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活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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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活蘭
1951年 트루먼 當時 美國 大統領을 豫防한 金活蘭
出生 1899年 2月 27日 ( 1899-02-27 )
大韓帝國 京畿道 仁川
死亡 1970年 2月 10日 ( 1970-02-10 ) (70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1]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
性別 女性
國籍 大韓民國
別稱 兒名(兒名)은 김기득 (金己得)
雅號(雅號)는 優越(又月)
洗禮名은 헬렌
日本式 이름은 아마基 가쓰란 (天城活蘭)
學歷 美國 컬럼비아 大學校 大學院 哲學博士
經歷 第3代 公報處長(1950)
招待 이화여자대학교 總長(1939~1961)
宗敎 改新敎 ( 監理會 )
父母 김진연(簿), 박도라(모)
兄弟 김애란(언니)
配偶者 없음(독신)

金活蘭 (金活蘭, 1899年 2月 27日 ~ 1970年 2月 10日 )은 日帝强占期 大韓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 財團理事長, 大寒基督敎敎育協會 會長 等을 歷任한 改新敎人 , 敎育者, 大韓民國 女性敎育의 先驅者이자 親日反民族行爲者 다. [2] 初名(初名)은 旣得(己得), 雅號는 優越(又月), 洗禮名은 헬렌(Helen), 日本式 이름은 아마基 街츠란(天城活蘭)이다. 梨花學堂 의 高等部를 거쳐 1918年 梨花學堂 大學部를 卒業하고 중앙기독교청년회 (YMCA)에서 活動하다가 女子 YMCA를 獨立, 1923年 유각경 等과 함께 朝鮮 中央女性基督敎靑年會 (YWCA)를 組織하였다.

1923年 美國 오하이오 웨슬리언 大學校 에 編入, 1924年 學事 學位를 받고, 보스턴 大學校 哲學과 에 編入하여 1926年 9月에는 哲學 碩士 를 받았으며, 歸國 後 李花女子專門學校 에서 敎師와 交感, 副校長 等으로 活動하였다. 1928年 美國 留學 中 "無知와 舊習의 打破"를 理由로 公開 斷髮을 하여 話題가 되었다. 1931年 10月에는 컬럼비아 大學校 에서 哲學 博士 를 받았다.

그러나 日帝强占期 1936年 前後로 日本의 强勁路線에 따라 積極的으로 親日 行爲를 하였다. 그는 講演, 論述活動을 하는 한便 1941年 創氏改名 後 展示 體制에 協力하여 칼럼, 講演, 學徒兵 督勵 等의 活動을 펼쳤다. 1941年 臨戰保國團 決戰否認大會에서 ‘女性의 武裝’, 1942年 싱가포르 攻略 大講演會에서는 ‘臺동아건설과 우리 準備’라는 主題로 講演했다. 그리고 여러 雜誌에 ‘徵兵制와 半島女性의 覺悟’, ‘뒷일은 우리가’, ‘男子에 지지 않게 皇國 女性으로서 使命을 完遂’ 等의 글을 發表하며 朝鮮 民衆들에게 日帝의 侵略 戰爭에 積極 參與할 것을 活潑하게 慫慂하는 積極的인 親日行脚을 서슴지 않았다. [3]

光復 以後에는 反託運動 에 參與한 뒤 48年 場面 , 조병옥 과 함께 파리 UN 總會에 派遣되어 大韓民國 政府를 承認받고 歸國했다. 1950年 韓國 戰爭 當時 戰時 內閣에 參與했다가 正式 公報處長 으로 活動하였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 初代 總長을 맡았으며, 言論人으로는 營者(英字)新聞社 ' 코리아타임즈 (The Korea Times) 社長을 맡았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幼年期 [ 編輯 ]

優越 金活蘭은 1899年 2月 27日 인천부 東區 창영동(當時 우각桐) 배다리 마을에서 事業街 김진연과 어머니 基督敎 信者인 박도라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연은 本來 平安北道 鐵山郡 出身으로 代農土를 가진 中農(中農)이었다가 求한 말 開港된 濟物浦 로 옮겨 倉庫業者가 되었다.

그는 3男 5女 中 막내였다. 本名은 ‘김기득’(金己得)으로 己亥年에 태어났다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4] 雅號는 優越(又月)이다. 일찍이 내리敎會의 傳道 夫人 헬렌에게 傳道받은 어머니 朴도라 女史는 後日 온 家族에게 勸誘하여 家族 모두를 基督敎 信者가 되게 했다. 그女는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基督敎 信仰敎育을 받았다. ‘활란’이라는 이름은 基督敎 信仰 깊었던 어머니의 影響에 따라 7歲 때에 監理敎 에 入敎하면서 ‘헬렌’(Helen)이라는 洗禮名을 받아 이를 아버지가 漢字 表記로 고쳐서 ‘활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梨花學堂 소學部 時節(앞줄 맨 오른쪽)

언니인 김신득(金辛得, 다른 이름은 김애란)은 김달하와 結婚했는데 後日 이화여자대학교 敎授, 東區女子中學校 校長을 거쳐 東區學院 理事長, YWCA 聯合會 財團 理事 等을 지낸 김정옥 은 언니 김신득의 딸이다. 그의 雅號인 優越은 兄夫인 김달하가 지어준 것이다.

1907年 仁川의 映畫學堂 에 入學했는데, 當時로서는 흔치 않은 新敎育을 받았다. 이듬해 1908年 家族이 漢城府 로 移徙하면서 梨花學堂 에 編入하였다. 梨花學堂 의 普通部, 中等部, 高等普通部를 거쳐 1916年 梨花學堂 大學部에 入學하였다. 어머니 朴徒라는 敎會 에 熱心히 出席, 傳道夫人의 役割을 하였고 그는 어머니의 信仰의 影響을 받고 篤實한 信仰人이 되었다.

信仰, 傳道 活動 [ 編輯 ]

梨花學堂 大學部 卒業 寫眞(1918年)

學費를 댈 수 있을 만큼 經濟的으로 安定된 집안이 아니었지만 어머니 朴徒라는 "나의 無知를 딸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一念으로 딸들의 高等 敎育을 積極的으로 後援, 한番도 딸들의 敎育을 中斷시킨 적이 없었다.

梨花學堂 大學部 時節 第3代 메이퀸으로 뽑혔고, 卒業式에서는 自身의 論文 〈女子의 高等敎育과 家庭〉을 主題로 韓國語 英語 로 講演을 하였다. [4] 梨花學堂 大學部를 1918年 第1回로 卒業하고 이 學校에서 梨花學堂 高等普通과의 英語 敎師로 活動했다. 1919年 4月 梨花學堂 高等普通과 英語 敎師로 在職하기로 되어있을 때 그해 3.1 運動 이 일어나 祕密 結社에 參與했다.

1920年 6月 '이화傳道大'를 結成해 全國 各地를 돌며 農村 啓蒙과 福音 傳道 活動을 했다. 1920年 6月 7日 傳道大를 組織하여 全國을 巡廻하며 監理敎會 를 傳播했다. [4]

1922年 4月 中國 베이징에서 開催된 世界基督敎靑年聯合會에 김필례 와 함께 朝鮮 女性 代表로 參席했다. 이것이 契機가 되어 1923年 3月 김필례 , 유각경 等과 함께 朝鮮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YWCA)를 創設했다.

美國 留學 및 社會 活動 [ 編輯 ]

이화傳道大 活動
大學 敎會의 女學生들이 組織했던 이화傳道團의 宣敎 禁止 記事(1922年)

梨花學堂의 敎師로 在職하면서 1922年 傳道大 活動을 다녔으나 講演의 內容이 朝鮮總督府 日本 信徒에 批判的인 內容이라는 理由로 當局의 甚한 制裁, 檢閱을 받다가 途中에서 中斷되고 말았다. 傳道大 活動을 中斷하게 되자 베이징 에서 열린 世界基督學生大會에 參加했다가 朝鮮으로 돌아오지 않고 곧장 美國 으로 건너갔다. 1923年 初, 京城府 로 돌아와 김필례 , 유각경 等과 함께 중앙기독교청년회 (YMCA)에서 獨立하여 女子들의 YMCA인 大韓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 (YWCA)를 創設하였다. 이때 중앙기독교청년회 (YMCA)의 이상재 , 윤치호 , 양주삼 , 여운홍 等의 도움을 받았다.

