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童話처럼 떠나간 植民地 아이들의 산타 小波 方定煥|新東亞

童話처럼 떠나간 植民地 아이들의 산타 小波 方定煥

“검은 馬車가 날 태우러 왔네, 가방을 주게”

  • 김영식 隨筆家, 飜譯家 japanliter@naver.com

    入力 2008-05-07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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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小波 方定煥(小波 方定煥·1899~1931)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들었다는 事實 또한 누구나 記憶한다. 그러나 너무 有名한 나머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逸話가 더 많다. 열매를 맺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어린이에게 꿈과 希望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靑少年의 달 5月, 망우리公園을 찾아 暗鬱한 時代를 希望과 익살로 살다간 그의 삶을 만나보자.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망우리 公園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小波 方定煥의 무덤.

    망우리公園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무덤을 꼽으라면 斷然 小波 方定煥의 妙일 것이다. 自然石(쑥돌)으로 에워싸인 그의 무덤 上席에는 琉璃箱子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調和 하나가 들어 있다. 언젠가는 床石 위에 어린이가 얹어놓은 銅錢 몇 닢과 초코파이가 놓여 있었다. 또 어느 時代에는 또 어느 어린이가 自身이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얹어놓을 터. 床石 위의 碑石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선여深冬(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墓地歡情房파소’

    그리고 碑石 뒷面에는 ‘이들舞童’이라 새겨져 있다. 都大體 무슨 말일까. 墓를 처음 찾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열이면 열 모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선 금세 알아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이 비는 서울 홍제동 火葬터에 奉安돼 있던 遺骨을 소파 他界 5周年인 1936年 망우리로 移葬하면서 세운 碑石으로, 글씨는 當代의 名筆이며 獨立運動家인 葦滄 吳世昌 先生이 썼다. 胃脹은 孫秉熙 先生의 參謀 格으로 3·1運動 33人 中 한 사람이고, 소파는 孫秉熙의 셋째사위였다. 吳世昌의 墓道 이곳 망우리에 있다.

    소파의 아들 방운용이 서른 살쯤 됐을 때(1948)의 일이다. 秋夕 前後에 父親의 墓所를 찾아간 運用은 墓 앞에 洋裝 女人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參拜하는 것을 目擊했다. 女人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옆에 서 있는 運用을 보더니 “遺族이신가요?”라고 짧게 묻곤 휑하니 사라졌다.

    얼마 後 運用이 소파의 오랜 親舊 柳光烈(言論人·1906~1981)을 만나 女人의 人相着衣를 說明했더니 그 女人은 神峻厲(新줄리아)라고 했다(‘사랑의 膳物’, 이상금, 2005). 그는 소파가 1920年 봄 김일엽, 백인덕이 企劃한 雜誌 ‘신여자’의 編輯顧問으로 委囑돼 일을 도와주면서 暫時 交際한 女人이다. 新줄리아도 이 雜誌의 企劃者 中 한 사람. 그는 소파의 글에서 ‘S’라는 이니셜로 나타난다. 다음은 ‘開闢’ 4號(1920.9.25)에 나온 ‘추창수筆(秋窓隨筆)’의 一部分이다.



    “밤 10時 20分, 燈불을 가까이하고 獨步(拘泥기타 돗抛)의 病床錄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獨步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戀愛가 있다’라고 한 그 句節 끝에 왜 이런 句節이 없는가 한다. ‘戀愛가 있는 곳에 반드시 失戀이 同居한다’고. 아아, 人情의 無常함을 只今 새로 느끼는 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失戀의 哀歌가 나오지 아니할까… 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萬有가 잠든 夜半에 窓 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구나….”

    소파의 戀人 ‘줄리아’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소파의 무덤(뒤쪽 갓머리 쓴 碑石). 아래는 최신복 家族의 무덤. 맨 아래 단비가 있는 무덤이 최신복의 墓다.

    소파 22歲, 줄리아 23歲로 둘 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靑春이었지만 소파는 이미 孫秉熙의 3女와 結婚하고 아들까지 둔 處地. 불꽃같이 짧았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結局 소파의 도쿄 儒學과 줄리아의 美國 留學으로 追憶의 한 場面이 돼버렸다. 줄리아는 後에 美國 보스턴代에서 碩士學位를 받았고, 그곳에서 만난 류형기(監理敎會의 指導者)와 1927年 結婚해 歸國했으나 社會 活動은 거의 하지 않아 그 이름이 生疏하다. 戰爭 中이던 1951年 渡美해 그곳에서 生을 마쳤다.

