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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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戰鬪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의 一部

세키가하라 戰鬪 屛風도(6곡 한隻)
세키가하라正歷史民俗資料管
날짜 게이初 5年 陰曆 9月 15日 ( 1600年 10月 21日 )
場所
일본의 기 日本 美露國 後와군 세키가하라, 多루이
(只今의 기후縣 後와군 세키가하라情 , 다루李霆 )
結果 東君의 勝利
이시다 미쓰나리 , 고니시 유키나가 , 안코쿠地 에케이 等의 斬首
交戰國
徐君(西軍)
東君(東軍)
指揮官

오사카城 守備隊
모리 데루모토


本隊
이시다 미쓰나리   ?
모리 히데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오타니 요시쓰구  
고니시 유키나가   ?
시마즈 요시히로


東君으로 復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舊쓰키 모토쓰나
아카者 나오야스
오가와 스케타다


東君에 內應
깃카와 히로이에


우에다性 守備隊
六連銭 사나다 마사유키
六連銭 사나다 노부시게


오우 本隊
조릿대에 참새 우에스기 가게카쓰
나오에 가네쓰구
混潮 시게나가


오쓰性 攻擊隊
모리 모토야스
다치바나 無네시게


다나베性 攻擊隊
懊惱期 시게쓰구
오다 老父카네
마에다 시게카쓰
가문, 마루에 이마 고이데 요시마사


미노·誤와리 守備隊

오다 히데老父   항복

本隊
도쿠가와 이에야스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아사노 요시나가
李珥 나오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호소카와 다다오키
오다 나街마스


나카센道群
도쿠가와 히데타다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센고쿠 히데히社
六連銭 사나다 노부유키


臺 우에스기 守備隊
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시계 방향의 삼파전 유키 히데야스


오쓰性 守備隊
膠固쿠 다카쓰구


다나베性 守備隊

호소카와 후지타카
兵力
80,000名 以上 (여러 說이 있음) 74,000名 ~ 104,000名 (여러 說이 있음)
被害 規模
(여러 說이 있음)
8,000名 [1] ~ 32,600名 [2]
(여러 說이 있음)
4,000名 ~ 10,000名 [3]
세키가하라 戰鬪
日本語式 漢字 ( 神自體 ) ?ヶ原の?い
日本語式 漢字 ( 舊自體 ) 關ヶ原の戰い
가나 表記 せきがはら の たたかい
國立國語院 標準 세키가하라 노 타타카이
로마字 Sekigahara no Tatakai

세키가하라 戰鬪 ( 日本語 : ?ヶ原の?い 세키가하라 노 타타카이 [ * ] )는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게이初 5年 陰曆 9月 15日 (西紀 1600年 10月 21日 )에 美露國 後와군 세키가하라(只今의 기후縣 後와군 세키가하라情 )를 主戰場으로 하여 行해진 野戰 이다. 세키가하라에서의 決戰을 中心으로 日本 全國 各地에서 戰鬪가 벌어져 세키가하라의 戰鬪 라고도 불린다. 戰鬪 當時는 難보쿠初 時代 의 옛 戰場(古戰場), '아오노하라'(?野原)나 '아오노가하라'(?野カ原)라고 쓰여진 文獻도 있다.

株 戰場이 된 세키가하라 옛 戰場터는 나라 指定의 史跡이 되었다.

槪要 [ 編輯 ]

이 全域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死後에 發生한 도요토미 政權 內部의 政爭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總大將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 구로다 나가마사 等을 中心으로 構成된 東君과 모리 데루모토 를 總大將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 , 이시다 미쓰나리 等을 中心으로 結成된 反도쿠가와 徐君의 兩 陣營이 세키가하라 戰鬪를 包含해 各地에서 戰鬪를 벌였다.

이 全域 結果 도요토미 政權은 統一 政權의 地位를 喪失한 反面, 勝者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莫强한 權力을 손에 넣고 막번 體制 確立의 길을 열게 된다.

背景 [ 編輯 ]

日本 列島 를 統一한 도요토미 政權 內部에는 政權 成立에 軍事的으로 寄與하며 壬辰倭亂 에도 參與한 武裝 勢力인 ‘武斷派’(武斷派)와 行政 · 經濟 · 兵站 · 軍事 · 宗敎 等 戰鬪 外的인 分野에서 活躍했던 ‘餌料派’(吏僚派) [4] 사이의 對立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와 동생인 히데나가 (秀長) 때문에 表面化 되지는 않았다.

1591年 에 히데羅哥가 죽고, 壬辰倭亂 의 出兵과 退却으로 말미암아 兩쪽 派閥의 對立이 더 깊어졌다. 히데요시는 죽기 前에 五大路 (五大老) 및 誤奉行 (五奉行) 制度를 만들어 여러 다이묘에게 親子息 도요토미 히데요리 ( 豊臣秀? )에게 服從할 것을 盟誓시키고 1598年 8月 후시미性 (伏見城)에서 죽었다. 이때부터 兩쪽의 對立은 表面化되었다. 卽, 다섯 多이로 中 한 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 ?川家康 )는 禁止된 다이묘 間의 結婚과 領土 分配를 통해 影響力을 强化하였고, 이것을 또 다른 다이묘人 마에다 都市이에 (前田利家)가 嚴重하게 警告했다.

한때 후시미 (도쿠가와群)와 오사카 (마에다群) 사이에서 이 葛藤은 一觸卽發의 狀況에까지 이르렀는데, 多幸히 마지막에 서로 誓約書를 交換하는 것으로 衝突은 避했지만, 이때부터 武斷派 다이묘나 姻戚인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官邸로 모여들면서, 도요토미 家門 內部는 빠른 分裂의 樣相을 띠기 始作했다.

도쿠가와 官邸로 모여든 主要 다이묘
마에다 官邸에 모여든 主要 다이묘

다음해 閏달 3月 都市이에가 死亡하자, 武斷派의 가토 기요마사 , 후쿠시마 마사노리 , 구로다 나가마사 , 이케다 데루마사 , 호소카와 다다오키 , 가토 요시아키라 , 아사노 요시나가 等 7名 [5] 이 官僚派의 우두머리格인 五峯行의 이시다 미쓰나리 를 襲擊하였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仲介로 事件의 責任을 묻지 않기로 하고, 鳳行職을 해임당하고 根據地인 사와야마 性 (佐和山城)으로 隱居했다 [6] . 미쓰나리의 失脚과 다른 五大路들이 自身의 領地로 歸還함에 따라 이에야스의 對抗 勢力은 사라졌고, 이에야스는 후시미性 에서 오사카城 으로 들어가 政務 (政務)를 맡아 指揮했다.

主要 兩軍의 다이묘 [ 編輯 ]

  • 아래 表 안의 兵力數는 主로 『日本戰士 세키가하라驛』(日本?史?ヶ原役)에 依한다. 『日本戰士 세키가하라驛』은 東西 梁君 兵力의 失手가 不分明하다고 하면서 石膏 100席當 3名으로 算出한 動員 可能 兵力의 推測치를 실었다.

(石膏의 옆, ○標示는 세키가하라에 布陣한 다이묘, ●는 布陣만으로 끝난 다이묘, ▲는 布陣에만 行해졌던 다이묘)