이 무렵 金活蘭은 朝鮮 監理敎 監督이었던 웰取(H. Welch) 宣敎師 의 推薦을 받아 美國 으로 留學, 1922年 10月 美國 오하이오州 오하이오 웨슬리언 大學校 2學年에 編入하였다. 웰치 監理敎 宣敎師 들의 學費 支援으로 美國 留學 生活을 하였다. 오하이오 웨슬리언 大學校 에서 哲學 , 敎育學 , 雄辯學 等을 工夫하였고, 1923年 6月 위싱 파턴 에서 開催된 女子基督敎靑年會世界大會(YWCA 世界大會)에 參席하기도 했다. 1924年 6月에 오하이오 웨슬리언 大學校의 優秀 卒業生으로 學事 學位를 받았다.

日帝 强占期 活動 [ 編輯 ]

女性 啓蒙과 YWCA 活動 [ 編輯 ]

YWCA 創立, 女性 啓蒙 運動 [ 編輯 ]

1923年 一時 歸國하여 京城 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 (YMCA, 大韓基督敎靑年會 의 全身)에 所屬되었던 祈晴 女子部를 독립시켜, 김필례(金弼禮)·유각경(兪珏卿) 等과 함께 朝鮮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 (YWCA, 大韓女子基督敎靑年會 의 前身)를 創設하였고, 1924年 YWCA 世界大會에 朝鮮 YWCA의 承認을 얻는 데 主導的 구실을 하였다.

學業과 竝行해서 YWCA에서 活動하며 朝鮮 女性의 權益을 擁護하는 運動에 同參했고 各種 啓蒙, 講演, 傳道活動에도 參與했다. 그가 主張한 것은 女子 基督敎 人 宣敎事業의 活性化, 女子들의 文盲 退治, 女子 敎育 活性化, 女子의 社會活動 參與, 男尊女卑의 因習 打破 等이었다. 1924年 美國 滯留 中 中央 YWCA 가 世界 YWCA大會에 加入하는 데 主導的 구실을 하였다.

1924年 10月 보스턴 大學校 大學院 哲學科에 入學해 〈哲學과 宗敎의 關聯性〉이라는 論文으로 1926年 6月에 哲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1926年에는 새롭게 눈뜨기 始作한 女性의 發言權을 發表하기 위하여 雜誌 《輿論》을 發刊하였다. 雜誌《輿論》의 創刊 趣旨로 그는 '女性이여 어서 앞으로 나가자!'라고 하였고, 《輿論》誌는 主로 基督敎 關聯 女性의 立場, 或은 女性의 政治的 見解 等이 실렸다. 새롭게 눈뜨기 始作한 女性의 發言이 실리게 되었다.

歸國과 社會 活動, 敎育 活動 [ 編輯 ]
1929年 도쿄에서 열린 第3回 汎太平洋 會議에 參加한 韓民族 代表團. 左路부터 백관수 , 송진우 , 윤치호 , 유억겸 , 金活蘭

1925年 6月 李花女子專門學校 敎授가 되고 바로 學監(校監)에 兼任하였다.

1926年 4月 26日 朝鮮 의 마지막 王인 純宗 (隆熙皇帝)가 崩御하자, 梨花學堂 의 學監으로 在職中이던 그는 美國人 宣敎師 出身인 이화여전 校長과 副校長에게 諒解를 求하고, 梨花學堂의 轉學生에게 깃廣木으로 喪服을 해입히고 昌德宮 앞에서 望哭(望哭)을 하게 하였다.

1927年 컬럼비아 大學校 博士 課程에 入學했으나 一時 歸國하여 母校인 李花女子專門學校 에서 敎授로 1930年 6月까지 일하였고, 農村 活動을 다녔다. 또한 송진우 , 조만식 , 金性洙 等의 主導로 民立大學設立運動 이 推進되자 그는 民立大學 期成會 會員의 한 사람으로 民間 大學 設立 運動에 參與하였으나, 朝鮮總督府 學務局의 不許로 失敗하고 만다.

美國 滯留中 斷髮한 金活蘭(1928年)

1927年 專門職 女性들의 親睦 모임인 望月俱樂部 가 職業婦人會로 改編될 때 實行委員에 選定되었다. 以後 그는 專門職 從事 女性 外에도 中産層 女性들까지 會員 參與의 幅을 넓히자고 提案하였다. 女性들의 團體 參與 活動이 많아져야 자연스럽게 政治, 社會 問題에도 關心갖는 女性들이 늘어난다는 것이 그의 持論이었다. 한便 그는 그해 初부터 나혜석 , 김일엽 等과 함께 女性團體 組織 運動에 着手하였으나 여러番 醫師 衝突로 決裂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4月 유영준 , 유각경 , 최은희 , 황신덕 , 박원민 , 정종명 , 주세죽 等과 함께 槿友會 創立 準備委員을 맡았고, 5月 槿友會 創立 때 會長에 選出되었다. 理解 7月과 8月 사이 하와이 호놀롤루에서 열린 第2次 太平洋問題硏究會義에 유억겸 , 백관수 와 함께 朝鮮 代表로 參席했다.

1928年 美國 캔자스 市에서 열린 監理敎 總會에 平信徒 代表로 參席하고, 4月 예루살렘 에서 열린 國際 宣敎會議에 신흥우 , 홍병선 等과 參席했다. 이 宣敎會議에 參席하기 위해 사이공 에 當到했을 때 公開的으로 머리를 잘랐다. 이때 그는 트레머리를 斷髮로 바꾸었다. 예루살렘 國際 宣敎會議를 마치고 歸國한 뒤에는 斷髮 위에 남바위 를 쓰고 韓服 두루마기를 입은 채 구두를 신고 京城府 내를 闊步하고 다녔으며, 사람들이 킥킥거려도 아랑곳않고 돌아다녀 話題를 뿌렸다.

1928年 槿友會 에서 脫退하였다. 活動을 끊은 後 主로 基督敎 團體活動과 宣敎 活動에만 專念하였다.

基督敎 團體 運動과 宣敎 活動 [ 編輯 ]
1920年代의 梨花女專 卒業 寫眞

1928年 初 美國監理敎會 總會에 參席하였을 때, 監理敎 總會에서는 美國 內部의 景氣不況이 甚하여 中國 朝鮮 監理敎 會에 資金 支援이 어렵다는 點을 들어 外國宣敎事業을 縮小시키기로 議決하고, 朝鮮 에 主宰하던 監理敎會 舟橋를 없애고 中國 이나 日本 監理敎會 의 主敎가 이를 겸하도록 決定하였다. 이에 金活蘭은 卽時 緊急發言權을 얻어 監理敎會 主敎의 喪主를 要請했으나 어렵다는 反應이 나타나자, 朝鮮 에 獨立된 主敎를 繼續 主宰할 것과 朝鮮人 監理敎會 主敎의 選出을 要請하기도 했다.

1927年 槿友會 의 創立에 參與하였다. 그러나 1929年 무렵 金活蘭, 최활란(崔活蘭), 黃에스더 等 一部 基督敎 女性運動家들은 槿友會에 '발을 끊은 狀態'였다. [5] 나중에 金活蘭은 '組織과 機關에 얽매지이 않고 個人的으로 敎養事業에 主力'하자면서 '思想을 統一시키려는 것은 自然法則에 違反'이라고 自己 行動을 解明했다. [5] 槿友會와 新幹會 活動 外에도 金活蘭은 女性 基督敎 宣敎 및 敎育, 啓蒙 活動 亦是 竝行하였다. 그는 이화여전에서 主管하는 農村地域 婦女子 啓蒙運動에도 參與하여 農村 婦女子들을 對象으로 한글과 數字를 가르치기도 했다.

美國 留學 中이던 1928年 1月 中國 상하이에서 開催된 極東 基督敎 指導者 會議에 參席하고 歸國했다가 다시 그해 4月 팔레스타인 예루살렘 에서 開催된 國際 宣敎委員 會議에 參席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그는 斷定한 外貌, 英語 語彙力과 雄辯力 等을 인정받아 各種 會議의 朝鮮人 代表團이 派遣될 때 代表團員 또는 通譯의 한사람으로 選拔되었다.

