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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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運動
韓國의 獨立運動 의 一部
서울 탑골 公園 의 3·1 運動 書板
날짜 1919年 3月 1日 ~ 1919年 4月 11日
地域 일본 제국 日本 帝國領 朝鮮
原因 大韓帝國 의 國權 피탈

韓國의 民族主義
2·8 獨立 宣言
파리 講和 會議

高宗 毒殺說
目的 朝鮮의 獨立
種類 非暴力 運動
結果 日帝의 武力鎭壓
主要 人物
民衆 主導
參與 人員
2,020,000名 以上
不明
死傷者
死亡者數 500 名에서 7000 名 以上
負傷者數 45,000名 以上
逮捕自首 49,000名 以上

3·1 運動 (三一運動) 또는 3·1 萬歲 運動 (三一萬歲運動) 또는 對한 獨立 萬歲 運動 (大韓獨立萬歲運動)은 日帝强占期 에 있던 朝鮮人 들이 一齊 의 支配에 抗拒하여 1919年 3月 1日 韓日 倂合 條約 의 無效와 韓國의 獨立을 宣言하고 非暴力 萬歲 運動을 始作한 事件이다. 己未年 에 일어났다 하여 己未獨立運動 (己未獨立運動), 줄여서 己未運動 (己未運動)이라고도 부른다. 大韓帝國 高宗 이 毒殺되었다는 高宗 毒殺說 이 所聞으로 퍼진 것을 契機로 高宗의 因山일(葬禮日)인 1919年 3月 1日 에 맞추어 韓半島 全域에서 蜂起한 獨立運動이다. 最近, 본 運動의 規模와 影響力을 考慮해 3.1 革命 (三一革命)이라고 부르자는 論議가 일고 있다.

萬歲 運動을 主導한 人物들을 民族 代表 33人 으로 부르며, 以外에 萬歲 聲明書에 直接 署名하지는 않았으나 直接的, 間接的으로 萬歲 運動의 開催를 위해 準備한 이들까지 합쳐서 普通 民族 代表 48人 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萬歲 運動이 失敗한 後에 拘束되거나 裁判廷에 서게 된다. 約 3個月 假量의 示威가 發生하였으며, 朝鮮 總督府 는 强勁하게 鎭壓했다.

朝鮮 總督府 의 公式 記錄에는 集會인 數가 106萬餘 名이고, 그 中 死亡者가 900餘名, 拘束된 自家 4萬 7千餘 名이었다. 한便 신복룡 敎授나 日本의 야마機 겐타로 約 50萬 名 程度가 3·1 運動에 參與하였다고 主張하고 있다. [1] [2] 1919年 3月 當時 日帝强占期 朝鮮 의 全體 人口는 1,678萬 8千400名이었다. [1] [1] [2] 學者들의 見解를 따르면 當時 朝鮮 人口 中 2.76%에서 2.97%이 萬歲 運動에 參與하였다.

3.1 運動을 契機로 다음 達人 1919年 4月 11日 中國 傷害 에서 大韓民國 臨時 政府 가 樹立되었다. 大韓民國 制憲 憲法 에서는 3.1 運動을 大韓民國 建國의 起源으로 삼아 臨時 政府의 法統을 繼承한다는 것을 闡明하였다.

한便 3.1 運動을 契機로 軍事, 警察에 依한 强勁策을 펴던 朝鮮 總督府 는 民族 分裂策人 一名 文化 統治 로 政策을 바꾸게 되었다.

天主敎 흥선大院君 의 彈壓後遺症(7千餘名 天主敎人 殺害)으로, 示威에 參與하지 않았다.

進行 過程 [ 編輯 ]

背景 [ 編輯 ]

戊午獨立宣言書 石版 印刷本

데라우치 마사打케 에서 陸軍大將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總督으로 繼承된 武斷 統治 는 “3·1獨立運動”이라는 뜻하지 않은 結果를 發生케 했다.

이런 가운데 第1次 世界大戰 이 끝나고 파리講和會談 에서 美國 大統領 우드로 윌슨 이 提案한 14個組의 戰後處理 原則 中에 '各 民族의 運命은 그 民族이 스스로 決定하게 하자'라는 所謂 民族自決主義 가 알려지면서 朝鮮의 獨立 運動家들 사이에 希望의 雰圍氣가 일어났다. 一部 獨立 運動家들은 1918年 末부터 緻密하게 事前 計劃을 세우고 있었고 파리 講和會議 에 우리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騷擾事態를 일으켜야 한다는 김규식 의 發言과 1919年 初 갑작스럽게 死亡한 高宗 皇帝 의 죽음 等 여러 가지 要因이 複合的으로 나타나면서 絶妙하게 機會를 捕捉하였다.

事前 準備 [ 編輯 ]

當時 中國 에 留學中이던 여운형 신규식 等은 이 宣言과 뒤이은 파리 講和 會議 가 朝鮮 獨立의 達成 與否를 떠나서 앞으로 朝鮮의 未來를 결정짓는 重要한 事件이 될 것이라고 判斷하고 新韓靑年黨 이라는 團體를 文書上으로 組織해 파리 講和 會議 불어 를 잘하는 김규식 을 派遣하고, 朝鮮쪽에는 日本語 에 有能한 장덕수 를 派遣한다. 이러한 消息은 朝鮮 안팎의 獨立運動家 들을 相當히 拷問하는 消息이었다. [3]

그리고 여운형 自身은 中國 吉林 性 으로 가서 活動하여 戊午獨立宣言 의 觸媒役割을 했다. 滿洲 지린(間島) 에 있는 獨立運動家 김약연 等과 만나서 파리講和會議와 民族自決主義 原則等 狀況을 說明하였고, 이는 戊午 獨立宣言 에 影響을 주었다. [4]

1919年 出國 前 김규식 상하이 新韓靑年黨 黨員들에게 다음과 같이 獨立 示威의 注文을 하였다. 金奎植의 獨立 示威 注文은 3·1運動이 벌어지는 契機가 되었다. [5]

파리 에 派遣되더라도 求人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一齊 虐政을 暴露하고 宣傳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國內에서 獨立을 宣言해야 된다. 派遣되는 사람은 犧牲당하겠지만 國內에서 무슨 事件 이 發生해야 내가 맡은 使命이 잘 遂行될 것이다. [6]

또한 때마침 發生한 高宗 의 갑작스러운 죽음 亦是 日本人들이 高宗을 毒殺하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絶妙하게 萬歲示威 擴散에 寄與하였다. 윤치호 는 自身의 日記에 高宗 의 죽음 亦是 國民的 感情을 刺戟해서 萬歲示威가 擴散되는 契機를 마련했다고 記錄하고 있다.

