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쓰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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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
이시다 미쓰나리
이시다 미쓰나리
대일대만대길
對日臺灣大吉
無事 情報
時代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出生 에이로쿠 3年( 1560年 )
死亡 게이初 5年 陰曆 10月 1日 ( 1600年 11月 6日 )
改名 사키치 (初名), 미쓰나리
別名 石田治部少
誡命 江東院正軸因公大?定門
主君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官位 種5爲하 支部老所有
氏族 이시다氏
父母 아버지: 이시다 마사쓰구 (石田正?)
兄弟姊妹 兄: 마사즈미 (正澄)
配偶者 情實: 고게쓰인 (皎月院, 우다 料理타다 宇多?忠의 딸)
子女 시게이에 (重家), 시게나리 (重成), 쇼鯤인 (??院, 高다이인 의 養女, 쓰가루 老父히라 의 側室) 等

이시다 미쓰나리 ( 日本語 : 石田三成 , 에이로쿠 3年( 1560年 ) ~ 게이初 5年 陰曆 10月 1日 ( 1600年 11月 6日 ))는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의 武裝 兼 다이묘 이다. 도요토미 政權 下에는 誤奉行 의 한 사람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生涯 [ 編輯 ]

出世 [ 編輯 ]

에이로쿠 3年( 1560年 ) 아버지 이시다 마사쓰구 와 어머니 이와타 氏의 次男 또는 3男으로 誤美國 사카타 軍 이시다 寸(現 시가현 나街하마시 이시다 政)에서 태어났으며, 兒名은 사키치이다. 이시다 家門은 性이 이시다 村에서 起因할 것으로 볼 때 이 地域의 土豪勢力으로 追贈할 수 있다.

하시바 히데요시 (羽柴秀吉)가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의 膝下에서 오미 北部의 아자이 家門을 滅門한 後, 이 地域 領主로 赴任해 왔으며, 나가하마性 을 쌓아 支配를 鞏固히 한다. 이 무렵인 덴쇼 2年( 1574年 ) 히데요시의 고쇼(小姓)로 일했을 것으로 推測하고 있다. 單, 連帶에 關해서는 異說도 있다.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의 名으로 주고쿠 를 攻掠할 때 從軍했으며, 덴쇼 10年( 1582年 ) 陰曆 6月 노부나가가 魂露地의 便 (本能寺の?)으로 橫死하자, 히데요시를 補佐하여 疫神 아케치 미쓰히데 (明智光秀)를 討伐한다. 덴쇼 11年( 1583年 ) 시즈街타케 戰鬪 에서 시바타 가쓰이에 (柴田勝家) 君의 動向을 偵探하는 活動을 하였으며, 戰鬪에 있어서는 先鋒에 나서 공을 세운 記錄이《일류가기》(一柳家記)에 적혀 있다. 덴쇼 12年( 1584年 ) 고마키·나가쿠테 戰鬪 에 從軍했으며, 같은 해에는 오미 國 街某君 에서 行政實務를 보았다. 漸次 하시바 히데요시 가 中央 政界를 掌握하자, 이에 미쓰나리度 漸次 히데요시의 側近으로 擡頭되기 始作한다.

도요토미 政權 下에서 [ 編輯 ]

덴쇼 13年( 1585年 ) 陰曆 7月 11日 히데요시가 관백 職에 오르자, 미쓰나리度 종오위下 支部老所有에 서임되었고, 年末에는 오미 國 미나쿠치 4萬 席에 拜領되었다.

덴쇼 14年( 1586年 ) 陰曆 1月 舞踊으로 名聲이 높은 옛 쓰쓰이 家門의 가신 緦麻 기요오키 에게 自身의 領地의 半에 該當되는 2萬 石을 주어 家神으로 맞아들인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도 놀라 미쓰나리의 行動을 賞讚했고, 緦麻 社콘에게는 미쓰나리에게 忠誠을 보일 것을 재촉하면서 國棟文樣이 있는 下午里 [1] 를 주었다. 單, 緦麻 社콘을 家神으로 맞이한 時期에 關해서는 異說이 存在하고, 緦麻 社콘은 미쓰나리의 家神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家神으로 맞이했다는 說도 있다. 같은 해 에치高 우에스기 가게카쓰 (上杉景勝)가 新種의 盟誓를 하기 위해 오사카城 으로 上京할 때 이를 斡旋했으며, 사카이 의 行政實務度 擔當했다.

덴쇼 15年( 1587年 ) 규슈 征伐 에서 後方의 普及을 맡았다고 한다. 前年에 끝난 시코쿠 征伐 처럼 규슈 評程度 比較的 短期間에 끝난 理由에 關해서 미쓰나리의 有能한 行政實務가 뒤받침했다는 見解도 있다. 규슈 平定後, 하카타 에서 行政實務를 擔當해 하카타의 復興에 邁進한다.

덴쇼 16年( 1588年 ) 사쓰마 시마즈 요시히사 (島津義久)와 히데요시의 接見을 斡旋했다.

덴쇼 17年( 1589年 ) 美露國 에서의 검指 實務를 맡았으며, 이듬해인 덴쇼 18年( 1590年 ) 誤다와라 征伐 에서는 好調 家門의 周邊 知性攻掠에 邁進했다. 오시성 攻擊에 있어서는 城周邊의 講을 끌어 들여 手工을 行하지만, 그다지 進陟되지 않았다. 現在 오시 性에는 그의 陣頭 指揮로 지어졌다는 이시다 堤防이 남아있다. 오시 姓은 本性이 誤다와라性 이 陷落된 後, 開城되었기 때문에 攻城戰에 있어서 미쓰나리의 策略은 別로였다고 적은 書籍이 많이 出版되고 있는 現實이다. 아울러 미쓰나리는 히타치 社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가 히데요시를 接見할 수 있도록 斡旋하였고, 田土 統一後, 오슈 의 검指關한 實務도 擔當하는 等 如前히 行政實務에서 頭角을 나타내었다.