    兒童文學家 李元壽는 後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韓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昇華됐다고 證言했는데, 그 때문인지 짧은 人生을 살다 간 소파의 活動은 多方面으로 눈부시게 展開됐다. 너무나 有名해 그 이름을 모르는 韓國人이 없을 程度인 소파. 그래서일까? 그에 對한 사람들의 知識은 大部分 短見과 皮相에 그친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그리고 兒童文學家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동아일보 1923年 5月25日子(1000號)에 실린 ‘어린이 千사람’ 合成寫眞.

    줄리아와의 ‘러브스토리’만 해도 그렇다. 줄리아에게 소파는 兒童文學家이기 前에 出版人이자 言論人이었다. 소파는 空前의 베스트셀러 雜誌인 ‘어린이’ 外에도 ‘學生’ ‘新女性’ ‘彗星’ ‘開闢’ ‘別乾坤’ 等에 直間接的으로 깊이 關與했다. 金一葉과 新峻厲 等이 ‘신여자’를 企劃하면서 소파를 編輯顧問으로 委囑한 것도 出版人, 言論人으로서 그의 能力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碑石에 쓰인 그의 一生과 業績을 簡略하게 살펴보자. 무덤 오른쪽 碑石 앞面에는 그의 履歷이 짤막하게 整理돼 있다.

    어린이의 眞正한 동무

    ‘年報. 1899年 11月9日 서울 당주동에서 出生, 1908年 ‘少年立地回’ 組織, 1917年 孫秉熙 先生의 셋째 따님 龍華 女史와 結婚, 1918年 보성전문학교 入學, 1919年 3·1運動 때 日警에 被檢, 1920年 3月 日本 東洋大學 哲學科에 入學, 1920年 8月25日 ‘어린이’라는 말을 個僻地에 처음 씀, 1921年 ‘天道敎 少年會’ 組織, 1922年 5月1日 ‘어린이의 날’을 勃起 宣布, 1922年 6月 飜案童話集 ‘사랑의 膳物’ 刊行, 1923年 3月20日 개벽사에서 兒童雜誌 ‘어린이’ 創刊, 1923年 5月1日 ‘어린이날’ 擴大 制定. ‘色동會’ 創立, 1928年 10月2日 ‘世界兒童藝術展覽會’ 開催, 1931年 7月23日 心身의 過勞로 大學病院에서 別世, 1936年 7月23日 遺骨이 이곳 망우리墓地에 묻힘, 1940年 5月1日 ‘小波全集’ 刊行, 1971年 7月23日 南山에 銅像이 建立됨, 1974年 4月20日 ‘小波 方定煥 文學全集’ 刊行, 1978年 10月20日 金冠文化勳章을 받음, 1980年 8月14日 建國褒章을 받음’

    碑石 뒷面에는 後代의 兒童文學家가 소파의 삶을 反芻하면서 쓴 글이 있다.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어린이’ 雜誌 童謠 公募에 入選한 兒童文學家들의 當時 寫眞. 왼쪽 위부터 時計方向으로 서덕출, 윤석중, 李元壽, 최순애.