博士課程 在學 時節 [ 編輯 ]

博士課程에 在學하면서도 在美 韓人僑民社會의 活動에도 參與하는 한便 李承晩 , 안창호 , 서재필 等의 在美 韓人 指導者들을 訪問하기도 했다. 1928年 5月 美國 캔자스에서 開催된 美國 基督敎 監理會 大會에 朝鮮人 代表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였다. 1928年 美國 留學中 "無知와 舊習의 打破"를 理由로 公開 斷髮을 하여 話題가 되었다. 1929年 11月 日本 교토 (京都)에서 열린 第3次 太平洋問題硏究會義에 朝鮮 代表로 윤치호 , 송진우 , 유억겸 , 백관수 와 함께 參席했다.

1930年 실론섬 에서 開催된 女子基督敎 靑年會 東南아시아大會에 參席하고 돌아왔다가 다시 美國 으로 건너갔다. 1930年 여름 컬럼비아 大學校 大學院으로 돌아가서 復學, 1年 3個月 동안 博士 論文을 準備하였다. 博士 學位 論文의 主題는 <韓國의 復興을 위한 農村敎育 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으로, 韓國의 農村 敎育에 對한 것이었다. 1931年 10月 컬럼비아 大學校 大學院 哲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이는 韓國人 女性으로는 1929年 미시건 大學校 에서 公衆保健學 博士 學位를 받은 송복신에 이어 史上 두 番째에 該當된다.

敎育, 農村 啓蒙 活動 [ 編輯 ]

1920年代의 梨花女專 敎授 金活蘭과 김필례
이화여전의 敎授로 있던 두 사람은 女子基督敎靑年會 YWCA의 組織 擴張을 위해 努力하였다.

1931年 博士 學位를 받고 배便으로 日本 을 經由하여 歸國한 後 1931年 6月에는 덴마크人 의 經濟復興에 對한 것을 紹介, 《正말인(丁抹人)의 經濟復興論》을 著述하여, 實力 養成論 을 根據로 産業, 農業, 經濟 各 部門에서 實力을 養成한 덴마크人들의 復興 過程을 紹介, 當時 韓國社會와 類似하게 經濟的, 精神的으로 沈滯되었던 덴마크가 어떻게 復興하게 되었는가를 알렸다.

1932年 9月부터 1939年 8月까지 李花女子專門學校 敎授로서 學監(校監) 및 副校長을 지냈으며, 副校長 在職 中이던 1935年 11月 暫時 校長 代理를 맡았다. 이때 그는 學校 運營의 主導權을 놓고 校長이었던 앨리스 아펜젤러 와 葛藤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의 葛藤에서 어느 쪽의 便을 들어줄 수도 없었던 윤치호 양주삼 은 지켜만 보았고, 內紛은 더욱 激化되었다. 이 무렵 그는 學校 政務 外에도 農村 敎育을 통한 文盲 退治 와 女性 啓蒙 活動에 注力하는 한便, 1932年 北美 基督敎 監理 會議, 1934年 世界女子基督敎靑年聯合會 東南亞細亞 會議에 朝鮮 代表로 參席하는 等 基督敎 團體 活動도 活潑히 展開했다.

한便 브나로드 運動 에도 同參하여 農村啓蒙運動을 推進하였는데, 이때 그는 文盲退治, 家庭經營에 必要한 知識獲得, 個人的 次元에서의 經濟自立, 封建的 因習 打破, 衣服改良 等을 支援하였다. 農閑期에는 婦女子들을 모아 各 地方에서 敎育의 必要性을 力說하는 講演, 敎會 에 다닐 것을 勸告하는 傳道 講演을 열기도 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財政的 問題로 困難을 겪던 安山 샘골의 農村兒童敎育施設과 女性學校의 敎師로 奉仕하던 崔容信 (崔容信) 等을 財政的, 精神的, 金錢的으로 支援하여 施設을 具備하도록 도와주었다. 한便으로 YWCA 女性 基督敎 靑年會의 會員을 募集하기 위해 直接 會員 募集과 基督敎 宣敎 事業에 直接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中日 戰爭 戰後 [ 編輯 ]

1930年代 後半 李承晩 이 影響을 發揮하던 獨立運動 團體 興業俱樂部 에도 加入하여 活動하였다. 그러나 朝鮮總督府 西大門 警察署 에 監禁된 윤치영 의 陳述로 1938年 5月 18日子 西大門 警察署 張의 報告에 依하면 그는 興業俱樂部 의 同志 會員의 한 사람으로 報告되었다. [6] 1939年 第7代 李花女子專門學校 校長이 되었다.

1936年 末부터 敎育과 女性 啓蒙 分野에서 親日 活動에 積極的으로 加擔하기 始作했다. 中日 戰爭 이 勃發한 以後부터 칼럼, 講演活動에 나서는 한便 1937年부터는 朝鮮總督府 가 支援하는 朝鮮夫人硏究會 , 放送宣傳協議會 , 愛國금차回 等에 參與했다.

그는 김복수 等 上流層 女性들과 함께 愛國금차回 를 組織하여 金비녀와 金가락지를 뽑아 日帝의 國防費로 獻納하는 運動을 벌였다.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朝鮮言論輔國會 , 조선임전보국단 을 통해 時局 講演에 數百 次例 나섰으며, 《 東洋地廣 》, 《 趙匡 》, 每日申報 等 新聞이나 雜誌 等에 日本 帝國 戰爭 支援을 積極 奬勵하는 煽動과 내선 一切 , 親日 및 戰爭 支援 活動 等 論說 글들을 數百 次例 寄稿하는 等 日帝 末期 展示 體制에 積極的인 活動을 했다. 또한 日本 帝國의 韓民族 抹殺 政策인 神社參拜 强要 에 協力하고, 徵兵을 勸誘하는 講演에도 앞장섰다.

戰爭 協力 및 督勵 活動 [ 編輯 ]

親日 및 戰爭 支援 活動 [ 編輯 ]

1938年 6月 20日 그는 이화여전 이화보陸 學生 4百餘 名을 動員, '愛國子女團'이라는 것을 組織케 하고 團長에는 金活蘭 自身이 就任하였다. [7] 金活蘭은 이화여전 校長 等으로 있으면서 積極 親日을 한 사람이었다. [7] 1939年에는 〈夫人들끼리의 愛情과 理解-내선(內鮮) 夫人의 愛國的 協力을 위하여〉(1939.03)등의 主題로 巡廻講演을 하였다. 이어 유각경, 이숙종(李淑鍾), 임영신 , 박순천 , 노천명 , 모윤숙 ·황선덕 等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幹部가 되어 精神對 參與 宣傳 督勵, 學徒兵 支援을 宣傳, 督勵하고 皇國夫人으로서 지녀야 할 資質硏磨와 覺醒을 促求하는 講演活動에 나섰다.

1939年 이화保育學校 (이화여대 附屬幼稚園의 前身)의 校長이 되어, 이화여전 副校長職과 兼任하였다. 한便 이화여전의 副校長으로 있으면서 學校運營의 主導權을 쥐려고 校長인 앨리스 아펜젤러 와 隨時로 摩擦을 빚었으며, 윤치호 에게 도움을 請하였으나 윤치호 는 拒絶하였다. 1939年 朝鮮總督府 에서 外國人 基督敎 宣敎師 들이 自由主義 를 부추긴다는 理由로 追放하게 되자 그해 4月 李花女子專門學校 第7代 校長이 되었다. 以後 總督府가 閉校令을 내릴 때까지 이화여전 校長과 이화保育學校 校長을 겸하였다. 또한 이화女專 維持財團 理事長을 兼任하여 1945年까지 在職했다.

金活蘭은 臨戰對策協力會 委員,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指導委員, 國民總力 朝鮮聯盟 評議員, 朝鮮敎化團體聯合會 否認啓蒙督勵半, 朝鮮言論輔國會 理事 等 各種 親日團體의 任員職을 맡았다. 그리고 女性大衆에게는 努力動員, 家庭의 節約과 貯蓄을 强調하였다. 1941年에는 國民總力朝鮮聯盟 評議員 및 慘事로 活動하였다.