武裝 石膏(萬石) 兵力 武裝 石膏(萬石) 兵力
徐君 모리 데루모토 112.0 東君 도쿠가와 이에야스 256.0 約 30,000
모리 히데모토 (20.0) 約 16,000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10.0) 3,000
깃카와 히로이에 (14.2) 李珥 나오마사 (12.0) 3,600
오토모 요시무네 分路쿠?게이초의 逆으로 改譯.
모리 데루모토의 支援
約 2,000 혼다 다다카쓰 (10.0) 500
우에스기 가게카쓰 120.0 約 25,000 마에다 都市나가 84.0 約 25,000
시마즈 요시히로 73.0 約 1,700 다테 마사무네 58.0 23,000~28,000
우키타 히데이에 57.0 17,220 호리 히데하루 45.0
社타케 요시노부 54.0 모가미 요시아키 24.0 約 7,000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37.0 15,675 후쿠시마 마사노리 24.0 6,000
嘲笑카베 모리치카 22.0 6,660 가토 기요마사 20.0
고니시 유키나가 20.0 6,000 쓰쓰이 사다쓰구 20.0 2,850
마시打 나街모리 20.0 호소카와 다다오키 18.0 5,100
이시다 미쓰나리 19.4 5,820 구로다 나가마사 18.0 5,400
오다 히데老父 13.5 約 9,000 하치스카 要視시게 17.7 不明
오가와 스케타다 7.0 2,100 아사노 요시나가 16.0 6,510
안코쿠地 에케이 6.0 1,800 이케다 데루마사 15.2 4,500
모리 가쓰노부 6.0 不明 이코마 가즈마사 15.0 1,830
나쓰카 마사이에 5.0 1,500 나카무라 가즈시게 [主席 1] 14.5 4,350
오타니 요시쓰구 5.0 1,500 도도 다카토라 8.0 2,490
오타니 요시하루 3,500 好리오 요시하루 10.0
기노시타 料理쓰구 2.5 750 가토 요시아키 10.0 3,000
다마루 나오마사 4.0 不明 다나카 요시마사 10.0 3,000
사나다 마사유키 3.8 2,500~3,000 膠固쿠 다카土毛 10.0 不明
와키자카 야스하루 3.3 990 膠固쿠 다카쓰구 6.0 約 3,000
아카者 나오야스 2.0 600 데라者와 히로타카 8.0 2,400
히라쓰카 다메히로 1.2 360 야마우치 가즈토요 5.9 2,058
舊쓰키 모토쓰나 1.0 600 街나모리 나價値카 3.9 1,140
度다 가쓰시게 1.0 300 아리마 도요우지 3.0 900
가와지리 히데나가 1.0 300 다키가와 가즈토키 1.4 不明
이시카와 사다키요 360 오다 나街마스 0.2 450
오다 노부타카 [主席 2] 不明 後壘打 시게카쓰 [主席 3] 1,020
모리 모토야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約 15,000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13.0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10.0) 3,000
다치바나 無네시게 13.2 오쿠보 다다치카 (6.5)
쓰쿠시 히로카도 1.8 사카이 이에쓰구 (3.7) 900
나베緦麻 나오시게 · 가쓰시게 32,000 구로다 間베에 (18.0) 9,000(一時的으로 13,000)

發端 [ 編輯 ]

이에야스는 마에다 都市이에 의 長男 마에다 都市나가 ( 前田利長 )가 主謀者로 指目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暗殺 計劃이 存在하는 것을 알고, 容疑者로서 5浮橋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 오노 하루나가 (大野治長), 히지카타 가쓰히社 (土方雄久)에게 蟄居(蟄居)를 命令했다. 그리고 마에다 都市나가에 對해 母斑 嫌疑를 씌우고 征伐 計劃을 세운다. 이에 都市나가는 親母인 好슈인 ( 芳春院 )을 人質로 내놓으면서 服從 意思를 表明했고, 가까스로 마에다 家門 의 地位는 保全되었다.

1600年 (게이初 5年)에 이르자, 이에야스는 우에스기氏 의 옛 가신 후지다 노부요시 (藤田信吉)의 出奔(出奔) [8] 을 契機로 아이즈( ?津 )의 우에스기 가게카쓰 에 對해 軍備 增强을 非難하며 교토 로 올라와 解明하라고 警告하였다. 가게카쓰의 重臣 나오에 가네쓰구 는 이에야스의 警告를 無視하였고, 오히려 나오에 腸 을 發表하여 이에야스의 心氣를 건드리게 되고 結局 이에야스를 總大將으로 하여 도요토미 側 다이묘가 多數 參加한 도요토미軍은 아이즈 征伐 을 開始하였다.

失脚한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 5副校의 한 名이었던 마시다 나街모리 (?田長盛), 모리氏 의 使臣僧侶이며, 이蓼麴 의 다이묘였던 안코쿠地 에케이 等과 謀議하여 多이로 모리 데루모토 를 擁立하여 徐君을 組織하고 여러 다이묘의 妻子息을 人質로 삼아 擧兵하였다. 人質 中에 호소카와 다다오키 의 아내였던 호소카와 街라샤 는 이시다 側의 人質이 되는 것을 拒否하고 家神의 窓에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야스는 후시미性 에 남겨둔 臣下 도리이 모토타다 (鳥居元忠)의 報告를 시모쓰케국 ( 下野? ) 오야마(小山)에 이르러 接하고는 卽時 行軍을 中止하고 따르던 다이묘들에게 以後의 動向을 물었다. 우에스기 討伐은 中止되어 사나다 마사유키 다마루 다다마사 等의 다이묘는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大部分은 그대로 이에야스를 따르기로 決定하고 君을 되돌려 西쪽으로 向하였다.

한便 이에야스의 아이즈 征伐은 이시다 미쓰나리 를 擧兵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策略이라는 見解도 있다. 基나이에서 모습을 감추면 미쓰나리를 誘引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說을 따른다면, 도리이 모토타다 는 이에야스 側이 미쓰나리를 攻擊하기 위한 口實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任務를 맡은 것이었다.

進行 過程 [ 編輯 ]

7月 1日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 秀家)가 도요쿠니 神社 에서 前代未聞의 盛大한 出征式을 치르고, 이 場所에 기타노萬도코로 (北政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情實)는 側近 히가시度盧盧 쓰步네 (東殿局) [9] 를 代身 參席하게 했다. 7月 11日 미쓰나리는 東君에 加擔할 豫定이던 親舊 오타니 요시쓰구 에게 ‘이에야스 打倒’를 밝히고 神의 陣營에 끌어들였다.

이 境遇 때문에 히데이에가 먼저 蹶起하고, 미쓰나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擧兵을 決定했다는 側이 最近의 硏究에서 매우 有力視되었다. 有力한 미쓰나리派 武裝인 사나다 마사유키 가 미쓰나리의 協力 要請에 對해 “어째서 事前에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적은 便紙가 傳해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끌려서 蹶起했기에 戰鬪 準備가 拙速的으로 이루어졌고, 社타케 요시노부 , 쓰가루 다메老父 (津??信) 等 미쓰나리와 親密한 武將들이 徐君에 參加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狀況에 빠진 것도 이러한 脈絡에서 理解할 수 있다.

요시노부는 아버지 要視시게 의 反對에 부딪혀 中立을 지키지 못하였고, 다메老父는 히데요시에게 領地를 인정받았을 때 미쓰나리가 많은 도움을 받은 큰 빚이 있었지만 周圍 모두가 東君 側에 있다 보니 自身도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 側에 섰다. 代身 다메老父는 戰鬪 後 미쓰나리의 아들 시게나리 와 사에요시를 保護했다. 또 高다이인 의 養女가 된 미쓰나리의 3女 다쓰히메 (辰?)는 後에 다메老父의 아들이자 2代 번주였던 쓰가루 老父히라 (津?信牧)에게 시집가서 後날 3代 番株價 되는 맏아들 쓰가루 노부요시 (津?信義)를 낳았다.

7月 12日 사와야마性 (佐和山城)에서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마시다 나街모리, 안고쿠지 에케이 와 祕密 會同을 모리 데루모토 을 徐君 總大將으로 삼기로 決定했다. 같은 날 아이치가와(愛知川)에서 東君에 參加 豫定이던 여러 將帥를 沮止하기 위해 官訴(?所) [10] 를 設置했기에, 嘲笑카베 모리치카 , 나베緦麻 가쓰시게 等이 움직일 수가 없어 結果的으로 徐君에 參加할 수밖에 없었다.

7月 17日 結局 미쓰나리는 擧兵을 宣言하고 다음날 이에야스의 家臣인 도리이 모토타다 가 지키던 후시미性 에 進擊했다. 降伏 勸告를 拒絶한 모토타다는 7月 19日 부터 始作된 攻城戰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 시마즈 요시히로 等의 猛攻에 맞서 奮戰하였으나 結局 8月 1日 性을 잃고 말았다( 후시미性 戰鬪 ). 그 後 單故國 다나베性 , 이세국 亞노쓰性 , 마쓰자카性 等을 攻掠해 8月 안에 모두 陷落시켰다. 미쓰나리 自身은 미노 方面을 牽制하기 위해 8月 10日 사와야마 城에서 徐君의 據點인 오가키性 으로 들어갔다.

한便 洞郡은 에도에서 머물던 이에야스를 除外하고 도카이道 (東海道)를 따라 西쪽으로 進軍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 이케다 데루마사 가 先鋒에 선 東君은 8月 22日 고우다(河田) [11] 기소가와 (木?川)를 건너 고메노무라 (米野村) 附近에서 徐君과 激突, 이를 擊破하고 進軍을 繼續해 다음날 오다 히데老父 가 성주로 있던 氣候性 을 陷落했다. 이에야스는 에도 에서 여러 武裝에게 便紙를 보내었다. 도도 다카토라 , 구로다 나가마사 等을 獅子로 삼아 도요토미 다이묘 의 抵抗을 막고, 徐君을 內部로부터 무너뜨리려 하였다. 氣候 城이 陷落되었음을 안 이에야스는 重大한 決心으로 約 3萬의 軍士를 이끌고 오사카 方面을 目標로 進軍했다.