高宗皇帝 이 王世子 나시모토 公州 의 結婚式을 꼭 나흘 앞두고 昇遐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所聞이 나돌고 있다. 正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屈辱을 甘受한 高宗皇帝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億丈이 무너져 自殺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王世子와 日本 公主의 結婚이야말로 王室의 立場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結婚을 통해서 두 王室 間의 友好關係가 增進될 것이고, 王世子는 朝鮮의 어떤 女性보다도 더 優雅하고 才氣 넘치는 新婦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萬若에 高宗皇帝 倂合 以前에 昇遐했더라면, 朝鮮人 들의 無關心 속에 저世上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只今 朝鮮人 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高宗皇帝 를 위해 暴動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結果 [ 編輯 ]

大韓帝國 高宗 의 葬禮 行列 - 高宗의 毒殺說로 日本植民地배의 反對 輿論이 높았다.

滿洲 지린에서 亡命한 獨立運動家 들이 1919年 2月 1日 戊午 獨立宣言 을 통하여 朝鮮의 獨立을 主張하였고, 朝鮮 在日 留學生을 中心으로韓 2·8 獨立宣言 의 影響을 받은 高宗 의 毒殺說로 인하여 日本의 不當한 朝鮮 占領과 暴力에 依한 統治에 對하여 많은 사람들이 反感을 갖게 되어 큰 呼應을 얻을 수 있었다. 이 示威는 純粹한 平和的 示威였으나 日本軍 [7] 은 이를 武力으로 鎭壓함으로써 暴力化되었다.

準備 過程 [ 編輯 ]

民族宗敎인 天道敎 의 代表인 손병희 等에 依해 主導되었으며, 天道敎人, 基督敎人, 佛敎徒人이 모두 함께 代表로 參與하였다. 최남선 이 〈 獨立宣言書 〉를 기초하였으나, 萬海 韓龍雲이 보고는 너무 어려운 漢文套人 데다가 內容이 溫乾하다 하여 다시 쓰기를 自請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 天道敎 基督敎 人士들의 聯合으로 萬歲 示威 計劃과 場所가 決定되었다. 佛敎 契의 代表로는 韓龍雲 等이 參與하였다. 崔南善의 草案에 春園 이광수 가 校正을 보고 萬海 韓龍雲이 公約 3張 을 덧붙였다.

한便 윤치호 는 獨立運動家들로부터 國民 代表로 署名을 勸誘받았으나 拒絶했고, 이는 失望한 一部 學生들로부터 批判을 받게 된다. 그는 이 民族的인 擧事를 純眞한 愛國心에 기초한 民族主義者들의 無謀한 行動으로 把握했다. [9]

準備 過程에 일어난 伸鐵 에 關한 逸話가 있다. [8] 1919年 2月 下旬 天道敎 에서 運營하는 印刷所 普成社 (普成社)를 急襲한 鍾路警察署 高等係 刑事인 伸鐵(申哲: 一名 申勝熙)은 普成社 社長 이종일 이 보는 앞에서 輪轉機를 멈추고 〈獨立宣言書〉를 빼내어 보았으나 그냥 돌아갔다. 李鍾一이 崔麟 에게 報告하자 崔麟이 伸鐵을 저녁 食事에 招待하여 돈을 주며 滿洲로 떠나라고 勸告했다고 한다. 日本 側 記錄에는 伸鐵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韓國 側 記錄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3月 3日로 豫定된 擧事를 3月 1日로 앞당겼다.

2月 28日頃 孫秉熙의 집에 모여 ‘流血 衝突을 避하기 위해’ 約束 場所인 탑골 公園에 나가지 않기로 決定하였고, 民族代表가 모일 場所는 태화관(泰和館)으로 바뀐다. [8]

關聯 人物 및 團體 [ 編輯 ]

民族代表 33人 또는 民族代表 48人 [ 編輯 ]

3.1 萬歲 運動의 첫 날 京城府 태화관에서 獨立宣言書를 朗讀한 民族 代表者 33人을 말한다. 여기에 박인호 , 김홍규 , 노헌용 , 이경섭 (以上 天道敎 ), 金道泰 , 安世桓 , 함태영 , 金元璧 , 김세환 (以上 基督敎), 임규 , 송진우 , 현상윤 , 최남선 , 강기덕 , 정노식 , 김지환 , 한병익 等을 합쳐 民族代表 48人 으로 보기도 한다.

그밖에 3.1 運動 當時 慘狀을 寫眞으로 撮影, 美國 캐나다 , 英國 等에 알린 스코필드 亦是 別途의 朝鮮人 民族代表者로 보기도 한다.

其他 關聯 人物 및 團體 [ 編輯 ]

기타 [ 編輯 ]

  • 戊午 獨立宣言 - 1919年 2月 1日, 中國 東北部 吉林省에서 趙素昻, 申采浩 先生 等 滿洲와 러시아地域의 抗日 獨立運動指導者 39名이 第1次 世界大戰 終戰에 맞추어 祖國獨立을 要求한 獨立宣言書이다. 다음달 3月 1日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獨立宣言의 導火線이 되었다.
  • 新韓靑年黨 - 2·8 獨立 宣言 에 直間接的 影響을 주었다. 또한, 파리講和會議 派遣을 主導하였다.

己未獨立宣言書 는 1919年 3月 1日 3·1 運動에 맞추어 民族代表 33人 이 當時 日帝 强占 下에 있던 朝鮮의 獨立을 國內外에 宣言한 글이다.

獨立宣言書 朗讀 [ 編輯 ]

탑골公園 에 設置된 3·1運動 記念碑

1919年 3月 1日 午後 2時 [10] 에 모이기로 했던 朝鮮의 民族代表 33人 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午後 3時가 되어서야 길선주 , 유여대 , 金炳朝 , 정춘수 를 除外한 29人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 (서울市 종로구 인사동 所在)에서 朝鮮 이 獨立國임을 宣言하였고, 모든 行事가 끝난 때가 午後 4時 무렵이었다. [8] 그들은 總督府 政務總監 야마가타 利子附로 에게 電話를 걸어 獨立宣言 事實을 알렸는데, 이는 自身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連行해 가라는 뜻이었다. 60餘 名의 憲兵과 巡査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民族代表를 南山 警務摠監部와 只今의 中部警察署 로 連行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等 태화당에 到着하지 못한 나머지 4人도 警察에 自進 出頭했다.

