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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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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私製 , 殉敎者
出生 1821年 8月 21日 ( 1821-08-21 )
朝鮮 忠淸道 면천군 범서면 솔뫼 (現 忠淸南道 唐津市 우강면 宋山里 솔뫼마을)
腺腫 1846年 9月 16日 ( 1846-09-16 ) (25歲)
朝鮮 漢城府 새남터
敎派 로마 가톨릭교회
諡福 1925年 敎皇 비오 11歲
諡聖 1984年 5月 6日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埋葬地 미리내 聖地
祝日 7月 5日
守護 韓國人 聖職者

김대건 (金大建, 1821年 8月 21日 ~ 1846年 9月 16日 )은 韓國人 最初의 로마 가톨릭교회 私製 利子 殉敎者, 旅行 가로, 洗禮名 안드레아 이다. 2021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選定되었다. [1] [2]

어린 時節 이름은 財福(再福)이고, 族譜名은 知識(芝植)이다. 成人으로 諡聖되었으며 祝日 (記念日)은 7月 5日 이다. 그의 洗禮名 안드레아 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殉敎者인, 金大建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의 洗禮名을 이어받았다. [3]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821年 8月 21日 忠淸南道 唐津市 우강면 宋山里 솔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제준, 어머니는 故 우르술라였고 10代祖 김희현이 牙山 縣監을 歷任했으며 9代祖 김의직은 忠淸兵馬節度使 在職時 壬辰倭亂 에서 전훈을 세우자 家門 代代로 土地와 벼슬을 保有하게 되었다. 司憲府監察과 通訓大夫를 지낸 8代祖 김수완 때부터 金大建의 家門이 솔뫼에 居住하기 始作하였다.

1784年 警 金大建의 伯祖父 김종현과 祖父 김택현이 內包 사도 이존창의 勸誘로 서울 金範禹의 집에서 敎理를 받고 天主敎에 入敎하자 下級 官吏였던 曾祖父 김진후度 官職에서 물러나 入校해 家門이 天主敎에 歸依하였다.

辛酉迫害 로 因해 曾祖父 김진후는 1801年 부터 監獄에 드나들기를 反復하더니, 1804年 에는 逮捕되어 해미로 押送되었고 해미聖地에서 10餘 年間의 獄살이 끝에 1814年 에 獄死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인 김한현은 1816年 安東에서 逮捕되어 大邱 觀德亭에서 斬首되었다. 己亥迫害 餘波로 아버지 김제준은 아들 金大建을 西洋에 私製 授業을 받게 하기 위해 留學을 보낸 重罪人으로 逮捕되어 酷毒한 拷問 끝에 1839年 서울 西小門 밖에서 斬首되었다. 또한 堂姑母였던 聖女 金 데레사度 앵베르 主敎의 處所를 돌보며 信仰을 傳播하다 逮捕되어 1840年 初 서울捕廳에서 敎師되었다. 金大建의 家門은 4代에 걸쳐 殉敎者가 나왔다.

生涯 初盤 [ 編輯 ]

金大建이 태어날 때 이미 曾祖父와 작은 할아버지가 殉敎한 天主學 집안이어서 家勢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迫害를 避해 할아버지 김택현은 金大建이 7살이 되던 해에 京畿道 龍仁市 內斜面 남곡리 '골배마실'이라는 山골로 移徙하였다. 15살 때인 1836年 피에르 模倣 神父에 依해 神學生으로 拔擢되어 [4]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留學하여 神學을 工夫했고 傷害(上海) 진쟈上 聖堂에서 페레올 主敎로부터 1845年 8月 17日 司祭로 敍品돼 그 해 10月에 歸國한다.

生涯 後半 [ 編輯 ]

1845年 朝鮮에 入國한 金大建은 龍仁 一帶에서 宣敎活動에 힘쓰는 한便 外國 宣敎師들을 迎入하기 위해 힘쓰다 1846年 9月 16日 서울 漢江邊 새남터에서 國文 梟首刑을 받고 26歲의 나이로 殉敎하였다.