    “사람이 오래 살기를 어찌 바라지 않을까마는, 오래 살아도 이 民族 이 겨레에 욕된 이름이 적지 않았거늘 不過 서른셋을 살고도 이 나라 이 歷史 위에 燦然한 발자취를 남긴 이가 있으니 그가 小波 方定煥 先生이다. 나라의 主權이 盜賊의 발굽 아래 짓밟혀 江山이 痛哭과 恨歎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先生은 나라의 將來는 오직 이 나라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라 깨닫고 從來 ‘애들’ ‘애놈’ 等으로 불리면서 從屬倫理의 틀에 갇힌 呼稱을 ‘어린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여 그들에게 人格을 附與하고 尊待말 쓰기를 부르짖었으니 이 어찌 예사로운 외침이었다 하겠는가. 先生은 率先하여 어린이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밤을 지새워 ‘사랑의 膳物’이란 읽을거리를 膳物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날’을 擴大 정착시키며 어린이를 위한 團體인 ‘色동會’를 組織하였으니 이는 半萬年 歷史에 일찍이 없던 일이요 封建의 迷夢 속에 헤매던 겨레에 바치는 불꽃같은 그의 사랑의 表現이었다. 그리하여 나라 잃은 이 나라 어린이에게 우리말 우리글 우리얼이 담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어 잃어버린 國權을 되찾는 일에 晝夜를 가리지 않았으니 그를 彈壓하려는 日帝의 채찍은 先生으로 하여금 警察署와 刑務所를 舍廊房 드나들 듯하게 하였다. 오직 기울어가는 나라의 將來를 來日의 主人公인 어린이에게 바람을 걸고 오늘보다 來日에 사는 어린이를 위한 兒童文化의 開化와 兒童文學의 씨뿌리기에 身命을 바쳐 이바지했으니 實로 廳舍에 길이 빛날 功績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애닯다. 그처럼 눈부신 活躍이 끝내는 健康을 크게 해쳐 마침내 젊은 나이로 忽然히 이승을 下直하면서 다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付託한다’는 한마디를 남기셨으니 뉘라서 이 精誠이 애틋한 所望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여기 조촐한 돌을 세워 民族의 스승이요 어린이의 어버이이신 그의 뜻을 이 겨레의 來日을 위해 千古의 歷史 위에 새겨두고자 하는 것이다. 1983年 어린이날 沙溪 이재철 짓고 月定 정주상 쓰다.”

    이 碑石은 1983年 韓國 最初의 ‘本格的’ 兒童雜誌 ‘어린이’ 創刊(1923) 60돌을 맞아 兒童文學人과 出版人, 뜻있는 어른들의 誠金으로 세워진 것이다. 碑文을 쓴 이재철(단국대 名譽敎授)은 詩人이자 兒童文學家로 ‘兒童文學槪論’ ‘現代兒童文學史’ 等을 著述하고 ‘小波全集’을 編纂했으며 世界兒童文學大會(1997)를 開催했다. 그는 韓國兒童文學學會長과 兒童文學評論사 主幹을 맡아 方定煥文學賞을 施賞(올해는 18回째)하는 等 우리나라 兒童文學의 理論的 定立과 發展에 큰 貢獻을 한 人物이다. 글씨를 쓴 정주상은 兒童文學家이자 書藝 敎科書를 執筆한 著名한 書藝家다.

    碑石에 쓰인 年譜를 읽던 筆者는 그의 年代記에서 흥미로운 事實 하나를 發見했다. ‘1928年 世界兒童藝術展覽會 開催’와 關聯해서다. 소파 무덤 近處에는 韓國 畫壇의 巨頭 이인성(1912~1950)李 묻혀 있는데, 그가 바로 이 展覽會 出身이다. 李仁星의 碑石 뒷面 年譜에는 16歲 때 이 展覽會에 ‘村落의 風景’을 出品해 特選에 入賞했다고 새겨져 있다. 이는 展覽會 側이 ‘東亞日報’ 1928年 10月12日子에 發表한 受賞者 名單에서도 確認된다.

    소파가 남긴 ‘사랑의 膳物’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東亞日報(1928.10.12)에 실린 世界兒童美術展覽會 特選作品 發表 廣告. 原案은 個人化 部門 特選을 차지한 이인성(當時 16歲).

    이인성 評傳에 따르면 동양 最初로 열린 世界兒童藝術展覽會는 大邱의 李仁星이 畫家의 길을 걷게 된 決定的 動機를 提供했다고 한다. 後에 李仁星은 조선국展(鮮展) 및 日本국展(帝展)에도 入賞해 韓國 畫壇의 鬼才로 浮上했으니 소파와 同僚들이 3年 동안 準備한 世界兒童藝術展覽會가 없었다면 어린이 李仁星의 人生航路는 180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소파가 벌인 또 하나의 큰 이벤트는 雜誌 ‘어린이’를 通한 童謠 運動이다. 當時 어린이가 接할 수 있는 노래는 學校에서 배우는 日本 노래와 어른들이 부르는 民謠밖에 없었다. 1970~80年代까지 初等學生이 學校에서 배운 動搖의 大部分은 雜誌 ‘어린이’를 통해 誕生했다. ‘오빠생각’은 11歲의 최순애가, ‘故鄕의 봄’은 15歲의 李元壽가 應募해 뽑힌 것이다. 설날(‘까치까치’…尹克榮), 半달(尹克榮), 고드름(유지영), 따오기(한정동), 오뚜기(윤석중), 봄便紙(서덕출) 等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世上에 나와 只今껏 愛唱되고 있으며, 作詞家들 또한 大部分 有名한 作家로 成長했다.