分路쿠 元年( 1592年 ) 壬辰倭亂 이 勃發하자, 마시打 나街모리 (?田長盛), 오타니 요시쓰구 (大谷吉?)와 함께 朝鮮 에 건너가 平壤城 에서 行政에 關한 總責任을 맡았다. 事實 그는 平壤 戰鬪 以後 繼續 北進했다가 추위와 普及 遮斷, 義兵 들의 活躍으로 인하여 平壤城으로 돌아가 行政에 關한 總責任을 맡은 것이었다.

分路쿠 2年( 1593年 ) 碧蹄館 戰鬪 에서 오늘날의 京畿道 高陽市 에 該當되는 地域에서 埋伏하고 있다가 照明 聯合軍을 擊破하였지만, 이 餘勢를 몰고 이시다 미쓰나리와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等이 이끄는 日本軍은 幸州山城으로 쳐들어가서 벌어진 幸州山城 戰鬪 에서는 朝鮮軍에게 敗北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 戰鬪에서 第2代를 맡아 마에노 나街야스 (前野長康), 마시打 나街모리, 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 戰鬪에서 미쓰나리는 朝鮮軍이 쏜 勝字銃筒 에 맞아 負傷을 當했다.

特히 戰鬪 當時 幸州山城은 들어오는 入口가 좁고 뒤에 漢江이 흐르고 있는 地形이였는데 미쓰나리와 우키타 히데이에 는 莫無可奈로 그 좁은 入口에 自身의 兵力들을 쓸어넣는 無理數를 두었다.

그 後 明나라 의 강화사 사용재 서일관 을 맞이해 나고야 姓 으로 돌아간다. 明과의 强化交涉을 積極 仲裁하였지만, 이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와 같은 武斷派의 反撥을 招來하는 契機가 되었다.

分路쿠 3年( 1594年 ) 사쓰마의 시마즈 家門과 히타치의 社타케 家門 營內의 검指를 擔當하였다.

分路쿠 4年( 1595年 ) 히데요시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 (豊臣秀次)가 母斑의 嫌疑로 謀殺되자, 그의 領地 中 오미 7萬 石耳 미쓰나리에게 돌아갔고, 뒤이어 오미 사와야마 19萬餘 席을 히데요시로부터 下賜받는다.

게이初 元年( 1596年 ) 사와야마 領內에 規定書를 내렸으며, 名의 講和使節을 接見했다. 같은 해 교토 의 行政實務를 擔當했으며, 히데요시의 命에 따라 斷行된 기리柴炭 彈壓策에 있어서는 기리시탄을 積極 辯護했다.

게이初 2年( 1597年 ) 丁酉再亂 이 勃發하자 다시금 明과 朝鮮과의 强化交涉에 힘써보지만, 決裂되었다.

게이初 3年( 1598年 ) 陰曆 8月 히데요시가 죽자 朝鮮의 여러 祭場들의 撤軍에 힘썼다.

히데요시 事後 [ 編輯 ]

도요토미 히데요시 事後 도요토미 政權은 赤字 도요토미 히데요리 가 承繼했다. 히데요시는 臨終 直前, 오랜 親舊였던 마에다 都市이에 를 包含한 五大路 [2] 에게 自身의 어린 아들 히데요里의 補佐를 懇切하게 付託하였다. 그러나 五大路의 한 名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付託과는 달리, 히데요시가 죽자 野心을 드러내며 自身의 天下를 計劃하기 始作한다.

게이初 3年(1598年) 潛在的으로 도요토미 家門에 威脅이 될 것을 感知한 미쓰나리는 積極的으로 이에야스에 對抗하지만, 自身의 가로人 緦麻 기요오키이 提案한 이에야스 暗殺 計劃에 對해서는 大義名分을 重要視하여 拒絶하였다. 이에 緦麻 기요오키는 나쓰카 마사이에 와 함께 獨斷的으로 이에야스 暗殺을 試圖하지만 事前에 이에야스 諜者에게 漏泄되어 失敗하였다. [3]

도요토미 家門을 整理할 計劃을 드러낸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家門의 斷絶을 위한 計劃을 하나씩 실현시키는데, 그 첫 番째가 도요토미 家門의 武將들을 包攝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는 死婚을 嚴格히 禁止하는 法을 財政하였으며, 이에야스를 包含한 五大路는 强壓에 못이겨 여기에 約束을 했으나, 히데요시 事後 이에야스는 이것을 어기며 후쿠시마 마사노리 , 가토 기요마사 , 구로다 나가마사 等과 도요토미 家門의 許可 없이 이에야스와 査頓을 맺게 된다. 特히 미쓰나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等은 히데요시의 家臣들임에도 히데요시가 마음대로 定한 法을 어기고, 이에야스와 査頓을 맺었다.

이로인해 게이初 4年( 1599年 ) 陰曆 1月,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히데요시가 在廷한 法을 어겼다며 五大路의 한 名인 호쿠리쿠 의 臺 다이묘 마에다 都市이에에게 提訴하고, 이에야스에게는 罪를 追窮하기 爲해 獅子를 派遣하였다. 이로 인해 다이묘들은 兩分되어, 마에다 都市이에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邸宅으로 各各 集結하는 事態가 發生하였고, 兩側은 戰爭의 一觸卽發 狀況에 이르렀다. 이에 이에야스는 陰曆 2月 2日 都市이에와 미쓰나리와의 覺書를 交換해 和親하였다. 그러나 尹 3月 3日 이에야스를 牽制하던 마에다 都市이에가 病死하자, 미쓰나리와 對立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 구로다 나가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 아사노 요시나가 , 호소카와 다다오키 ,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7武裝이 미쓰나리의 오사카 邸宅을 襲擊한다. 史料에 따라서는 하치스카 이에마사 , 도도 다카토라 의 이름도 있다.

