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
(黃祖, ? ~
208年
)는
中國
後漢
말 兄
注目
遊標
麾下의 武裝으로
降下太守
로 在職했다.
형주
로 南下한
孫堅
을 막아 죽였으며 그
아들
손책
과
孫權
의 거듭된
降下
侵攻 亦是 約 10年間 막아내다가 結局 잡혀 죽었다.
自身을 위해 熱心히 일한 감녕을 冷待했으며
예형
을 함부로 죽일 程度로 殘惡無道하고 眼下無人인 데다가 狀況 判斷을 제대로 못했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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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氏 兄弟의 怨讐
[
編輯
]
191年
(
草平
2年)
反童濯 聯合軍
이 分裂하여
南陽
태수
怨讐
과
渤海
태수
元素
가 서로 싸웠다.
遊標
는 元素와 손잡은 탓에 元述이
孫堅
을 시켜
형주
로 쳐들어왔다.
[1]
黃鳥歌 邀擊했지만
蕃盛
(樊城)과 等星(鄧城) 사이에서 격파당하고 現産(峴山)으로 달아났다.
192年
孫堅이
한手
를 건너 遊標의 據點인
襄陽性
을
包圍
한 채 皇祖를 쫓아 現産으로 올라왔다가 埋伏한 弓手가 쏜
화살
에 맞아 죽었다.(
襄陽 戰鬪
)
[2]
이로써 孫堅을 沮止하였다.
198年
(
建安
3年) 皇祖의 身世를 지고 있던
예형
을 죽였다. 元來 예형은
曹操
에서 유표를 거쳐
河口
(夏口)에 駐屯하던
[3]
皇祖에게 와있었는데 글을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는 等 정갈하게 잘 썼으므로 황조가 그 손을 잡으며 ‘黃鳥歌 말하고 싶은 마음 속의 생각을 正確히 그대로 쓴다’고 말할 程度로 優待하였다. 어느 날 몽衝(蒙衝)에서 船上 파티를 크게 열어 예형도 參席했는데 그 말이 不遜하였다. 황조가 부끄러워 나무라자 되레 注視하며 “老人 屍體야!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라고
쌍辱
을 날렸다.
[4]
황조가 크게 怒하여 鞭刑(鞭刑)을 賦課하려하자 예형은 더 辱을 퍼부었다. 完全히 뚜껑이 열린 黃鳥歌
死刑
을 命하니 平素 예형을 싫어하던
主婦
(主簿)가 卽時 兄을 執行하였다. 以前부터 豫型과 親했던 큰아들
黃驛
이 遑急히 맨발로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황조 亦是 後悔하여 厚하게 葬事지냈다.
[5]
10年間의 血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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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年
여강
태수
有勳
이
洋酒
(揚州)를 蠶食해가던
손책
의 거짓 同盟에 속아 驪江을 뺏기고
[6]
서새산(西塞山)의 遺棄(流沂)
[7]
까지 밀려나 遊標에게 急히 援兵을 請하였다. 黃役이 5,000名을 데리고 달려갔지만 反轉夏至 못하고
剛하군
사이縣(沙?縣, 沙羨縣)까지 손책에게 蹂躪당하였다.
[8]
皇祖의 妻子息이 붙잡히고 遊標가 增員한 한희(韓晞)와
조카
유호(劉虎) 等 수많은
사람
이 죽었다. 이때
손분
,
注油
,
女犯
,
情報
,
孫權
,
汗黨
,
黃蓋
,
桐濕
[9]
等이 參戰하였다.
[10]
손책 事後 그 뒤를 이은 孫權이
203年
降下를 侵犯하였다. 皇祖의
水軍
이 깨지고 追擊당했는데 部下
감녕
이 派的敎委(破賊校尉)였던 吳나라 將帥
능兆
를
활
로 쏴 죽이는
[11]
等 奮戰하여 더 큰 危機를 면하였다.
[12]
孫權은
性
은 征服하지 못하고
産月
問題로 인해 돌아갔다.
207年
孫權이 또 넘어왔는데 이番에도 皇祖를 克服하지 못하고
[13]
사람들만 잡아갔다. 그동안 황조도 施賞(柴桑, 只今의
장시省
主張詩
)을 몇 番 찔렀으며 손權君의
徐渻
과
[14]
周遊家 功을 올렸다.
[15]
惡緣의 끝
[
編輯
]
208年 봄 孫權이 감녕의 建議에 따라 또 侵入하였다. 앞서 감녕은 황조가 自身을 普通 사람으로 對하는 데에 不滿을 품고
동오
로 歸順했었다.
[16]
황조는 몽忠을 雙으로
免勾
(沔口)에 配置하여 守備하였다.