太平洋 戰爭 무렵 [ 編輯 ]

1941年 創氏改名 때 아마基 가쓰란(天城活蘭)으로 改名하고, 臨戰對策協力會 委員으로 活動하였다. 또한 1941年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指導委員이 되었다. 1941年 12月 27日 朝鮮保國團 主催로 府民館 에서 '決戰 否認大會'를 開催했다. [8] 演士로는 박인덕 , 金活蘭, 모윤숙 , 박순천 , 임숙재, 최정희 等이었다. [8] 以後 그는 夫人蹶起促求 講演, 決戰부인대 講演, 放送 等을 통해 日帝의 侵略政策을 美化하고 內鮮一體·황민化施策을 宣傳하며 一般女性이나 女學生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徵兵·徵用·學兵 動員에 對한 理解를 促求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徵兵制라는 커다란 感激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貴한 아들을 즐겁게 戰場으로 내보내는 內地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半島女性 自身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國民으로서의 最大 責任을 다할 機會가 왔고, 그 責任을 다함으로써 眞正한 皇國臣民으로서의 榮光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惶悚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感激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責任을 다하기 위하여 最善을 다할 것이다.
 
— “徵兵制와 半島女性의 覺悟”, 《 新時代 》, 1942. 12
學徒兵 出陣의 北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勇躍(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寵厚(銃後)는 우리 婦女가 지킬 것이다. 男兒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生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學兵 諸君 앞에는 洋洋한 傳道가 열리었다. 몸으로 國家에 順(殉)하는 거룩한 使命이 附與되었다.
 
— “뒷일은 우리가”, 《 趙匡 》, 1943. 12

太平洋 戰爭 期間 中 그는 學徒兵 徵集을 督勵하는 講演 活動에 參與하고 論說을 發表하였다. 太平洋 戰爭 期間 中 〈徵兵制와 半島女性의 覺悟〉(1942.12), 〈男子에 지지 않게 皇國 女性으로서 使命을 完遂〉等의 글을 新聞과 雜誌에 發表하는 한便, 〈女性의 武裝〉(1941.12), 〈大東亞 建設과 우리 準備〉(1942.2) 等의 主題로 朝鮮總督府 政策에 協力할 것을 勸告하는 칼럼, 講演 等을 하였다.

光復 直前 [ 編輯 ]

日帝强占期 後半 그는 李花女子專門學校 의 活動 外에도 基督敎 靑年團體人 YWCA 女性靑年會와 YMCA 靑年會의 活動, 基督敎 宣敎 活動 等에도 參與하였다. 그러나 太平洋 戰爭 當時 1943年末 戰時非常措置方策으로 그가 맡고 있던 이화전문학교는 廢校당하고 農村指導員 鍊成所가 되었다. 그는 後에 自身의 自敍傳 《그 빛속의 작은 生命》에서 이를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해 12月 25日의 每日申報에는 이에 對한 所感을 發表하기도 했다.

亞細亞 10億 民衆의 運命을 決定할 重大한 決戰이 바야흐로 最高潮에 達한 이 때 어찌 女性人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以下 中略)... 이番 半島 學徒들에게 열려진 軍門으로 向한 光明의 길은 應當 우리 이화전문학교 生徒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女性이라는 한 가지 理由 때문에 參與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第一線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意味에서 우리 學校가 앞으로 女子特別鍊成所 指導員 養成機關으로 새로운 出發을 하게 된 것은 當然한 일인 同時에 生徒들도 皇國女性으로서 다시 없는 特戰이라고 感激하고 있습니다.
 
— 每日申報, 1943. 12. 25

이화전문학교가 女子靑年鍊成所 指導者然成果로 바뀌어, 旣存 學生들에게는 3個月間의 敎育을, 新入生에게는 1年間의 敎育을 시켜 前朝鮮에 設置된 女子靑年鍊成所 指導者로 配置하여 農村女性을 啓蒙한다는 日帝의 方針대로 되자, 1944年 이화여전 學生 募集에는 150名 募集에 40名밖에 支援하지 않았다. 게다가 在學生들도 激減하였다. 그리고 弟子들과 後輩들은 그를 外面하고 學校를 떠났다. 1943年부터 過勞 等으로 健康이 惡化되어 1944年 初에는 眼球 疾患에 걸렸다.

1944年 惡性 안질환에 걸렸으나 劇的으로 實名의 危機를 謀免하였다. 그가 眼科診療를 받을 當時 失明할 憂慮가 있다는 醫師의 말에 金活蘭은 "남의 貴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내가 장님이 되어도 抑鬱할 것 없지. ...(以下 中略)... 當然한 刑罰"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9] 1945年 朝鮮言論輔國會 移徙에 被選되었다. [週 1] [11]

光復 以後 活動 [ 編輯 ]

解放 直後 [ 編輯 ]

光復 後에는 建國準備委員會 參與를 拒否하고 1945年 8月 임영신 , 이은혜 等과 함께 女子國民黨 을 組織하였다.

1945年 9月 美軍 駐屯 後에는 美軍政 靑 韓國敎育委員會 委員에 任命되었다. 9月 李花女子專門學校를 復舊해 校長을 맡았다. 9月 初 美軍이 朝鮮 에 駐屯하면서 美軍이 이화를 訪問하여 學校를 軍用病院으로 쓰려하니 닷새 안에 建物을 비워 줄 것을 要請했다. 金活蘭은 이때를 回想하기를 '當時 앞이 캄캄했으며, 너무나도 無力한 韓國의 處地에 슬퍼하고 憤怒했다'고 한다.

그는 斷乎히 拒絶했으나 美軍側度 물러서지 않았다. 이 때 마침 서울 에 到着한 美國 뉴스위크 의 記者 헤롤드 아이삭스 를 說得, 그의 도움으로 美軍政 司令長官 존 하지 를 만나 “日帝 때도 내놓지 않았던 學校입니다. 只今 解放에 차있는 韓國에서 韓國의 高等敎育機關을 내놓으라는 것은 到底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立場을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美國의 어떤 女子大學을 軍에서 밀고 들어갔다면 어떤 輿論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라고 抗議했다. 하지 將軍은 强制로 占領하는 것이 아니라 像이 軍人들을 위해 建物의 使用을 要請하는 것이니 同意해달라고 付託했고, 學校를 위해서 더 좋은 場所를 物色해서 드리겠다는 約束을 하며 說得했다. 그러나 金活蘭은 이를 拒絶했다. 그는 '이 學校는 나의 私有財産이 아닙니다. 수많은 卒業生과 在學生 그리고, 全國 女性의 輿論을 들은 後에라야 어떤 決定을 내릴 수 있습니다.'라고 斷乎히 拒絶했고, 先生의 論理的인 말에 말門이 막힌 하지는 結局 梨花女大 의 建物 使用을 取消했다.

美軍政 活動과 敎育 活動 [ 編輯 ]

1946年에는 女子敎育擔當 敎育諮問委員을 兼職하였다. 軍政期間 中 그는 美軍政 敎育委員會 委員과 女子敎育擔當 敎育諮問委員을 맡아 女子 敎育의 擴大를 確定시켰다. 한便 李花女子專門學校 를 다시 大學으로 昇格시키기 위해 努力, 이화專門 學校를 綜合大學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專門學校 內에 翰林院, 예림원, 杏林원, 等의 3個 單科大學으로 나눠 運營하고, 綜合大學의 認可를 받기 위해 軍政廳 官吏들을 說得하였다. 그는 이화여대 雪林의 必要性의 理由로 하나는 女子 大學이 반드시 必要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世界의 大學이 世界의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專攻分野를 開拓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10月 이화여자대학교 로 昇格되고 初代 總長에 就任하였다.

金活蘭은 두 個의 原則 아래 學校發展計劃을 推進하였다. 한便 梨花女大 를 男女共學으로 하자는 提案이 나올 때마다 그는 ' 韓國 國會議員 議席의 折半을 女性이 차지하는 날이 올 때까지 안됩니다.'라며 拒絶하였다.

1945年 9月 女性基督敎靑年會(YWCA)를 再建하고 會長이 되었으며, 女性敎育 振興, 奬勵를 위한 韓國女學士會를 創設하여 初代會長에 就任하였다. 한便 政治的으로는 李承晩 , 金九 反共主義者 를 支持하여 女性의 政治的 發言權을 獲得하려 努力하였다. 10月에는 李承晩 의 歸國을 迎接하고, 大韓獨立促成中央會 에 參與하였으며, 12月 獨立促成國民會의 女性 組織인 大韓獨立促成婦人會를 組織하여 이를 이끌었다.

