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립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유립 (李裕?, 1907年 12月 18日 ( 1907年 陰曆 11月 14日 ) [1] ~ 1986年 4月 18日 [2] )은 韓國의 宗敎人으로 太白校라고 하는 少數宗敎의 敎主이자, 民族運動家로 알려져 있다. [3] 하지만 一角에서는 親日 疑惑이 提起되기도 한다. [4] 本貫은 高聲(固城) , 者는 채영(采英)·中庭(中正), 號는 한庵堂(寒闇堂)·精算超人(靜山樵人)·段下産인(檀下山人)·호상포객(湖上逋客)·단학동인(檀鶴洞人)이다.

生涯 [ 編輯 ]

高麗末 文臣인 李嵒 (李?)의 後孫으로, 아버지는 이관집(李觀楫) [3] , 어머니는 態인 白氏 이다. [5] 어려서부터 漢文을 익히고, 1915年 9살에 오동진(吳東振)李 祕密로 가르치는 舊韓國軍(舊韓國軍)의 노래와 行進練習을 하였다. 1919年에는 신안동(新安洞)에서 太極旗를 들고 朝鮮獨立萬歲運動에 加擔하는 等 愛國思想이 剛하였다고 한다. [3] 하지만 이유립 및 아버지 이관집의 獨立運動 關聯 行跡은 모두 이유립 本人이 쓴 冊을 出處로 하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 交叉 檢證되지 않는다. [6] [4]

略歷 [ 編輯 ]

  • 1907年 平安北道 朔州郡 구곡면 안풍동 救靈抛 청계靈山 아래 靑溪谷에서 單해(檀海) 이관집의 4男으로 出生.
  • 1921年 朝鮮獨立少年團(朝鮮獨立少年團) 組織活動에 參加해 團長이 됨. [3]
  • 1924年 ~ 1927年 朔州高等普通學校 3學年 入學, 卒業
  • 1931年 7月 朝鮮總督府 發行 月刊誌 《朝鮮》에 詩 '社會(寫懷)' 揭載됨.
  • 1933年 8月 朝鮮總督府 發行 月刊誌 《朝鮮》에 詩 '朔州(朔州) 乙山村(乙山村)' 揭載됨
  • 1933年 안循環 (安淳煥)이 設立한 名敎學院(明敎學院: 朝鮮儒學回 또는 朝鮮儒敎回) 立會
  • 1935年 朔州儒敎靑年會지교部長(朔州儒敎靑年會支敎部長) [7] , 《일월詩步》(朝鮮儒學回 機關紙) 主筆
  • 1938年 東亞日報 朔州支局長 [8]
  • 1939年 新風學院(新豊學院) 設立, 學監 兼 敎師로 勤務
  • 1945年 4月 建國同盟(建國同盟)의 平安北道 朔州冊을 맡음. 前奉天(全鳳天)의 「大東亞戰爭拒否論」 삐라撒布事件에 關聯되어 救靈抛 日本憲兵隊의 問招를 받음. 9月 9日 鴨綠江國民學校 校長과 風民組合長(豊民組合長), 大寒勤勞국민회 文化部長 職에 避妊. 10月 3日 天摩山第全大會에서 獨立運動家 이용담(李龍潭)의 主宰로 結成된 單學會(檀學會)의 機關紙 『太極(太極)』의 週間으로 避妊 [3]
  • 王政復古 를 主張했다가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를 받음
  • 1963年 單學會를 繼承한 단단學會(檀檀學會)의 3大會場이 되어 機關紙 《커發汗》 發行
  • 1976年 박창암 , 안호상 , 유봉영 , 문정창 , 朴詩人 , 임승국 等과 함께 國史찾기 協議會 組織
  • 1979年 환단고기 刊行(100部 限定出版)

親日 疑惑 [ 編輯 ]

一般的으로 獨立運動家 또는 民族運動家라고 알려져 있으나, 아래와 같은 行跡으로 볼 때 親日派라는 主張이 提起되었다. [4]

  • 朝鮮總督府 發行 月刊誌 《朝鮮》에 詩를 投稿하였는데, 詩의 內容이 日帝 下의 太平聖代를 노래하는 內容이다. [9]
  • 親日 儒敎 團體인 朝鮮儒敎回 에서 活動하였으며 黨 團體에서 發行한 親日 性向의 機關紙 《일월詩步》의 主筆을 歷任하였고 傘下 團體인 新風學院을 設立하였다. [10]
  • 中日 戰爭 以後에 親日新聞이 된 동아일보의 支局長을 歷任하였다. [11]

한便 이유립은 《환단고기》의 傳授者를 自稱하고 있으나 實際로는 自身이 直接 쓴 것으로 確實視되고 있다. [12] [4] 《환단고기》 亦是 民族主義的인 內容이 담겼다고 알려져 있으나 實際 內容上 親日的 要素가 剛하다는 批判이 있다. 또한, 이유립은 이러한 《환단고기》를 박창암 將軍에게 傳했는데, 박창암 將軍은 환단고기 原文을 日本의 歷史著述가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傳達하기도 하였다. [13] 가지마 노보루는 日선同調론과 같은 黃國史學을 主張하는 極右 歷史著述家로 그가 飜譯한 《환단고기》에는 “日선同調론의 證據가 되는 冊을 傳達해 주어서 이유립에게 感謝한다.”는 言及을 하고 있다. [14] 이 對해 이유립은 自身이 傳達하도록 許諾한 것이 아니며 許諾 없이 冊을 流出한 것이라 主張하였다.