이에야스의 3男 도쿠가와 히데타다 는 約 3萬 8千의 兵力을 이끌고 나카센도 (中山道)를 따라 前進했으나, 途中에 사나다 마사유키 가 지키던 우에다性 을 攻掠했다가 발목을 잡혀 세키가하라 戰鬪에는 參戰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決戰 前날인 9月 14日 , 아카사카(赤坂)의 오카야마(岡山)에 本陣을 세웠다. 미쓰나리는 家臣인 緦麻 기요오키 (島?興)의 進言에 따라 아카사카 附近을 흐르던 구이세가와(杭?川)에 兵士를 내보내 東君의 一部를 誘引해 이들을 擊破했다( 구이세가와 戰鬪 ).

9月 14日 밤, 이시다 미쓰나리 는 아카사카를 빠져나와 나카센度를 따라 西쪽으로 가려는 이에야스의 모습을 보고 세키가하라 로 進擊했다.

戰鬪 進行 [ 編輯 ]

9月 15日 東西 兩軍은 세키가하라에 集結했다. 東君 82,000名, 徐君 104,000名, 都合 18萬이 넘는 兵力이 좁은 세키가하라의 盆地에 集結했다고 한다. [12]

메이지 時代 軍事顧問으로 日本을 찾았던 獨逸 클레멘스 메켈 少領은 세키가하라에서의 兩軍의 布陣을 接하고 徐君의 勝利를 壯談했다고 한다. 그만큼 徐君 側은 미쓰나리가 있던 사사오 산(笹尾山), 우키타 히데이에 가 있던 덴만 산(天?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秋)가 있던 마쓰오 산(松尾山),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가 布陣한 難句 山(南宮山)을 連結하는 電線으로 洞郡을 감싸 안은 鶴翼陣 (鶴翼の陣)을 形成하고 있다는 點에서 地形的 利點을 차지하고 있었다. 反面 東君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 못하는 狀況이었다. 이 때문에 西軍은 勝利를 自信했다. 하지만 東君 亦是 이럼에도 不拘하고 勝利를 壯談했는데 그것은 鉏軍쪽의 다이묘들間의 不和가 極甚하다는 것을 桐軍側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分明 正常的인 軍隊間의 戰鬪였다면 東軍이 이길 수 없는 狀況이였으나 徐君의 組織力은 이미 軍隊라고 할 수 없을 程度로 瓦解된 狀態였다. 勿論 이 點을 念慮한 오타니 요시쓰구 는 이를 補完하기 위해 名望이 없는 이시다 미쓰나리 代身 名望이 있는 모리 데루모토 를 總大將으로 擁立하여 補完策을 講究했으나 結果的으로 別 所用이 없었다.

세키가하라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안개 가 생겨 近處 我軍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渦中에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의 約束을 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 는 곧바로 改悛의 機會를 엿보고 있었다.

戰鬪 開始 [ 編輯 ]

짙은 안개 속에 兩軍은 2 時間 程度 對峙가 繼續되었다. 徐徐히 안개가 걷힐 때쯤 후쿠시마 部隊의 옆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小部隊와 李珥 나오마사 가 박차고 나갔다. 이에야스로부터 先鋒을 맡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는 急히 그들을 沮止하고 理由를 묻자, “偵察”이라고 말하면서 후쿠시마 部隊 前方으로 나아갔다.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小部隊는 突然 徐君의 主力인 우키타 히데이에 部隊를 向해 發砲하고, 여기서 세키가하라 戰鬪의 序幕이 열리었다.

이 攻擊에 對해 우키타 部隊는 卽時 應射했고, 세키가하라는 瞬息間에 激戰의 場所로 變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部隊 6,000名과 우키타 히데이에 部隊 17,000名은 치고받으면서 兩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구로다 나가마사 部隊 5,400名, 호소카와 다다오키 部隊 5,100名 等은 一齊히 미쓰나리를 向해 攻擊에 나섰다. 미쓰나리 部隊도 麾下의 緦麻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 (蒲生??)의 奮戰으로 攻擊해온 敵을 擊退했다.그리고 徐君의 오타니 要시츠구는 東君의 도도 打카토라와 맞붙게 된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等에게 背信을 約束받은 데다가 徐君의 다이묘들間에 不和가 極甚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特히 徐君의 다이묘 中 不和의 中心이 되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繼續되는 敗北에도 不拘하고 勝利를 確信했다.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繼續 敗北를 當함에도 不拘하고 兵力을 뒤로 물리지 않고 그냥 싸우도록 내버려 둔 것이였다.

미쓰나리는 戰鬪를 始作한 後 2時間을 經過할 때쯤 아직 參戰하지 않은 武將들에게 戰鬪에 參與할 것을 促求하는 노로視(狼煙; 말하자면 奉化)를 올렸다. 거기에 시마즈 部隊에 應援 要請의 使者를 보냈다. 徐君의 總兵力 中 戰鬪를 벌이던 兵力은 겨우 35,000名에 不過했기에 戰鬪 狀況을 유리한 狀況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여기서 마쓰오 산(松尾山)의 고바야카와 部隊와 難句 山의 모리 部隊가 東君의 側面과 背後를 攻擊한다면, 正確하게 말하자면 고바야카와 部隊 等이 壬辰倭亂 當時 보여준 無能한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徐君의 勝利는 確定的이 될 것은 當然한 것이었다. 事實 幸州山城 戰鬪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漢江으로 몰아넣은 日本軍(李 戰鬪 當時 日本軍의 指揮官은 가토 기요마사를 除外한 모두가 徐君)이였으나 權慄 에게 一方的으로 敗退한 前歷이 있었다.

그러나 시마즈는 應援 要請을 拒否했다. 또한 모리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家)에게 길이 막혀 參戰할 수 없었다. 깃카와 히로이에 는 모리 家門 所有의 領地를 保障한다는 條件으로 이에야스 側과 內通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의 背反 [ 編輯 ]

正午가 지나자, 이에야스는 背反을 約束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部隊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焦燥해한 끝에 마쓰오 山을 向해 威脅射擊을 加하라고 命令했다. 當時 選對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안코쿠地 에케이 의 親分,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人格과 이시다 미쓰나리 의 性格上의 缺陷 等을 저울질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苦悶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는 이에야스의 督促을 받고 뜻을 決定하여 마쓰오 山을 내려갔다. 結局 히데아키는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안코쿠地 에케이 의 親分을 無視해버리고 만다.

고바야카와 部隊는 오타니 요시쓰구 部隊 右翼을 攻擊하였다. 요시쓰구는 히데아키의 背反을 豫測하여 溫存하게 남아 있던 500名의 直屬部隊로 맞서 싸워 15,600名의 고바야카와 君을 300미터 程度 후퇴시켰다. 이때 고바야카와 軍 武裝인 마쓰盧 시게모토 (松野重元)는 “防牌 속의 反逆은 無事로써는 絶對 있을 수 없는 日”이라면서 한 部隊를 이끌고 傍觀했다. 이것이 고바야카와君의 後退의 原因이었다. 그런데 도도 다카토라 等의 謀反冊에 따라 그때까지 觀望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 오가와 스게타다 , 아카者 나오야스 , 舊쓰키 모토쓰나 等의 徐君 여러 部隊도 고바野歌와 軍에 呼應하여 洞郡으로 돌아섰다. 事實 東君으로 돌아서기 以前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도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시다 미쓰나리 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事實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幸州山城 戰鬪 에서 自身의 部隊를 똑바로 指揮하지 못하고 無能한 모습을 보인 끝에 大敗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壬辰倭亂 에 參戰한 바 있는 와키자카 野쓰하루로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信賴할 수가 없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水準의 無能함이면 自滅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였다. 豫測하지 않았던 4部隊의 背信으로 熾烈한 亂廛이 瞬息間에 東君의 壓倒的인 優勢로 變하게 되었다. 徐君은 有利한 鶴翼陣을 形成하였고 東君을 골짜기에 가둬놓았지만, 鶴翼의 날개 部分에 該當하던 相當數의 武裝이 背信하거나 傍觀하는 姿勢로 一貫하게 되어 戰鬪는 徐君 內에서의 內紛과 東君의 猛烈한 攻擊으로 인해 瞬息間에 戰況이 逆轉되었고, 거기에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데루모토 等 重要한 役割을 해야 하는 徐君 側 다이묘들이 따로 놀면서 엉뚱한 行動들을 했기 때문에 終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이끄는 東軍이 大勝을 거두었다.