解放 政局의 政治 活動 [ 編輯 ]

1948年 12月 파리 UN 總會에 派遣된 大韓民國 政府 代表團. 맨 앞줄 왼쪽이 조병옥 , 가운데는 代表團長 場面 , 왼쪽은 장기영 , 뒷줄은 왼쪽부터 정일형 , 모윤숙 , 뒷줄 가운데가 金活蘭, 右側으로는 姓名 未詳, 김우평

1945年 韓國 敎育審議會의 委員의 한사람이 되어 場面 等과 함께 敎育理念分科에 參與하여 敎育關聯 政治理念 問題에 對한 議論을 하였다. 以後 이화여대 初代 總長을 비롯하여 여러 學校의 理事長職을 맡았으며, 女性 敎育界의 代表的인 人物로서 韓國女性團體協議會 會長 等 女性界에서 活潑한 活動을 했다. 以後 右派 運動에 나서 反託 運動 團體인 獨立促成中央夫人團 에 參加했다. 金九 가 모스크바 3上會談에 反撥, 强力한 反託運動을 推進하자 45年 12月 30日 結成된 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委員會 委員이 되었다. [12] 1946年 右翼系列의 女性團體이자 獨立促成國民會 의 隸下組織인 獨立促成中央夫人團에 參加하는 等 反託運動에 앞장섰다.

1946年 2月 민주議員 의 祕書로 參與하였고, 1946年 9月 프랑스 파리 에서 열린 유엔 總會에는 민주議員 側 代表子路 派遣, 會議에 參席하여 朝鮮 國民의 絶對多數가 共産主義 를 決死反對한다고 發表, 共産主義 者들이 韓半島의 獨立을 妨害한다고 主張하였다. 1946年에는 中華民國 항저우 (杭州)에서 開催된 女子基督敎靑年會 世界大會에 朝鮮女性 代表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고 돌아왔다.

1948年 1月 南北協商 論과 單獨政府 樹立 論이 나뉘게 되자 李承晩 을 支持하고 單獨政府 樹立의 支持를 宣言하였다.

한便 그는 親日 人士로 指目된 바 있다. 2001年 <월간중앙> 8月號에서 公開한 '1948年 金九와 臨時政府 系列이 指目한 肅淸對象 親日人士들의 名單 草案'이라는 文件을 통해 金活蘭 初代 總長이 民族陣營에 依해 肅淸對象 中 두 番째로 올랐다. [13]

政治 活動 [ 編輯 ]

UN 代表團 派遣 [ 編輯 ]

1948年 李承晩 의 單獨 政府 樹立論을 支持하였다. 1948年 5月 10日 制憲國會議員 選擧에 서울 西大門區 國會議員 候補로 出馬했으나 落選했다. 그는 制憲 國會 議員 選擧에 女子 候補 모두 19名 出馬하여 한 사람도 當選되지 못한 點을 指摘, '知識階級의 女性과 一般女性들과의 緊密한 關係를 맺어야겠다는 點을 切實히 느꼈다'며 女子 有權者들의 政治 參與와 共感帶 形成의 必要性을 主張하였다.

1948年 12月 7日~ 12月 12日,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第3次 유엔 總會 (第3次) 代表團에, 大韓民國 의 유엔 承認을 위한 弘報使節로서 場面 (團長), 장기영 , 조병옥 , 정일형 , 전규홍 , 김우평 , 김준구 , 모윤숙 와 함께 參席하였다. [14] [15] 1950年 4月 中央敎育委員會 委員에 委囑되었으며, 1950年 5月의 第2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出馬하였으나 亦是 落選하였다.

1949年 3月 母校인 보스턴 大學校 에서 名譽 法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그해 9月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UN 總會에 參席하고 돌아왔으며, 大韓女子基督敎靑年會 聯合會(YWCA 聯合會) 財團 理事長에 選出되었다. 1950年 '女學士 協會' 創立委員會 發足에 參與하여 創立委員이자, 初代 委員長에 選出되어 大韓民國 國內의 女子 學校 開校, 設立 運動을 主管하였다.

韓國 戰爭 期間 中 [ 編輯 ]

그 해 6月 25日 韓國 戰爭 이 터지자 서울 市內 野山에 隱身해 있다가, 戰爭 直後 政府가 避難갈 때 戰時 內閣에 特別 召集되었다. 韓國 戰爭 中이던 1950年 公報處 第3代 長官을 지내기도 했다.

釜山 으로 내려갔다가 1951年 戰時 國民 弘報 外交 同盟 全體 委員長이 되고 1951年 4月 大韓民國 民間 外交使節로 美國 워싱턴 D.C. 를 訪問, 美國 上,下院의 基督敎 信者인 議員들에게 韓國의 自由, 信仰의 自由를 지키기 위한 도움을 呼訴하고 韓國 戰爭에 對한 꾸준한 支援을 要請하였고, 5月 오하이오州 로 가 母校인 오하이오 웨슬리언 大學校 에서 名譽 法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52年 1月부터 1954年까지 英字新聞 코리아타임즈 (The Korea Times) 社長을 맡았다. 또한 國民弘報外交同盟 을 組織하여 美國 과 UN 參戰國과의 民間外交 및 外國參戰兵들의 慰問 等 展示國家의 女性運動을 指導하였다. 그리고 派兵軍人 中 基督敎 系列 將星과 指揮官, 軍人들에게 韓國 의 自由 民主主義와 基督敎 信仰을 가질 自由를 지켜달라고 呼訴하였다. 1953年 英國 政府의 招請으로 런던 에서 開催된 言論人大會에 大韓民國 側 代表로 派遣, 參席하였으며, 1953年 유네스코 韓國委員會 執行委員에 選任되었다. 또한 國民弘報外交同盟을 組織하여 參戰國과의 民間外交 및 外國參戰兵들의 慰問 等 展示國家의 女性運動을 指導하였다.

1951年 9月 1日 避難地 釜山 에서 이화여자대학교 의 臨時 學校 敎師建物을 얻어 學校 運營을 繼續하였다. 1952年 休戰이 되자 서울 로 올라와 이화여자대학교 總長으로 活動하였다. 1953年 英國 政府와 招請을 받아 런던에서 열린 言論人 大會에 韓國 代表로 參席하고 돌아왔으며, 그해 財團 法人 興한의 理事, 文敎財團 聯合會 理事, 유네스코 韓國 委員會 執行委員에 委囑되었다.

政治, 外交 活動 [ 編輯 ]

1954年 美國國際基督敎宣敎委員會에 參席하였고, 그해 6月 코넬 大學 에서 名譽 法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7月 歸國, 國際基督敎宣敎委員會 副委員長과 基督敎大韓監理會理事 및 實行委員에 委囑되었고, 以後 韓美財團理事, 문교부 高等敎育과 敎授資格審査委員, 문교부 傘下 大韓敎育審査委員會 副委員長 等에 委囑되었다. 7月 24日에는 大韓民國 學術院 哲學 部門 會員이 되었다.

1955年 2月 문교부 中央敎育委員會 委員이 되고, 바로 함태영 等과 함께 基督敎 放送局 後援會 理事가 되었으며 바로 後援會 理事長이 되었다. 또한韓國 4H 俱樂部 委員會 移徙에도 被選되었다.

1955年 大韓赤十字社 副總裁를 맡았고, 1957年 10月 美國 뉴욕 에서 開催된 1957年 UN總會에 大韓民國 代表團의 한 사람으로 다녀왔고, 1958年 10月 다시 뉴욕에서 열린 1958年의 UN總會 韓國代表團의 한사람으로 다녀왔다. 1959年 韓國女性團體協議會 의 組織에 參與하였다. 1959年 6月 스위스 제네바 에서 開催된 國際赤十字 會議에 大韓民國 代表團의 한사람으로 派遣되었고, 그해 9月 뉴욕 에서 열린 UN總會에 大韓民國 代表로 參席하고 歸國하였다.

그는 1948年 12月, 1956年 11月, 1957年 10月, 1958年 10月, 1959年 9月, 1965年 12月의 유엔 總會에 大韓民國 代表團이 派遣될 때 韓國 代表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였다. 1959年 12月부터 1970年 2月까지 韓國女性團體協議會 會長을 지냈다. 1959年 韓國아시아反共聯盟 副理事長과 韓國女學士協會 會長을 맡았다. 1959年 大韓赤十字社 副總裁로서 장택상 , 場面 等과 함께 日本 의 居住 僑胞의 北宋을 反對하기 위하여 제네바 赤十字社 本部를 訪問하고 歸國했다.