神學生 時節 [ 編輯 ]

丁夏祥의 도움 [ 編輯 ]

漢陽 에서 라틴語 聖職者 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는 基礎 神學 工夫를 마친 後에 金大建은 平信徒 神學者 정하상 (바오로)과 함께 朝鮮敎會에서 活動한 이광렬 (요한), 朝鮮에서 中國 淸나라 로 歸國하는 유방제(破치피코)新婦의 도움으로 1836年 12月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等과 함께 朝鮮 을 떠났으며, 滿洲 搖動 을 거쳐서 1837年 6月 7日 目的地인 마카오 에 無事히 到着하였다. 피에르 模倣 神父는 朝鮮에서 比較的 가까운 北京 神學校 [5] 나 中國人 神學校 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 까지 가서 留學을 하게 된 것이었다. [6]

마카오 神學校 [ 編輯 ]

마카오 에 있던 파리 外方傳敎會 東洋經理部의 佛蘭西 가톨릭 宣敎師 들은 朝鮮 에서 온 神學生들에게 直接 神學 , 哲學 , 지리 , 歷史 , 神學 을 工夫하기 위한 라틴語 [7] , 프랑스語 等을 가르쳤다. 朝鮮 神學生 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神父는 "朝鮮 少年들은 훌륭한 私製 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神心, 謙遜, 勉學審, 스승에 對한 尊敬 等 모든 面에서 完璧하다"고 대견해했다. [8] 마카오 神學校에서의 神學生들의 工夫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學問 을 誠實히 해야 함을 말하는 敎會史 事例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려움 [ 編輯 ]

英國 阿片 輸出에 따른 民衆 抗爭, 김대건 神學生의 弱한 體質 [9] , 西洋 東洋 傳統 이 다른 文化衝擊 [10] , 최방제 神學生의 兵士( 位熱病 , 1837年 [11] 11月 26日에서 27日) [12] , 租借地 人 마카오를 統治하던 포르투갈 政府의 프랑스 가톨릭 宣敎師들에 對한 不利益 等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天主敎 歲종로성당에서 連載하는 天主敎會 社에 따르면, 파리 外方傳敎會 宣敎師들은 政治 가 不安해지면 避身하라는 파리 外方傳敎會 指針에 따라 1839年 4月 필리핀 마닐라 로 避身했으며 [13] , 1839年 5月 이동한 필리핀 롤롬보異議 聖 도미니코 修道會 修道院 에서 工夫할 때에 安定된 環境과 도미니코 修道會 私製 들과 搜査 들의 親切德分에 몸과 마음의 健康이 좋아졌다. [14]

作文 [ 編輯 ]

계몽사 에서 만든 '어린이그림電氣 全集'《金大建》 偉人傳 ( 구중서 知音/ 이우범 그림)에 따르면, 金大建은 神學生日 때에 하느님을 敬畏하는 믿음이 相當히 成熟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라틴語 로 써서 남긴다.

네로 皇帝 로마 帝國 을 統治하던 時期에 많은 그리스도人 이 迫害받았습니다. 에서 獅子 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人度 잡혀갔고, 競技場에서 獅子 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獅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獅子는 그리스도人이 키우던 獅子였습니다. 自身을 키우던 主人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獅子도 제 主人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天主님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요?

르네상스맨 [ 編輯 ]

가톨릭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 에 依하면 金大建은 마카오 神學校 時節 그를 가르친 敎授들이 萬若 神學生이 되지 않았다면 畫家 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學問 美術 모두 뛰어난 博識家 이었던 것이다. 神學生 金大建, 崔良業, 최방제가 工夫하던 時節은 西區 市場 에서 成長한 資本 이 勢力을 넒히도록 基督敎 , 軍隊 , 商業 이라는 三角形으로써 植民地를 만들려는 西洋 帝國主義 [15] 民族主義 로써 抵抗하는 東方 民衆 들間의 對立과 鬪爭이 있던 時代였다. 그래서 마카오 에서의 民衆 運動을 被害, 필리핀 롤롬보異議 도미니코 修道會 에서 工夫하기도 했다. [16] 勿論 필리핀 에서 가톨릭 神學 을 工夫한 理由는 스페인 의 植民統治의 影響으로 가톨릭 이 뿌리내린 나라이기 때문이다. 金大建의 學問을 신봉승 作家는 《朝鮮王朝500年:大王 正祖-김대건》( 금성출판사)에서 김대건 副題 가 流暢한 불어 로 밀死因 金프란치스코 敎友가 傳하는 朝鮮 가톨릭교회 消息을 同行한 메스트르 新婦에게 傳하는 場面으로 그려낸다.