하지만 미쓰나리는 事前에 社타케 요시노부의 도움을 받아 오사카를 脫出해 후시미性 으로 逃走한 後였다. 이 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仲裁로 和解하고, 미쓰나리는 五峯行에서 물러난다. 陰曆 3月 10日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次男 유키 히데야스 의 警護를 받으며 사와 酸性 으로 돌아갔다. 미쓰나리 襲擊에 關해서는 미쓰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邸宅으로 避身했다고 적은 書籍이 많지만, 이는 19世紀 以後에 쓰여진 《日本戰士· 세키가하라 役》 等으로 그 以前에 記錄된 史料에는 적혀 있지 않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에다 都市이에가 죽은 後, 父親의 維持를 이어 도요토미 家門에 충성할 수 있는 마에다 家門에 母斑嫌疑를 씌워 가가 (加賀) 征伐을 計劃하였으나, 都市이에의 長男인 마에다 都市나가 는 어머니인 好슌인 을 人質로 보내어 이에야스에게 順從하였다. 이에 미쓰나리는 사와 山城에서 이에야스 除去를 決心하였다.

세키가하라 [ 編輯 ]

게이初 5年( 1600年 ) 陰曆 7月,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政界에서 排除하기 위해 아이즈 (現在의 후쿠시마縣 )의 臺 다이묘 우에스기 가게카쓰, 그의 家臣 나오에 가네쓰구 와 祕密裏에 擧兵計劃을 꾸민다. 이에 關해서는 예초에 密約같은 것은 없었다라는 說도 있다. 이 後, 우에스기 家門은 公公然히 이에야스와 對立하였고 가네쓰구는 나오에腸 을 全國에 頒布하여 도쿠가와에 反旗를 표하였고, 이에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 를 이끌로 아이즈 征伐 을 斷行한다. 只今이 東西로 이에야스를 挾擊할 好機로 본 미쓰나리는 擧兵을 決意하고, 이에야스에게 從軍하려던 親友 오타니 요시쓰구를 友軍을 맞이하였다. 요시쓰구는 當時 領地 19萬 席에 不過한 미쓰나리가 250餘萬 席의 臺 다이묘人 이에야스에게 對抗하는 것은 無謀하다며 말리지만, 도요토미 家門을 위한 미쓰나리의 意志를 꺾을 수 없어 미쓰나리의 徐君에 加擔한다.

陰曆 7月 12日 兄 마사즈미를 浮橋로 하여 오미 에치江 隣近에 官訴를 設置하고, 이에야스를 따라 아이즈로 向하는 後發 다이묘 나베緦麻 가쓰시게 마에다 모리카쓰 의 움직임을 沮止하여 자군에 편입시켰다. 單, 나베緦麻 가쓰시게의 境遇, 아버지 나베緦麻 나오시게 부터 오사카 邸宅에 머물러 있으라는 命을 받고, 이를 殊常히 여기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쓰나리를 따랐다는 說도 있다. 陰曆 7月 13日 미쓰나리는 힘으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기기 어렵다고 判斷하여 여러 다이묘의 妻子를 人質로 삼기 위해 오사카城 안으로 軍을 派遣한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妻를 비롯 一部는 이미 오사카를 脫出하였고, 더욱이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妻 街라샤 는 邸宅에 불을 놓고 죽는다. 이에 다이묘들의 妻를 人質로 삼으려는 計劃은 中止되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이러한 行動은 日本 全體를 憤怒에 휩쌓이게 했으며 이시다 미쓰나리는 公共의 敵이 되었는데 特히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찢어죽여버리기로 굳게 盟誓했다.

陰曆 7月 17日 五大路 中 한名인 모리 데루모토를 徐君 總大將에 擁立해 오사카 城에 入城한다. 이와 關聯하여 오타니 요시쓰구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人望이 높지 않음을 直言하여 보다 큰 다이묘에게 指揮權을 넘기라는 助言해 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 亦是 미쓰나리와 같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里를 위한 것이라고 했기에, 戰爭의 重要한 열쇠를 쥐고 있는 히데요里의 參戰을 이끌지는 못했다. 陰曆 7月 18日 徐君은 이에야스의 重臣 도리이 모토타다 가 지키고 있는 후시미 性을 攻略한다. 그러나 道理이 軍의 頑剛한 抵抗에 쉽게 陷落하지 못하자, 兵士들의 家族을 人質로 脅迫하였고, 陰曆 8月 1日 脅迫에 못이긴 兵士들의 背信으로 性은 陷落된다. 陰曆 8月 2日 미쓰나리는 후시미 性 陷落을 여러 다이묘에 알리기 위해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및 自身이 連判狀에 이름을 올려 全國에 公布한다.

8月부터 二世 方面을 攻掠하지만, 豫想보다 東君의 서상이 빨랐기 때문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야전할 것을 決定한다. 드디어 陰曆 9月 15日 霸權을 둘러싼 세키가하라 戰鬪 가 始作되었다.

본 戰鬪가 일어나기 前, 東君은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牽制하기 위해 따로 떨어져 있는 다테 마사무네 , 모가미 요시아키 等과 나카센도 를 經由해 合流하기로 한 도쿠가와 히데타다 의 3萬 8千의 部隊가 우에다 [4] 사나다 마사유키 軍에 묶여 [5] 本錢에 參戰하지 못하는 兵力적 損失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徐君 또한 一部 前歷이 오쓰, 다나베 等에 分散되었고, 세키가하라에 있는 다이묘들마저도 몇몇이 本錢 中 觀望하는 態度를 일삼거나, 甚至於는 東君과 內通하였다.

戰鬪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部隊의 制止 命令을 無視하고 李珥 나오마사 部隊가 우키타 히데이에 軍에 發砲한 것을 始作으로 展開되었다. 戰鬪 初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數的 優位에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 軍을 攻擊했으나, 도요토미 家門을 위한 聖戰이라 믿는 우키타 히데이에 軍의 높은 戰意와 우키타 部隊의 前衛에 있던 아카시 다케노리 의 8千部隊의 總攻擊에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潰滅 危機에까지 몰리게 된다. 우키다 君의 追擊은 東君 陣營에 있던 가토 요시아키 軍과 쓰쓰이 사다쓰구 軍이 후쿠시마 君을 援助하여 멈추었으며, 게다가 徐君側은 우키다 軍을 除外하고는 크게 움직이지 않았기에 우키다 軍은 깊이 追擊하지 않고, 軍隊를 整理하였다.