敎育·基督敎界 女性指導者의 代名詞 [ 編輯 ]

金活蘭은 日帝强占期 夏에서는 '專門學校의 唯一한 女性校長, 女性 YWCA 創立者의 한사람' 等이라는 修飾語와 함께 그는 敎育, 基督敎界의 女性主義 運動의 代表的인 人物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8·15 以後에는 梨花女大 總長職과 排貨學院, 國際大學, 東區學院, 금란女中高, 영란女中高 等 여러 學校의 財團 理事長職을 맡았으며, 社會團體로는 韓國女性團體協議會, 女學士協會, 大韓婦人會, 主婦클럽聯合會, YWCA 等 女性團體를 設立하고 會長 等의 任員職을 歷任하였다.

또한 公職 活動으로는 政府 樹立 直後에는 유엔總會 때 韓國代表로 參席하였고, 6·25 때는 戰時 內閣의 公報處長, 1965~70年에는 大韓民國 巡廻大使, 韓國아시아反共聯盟 理事 等 政治·外交活動에도 參與하였다. 宗敎 活動으로는 基督敎 女性 啓蒙運動, 基督敎界 女性團體 活動 및 全國 宣敎活動에호 活潑하게 參與하였다.

社會團體, 宣敎 活動 [ 編輯 ]

1960年 金襴女子中,金襴女子高等學校 財團 理事長에 委囑되었다. 1961年 9月 이화여자대학교 를 停年退職하고 名譽總長 兼 이화學院 財團 理事長을 맡았다. 1961年 金襴顚倒協會를 組織해 農村 基督敎 傳道 活動을 展開했고, 大韓基督敎敎育者協會 會長, 全國福音化運動 名譽會長, 韓國基督火運動委員會 委員長 等을 맡았다. 1962年 神經炎 으로 病席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活動하였다. 以後 1964年까지 洋酒, 仁川, 抱川, 忠州, 扶餘, 原州, 全州, 大田, 신탄진, 大邱 等으로 傳道 旅行을 다니기도 했다. 1962年 11月 第12次 유네스코 總會에 韓國側 代表로 프랑스 파리 에 다녀왔다.

1963年 8月 敎育 部門의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막사이사이상 의 公益部門賞과 美國 監理敎會에서 주는 다락房賞等을 受賞했다. 1964年 5月 美國 웨스턴하우스의 史料編纂委員의 한 사람으로 委囑되어 都彌, 敎育部門 擔當委員으로 參與하였다. 이때 웨스턴하우스에서는 타임캡슐에 넣을 資料編纂을 하고 있었다. 1964年 11月 프랑스 파리 에서 開催된 第13次 유네스코 總會에 韓國代表로 參席하였다.

1965年 9月 大韓民國 巡廻大使로 任命되어 1970年까지 在職하였다. 그는 平生을 獨身으로 살았으며 基督敎 活動, 女性 政治 運動 等에 參與하였으며 政治界에서 女性의 發言權 獲得을 위한 努力, 女性 基督敎 仁義 立場을 代辯하는 役割을 하였다.

最後 [ 編輯 ]

1966年 11月 프랑스 파리 에서 열린 第14次 유네스코 總會에는 韓國側 首席代表에 任命되어 代表團員들을 데리고 파리 總會에 參席하고 돌아왔다. 그는 1970年까지 梨花學堂 學校 法人 理事長으로 있었고, 1969年 3月 開校한 영란女子中,女子商業高等學校 [16] 設立을 主導하였다.

1970年 1月初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人間의 生命이 永遠 不滅하다는 것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더 좋은 生命의 길을 찾기 위해 살아왔소, 肉體와 環境에 얽매인 것을 克服하면서 내 나름대로 勝利의 길을 걸어 오느라 힘 썼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그의 遺言이 되었다. 그해 1月 糖尿病 動脈硬化 로 病席에 눕게 되었다. 2月 5日 心臟失調症과 不整脈, 腦溢血, 動脈硬化 等의 合倂症으로 昏睡狀態에 빠졌다.

1970年 2月 10日 서울特別市 서대문구 대신동 85番地 1番地 自宅에서 過勞와 糖尿病 , 腦出血 , 心臟疾患, 不整脈 等의 合倂症으로 死亡했다. 死亡當時 그의 나이 72歲였다.

著書로 自敍傳 《그 빛 속의 작은 生命》(1965) 等이 있다. 그는 晩年에 "人間의 生命이란 不滅하여 肉體가 없어지더라도 靈魂은 天國에 가게 되니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슬퍼할 必要는 없으며 葬禮式 代身 華麗한 勝利의 길로 還送해주는 歡送禮拜를 해주기 바란다."고 當付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에서 葬禮式이 擧行되었는데, 生前 黨部에 따라 韓國 에서는 처음으로 葬禮式을 音樂會와 가벼운 晩餐으로 하였다.

事後 [ 編輯 ]

死亡 後 서울特別市 중랑구 망우동 金襴동산에 安葬되었다. 1970年 大韓民國 政府에서 '大韓民國 一等修交勳章'을 追敍했다.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에 選定되었고,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整理해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도 包含되었다. 이화여대에 設置되었던 銅像에 對해서 金活蘭의 親日 活動에 對해 批判的인 민주노동당 學生委員會 學生들의 撤去 要求가 있었다. [17] 基督敎大韓監理會 가 2005年 光復 60周年 記念으로 펴낸 資料集 《하나님에게만 希望을 두고 살아라》에서 選定한 監理敎 내 親日 附逆者 名單 12名 中에도 윤치호 , 신흥우 와 함께 平信徒 3人 中 한 名으로 包含되었다. [18]

2008年 8月 學術誌 ‘韓國史 市民 講座’ 下半期號(43號)에서 大韓民國 建國 60周年 特輯 ‘大韓民國을 세운 사람들’을 選拔, 建國의 基礎를 다진 32名을 選定할 때 文化, 宗敎, 言論 部門의 한 사람으로 選定되었다. [19]

賞勳 經歷 [ 編輯 ]

  • 敎育部門 대한민국장(1963年)
  •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公益部門上(1963年 8月)
  • 美國 監理敎會에서 주는 다락房上 [20] (1963年)
  • 事後 유엔 韓國 代表로 오랫동안 活動한 功勞로 1970年 一等修交勳章 이 追敍되었다.

著書 [ 編輯 ]

  • 《그 빛속의 작은 生命》(1965)
  • 論文, 《韓國의 復興을 위한 農村敎育 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
  • 論文, 《正말인(丁抹人)의 經濟復興論》

學位 [ 編輯 ]

思想과 信念 [ 編輯 ]

啓蒙 運動과 精神 改造 [ 編輯 ]

쓰개치마 를 쓰고 登校中인 1900年代의 梨花學堂 女學生

1926年 當時의 因襲的 制約과 拘束을 打破하기 위하여 率先垂範하여 머리를 짧게 자르는 斷髮運動에 同參하기도 하였다.

博士學位人 <韓國의 復興을 위한 農村敎育 Rural Education for the Regeneration of Korea>에서 그는 朝鮮 에 基督敎를 宣敎, 布敎하려면 敎育과 啓蒙運動을 竝行해야 한다고 하였다. 1931年 博士學位를 받고 歸國한 後 著述한 《正말인(丁抹人)의 經濟復興論》그는 우리 民族에게 全民族의 精神刷新, 民衆 啓蒙과 敎育의 必要性, 協同組合運動의 發興을 强調하였으며, 이를 契機로 우리 나라에 協同組合運動의 擴散에 寄與하였다.

韓國 監理敎 保存 運動 [ 編輯 ]

1920年 3.1 運動 以後 美國 內의 長老敎 , 監理敎 , 浸禮敎 等 各 敎派의 敎團에서는 朝鮮 宣敎 事業을 抛棄하기로 하고, 日本 基督敎 聯合會와 日本長老敎, 監理敎, 浸禮敎會의 麾下에 두도록 定하였다. 그는 美國 남監理敎 北監理敎 回 指導者들을 說得하여 朝鮮內 撤收 沮止와 朝鮮內 獨自的 監理敎 敎區를 維持시켰다.

1928年 美國監理敎會 總會에 參席하였을 때, 美國 에는 美國 國內 經濟不況이 甚하여 自國 國民들부터 救濟하자며 外國宣敎事業을 縮小시키기로 하였다. 또한 1928年의 美國監理敎 總會에서는 朝鮮 에 禹主宰하던 主敎를 없애고 中國이나 日本의 監理敎 主敎가 이를 겸하도록 決定하였다. 그러자 會議에서 緊急發言權을 얻은 그는 基督敎 思想이 朝鮮 百姓들을 救濟할 수 있는 唯一한 思想임을 說得하여 總會가 方今 可決한 것을 飜覆, 뒤집게 하고, 朝鮮에 獨立된 監理敎 舟橋를 繼續 主宰하도록 만들었다.