1. 우리는 이에 朝鮮 이 獨立國임과 朝鮮人 이 自主民임을 宣言한다. 이 宣言을 世界 온 나라에 알리어 人類 平等의 크고 바른 道理를 分明히 하며, 이것을 後孫들에게 깨우쳐 우리 民族이 自己의 힘으로 살아가는 正當한 權利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半萬 年이나 이어 온 우리 歷史의 權威에 依支하여 獨立을 宣言하는 것이며, 二千萬 民衆의 精誠된 마음을 모아서 이 宣言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民族의 한결 같은 自由 發展을 위하여 이것을 主張하는 것이며, 누구나 自由와 平等을 누려야 한다는 人類的 良心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世界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機會와 運數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獨立 宣言은 하늘의 밝은 命令이며, 民族 自決主義에로 옮아 가는 時代의 큰 形勢이며, 온 人類가 함께 살아갈 權利를 實現하려는 正當한 움직임이므로, 天下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獨立 宣言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己未獨立宣言書 처음 部分 (現代語驛) [11]

한便 午後 2時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元來 約束 場所였던 탑골公園에서는 學生들이 모여들었다. 民族代表 33人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唐慌하였으나 更新學校 出身 정재용 이 八角亭에 올라가 獨立宣言書를 朗讀했다. 午後 3時頃에 寶城法律商業普通學校 學生 강기덕 , 연희전문학교의 金元璧 그리고 한위건 이 民族代表의 素材를 찾아 나섰다.

擧事時間에 期約하지 않고 모인 學生이 千餘名이었고 정재용이 獨立宣言書를 朗讀하자 萬歲소리가 울려퍼지고, 자그마한 太極旗와 宣言書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帽子를 벗어 虛空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成案과 地方의 百姓들도 合勢하여 數十萬의 群衆이 參與하였다. 示威 群衆은 두 갈래로 나뉘어 行進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鍾路 普信閣 을 지나 南大門 쪽으로 向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大漢門 을 向하였다. 大漢門에 이르른 群衆을 이끌던 사람이 德壽宮의 混戰에 나아가 세 番 절하고 繼續 萬歲를 불렀다. 示威行進은 서울을 8個區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獨立宣言書를 나눠주고 "日本軍과 日本人은 日本으로 돌아가라", "朝鮮獨立萬歲", "朝鮮 獨立政府를 樹立하라"는 口號를 외쳤다. 그리고 繼續 進行하여 西大門 을 돌아 태평로를 지나 美國 領事館 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學生이 太極旗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大韓獨立' 4字를 써서 앞에 들고 群衆을 引導하니 美國領事는 門을 열어 歡迎하고 깊은 同意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獨立의 住持를 演說하고, 鍾路에 이르러 다시 演說을 벌이자 日本 憲兵과 騎馬兵들은 칼을 휘두르며 解散시키려 하였으나 群衆들은 泰然自若한 態度로 물러가지 않다가 6時가 되어서 自進解散하였다. 다음날 總督府는 獨立團을 搜索하고 逮捕하여 投獄하였는데 그 數字가 1萬餘名에 이르렀다. [12]

3.1 運動의 參與 人員 [ 編輯 ]

1919年 3月 3日 高宗의 葬禮式에 參席하기 위해 全國의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고, 이들 中의 많은 數가 示威運動에 參加하였다.

日本人 學者 야마베 겐타로에 依하면 運動의 參與者는 50萬 名 以上이라고 推定한다. 야마베 겐타로에 依하면 全國에서 高宗의 葬禮를 위해 50萬名의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있었는데 이들은 大部分 示威運動에 參與하여 三一運動의 參與者는 50萬 名 以上이라고 推定한다. [2] 韓國의 學者 신복룡은 46萬 名 程度로 把握하였다.

3.1 運動의 非暴力 抗爭 中에서도 3月 1日 부터 4月 30日 까지 萬歲를 부른 사람의 數爻는 46萬 3086名 程度였다. [1] 이는 1919年 3月 當時 全體 人口 1,678萬 8千400名 中 2.76%에 該當되는 人員이었다. [1] 朝鮮總督府의 公式 集計에 따르면, 106萬 名이 參加하여 鎭壓 過程에서 553名이 死亡, 12,000名이 逮捕되었다

全國的인 示威와 暴力 鎭壓 [ 編輯 ]

2月 28日 高宗國葬 豫行演習을 지켜보는 모습이다

天安 아우내場터에서 始作되어 不過 數個月 만에 全國으로 퍼져나갔으며, 日本 沿海州 等 海外에서도 벌어져 1年餘 동안이나 持續되었다. 임종국 의 《實錄 親日派》에 따르면, 3月 1日부터 4月 30日까지 60日 동안 1214回의 萬歲 運動이 벌어졌다고 한다. [13]

獨立宣言書가 本來 朗讀되기로 豫定되어 있던 서울 탑골公園 에서부터 萬歲 示威가 發生하였다. 몇十 萬名이 同時에 太極旗를 흔들며 萬歲를 외치고, 빠른속도로 全國的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唐慌한 日本軍들은 鎭壓하다 못해 暴力을 휘두르게 되고, 그에 더 刺戟 받은 韓國人들의 運動이 그 規模를 더하였다.

天安 아우내 萬歲運動 [ 編輯 ]

  • 一時: 1919年 4月 1日 ( 陰曆 3月 1日 )
  • 場所: 天安 아우내 場터
  • 經過: 天安 아우내 萬歲運動은 天安 병천 市場에 있던 3千餘 名의 群衆이 獨立萬歲를 부른 事件으로 日本 警察과 憲兵은 銃劍을 利用하여 强力한 鎭壓을 하여 많은 死傷者가 發生하였다. 聖公會 병천敎會에서 運營하던 진명學校 [14] 敎師 김구응이 地域 有志들과 젊은 靑年, 學生들과 함께 參與하였다.비보를 듣고 온 그의 母親 崔氏가 子息의 屍身을 안고 痛哭하자 老母마저 槍과 로 찔러 殺害하였다. 日本의 强制 鎭壓으로 現場에서 죽은 사람은 19名이며, 柳寬順 을 包含한 많은 參加者들이 負傷, 投獄等의 어려움을 겪었다.