프랑스 艦隊 通譯 [ 編輯 ]

1842年 2月 프랑스 프리깃함 人 에리곤 號 艦長 張 밥티스트 세실 이 朝鮮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마카오 에 있는 파리 外方傳敎會 의 極東 宣敎部 所屬인 리브와 新婦 에게 通譯 한 사람을 祕密裏에 要請하였다. 忠南大學校 國史學科 김수태 敎授는 프랑스가 朝鮮과 單獨으로 外交關係를 맺음으로써 經濟的인 利益을 꾀하려고 세실 艦長이 朝鮮을 訪問하려고 한 것으로 보았다. 파리 外方傳敎會 마카오 代表部 리브와 神父는 세실이 이끄는 프랑스 艦船이 朝鮮을 訪問한다면, 宣敎師들이 海路를 利用하여 朝鮮에 入國함으로써 宣敎 活動을 하려는 計劃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希望을 가졌다. 海路入國은 2代 天主敎 朝鮮敎區長 이었던 앵베르 主敎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들은 海路를 開拓하면, 天主敎가 國家 暴力 으로 彈壓받는 朝鮮에서 宣敎師들이 牧會하다가 殉敎 하더라도 꾸준히 宣敎活動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神學生이 라틴語 로 對答하면, 宣敎師 프랑스語 로 옮길 수 있도록 김대건 神學生과 메스트르 神父가 에리곤 號에 올랐다. 프랑스 艦船을 타고 朝鮮에 돌아가는 旅行길 에 오른 金大建은 난징條約 締結現場 參觀(1842年 8月 29日)等의 經驗으로써 見聞이 넒어지는 經驗을 했다.(페레올 主敎) 金大建 神父가 리브와 新婦에게 보낸 글 을 읽어보면 난징條約 締結現場을 仔細히 썼다. 하지만 1842年 9月 세실 艦長이 艦船 안에 患者가 많고, 自己의 旅行 豫定 期間이 짧다는 理由로 朝鮮으로 갈 航海를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더以上의 旅行을 하지 못했다. [17] 1842年 2月 16日 以後, 프랑스 海軍의 도움을 받아 朝鮮에 돌아가려고 했던 金大建 神父의 經路는 필리핀 마닐라(小西洋)→ 中國 主山이다.(파리외방전교회 리브와 新婦에게 보낸 글) [18]

朝鮮立國로 開拓 [ 編輯 ]

서종태( 全州大學校 歷史文化콘텐츠學科)敎授는 〈金大建 神父와 그의 記錄〉(《記錄인》 2014年 가을號, 國家記錄院 消息紙)에서 金大建 神父가 길을 만드는 開拓者였다고 記錄했다.

1844年 朝鮮 入國을 위해 애쓰던 페레올 (Ferreol, 高) 主敎 는 勇氣와 熱情이 남다른 김대건에게 훈춘 (琿春)에서 豆滿江 을 건너 慶源 으로 入國하는 東北方 入國路의 利用 可能性을 알아보도록 指示했다. 金大建은 1844年 2月에 出發하여 任務를 成功的으로 完遂하고 4月에 돌아왔다.

司牧과 殉敎 [ 編輯 ]

切頭山 天主敎 聖地 에 있는 聖 金大建 안드레아 神父의 銅像

聖職者가 되다 [ 編輯 ]

가톨릭 副祭敍品 [ 編輯 ]

金大建은 1844年 12月 가톨릭 副題 敍品을 받았다.

上海로 가다 [ 編輯 ]

副題 朝鮮 에 暫時 들어온 金大建 副題는 當時 돈 146 [19] 船舶을 購入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年 4月 30日 天主敎 信者 12名과 함께 濟物浦港 (現 仁川港 )을 떠나 상하이 로 갔다. 高틀랑 神父가 쓴 便紙에 따르면, 羅針盤을 보고 航海한 작은배 라파엘 號는 西海에서 배가 가라앉을 뻔 했지만, 金大建 副題는 聖職者로서 平信徒 들에게 聖母 마리아 의 像本을 보여주며 慰勞하고 激勵했다. [20] 中國 船長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 온 金大建은 英國 領事의 歡待를 받았다.

