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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妓生
全貌 를 쓴 妓生 그림
職業
活動 分野 藝術
說明
力量 · 노래 ·風流
妓生

妓生 (妓生) 或은 妓女 (妓女)는 · 노래 ·風流 等으로 주연석이나 遊興場의 興을 돋우는

일을 職業으로 삼는 官妓(官妓) ·閔箕(民妓) ·藥房妓生 ·尙方妓生 等 禮記(藝妓)의 總稱이다. 賤人 身分이었지만 , 노래 , (詩) 等에 能한 曳引(藝人)이었으며, 代表的인 妓女로는 16世紀 사람인 황진이 가 있다.

妓生制度는 朝鮮時代 에 發展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妓生이라 하면 一般的으로는 朝鮮時代의 妓生을 指稱하기도 하며, 儒敎的 秩序를 重視했던 當代 社會階級 上으로는 賤民 에 屬해 社會的 待遇를 받지는 못했으나, 에 能한 知識人 으로서 待接받는 特異한 階層이었다. [1] 日帝强占期 에 살았던 妓女 中에는 勞動組合 을 結成하여, 券番 [2] 搾取 日本 帝國主義 에 抗爭한 김향화 같은 妓女도 있다.

歷史 [ 編輯 ]

新羅의 원貨 [ 編輯 ]

新羅 원貨 制度는 花郞 制度 以前에 있었던 制度로, 두 名의 女性을 代表로 뽑아 花郞道와 같은 人材 養成을 目的으로 하였다. 하지만 첫 番째 代表였던 南毛와 준정이 서로 猜忌하여 준정이 南毛를 죽이는 事件 以後 원貨는 廢止되고 男性인 風月主 를 代表로 하는 花郞道로 代替되었다.

원貨 制度와 妓生의 聯關性이 明確히 나와 있는 歷史 資料는 없으나, 一部 學者들은 원貨 制度가 妓生의 本流라고 主張하고 있다. 이능화 의 《 朝鮮解語花社 》에서도 원貨 制度가 妓生의 本流라고 主張하고 있다.

高句麗 百濟 의 古墳壁畫 等에도 妓生과 비슷한 女性의 모습은 發見되고 있으나, 記錄으로 남은 것은 없다.

考慮女樂 [ 編輯 ]

高麗 初에 八關會 燃燈會 等의 行事에 必要한 女性을 供給하기 위해 考慮女樂 이 制定되었다. 가와무라 미나토 等의 妓生 硏究家들은 이 考慮女樂이 妓生의 元祖라고 主張하고 있다.

高麗 時代 初期 三國 統一 過程에서 發生한 捕虜를 管理하기 위해 高麗 政權은 男子 捕虜를 '盧', 女子 捕虜를 '비'로 管理하였다. 이 '비' 中에서 歌舞와 禮樂에 뛰어난 女性들은 따로 골라내어 國家가 直接 管理하였다. 後百濟의 後裔로 高麗에 反抗的이었던 楊水尺 中에서도 禮樂이 뛰어난 女性들을 뽑아 '氣'로 삼았다. 王室 主要 行事인 八關會 燃燈會 에는 恒常 '女樂'李 뒤따랐는데, 위의 女性들이 動員되었다.

朝鮮 時代 [ 編輯 ]

朝鮮은 妓生을 一種의 制度로 定着시켜 國家가 直接 妓生들을 管理, 監督하였다. 妓生은 基本的으로 官妓로서, 官家에 登錄이 된 妓生만이 妓生 活動을 할 수 있었다. [3] 妓生들을 登錄한 臺帳인 '奇跡' (妓籍)에 한番 오르면 賤人 身分을 벗어날 수 없었다. 官奴婢의 停年은 50歲까지였으나 子息을 낳더라도 身分은 대물림되었다. [4]

妓生은 敎養 이 있는 知識人 이었다. 이들은 노래 , , 樂器 , 學問 , , 書畫( 그림 )乙 알고, 말씨나 行動이 高尙하여야 했다. 掌樂院 에 들어가서 몇年에 걸쳐 敎育받고 訓鍊을 받아야 하였다. 敎育은 一定 나이가 지나거나, 出産 等의 理由로 隱退한 退妓들이 主로 맡았다. 妓生은 先輩인 退妓로부터 基本的인 춤과 노래, 時調 等을 배웠으며, 높은 管理 를 對하는 禮義 도 배웠다.