徐君의 敗北 [ 編輯 ]

徐君의 自滅 속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部隊는 一齊히 射擊을 퍼붓고는 곧장 이에야스 本陣을 通過하면서 撤收하는 이른바 “前震撤收” [13] 를 開始했다. 이 行動에 후쿠시마 部隊는 그대로 그들을 보내주었으나, 이들을 쫓았던 部隊 中 李珥 나오마사 마쓰다이라 다다요시 는 狙擊을 當해 負傷을 입었고, 혼다 다다카쓰 는 타던 말이 銃에 맞아 落馬했다. 시마즈 部隊는 시마즈 도요히社 (島津豊久)와 아다 모리아쓰 (阿多盛惇) [14] 의 犧牲으로 約 80期 前後의 少數만이 살아남아 撤收에 成功했다. 모리아쓰는 요시히로가 히데요시에게 膳物 받았던 眞바오리 (陣羽織) [15] 를 몸에 걸치고, 요시히로 代身 “효고두 [16] , 武運이 다하여 여기서 最後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하면서 割腹 했다고 傳해진다. 다른 徐君 部隊는 壞滅하여 敗走했다.

地域別 波及 效果 [ 編輯 ]

세키가하라 戰鬪가 벌어지는 동안 全國 各地에서도 東君, 徐君을 各各 支持하던 센고쿠 다이묘 들 사이에 交戰이 벌어졌다.

도호쿠 [ 編輯 ]

아이즈 征伐에 關해선 호리 히데하루 의 讖言 때문이라는 게 定說이었으나, 近年에 들어 히데하루가 徐君 側에 加擔하려는 意思를 表示한 便紙 等이 發見되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擧兵으로 因해 回軍할 때 유키 히데야스 를 主力으로 남기고, 우에스기 領地와 맞닿아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 와 그 周邊의 히데하루, 다테 마사무네 에게 가게카쓰의 監視를 命令받았다.

이때 바다가 欲心나던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것을 好機로 보고 우에스기 領地에 對해 마사무네와 謀議하여 侵攻하려고 企圖했으나 이를 알아챈 우에스기價의 重臣 나오에 가네쓰구로부터 先制 攻擊을 받았다. 9月 9日 요네자와性 ( 米?城 ) 方面에서 모가미 領地를 壓迫해 들어간 나오에 가네쓰구 軍은 數日 만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巨星 야마가타性 을 고립시켰다.

다테 마사무네 는 東君에 加擔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로부터 戰鬪에 勝利한 後에는 마사무네의 옛 領地 7軍(郡)을 더해 100萬 席의 領地를 내려주겠다는 約束을 받았다. 다테 軍은 우에스기 英知人 時로이시성 (白石城)을 攻擊해 占領했다. 모가미 요시아키 는 빠른 侵攻에 놀라 마사무네에게 援軍을 要請했다.

다테 家門 內에서는 “우에스기 軍과 모가미 君을 서로 싸우게 한 뒤 疲勞해진 우에스기 軍을 攻擊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고, 그 다음엔 야마가타도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다.”라고 重臣 伽陀쿠라 가게쓰나 가 進言하였으나, 모가미가 壞滅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威脅을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었기에(일설에는 야마가타 城에 살던 母親을 마사무네가 걱정했다는 말도 있다) 루스 마사카게 을 總大將 代理로 내세워 9月 17日 援軍을 보냈다. 마사무네의 援軍이 加勢하고, 가네쓰구 軍이 사케盧베 히데쓰나 (?延秀綱)의 勇猛에 눌려 時務라 미쓰야스 (志村光安)가 少數 兵力으로 守備하던 下歲도 性 (長谷堂城)을 攻掠하지 못하자 戰況은 膠着狀態에 빠지게 되었으나, 9月 29日 세키가하라 戰鬪의 消息이 梁君 陣營에 傳해지자, 흐름은 一擧에 모가미 君에게 기울었다.

가네쓰구는 卽時 撤收를 命令했고, 自身은 後軍을 맡아 撤收는 開始했다. 한便 요시아키는 곧바로 追擊을 命令하고 直接 猛攻에 나섰다. 이 追擊戰은 對婚前이 벌어져, 요시아키는 投球에 銃彈을 맞을 程度로 크게 苦戰하였으나, 모가미 요시야스 等의 軍勢가 달려와 어려움을 벗어났다. 가네쓰구 軍은 10月 4日 요네자와 姓으로 歸還했다. 이 戰鬪를 下歲도 星 戰鬪 라고 부른다.

호쿠리쿠 [ 編輯 ]

마에다 都市나가는 우에스기가 攻擊을 支援하기 위해 7月 26日 가네자와( 金? )를 出發해 8月에 야마구치 무네나가 (山口宗永)가 지키던 다이쇼知性 (大聖寺城)을 包圍하고 3日 만에 陷落시키고 아오키 가즈노리(?木一矩)의 기타노쇼性 (北ノ庄城)을 包圍했다. 그러나 “ 오타니 요시쓰구 의 大軍이 後方에서 다가온다.”라는 헛所聞(요시쓰구 自身이 흘려보냈다는 얘기가 있다)을 듣고 놀라서 急히 街네자와로 回軍하였다.

都市나가는 途中 軍隊를 둘로 나눠 니와 나가시게 (丹羽長重)가 지키던 고마쓰性 (小松城)에 別動隊를 보냈다. 8月 9日 나가시게는 籠城君을 이끌고 別動隊를 奇襲해 別動隊를 擊破하고 뒤이어 都市羅哥의 본대도 奇襲을 加해 都市나가에게 큰 被害를 입혔다. 그러나 膠着狀態에 빠진 나가시게는 서로 和親을 맺고, 고마쓰 性을 다음날 都市나가에게 넘겨주었다. 겨우 가네자와에 돌아온 都市나가는 急히 軍을 再整備하고 9月 12日에 다시 街네자와를 出發했으나, 結局 세키가하라에 到着하지 못했다. 이때 다이쇼地 性 攻擊에 參加했던 동생 마에다 都市마사는 거成人 나나오성 (七尾城)에서 籠城하며 움직이지 않고, 東君에는 加擔하지 않았다. 都市마사는 繼續 徐君에 參加할 것을 主張했기에 結果的으로 戰鬪 後 領地를 몰수당하는 不幸한 일을 當한다.

基나이 [ 編輯 ]

單孤 다나베性 에는 호소카와 유사이 가 아들 다다오키가 出陣한 뒤 兵士 500名과 함께 城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徐君 側에 加擔한 後쿠치野魔性 (福知山城) 星州 오노키 시게카쓰 (小野木重勝)를 總大將으로 한 고이데 히데마사 (小出秀政), 요시마사 (吉政) 富者, 아카마쓰 히로히데 (赤松?秀) 等이 15,000餘 兵力을 이끌고 와서 다나베 城을 包圍했다. 兩쪽의 戰鬪가 벌어졌으나, 徐君 側 여러 武裝 中에는 柳사이에게 와카 (和歌)의 배웠던 다니 모리토모 (谷衛友)란 者도 있어, 激烈한 戰鬪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傳해진다.

그러나 戰況은 徐徐히 유사이에게 不利한 狀況이었다. 죽음을 覺悟한 類似이는 비전의 “古今?授”의 證書를 弟子인 하치조노미야 都市히吐 親王 (八?宮智仁親王)에게 依託하기로 決心하고, 證書 一切를 하치조노미野에 獻上했다. 이 일이 하치조미야에서 고요제이 天皇 의 귀에 들어가자 柳사이의 喪失을 두려워한 고요제이 天王은 마에다 겐이를 통해 徐君 側에 性을 넘겨주라는 勅命을 보냈다. 그러나 徐君 側에는 그런 醫師는 없었고, 또한 유사이度 性을 넘겨주는 것을 拒絶했다. 9月 12日쯤에 이르러 고요제이 天皇은 나카노人 미치카쓰 (中院通勝), 街라스마루 미쓰히로 (烏丸光?), 散調니시 社네키 (三?西?枝)等 세 名을 勅使로서 다나베 性으로 보내 유사이에게 和議에 應하도록 說得해 9月 18日 오노키에게 性을 넘겨주고 退去했다.

그러나 유사이 退去 直後, 시게카쓰는 세키가하라 戰鬪의 敗北 消息을 傳해 듣자, 시게카쓰는 後쿠치야마 城으로 돌아갔으나, 瞬息間에 勝利의 餘勢를 몰아 달려온 타다오키와 배반한 다니 等의 軍隊에 포위당해 시게카쓰는 목숨을 歎願했으나 11月 18日 自決하고 말았다.