平南 江西郡 泗川場터 示威 [ 編輯 ]

  • 一時: 1919年 3月 4日 [15] [16]
  • 場所: 平安南道 大同郡 , 江西郡
  • 經過: 3月 4日 大同郡 禁制面 원장리에서 約 3千餘 名의 群衆이 모여 江西郡 반석면 上사리의 泗川市場 方面으로 示威 行進을 벌였다. 이때 泗川市場 附近에 있던 泗川憲兵隊에 이 地域에서 萬歲 示威를 組織하던 基督敎 系列의 人士들이 事前 摘發되어 拘禁되어 있던 狀態였기 때문이다. 泗川憲兵駐在所의 日本人 所長 사토 지쓰고로( 日本語 : 佐藤實五郞 )와 朝鮮人 憲兵補助員 강병일 , 김성규 , 박요섭 等은 미리 埋伏해 있다가 行進하는 示威隊에게 無差別 銃擊을 加하여 示威 參加者 數十名을 殺傷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示威隊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殺害당했다. [17] 이 事件은 3·1 運動 最初의 死亡者가 3月 1日 平安北道 先天 按酒 에서 發生한 以來 가장 規模가 큰 流血 事態였다.
  • 關聯者: 조진탁 (死刑), 古地形 , 지석용

三振 依據 [ 編輯 ]

  • 一時: 1919年 3月 28日 , 4月 3日 [18]
  • 場所: 慶尙南道 昌原
  • 經過: 第1次와 第2次 두 次例에 걸쳐 展開된 三振義擧는 昌原 一帶의 聯合 大示威였다. 서울 에서 示威에 參加한 뒤 緣故地에 돌아온 邊狀態 가 進展, 眞北, 振動面의 3個面에서 同調하는 人士들을 모아 謀議했다. 單一 示威로는 馬山 地域에서 가장 激烈한 示威였으며, 全國的으로도 規模가 큰 聯合示威로 記錄되었다. 第1次 三振 依據 에서 檢擧를 避한 主謀者들이 太極旗 를 製作해 第2次 三振 依據(4·3 三振依據)를 再次 計劃했으며, 진북면 지산교 附近에서 約 3千餘 名의 非武裝 示威隊가 日本 憲兵隊와 流血 衝突하여 5名이 卽死하고 11名이 부상당하는 被害를 입었다.
  • 關聯者: 邊狀態, 변갑섭(射殺), 변상복(射殺) 等

제암리 虐殺 事件 [ 編輯 ]

곽산 虐殺 事件 [ 編輯 ]

  • 一時: 1919年 3月 6日
  • 場所: 平安北道 定州郡 곽산
  • 經過: 곽산 그리스도敎會를 中心으로 蜂起하여 漸次 數千名이 示威에 同參하자, 日帝는 獨立運動家 박지협(朴志協)을 主動 嫌疑로 逮捕 直後 他殺(打殺)하고, 逮捕한 示威群衆 100餘名 中 50餘名이 殘忍한 拷問으로 死亡했다. 日帝는 示威 鎭壓 過程에서 群衆에 對해 無差別 銃擊을 加했으며, 狂犬(狂犬)을 죽이는 데 使用하던 쇠갈고리로 示威群衆 數千名을 慘殺했다. 一名 곽산의 慘殺 (郭山一慘殺)이라고도 불린다.
  • 關聯者:박지협(他殺)

泗川 虐殺 事件 [ 編輯 ]

  • 一時: 1919年 3月 3日
  • 場所: 平安南道 泗川
  • 經過: 改新敎 牧師 한例헌(韓禮憲)과 天道敎 敎區長(敎區長)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金炳周(金炳疇) 等의 主導로 萬歲 運動이 일어나자 日本 憲兵隊는 示威 群衆에 對한 無差別 銃擊으로 73名을 虐殺했다. 그러나 示威群衆은 虐殺에도 不拘하고 示威를 繼續하여 憲兵 駐在所에 불을 지르고 憲兵 2名을 他殺(打殺)했다.
  • 關聯者: 한例헌(韓禮憲),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金炳周(金炳疇) 等

화수리 虐殺 事件 [ 編輯 ]

  • 一時: 1919年 4月 11日
  • 場所: 京畿道 水原郡 우정면 화수리
  • 經過: 4月 3日 示威群衆이 화수리 駐在所에 불을 지르고 示威隊에 銃擊을 加한 日本 巡査 1名을 他殺하자 11日 새벽 에 憲兵과 警察을 動員해 民家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銃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마을 住民 數十餘名을 虐殺했다. 40家口가 모여살던 화수리는 事件 以後 모두 불타 18家口만 남았으며, 事件 以前까지는 比較的 富村(富村)이었으나 以後 餓死者(餓死者)가 續出했다.

孟山 虐殺 事件 [ 編輯 ]

平安南道 孟山 에서 天道敎人 基督敎人 이 萬歲示威를 벌였는데, 事件 며칠 後 日本軍이 基督敎人 指導者 한사람을 逮捕하여 憲兵分遣소에 가두고 拷問을 하자 群衆들이 몰려와 指導者의 釋放을 要求하자 日本 憲兵이 이들을 分遣所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門을 잠그고 60餘名을 銃殺한 事件이다.

大邱 虐殺 事件 [ 編輯 ]

大邱에서 2萬 3千 名이 示威를 벌여 日本軍에게 113名이 銃殺되었고, 87名이 부상당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示威의 主謀者로 獨立宣言을 朗讀했는데, 김용해는 逮捕하러온 日本軍과 맨손으로 對抗하다가 칼에 맞아 重傷을 입었으며, 富者가 投獄되어 며칠 後 死亡하였다.

陜川 虐殺 事件 [ 編輯 ]

3月 16日 慶南 陜川郡 야로면에서 住民들과 海印寺 僧侶 들이 모여 示威를 벌였는데, 그 參加者가 1萬餘名에 이르렀다. 3月 18日 陜川郡 江兩面의 市場에서 示威가 있었다. 日本 軍人과 警察이 쇠몽둥이나 長劍으로 解散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發砲하여 3名이 죽고 多數가 부상당했다. 3月 19日 에는 陜川郡 臺正面에서 地域 維持와 勞動者들이 고현市場에 모여 獨立을 宣言하고 萬歲 示威를 벌여 主謀者 5名이 逮捕되어 晋州 로 押送되었다. 3月 22日 에는 상백,白山,가회,삼가 等 다섯 面의 住民 3萬餘 名이 모여 萬歲 示威를 벌였다. 秩序있는 平和示威를 벌였음에도 日本軍이 無差別 發砲하여 42名이 死亡하고 100餘 名이 큰 負傷을 입었다.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유림과 學生의 主導로 8千餘名이 모여 萬歲 示威를 벌이자 亦是 日本軍이 發砲하여 5名이 죽고 數十名의 負傷者를 냈다.