宗敎 活動 [ 編輯 ]

이유립은 日帝强占期 當時부터 單學會나 太白校와 같은 民族團體 또는 民族宗敎에서 活動했다고 主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單學會를 繼承했다고 主張하고 있는 단단學會(檀檀學會)나 太白校, 커發汗 等은 一種의 少數宗敎로 分類되고 있으며 이유립은 그 敎主로 알려져 있다. 《환단고기》에도 이유립이 敎主로 있는 太白校의 敎理가 敍述된 部分이 많다 [15]

著書 [ 編輯 ]

  • 《광개토 성릉 鼻紋 譯註》, 大東文化社, 1973年
  • 《커發汗 文化思想社》1-2, 단단學會, 1976年
  • 환단고기 》, 광오理解社, 1979年 [16]
  • 《한庵堂 이유립 社學總署 (千)》, 단단學會 篇, 母音出版社 , 1983年 [17]
  • 《臺배달民族社》1-5, 考慮가, 1987年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링크
  2. 韓國日報 1986年 4月 20日 10面 ( 한국언론재단 웹사이트에서 檢索 可能)
  3. 「이유립」,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4. 이문영, 《만들어진 韓國史》, 波瀾미디어, 2010
  5.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韓國民族文化大百科의 이유립 項目에 出處로 提示된 書籍은 모두 이유립 本人의 著書이다.
  7. 「靑年諸賢에게 檄함」, 《 일월詩步 》創刊號, 1935
  8.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社데이터베이스 朔州支局設置 ; 李裕? 任支局長 (昭和12年)” . 2007年 9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8月 28日에 確認함 .  
  9. “白鶴山, 높은 峰
    새날이 또 뜨고
    千石坪 넓은들
    벼 母 잘크네.
    九曲川 내림물
    ?巖을 싸돌고
    求誠齋 옛바람
    笙簧이 桐하네.

    아마도 이 村落이
    우리의 家鄕일레라.”
    《朝鮮》 1933年 8月號, 75쪽
  10. “以上에서 檢討한 바와 같이 總督府는 여러 浮遊腐儒들을 끌어들여 親日 儒林團體를 組織하고 傳來의 儒敎精神과 儒敎敎化政策을 現 總督府 植民地統治에 그대로 接合하여 社會運動化 시킴으로써 儒敎를 利用한 民族分裂이라는 效果와 함께 植民地 統治冊의 當爲性을 儒敎思想과 組織에서 얻고자 하였다.” 韓國獨立運動의 歷史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中 朝鮮儒敎回 關聯 페이지, 獨立記念館 提供
  11. 1937年 以後의 동아일보는 親日新聞이 되었다. 歷史問題硏究所 長身 硏究員 인터뷰
  12. 박광용, 〈大倧敎 關聯 文獻에 僞作 많다〉, 《역사비평》 10號, 1990年.
    이도학, 〈재야사서 解除 《환단고기》〉, 《民族知性》, 1986年 11月號.
    以上市, 《檀君實査에 關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年.
    조인성, 〈《閨怨士禍》와 《환단고기》〉, 《韓國史市民講座》 2輯, 1988年.
    조인성, 〈한말단軍關係司書의 再檢討 - 神壇實記·短期告祀·환단고기를 中心으로 -〉, 《국사관論集》 3, 1989年.
    文革, 〈《환단고기》에 對한 飼料學的 檢討〉, 社會科學院-한국학술진흥재단, 2006年
  13. “韓國史 硏究에 큰 事件이 된 환단고기는 韓國보다 日本에서 먼저 飜譯되었다. 박창암 將軍이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 原文을 傳해 받고 日本人 辯護士 가시마(鹿島 昇) 에게 보여주어 日本에서 飜譯되어 나오기에 이르렀다.” 김유경, '박창암과 장도빈 - 局社찾기운동', 프레시안뉴스, 2003.12.13.
  14. 가지마 노보루 驛,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15. 이강오, 〈檀君信仰 實態分析〉, 《정신문화연구》 3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16. 純漢文本 100部 限定版으로 影印하였다. 이는, 계연수 로부터 13歲 때 《환단고기》를 건네받을 때에 60甲子 後에 公開하라는 當付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原本은 關聯 資料와 함께 1975年 以前에 모두 流失되었으나, 남아 있는 記憶으로 內容 全部를 復元하였다고 한다.
  17. 이 冊의 發行 鳶島는 神市개川 5880年으로 적혀 있다. 神市개川5880年은 1983年이고 版權에는 干支가 癸亥年으로 적혀있으며, 1983年이 癸亥年이었다. 이유립 叢書 中의 첫째卷은 (千)이라는 名稱이 붙어있다. 後日 (知)와 (人)李 繼續 發行될 豫定이었다.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