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방울 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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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
會社名 쌍방울
設立 鳶島 1990年
解體 鳶島 2000年
마스코트 방울이
所屬 리그
韓國野球委員會
韓國프로野球
홈 球場
錢主野球場 (1990年~1999年) (본 球場)
群山野球場 (1990年~1999年) (第2球場)
收容 人員 10,000名( 全州 )(본 球場)
12,000名( 群山 ) (第 2球場)
緣故地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1990年~1999年)
永久 缺番
歷代 타이틀
成績(타이틀 以外)
플레이오프 (1回) (굵은 글씨는 勝利한 해)
1996
準플레이오프 (1回) (굵은 글씨는 勝利한 해)
1997
球團 組織
유니폼
遠征

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는 大韓民國 全羅北道 를 緣故地로 한 프로 野球팀 이었다. KBO 所屬으로, 전주종합경기장 野球場 月明綜合競技場 野球場 을 홈 球場으로 使用했다.

1990年 3月 31日 에 球團이 創團된 後, 1990年 5月 11日 프로 2軍 리그(現 KBO 퓨처스리그) 에서 始作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991年 시즌부터 1軍 正規리그 競技에 參加했다. 每年 下位圈을 맴돌았으나, 김성근 監督이 赴任한 以後에는 1996年 正規시즌 2位, 1997年 에 正規시즌 3位를 記錄하면서 포스트 시즌에 進出하였다.

弱팀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겨 내면서 徐徐히 강팀으로 變貌하고 있을 즈음에 IMF 事態 를 맞게 되었다. 經濟 危機의 餘波로 인하여 母企業인 쌍방울그룹 이 財政難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 그룹 所有인 무주리조트 가 位置한 無主가 冬季올림픽 誘致를 念頭에 두고 1997年 冬季유니버시아드를 開催하여 무주리조트 에 大大的인 投資를 한 것이 禍根이 되었다. [1]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 亦是 極甚한 財政難을 겪게 되었으며, 1997年 10月 15日 에 母企業인 쌍방울그룹이 不渡가 났다. 이때 以後 主軸 選手들을 現金 트레이드하는 惡循環이 發生했다. 1998年부터 돈度없는 힘든 球團 事情으로 成績은 最下位圈에 머물렀다. 이에 眞正한 팬들이 힘을 모아 野球 最初의 서포터를 結成한다. 最初의 野球 서포터 포에버 레이더스는 全州大學校 在學生이었던 여용구를 筆頭로 約 100餘 名의 骨髓 팬들이 홈?遠征을 가리지 않고 競技場을 찾아 힘든 時節을 겪는 選手들에게 큰힘을 보태었다.

그러나 팬들의 바람에도 結局 쌍방울 레이더스는 2000年 1月 7日 에 解體되었고, 旣存 選手團과 코칭스태프, 新人 指名權은 SK 와이번스 에 引繼되었는데 1999年 김준환 監督 代行이 쌍방울 正式 監督으로 赴任한 過程에서 [2] 코치로 赴任했지만 팀이 2000年 1月 解體된 後 새로 創團된 SK 와이번스 에서 코칭 스태프를 歷任한 함학수 , 김성현 , 박철우 코치와 강병철 監督이 SK 初代 監督으로 赴任하면서 이 팀 首席코치를 맡은 김준환 코치가 2000年 말 '쌍방울 色 지우기' 프로젝트에 따라 [3] 팀을 떠나야 했으며 이들 뿐 아니라 앞서 言及한 것처럼 1999年 김준환 監督 代行이 쌍방울 正式 監督으로 赴任한 過程에서 코치로 赴任했으나 [4] 팀이 2000年 1月 解體된 後 새로 創團된 SK 와이번스 에서 코칭스태프를 歷任한 이건열 코치와 旣存 쌍방울 레이더스 코치 出身인 박상열 , 김만후 코치가 解雇됐고 以外에도 쌍방울에서 그대로 받은 選手들 爲主로 大大的인 構造 整理가 斷行됐다. 쌍방울은 1999年 8月 會社 整理 節次 人家가 決定되었고 大韓電線 系列로 넘어가 "트라이 브랜즈"라는 이름으로 變更했으나 다시 쌍방울로 還元되었다.