全北 南原 虐殺 事件 [ 編輯 ]

南原郡 덕과면長이었던 李石基 가 官廳 行事였던 植樹 記念式이 豫定되어 있던 4月 3日 을 期해 萬歲 示威를 벌이기로 計劃하고 19個 面에 檄文과 參加 趣旨書를 보냈다. 나무 심기를 핑계로 群衆 800餘名을 모아 植樹記念式이 끝나자 19個 面長 等이 萬歲를 先唱하고 群衆들이 呼應하여 南原- 全州 間 道路를 行進하며 示威를 벌였다. 示威 消息은 곧 南原郡 全體에 퍼졌으며, 다음날인 남원읍 場날에 場터에서 또다시 萬歲 示威가 벌어졌다. 場날 午後에는 廣寒樓 앞 廣場에서 群衆 1000餘名이 모여 示威를 벌이자 數千餘名의 住民들이 다시 合勢해 大規模 示威가 벌어져 邑內 全體가 示威 群衆으로 가득했다. 日本軍은 示威隊에 銃擊을 加해 이 過程에서 方陣形(房鎭炯), 방명숙(房明淑) 等 8名이 現場에서 卽死하고 10餘 名이 重傷을 입었으며, 황일환(黃日換), 이성기(李成器), 형갑수(邢甲洙) 等 20餘名이 逮捕되었다. [19]

益山 이리場날 萬歲運動 [ 編輯 ]

基督敎 人이었던 群山 英明學校 敎師 문용기 1919年 4月 4日 이리 場날을 利用하여 일어난 獨立運動을 主動하였다. 當時 日本軍 步兵中隊가 駐屯하여 檢問檢索이 深海서 어려운 形便이었지만, 그는 박도현과 장경춘等 基督敎 系統의 人士들과 몰래 만나 4月 4日 場날에 擧沙하기로 하였다. 12時쯤 이리 場터에는 基督敎人 等 300餘 群衆이 모였다. 萬歲運動에 參與한 群衆들은 문용기의 指揮에 依해 獨立宣言書를 나누어 가지고 太極旗를 휘날리며 隊列을 지어 市街를 行進하였다. 群衆의 數가 漸次 늘어 1千餘 名이 되고, 그에 따라 氣勢가 오르자 日本 憲兵隊가 出動하여 이를 制止하였다. 日帝는 이에 消防隊와 日本人 農場員 數百名을 動員하여 槍劍과 總·棍棒·쇠갈고리를 휘두르며 武力으로 鎭壓했다. 示威 群衆이 이에 對抗하여 繼續 萬歲運動을 進行하자 及其也는 無差別 射擊을 敢行하여 死傷者가 續出했다. [20]

이 때 문용기가 오른손에 太極旗를 들고 群衆의 앞으로 나아가 獨立運動의 正當性과 日帝의 蠻行을 糾彈하는 演說을 하였다. 그러자 日本 憲兵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太極旗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太極旗를 들고 萬歲를 외치며 前進하자 이番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繼續 萬歲를 외쳤다. 이에 激忿한 日本 憲兵은 끝내 追擊하여 事情없이 亂刺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瞬間까지 獨立萬歲를 외치다가 끝내 殉國하였다. [21]

群山 3·5 萬歲運動 [ 編輯 ]

全北 群山 에서 英明學校 卒業生 김병수 1919年 2月 26日 民族代表 33人中 한名이던 이갑성 과 接觸하여 獨立宣言書 200餘張을 건네받고 萬歲運動을 主導하여 英明學校, 멜本딘女學校(現 群山榮光女中·高校), 구암敎會 敎人, 市民 等 500餘名이 3月 5日 示威에 參加하였다. 윌리엄 린튼 은 群山의 萬歲運動을 指導하였는데, 示威는 以後에도 28次例에 걸쳐 繼續되어 市民 3萬餘名이 示威에 參加하였다. 示威 當時 日帝의 暴力鎭壓으로 因해 53名이 死亡하고, 72名이 失踪되었으며, 195名이 負傷을 當해 萬歲運動으로 인한 死傷者로서는 全羅北道 內에서 가장 많은 規模였다. 이는 3·1運動 以後 漢江 以南 地域에서 最初로 벌어진 萬歲運動으로 그 意味가 크다. [22] [23]

滿洲 舂精 萬歲運動 [ 編輯 ]

滿洲 地域에서의 代表的인 萬歲示威는 3月 13日 舂精에서 3萬餘 名이 參加한 示威였다. 이들은 獨立宣言書를 朗讀하고 獨立萬歲를 외쳤는데, 市街行進을 하자 中國軍隊가 示威隊를 向하여 發砲하여 死傷者가 發生하였다. 日帝는 3·1 運動의 影響을 遮斷하기 위하여 瀋陽에서 朝鮮人會를 열었다. 朝鮮人會에 參席한 韓國人들은 日本人과의 差別 撤廢를 要求하였다. [24]

被害 規模 [ 編輯 ]

運動의 參與 人員에 對하여 歷史學者들 사이에서 意見은 差異가 있다.

日本人 學者 야마베 겐타로에 依하면 運動의 參與者는 50萬 名 以上이라고 推定한다. [2] 韓國의 學者 신복룡은 46萬 名 程度로 把握하였다. 3月 1日 부터 4月 30日 까지 萬歲를 부른 사람의 數爻는 46萬 3086名 程度였다. [1] 그런데 歷史學硏究所의 《함께 보는 韓國近現代史》(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歷史》(경세원, 2002年)에서는 參與 人員 2百萬餘 名, 全國의 萬歲 示威 件數 1,542 回, 死亡 7,509 名, 負傷 15,961 名, 逮捕 46,948 名의 規模로 敍述한다. [25] [26] 參與 人員에 對하여 이렇게 큰 差異가 나는 理由는 典據로 삼은 史料에서 비롯한다. 歷史學硏究所나 한영우 等은 그 出處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大體로 박은식 의 《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에 실린 統計를 典據로 삼았다. [27] 많은 韓國의 敎科用 島嶼에서도 大體로 이 統計를 活用한다. [28]

그런데 3·1 運動을 鎭壓하였던 朝鮮總督府 쪽의 統計는 이와 크게 差異 난다. 朝鮮總督府는 當時 朝鮮憲兵隊司令部와 總督府 警務摠監部의 報告書를 바탕으로 《朝鮮騷擾事件一覽表》(朝鮮騷擾事件一覽表) [29] [30] 를 作成하여 3月 1日에서 4月 末까지의 狀況을 10日 單位로 整理하였다. 이를 合算하면 4月末까지 朝鮮人 示威 參與者는 58萬 7,641名(50名 以下 參與者의 境遇는 除外), 檢擧者 26,713名(當日 13,517名, 追加 檢擧 13,196名), 示威 參加者의 死亡 553名, 負傷 1,409名이라고 集計되어 있다. 또한 日本軍과 憲兵, 警察의 境遇 死亡 9名, 負傷 156名으로 集計하였다. 한便, 朝鮮憲兵司令部가 發刊한 《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 1919.4.21-1919.4.30) [31] 에서는 總 檢擧 件數를 26,713 名으로 集計하였다.

