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코쿠地 에케이
(
日本語
:
安?寺?瓊
,
1539年
? ~
1600年
11月 6日
)는
센고쿠 時代
부터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까지의
僧侶
,
다이묘
이다. 안코쿠地(安?寺)라는 姓은
아키國
(只今의
히로시마縣
)에 있는 寺刹名
後道人
(不動院)에서 起因한 것이다.
주고쿠 地方
의 臺 勢力
모리氏
의 外交勝으로 活躍해 다이묘의 身分에 오른 人物이다.
壬辰倭亂
에서 義兵將
郭再祐
와의 戰鬪로 익히 알려져 있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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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난 해에 關해서는 여러 說이 있지만,
덴分
8年(
1539年
) 或은 덴分 6年(
1537年
)으로 알려져 있다. 父親은
아키 다케다氏
(安芸武田氏)의
다케다 노부시게
或은 그의 아버지
圖謀 시게키요
인 것으로 傳해 내려온다.
덴分 10年(
1541年
)
모리 모토나리
의 攻擊을 받고 아키 다케다氏가 滅門되자, 家臣에 이끌려 脫出했고,
아키
의 안코쿠地로 出家해 世俗과 關係를 끊었다. 그 뒤,
교토
의
도후쿠地
에 들어와
지쿤 엔신
의 弟子가 되었다. 덴쇼 2年(
1574年
) 아키 안코쿠誌의 住持가 된 後, 도후쿠地,
난젠지
의 住持가 되는 等, 中央
腺腫
寺刹의 最高 職位를 얻는다.
한便 모리氏의 스승 엔신에 歸依한 關係로, 모리氏의 外交勝이 된다.
겐키
元年(
1570年
) 모리氏와 對立하고 있던
奔告
의
오토모 소린
과의 和親을 성사시킨다.
덴쇼
10年(
1582年
) 모리氏는
하시바 히데요시
가
주고쿠 征伐
(中?攻め)의 발板으로
빗秋
다카마쓰性
으로 進軍하였고
攻防戰
中
魂露地의 便
이 일어나
오다 노부나가
가
惛怓지
에서 橫死하였다. 이 때, 하시바 히데요시는 이 事實을 숨기고 모리氏와 和親을 提案한다. 이에 外交勝이었던 안코쿠지는 이를 受諾한다. 이는 안코쿠地 自身이 히데요시의 躍進을 豫測해 이를 受諾한 것이라고 한다.
덴쇼 13年(
1585年
) 陰曆 1月, 하시바가 모리氏에 正式으로 服屬할 것을 要求한다. 이에 이를 受諾하고, 하시바의 信任을 얻는다. 그리고,
시코쿠 征伐
(四?攻め,
시코쿠 平定
(四?平定)) 以後,
이蓼麴
內 2萬 3千 席의 領地를 下賜받았으며, 덴쇼 14年(
1586年
)
규슈 征伐
以後, 6萬石으로 加增되었다. 또, 히데요시의 側近이 되어 全國에서 行해진 검指의 實務를 擔當하였다.
分路쿠
元年(
1592年
)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의 隸下 部隊에 屬해
웅치 戰鬪
,
정암진 戰鬪
等을 指揮하였다.
게이初
4年(
1599年
) 교토의
겐닌지
(建仁寺)를 再興하는 데 힘쓴다.
안코쿠지는 모리氏 中 親히데요시波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와 遭遇가 깊었지만, 고바야카와 事後, 親도쿠가와波인
깃카와 히로이에
와 反目한다. 게이初 5年(
1600年
)
세키가하라 戰鬪
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를 도와 徐君에 參戰하였고, 이에 더해 모리氏의 首長
모리 데루모토
를 說得하여 徐君 總大將으로 擁立하는데 助力했다.
陰曆 9月 15日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모리 히데모토
, 깃카와와 함께
도쿠가와
君의 後方에 陣을 쳤다. 하지만, 바로 앞에 陣을 친 깃카와군에 막혀 君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는 깃카와가 隱密히 도쿠가와와 內通했기 때문이다.
前後, 안코쿠지는 逃走하지만, 교토에서 도쿠가와의 사위
오쿠다이라 老부마사
部隊에 捕縛되어 徐君 首魁 中 한 名으로
로쿠조가와라
에서 斬首되었다. 享年 62歲 或은 64歲였다.
墓所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野마구
의 겐닌지에 목무덤이 있고,
히로시마縣
히로시마시
히가시區
의 後道人에도 墓가 있다.
人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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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덴쇼 元年(
1573年
) 陰曆 12月 12일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의 側近
이노우에 하루타다
앞으로 된 署長
[1]
을 보면
오다 노부나가
가 漸次 衰하고, 그의 家臣
하시바 히데요시
가 躍進할 것을 豫想했다. 이런 逸話로 볼 때 先見之明이 있는 人物로 보인다. 이에 派生된 이야기로 태合期에서는 無名의 히데요시에게 “當身은 將來에 天下를 取할 床을 가졌소”라고 豫言해 그 뒤 히데요시로부터 領地를 받았다고 적고 있다.
- 시코쿠의 嘲笑카베 家門의 外交勝 히有와 함께 잇쓰보즈(一?坊主)
[2]
라고 불리었다.
- 웅치 戰鬪
後, 朝鮮軍의 忠誠心과 勇猛性에 歎服하여 朝鮮軍의 遺骸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朝鮮의 忠臣 義士들의 靈魂을 祖上하노라(弔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標木을 세웠다고 한다.
[3]
이 標木을 세운 人物에 關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戰鬪의 指揮는 안코쿠地 에케이가 하였다.
- 朝鮮王朝實錄
에 記述된 洪 通事(洪 通事)의 陳述에 따르면, 에케이는 文章이 뛰어나고, 官職이 높으며 壬亂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의 指示에 따른다고 하였다.
[4]
또, 임란 後의
姜沆
의 陳述에 따르면, 主要 國政에 에케이가 參與함을 알 수 있고, 그 周邊에 朝鮮人을 두었다고 한다.
[5]
文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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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임
귀무자2
에서는 안코쿠地 에케이가 主人公
野규 쥬베이
와 함께 冒險을 떠나는 酒酊뱅이 스님으로 나타난다.
各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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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信長之代、五年、三年は持たるべく候。明年?は公家などに成さるべく候かと見及び申候。左候て後、高ころびに、あおのけに?ばれ候ずると見え申候。藤吉?さりとてはの者にて候〉
- ↑
잇쓰란 한雙으로 묶어 說明할 때 쓰는 말이며, 보즈란 僧侶 中에 우두머리 卽 住持勝을 가리키는 말이다.
- ↑
두산百科_웅치戰跡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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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宣祖 60卷, 28年(1595 乙未 / 名 萬曆(萬曆) 23年) 2月 10日(癸丑) 6番째記事
- ↑
宣祖 126卷, 33年(1600 경자 / 名 萬曆(萬曆) 28年) 6月 9日(競進) 2番째 記事
參考 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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