그 以後 쌍방울 레이더스의 緣故地였던 全北特別自治道 는 無緣故 地域이었으나 2001年 KIA 타이거즈 에 返還되었고, 그 해 以後부터 每年 2001年부터 2013年까지 群山市 에서 競技를 치렀는데 2002年 에는 微弱한 競技場 事情과 적은 收益, 2003年 에는 全國體典 關係로 [5] 프로野球 競技가 開催되지 않았으며 그 以後 2006年 부터 2008年 까지는 球場 改補修 關係로 3年 동안 프로野球 競技가 열리지 않았다.

通算 成跡은 10시즌, 1202競技 490勝 674敗 38無, 勝率 0.420이었다.

球團 歷史 [ 編輯 ]

創團과 프로리그 參加 [ 編輯 ]

韓國野球委員會 1989年 에 新生팀 '第8球團' 創團을 決意하고 希望 企業을 選定하게 된다. 新生팀의 緣故地는 全北特別自治道 地域으로, 홈 競技場은 全州 野球場 으로 하였다. 創團 過程에서 全北特別自治道 緣故權은 當時 全羅道 地域 緣故팀이었던 해태 타이거즈 로부터 購入하였다. 本來 創團 過程에서는 쌍방울그룹과 大象그룹 의 컨소시엄 形態로 創團을 推進했으나, 後日 對象그룹이 創團 過程에서 빠지게 되었으며 쌍방울은 프로野球團 創團에 앞서 1983年 프로蹴球 出帆 後 對象 금호아시아나 해태 等 여러 湖南地域 企業과 함께 몇 次例 湖南 프로축구팀 創團에 挑戰했지만 [6] [7] 財政的인 理由 때문에 [8] 失敗했다. 1990年 創團 當時 1年間은 2軍 리그에서 競技를 치렀고, 1991年 부터 正式 프로 野球 팀으로 昇格되어 1軍 正規 리그에 參加하게 되었다.

1991年 ~ 1995年 [ 編輯 ]

新生 創團 팀 쌍방울 레이더스는 大株主 母企業의 規模가 작았기에 野球團 運營에 痼疾的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8個球團 팀들과 戰力을 比較하면 選手陣이 얇았었다. 쌍방울 球團은 新生 創團된 팀으로 選手들이 不足한데다 資金力이 탄탄한 便이 아니었고, 緣故地인 全北特別自治道 地域 亦是 그렇게 優秀한 팜이 아니었기 때문에 主로 他 팀에서 全盛期가 지난 選手들을 많이 迎入해서 效果的으로 利用했었다. 特히 해태 타이거즈에서 選手들이 쌍방울로 많이들 넘어왔다. 이 時期에 쌍방울은 해태 타이거즈의 작은집으로 불렸지만 成跡은 每年 下位圈으로 아쉬웠다. 한便, 1989年 11月 14日 3年 契約으로 赴任했던 [9] 김인식 創團 監督이 1991年 말 球團主 代行 兼 쌍방울 副會長으로 就任한 [10] 이용일 前 KBO 總裁特報와의 摩擦 뿐 아니라 3年 契約 終了로 自然스럽게 물러난 뒤 利用日 球團主 代行처럼 [11] 所謂 '日本通'이었던 신용균 監督이 3年 契約 形式으로 赴任했지만 [12] 外國人 選手 迎入 過程에서 本人(신용균)과 달리 所謂 '美國通'이었던 한동화 코치와 不和를 보여 [13] 結局 1年 만에 解任됐고 한동화 코치가 2年 契約 形式으로 [14] 監督 昇格했다. 하지만, 한동화 監督은 自身과 똑같은 '美國通'이었던 김인식 創團 監督이 그랬던 것처럼 所謂 '日本通'인 利用日 球團主 代行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結局 1995年 시즌 連霸를 反復하여 途中下車했다 [15] .

1996年 ~ 1999年 [ 編輯 ]