朴殷植의 統計는 3月에서 5月까지의 狀況을 整理한 것이고 朝鮮總督府의 것은 4月 末까지를 整理한 것이어서 單純한 比較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參與하여 壯烈하게 鬪爭하고 過程에서 苛酷한 彈壓받았음을 記憶하려는 獨立運動 陣營과 그들의 統治에 抵抗한 사람이 적었으며 彈壓 또한 秩序維持를 위한 程度였음을 强辯하기 위한 統治者側의 意圖가 일정하게 反映된 數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쪽 統計를 보아도 3·1 運動은 日帝 强占 以後 由來가 없는 規模의 獨立 運動이었다.

萬歲 運動 自制 活動 [ 編輯 ]

3.1運動 當時 示威隊에 對應하기 위해 堵列해 있는 日本 軍警
3.1運動 鎭壓 自制團 發足 新聞 記事

3·1 萬歲 運動이 全國으로 擴散되는 過程에서 暴力의 兆朕이 보이자 박중양 4月 6日 大邱 에서 自制 乃至는 鎭壓, 示威 參與者를 說得, 귀가시키기 위해 自制團 을 組織하였다. '自制團 發起人會'가 組織될 때 그는 自制團 本部를 構成하고 團長이 되었고, 大邱 自制團 本部長도 兼任하였다. 大邱부청 앞에서 組織된 自制團 組織 聲明書에서 박중양 은 自制團 結成 趣旨에 對해 自制團은 '輕擧妄動으로 인하여 國民의 品位를 損傷케 하는 일이 없도록 相互 自制케 함'을 目的으로 한다면서, '所要(3·1 運動)를 鎭壓하고 不逞한 무리를 排除'하는 것임을 闡明하였다.

以後 慶北道 參與官 신석린 이 主動이 되어 安東, 星州, 軍威, 金泉 等地에 自制團 支部가 組織되었다. 5月에는 慶尙南道 에도 釜山, 密陽, 昌原, 泗川, 統營 等地에 自制段이 構成되었으며, 6月에는 淸州, 忠州, 天安, 牙山, 堤川, 淸州 等地에 自制團 支部가 結成되고 6月 27日 沃川郡 옥천면에서 정석용 에 依해 沃川 自制段이 組織되었다.

이들 自制團은 12月까지 各地에서 3.1 運動 參加者들에게 武力 示威를 自制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說得, 呼訴하거나 萬歲 運動을 解散하는 等의 活動을 하였다.

反應 및 波及 效果 [ 編輯 ]

萬歲 熱氣는 5月까지 繼續되었다. 5月 31日 윤치호 는 7,8名의 젊은이가 鐘閣 驛 近處에서 太極旗를 들고 萬歲를 외치는 것을 目擊했다. 日本 憲兵이 들이닥치자 그 中 한名이 주머니칼로 自身의 목을 그었다. 이를 지켜본 尹致昊는 그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自身이 옳다고 確信하는 것을 지키기 爲해 '눈을 뜨고 地獄으로 뛰어들수 있는 그 勇氣에 感激 [32] '하였다. 그러나 이런 行動만으로는 獨立을 達成할 수 없다고 判斷했다. 그러면서도 윤치호 는 3.1 運動이 國內外에 韓國人에 對한 視角을 改善시켰다고 評했다.

韓國人들 스스로 民族意識을 깨우치는 契機를 마련했고, 朝鮮의 滅亡을 當然視하고 日本에게 肯定的이던 國內 滯留 美國 宣敎師들의 視線을 改善시켰다고 評價했다. 또한 日本의 殘忍한 鎭壓이 美國 人 宣敎師들과 美國 知識人들이 日本으로부터 등을 돌리거나 日本을 否定的으로 보는 契機를 마련했다고 評했다. [33]

國內 [ 編輯 ]

水原에서 萬歲運動主導한 妓生組合의 김향화

3.1運動을 契機로 민주 共和制의 大韓民國 臨時 政府가 樹立됨으로써 19世紀 後半부터 이어져 온 近代 國民 國家 樹立運動이 첫 結實을 맺었다. [34] 三一運動으로 말미암아 韓民族은 獨立을 向한 마음이 서로 一致함을 確認할 수 있었으며, 滿洲地方에 있던 獨立運動家들과 三一運動으로 因해 上海로 亡命한 獨立運動家들이 大韓民國 臨時政府 를 樹立함으로써 具體的인 成果를 거두었으며, 世界的으로 獨立의 決議를 나타내 各 國家의 國民에게 韓國의 獨立意志를 傳播하였다. 1945年 日本이 敗亡한 以後 勝戰國은 이런 韓國의 뜻을 받아들여 大韓民國을 獨立國家로 認定하기에 이르렀다.

한便 3.1 萬歲 運動 의 失敗를 豫見한 윤치호 는 萬歲 運動이 한참 進行 中이던 3月 2日 者의 日記에서 學生들을 앞세운 뒤, 萬歲 隊列에서 슬그머니 발을 뺀 基督敎 , 天道敎 界 人士들을 陰謀꾼들이라며 糾彈했다. [9] 3ㆍ1運動 後 拘置所에 收監되는 女學生들의 모습에서는 日帝 警察에 大寒憎惡와 憤怒로 밤새워 괴로워했다. [9] 以後 3月 5日 ~ 3月 7日 그는 市內를 다니며 萬歲 示威 直後의 動態를 把握했다. 3月 7日 記者 會見을 통해 다음과 같은 談話文을 發表하기도 했다.