예수회 高틀랑 神父의 歡待 [ 編輯 ]

連絡을 받고 온 예수회 (예수회에서 天主敎 상하이 敎區를 책임졌음)고틀랑 神父는 金大建 副祭의 付託으로 미사 를 執典하기 前에, 밤이 늦도록 精誠껏 天主敎 信者들의 告解를 들었고, 天主敎 信者들도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서 容恕의 恩惠를 베푸시는 成事 告解聖事 에 參與하였다. 金大建 副題는 韓國말 을 모르는 高틀랑 新婦를 配慮하여 通譯 을 했는데, 高틀랑 神父는 " 神學 을 마카오에서 工夫했고, 朝鮮에서 온 天主敎 信者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金大建 副祭의 속깊음을 稱讚했다. 1845年 8月 17日 상하이 의 眞쟈샹(金家港,금가港)聖堂( 2001年 상하이 市에서 地方法院 附屬建物을 짓기 위해 撤去, 韓國 天主敎會에서 은이聖地에 진쟈上 聖堂을 復元했음. 가톨릭 新聞에 依하면, 撤去된 진쟈上 聖堂도 本來 聖堂 이 있던 곳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建築하였고, 金大建 神父를 記憶하기 위해 라파엘 號를 象徵하는 모습으로 경당 을 지었음.)에서 세番째 天主敎 朝鮮敎區 [21] 莊祖제프 페레올 主敎 敍品成事 執典으로 가톨릭 私製 敍品 을 받았다. 當時 같이 따라간 朝鮮의 天主敎 信者 12分, 宣敎師, 中國 天主敎 神父 1分等이 敍品을 祝賀했다. 特히 朝鮮의 天主敎 信者들은 "하느님이 敎會 를 사랑하셔셔 朝鮮 처음의 天主敎 司祭가 敍品받았다"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一週日 後인 8月 24日 상하이 진쟈上 聖堂에서 30킬로미터가 떨어진 상하이 黌堂聖堂(상하이 예수회 소 神學校 聖堂)에서 첫 天主敎 미사 를 드렸다. 상하이 예수회 高틀랑 新婦가 예수회 長賞에게 보낸 1845年 7月 8日子 書翰(9月 12日 追伸을 적어 發送)에는 "… 그(金大建 神父)는 그의 첫 미사를 8月 24日 週日, 다블뤼 神父의 輻射 를 받으며 頑痰(卽 黌堂) 神學校에서 드렸습니다"라고 記錄돼 있다.(가톨릭신문, 2015年 8月 23日, 박지순 記者) 1845年 8月 31日 朝鮮 入國을 위해 金大建 神父는 페레올 主敎와 다블뤼 (Daveluy) 神父를 모시고 함께 갔던 天主敎 信者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港을 떠났다. 出港한 지 3日 만에 西海 바다에서 風浪을 만나 漂流하다가 9月 28日 濟州道 용수리 浦口(現在 濟州島 한경면 용수리)에 漂着하게 되었다. 여기서 2∼3日 程度 배를 修理하고 飮食 等을 準備하여 10月 1日 浦口를 떠난 金大建 神父 一行은 10月 12日 錦江 下流의 나바위에 無事히 到着했다. [22] 卽, 金大建은 1845年 10月 朝鮮 에 到着하였다. 12月 까지 漢陽 京畿道 一帶에서 己亥迫害 當時 敎會 指導者들인 宣敎師 들의 殉敎로 敎會가 無力化된 어려운 狀況속에서도 司牧을 했으며, 男便과 死別한 後 迫害를 避해 轉轉하던 어머니를 慰勞했다.

殉敎 [ 編輯 ]