普通 宮闕이나 官廳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各種 춤과 노래를 擔當하였고, 公式的인 業務 外에도 民間에서 벌이는 各種 風流의 場에도 參與하였다. 技藝가 뛰어난 女樂은 勢道家의 이 되기도 했지만 女性들만의 잔치인 內燃 (內宴)에는 參與하였는데, 當時로서는 악, 가, 無의 能力이 누가 쉽게 代替할 수 없는 專門分野에 屬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脂肪 官妓들의 境遇 宮中잔치 日程에 따라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가 行事가 끝난 뒤에 내려왔다. 이때 大闕 안의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돌아온 妓生들은 地方 藝術文化에까지 影響을 미치며 普及하는 役割을 하기도 했다. [4]

1910年 臺 무렵의 어느 작은 술집의 妓生

朝鮮 時代의 妓生은 法的 身分으로는 良民 이었지만(다만 官奴로서 妓生이 된 者는 賤民이다), 職業의 特性上 生活은 中産層 以上의 生活水準을 享有했고, 社會的으로는 賤民 으로 待遇받았다. 妓生들은 賤民이었지만, 相對하는 이의 格에 맞게 歌舞(歌舞), 詩(詩), 서(書), 禍(畵)의 才能과 志操(志操), 智略(智略), 醫協(義俠)의 德目을 두루 갖춘 敎養人이었다. 또한 妓生이 머무는 곳인 妓房에는 原則的으로 兩班의 出入이 禁止되어 있었다. [5] 다만 風流를 즐기기 위해 그들을 兩班이 노는 곳에 불러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一部 兩班과 王族들은 妓生집에 自由自在로 出入했고, 朝鮮 後期에는 中人과 平民 商人들도 妓房에 出入하였다.

朝鮮 末期에 妓生은 一牌, 二牌, 三牌 세 部類로 나뉘었다. 一牌 妓生은 棺에 所屬된 官妓로 兩班妓生이라고도 불리며, 朝鮮말부터 생긴 玉堂妓生과 賃金 앞에만 나가서 노래 을 하는 妓生으로 禮義 凡節에 밝고 一部는 男便 이 있는 妓生으로 몸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松島 황진이 , 扶安 이매창 은 一牌 妓生으로 主로 선비 들과 學問 時調 를 나누고 交分을 쌓던 인텔리 들이다. 二牌 妓生은 '慇懃짜(隱君子)'로 불렸는데 官衙나 宰相집에 出入했고 暗暗裏에 몸을 파는 密賣淫을 하기도 했었다. 三牌 妓生은 몸을 파는 遊女(遊女)라고 할 수 있다. [6]

開化期 및 日帝 强占期 [ 編輯 ]

平壤의 妓生學校

官妓 制度는 1894年 甲午改革 當時 身分制 廢止로 함께 廢止되었지만, 妓生들은 生計를 위해 持續的인 活動에 나섰다. [4] 1908年 日帝는 '妓生團束令'과 '娼妓團束令'을 公布하며, 춤과 노래를 公演하는 '妓生'과 性賣買를 하는 '娼妓'로 區分지었다. 妓生으로 營業하기 위해서는 警務廳에 申告하여 許可證을 받아야 했으며, 警務廳의 指示에 따라 組合을 設立해야 한다고 規定하였다. [4]

이러한 背景 속에서 誕生한 妓生組合은 有名 料理집과 契約을 맺어 妓生의 놀음을 仲介하고 手數料를 받는 商業的 組織의 性格을 띠기 始作했다. [4] 또 妓生들은 妓生組合의 仲介로 都市 料理館과 같은 商業的 空間에서 營業을 하고 時間當 花代 를 받는 形式으로 勞動에 對한 物質的 補償을 받게 되었다. [4] 京城에 생긴 最初의 妓生組合은 1913年 地方 出身의 香氣로 男便이 없는 妓生을 모아 設立한 다동組合 (茶洞組合)과 京城 出身의 競技로 男便이 있는 妓生을 모아 設立한 광교組合 (廣橋組合)이었다. [7]

妓生組合은 1915年부터 日本式 表現인 ' 券番 ' (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7] 다동組合은 '朝鮮券番'으로, 광교組合은 '漢城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낙원동 에 鍾路券番이 新設되고 이 세 券番이 競爭하면서 名唱들을 輩出하였다. 1942年 에는 歲 券番의 株主가 倂合해 三火券番을 發足하기에 이르렀다. [7] 京城 外에도 光州 , 南原 , 達成 , 慶州 , 開城 , 咸興 等의 地方에서도 券番이 設立되었고, 特히 平壤 에 設立된 旣成券番이 널리 알려졌다. [7]

日帝强占期 동안 日本人 들은 '사라져가는 浪漫의 나라 朝鮮의 傳統文化'로서 妓生을 바라보았다. 많은 日本人들이 有名한 妓生들의 畫報集, 葉書 를 發行하여 많은 收入을 올렸으며, 잡지 에서 妓生의 하루를 寫眞으로 찍어 팔기도 하였다.실례로 드라마 京城스캔들 에서는 잡지 寫眞 記者와 編輯者 가 雜誌에 실을 妓生 寫眞을 찍는 이야기가 나온다.

第 2次 世界大戰 當時 民族抹殺政策 으로 卷番도 强壓的으로 廢止되어 傳統禮樂을 하는 妓生制度는 漸次 사라지고 性賣買를 하는 遊女만 남게되었다.