시코쿠 [ 編輯 ]

俚謠 에서도 東君에 加擔한 가토 요시아키라 마쓰마에성 (松前城)을 모리 軍이 攻擊을 加했다. 무라카미 다케요시 (村上武吉), 무라카미 모토요시 (村上元吉) 等 이요에 因緣을 가지고 있던 모리 家臣들은 옛 領地 回復을 目標로 히라오카 나오後嗣 (平岡直房), 소네 다카後嗣 (?根高房) 等이 미쓰하마(三津浜)에 上陸해 陣地를 構築했다. 마쓰마에 城에 降伏을 要求했다가 가토價의 守備隊將人 쓰구다 가쓰나리 (佃十成)의 夜襲을 받고, 무라카미 모토요시, 소네 다카後嗣가 戰死하고 말았다. 그 後에도 모리 側이 不利함이 繼續돼 세키가하라의 徐君 側 敗北를 接하고 모리 軍은 後退했다.

규슈 [ 編輯 ]

규슈에서는 구로다 조스이 , 가토 기요마사 , 나베緦麻 나오시게 等이 本國에 머물고 있었고, 기요마사와 나오시게는 當初 中立을 지켰기에 積極的으로 움직인 사람은 東君에 加擔한 조스이뿐이었다. 조스이는 나카쓰 性(中津城)에 모아둔 金과 兵糧을 아끼지 않고 풀어서 이것을 미끼로 모은 浪人을 中心으로 約 3,500餘 名의 軍隊를 만들었다.

한便 徐君 側에서는 東西 對決의 狀況을 지켜보지 않고 데루모토의 支援을 받아 奔告 奪還을 노리던 오토모 요시무네 가 있었다. 9月 9日 요시무네는 追放된 以來 오랜만에 奔告의 땅을 밟고, 오토모 옛 臣下들을 모아 이시오키하라(石垣原) [17] 에서 조스이 軍과 對峙했다. 9月 13日 兩軍이 激突하여 激戰을 벌여 요시무네 君의 勇將이 戰死하는 等 敗色이 짙자 9月 15日 요시무네는 出家하여 모리 다헤에 (母里太兵衛)의 陣地에 出頭하여 조스이 軍에 降伏했다. 조스이 軍에 加擔하기 위해 구마모토城 을 나온 기요마사는 조스이 軍이 勝利했다는 消息을 듣고, 軍隊를 돌려 徐君 側의 고니시 유키나가 의 領土를 侵攻했다.

조스이 軍은 以後에도 기타큐슈 여러 城을 陷落하고, 세키가하라에서 歸還한 다치바나 無네시게 가 지키던 야나가와性 (柳川城)을 기요마사, 나오시게와 더불어 包圍하여 무네시게를 降伏시켰다. 조스이 聯合軍은 마지막으로 시마즈가 攻擊을 計劃하고, 유키나가의 領地에 남아있던 守備隊將이 시마즈 요시히사 에게 救援을 要請하자 요시히사는 이에 應하여 軍隊를 派遣하는 等 규슈의 緊張은 最高潮에 達했으나, 시마즈 攻擊 直前 이에야스로부터 戰鬪 中止 命令이 내려와 시마즈 攻擊은 中止되었다.

其他 地域 [ 編輯 ]

간토

社타케 요시노부는 아버지 社타케 要視시게 의 “東君에 加擔해야 한다.”라는 意見과 自身과 미쓰나리의 親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어서 曖昧한 態度로 一貫했다. 麾下의 다가야 시게쓰네 (多賀谷重?)와 作人 勢力 야마가와 도모노부 (山川朝信), 蘇摩 요시打네 (相馬義胤)는 가게카쓰와 손을 잡고 있었다.

二世

세키가하라에서 進出하여 北上하던 모리 軍은 途中에 있던 亞노쓰性 等 二世의 여러 城을 攻擊했다. 亞노쓰誠意 도미다 노부타카 (富田信高)는 降伏하여 出家하고, 마쓰社카 誠意 후루다 시게카쓰는 和親을 맺어 時間을 끌었다.

戰後 處理 및 論功行賞 [ 編輯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戰鬪에서 勝利 後 徐君 側 다이묘의 處罰 및 洞郡 側 다이묘의 褒賞을 하였다.

徐君 [ 編輯 ]

  • 戰鬪 後 9月 21日 이시다 미쓰나리 는 옛 親舊였던 다나카 요시마사 部隊에 逮捕되었다. 또한 고니시 유키나가 9月 19日 에, 안코쿠地 에케이 9月 23日 에 各各 逮捕되었다. 이들은 以後 오사카, 사카이로 끌려다니다가 로쿠조가와라 에서 斬首되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 의 石膏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强制로 가토 기요마사 에게 붙여버렸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들은 僧侶가 되어 平生 政治에는 一切 關與하지 않고 宗敎活動만 專念하는 條件으로 목숨만은 延命하게 했으며 長男인 이시다 시게이에 (石田重家, 1583 ~ 1686)는 103살까지 살아 天壽를 모두 누렸다.
  • 우키타 히데이에 는 세키가하라 戰鬪 後 사쓰마로 도망쳤다가 1603年 시마즈 다다쓰네 (島津忠恒)가 이에야스에게 끌고갔다. 다다쓰네와 아내의 親가인 마에다 都市나가 가 救命 歎願하여 죽음은 면했으나, 스루가 구능山에서 幽閉된 後, 하치조緦麻 (八丈島)에 流配되어 死亡할때까지 長長 50年동안 하치조緦麻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4代 쇼군 이에쓰나의 治世 때까지 살았고, 그의 子孫은 마에다價의 支援을 받아 메이지 維新 때까지 家門을 지켰다.
  • 나쓰카 마사이에 는 巨星 誤優美 미즈구치 性으로 도망쳤으나, 東君의 이케다 데루마사 部隊의 追擊을 받자 10月 3日 自決했다. 오타니 요시쓰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의 背信으로 인해 攻擊을 받던 中 포위당해 自決했다.
  • 시마즈 요시히로 의 處罰은 여러 方面의 懷柔 끝에 1602年 4月 이에야스는 “요시히로의 行動은 堂主가 認定한 것으로 나쁘지 않다.”라며 요시히로의 兄 시마즈 요시히사 에 對해 領地를 認定해주고, 家門을 시마즈 다다쓰네 에게 물려주는 것으로 罪를 容恕했다. 이는 시마즈 家門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를 故意로 精神病者라고 하면서 "事實 세키가하라 戰鬪 當時 徐君에 붙은 것도 시마즈 요시히로 가 미쳐서 그런 것 이니 容恕를 바랍니다"라면서 歎願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 에서 시마즈 요시히사 로 바뀌는 것으로 一段落 되었으며 石膏의 削減은 免除되었다.
  • 모리氏에 對해서 모리氏 의 堂主 모리 데루모토 가 徐君의 總大將으로 오사카城 에 있었기 때문에, 깃카와 히로이에 의 領地 安全의 約束은 破棄되었고, 모리 家門의 領地가 沒收되는 代身 히로이에에게는 스誤 나가토 의 2個 拘泥 가 領地로 내려졌다. 이에 놀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에게 自身의 領地를 모리 家門의 것으로 해달라고 要請했다. 히로이에의 懇請은 受諾되었으나 結果的으로 많은 領地를 削減당한 것이 되어,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家門으로부터 本家를 팔았다는 非難을 받고 運身의 幅이 좁아지게 되었다.
  • 다치바나 無네시게 마에다 都市나가 를 擊破했던 니와 나가시게 도 領地를 몰수당했으나, 나중에 무네시게와 시게나가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의 計劃에 따라 다이묘로 復歸하고, 무네시게는 옛 領地까지 돌려받게 되었다. 特히 무네시게의 境遇 시마바라의 난 을 鎭壓하는 데 큰 武勳을 세우게 되어 세키가하라 戰鬪 當時 徐君에 섰던 過去를 完璧하게 相殺했다.
  • 嘲笑카베 모리치카 는 謝罪했지만, 誤解와 家神의 讖言이 原因이 되어 兄 쓰노 지카타다 (津野親忠)를 殺害하여 이에야스의 憤怒를 사서 領地를 몰수당했다.
  • 우에스기 가게카쓰 는 아이즈(?津) 120萬 席에서 나오에 가네쓰구의 領地였던 요네자와 30萬 席으로 크게 削減되었다. 參考로, 요네자와는 아이즈의 一部이며, 아이즈 最北端에 位置해 있다.
  • 社타케 요시노부 도 히타치(常陸) 미토(水?) 54萬 席에서 데와(出羽) 아키다(秋田) 18萬 席으로 크게 削減되었다.
  • 徐君을 背信하고 東君으로 돌아섰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지쿠젠 (筑前) 나지마(名島) 36萬 席에서 非젠 (備前) 오카야마(岡山) 57萬 席으로 增減하여 옮겼다. 그러나 히데아키는 1602年에 겨우 21살의 젊은 나이로 미쳐서 죽었고, 後嗣가 없어 家門은 斷絶되었다.
  • 히데아키의 背信에 呼應하여 돌아섰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舊쓰키 모토쓰나 는 領地를 그대로 인정받았으나, 오가와 스케타다 아카者 나오야스 는 領地를 몰수당하고, 히데아키, 야스하루, 모토쓰나 以外의 背信한 者들에 對해선 이에야스는 嚴重히 處斷하였다. 스게타다는 背信한 過去가 많았고, 거기에 아들이 미쓰나리와 親했던 일 때문이었고, 나오야스는 “銃聲에 놀라서 背信했다.”라고 말한 理由가 原因이었다. 스게타다는 戰鬪 後 다음해에 죽고, 나오야스는 마에다 都市나가 를 섬기다가 1606年 엣추 (越中)에서 溺死했다.
  • 소 요시토視 의 境遇는 비록 徐君에 加擔했고 特히 고니시 유키나가 의 사위인 點이 있었으나 요시토市는 平素에 壬辰倭亂 을 强力하게 反對하는 立場이었고 세키가하라 戰鬪가 끝나자마자 요시토市는 스스로가 고니시 유키나가 의 딸인 마리아와 離婚한 데다가 이에야스에게 降伏과 同時에 順從을 宣言했으며, 特히 이에야스의 立場에서 요시토市는 그 該當되는 番移 쓰시마 후추 番 人 關係로 朝鮮과의 外交的 問題때문에 요시토詩라는 人物이 반드시 必要해서 요시토市에 對한 賞罰은 省略하고 그대로 쓰시마 후추 번주의 職位를 維持하고 石膏의 削減도 없었다. 그 代價로 요시토市는 1607年 까지 朝鮮과의 關係 回復에 힘을 써서 朝鮮과 日本間의 國交를 正常化시켰다.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敗北한 사쓰마번 (薩摩藩)의 시마즈 家門 조슈번 (長州藩)의 모리 家門 은 도쿠가와 家門에 對한 怨恨이 그대로 남아 250年 後 幕府 末期에 이르러 幕府 打倒의 原動力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그들이 中心이 되어 朝鮮을 侵略 및 服屬 시켰다.