오타니 요시쓰구는 도도 다카토라, 膠固쿠 다카土毛 , 데라者와 히로타카 部隊를 맞이하여 一進一退의 激戰을 치르고 있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 오다 나街마스 , 後壘打 시게카쓰 軍과 戰鬪를 遂行하고 있었다. 시마즈 요시히로 部隊는 進擊해온 李珥 나오마사 君을 맞았으나 시마즈 軍은 激烈하게 應戰하지 않은채 陳(陳) 안에서만 應戰할 뿐이었다.

한便 徐君에서 典醫가 가장 높았던 이시다 미쓰나리의 部隊에는 호소카와 다다오키, 구로다 나가마사, 다나카 요시마사 等이 攻擊을 敢行하였다. 또한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救援하고 方向을 바꾼 가토 요시아키의 部隊 亦是 미쓰나리의 部隊를 함께 攻擊하여, 미쓰나리는 倍 以上의 敵에게 攻擊을 받았다. 東君의 各 祭場들은 事實上 徐君의 大將이라 할 수 있는 미쓰나리의 陣營으로 殺到하여 戰爭의 最大 功勳을 세우려 하였으나, 미쓰나리 部隊는 이들을 맞이하여 싸웠으며, 오히려 緦麻 社콘, 가모 사토이에 와 같은 將帥들의 奮戰으로 因해, 攻擊해온 敵을 擊退하여 戰鬪 初盤의 傳貰를 徐君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正午가 가까워지도록 戰況은 如前히 徐君이 優勢했다. 梁君 모두 20~30% 程度만 싸우고 있었다. 이 戰鬪 初盤의 戰況은 東君에게 不利하였고, 內通을 約束한 部隊들도 觀望하였으므로, 焦燥해진 이에야스는 本陣을 모모쿠바리 산(桃配山)에서 이시다 君과 시마즈 軍과의 500미터 距離 地點 [6] 으로 陣을 전진시켜 戰場으로 나왔다. 하지만 좀처럼 戰況이 바뀌지 않자, 內通을 約束한 고바야카와 軍이 陣을 치고 있던 마쓰오 山에 砲擊을 敢行하였다. 以後 1萬 5千의 고바야카와 軍은 徐君을 背信하여 山을 내려왔으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의 背信을 이미 豫想하고 있었던 오타니 요시쓰구는 400名의 直屬部隊로 反擊을 敢行하였다. 그는 고바야카와 君의 1陣과 2陣을 擊退하였고, 고바야카와의 大軍을 300미터 程度 후퇴시키며 奮戰하였으나 [7] , 自身의 指揮아래 두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의 部隊가 고바야카와의 部隊에 呼應하여 마쓰오 山을 내려오자, 衆寡不敵으로 潰滅하였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背信으로 戰況이 急速히 바뀌어 東軍이 優勢하게 되었고, 오타니 요시쓰구를 비롯하여 우키타 히데이에의 部隊와 이시다 미쓰나리의 部隊도 敗走했다. 이렇게 해서 日本 全體의 命運이 걸렸던 세키가하라 戰鬪는 單 하루 만에 幕을 내렸다.

세키가하라에서 敗戰한 미쓰나리는 이부키 산 으로 逃走해 이부키 山 東쪽의 아이가와 山을 넘어 가스가 村으로 달아났다. 이때 多急하게 逃亡을 다닌 탓에 밥을 지을 時間마저 確保를 못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生쌀을 먹었기 때문에 泄瀉를 甚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傳해진다. 그 後, 가스가 村에서 信號 고개를 迂廻해 아네價와 江 으로 나갔다. 마가타니에서 나나마와리 고개를 넘어 아사노타니로 들어선다, 그리고, 오다니 山의 다니구치에서 다카토키 江 上流로 나와 候樓바시로 逃走했다. 그러나, 陰曆 9月 21日 다나카 요시마사의 追擊臺에 依해 捕縛되었다.

한便 陰曆 9月 18日 미쓰나리의 巨星 사와 山城은 東君의 攻擊을 받고 陷落되었다. 이때 父親을 비롯하여 이시다 一族 多數가 戰死했다고 한다.

陰曆 9月 22日 오쓰 姓 으로 護送되어 城門 앞에 밧줄로 묶어 앉혀 놓았으며, 그 後 이에야스와 會見하였다. 陰曆 9月 27日 오사카로 護送되어 29日 교토로 護送되어 오쿠다이라 老부마사 減毒下에 있게 된다.

陰曆 10月 1日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命에 依해 로쿠조가와라 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地 에케이 等과 함께 조리돌림을 當한 後 斬首되었다. 그의 나이 享年 39歲였다. 목은 散調가와라에 梟首된 後, 生前 親交과 있었던 僧侶 슌오쿠 소엔 , 다쿠안 소호 에 引渡되어 교토 다이土쿠지 에서 葬禮를 치렀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人間性과는 別個로 自身에게 지나치게 過分한 任務를 遂行한 탓에 徐君을 敗하게 하였으며 本人 亦是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처형당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文官으로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無關으로서는 完全히 失格인 人物로 軍事에 對해 完全히 門外漢이었으며 實際로도 행주大捷 에서 權慄 에게 3~4倍나 많은 兵力을 動員하고서도 半쯤 全滅하는 大敗를 當했다. 이렇기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本人에 對해서 잘 알고 戰鬪指揮를 本人보다 훨씬 뛰어난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다이묘에게 委任했어야만 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는 自身의 分數를 모르고 本人의 그 不足한 軍裁를 느끼지 못해 本人이 直接 戰鬪指揮를 하는 바람에 東君에 依해 큰 敗北를 當했다. 特히 部下管理가 매우 엉망이어서 시마즈 요시히로 와는 戰鬪 내내 反目했으며 甚至於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를 始作으로 麾下 다이묘들이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을 包含해 줄줄이 背信하는 바람에 제대로 힘조차 못 써보고 敗北했다. 어떠한 사람이든 그 사람의 그릇에 맞게 用途를 定해야 하는데 이시다 미츠나리는 戰鬪 指揮官으로서는 쓸모가 없으며 그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이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大敗를 當한 것이다.