賃金이 熙政堂(熙政堂) 에 나아가 大臣과 備局 堂上을 引見하였다. 私學 罪人(邪學罪人) [23] 김대건(金大建)을 梟首(梟首)하라고 命하였다. 金大建은 龍仁(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歲에 달아나 廣東 (廣東) 에 들어가서 兩校(洋敎) [24] 를 배우고, 癸卯年 ( 1843年 , 憲宗 9年)에 현석문 (玄錫文)等과 結託하여 몰래 돌아와 都下(都下)에서 敎主(敎主)가 되었다. 이 해 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當選(唐船) [25] 을 만나 廣東에 있는 兩漢(洋漢) [26] 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地方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中國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本말(本末)을 事實대로 告하였다. 捕廳(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詰問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狡猾하여 兩朴(洋舶) [27] 의 剛한 것을 믿고 脅迫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校(敎)를 禁할 수 없을 것이다. 恩典(銀錢) [28] 을 흩어서 京外(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財貨는 다 洋韓이 冊中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孃外 [29] 의 除番 [30] 의 말에 能通하므로, 天主敎 神父로서 各國을 위하여 統社 [31] 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主伐 [32] 하였는데, 玄錫文은 辛酉年( 1801年 , 純祖 元年)의 사도 [23] 로 處刑된 現計欠의 아들이다.

憲宗實錄 》 13卷 12年( 1846年 ) 陰曆 7月 25日 (무신) 1番째 記事, 《憲宗實錄》 憲宗 大王 行長

敎勢 擴張 보다도 더 時急한 것이 外國 宣敎師의 入國과 奏請(駐淸) 宣敎部와의 通信連絡에 必要한 航路 開拓이었다. [33]

金大建은 1845年 10月에 朝鮮에 들어온 天主敎 朝鮮敎區 페레올 主敎 의 指示로 宣敎師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航路를 알아보았다. 金大建은 京畿道 延坪島 앞바다에 宣敎師가 들어와서 傳道할 수 있는 航路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年 6月 5日 天主敎 宣敎師들이 들어와서 傳道할 수 있는 航路를 그린 地圖 를 中國으로 가는 中國 漁船에 넘겨주려다가 延坪島 附近에서 巡察하던 官憲들에게 逮捕되어 모진 拷問 을 받았다. 中國漁船을 官憲에서 徵發하는 것에 抗議하다가 身分이 드러났다고 한다.

學識이 出衆하여 獄中에서 몇몇 大臣의 付託으로 世界 지리 에 關한 을 만들었고, 英國 에서 만든 世界 地圖를 라틴語 實力을 發揮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色漆하기도 했다. 金大建이 옮긴 地圖는 憲宗 에게 바쳐졌다. 一部 大臣들은 金大建의 博學多識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救命運動을 벌였으나, 金大建이 神學 工夫와 司牧을 위해 外國人 들과 接觸한 事實로 處罰해야 한다는 領議政 권돈인 의 主張에 따라 그해 9月 15日 朝鮮에서 禁하던 天主敎를 믿는다는 罪로 斬首刑 을 宣告받았고, 이튿날 새남터 에서 天主敎 司祭로 斬首 되어 殉敎 의 길을 걸었다. [34] 良心囚의 屍體는 3日以內 家族이 찾아갈 수 있는데, 金大建의 屍體는 새남터 모래밭에 假埋葬되었다. 이민식이라는 天主敎 信者가 金大建 神父의 屍身을 收拾하여 京畿道 安城에서 葬禮 를 치렀다. 프랑스 海軍 張 밥티스트 세실 提督은 金大建을 救하기 爲해 朝鮮 으로 航海해 왔으나, 金大建이 殉敎하기 前까지 朝鮮에 到着하지 못하였다. [35]

當時 그의 遺言은 "主敎님, 어머니를 付託드립니다."였다. 當時 天主敎 朝鮮敎區長 페레올 主敎에게 어머니의 安危를 付託한 것이었다. 또한 殉敎하기 전 하느님을 敬畏하고 罪를 짓지말라는 內容의 便紙 를 써서 迫害받는 信者들을 激勵하였다.

나는 이제 마지막 時間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外國人들과 交涉한 것은 내 宗敎와 內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天主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永遠한 生命이 내게 始作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幸福하기를 願하면 天主敎를 믿으십시오. 天主께서는 當身을 無視한 者들에게는 永遠한 罰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36]
 
— 김대건, 殉敎 直前에 남긴 遺言

葬禮 [ 編輯 ]