東君 [ 編輯 ]

東君의 여러 다이묘는 大幅 增減이 있었다.

다만 여기서 보더라도 도요토미 側과 因緣이 있던 다이묘에 對해서 이에야스는 領土를 늘려주는 代身 西쪽 地域으로 이동시켰다.

  • 쓰가루 다메老父 는 東君 側에 加擔하기는 하였으나, 그 맏아들 老父타케 오사카城 에서 도요토미 家門에 奉仕했고, 戰爭 後에는 老父타케와 함께 온 이시다 미쓰나리 의 아들을 保護해주는 等 兩側에 모두 발을 대는 듯한 모습을 보인 탓인지 별다른 褒賞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다메老父와 셋째 아들 老父히라 가 軍營에 參與한 것에 對하여 고즈케國 의 2千 席 領地가 若干의 銀賞으로 내려졌다.
  • 이에야스 自身의 直轄領에 對해서 세키가하라 戰鬪 以前에는 250萬 席인 것을 400萬 席으로 大幅으로 늘려 全國에서 第一 많은 領地를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 이것은 日本 全土의 1380萬 席의 30%에 達하는 대단한 比率이었으며 도쿠가와 自身의 絶對權力의 크기를 誇示하여 다른 다이묘들이 絶對的으로 服從하게 만들기 위한 道具이기도 했다. 도쿠가와는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最下 4~6倍 以上의 石膏를 짊어지고 있었으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은 莫强했다고 볼 수 있다. [18]
  • 도요토미 氏의 領土에 對해선 히데요시 時代 222萬 席에서 65萬 席으로 크게 削減했다. 도요토미 氏의 財政을 支撐하던 사카이 나가사키 의 교역항 等도 도쿠가와 氏의 支配를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完全히 도쿠가와 氏와 도요토미 氏의 立場은 逆轉되고 말았다.
  • 한참 後代에 이르러서 도쿠가와 幕府는 이 도요토미 히데요리 오사카 戰鬪 로 멸망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自身이 直接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臺를 完全히 斷絶시키고 그 領地를 모두 沒收하며 끝없는 領地開發을 통해 期於이 500萬 席을 채우고야 만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治世期間에 이르러서는 시마바라의 난 을 鎭壓하고 도쿠가와 直轄領과 그 나머지 領地 總合이 對等한 水準까지 到達해 모든 다이묘들이 全部 힘을 합쳐야 도쿠가와 家門과 對等했다.

세키가하라 戰鬪에 關聯된 論點 [ 編輯 ]

徐君의 大將 格이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 外 將帥들이 오가키性 에 머물지 않고 세키가하라로 前進한 것은 “오가키 性을 無視한 채, 사와야마 性 을 陷落한 뒤 오사카로 나가겠다.”라는 所聞 때문이라고 한다. 이 所聞은 이에야스가 퍼트렸으며, 이 所聞에 미쓰나리가 걸렸다는 說이 普遍的이지만, 疑問點이 많다.

或是라도 이에야스가 위의 말처럼 거짓 情報를 흘렸다고 본다면 部隊의 統率이 가장 脆弱한 行軍 中 敵의 襲擊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이에야스가 유리한 狀況에서 攻擊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또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戰鬪 以前에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 에게 出陣을 여러 番 要求했었다. 이것은 結束力이 不足한 徐君의 士氣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向한다면 미쓰나리에게는 絶好의 機會로 오사카 附近에서 이에야스의 背後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對해, 附近 河川의 汎濫으로 여러 番 水害를 입었던 오가키 性을 이에야스가 手工으로 攻擊하면 徐君의 首腦와 세키가하라 附近에 布陣한 모리 히데모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等과의 連絡이 끊어지는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說도 있다. 이 說은 세키가하라, 마쓰오 山에 設置된 築城 工事가 새로운 性이라고 말할 수 있을 程度로 大規模로 이루어졌음을 前提로 미쓰나리의 戰略을 아래와 같이 推定할 수 있다.

  1. 세키가하라 西쪽의 마쓰오 산 - 사사오 산 (笹尾山) 라인에 野戰 築城을 實施해 東君의 進擊을 沮止한다.
  2. 마쓰오 山의 城砦에는 徐君 主力인 모리 데루모토 以下 3萬을 配置한다.
  3. 東軍이 오사카로 向하기 위해 오가키 性을 無視하고 세키가하라로 進擊한다면 오가키 性의 이시다 미쓰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 難句 山의 모리가 東君을 追擊해 1番 라인의 軍과 함께 東쪽과 西쪽에서 挾攻한다.
  4. 東軍이 오가키 城을 攻擊한다면 1番 라인에서 布陣하던 오타니 요시쓰구 , 모리 히데모토가 오가키 城을 攻擊하는 東君의 背後를 쳐 오가키 誠意 軍과 挾攻한다.

結局 이 戰略은 어떤 方向으로 進行되더라도 徐君은 東君을 挾攻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西쪽의 마쓰오 산-사사오 산 라인의 重要한 곳인 마쓰오 산 城砦에는 去就가 不分明한 고바야카와 軍이 徐君의 朝飯(城番) [19] 을 折半이나 몰아낸 形態로 駐屯한 일, 또 오가키 性이 水公에 脆弱하기 때문에 手工을 當한다면 이미 性이 攻擊당하여 4番에서와 같이 오타니, 모리 軍이 背後를 칠 수 없어, 이 戰略은 깨지고 만다. 그 때문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 暫行한 것이 아닌가 推測한다는 것이 이 說의 要旨이다.

徐君은 大將을 잘못 選擇해서 敗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가 總指揮를 했더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大敗를 當하진 않았을 것이며 적어도 東君과 伯仲之勢를 維持했을 것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勇猛한 다이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壬辰倭亂 으로 많은 經驗을 쌓은 百戰老將인 反面 이시다 미츠나리는 행주大捷 에서 權慄 에게 크게 敗한 것 말고는 딱히 戰鬪라고는 經驗한 게 그리 많지도 않았다. 徐君은 純全히 이시다 미츠나리 혼자만의 잘못으로 敗北한 것일 뿐이며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 戰鬪에서 저지른 失策들은 다음과 같다.