每年 下位圈 팀으로 分類되었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年 김성근 李 監督으로 赴任하면서 팀의 雰圍氣가 完全히 달라지게 된다. 監督으로 赴任한 김성근 의 指導 下에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6年 正規 시즌 2位를 記錄하여 突風을 일으켜 創團 첫 플레이오프에 進出하였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 를 맞아 5次戰 接戰 끝에 2勝 3敗로 憤敗하였다. 그 다음 해 1997年 쌍방울 레이더스는 正規 시즌 3位를 記錄하여 1996年 시즌이 決코 偶然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다만, 준 플레이오프에서 三星 라이온즈 를 만나 敗해 4位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지만, 1996年 1997年 시즌 成跡을 놓고 보면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은 旣存의 弱팀의 이미지에서 강팀으로 變貌해 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97年 12月, IMF 事態 가 터지면서 母企業이 深刻한 財政難에 빠지게 되자,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 亦是 餘波를 미치게 되어 球團을 維持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財政難을 深刻하게 겪으면서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은 球團을 正常的으로 運營하기 위해 極端的으로 核心 選手들을 相對로 '選手 팔기' 作業을 始作하게 된다. 이 무렵 1次 指名하였던 圓光大 投手 조진호 는 結局 보스턴 레드삭스 에 入團하였다. 結局 1998年 박경완 조규제 현대 유니콘스 로, 1999年 시즌 前에는 김기태 김현욱 三星 라이온즈 에 現金 트레이드로 移籍하는 等 쌍방울 레이더스 核心 選手들 大部分이 이러한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의 極端的인 '選手 팔기' 作業에 依해 팀을 떠남으로써 球團의 前歷은 바닥을 치게 된다. 1998年 시즌 中에는 在日同胞 外野手 김실 OB 베어스 로 트레이드했다. [16] 이와 함께, 1998年 시즌 中에는 한때 左腕 에이스였던 박성기 롯데 자이언츠 로 트레이드했는데 다음 해 한화 이글스 로 移籍한 뒤 그 해 韓國시리즈 優勝을 經驗한 바 있었지만 같은 해 시즌 後 隱退했었다.

1998年 부터 外國人 選手 制度가 導入되자, 쌍방울 레이더스의 野球團 運營은 더욱 苛酷해지는데, 비싼 돈을 주고 選手를 쓸 수 없었고 中道 退出되어도 마땅히 代替 選手를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8年 에는 外國人 選手를 迎入하지 않았다. 이 시즌에는 김기태 , 崔泰源 , 조원우 , 김원형 等이 活躍하여 正規 시즌 6位로 마쳤다.

1999年 이 되어 狀況은 날이 갈수록 惡化되어만 갔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1999年 에 제이크 비아노, 傳해 LG 트윈스 에서 마무리로 뛰었던 마이클 앤더슨 等 投手 傭兵 選手를 迎入하였지만, 이들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劣惡한 施設 環境과 김성근 監督의 訓鍊量에 못 따라가 시즌 6點臺 防禦率을 記錄하는 等 極甚한 不振을 보여 中途 下車했다. 1999年 드래프트에서는 一部 大學 進學者를 除外한 高卒 選手들의 指名을 抛棄하고, 2次 1順位로 指名한 한양대학교 投手 라荊榛 三星 라이온즈 에 指名權을 讓渡했으며, 1次 指名者인 군산상고 이진영 萬 契約했을 程度였다. 2000年 新人 드래프트에서 이승호 엄정욱 等을 指名하지만, 2次 1順位로 指名한 投手 마일영 의 指名權을 현대 유니콘스 에게 賣却할 程度였다. 球團 代株主였던 母企業인 쌍방울이 事實上 팀 運營을 할 수 없게 되면서 KBO 에 依한 委託 管理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投打의 核心 選手들이 每年 現金 트레이드 等으로 팀을 떠났기에 結局 貧弱한 選手層으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고 前年度 시즌 뒤 2年 재계약한 [17] 김성근 監督마저 올스타戰이 끝난 날 成績 不振에 따른 雰圍氣 刷新을 理由로 解任되면서 김준환 首席코치가 監督으로 昇格되어 팀을 맡지만 1999年 시즌 單一 시즌 最多 牌 記錄인 97敗(28勝 7無)를 記錄하면서 마지막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기타 [ 編輯 ]

쌍방울 레이더스가 連續 17勝을 하는 理由가 遠征팀이 호텔에 머무른 곳에 鬼神이 存在해서 遠征팀들의 기운과 소름을 끼쳤다고 한다. 이에 쌍방울 레이더스가 大勝을 했다고 한다 [18] . 그리고 1996年 KBO 포스트시즌 홈구장 1~2次戰에도 현대 유니콘스 를 連續 이겼다, 하지만 遠征으로 移動할 때에는 3敗를 當하여 탈락했다. 第一 먼저 OB 베어스 가 全州코아호텔에서 겪었다고 하고, 그 後에는 현대 유니콘스 도 같은 場所 코아호텔에서 이 經驗을 겪었다고 한다.