現代 [ 編輯 ]

1945年 以後 只今까지 朝鮮 時代의 '妓生'은 거의 存在하지 않는다. 明器로 이름을 날렸던 몇 妓生만이 解放 後 無形文化財 로 指定되어 傳統 藝術을 繼承하였다. 그러나, 妓生學校와 券番制度를 통해 妓生을 維持하던 日本 帝國主義가 韓半島에서 물러간 後 一部 妖精 (高級 飮食店)에서 特權層을 相對로 妓生과 비슷한 式의 性賣買를 했었고, 1970年代 日本人들이 南韓에 妓生 觀光을 하러 온 적도 있었다. 現在 性賣買 産業의 大部分도 風流 提供보다는 性賣買 自體에 焦點이 맞추어져 있으며, 移轉 妓生 制度와는 距離가 멀다.

藝術 [ 編輯 ]

妓生文學 [ 編輯 ]

황진이 , 洪娘, 매창 等이 지었다는 時調가 現在까지 傳해 내려오고 있다. 女性文學家들인 妓女들이 지은 時調들은 "冬至날, 기나긴 밤을 베어다가 이불에 넣고 임과 기나긴 사랑을 하고 싶어요.", "이화우 곧 배꽃 이 비처럼 내리는 날에 헤어진 님이 落葉이 지는 가을에도 나를 記憶할 것인가?"(매창 詩人의 始祖), 헤어지는 님(崔慶昌)에게 强靭한 生命力을 가진 버드나무 가지 를 꺽어주면서 사랑 을 노래하는 時調( 洪娘 詩人의 始祖)처럼 임을 向한 사랑을 노래한, 感性 敵이고 자유로운 文體와 內容이 特徵이다. 판소리 界 世態 諷刺 小說 裵裨將傳 , 世態小說 李春風傳 에도 妓女인 애랑과 追越이 登場한다. 그 外에도 金弘道 , 신윤복 等의 畫家 들이 妓生을 對象으로 한 그림들을 그린 바 있다.

妓生이 나오는 文學 [ 編輯 ]

  • 朝鮮의 小說 春香傳 에서 主人公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妓生이다.
  • 日帝 强占期 때 妓生이 登場하는 日本 小說이 많이 發表되었다.

春化 [ 編輯 ]

春化 는 朝鮮時代 後期 流行했던 民俗畫의 一種으로, 男女間의 情事를 加減없이 表現하고 있다. 春畫에 登場하는 女性의 大部分이 妓生으로 春畫를 통해 當時 妓生들의 生活相을 알 수 있다.

朝鮮 時代의 有名한 畫家인 신윤복 金弘道 도 妓生과 關聯된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이들이 그린 春畫圖 只今까지 傳해 내려오고 있다. 어린 妓生은 春畫를 보며 性敎育을 받았다고 한다.

妓生畫報, 妓生葉書 [ 編輯 ]

日帝 强占期 時節 日本人들은 當時 서울 平壤 等에서 人氣가 높았던 妓生들의 畫報集과 葉書를 만들어 販賣했다.

畫報와 葉書에 登場하는 妓生들은 하나같이 朝鮮의 傳統 服裝을 입은 少女의 모습으로 나오는데, 妓生 硏究가 가와무라 미나토 는 이것을 圖像學 敵으로 分析해 볼 때, 占領國 男性이 植民地 女性을 道具化하는 典型的인 帝國主義的 視線을 따르고 있다고 하였다.

寫眞 資料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가와무라 미나토, 《말하는 꽃, 妓生》, 2002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全國歷史指導士모임 (2016年 11月 30日). 《標石을 따라 鏡城을 거닐다》. 劉氏북스. 35쪽. ISBN   9791195695935 . 儒敎的 秩序를 重視했던 身分制 社會에서 妓生은 社會的 待遇를 받지 못했지만, 兩班과 함께 詩文을 짓고 風流를 즐길 줄 아는 敎養人으로 待接받은 특별한 階層이었다.  
  2. 券番(券番)【名詞】 日帝 强占期에 있었던 寄生들의 組合.(民衆國語辭典)
  3. 강명관 (2004年 1月 5日). 《朝鮮의 뒷골목 風景》 初 12刷판. 서울: 푸른역사. 217쪽. ISBN   89-87787-74-5 .  
  4. 全國歷史指導士모임 (2016年 11月 30日). 《標石을 따라 鏡城을 거닐다》. 劉氏북스. 35-37쪽. ISBN   9791195695935 .  
  5. 강명관 (2004年 1月 5日). 《朝鮮의 뒷골목 風景》 初 12刷판. 서울: 푸른역사. 96쪽. ISBN   89-87787-74-5 .  
  6. 주영하, 飮食戰爭 文化戰爭 230쪽, 四季節 2000年
  7. 全國歷史指導士모임 (2016年 11月 30日). 《標石을 따라 鏡城을 거닐다》. 劉氏북스. 44-45쪽. ISBN   97911956959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