신봉승 史劇作家에 따르면 金大建은 1846年 9月 16日 새남터 (現在 서울 鷺梁津 )에서 12名의 死刑 執行人에 依해 斬首 되었으며, 이 軍門에 걸려 梟首되었다. 本來 良心囚 의 屍體는 3日以內 家族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金大建의 屍體는 假埋葬되었다. 祕密裏에 天主敎 信者인 이민식이 金大建의 屍身을 미리내 聖地 (京畿道 安城)로 옮겼다. 1960年 7月 5日 金大建의 屍身은 惠化洞 가톨릭대학교 안의 聖堂 에 移葬되었다. 聖 金大建 神父의 遺骸 一部가 아프리카 大陸에 位置한 부르키나파소 쿠펠라大敎區의 '性요셉聖堂' 祭臺에 安置될 豫定이다. 필리핀 敎皇大使館 1等 參事官 까步레 몬시뇰은 過去 駐韓 敎皇大使館에서 勤務할 때 韓國敎會의 殉敎 歷史와 殉敎 成人 恭敬에 感銘을 받고, ‘性 金大建 안드레아 誕生 200돌 禧年’을 맞아 遺骸를 부르키나파소의 聖堂에 奉安하고 싶다고 廉 樞機卿에게 要請했다. [37]

諡聖 [ 編輯 ]

1857年 敎皇 비오 9歲 가 金大建을 可敬者 로 宣布하였으며, 1925年 7月 5日 敎皇 비오 11歲 는 그를 福者 로 宣布하였고, 1984年 5月 6日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成人 으로 諡聖하였다. 現在 韓國 天主敎會의 聖職者들의 守護聖人 으로 모셔지고 있다.

靈性 [ 編輯 ]

金大建은 하느님을 가리켜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世上을 만든 荏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世上에 난 보람이 없고, 그분을 배반하면 차라리 이 世上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는 것이 金大建의 靈性 이었다. [38]

熱情 [ 編輯 ]

金大建은 몸이 弱한 사람이었다. 마카오 神學校에 다니던 때에 先生 들이 "金大建 神學生이 天主敎 司祭가 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고, 세실 提督의 提案과 "健康이 나쁜 김대건 神學生이 프랑스 海軍 에서 生活하면 健康해질 것"이라고 期待한 페레올 主敎의 생각으로 프랑스語 通譯을 할 때에는 毒感 에 걸렸다. 그런데도 聖職者 로 살아내었음은 金大建이 熱情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斟酌하게 한다. 몸이 弱하다는 短點을 熱情으로 이겨낸 聖職者들로는 性 바울 존 웨슬리 가 있다.

家計 [ 編輯 ]

2002年 金海 金氏 안경공派에서 天主敎 成人公派(天主敎 聖人公派)로 分派하였다. 天主敎 殉敎者 김진후(金震厚, 보명: 運祚(運祚))를 中始祖로 삼고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그 外 [ 編輯 ]

  • 가톨릭평화방송 에서는 金大建의 生涯를 다룬 드라마 를 製作하였는데, 審問하는 官吏가 김대건에게 "天主님이 계시다면 왜 너를 돕지 않으시냐"라고 물으며 마음을 흔드는 內容을 揷入하는 等, 基督敎 信仰이 迫害받는 現實 사이에서 苦惱하는 人間的인 面을 浮刻하였다.
  • 계몽사 偉人傳 基 全集에 김대건 電氣가 있다. 이우범 畫伯이 그림을 맡았으며, 구중서 先生이 글을 썼다. 金大建의 敬虔한 信心과 慈悲를 담았다. 編輯者 는 金大建이 天主敎 司祭가 된 상하이 금가港 聖堂 寫眞도 실었다.
  • 萬若 가톨릭 入敎者가 金大建을 洗禮名으로 쓸 境遇, 이름과 洗禮名을 합친 대건 안드레아 가 信者의 洗禮名이 된다.
  • 1972年 5月 12日 銅像 除幕式이 열렸는데 최성모 신동아그룹 創業主가 資金 全額을 [39] 獻納하기도 했다.
  • 2023年 9月 16日 午後 4時 30分 바티칸 時局 聖 베드로 大聖殿 外壁에 金大建 안드레아 神父의 星霜이 세워졌다. [40]

世界記念人物(UNESCO) [ 編輯 ]

