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政院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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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日記
(承政院日記)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國寶
種目 國寶 第303號
( 1999年 4月 9日 指定)
數量 3,243冊
時代 朝鮮 , 大韓帝國
住所 서울特別市 冠岳區 서울大學校 奎章閣 韓國學硏究원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承政院日記 》(承政院日記)는 朝鮮 大韓帝國 承政院 에서 王名 出納, 行政 事務 等을 每日 記錄한 日記 [1] 이다. 2001年 9月 世界記錄遺産 에 登載되었다. 1623年 ( 人組 1年) 陰曆 3月부터 1910年 ( 純宗 4年)까지의 記錄이 現存하며, 現在는 仁祖와 高宗 時期의 日記가 飜譯되어 있다. [2] 다른 이름으로는 後援日記 (喉院日記)라고도 한다.

槪要 [ 編輯 ]

承政院日記는 行政과 事務, 王命, 出納 等을 맡은 承政院의 事務를 記錄한 日記이다. 單一 史料로서는 가장 厖大한 量으로서 史料的 價値가 높게 評價된다. 모두 3,245冊, 글字 數 2億 4,250萬字다. 1960年 부터 1977年 까지 國史編纂委員會 에서 草書體 였던 承政院日記를 楷書體 로 고쳐쓰는 作業을 하였다. 2000年 부터 2010年 까지는 承政院日記 情報化事業을 進行하여 影印本 1冊~111冊, 127冊~129冊에 對한 電算化가 進行되었다. 元本 1部밖에 없는 貴重한 資料로 國寶 第303號(1999.4.9)로 指定되어 있다. 이는 世界 最大 및 1次 史料로서의 價値를 인정받아 2001年 9月 유네스코世界記錄遺産으로 登載되었다. [3]

保存과 消失 [ 編輯 ]

承政院의 注書(注書)·假注書(假注書)는 날마다 承政院의 日記를 썼는데, 每月의 日記는 다음 달 안으로 完成하여 保存되었다. 元來 朝鮮 開國 以來의 日記가 있었는데, 壬辰倭亂 때( 1592年 , 宣祖 25年) 불탔고, 1623年 ( 人組 1年)까지의 日記도 李适의 亂 으로 말미암아 거의 사라졌다. 그 後 壬辰倭亂 以後의 日記를 改修했으나, 1744年 (英祖 20年) 承政院의 火災로 인해 壬辰倭亂 直後부터 1721年 ( 警鐘 1年)의 記錄이 消失되어 1746年 (英祖 22年) 日記廳(日記廳)을 設置해 改修했으나 本來 冊數의 3分의 1도 안 되는 量만 改修할 수 있었다. 또 英祖 때의 承政院 日記 中 壬午年의 일(壬午花邊)과 關聯한 內容들은 世孫의 請으로 因해 洗草 [4] 되었다. [5] 그리고 1888年 ( 高宗 25年)에 또다시 火災로 1851年 ( 哲宗 2年)에서 1888年 (高宗 25年)까지의 日記 361冊이 消失되었으나 다시 改修했다. 그밖에 수많은 紛失과 火災를 當하고 改修하기를 反復하였고, 個數 때 原本의 內容을 어느 程度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評價 [ 編輯 ]

이 冊은 當時의 公的 記錄인 《 備邊司謄錄 (備邊司謄錄)》, 《 日省錄 (日省錄)》과 더불어 드물게 存在하는 朝鮮時代 國政의 結果에 對한 1次 史料로 그 價値는 實錄을 凌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 時期의 日記(日記)라는 낱말은 오늘날에 公務記錄에 該當하는 日誌(日誌)에 더 가깝다.
  2. “韓國古典綜合 承政院日記 高宗 44年” . 2014年 2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8月 14日에 確認함 .  
  3.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4. 洗草(洗草)란 焦憔와 中草를 記錄한 종이들을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5. 英祖 127卷, 52年(1776年) 2月 4日 3番째記事 / 英祖 127卷, 52年(1776 病身 / 靑 乾隆(乾隆) 41年) 2月 6日(무신) 2番째記事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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