强者와 서로 和合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弱者가 恒常 順從해야만 强者에게 愛護心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平和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萬若 弱者가 强者에 對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强者의 노여움을 사서 結局 弱者 自身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朝鮮은 內地에 對해서 그저 덮어 놓고 不溫한 言動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이 事件을 契機로 尹致昊는 甚한 批判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완용 , 예종석 等의 3.1 運動 反對 發言이 알려지면서 이완용, 예종석 等에 對한 聲討 輿論이 造成되었다.

朝鮮總督府 統治政策 變化 [ 編輯 ]

3·1 運動을 契機로 强勁策 乃至는 軍事, 警察에 依한 武斷 統治를 하던 朝鮮總督府 는 文化 統治로 政策을 바꾸게 된다. 3·1 運動에 依해 日本 政府나 總督府 側에서는 旣存의 統治 方式을 深刻하게 考慮하지 않을 수 없었고, 軍人 사이토 마코토 總督의 派遣을 起點으로 旣存의 强壓的 統治에서 懷柔的 統治로 그 方向을 旋回하게 된다. 그 結果 團體 活動 및 言論 活動이 許可되었고 아주 기초적인 初等 敎育 이 擴大되었다. 그러나 實質的으로는 이름만 바꾼 것에 不過한 것으로, 親日派 養成을 통해 韓民族 의 分裂을 試圖하였으며, 이는 植民 統治를 徹底히 隱蔽하기 위한 統治 方式에 지나지 않았다.

그 證據로 日本軍 이 韓半島에서 逐出될 때까지 文官 總督은 單 한 名조차도 任命되지 않았고, 憲兵 警察制를 普通 警察制로 바꾸었지만 事實上 名稱만 變更된 것으로 警察力은 오히려 더욱 講和되었으며, 獨立運動家 索出을 위한 專門的인 '高等 警察制'를 導入하였다. 日本은 文化 統治를 통하여 自身들을 朝鮮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少數의 親日官僚들을 키워 朝鮮人 을 離間하여 분열시키고, 民族의 近代 意識 成長을 誤導하며, 初級 學問과 技術 敎育만을 利用하여 日本의 植民地 支配에 도움이 될 人間을 大量 養成하는 結果를 낳았다.

日本 [ 編輯 ]

3·1 運動에 對한 當時 日本 政府의 公式的 事件 名稱은 “朝鮮萬歲騷擾事件”(朝鮮萬歲騷擾事件)이고, 基本的 視角은 ‘所要’(뭇사람이 들고 일어나서 暴行·脅迫을 함으로써 한 地方의 公共秩序(公共秩序)를 紊亂하게 하는 行爲)였다.

그러나 個人的인 評價는 다른 點도 있다. 京畿道 警察部 警察部長을 지낸 지바(千葉了)는 自身의 글 〈朝鮮獨立運動飛火〉에서 3·1 運動에 對해 “民族 本能의 地下水의 噴出” 또는 “川邊怪異의 賞”이라고 表現하였다. [13]

海外 [ 編輯 ]

3.1 萬歲運動 獨立宣言書 英文版.

뉴욕타임즈 는 1919年 3月 13日子에서 “朝鮮人들이 獨立을 宣言했다. 알려진 것 以上으로 3·1運動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數千餘名의 示威者가 逮捕됐다”고 記錄했다. AP通信 은 “獨立宣言文에 ‘正義와 人類愛의 이름으로 2000萬 同胞의 목소리를 代表하고 있다’고 明示돼 있다”고 報道했다. [35] 이運動의 始作부터 3.1運動에 關한 모든 韓國의 狀況을 海外에 傳達하는데는 캐나다의 宣敎師 프랭크 스코필드 博士의 影響이 매우 많았다. [36]

批判的 反應 [ 編輯 ]

윤치호 는 3.1 運動을 純眞한 愛國心에 기초한 民族主義者들의 無謀한 行動으로 把握했다. [9]

3.1 運動 當時 流言蜚語와 煽動이 있다는 批判이 當代부터 提起되었다. 基督敎 運動家이자 李花女子中學校 敎師였던 김창제 윤치호 에게 自身이 3.1 萬歲 運動에 參與할 수 없는 理由로, 萬歲 運動 當時 누군가에 依해 各種 迷信과 流言蜚語가 擴散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3.1 運動 에 對해 愛國的이기는 하지만 投機, 迷信, 허황된 말, 陰謀에 기초하고 있어서 同調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37] 김창제 는 누군가 組織的으로 流布시킨 流言蜚語가 平和的인 示威를 武力 示威로 만들고 及其也는 日本軍의 殘忍한 虐殺을 誘導했다며 批判하였다.

김창제 는 또한 多數가 參與해서 움직이는 일이 반드시 선량한 일이 아니라고 批判을 加하였다.

多數의 목소리가 곧 主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죠. 예수님을 十字架에 못박게 한 것도 多數의 要求잖아요. 天道敎와 基督敎의 聯合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얘기도 事實이 아닙니다. 主님의 아들에게 死刑을 宣告한 것도 바리새인과 헤롯의 聯合이었잖아요. [37]

김창제는 萬歲 示威가 갈수록 暴力的으로 變해가는 點을 指摘하였다. 김창제 는 自身이 3.1 運動에 參與할 수 없는 理由를 說明한 뒤, 多數의 생각, 多數의 選擇이 반드시 올바른 選擇은 아니라는 見解를 披瀝하였다. 아울러 김창제 는 多數의 選擇이 無條件 올바른 選擇이고 民主主義 라고 解釋하는 것을 反對했다. 윤치호 는 그의 見解에 積極 共感하였다. 수원역 隣近 水原面에서 夜間에는 商人과 勞動者가 合勢하여 日本人 商店에 돌을 던지고 窓琉璃 等을 破壞했다. [38]

기타 [ 編輯 ]

1946年 3月 1日 第27回 記念式을 始初로 國家 慶祝日로 指定되고 [39] , 1949年 10月 1日 <國慶日에관한법률>을 公布함으로써 國慶日로 指定되었다.

寫眞 [ 編輯 ]

3.1運動 當時에 撮影한 寫眞은 現在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몇 가지 參考할 만한 것이 있는데 하나는 <<korea independence movement>>라는 寫眞集이다. 3.1運動을 說明할 때 가장 잘 引用되는 寫眞들이 모두 이 寫眞集에 들어있다. 이 寫眞集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1919年 10月에 만들어진 버전과 1920年에 만들어진 것이다. 두 버전의 差異는 1920年本이 1919本에 비해 赤十字會 團體寫眞이 追加되는 等 페이지가 늘어났다는 點이다. 이 寫眞은 우리가 흔히 스코필드 宣敎師가 撮影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實際 스코필드 宣敎師가 撮影한 것인지는 正確하지 않다. 1919年本은 日本 外務省 所長 <<不逞團 關係잡건>> 朝鮮人의 富 - 再上海地方 1卷 에 編綴되어 있으며, 美國 컬럼비아대학 버크圖書館 에 所藏되어 있으며, 1920年本은 獨立記念館 과 美國 USC 等에 所藏되어 있다.(아래 寫眞은 USC 所藏本이다.)

