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微賤한 出身, 그러니 탓하지 마라” 李在明의 아버지 콤플렉스|週刊東亞

週刊東亞 1318

..

“微賤한 出身, 그러니 탓하지 마라” 李在明의 아버지 콤플렉스

立志傳的 삶, 歡呼하는 이들만큼 不安 느끼는 이도 적잖아

  • 이정훈 記者

    hoon@donga.com

    入力 2021-12-12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12월 4일 전북 군산시 공설시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뉴시스]

    12月 4日 全北 군산시 公設市場에서 더불어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가 演說하고 있다. [뉴시스]

    더불어民主黨(民主黨) 李在明 大選候補의 人生事가 사람들 關心을 끌고 있다. “無(無)수저 靑年의 自手成家”라는 賞讚이 있는가 하면, 그의 成長史 몇몇 대목에 疑問을 提起하기도 한다. 李 候補 個人事에서 가장 궁금한 部分은 왜 中高校를 다니지 못했느냐는 點이다. 1963年生(出生申告는 1964年)인 李 候補 또래가 中學校에 가지 않은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特히 그의 아버지는 當時 드문 ‘識者’인 것으로 알려졌다. 李 候補는 ‘웹 自敍傳’에서 “아버지는 中退이긴 하지만 大邱에서 苦學으로 大學 工夫도 한 사람이었다. 敎師나 巡警도 했었지만…”이라고 밝혔다. 그의 아버지는 1931年生으로 알려졌는데, 그 年輩에서는 大學은커녕 高校를 나온 이도 많지 않다. 1966年 歌手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先生님’이 大히트를 칠 만큼 그 時節 敎師는 羨望의 對象이었다. 日帝强占期 盞影島 남아 있어 “巡警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뚝 그칠 만큼 警察 힘도 대단했다. 敎師와 巡警을 지낸 이가 아들을 中學校에 보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敎師와 巡警

    李 候補는 故鄕(慶北 安東市 도촌리)을 “疊疊山中 山꼭대기 氣막힌 奧地, 火田民들의 터전. 只今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50, 60代 男性의 로망을 그려내는 ‘나는 自然人이다’ 프로그램 背景으로 맞춤한 곳”으로 描寫했다. 敎師와 巡警을 한 아버지가 이런 奧地에 온 背景을 두고 “(아버지는) 외아들이라 父母님을 모시려고 돌아왔다” “孝子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 候補 아버지는 奧地에 定着하지 못했다. 그 理由에 對해 李 候補는 “(아버지는) 農事일을 하나도 할 줄 몰랐다” “지統마을 그 奧地에도 한때 도리짓고땡이 大大的으로 流行했다. 맞다. 20張의 東洋畫로 하는 그 놀이. 아버지도 마을住民과 어울리며 暫時 心醉했고, 그나마 있던 조그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上京에는 그런 背景이 있었다”고 밝혔다.

    初等學生 時節 李 候補는 남보다 이르게 成長痛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母親의 땔감 日, 밭일을 돕느라 코스모스를 심는 學校 環境美化作業을 제대로 하지 못해 敎師에게 맞은 일을 다음과 같이 回顧했다.

    “先生님에게 내 事情은 통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向해 날아왔다. (中略) 美化作業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理由는 아니었을 것이다. 맞아야 하는 理由를 理解하지 못했던 나는 맞으면서도 先生님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이 맞았을 것이다. 그날 내가 맞은 따귀는 스물일곱 臺였다. 親舊가 세어줘 알았다. (中略) 내 初等學校 成績表 行動란에 이런 게 적혀 있다. 稱讚하는 말 뒤에 달라붙은 한마디. ‘동무들과 사귐이 좋고 每事 意欲이 있으나 덤비는 性質이 있음.’”

