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康錦實,
1957年
2月 12日
~ )은
大韓民國
第55代 法務部 長官을 지낸
法曹人
이다.
1981年
第23回
司法試驗
에 合格하였고,
1983年
부터
1995年
까지
判事
로 在職하였다.
서울
地域 첫 女性 刑事 單獨判事였다.
1996年
부터 辯護士 生活을 하였고 人權辯護士의 길을 걸었다.
2003年
2月에
노무현 政府
첫
法務部
長官으로 拔擢되었다.
[2]
그女는 첫 女性 法務法人 代表, 첫 女性
民辯
副會長, 첫 女性
法務部
長官이라는 象徵性이 있다.
[2]
生涯
[
編輯
]
1957年
2月 12日
濟州道
에서 태어났다.
京畿女子高等學校
卒業
을 거쳐,
서울大學校
法學科를
學士
學位했다.
1984年
結婚
했고
2000年
離婚
했다.
강금실의 아버지 강계돈(康季敦)은 容共造作 事件으로 有名한 '維持(有志) 事件'의 代表的인 犧牲者로 알려져 있다. 維持 事件은
1950年
8月 初旬 濟州地域 法院長, 檢事長, 辯護士, 事業家, 敎育者, 濟州邑長 等 16名의 地域有志級 人士들이 人民軍歡迎準備委員會를 結成했다는 嫌疑로 濟州地域 戒嚴司令部로 連行된 代表的 事件이다. 當時
濟州農業高等學校
校監이었던 강계돈은 誣告 嫌疑로 拘束되어
1951年
4月에 열린 釜山地方法院 公判에서 懲役 2年을 宣告받았다가 1951年 11月 大邱高等法院에 抗訴한 끝에
1952年
1月 15日
無罪로 풀려났다. 이 事件은 後날 戒嚴司令部(濟州島 海兵隊 情報參謀室)가 容共造作한 事件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 事件으로 강금실의 家族은 濟州島를 떠나 陸地에 나가게 되었다.
[3]
1981年
第23回
司法試驗
에 合格하였다.
1983年
부터
1995年
까지 判事로 在職하였다.
1993年
第3次
司法波動
에 參與하여 少壯 判事들과 함께 司法府의 反省과 改革을 促求하는 建議書를 大法院長에게 傳達하였다.
서울高等法院 判事를 끝으로 判事職에서 물러났고
1996年
부터 辯護士 生活을 始作하였으며 人權辯護士의 길을 걸었다.
[4]
[2]
2000年
부터
2006年
까지
法務法人 地平
의 代表 辯護士로,
2001年
부터
2003年
까지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의 副會長으로 活動하였다.
2003年
參與政府
에서 第55代
法務部
長官으로 任命되어 大韓民國 最初의 女性 法務部 長官이 되었다. 當時 40代中盤인 46歲에 立脚하며 話題가 되었다. 長官으로 在職하면서 改革的인 業務 推進과 潑剌한 言辭로 注目을 한몸에 받았다.
[5]
또 꼭짓點 댄스를 잘 춰 '江효리'라는 別名을 얻었다.
2004年
第17代 國會議員 總選擧
에서
열린우리당
側의 出馬 勸誘가 있었으나 물리치고 長官職을 繼續 遂行했다.
法務部 長官 辭職 後 다시 辯護士로 活動하다가,
2006年
第4回 地方 選擧
에서 열린우리당 公薦으로
서울 市長
에 出馬하였으나
한나라黨
의
吳世勳
候補에 밀려 落選하였다.
서울 市長 落選 後 政界를 暫時 떠나 法務法人 <우일아이비氏>의 顧問 辯護士 兼
外交通商部
女性人權大使로 活動하였다.
2007年
第17代 大統領 選擧 및
2008年
第18代 國會議員 總選擧에서 各各 統合新黨과 統合민주당의 選對委員長으로 活動했다. 以後
法務法人 원
의 構成員 辯護士로, 韓國人權財團의 理事로 活動하였다.
2014年
6·4 地方選擧
에서
새政治民主聯合
최문순
이 第37代 江原道知事로 選出되는 데 寄與하였다.
[6]
法務法人 원
顧問 辯護士로서 서울에서 活動하다가 該當 로펌이 濟州島에서 公益的 法律서비스를 펼치고자 濟州 分事務所를 開所하면서 活動 領域을 濟州島로 擴張하였다. 康錦實은 濟州道辯護士會 會長을 맡고 있는 문성윤 辯護士와 함께
法務法人 원
濟州 分事務所를 이끌었다.