人物, 逸話 [ 編輯 ]

  • 《武裝감長期》에 따르면, 매사냥을 하다 渴症을 느낀 하시바 히데요시가 間論旨 或은 山슈인을 訪問한다. 이때 童子僧 미쓰나리가 3盞의 茶를 勸했다. 첫盞은 큰 다완에 미지근한 茶를 한 가득 따랐고, 두 番째 盞은 앞선 다완에 비해 작고, 어느 程度 뜨거운 茶를 半 程度 따랐다. 以後, 마지막 盞은 高價의 작은 다완에 혀가 데일 程度의 車를 조금 따랐다. 이 童子僧의 마음씀씀이에 반한 히데요시는 童子僧을 데리고 나가하마性 에 入城했다고 한다. 이 逸話를 가리켜 3盞의 茶 또는 3헌車 라 일컬어지고 있으나, 史料가 에도 時代 에 出刊된 것이라 創作으로 보고 있다.
  •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敗走한 미쓰나리는 自身의 領地 오미 候樓바시 村에 다달았다. 처음 미쓰나리는 山슈인(三珠院)에 몸을 依託한다. 이때 주지 젠歲쓰가 미쓰나리에게 “자네의 所望이 무언가”라고 묻자, “이에야스의 목을 願합니다.”라고 對答해 젠歲쓰를 놀라게 했다. 그 後, 英敏 要旨로다이후의 案內를 받아, 절을 떠나 바위洞窟에 몸을 숨겼다. 이때 요지로는 혼자 責任을 지기 위해 妻와 離婚했고, 이에 感服한 미쓰나리는 自身이 숨은 곳을 官衙에 알리라고 慫慂했다. 왜냐하면 搜索隊가 미쓰나리를 찾을 境遇, 그의 親族에 그치지 않고 마을 사람을 모두 虐殺해 버린다는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요지로는 自首하였고, 虐殺을 避할 수 있었다.
  • 마에다 都市이에 死後,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不滿을 품은 武斷派 武裝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等이 미쓰나리를 襲擊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仲裁에 依해 미쓰나리는 官職에서 물러나 사와 山城에서 蟄居하게 된다. 이 때, 미쓰나리의 護送驛에 이에야스의 2男 유키 히데야스가 擔當하였다. 미쓰나리는 히데야스에게 이름이 새겨지지 않는 名도〈마사무네〉를 주었고, 이에 히데야스는 기쁜 나머지 〈이시다 마사무네〉로 명명해 所重히 여겼다고 한다. 名도 마사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쓰나리에게 준 것이라고는 하지만, 에도 時代에 出刊된《도검명물장》에서는 모리 데루모토가 所持하고 있던 것을 우키타 히데이에가 사들였고, 미쓰나리에 膳物하였다고 적고 있다.
  • 이시다 미쓰나리는 처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200 席 或은 400 席의 給料를 받고 있을 때, 그 給料를 모두 와타나베 肝베이란 人物에 주어 家神으로 맞이하였다. 와타나베 肝베이란 人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2萬 席의 領地를 줄테니 家神이 되어 달라고 付託하였고, 10萬 石을 주지 않으면 섬길 마음이 없다며 拒絶한 人物이다. 그 後 肝베이는 미쓰나리가 給料를 引上해 주겠다는 데에도 不可하고 처음 받은 給料 그대로 미쓰나리를 섬겼다고 한다. 이 일은 緦麻 社콘을 家神으로 맞이할 때 일화가 訛傳된 것으로 推測된다.
  • 《縱談日記》에 傳해 내려오는 오타니 요시쓰구와의 逸話는 有名하다. 한센病 을 앓고 있던 요시쓰구는 도요토미가 武將들과 함께 茶果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요시쓰구가 입을 댄 茶盞은 病의 感染을 두려워하여 모두가 꺼려하였으나, (요시쓰구의 津물이 茶盞으로 떨어졌다고도 한다.) 미쓰나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들이마시며 요시쓰구와 對話를 하였고, 이에 感動한 요시쓰구는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미쓰나리에게 加擔했다고 한다.
  • 이시다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敗하여 잡혀 監獄에 갇히게 되었다. 이시다는 목이 마르다고 呼訴하였는데 獄卒들이 그에게 곶감 을 던져줬다. 그러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感은 몸을 차게해 좋지 않다고 하자 獄卒들이 "於此彼 머지 않아 죽을 것인데 그런 것까지 神經씁니까?"라고 묻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大業을 이루려는 者는 죽는 瞬間까지도 抛棄는 하지말아야 한다"라는 말로 호통을 쳤다.
  • 犬猿之間인 가토 기요마사 와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實際 히젠 나고야 姓 築城에서 準備作業과 後方支援을 이시다 미쓰나리가 하였고, 建設에서의 指揮는 가토 기요마사가 맡았다. 이들이 힘을 函쳐 나고야 姓은 短期間에 完成되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壬辰倭亂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가 먼저 漢陽에 到着했으나 狀啓는 가토 기요마사가 먼저 보낸 것으로 비롯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그냥 本人이 漢陽에 到着하자마자 바로 狀啓를 보냈는데 이시다 미츠나리는 自己 눈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漢陽에 먼저 到着한 것을 確認했는데 이 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른 業務를 하느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보낼 狀啓를 作成하지 않은 狀態였다. 이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가토 기요마사의 狀啓를 遲延시키려다가 가토 기요마사와 싸움이 난 것이다. 參考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中에서 맨 먼저 漢陽에 到着하는 單 1名에게만 褒賞 을 하겠다는 方針을 定한 狀態였다.
  • 對立하고 있는 人物을 毒殺했다는 疑惑이 있다. 가모 우지사토 (蒲生氏?)와 가토 미쓰야스가 擧論된다. 가모 우지사토의 境遇 나고야 城에 再陣中 膵臟癌 으로 죽었다는 記錄이 있어 否定되고 있다. 가토 미쓰야스의 境遇 美야베 나街後嗣 의 津에서 饗應을 받은 後 毒殺되었다는 이야기와 戰場에서의 負傷으로 病死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同時代에서는 毒殺說에 무게를 두었다. 이에 가토 家門은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東君을 따랐다.
  • 1595年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失脚하자, 미쓰나리는 히데쓰구를 外面하는 여러 武裝과 달리 이를 代辯하였고, 히데쓰구의 照明을 歎願했다. 이에 히데쓰구와 신복이였던 마에노 다다야스 와 히데쓰구의 家臣들은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따랐으며 이 事件으로 비록 히데쓰구는 割腹했지만 이시다 미쓰나리가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救命한 點이 勘案되었기 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크게 信賴를 받게 되어 나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게 되었을 때 自身의 늦둥이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里를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付託하고 殞命하였다.
  • 도요토미가 五峯行의 筆頭로서, 다이코測定을 企劃하고 測量者를 定하는 等 뛰어난 行政官僚로서 큰 實績을 남겼으며,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와 酸性의 主人, 이시다 支部老所有 [8] 는 다이코共의 손발의 家臣으로서, 그 威勢를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고, 고야 산 (高野山)의 모쿠지키 오고 高僧은 '이시다 支部老所有는 奉行의 第一되는 얼굴 徵兆가 있다.'라고 評價하였다. 이들의 評價는 當時 미쓰나리에 對한 도요토미 政權의 信賴와 그의 權勢를 直接的으로 보여주는 評價이다.
  • 세키가하라 戰鬪 前에 호소카와 타다오키 를 잡아두기 위해 人質로 있던 그의 아내 호소카와 街라샤 를 잡아두려고 했으나 그女가 自殺하는 바람에 놀라 人質政策을 그만둔 逸話가 있다. 아내를 매우 아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激忿하여 東君에 積極的으로 加擔했다.