    1976年 2月 慶北 安東市 三界國民學校(現 월곡초 三界分校)를 卒業한 그는 3年 前 故鄕을 떠난 아버지가 있는 競技 성남시로 家族과 함께 移住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찾아온 아들을 學校에 보내지 않았다. 工場에 다니게 된 이 候補는 高等公民學校 校服을 입고 工場에 出退勤하는 아이를 發見하고 “夜間學校에 들어가겠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承諾하지 않았다. 그는 웹 自敍傳에 “돈벌이로 工場이나 다니게 하려고 (아버지가) 工夫를 막는다고 나는 斷定했다. 아버지와의 길고 깊은 葛藤의 始作이었다. 이때부터 大學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오직 工夫하기 위해 아버지와 싸워야 했다”고 적었다. 李 候補 아버지의 意中은 무엇이었을까. 李 候補는 “아버지가 城南으로 上京한 뒤로는 完全히 바뀌어 守錢奴가 돼 있었다. 齷齪같이 일하고 至毒하게 모았다. 집에는 돈 버는 사람만 있고 쓰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兄 이재영 氏의 다음과 같은 말도 웹 自敍傳에 옮겨놓았다.



    젊은 시절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와 모친. [이재명 후보 인스타그램]

    젊은 時節 李在明 大選候補(왼쪽)와 母親. [李在明 候補 인스타그램]

    “齷齪같이 돈 모아야 한다”

    “아버지는 安東 兩班 出身이에요. 젊은 時節엔 自己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道理를 다한다는 式의 先公後私 같은 道德意識이 있었어요. 洞네 일은 空짜로 다 해주면서 곧이곧대로 살던 사람이었죠. 自己가 가진 知識과 돈, 時間을 다 남을 위해 썼던 거예요. 그런데 그 結果가 뭐였냐? 城南에 와서 아버지는 體面과 名分, 工夫, 이딴 거 아무 所用없다, 거지를 면하려면 齷齪같이 돈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決心한 것 같아요.”

    왜 城南에 온 아버지는 달라졌을까. 李 候補는 그 理由는 밝히지 않고 아버지를 理解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事緣이 있었을 것이다. 自身의 맘 같지 않은 世上에 傷處받은 後로 元來의 自身을 否定하며 살았는지도…. 어쩌면 아버지는 平生 火가 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네 살 아들이 工場에 다니며 夜間學校에 가겠다는 걸 막는 아버지를 理解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中學校 進學을 막을 程度로 아버지를 憤怒하게 한 일은 都大體 무엇일까.

    청계천 평화시장 勞動者 전태일 氏가 焚身自殺해 社會에 衝擊을 준 때가 1970年 11月 13日이다. 이 일로 ‘勤勞基準法’에 對한 關心이 높아졌다. 現在 勤勞基準法 第64條 1項은 ‘15歲 未滿인 사람은 勤勞者로 使用하지 못한다. 다만, 大統領令으로 定하는 基準에 따라 雇傭勞動部 長官이 發給한 就職人虛症(就職認許證)을 지닌 사람은 勤勞者로 使用할 수 있다’고 規定한다. 初等學生에 該當하는 13歲 未滿은 無條件 勤勞者로 삼을 수 없고, 中學生에 該當하는 13~15世는 就職認許症이 있어야 勤勞者가 될 수 있다는 것이 規制 核心이다. 이런 兒童 勞動 規制는 世界的 常識이었고 이는 當時 韓國도 큰 틀에서 마찬가지였다.

    中學生이어야 할 時節 李 候補는 會社 ‘동마고무’ ‘아주冷凍’ ‘大洋失業’ ‘오리엔트’ 等을 옮겨 다니며 ‘少年工’으로 일했다고 밝혔다. 當時 編物點 같은 家內手工業體나 飮食店 等 法人이 아닌 業所는 10代 初盤 少年을 使喚처럼 雇用했다. 그러나 當局 許可를 받고 運營하는 法人이 中學生 나이인 少年을 雇用하는 데는 相當한 制約이 있었다. 勤勞基準法과 施行令 等은 高等學生인 16~18歲 젊은이의 雇用도 制限하고, 이들을 投入할 수 있는 分野도 制限한다. 10代 時節 勞動에 對한 李 候補의 回顧와 겹쳐보면 그가 다녔다는 企業의 雇用 形態는 不法이다. 李 候補는 自身보다 나이 많은 다른 이의 이름으로 僞裝 就業한 것일까. 또한 그 時節 李 候補 집안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程度로 가난했던 것일까. 그는 “初等學校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시골에서 올라와 産業役軍이라는 巨創한 이름의 공돌이가 된 아이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에게 도시락 하나를 더 싸달라고 했다. 自炊를 하며 點心을 굶는 아이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欣快히 내 付託을 들어줬다”고 밝혔다.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