이 때부터 雄辯力을 認定받은 이름이 알려지기 始作하여 日帝强占期 當時 各種 國際 會議나 太平洋會議 等의 代表團에 朝鮮人 代表의 한사람으로 參與하게 되었다.

家計도 [ 編輯 ]

  • 아버지: 김진연(金鎭淵)
  • 어머니: 박도라(朴萄羅)
  • 언니: 김신득(金辛得, 다른 이름은 김애란)
  • 兄夫: 김달하(金達河)
  • 조카: 김정옥 (金貞玉, 1913年 7月 4日~2004年 4月 14日)

論難 [ 編輯 ]

親日 行跡 [ 編輯 ]

2005年 3月 25日 이화여대 學生들은 親日派 金活蘭의 銅像 撤去를 要求하며, 아래의 親日 行跡을 밝혔다. [21]

  • 1939年 6月 《東洋地廣》 - 夫人들끼리의 愛情과 理解 - 내선 夫人의 愛國的 協力을 위하여
過去 朝鮮의 夫人運動은 어쨌든 華麗한 時期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正말로 口號에 不過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 一切 의 大業 속에서 正말로 確固하게 現實性이 있는 夫人運動이 展開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1941年 12月 27日 - 女性의 武裝 (조선임전보국단 主催 決戰否認大會 結成式 府民館 大講堂)
저 黑奴(黑奴) 解放(奴隸 解放)의 싸움을 聖殿이라 했고 十字軍의 싸움도 聖殿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聖殿은 正말로 내려진 것이다. 東亞 10億의 民族을 解放하고 光明으로 引導하려는 道義의 戰爭이다. 우리 寵厚의 半도 女性은 只今 이 道의 戰爭에 한 사람의 鬪士로서 加擔하고 있다는 光榮(光榮)을 가졌다.
  • 1942年 12月 - 徵兵制와 半島 女性의 覺悟 (이화여전 校長)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徵兵制라는 커다란 感激이 왔다. …(中略)… 이제 우리에게도 國民으로서의 最大 責任을 다할 機會가 왔고, 그 責任을 다함으로써 眞正한 皇國 臣民으로서의 榮光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惶悚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感激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責任을 다하기 위하여 最善을 다할 것이다.
  • 1943年 8月 7日 每日申報 - 거룩한 對話魂을 銘心 - 敵 결滅에 一路邁進
이 機會에 大東亞 建設을 위하여 東亞 10億의 民族을 저 앵글로 색슨 의 손으로부터 解放하기 위하여 우리 黃君이 道義의 싸움을 하고 있는 이 때에 半도 靑年에 이러한 榮譽를 내리옵심은 더욱 기쁜 바이며, 또한 幸福된 일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倍速으로부터 對話魂의 所有者가 되어야 한다. .... 尊嚴하옵신 皇室을 받들어 모시고 生死를 超越하여 大軍을 위하여 殉國 奉仕하는 그 마음 오직 우리 皇國 臣民만이, 特히 帝國 軍人만이 經驗할 수 있는 바이다.
  • 1943年 12月 趙匡 - 뒷일은 우리가
學兵制軍 앞에는 洋洋한 傳道가 열리었다. 몸으로 國家에 順(殉)하는 거룩한 使命이 附與되었다. 이 얼마나 感謝할 일이냐. 諸君은 오늘 이때를 永久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戰線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寵厚의 女性들은 諸君들이 安心할 만큼 萬事를 해來日 覺悟가 굳은 바이니, 바라건대 모쪼록 빛나는 專攻을 세워 朝鮮學徒의 참다운 一面을 길이 廳舍에 빛내여라!
  • 1943年 12月 25日 每日申報 - 男子에 지지 않게 皇國 女性으로서 使命을 完遂
1943年 12月 展示敎育臨時措置令에 따라, 李花女子專門學校를 廢校하고 '女子特別鍊成所'라는 農村 指導院 養成 機關으로 바뀐 것에 對하여 每日申報에 發表한 글…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第一線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意味에서 우리 學校가 앞으로 女子特別鍊成所 指導員 養成 機關으로 새로운 出發을 하게 된 것은 當然한 일인 同時에 生徒들도 皇國 女性으로서 다시 없는 特戰이라고 感激하고 있습니다.
  • 1938年 6月 9日 每日申報 - 感激과 加重한 責任 - 陣頭에 나설 女學生의 決議
1938年 6月 當時 朝鮮 YWCA의 會長으로 있던 그는 “非常時局에 있어 基督敎 女子 靑年들도 내선 一切의 旗발 아래로 모여 時局을 再認識하는 同時에 皇國 臣民으로서 앞날을 自己(自期)하는 意味에서…”라며 日本 YWCA에 加盟 發表.

銅像 撤去 問題 [ 編輯 ]

2005年 4月 25日 민노당 이화여대 學生委員會(以下 이대 學生위)는 25日 낮 12時 大學 內 金活蘭 銅像 앞에서 梨花女大 親日殘滓 淸算을 위한 記者會見을 열고 '金活蘭 賞' 廢止와 銅像撤去 等을 要求했다. 이대 學生位는 聲明書에서 “이화의 자랑스러운 先輩는 親日派 金活蘭 초대總長이 아닌 梨花學堂의 在學生으로서 獨立運動에 自身을 獻身한 柳寬順 醫師가 되어야 한다”며 “韓國의 女性運動은 金活蘭 이화여대 總長을 克服하지 않으면 發展이 없다”고 指摘했다. [13]

이들은 또한 “이화여대 學生手帖을 보면 金活蘭 總長이 이화의 뿌리로, 先輩로 올라와 있다”며 “金活蘭 前 總長의 親日行跡에 對한 立場을 總學生會(學生手帖 內容은 總學生會 責任으로 作成)에 듣고자 했지만 어떠한 答도 얻을 수 없었다”며 親日 總長을 이화의 뿌리로 選定한 總學生會에 對해 批判했다. [13] 이화여대 總學生會는 민노당 學生위의 公開質疑에 對한 答辯에서 金活蘭 初代總長을 學生手帖에 收錄한 것은 梨花人의 뿌리찾기 次元이라고 解明했다. 그러나 親日行跡에 對한 質問에는 答辯하지 않았다. [13] 이화여대 總學生會는 4月 23日 "在學生들에게 梨花女大 歷史에 對해 잘 알려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제1대 메리 F. 스크랜턴 當場님부터 第8代 김옥길 總長님까지 모두 다섯 분의 歷代 總長님을 收錄했고 金活蘭 總長님은 이 中 한 분의 總長님으로 收錄되었다"고 答辯했다. [13] 민노당 學生位를 비롯한 一部 學生들의 要求에 學校 側에서는 應對하지 않았고 銅像 撤去를 要求하는 一部 學生과 이를 反對하는 學校 側의 葛藤은 進行 中에 있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金活蘭에 對한 評價는 매우 相反된 評價로 나뉘어 있다. [22]

肯定的 評價 [ 編輯 ]

韓國 近現代史에서 美國 博士學位를 授與받은 代表的인 엘리트 知識人으로 女性의 社會的, 經濟的 地位를 向上시키는 데 功績을 남겼으며 女性主義 擴散에 寄與했다는 評價가 있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1936年 前後로 代表的인 女性 親日派 로 變節해 日帝 末期 展示 體制 때 積極的인 戰爭 協力者로 活動하였다는 批判的인 評價가 많다. [22] 또한 女性 敎育者들 中 自身의 弟子를 戰爭터에 보낸 人物 中의 한 사람이라는 否定的인 視角도 存在한다.