  • 周邊의 否定的인 評價에도 介意치않고, 自身의 信念에 따라 도요토미 政權의 行政을 도맡았다. 하지만 妥協이 全혀 없는 性格은 傲慢不遜한 態度로 비추어져 다른 다이묘들의 德望을 얻지 못하였다. 또한 좋고 싫음을 明確히 따지는 性格과 싫은 相對에게는 싫은 氣色을 감추지 못하여 外部 뿐만 아니라, 內部에도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와 같은 靜寂들이 많았다. 이들은 마에다 都市이에가 죽은 後, 미쓰나리를 襲擊하였고,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東君에 加擔하였다. 또한 이것이 原因이 되어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自身이 直接 總司令官이 되지 못하고 모리 데루모토를 總司令官으로 擁立해야만 했다.
  • 文官으로서는 뛰어난 人材인 反面 軍裁가 너무 없었으며 다른 다이묘들과는 些少한 걸로 다투는 일이 많았다. 시마즈 요시히로와는 壬辰倭亂 時節부터 始終一貫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사쓰마 兵力이 1千 5百名밖에 안된다는 것을 트집잡거나 시마즈가 建議한 計略이 마음에 들지 않아를 꾸짖는 等 些少한 理由로 甚하게 다퉜다. 이 때문에 結局 시마즈는 積極的으로 戰鬪를 進行할 수 없게 되었으며 結局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徐君의 敗北를 自招하게 되었다.
  • 이시다 미쓰나리의 親舊인 오타니 요시쓰구는 세키가하라 戰鬪 直前에 다음과 같이 忠告했다고 한다. “主君(이시다 미쓰나리)께서는 재주와 智慧에는 뛰어나지만, 勇氣(勇猛)李 不足합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목숨을 아끼지 않을 覺悟로 戰爭에 臨했으면 합니다.”, “主君께서는 건방지고 傲慢하다고 하는 所聞이 위로는 다이묘에서 아래로는 百姓들에게 이르기까지 퍼져 있습니다. 主君께는 罪悚하지만 朱君은 人望이 없습니다. 사람들 위에 설 者(=總大將)가 人望이 없다면 안됩니다. 主君께서 주제넘게 나선다면, 도요토미 家門의 大使를 誓約(盟誓)韓 者들까지 나이後(?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로 가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總大將은 아키 주나곤(安芸中納言 = 모리 데루모토)님, 部隊長은 非젠의 宰相(備前宰相 = 우키타 히데이에)님으로 세우시고, 主君께서는 그림자(背後)로 남으십시오” 이렇게 親舊의 率直한 忠告에 이시다 미쓰나리度 받아들여 實際로 總大將은 모리 데루모토에게 移讓하였다. [9]
  • 1600年 세키가하라 戰鬪가 勃發하자 우에스기 가게카쓰 ,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의 다이묘들을 一旦 徐君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成功하였고 모리 데루모토를 擁立하기까지 했으나 戰鬪指揮能力, 對人關係 等 여러面에서 脆弱點을 드러내 結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이 줄줄이 背信하여 徐君끼리의 內部戰鬪로 가는 樣相을 보여 結局 自滅하게 되었고 이시다 미쓰나리에 呼應했던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等은 沒落 一步直前까지 갔다.
  • 세키가하라에서 勝利한 東君은 미쓰나리의 巨星 사와 酸性을 攻擊하여 陷落시킨다. 《甲子野話》에 따르면, 當時 東君의 兵士들은 히데요시 時節 寵愛를 받던 미쓰나리였기에, 華麗한 미쓰나리의 邸宅을 期待했으나, 미쓰나리의 邸宅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感謝狀밖에 없었다고 傳해진다.
  • 誤奉行 으로서의 行政 能力은 相當히 뛰어났으나, 그 以外의 能力은 全部 無能兒였다. 甚至於 人間性에도 缺陷이 많아서 周邊에 怨恨關係를 많이 사기도 했으며 엄청나게 웃긴 行動을 한 적이 있는데 平素에 늘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죽이기로 다짐했음에도 不拘하고 정작 시즈가타케의 漆本倉 이 이시다 미츠나리를 죽이러 오자 되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 뒤에 숨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救助를 要請하는, 實로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行動을 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거成人 사와 山城까지 無事히 배웅시켜줬으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들의 不滿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이시다 미츠나리를 五峯行에서 解職시켰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分에 목숨을 건졌음에도 不拘하고 五峯行에서 解職당한 일만 원통해했다. 또한 호소카와 다다오키 의 아내이며 自身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對立에 一抹의 聯關性이 없는 호소카와 街라샤 를 拉致하려고 했다가 호소카와 가라샤가 死亡하는 일이 벌어지자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호소카와 家門, 시즈가타케의 漆本倉 等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知人들이 세키가하라 戰鬪 에서 모조리 東君으로 붙게 만들었다. 게다가 정작 세키가하라 戰鬪 가 벌어지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를 繼續 달래서 參戰시켜야 함에도 不拘하고 全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되려 하지 말아야 할 시마즈 요시히로 와 反目하면서 時間을 浪費했다. 結局 이시다 미츠나리 혼자만의 잘못으로 인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를 筆頭로 와키자카 야스하루 等 여러 다이묘들이 背信했으며 이시다 미츠나리는 그 自身의 人格이 그 自身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 주어진 業務만 잘 하는 사람일 뿐 知能 自體는 그리 높지 않은 사람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를 죽이는 것이 人生의 目標인 것과는 對照되게 平生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完全히 利用 當한 後 廢棄處分 當했다. 시즈가타케의 漆本倉 이 미츠나리 本人을 죽이러 왔을 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에야스에게 救助를 要請한 것부터 그의 知能이 낮은 것을 證明한다. 自身이 不俱戴天이라 여기는 사람 德分에 죽을 危機를 謀免했다는 것부터 이미 미츠나리에게는 名分이라는 것이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對하는 態度 [10] [11] 를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不拘하고 이에야스를 지나치게 過小評價 했으며 그 結果 호소카와 街라샤 를 拉致하는 過程에서 호소카와 街라샤 를 죽게 만들어 이 事件이 벌어진 時點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罪를 물어 이시다 미츠나리를 割腹시켜 없애도 말이 되는 狀況이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되려 이시다 미츠나리를 官職에 從事하지 못하는 代身 그를 保護하는 怪異한 行動을 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高度의 計略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하나의 長期말로 利用하여, 나머지 다이묘들의 忠誠心 檢査를 試圖했다. 於此彼 이시다 미츠나리는 호소카와 街라샤 가 죽은 時點에서 이미 處刑을 避할 수 없는 狀況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故意로 이시다 미츠나리 一黨들이 亂을 일으키게 만들어 여기에 加擔하는 者들을 索出하려고 이시다 미츠나리를 利用했다. 하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는 머리가 좋지 않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萬若 눈치챘더라면 이에야스에게는 아무리 덤벼도 所用 없다는 結果를 看破해 이에야스를 敵對하길 斷念하고 山 속에 숨어 平生을 隱遁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壬辰倭亂 以前부터 이미 판을 다 짜 놓았기 때문에 그에게 挑戰한다는 것은 아무 勝算이 없는 짓이었다. [12] 結局 이시다 미츠나리는 政敵(政敵)에게 마음껏 利用만 當하다 生을 마감한 寒心한 人生을 살아간 사람이다. 人品 問題를 떠나 現實的으로 評價하면 그렇게 된다.