SK 와이번스 와의 聯關性 論難 [ 編輯 ]

IMF 餘波로 極甚한 財政難을 겪어야만 했던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은 1998年 부터 主軸 選手들을 現金 트레이드를 통해 '選手 팔기' 式으로 근근히 命脈을 維持하게 된다. 마지막 해였던 1999年 에는 新人 指名者들 中 1次 指名한 群山商業高等學校 外野手 이진영 萬 契約하고 2次 1順位로 指名한 한양대학교 投手 라荊榛 三星 라이온즈 에 指名權을 讓渡하였으며, 다른 選手들 中 몇몇 大學 進學 選手들을 除外한 高卒 指名 選手들과는 契約하지 않을 程度로 運營難을 보였다. 1999年 7月 16日 이의철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主가 박용오 KBO 總裁와의 祕密 會談에서 最初로 賣却 意思를 밝힌다.

하지만 賣却 協商은 遲遲不進하여 進展이 없었고, 結局 1999年 11月 16日 , 쌍방울 레이더스 金鍾哲 新任 球團主는 박용오 KBO 總裁와의 會談에서 ' 2000年 시즌 팀을 꾸려 나갈 能力이 없다'고 最初로 밝힌다.

이때, 프로 野球團에 關心을 보인 SK그룹 은 쌍방울과의 協商을 徹底히 排除하고, KBO 와 接觸하며 쌍방울 레이더스 球團의 引受가 아닌 새로운 球團의 創團으로 프로野球界에 뛰어들 計劃을 갖는다. 法定 管理 中인 쌍방울 立場에서는 野球團을 넘기는 引受 條件으로 最大限 많은 金額을 받아 내길 願했지만, SK그룹 은 反對 立場이었다. 自動的으로 退出되는 쌍방울과 만날 理由가 없는 까닭이었다. 卽, SK그룹 은 쌍방울이 自動으로 退出되는 2000年 2月 12日 까지 기다렸다가, 새로운 팀 創團의 手順을 밟는다는 것이 當時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兩쪽 다 팽팽하게 '줄다리기'式으로 賣却 當事者들은 버티기만 했었다.

結局, 쌍방울은 얼마 못 가 2000年 1月 7日 解體를 宣言하고, SK그룹 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 SK그룹 이 프로野球에 參與할 것을 積極的으로 考慮하고 있다'고 公式的으로 밝히게 된다.

以後 쌍방울 레이더스는 解體되었고, SK는 引受가 아닌 새 팀의 創團으로 레이더스의 자리를 代身하게 되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歷史 속으로 사라졌고, 解體 後 再創團이라는 過程을 거친 SK 와이번스 는 當時 현대 유니콘스 가 緣故地를 移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緣故地를 仁川廣域市 로 移轉하면서 새로운 仁川 緣故 球團으로 獨自的인 歷史를 始作하였다. 이 過程은 後날 히어로즈 의 創團 過程과도 깊은 聯關이 있다. 히어로즈 또한 현대 유니콘스 解體 後 再創團의 過程을 거쳐 現代와 히어로즈의 連結고리를 끊고, 現代家 KBO 에 運營 資金으로 진 빚 131億을 갚지 않을 名分을 얻게 되고 歷史的으로 完全히 새로운 팀으로 變貌하게 된다.

主要 記錄 [ 編輯 ]

鳶島 順位 게임數 勝率 備考
1990 1位 62 35 8 19 0.648 2軍리그 優勝
1991 6位 126 52 3 71 0.425 1軍리그 첫해
1992 8位 126 41 1 84 0.329
1993 7位 126 43 5 78 0.361
1994 8位 126 47 5 74 0.393
1995 8位 126 45 3 78 0.369
1996 2位 126 70 2 54 0.563
1997 3位 126 71 2 53 0.571
1998 6位 126 58 2 66 0.468
1999 8位 132 28 7 97 0.224
10시즌 1202 490 38 674 0.420
  • 페넌트레이스 및 韓國시리즈 優勝 回數 :

通算 記錄 [ 編輯 ]

鳶島 팀명 順位 勝率 포스트 시즌 首相 選手 監督
1991 쌍방울 6位 52 3 71 0.425 조규제 (神) 김인식
1992 8位 41 1 84 0.329
1993 7位 43 5 78 0.361 신용균
1994 8位 47 5 74 0.393 한동화
1995 8位 45 3 78 0.369 한동화
김우열
1996 3位 70 2 54 0.563 * 플레이오프 : 現代 前 2-3 牌 김성근
1997 3位 71 2 53 0.571 * 準플레이오프 : 三星 前 1-2 牌
1998 6位 58 2 66 0.468
1999 매직 4位 28 7 97 0.224 김성근
김준환
쌍방울 레이더스 9시즌 455 30 655