金大建 神父가 '2021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選定됐다. 2019年 11月 14日, 유네스코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本部에서 第40次 總會를 열고 金大建 神父를 '2021年 世界記念人物'로 確定했다. 2021年은 金大建 神父 誕生 200周年이 되는 해다. 유네스코는 金大建 神父의 삶과 業績이 유네스코가 追求하는 理念과 符合한다는 點을 들어 世界記念人物로 選定했다. [1] 忠南 唐津市는 2019年 6月에 프랑스, 베트남, 필리핀 等 3個國으로부터 支持 宣言을 確保한 뒤 유네스코에 世界記念人物 指定 申請書를 提出했다. 이에따라 유네스코 執行理事會는 2019年 10月 17日 第207次 會議에서 金大建 神父 誕生 200周年을 맞아 金大建 神父를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選定할 것을 勸告했다. 유네스코는 2004年부터 유네스코가 追求하는 理念과 價値가 一致하는 歷史的 事件과 人物, 名詞의 記念日을 유네스코 聯關 記念行事로 選定해 重要性을 附與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2年 茶山 丁若鏞 誕生 250周年과 2013年 東醫寶鑑 發刊 400周年이 유네스코 記念의 해로 選定된 바 있다. [2]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연합뉴스] 金大建 神父 '2021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選定 (이은파 記者 2019-11-15)
  2. [충청일보] ‘金大建 神父’, 2021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 選定 (최형순 記者 承認 2019.11.15)
  3. 김은신 (1995年 11月 1日). 《이것이 韓國 最初》. 三門. 247~249쪽쪽. ISBN   978-89-85407-35-9 .  
  4. 가톨릭新聞. “[길에서 쓰는 水原敎區社] 은이聖地(上)” . 2018年 7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7月 8日에 確認함 .  
  5. 《女人列傳》/이덕일 지음/김영사에 따르면 韓國敎會史 처음의 天主敎 宣敎師인 周文謨 ( 야고보 ) 神父는 北경신학교 1回 卒業生이다.
  6. 朴海鎭 (1994). “歷史探訪 : 民族魂의 祭壇에 바친 밀알 - 金大建과 민영환 -” . 《都市問題》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9 (302): 128. 2016年 2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2月 13日에 確認함 . 朝鮮에서 가까운 北京에 留學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模倣新婦의 깊은 配慮가 있었기 때문이다. 模倣新婦는 처음부터 北京(北京)神學校나 中國人 新婦養成所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가톨릭 正統의 脈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世俗化)된 感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7. 元來는 로마를 包含한 이탈리아의 라詩움(Latium) 株(州)에서 사는 住民들의 用語였다. 3世紀 頃 西方敎會에서의 公用語로 그리스어 代身으로 北아프리카 에서 第一 먼저 使用되었다. 敎會 라틴語는 古典보다는 오히려 民間에서 通用되는 말에서 發達하여 불가타 (Vulgata) 聖書에서 거의 確立되었다. 以後 가톨릭 敎會 公用語 (公用語)로 使用되어 前例 用語(典禮用語)로, 또는 神學校 에서의 授業과 모든 敎科書 에 使用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前例, 特히 미사 를 드릴 때의 祈禱門까지도 자국어(自國語)로 行하게 되었다. 가톨릭 事前 Archived 2018年 4月 10日 - 웨이백 머신
  8. 평화신문 , 2013年 7月 7日, 리길재 記者
  9. 頭痛 , 腰痛 , 毒感 , 黃疸
  10. 평화방송 에서 製作한 김대건 電氣드라마 〈聖 金大建〉를 보면, 마카오 神學校에서 工夫할 때에 三位一體 敎理를 놓고 라틴語 로써 神學生들과 파리외방전교회 宣敎師 리브와 新婦가 論爭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儒敎 傳統에서 자란 朝鮮 神學生들이 보기에 聖父 , 聖者 , 聖靈 平等 을 主張하는 三位一體 敎理는 理解할 수 없는 것이었다. 宣敎師들이 待接한 西洋飮食( , 커피 ), 식기( 포크 , 나이프 )도 朝鮮 神學生들에게는 不便했다.
  11. “가톨릭 事前” . 2017年 8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8月 27日에 確認함 .  
  12. 天主敎 世宗路 聖堂 天主敎史
  13. “世宗路聖堂 - 金大建聖人과 韓國天主敎殉敎史 - 마닐라 避身” . 2017年 12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12月 2日에 確認함 .  