梨花女大 學生 모임인 異口同聲은 "金活蘭 初代 總長은 그동안 '女性博士 1號', '女性運動의 先驅者'라는 理由로 제대로 된 歷史的 評價를 받지 못했다"고 指摘했다. [23] 異口同聲은 " 梨花女大 의 부끄러운 歷史로 남아있는 金活蘭 初代 總長보다 獨立 運動을 위해 목숨을 받친 柳寬順 烈士가 이화여대의 자랑스런 先輩가 돼야 한다"며 " 柳寬順 烈士는 梨花人과 우리 國民이 본받아야 할 人物이다"고 말했다. 이어 " 梨花女大 의 부끄러운 歷史를 다시 쓰기 爲해 過誤는 徹底히 批判하고 공은 높이 사서 기려야 한다"며 " 柳寬順 烈士의 銅像을 梨花人의 힘으로 세우자"고 主張했다. [23]

기타 [ 編輯 ]

本名은 己亥年 에 태어났다 하여 旣得(己得)이라 했으나 後에 활란으로 改名했다. 활란이라는 이름은 그의 監理敎 洗禮名 헬렌(Helen)을 漢字 漁撈 音譯해서 表記한 것이다. 外國에서는 그의 洗禮名이자 英文名人 헬렌 킴(Hellen Kim)으로 널리 알려졌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

  1. 狀況忌避者들은 말한다. 高麗大學의 前身인 보성전문을 運營했던 인촌 金性洙 朝鮮 學生들에게 日本 大東亞戰爭 에 協力하라는 글을 쓰고 在學生들에게 家庭訪問으로 積極的인 同參과 協力을 求하는 等 親日에 앞장서서 皇國臣民이 될 것을 促求함으로써 친일인명사전 에 登載되기는 했지만 그를 無條件 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日帝侵略 下에서 學校를 運營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選擇이기에 日帝侵略에 協力할 수밖에 없었다는 不可避性을 學生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意圖에서 敎科書에 敍述한 것이라고, 이런 窮塞한 辨明으로 擁護하며 조선임전보국단 에서 함께 活躍한 이화여전의 金活蘭과 연희전문의 백낙준 等도 斗頓하였다.

    이러한 便利한 論理로 日本 總督府의 彈壓이 極甚했던 時節 朝鮮 學生들을 向해 日本과 朝鮮이 하나라며 內鮮一體 를 强調하며, 日本 天皇 아래 皇國臣民이 된 것에 感謝하며, 日本 宗敎인 信徒에 參拜하는 神社參拜할 것을 强要하여 良心을 欺罔토록 하고, 大東亞共榮圈을 主唱하며 日本이 일으킨 侵略戰爭의 銃알받이로 나갈 것을 朝鮮 靑年들에게 督勵한, 그래서 日本軍의 不足한 兵力을 强化시켜 오히려 戰爭을 더 持續하게 만드는데 一助한 이들이 있었기에 朝鮮의 敎育機關이 維持되었고, 이를 通해 朝鮮 靑年들에게 敎育을 시킬 수 있었음을 多幸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强調한다. 어떻게 보면 맞는 듯하지만 이러한 狀況論理는 沒價値的이다.

    숭실大學은 日本 神社參拜 에 應할 수 없다며 自進廢校하였다. 그리고 1954年에 서울 에서 다시 大學門을 열었다. 萬一 그때 모든 學校가 日本에 抵抗하며 廢校의 길을 함께 걸었다면, 그 凝集된 힘이 오히려 日本敗亡을 앞당겼을 것이고, 民族 全部가 사는 길이 앞당겨져 왔을 것이다. 모두 抵抗하는 길 代身 一部가 무릎 꿇고 服從하는 길을 選擇해, 抵抗하는 者들을 죽게 만들고, 背信한 自己들만 살아남았다. 이런 狀況論理를 繼續 主張하며 日本에 協力하는 길을 選擇함으로써 自身들만 살아남고서는, 이제 와서는 그때 狀況이 그러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自身들의 正當性을 擁護하는 狀況忌避者들은 그래서 沒廉恥하고 卑怯하다는 것이다. [10]

出處

  1. 兵士( 過勞死 , 糖尿病 , 急性 腦出血 , 心臟疾患, 不整脈 , 動脈硬化 의 合倂症)
  2. “金活蘭(金活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020年 4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0年 8月 29日에 確認함 .  
  3. “[권종현의 敎育希望] 私學法人이 懲戒權을 濫用해도 어쩔 수 없다는 敎育部?” . 民衆의소리. 2019年 7月 24日.  
  4. 김은신 (1995年 11月 1日). 《이것이 韓國 最初》. 三門. 18~20쪽. ISBN   978-89-85407-35-9 .  
  5. 박은봉, 《韓國史 100 場面》(嘉藍企劃, 1998) 349
  6. 雩南 李承晩 硏究(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쪽
  7. 송건호, 《송건호 全集 4》(한길사, 2002) 137페이지
  8. 송건호, 《송건호 全集 4》(한길사, 2002) 138페이지
  9. 장상氏가 辯護하는 '金活蘭 親日行脚'의 全貌 '民族正氣 세우는 國會..., 전홍기慧 記者, 프레시안(2002.07.30) 記事 參照
  10. 오시영 (2013年 6月 7日). “오시영의 世上의 窓-김삼환 詩人의 “따뜻한 손”, 참을 수 없는 歷史 歪曲者들의 詭辯” . 法律新聞. 2013年 12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11月 30日에 確認함 .  
  11. 言論社主·大學總長 等 日帝末 指導層 恥部 ‘낱낱이’ 홍석재 記者, 한겨레(2009.11.27) 記事 參照
  12.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1993, 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255
  13. 이대 學生위 "親日派 金活蘭 銅像 撤去하라" 오마이뉴스 2005.03.25
  14. 建國外交, 監督 李承晩, 主演 場面, 助演 바티칸-美國 Archived 2013年 12月 7日 - 웨이백 머신 양원석 記者, 뉴데일리(2013.03.27) 記事 參照
  15. “歷代유엔總會韓國代表團” . 京鄕新聞. 1962年 8月 8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6. 現在 이화여자대학교竝設미디어高等學校로 校名 變更
  17. 조호진 (2005年 3月 25日). “梨大 學生위 "親日派 金活蘭 銅像 撤去하라 " . 오마이뉴스 . 2008年 5月 27日에 確認함 .  
  18. 이승규 (2005年 8月 6日). “監理會, 敎壇 內 親日 人士와 獨立運動家 名單 發表 - 光復 60周年 記念 禮拜 資料集 發刊…親日 人事 選定 根據 없고, 敎團 次元 親日은 빠져” . 뉴스앤조이 . 2008年 1月 4日에 確認함 .  
  19. 금동근, 윤완준 記者 (2008年 8月 22日). “混沌의 解放空間서 自由民主主義 礎石을 놓다” . 東亞日報. 2013年 12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20. “有色人으론 첫榮譽 = 金活蘭博士, 「다락房賞」 受賞” . 京鄕新聞. 1963年 10月 3日. 7面.  
  21. 조호진 記者 (2005年 3月 25日). “梨大 學生위, 親日派 金活蘭 銅像 撤去하라!” . 오마이뉴스.  
  22. “현정은 現代그룹 會長 '金活蘭 女性指導者上' 論難” . 2012年 1月 1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1月 4日에 確認함 .  
  23. 박상규 (2005年 6月 13日). " 자랑스런 李大人은 金活蘭이 아닌 柳寬順 " . 오마이뉴스 . 2008年 2月 6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參考 書籍

  • 金活蘭, 《그 빛 속의 작은 生命:優越金活蘭 自敍傳》(이화여자대학교 出版部, 1983)
  • 오병학, 金活蘭 (규장문화사, 1994)
  • 김옥길 外, 《金活蘭博士素描》(이화여자대학교 出版部, 1959)
  • 정충량, 《이화80年史》 (이화여자대학교 出版部, 1968)
  • 김정옥, 《姨母님 金活蘭》(정우사, 1977)
  • 反民族問題硏究所, 《親日派 99人》(反民族問題硏究所, 1993)
  •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90年史》(정동교회 歷史編纂委員會, 1977)
  • 이화여자대학교 篇, 《韓國女性史》(이화여자대학교 出版部, 1978)
  • 민숙현, 박혜경, 《한가람 봄바람에:이화100년야사》(지인사, 1981)
  • 反民族問題硏究所 (1993年 3月 1日). 〈金活蘭 : 親日의 길 걸은 女性 指導者의 代名詞 (강정숙)〉. 《親日派 99人 2》.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2-4 .  

뉴스 認容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앨리스 아펜셀러
招待 이화여자대학교 總長
1939年~1961年
後任
김옥길
前任
이철원
第3代 公報處長
1950年 8月 15日~1950年 11月 25日
後任
이철원
前任
김병원
第2代 公報處 次長
( 이헌구 와 共同)
1950年 6月 28日~1950年 8月 14日
後任
최석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