    詩人 朴木月은 17歲 때인 1933年 ‘어린이’에 童謠 ‘桶딱딱 桶짝짝’李 入選된 바 있고, 강소천度 같은 해 18歲 나이로 ‘蔚엄마젖’李 入選했다. 다리가 不便한 遲滯障礙者였던 서덕출은 ‘어린이’로 登壇해 31歲로 夭折하기까지 많은 活動을 했는데, 요즘 出身地 蔚山에서는 그를 기리는 事業이 旺盛하다. 鶴聲公園에 노래碑가 세워졌으며, 서덕출 創作童謠祭와 서덕출文學賞이 每年 열린다. ‘世界兒童藝術展覽會’가 畫家 李仁星을, ‘어린이’가 서덕출과 李元壽를 輩出했듯, 소파는 暗鬱한 時代를 사는 可憐한 어린이들에게 꿈과 希望을 膳賜했다.

    소파는 어린이들을 위한 읽을거리를 싸게 提供하기 爲해 1922年 飜案童話集 ‘사랑의 膳物’을 펴냈다. 비록 飜案이기는 하지만 이 冊은 80年이 지난 只今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어린이’에 실린 ‘사랑의 膳物’ 廣告가 눈에 띈다. 가을에는 “落葉이 우는 가을 밤, 외로운 燈盞 밑에 마음이 쓸쓸할 때” 이 冊을 읽으라 하고, 한겨울에는 눈 오는 窓밖을 바라보는 少女의 그림과 함께 “눈이 옵니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퍼억 퍽 저녁때까지 쏟아집니다. 쓸쓸한 저녁 혼자 안에서 어린 가슴이 울고 싶을 때 ‘사랑의 膳物’을 읽으십시오”라며 讀者의 感性을 刺戟한다.

    勿論 發刊 3年째에 10萬名 以上의 讀者를 모은 雜誌에 실린 廣告이니만큼 그 弘報效果가 대단했음을 斟酌할 수 있다. 하지만 當時 나온 다른 冊들은 사라지고 없는 反面, 이 冊만이 只今까지 읽힌다는 事實은 廣告 外의 本質的 價値가 있음을 말해준다. ‘어린이’ 等에 실린 이야기나 童謠는 슬픈 內容이 많아 너무 感傷的이라는 批判도 받았다. 그러나 當時는 어른도 苦生이 많았지만, 植民地에 태어난 어린이의 現實과 將來는 더욱 暗鬱했다. 소파가 傳한 슬픔은 그 時代 어린이의 共感帶를 타고 讀書와 藝術로 昇華했다. 그것이 소파가 어린이에게 주고자 한 最善의 膳物이자 活動 目標였다. 그中의 하나인 ‘사랑의 膳物’은 그 題目부터가 象徵的이다.

    소파는 뛰어난 童話口演家로도 有名했다. 童話口演을 할 때마다 가득 찬 聽衆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으며, 甚至於 監視하러 온 立會 巡査도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한다. ‘別乾坤’(1930.10.11)에 다음과 같은 逸話가 실려 있다.