  14. “世宗路聖堂 - 金大建聖人과 韓國天主敎殉敎史 - 롤롬보이에서의 生活” . 2017年 12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11月 30日에 確認함 .  
  15. 獨逸 의 經濟, 社會學 自認 칼 맑스 는 共産主義 宣言( 共産黨宣言 )에서 西歐 資本의 자람과 勢力넒히기가 植民地 만들기로 이어졌음을 뛰어난 學識과 文學으로써 말하고 있다.
  16. 어린이그림偉人傳記 《金大建》/ 구중서 知音/ 이우범 그림/계몽사
  17. 《金大建 神父의 海路를 통한 朝鮮 入國路 開拓》김수태(忠南大學校 國史學科 敎授).
  18. 韓國의 聖地와 巡禮地. “김대건 : 金大建 神父의 便紙 : 1-3番째 (마닐라/珠算/上海에서)” . 2018年 7月 2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19. 史劇 作家 신봉승 作家가 《朝鮮王朝500年:大王 正祖-김대건》에서 引用한 金大建 神父의 글
  20. 信者들은 3日 동안 먹지 못하여 極度로 脫盡하였고 살아날 可望이 없음을 보고 絶望하여 "이제는 다 끝났다. 到底히 살아날 수가 없겠다." 하고 서글피 울기 始作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의 唯一한 希望이신 聖母님의 奇跡 像本을 내보이면서 "겁내지 말라. 우리를 도와주시는 聖母님이 여기 계시다."는 말로 可能한 그들을 慰勞하고 激勵하였습니다. 저 亦是 新兵中이라 먹기 싫은 飮食을 억지로 먹으면서 일을 보았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으뜸 沙工으로 採用한 사람은 벌써부터 零細 準備를 하고 있던 外人이었기에 저는 그에게 洗禮를 주었습니다. [金大建 神父의 便紙에서 引用 http://www.paxkorea.kr/bbs/zboard.php?id=3002&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4 Archived 2018年 7月 29日 - 웨이백 머신 ]
  21. 韓國 天主敎 1831年 天主敎 朝鮮敎區 로 設定되었다.
  22. 天主敎 濟州敎區 用水(金大建 神父 濟州 漂着地)紹介記事
  23. 天主敎 信者
  24. 天主敎
  25. 中國 漁船
  26. 天主敎 朝鮮敎區 페레올 主敎
  27. 西洋
  28. 銀으로 만든 돈
  29. 西洋
  30. 모든 나라
  31. 西洋말을 韓國말로 옮겨서 말함
  32. 處罰內容에 對해 적음
  33. 朴海鎭 (1994). “歷史探訪 : 民族魂의 祭壇에 바친 밀알 - 金大建과 민영환 -” . 《都市問題》 (대한지방행정공제회) 29 (302): 130. 2016年 2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2月 13日에 確認함 . 敎勢 擴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더 時急한 것이 外國 宣敎師의 入國과 駐淸 宣敎部와의 通信連絡에 必要한 祕密航路 開拓이 時急한 일이었다.  
  34. 임금이 말하기를,"김대건(金大建)의 일은 어떻게 處置할 것인가?"하자, 權敦仁이 말하기를,"김대건의 일은 한 時刻이라도 容恕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社交(邪敎)에 依託하여 人心을 속여 眩惑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疑惑하여 眩惑시키고 煽動하여 어지럽히려는 計策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詐術뿐만 아니라 그는 本來 朝鮮人으로서 本國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地境을 犯하였고, 스스로 私學(邪學)을 稱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共同(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法(按法)하여 主伐(誅罰)하지 않으면 口實을 찾는 端緖가 되기에 알맞고, 또 弱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憲宗實錄 13卷, 憲宗 12年 7月 15日 武術 1番째記事 1846年 http://sillok.history.go.kr/id/kxa_11207015_001 ]
  35. Buttinger, Joseph (1958) 《The Smaller Dragon: A Political History of Vietnam》 University of Michigan p.394
  36. 金大建 神父 遺言 (韓國語)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37. “性 金大建 神父 '遺骸 一部' 아프리카로 간다” .  
  38. “가톨릭 大辭典”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11月 14日에 確認함 .  
  39. “14日 除幕式(除幕式) 金大建(金大建)神父 銅像(銅像)” . 京鄕新聞. 1972年 5月 12日 . 2022年 7月 20日에 確認함 .  
  40. 殉敎 177周年 되는 날, 바티칸에 金大建 神父 聖像 出處: 서울新聞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