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다다카쓰
(
日本語
:
本多忠勝
,
덴分
17年
陰曆 2月 8日
(
1548年
3月 17日
) ~
게이初
15年
陰曆 10月 18日
(
1610年
12月 3日
))는
센고쿠 時代
부터
에도 時代
前期에 걸친
武裝
·
다이묘
이다.
도쿠가와氏
의 家臣.
가즈사
誤타키番
과
二世
舊瓦나番
各各의 招待 번주.
혼다 家門 다다카쓰派
宗家 時調(初代).
本性
(本姓)은
후지와라 우지
(藤原氏).
후지와라노 街네미치
의 後孫이다. 戰場의 虎狼이로 불리기도 하였다.
도쿠가와 四天王
·
도쿠가와 十六신장
·
도쿠가와 三傑
로 손꼽히며, 主君
이에야스
를 도와 功臣으로서 現在에도 顯彰(?彰)되고 있다.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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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氏의 領地
미카와
의 特産品인 사슴뿔로 만든 투구를 쓰고 戰鬪에 臨하였는데, 여러 番의 戰鬪를 거쳐 그의 投球는 象徵이 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敵軍의 卒兵들을 怯에 질리게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는 多다카쓰의 勇猛함에 感歎해하며
三國志
의
裝備
에 比喩하기도 했다.
美카他家하라 戰鬪
의 前哨戰인 히吐코토자카 戰鬪에서 혼다 多다카쓰의 勇猛함을 본 다케다側의 武裝인 고스機 社콘(小杉左近)李 「家康に過ぎたるものは二つあり、唐のかしらに本多平八(이에야스에게 過分한 것이 두가지가 있으니, 唐나라 투구와 혼다 헤이하치이니라)」라는 巧카(狂歌)의 落書를 통해 그의 용맹스러움을 稱讚하였다
[1]
.
혼다 多다카쓰는 戰國時代의 다이묘 中 한 名인,
다케다 신겐
(武田信玄)을 相對로
美카他家하라 戰鬪
에서 눈부신 活躍을 했으며 窮地에 몰린 自身의 主君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求하기도 했다.
武裝으로는 圖章인
센高 무라마사
가 만들고
이家國
의 핫토리 氏族이 가지고 있던,
돈보기리
(
??切
)라는 이름의
窓
을 즐겨 썼는데,
잠자리
가 내려앉았다가 그대로 半으로 잘리는 일에서 由來가 되었다. 오데기네(
御手杵
), 니혼고(
日本?
)와 함께 天下三名唱(
天下三名槍
)이라 불린다. 現在
오카자키性
에 톤보기리의 複製品이 保管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壬辰倭亂
을 일으킬 때 多다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部下였기 때문에 이에야스와 같이 壬辰倭亂에는 不參했다.
武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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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보기리(??切)
- 앞에서도 잠깐 나왔지만 이 窓은 多다카쓰의 愛唱(愛槍)으로써 잠자리가 暫時 쉬려고 앉았을 때 앉은 瞬間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져서 붙은 이름이다. 칼날의 길이만 43.8cm로써 總 길이는 約 6m로 傳해진다. 當時 장창의 平均 길이가 4.8m인 것을 봤을 때 매우 긴 槍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 사슴뿔 投球
- 말 그대로 사슴의 뿔을 투구에 裝飾한 것으로써 만들 때 검은 옻漆을 하였다고 한다. 톤보기리와 함께 다다카쓰를 象徵하는 投球로 알려져 있다.
- 黨勢鉤足
- 검은 실로 만들어진 甲옷으로써 多다카쓰는 運動性을 重視해 언제나 이 甲옷만을 입었다고 한다. 當時 武士들의 甲옷이 大部分 20kg을 前後 한 것을 勘案하면 매우 가벼운 甲옷이었다고 傳해진다. 또한 運動性度 重視했지만 自身이 죽인 敵들을 哀悼하기 위한 念珠를 어깨에 메기 爲해서 警長을 選擇했다 한다.
- 三國黑(三國黑)
- 온몸이 검은 名馬로서 쇼군
히데타다
가 潛邸時節에 다다카쓰에 하사하였지만 세키가하라 戰鬪에서 시마즈 君의 銃擊에 목숨을 다하였다.
舞踊
[
編輯
]
- 多다카쓰가 平生 동안 싸운 戰鬪는 總 57番 이었지만 몸의 어떤 곳에도 긁힌 傷處 하나 없었다고 한다.
- 오다 노부나가는 多다카쓰의 舞踊을 보고
1582年
다케다 征伐이 끝나고 나서 巨星이었던
아즈齒性
으로 돌아가기 前 '꽃과 열매를 兼備한 勇士(花?兼備の勇士)'라고 極讚 하였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日本 第一, 古今 獨步의 無事(日本第一、古今??の勇士)'라고 極讚하였으며 東쪽에는
혼다 헤이하치로
(本多平八?), 西쪽에는
다치바나 無네시게
(立花宗茂)가 있노라. 라는 말도 하였다.
各州
[
編輯
]
- ↑
흔히 다케다신겐이 美카他家하라 戰鬪에서 읊은 句節이라고 알려진 境遇가 많으나 이는 잘못된 內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