  1. 시마즈 요시히로 를 貴賓으로 待遇해줬어야 했음에도 不拘하고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끌고 온 兵力이 1,500名밖에 안된다는 理由 하나만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푸待接했다.
  2.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는 가장 이시다 미츠나리를 甚하게 疑心하는 다이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만큼은 죽을 힘을 다해 脾胃를 맞춰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마음에 쏙들었어야 했는데 정작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런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는 종이로 된 誓約書 한 張만 달랑 써 주고 아무것도 안 했다.
  3.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이 戰鬪에서 엄청난 諜報戰을 敢行했다. 이에 따라 이시다 미츠나리 亦是 도쿠가와 相對로 맞첩保全을 벌였어야 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傍觀했다.
  4. 이시다 미츠나리가 平素에 行動을 똑바로 하지 못했다. 特히 호소카와 街라샤 를 죽게 한 일로 世間의 憤怒를 크게 산 狀態였으며 이 때문에 이 戰鬪에서 本人이 直接 指揮를 하지 못한 채 모리 데루모토 의 이름을 팔아서 指揮를 해야만 했다.
  5. 모리 데루모토의 이름은 팔았지만 정작 그 當事者인 모리 데루모토를 戰爭터에 나오게 하지 못했다. 徐君 兵力들은 모리 데루모토의 얼굴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만으로도 軍 內部의 士氣를 크게 左右하는 狀況이었음에도 不拘하고 모리 데루모토는 徐君들 앞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徐君 아시가루 들의 觀點에서 보면 웬 비리비리하고 矮小한 놈 이 自稱 모리 데루모토에게 權限을 委任받았다고 하면서 나대고 있다 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反面 東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人物인지를 如實히 보여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一旦 事前作業을 宏壯히 많이 해뒀는데 시즈가타케의 7本倉 의 憎惡를 한몸에 받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시즈카타케의 7本倉과 摩擦이 생기자 되려 시즈카타케의 7本窓을 沮止하는 척 하면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自宅까지 安全하게 배웅해주는 反面 이시다 미츠나리를 誤奉行 에서 職位解除 시켰다. 호소카와 邸宅 事件은 이에야스가 딱히 손을 쓴 건 아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먼저 侵犯해 호소카와 街라샤를 人質로 잡으려다 가라샤가 이 過程에서 死亡하는 바람에 이게 이에야스에게는 利得이 되었다. 게다가 徐君에 加擔한 다이묘들 中 一部는 繼續 懷柔作戰을 벌였으며 그 結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를 筆頭로 한 여러 다이묘들이 연달아 背信하게 만들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自身의 陣營을 그렇게 짠 것은 다른 다이묘같으면 辨明의 餘地없이 山밑에서 포위당해 몰살당할 것이 뻔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의 無能한 軍裁를 盲信해서 故意로 그렇게 陣營을 構築했으며 實際로도 이시다 미츠나리의 軍裁는 너무나 無能했다. 結果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無能함을 最大限 쥐어짜가면서 活用한 것이다.

세키가하라 戰鬪 屛風化 [ 編輯 ]

세키가하라 옛 戰場 [ 編輯 ]

세키가하라情 , 기후縣 은 옛 戰場을 觀光 에 活用하기 위한 PR活動이나 整備했으며 [20] , JR 세키가하라驛에서는 東君과 徐君 主要 武裝의 이름이 적힌 '옛 戰場의 마을 세키가하라'라는 題目의 看板이 걸려 있다. [21] . 가마타 龜尾 의 有名한 戰爭터인 게티즈버그 ( 美國 )이나 워털루 ( 벨기에 )와 '姊妹 옛 戰場 協定'을 맺고 있다. [22] .

朝鮮王朝實錄의 記錄 [ 編輯 ]

朝鮮王朝實錄에는 다음과 같은 陳述로 日本의 事項을 알려주고 있다.

捕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河東 (河東)의 敎生(校生) 강사준(姜士俊)과 餘震德(余進德) 等의 楚辭(招辭)는 다음과 같다.