尿道逃奴 및 高다이人과의 關係 [ 編輯 ]

一般的으로 널리 퍼진 誤解 中 하나는 미쓰나리가 옛 誤美國 榮州 아자이 나가마사 (?井長政)의 딸 尿道逃奴 (淀殿)를 崇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두 사람 모두 오미 出身이란 理由에서 만들어진 臆測으로 이시다 家門은 오미의 土豪勢力이었지만, 오미 北部의 榮州 아자이 家門과는 敵對關係였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理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親子息이 아니라 미쓰나리와 尿道逃奴 사이에서 태어난 私生兒라는 說이 있다. 하지만, 이 風聞의 相對者는 미쓰나리뿐만 아니라 오노 하루나가 도 있고, 記錄이 에도 中期以後에 나타나므로, 에도 幕府 의 御用學者가 捏造한 것으로 보고 있다. 히데요理는 1593年 8月 29日 生이며, 미쓰나리는 1592年 6月부터 朝鮮 에 있었다. 勿論 사람의 妊娠期間이 普遍的으로는 10個月이지만 이보다 若干씩 길고 짧을 수는 있다는 反論을 提起할 수 있지만 히데쓰구가 逆謀嫌疑로 죽게 되었을 때 미쓰나리는 이를 傍觀하지 않고 히데쓰구의 救命運動을 積極的으로 한 點으로 미뤄본다면 미쓰나리가 히데요里의 親父일 可能性은 없다고 볼 수 있다.

旣存의 通說로는 “ 誤와리 出身의 武斷派 高다이인 (高台院)”과“오미 出身의 餌料派 와 尿道逃奴”의 對立으로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高多이인의 키운 여러 祭場과 高다이인이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東君에 屬해 마시打 나街모리 [13] , 오타니 요시쓰구, 이시다 미쓰나리의 오미 出身이 主軸이 된 徐君과 싸웠다는 것이 一般的이다. 또, 히데요시 生前 尿道逃奴를 寵愛해 고다이인이 이를 嫉妬하여 이에야스를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다이인이 세키가하라 戰鬪를 전후하여 査察 고다이지 (高台寺)을 지을 때 이를 支援했다.

한便《미쓰나리와 그 一族》을 쓴 著者 시라카와 校 [14] 는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의 政府인 高多이인과 親密해, 오히려 히데요里의 親母 尿道逃奴의 政治介入과 그들 側近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는 通說과는 全面 配置되는 이야기이다. 이 論據는 미쓰나리의 3女 다쓰히메가 高多이인의 養女로 받아들여져 쓰가루 老父히라 (津?信枚)와 結婚했으며, 高多이인의 側近 高조스 는 미쓰나리의 姻戚이며 徐君을 위해 오쓰 誠意 開城敎習을 한 것과 尿道逃奴 周邊 人物에는 미쓰나리의 徐君에 關聯된 者가 없다는 것 等을 擧論하고 있다. 또, 陰曆 7月 18日 히데요시의 忌祭日에 擧行된 미쓰나리의 勝戰祈願行事에 高多이인의 側近인 히가시逃奴 를 代理로 보낸 일이 神類인 本슌(神龍院梵舜)이 쓴〈범순일기〉에 나와있다. 아울러 히가시逃奴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母親이다. 單, 고다이인은 以前까지 히데요시의 忌祭日에는 한番도 그르지 않고, 直接 도요쿠니 神社 에 와 參拜했었다.

