로 자리를 잡아가는 中이니 莞草 工藝도 앞으로 再發見되는 時代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일찍이 이상재의 作品에 눈길을 주는 이도 있었다.

    “英國에서 展示할 作品을 고르려고 온 英國人이 빛바랜 것들을 다 골라가더군요. 또 日本 사람들은 매끈하게 만든 것보다 우리 딸이 서투른 듯 자유롭게 만든 作品을 다 사갑니다.”

    딸 정민이의 作品은 보면 저절로 微笑가 나올 만큼 귀엽고 天眞한 데가 있다. 實生活에 쓰이는 工藝品이라기보다 보고 즐기는 藝術品으로서 더 可能性이 보이는 作品이다.

    “정민이는 한番 始作하면 지나치게 沒頭하는 性格 때문에 요즘엔 하지 말라고 말리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帽子와 가방은 英國 貴族이 쓰고 들면 꼭 알맞을 그런 品格이 있다. 女子로 치면 今方 눈길이 가는 華麗하고 세련된 女子라기보다 조용하게 앉아 있는 貴婦人 같다고나 할까. 그의 作品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우리가 그 貴婦人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疑問이 든다. 한때 이상재의 技術을 배우려고 男女老少 몰려들어 북적이던 그의 집은 이제 너무 조용한 게 아닌가 여길 무렵 하나둘 弟子가 모여들었다. 다만 이제는 가장 어린 사람이 마흔아홉 살일 程度로 나이 많은 弟子들이다. 그것도 죄다 女子들뿐이다.

    “돈이 안되니 젊은 사람, 男子들이 배우러 오질 않아요. 처음에는 젊은 女子들이 오더니 이제는 나이 든 女子만 오는군요. 그래도 큰 자리를 짜는 先生님과 比較하면 제가 나은 便이랍니다. 先生님 弟子들은 60代가 젊은 軸이라고 하니까요.”

    그의 弟子들은 이상재 匠人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선옥 氏와 함께 커피도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쉴 새 없이 손을 놀려 熱心히 만든다. 유선옥 氏는 말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고…. 多幸히 왕골 일을 하다보면 하루 이틀 날 새기가 일쑤일 만큼 생각을 잊게 됩니다.”

    비록 다른 文化財 匠人처럼 專修館 같은 것은 없지만 平生 自身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이 들어서까지 弟子들과 어울려 사는 것만으로도 썩 괜찮은 人生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잊고 있던 貴婦人을 더는 모른 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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