    李 候補는 檢定考試로 中卒·高卒 資格을 取得했다. 高卒 檢定考試 準備를 위해 學院에 다닐 때 아버지는 反對했으나, 어머니가 “學院費도 지가 벌어 댕기는 아한테 그게 할 소리니껴? 남들은 다 學校 보내는데, 父母가 돼서 우리가 해준 게 뭐가 있니껴?”라고 맞섰다고 한다. 그를 向해선 “工夫해라! 내가 속곳을 팔아서라도 돈 대주꾸마”라고 했다. 그래도 돈이 달려 다니던 성일학원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자 김창구 當時 성일學院 院長이 學院費를 免除해준 德에 工夫를 繼續할 수 있었다. 只今도 이 候補는 그를 恩人이라고 말한다. 李 候補가 高卒 檢定考試 合格 後 就業을 하지 않고 大入學院에 다니자 아버지가 못마땅해 했다. 그는 當時 日記에 “學院 갔다 와서 工夫 좀 하려 했더니 아버지가 쓰레기 치우러 나오라고 한다. 神經質이 났다. 신발을 확 집어던졌다. 아버지가 그 模樣을 보더니 한참 나를 노려봤다(1980. 5. 29)”고 적어놓았다. 그는 아버지에 對한 兩家(兩價·ambivalence) 感情을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及其也 일을 못 할 程度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市場通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데,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더니 가게 坐板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作業服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黎明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 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여기서 다시 한 番 注目할 것은 3年間 家族과 떨어져 있었을 때 이 候補 아버지의 行跡이다. 敎師 經驗이 있던 家長은 都大體 무슨 일을 겪었기에 3年 만에 만난 아들의 進學을 막을 만큼 變했는가. 英特했던 李 候補의 工夫 熱情을 풀어준 것은 어머니와 김창구 院長, 그를 奬學生으로 받아준 중앙대와 當時 敎育 시스템이었다. 중앙대 法大를 卒業한 1986年 가을, 그는 제28회 司法試驗에 合格했다. 그 直後 李 候補 아버지는 55歲 나이로 別世했다.

    “正말 熱心히 살았다”

    2021年 與黨 大選候補로 우뚝 선 李在明. 그는 12月 4日 全北 군산시 遊說 現場에서 “내 出身이 卑賤하다. 卑賤한 집안이라서 周邊을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 “내 出身의 微賤함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를 탓하지 말아달라” “나는 그 속에서도 最善을 다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주어지는 權限이 있다면 最大値로 行使할 것이고, 우리 國民이 나라의 主人이니 나는 머슴이라는 생각으로 主人 뜻 徹底히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自身의 家政事와 個人事를 더는 追跡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같은 날 이 候補는 “내 어머니, 아버지는 火田民 出身으로 城南에 와서 아버지는 市場 化粧室 淸掃夫로 일하고, 어머니는 化粧室을 지키며 代辯 20원, 小便 10원에 休紙를 팔았다. 그 젊은 나이에 男丁네들이 化粧室 들락거리는 앞에서 쭈그려 앉아 먹고살겠다고, 그래 살았다” “넷째 女同生은 요구르트를 配達하고 미싱師를 하다 化粧室에서 죽었는데, 産災(産業災害) 處理도 못 했다. 男동생은 只今 環境美化員일을 하고 있다” “내 집안이 이렇다. 그런데 누가 집안이 엉망이라고 흉을 보더라” “나는 正말 熱心히 살았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最善을 다했고 주어진 일은 公職者로서 할 수 있는 最大値를 했다”고도 强調했다.

    李 候補는 이른바 ‘微賤한 過去’를 내세워 自身을 防禦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先親처럼 憤怒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열네 살의 그가 아버지를 理解할 수 없었듯, 이 時代 젊은이도 그를 理解하기 어렵지는 않을까. 自己 삶을 통해 立志傳을 쓴 이 候補의 에너지에 歡呼하는 사람만큼, 그의 實體를 몰라 不安해하는 사람도 적잖아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 측은 ‘초등학교 퇴학’ ‘소년원 입소’ 루머를 가짜뉴스라며 일축했다. [이재명 후보 공식 블로그 캡처]

    李在明 大選候補 側은 ‘初等學校 退學’ ‘少年院 入所’ 루머를 假짜뉴스라며 一蹴했다. [李在明 候補 公式 블로그 캡처]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