家門의 文章 [ 編輯 ]

對日臺灣大吉의 文章

이시다 家門의 文章에는 對日臺灣大吉 (大一大萬大吉)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데, '한사람이 모두를 위해 모두가 한사람을 위해 努力한다면 天下는 幸福해진다'라는 뜻이다. 西洋의 '日人은 萬人을 위하여, 萬人은 日人을 위하여(One For All and All For One)'와 비슷한 말이다. 하지만, 미쓰나리만 이 文章을 使用한 것이 아니라 가마쿠라 時代 武裝으로 미나모토盧 요시나카 所屬의 이시다 다메히社 貧苦 의 야마우치스도 家門도 使用했다. 또, 이시다 家門의 文章에는 久要 文科 吉慶 門도 있다.

家計 [ 編輯 ]

  • 長男:이시다 시게이에(石田重家)
  • 次男:이시다 시게나리(石田重成)

關聯 作品 [ 編輯 ]

映畫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日本
韓國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이시다 다카유키(石田多加幸) (1992年). 〈忠節무비를 따른 股肱의 臣下 이시다 미쓰나리(忠節無比に仕えた股肱の臣石田三成)〉. 《歷史群像 시리즈 - 戶長 히데요시軍團(?史群像シリ?ズ 豪?秀吉軍?)》. 학습연구사(?習?究社).  
  • 나카이 슌이치(中井俊一?) (2000年). 〈히데쓰구?가모 로닌을 呼吸, 미쓰나리 苦心의 家臣團構成(秀次?蒲生牢人を吸?、三成苦心の家臣?構成)〉. 《歷史群像 시리즈 - 【센고쿠】 셀렉션 - 決戰 세키가하라(?史群像シリ?ズ【??】セレクション 決? ?ヶ原)》. 학습연구사(?習?究社).  
  • 歌詞와 가즈히코(笠谷和比古) (고단샤 學習文庫(講談社?術文庫) 2008年) [[[고단샤]] 센쇼메치에(講談社選書メチエ) 1994年]. 《세키가하라 戰鬪(?ケ原合?)》.  
  • 이마이 린타로(今井林太郞) (요시카와 古墳칸(吉川弘文館) 2009年) [[[요시카와古墳칸]](吉川弘文館) 1961年].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光)》.  
  • 臨津戰亂社刊行委員會 (韓國自治新聞社 1994年) [[[韓國自治新聞社]] 19734年]. 《臨津戰亂社(任辰戰亂史) 中卷》.  

各州 [ 編輯 ]

  1. 日本의 傳統 禮服
  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기직전까지 아들 히데요里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五大路 制度를 만들었는데, 어린 아들 히데요里를 다섯 名의 대로 가 補佐하여 合意制度를 두게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5名의 大路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 마에다 都市이에, 모리 데루모토 , 우키타 히데이에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가 包含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死後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 가 뒤이었다.
  3. 五峯行의 한 名이었던, 마사이에가 아이즈 征伐 을 가는 이에야스를 미나쿠치오카야마 姓 에서 待接하도록 하고, 社콘이 城內에 潛入하여 暗殺한다는 作戰이지만, 社콘이 提案했는지에 對해서는 異說이 있다.
  4. 우에다 性
  5. 第2次 우에다 星 戰鬪
  6. 前後 眞바노(陣馬野) 或은 쇼機바라는 通稱이 붙어 도쿠가와 時代에 神聖한 場所로 保護되었다.
  7. 하지만 이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部長인 마쓰盧 시게모토 (松野重元)가 "防牌 속의 背信은 있을 수 없다"면서 오타니 요시쓰구에 對한 攻擊을 一切 하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8. 外交, 高官의 戶籍管理 等에 關한 일을 다루었으며, 當時 미쓰나리의 官職名
  9. 今井林太郞(이마이 린타로), 酒木?美子(社카키 스미코) (2009年 10月 1日). 《石田三成(이시다 미쓰나리)》. 吉川弘文館(요시카와古墳칸). 151쪽. ISBN   978-4-642-05142-2 .   以上의 原文은 다음과 같다.“?じて其元には諸人へ?し彼?申ての時宜作法共に、殊の外へいわい(=柄橫)に候とて、諸大名を初め末?の者?も、日頃惡敷沙汰仕る由也。《중략》今度の大儀も毛利輝元?宇喜多秀家?人を上に立て、其下に附て事を取り計はれ候如く心得不?被?申候ては、事行間敷候。其には其元の儀、智慮才?の段に於ては?ぶ人も無?之如く有?之候得共、勇?の一つは不足有?之歟の?に被?存候”
  10.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降伏을 받기 위해서 이미 다른 男子에게 시집간 女同生 아사히히메 를 强制로 離婚 시킨 뒤 이에야스에게 아내로 바쳤으며, 甚至於 自身을 낳은 生母인 오만도코로 를 이에야스에게 人質로 보냈다. 이에야스를 手下로 넣기 위해서 친 어머니와 女同生을 이에야스에게 바친 것이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이렇게까지 큰 人物로 待遇한 것은 다 理由가 있는 것인데 미츠나리는 이 事實을 알고도 히데요시가 왜 이렇게까지 이에야스를 優待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11. 甚至於 오다 노부나가 生前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다 더 級이 높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 同盟이며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와 同一한 다이묘 였을 當時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家臣에 不過했다.
  12. 甚至於 不滅의 李舜臣 에서는 이를 매우 날카롭게 描寫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키자카 야스하루 를 誘惑하는 場面이 나온다.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 側에서 背信할 사람들을 다 골라 놓은 狀態였다.
  13. 出身이 誤와리라는 說도 있다
  14. NHK의《그때 歷史가 움직였다》에서 高多이인의 立場을 中立的으로 描寫하자 시라카와 敎는 NHK 프로그램으로 反論과 疑問點에 對한 質疑書를 보내기도 했다. 白川亨氏公開質問? Archived 2001年 10月 30日 - 웨이백 머신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