棕櫚나무
로 만든 큰 밧줄로 맨 돌을 닻으로 삼아 固定시키고 그 위에서 1,000名의 路需가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으니 孫權軍이 함부로 接近하지 못했다. 편장군(偏將軍) 桐襲과 別付私馬(別部司馬)
能通
이 各各 決死隊 100人을 이끌고 甲옷을 껴입은 채 큰 배를 몰아 突進하였다. 능통이 皇祖의 長壽 長石(張碩)을 베고
[17]
桐襲이 量 닻줄을 끊어 隊伍를 흩트리는 바람에 孫權의 大軍이 水陸竝進해왔다.
[9]
黃鳥歌
眞趣
의 水軍을 출전시켰으나 先頭에서 突擊하던 平北徒尉(平北都尉)
旅夢
에게 머리를 베였다. 孫權軍이 그 氣勢로 姓까지 猛烈하게 攻擊하였다.
[18]
黃鳥歌 밤을 타
[13]
逃走하다가 孫權의
起兵
風칙
에게 잡혀
梟首
當했다. 後任 태수로는
油種
과의 後繼者 競爭에서 밀려난 遊標의 長男
遺棄
가 赴任하였다.
評價
[
編輯
]
손책은 黃鳥歌
遊標
의
발톱
과
어금니
[爪牙] 같은 心腹이라 하였다.
[10]
예형을 죽인 일은 後世에도 널리 膾炙되었다.
二百
의
時
에도 素材로 使用되어 황조는 惡名을 얻었다고 하였다.
[19]
三國志演義
[
編輯
]
司書가 아닌
小說
《
三國志演義
》에서는
襄陽 戰鬪
의 秒前에서 接近하는 척하는
孫堅
을 向해 사흘間 화살만 날리다 다 떨어진다. 孫堅이 이 화살을 뽑아 거꾸로 日帝
射擊
하며 上陸하니 黃鳥歌 敗退한다.
女工
이
怪量
의 計策에 따라 孫堅을 現産으로 誘引한 後 돌과 화살을 쏟아부어 죽인다. 이에
怪月
,
菜某
와 함께 城 밖으로 出擊하는데
黃蓋
에게 사로잡힌다. 遊標와
손책
이 孫堅의 屍體와 皇祖를 서로 交換하고 强化한다.
예형
이 自身을 아무 靈驗도 없는
祠堂
속
鬼神
이라 坪하자 火가 나
殺害
한다. 遊標가 예형을 鸚鵡週에 묻어준다. 208年
孫權
의 大軍에 降下가 함락당해 달아나지만 그間의 푸待接으로 因해 동오로 歸順했던
감녕
에게 사살당한다. 孫權이 그 머리를 죽은 아버지의 靈前에 바친다.
手下 長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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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計
[
編輯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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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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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後漢書
》75卷 列傳 第65 元述
- ↑
《三國志》46卷 五署 第1 孫堅. 御患, 《前略》(典略) ;
配送地
主席, 《三國志》46卷 五署 第1 孫堅에서 引用.
- ↑
《平原예형展》 ; 配送地 主席, 《三國志》10卷 魏書 第10
순욱
에서 引用
- ↑
“死公 云等道” 死公(沙工)은 쌍辱이다.
耳峴
主席, 《後漢書》80卷下 列傳 第70下 예형
- ↑
《後漢書》80卷下 列傳 第70下 예형
- ↑
《三國志》46卷 五署 第1 손책
- ↑
배송지가 〈손책展〉에 引用한 《강표傳》(江表傳)에서는 氣(沂)라고 하였으나 《
資治通鑑
》63卷 寒氣 第55
獻帝
建安 4年을 따른다.
- ↑
《강표傳》 ; 配送地 主席, 《三國志》46卷 五署 第1 손책에서 引用
- ↑
가
나
《三國志》55卷 五署 第10 桐濕
- ↑
가
나
《오록》(吳錄) ; 配送地 主席, 《三國志》46卷 五署 第1 손책에서 引用
- ↑
능條가
戰死
한 해가 언제인지는 記錄이 없다. 〈能通展〉에 依하면 陵弔意 아들 能通은
아버지
事後 마둔(麻屯)과 步둔(保屯)을 攻擊했다. 〈駐油田〉과 〈
손유
전〉에도 마鈍과 步鈍을 攻擊한 記錄이 있는데
206年
이다. 206年 以前에 孫權이 皇祖를 친 것은 203年이다. 그래서
司馬光
은 능條가 203年에 죽었다고 推定하였다. 《資治通鑑고이》3卷
- ↑
危巢
(韋昭) 等, 《五署》 ; 配送地 主席, 《三國志》55卷 五署 第10 감녕에서 引用
- ↑
가
나
《三國志》63卷 五署 第18
誤犯
(吳範)
- ↑
《三國志》55卷 五署 第10 徐渻
- ↑
《三國志》54卷 五署 第9 注油
- ↑
《三國志》55卷 五署 第10 감녕
- ↑
《三國志》55卷 五署 第10 能通
- ↑
《三國志》54卷 五署 第9 旅夢
- ↑
李白, 〈網鸚鵡週回예형〉(望鸚鵡洲懷?衡, 鸚鵡週를 바라보며 예형을 떠올리네)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