大體로 適正(賊情)은 丙申年부터 天才(天災)가 자주 있고 地震이 너무 甚하여 工事(公私)의 家屋이 無數히 破壞되었고, 甚至於는 山陵(山陵)과 川澤(川澤)李 移動하고 龜裂되어 壓殺(壓殺)당한 民間과 家畜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戊戌年 8月 18日에 坪數길( 平秀吉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 兵士(病死)하면서 그의 廢盧(嬖奴) 석전 恥部頃( 石田治部卿 : 이시다 미쓰나리 )·曾前 愚問勝( 增田右門丞 : 마시打 나街모리 )·葬俗 태장승( 長束太臟丞 : 나쓰카 마사이에 ) 等 3名에게 遺言하기를 ‘너희는 어린 受賂( 秀賴 : 도요토미 히데요리 )를 補佐하라. 나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또 內部 加强( 內府家康 :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關東北(關東北) [23] 33週(州)를 네가 眞福(鎭服)시켜야 어린 아이를 保護할 수 있다.’ 하고, 다음으로 重納言 휘원( 中納言輝元 : 모리 데루모토 )에게 ‘寬恕( 關西 : 간사이 脂肪 )의 南쪽 30餘 州에서는 네가 우두머리이니, 모름지기 나의 아들을 付託하는 근심을 가련히 여겨 삼가 後嗣(後事)를 保存하도록 하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해 겨울 加藤淸正( 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 * ] )과 甲匕首( 甲斐守 : 구로다 나가마사 ) 等이 豐臣秀吉( 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 [ * ] )이 살았을 때에 석전 恥部驚異 權勢를 잡고 自己들을 野薄하게 對한 것에 怏心을 품고 加强에게 阿附하여 석전 恥部卿을 講主 左右性( 江州佐祐城 )으로 내쫓았는데, 己亥年 가을에 街江이 또 受賂( 秀賴 )의 有婦(乳父) 詩傳비전수( 蒔田肥前守 : 마에다 都市나가 )를 가주( 加州 가슈 [ * ] )로 내쫓고서 自身이 複見性( 伏見城 : 후시미性 )으로 들어갔으며, 同年 9月에 受賂를 問安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受賂가 있는 대판性( 大坂城 : 오사카城 )으로 들어가 그대로 웅거(雄據)하고 있으면서 軍國(軍國)의 모든 일을 제맘대로 하였으므로 上下가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리고 重納言 景勝( 中納言景勝 : 우에스기 가게카쓰 )이란 者가 있는데 3週(州)를 거느린 將帥로서 東北( 東北 : 도호쿠 地方 ) 地域에 있으면서 街江이 수길의 付託을 배반한 것을 매우 싫어하여 비로소 街講을 따르지 않을 뜻을 두어 街江이 再三 불렀으나 끝내 그에게 服屬하지 않았습니다. 庚子年 9月에 街江이 5∼6萬 名의 軍隊를 이끌고 그의 本陣(本鎭)인 越州( 越州 ) [24] 와 능등( 能登 노토 [ * ] ) 地域에 달려가 그의 孼子(?子) 三下手( 三河守 : 유키 히데야스 )라는 者를 보내 5∼6萬의 軍士를 거느리게 하여 先鋒(先鋒)으로 삼아 景勝을 攻擊하게 하였는데, 일곱 番 싸워 다섯 番 敗하여 다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었을 때, 釋奠 恥部頃 等이 街江이 수길을 저버리고 國史를 제맘대로 籠絡하는 것을 憎惡하고, 兵權(兵權)을 가지고서도 온유(溫柔)韓 휘원( 輝元 )을 思慕하여, 對蘇(大小)가 모두 휘원을 勸하여 虛點을 틈타 入城(入城)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어 曾前 愚問勝으로 部長(副將)을 삼아 受賂가 있는 곳에 머물도록 하고, 석전 恥部警은 非全州 重納言( 備前州中納言 ) 坪數가( 平秀家 : 우키타 히데이에 )와 小西行長(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 * ] )·살마 逃走( 薩摩島主 ) 도진( 島津 : 시마즈 요시히로 ) 等의 軍隊 4∼5萬 兵力을 거느리고서 重老兵(中路兵)李 되어 美洲( 尾州 비슈 [ * ] )·農酒( 濃州 老슈 [ * ] ) 地域 隊員星( 大垣城 : 오가키性 )으로 가서 陣을 치고 場속 大將勝( 長束大藏丞 )과 安國寺( 安國寺 : 안코쿠地 에케이 ) 2人을 軍摠(群總)으로 삼아, 휘원( 輝元 )의 兩者(養子) 醴酒 宰相( 藝州宰相 ) 水原( 秀元 : 모리 히데모토 )과 용장사( 龍藏寺 )·運籌 始終( 雲州侍從 : 깃카와 히로이에 ) 等의 4萬 3千의 軍士를 거느리게 하여 迂路病(右路兵)으로 삼아 이세주( 伊勢州 二世슈 [ * ] )로 가서 眞性( 津城 : 쓰 性 )과 송오성( 松鳥城 )을 陷落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加强에게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軍隊를 農酒( 濃州 老슈 [ * ] )의 官員( 關原 : 세키가하라情 )으로 이동시키고, 大戰 兄夫頃( 大田刑部卿 )이 山求人 番手( 山口因幡守 ) 等의 7千 軍士를 거느리게 하여 左路病(左路兵)으로 삼아 月후주( 越後州 에치故國 [ * ] )에서 抗戰을 하였는데, 當時 加强과 같이 일을 圖謀한 倭將 詩傳비전數의 軍隊가 追擊하였습니다. 3로의 軍隊가 農酒 官員에서 合陣(合陣)하여 街江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加强은 휘원이 이미 大판城에 入城하여 軍隊를 出動하여 抗戰한다는 말을 듣고 自己에게 붙은 8萬餘 名을 거느리고 晝夜로 달려 農酒( 濃州 )의 請願( 靑原 )에 到着하였습니다. 이때 혹佃甲匕首( 黑田甲斐守 : 구로다 나가마사 )란 自家, 휘원의 사위 軸全州 重納言( 筑前州中納言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과 휘원의 從弟(從弟) 運籌 始終( 雲州侍從 )이 속으로 휘원에게 붙으려 하지 않는 뜻이 本來부터 있음을 알고서 몰래 加强에게 內通하니, 街江이 卽時 甲匕首를 시켜 反間計 (反間計)를 使用하였는데, 軸全州 重納言 等이 그 말을 달게 여기고 約束하기를 ‘9月 14日에 精銳 起兵(精銳騎兵)을 整頓해서 奇襲해 오면 우리는 거짓으로 3로의 先鋒(先鋒)李 되었다가 되돌아서서 官員( 關原 )을 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街江이 果然 그 約束대로 하니 祝電 重納言 等이 亦是 約束대로 하여 晝夜로 連戰(連戰)하였는데 官員의 3老兵이 크게 敗退하여 數가( 秀家 )와 對蘇 兄夫頃( 刑部卿 : 오타니 요시쓰구 ) 等은 다 戰死하고, 그 나머지도 모두 潰散(潰散)하였으며 加强은 乘勝長驅하여 近江週( 近江州 誤미슈 [ * ] ) 歲多校( 勢多橋 )에 到着하여 運籌 始終( 雲州侍從 )이란 者를 불러 ‘너의 從兄 휘원이 城門을 열고 스스로 물러가면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휘원이 속임數인 줄을 모르고 그 말을 믿고서 怯이나 城을 버리고 本陣(本津)으로 물러가니 같은 달 27日에 街江이 다시 受賂( 秀賴 )의 城으로 들어가 曾前 愚問勝( 增田右門丞 ) 等 自己를 배반했던 10餘 人을 追擊해서 逮捕하여 割腹 自決하도록 하고, 또 석전 恥部頃( 石田治部卿 )과 坪行長( 平行長 )·安國寺( 安國寺 ) 等 셋을 잡아다 都市(都市)를 돌면서 罪를 聲討한 後 경동교( 京東橋 ) 앞에서 梟首(梟首)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원에게 脅迫하기를 ‘네 罪는 宜當 죽여야 할 罪이나 너의 愛妾(愛妾)과 子息 收取( 守就 : 모리 히데나리 )를 볼모로 보내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니, 휘원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加强은 그들을 볼모로 잡고서도 또다시 휘원의 食邑(食邑) 8週 中에 6株를 빼앗고 脅迫하여 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景勝( 景勝 )은 軍隊가 매우 强盛하여 그 周邊의 적秋(賊酋) 6∼7人이 그에게 붙었고, 街講義 孼子(?子) 三下手( 三河守 : 유키 히데야스 )란 者도 亦是 제 아비를 배반하고 景勝에게 合勢하였는데, 景勝은 눈이 녹기를 기다려 大大的으로 進擊할 것이라고 하므로 이는 街江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또 土座 始終( 土佐侍從 ) [25] 이란 者가 남經路( 南京路 )에 있는데, 加强에게 붙지 아니하고 있으며, 살마 始終 도진( 薩摩侍從島津 : 시마즈 요시히로 )이란 字는 휘원과 같은 무리인데 街江이 지난 10月에 그의 孫子 사위인 淸淨( 淸正 )으로 長壽를 삼아 4萬 餘의 軍士를 거느리고 가서 도진( 島津 )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네 番 싸워 모두 敗하자 軍士를 退却시키고, 强化(講和)를 要請하였으나 都塵이 兵船(兵船) 70餘 隻을 準備해서 中國으로 들어가겠다고 큰소리친다고 합니다. 敵의 속셈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都塵이 加强과 서로 對峙하여 變亂을 對處하고 있으면서 必是 街江이 오는 것을 利用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中國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宣祖 136卷, 34年( 1601年 : 新築 / 名 萬曆 (萬曆) 29年) 4月 25日(壬辰) 11番째 記事

參考 文獻 [ 編輯 ]

  • 후지이 지자에몬, 《세키가하라 合戰》 ( 세키가하라 觀光 協會 )
  • 후지이 지자에몬, 《세키가하라 合戰 史料집》 ( 新進부쓰誤라이샤 )
  • 가사야 카즈히코, 《세키가하라 合戰, 四百年의 수수께끼》 (新進부쓰誤라이샤)
  • 시로미즈 다다시, 《圖說( ?? ) 세키가하라의 合戰》 ( 氣候 新聞社 )
  • 後타키 겐이치, 《세키가하라 合戰》 ( 츄코신쇼 )
  • 宮川?古「?原軍記大成1~4」(?史?究?)

各州 [ 編輯 ]

  1. 『?原始末記』
  2. 『?原軍記大成』
  3. 『?原合?記』
  4. 官僚派
  5. 《醫宴會後一期》(義演准后日記)에서는 그에 도도 다카토라 , 하치스카 이에마사 ,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 3名이 더 參加했다고 한다.
  6. 이때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의 邸宅으로 도망쳐 도움을 要請했다는 俗說이 있으나, 이것은 後世 《 日本野史 》(日本野史)에 나오는 이야기로 信賴性은 없다.
  7. 잇키란 日本史에서 武裝 蜂起와 叛亂을 뜻한다. '우에스기 이민잇키'는 1600年 세키가하라 戰鬪 當時 에치故國(只今의 니가타縣)에서 發生한 武裝 蜂起를 말한다.
  8. 모시던 家門을 떠나는 것을 일컫는 말
  9. 오타니 요시쓰구의 어머니
  10. 關門
  11. 只今의 이치노미야視 (一宮市)
  12. 〈세키가하라 戰鬪〉. 《《日本戰士》(日本戰史)》. 區(舊)日本陸軍 參謀本部.  
  13. 시마즈 部隊의 的中突破 退却前으로 有名하다.
  14. 조주인 모리아쓰 (長?院盛惇)
  15. 武裝이 戰場에서 입던 겉옷
  16. 요시히로를 말함
  17. 現在의 벳푸詩 (別府市)
  18. 달리 論하자면, 兵農一切의 當時 狀況의 兵役을 勘案한다면 石膏만으로도 充分히 一定 水準 以上의 兵力이 될 수 있었는데, 도쿠가와가 갖는 이 程度의 石膏라면 도쿠가와의 石膏만으로도 웬만한 다이묘가 氣를 쓰고 모은 最大兵力의 2倍쯤은 가볍게 超過했다.
  19. 非常 事態에 對備해 城을 守備하는 兵士
  20. “?ケ原古?場の整備” . 岐阜?? . 2017年 9月 1日에 確認함 .  
  21. プレイライフ編集部 (2020年 9月 24日). “【?ケ原の?いが1分でわかる】一度見れば絶?に忘れない!大人は?明できないと恥ずかしい??” . 《プレイライフ》 . 2020年 9月 27日에 確認함 .  
  22. ワ?テルロ?と?ケ原、「姉妹古?場」に 日本??新聞 』夕刊2017年9月1日
  23. 간토 地方 도호쿠 地方
  24. 에치젠國 , 엣추국 , 에치故國
  25. 嘲笑카베 某토치카 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세키가하라 戰鬪 以前에 臨終하였기 때문에 아들 嘲笑카베 모리치카 로 推測된다.

內容主 [ 編輯 ]

  1. 諏訪勝則作成の表(『?史?本』780? 新人物往?社、2004年)?載のでは一忠。
  2. ?母衣衆や、織田信吉、織田長次が布陣したとされる。
  3. 古田重然という?もある。

出處週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