또 하나는 日本 新聞에 揭載된 寫眞들이다. <<오사카每日新聞>>이나 <<오사카朝日新聞>> 等에서 3月 4日부터 3.1運動 關聯 記事를 報道하기 始作하는데, 서울, 平壤 等地의 示威 寫眞이 引用되고 있다. ((妓生으로 잘못 알고 있는) 女學生들의 萬歲 示威 參與 寫眞이 여기서 나온 것) 이 寫眞이 實際 示威 場面을 찍은 것인지 論難의 餘地도 있지만 3.1運動을 說明하는 데 자주 使用되고 있다. [40]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신복룡, 《韓國史 새로보기》 (풀빛, 2001) 216페이지
  2. 야마베 겐타로, 日本의 植民地 朝鮮統治 解剖, 108쪽, 語文學社
  3. 틀:웹 認容 (映畫 말모이에서볼수있음 廣告아님)
  4. <<하울이 본 韓國獨立運動史 第10部 黃布의 눈물>>-EBS
  5. 《韓國獨立運動史事前,3-7 :運動·團體便(4),p 337~ p 339》,獨立記念館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
  6. 이정식, 《大韓民國의 起源》(일조각, 2006) 269쪽 參照
  7. 김완섭 (2003). 《새 親日派를 위한 辨明》. 서울: 춘추사. 65-72쪽쪽. ISBN   89-952802-2-0 .   이 冊에서는 3·1 運動 當時에 '朝鮮 地域에는 日本軍이 없었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最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겨레新聞 - 日帝 ‘제암리 虐殺’ 隱蔽工作 드러나 中央日報 - 日帝 제암리虐殺 隱蔽 立證 朝鮮軍司令官 日記 發見 記事) 當時에도 日本軍이 朝鮮에 進駐해 있었다. 다만 그 名稱이 軍隊가 아닌 “憲兵 警察”이라는 點을 들어 “警察”이라고 主張하나, 이는 “憲兵”(Military Police, 軍隊 警察)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主張이 있으며, 實際 그들의 役割도 警察의 구실뿐만 아니라 憲兵의 구실과 末端 行政 官訴의 役割까지 하였다. 또한 當時 示威를 鎭壓한 이들 가운데 一部가 警察의 地位가 아닌 軍人의 地位(例를 들면 陸軍 ‘步兵 79聯隊’ 所屬 中尉 아리타 도시오 等)를 가지고 있었다.
  8. 신복룡 (2001年 12月 20日). 〈己未年 3月1日에 있었던 일〉. 《韓國史 새로 보기》 初 2刷판. 서울: 圖書出版 풀빛. 199~210쪽쪽. ISBN   89-7474-870-3 .  
  9. 尹致昊日記 Archived 2001年 2月 23日 - 웨이백 머신 韓國日報 2001年 2月 16日子
  10. 從來에는 正午(낮 12時)로 알려져 왔다.
  11. “기미 獨立 宣言書(己未 獨立宣言書)” . 2013年 9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9月 20日에 確認함 .  
  12.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 171~173쪽, 서문당, 박은식
  13.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125~126쪽쪽. ISBN   89-7199-036-8 .  
  14. 진명學校는 聖公會 병천敎會(1906年 設立)에서 運營하던 近代 近代式 敎育機關dms roQnf, 1908年 設立되었다
  15. 조진탁 : 獨立有功者 功勳錄 - 國家報勳處
  16. 《디지털報勳新聞》 (2006.8.8) 光復 61周年, 獨立運動家 313名 褒賞 Archived 2016年 3月 5日 - 웨이백 머신
  17.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강병일〉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PDF) . 서울. 548~551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2007年 9月 26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8月 18日에 確認함 .  
  18.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7年 12月). 〈이용원〉 (PDF) . 《2007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PDF) . 서울. 1325~1329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南原虐殺事件" 韓國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3n3362a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10. 1. 4字 記事]
  20. 現代人物-문용기 , 益山文化院
  21.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下) 20,21쪽, 서문당, 박은식
  22. 다시 보는 群山 3?5獨立萬歲運動 2007-03-01 뉴시스
  23. [全北]群山 옛 구암敎會에 ‘3·1運動 記念館’ 오픈 2008-11-21 東亞日報
  24.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41 - 中國東北地域便 III 5쪽, 2005年 國史編纂委員會
  25. 歷史學硏究所, 《함께 보는 韓國近現代史》 (서해문집, 2004) 139페이지
  26. 한영우, 〈3·1 運動〉, 《다시찾는 우리歷史》, 경세원, 2002年, ISBN   89-8341-057-4
  27. 박은식, 《 韓國獨立運動之血史 》, 1920年 - 3·1運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再引用
  28. 敎學社, 《 歷史 2 Archived 2018年 3月 2日 - 웨이백 머신 》,2013年
  29. 朝鮮騷擾事件一覽表 , 韓國史데이터베이스
  30.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 韓國史데이터베이스
  31. 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 , 韓國史데이터베이스
  32. 尹致昊日記 1919年 5月 31日子
  33. 尹致昊日記 1919年 3月 5日, 5月 28日, 5月 31日子
  34. 한철호 外 (2010年 7月 30日). 《高等學校 韓國史 敎科書》. (週)未來앤컬쳐. 237쪽.  
  35. 역사스페셜, 朝鮮 獨立鬪士 辯護했던 日 辯護士 照明… 放送社들 多樣한 3·1節 特輯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國民日報 2012年 2月 29日
  36. “獨立萬歲” 3·1 運動의 助力者…푸른 눈의 異邦人들, KBS 뉴스, 2018.03.01
  37. 윤치호,《尹致昊 日記 1916~1943: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時期》 (人物과 思想史, 2001) 109페이지
  38. 水原을 아시나요 》, 3·1運動의 聖地, 제암리 水原文化院 2012年12月20日
  39. 軍政法律 第2號 慶祝日恐怖의관한건 (1946年 2月 21日)
  40. 獨立記念館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日本新聞 韓國獨立運動技士집(1~2)》.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