[3]
學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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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經歷
[
編輯
]
- 1981年
第23回
司法試驗
合格
- 1983年
서울地方法院 南部支院 判事
- 1985年
서울家庭法院 判事
- 1987年
서울民事地方法院 判事
- 1988年
釜山地方法院 判事
- 1990年
서울北部地方法院 判事
- 1992年
서울民事地方法院 判事
- 1994年
서울高等法院 判事
- 2000年
國務總理 行政審判委員會
- 2000年 ~
2003年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副會長
- 2003年 2月 ~
2004年
7月 第55代
法務部
長官
- 2004年 10月
法務法人 地平
代表 辯護士
- 2006年
8月 外交通商部 女性人權大使
- 2006年 10月 ~ 2008年 7月 法務法人 <우일아이비氏> 顧問 辯護士
- 2008年
1月 ~ 2008年 2月
大統合民主新黨
最高委員
- 2008年 2月 統合민주당 最高委員
- 2008年 3月 統合민주당 選擧對策委員會 委員長
- 2008年 ~ 2018年
法務法人 원
顧問 辯護士
- 2013年 ~ 中華人民共和國 黑龍江省 치치하얼시人民政府 特別顧問
- 2014年 ~ 延邊朝鮮自治州 經濟特別顧問
- 2015年 ~ 地球와사람 代表
- 더불어民主黨
法律行政特任拷問
- 2018年 ~ 社團法人 선 理事長
- 2018年 ~
法務法人 원
代表辯護士
- 2019年 ~ 東아시아鐵道共同體포럼 運營委員
- 2019年 ~ 國家氣候環境會議 諮問委員
- 2020年 ~ 江原文化財團 理事長
- 2021年 ~ 더불어民主黨 南北高速鐵道 推進 特別委員會 委員
- 2021年 7月 ~ 더불어民主黨 大統領 選擧 競選 候補者 李在明 後援會長
[7]
- 2023年 5月 ~ 京畿道 氣候大使
[8]
賞勳
[
編輯
]
著書
[
編輯
]
社會的 發言
[
編輯
]
戶主制의 違憲性 舌破
[
編輯
]
2000年
康錦實은 論文 《戶主制 廢止를 위한 法的 接近》를
李錫兌
辯護士와 함께 著述하였다. 該當 論文에서 강금실은 "戶主制는 配偶者나 家族 사이의 主從關係를 前提한다는 點에서 明白히
憲法
의 平等權 保障 趣旨와 人權 理念에 반한다. 戶主制가 只今까지 存續할 수 있었던 것은 日帝時代 封建的 儒敎이데올로기와 日本 天皇制 파시즘이 結合해 南韓 社會에 定着한 以後 權威主義 政權이 이를 積極的으로 政權 維持에 符合하는 制度로 維持·고착시켰기 때문이다. 戶主制는 單純히 男性 中心의 文化的 意識構造에 依해 維持된 것이 아니라 舊韓末 封建制的 世界觀의 限界를 지닌 復古主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儒林勢力이 組織的으로 戶主制 廢止를 反對했기 때문이다. 戶主制는 우리 社會에 너무 오래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國會의 立法을 통한 方法만으로는 不足하다.
憲法裁判所
에 違憲提請과 憲法訴願審判請求를 통해 違憲 決定을 받아내는 訴訟 戰略을 提示하는 바이다. 最終的으로
유엔 人權 理事會
에 提訴하는 方法도 있다. 戶主制 廢止 後의 代案으로 家族別 戶籍의 編制方法, 住民登錄制度와의 一元化 等을 檢討할 수 있다.
1960年代
朴正熙 政權
時代에 設置된 住民登錄制度와 關聯한 戶籍制度의 問題들을 檢討하고 올바른 代案을 提示하는 것이 時急한 課題이다"고 指摘했다.
[9]
[10]
2003年
3月,
法務部
長官 康錦實은 "法務部는 法의 執行뿐 아니라 ‘少數者 集團’의 人權 向上에도 積極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男女不平等을 惹起하는 代表的인 毒素 條項 '戶主制'의 廢止에 積極 나설 方針이다"라고 말하며 戶主制 廢止를 公言하였다. 以後
憲法裁判所
에서 憲法不合致 決定이 내려졌고,
2005年
3月에 民法 改正이 이루어졌으며, 3年 後인
2008年
1月 1日
부터 새로운
家族關係登錄法
이 施行되었다.
[9]
[11]
[12]
[13]
같이 보기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
選擧
|
臺數
|
職責
|
選擧區
|
正當
|
得票數
|
得票率
|
順位
|
當落
|
備考
|
2006年
|
地方 選擧
|
33代
|
市場
|
서울特別市
|
열린우리당
|
1,077,890票
|
|
2位
|
落選
|
|
各州
[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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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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