歷代 監督 [ 編輯 ]

臺數 이름 就任 退任
1代 김인식 1990年 1992年
2代 신용균 1993年 1993年
3代 한동화 1994年 1995年
4大 김우열 1995年 1995年
5大 김성근 1996年 1999年
6大 김준환 1999年 1999年

歷代 選手 [ 編輯 ]

쌍방울 레이더스의 1先發 投手 [ 編輯 ]

쌍방울 레이더스의 必勝組 불펜 [ 編輯 ]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무리 投手 [ 編輯 ]

歷代 外國人 選手 [ 編輯 ]

1999年

韓國 프로 野球上 受賞者 [ 編輯 ]

쌍방울 레이더스는 韓國 프로 野球 最優秀 選手 를 한 名도 排出하지 못했고, 1991年 投手 조규제 가 最優秀 新人賞을 받았다.

歷代 個人 記錄 受賞者(投手 部門) [ 編輯 ]

多勝 [ 編輯 ]

平均自責點(自責點) [ 編輯 ]

  • 年度 選手 이닝 - 自責 - 平均自責點
  • 1997年 김현욱 157 2/3 - 33 - 1.88

最多 세이브 포인트(세이브+救援勝) [ 編輯 ]

最多 세이브(救援勝 除外) [ 編輯 ]

歷代 個人 記錄 受賞者(他者 部門) [ 編輯 ]

守衛 타자(타율1위) [ 編輯 ]

  • 1995年 김광림 419打數 141安打 打率 0.337
  • 1997年 김기태 390打數 134安打 打率 0.344

最多 安打 [ 編輯 ]

最多 홈런 [ 編輯 ]

最高 長打率 [ 編輯 ]

最高 出壘率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정희준 (2007年 7月 18日). “平昌 올림픽, 죽지도 않고 또 오려고?” . 프레시안 . 2020年 3月 25日에 確認함 .  
  2. 백기곤 (1999年 12月 9日). “김준환 監督 等 코치陣 確定 쌍방울 레이더스” . 全北日報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 천병혁 (2000年 10月 19日). “<프로野球消息> SK, 코칭스태프 大改編” . 聯合뉴스 . 2020年 2月 29日에 確認함 .  
  4. 백기곤 (1999年 12月 9日). “김준환監督等 코치陣 確定 쌍방울레이더스” . 全北日報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 體典取材班 (2003年 10月 13日). “◇來日의 全國體典(14日)” . 聯合뉴스 . 2018年 9月 13日에 確認함 .  
  6. “第7醫팀「쌍방울」創團채비 스카우트나서” . 東亞日報. 1984年 9月 5日 . 2019年 9月 3日에 確認함 .  
  7. “프로蹴球 湖南(湖南)팀 創團(創團)” . 京鄕新聞. 1987年 9月 26日 . 2019年 9月 3日에 確認함 .  
  8. “湖南(湖南)軟膏 프로蹴球팀 推進” . 東亞日報. 1990年 8月 18日 . 2019年 9月 3日에 確認함 .  
  9. “스포츠 揭示板” . 朝鮮日報. 1989年 11月 15日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0. 聯合 (1991年 11月 16日). “李容一 KBO總裁特報, 쌍방울 副會長 迎入” . 聯合뉴스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1. 여현호 (1993年 8月 10日). “韓國體育 이대로 좋은가 (58) 프로選手 빛과 그늘〈9〉툭하면 解任'파리목숨'監督” . 한겨레新聞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2. “스포츠 揭示板” . 朝鮮日報. 1992年 9月 26日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3. 김경윤 (2015年 7月 31日). “[施工超越 라이벌]쌍방울 VS 韓華, 萬年 꼴찌 脫出記” . 스포츠서울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4. ““쌍방울 10連霸 不振 責任져라”” . 중도일보. 1995年 5月 17日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5. ““쌍방울 10連霸 不振 責任져라”” . 중도일보. 1995年 5月 17日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6. 장원삼 내준 히어로즈, 그리고 쌍방울 - OSEN
  17. 聯合 (1998年 10月 23日). “<프로野球> 쌍방울, 金聲根監督과 再契約” . 聯合뉴스 . 2020年 5月 28日에 確認함 .  
  18. 鬼神을 目擊하는 野球選手들, 그 기막힌 이야기!20191222 2019.12.22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