    日本 巡査도 울린 童話口演

    “내가 맨처음(10年 前) 京城에서 童話口演이란 것을 할 때 天道敎黨에서 ‘難破船’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날 온終日 울고 앉아 있는 少年을 두 사람 본 일이 있었지만은, 今年 봄에 李花女子普通學校에 끌려가서 全校學生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發音 Cendrillon)李’ 이야기를 할 때 옆에 앉아 계신 男女 先生님이 가끔 얼굴을 돌이키고 눈물을 씻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學生들은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 緋緞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것을 그냥 씻지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산드룡이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맞는 句節에 이르자 그 많은 女學生이 그만 두 손으로 수그러지는 얼굴을 받들고 마치 喪家집 谷城같이 큰소리로 응- 응- 소리치면서 一時에 울기 始作하였다. 옆에 있는 先生님들도 일어나 號令을 할 수 없고, 나인들 울려는 놓았지만 울지 말라고 할 재주는 없고 한동안 壇上에 먹먹히 서 있기가 거북한 것은 고사하고 敎員들 뵙기에 憫惘해서 곤란하였다.”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어린이’ 1929年 5月號‘ 表紙. 소파가 지은 ‘어린이날 노래’ 樂譜가 表紙寫眞으로 실려 있다.

    위에 든 活動 外에 後世의 學者들은 소파를 兒童敎育 思想家로도 높이 評價한다. 비록 그의 兒童敎育哲學이 理論으로 集大成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西洋으로부터 존 듀이의 敎育論이 導入되기 以前 時代에 이미 소파는 兒童 中心의 敎育哲學을 定立하고 그것을 實踐에 옮긴 사람이다. 소파의 어린이 運動은 將來 朝鮮 獨立의 役軍이 될 人材를 키우고자 하는 데 目的이 있었다. 소파는 旣成世代의 分裂相에 對한 挫折感을 新世代에 對한 期待로 轉換했다. 어린이 雜誌는 檢閱에 걸려 頻繁히 記事가 削除됐고 그때마다 소파는 警察署를 밥 먹듯 들락거려야 했다. 日警이 作成한 ‘倭政人物 1卷’(國史編纂委員會)에는 소파에 關해 이렇게 적고 있다.

    ‘經歷 및 活動 : 高 손병희 孫女 宂話의 男便으로서 恒常 天道敎의 重要 任務를 專擔함. 1920年 東京에서 天道敎 支部를 設立하여 손병희 事後 異例的으로 그 相續人이 된 者임. 人物評 外貌 : 키 5隻 2寸. 둥근 얼굴型에 까만 皮膚. 肥滿임. 排日思想을 가지고 있고 不溫한 行動을 할 憂慮가 있음’

    日警이 作成한 文書에는 소파의 婦人을 ‘孫秉熙의 孫女’라고 表記하고 있으나 이는 事實이 아니다. 소파의 夫人은 孫秉熙의 孫女가 아니라 셋째딸이 맞다. 日警이 文書를 잘못 作成했는지, 이를 옮겨 적은 國史編纂委員會가 오기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日帝는 소파의 排日嫌疑를 잡기 위해 갖은 陰謀를 꾸몄는데 番番이 失敗했다. 日帝 强占期 드라마에 단골로 出演해 우리에게 이름이 낯익은 鍾路警察署 美와(三輪) 警部는 어린이날 行事의 不穩性을 밝혀내기 위해 소파를 자주 불러 取調했지만 소파는 그때마다 능청맞은 말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한다. 1967年 ‘신동아’ 5月號에 실린 미와 警部의 말에는 소파의 非凡함이 묻어난다.

    “방정환이라는 놈, 凶測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日本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京釜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爲人은 아냐… 日本社會라면 든든히 한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윤극영)

    산타클로스 代身 소파를…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어린이’를 통해 發表된 한정동의 童謠 ‘ 따오기’. 尹克榮이 曲을 썼다.

    소파는 全國을 도는 講演, 여러 雜誌의 刊行, 執筆, 行事 企劃 等으로 바쁘게 일하다 結局 過勞로 쓰러졌다. 高血壓에 依한 腎臟炎이라는 診斷이었다. 病院에 入院해서도 看護師들에게 童話를 들려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지냈지만 當時 醫學은 끝내 그를 救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어린이들을 잘 付託한다”라는 말과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馬車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馬夫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는 말을 남기고 마치 童話 속 한 場面처럼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筆者는 소파의 죽음에 關한 逸話를 接하고 이런 생각을 해봤다. 해마다 年末이면 온 거리에 내걸리는 산타클로스 代身 뚱뚱보 소파를 어린이의 親舊로 등장시키면 어떨까. 어린이날이나 聖誕節 밤에 뚱뚱보 소파가 검정 馬車를 타고 사랑의 膳物을 가지고 온다는 콘셉트로 文化運動을 벌이면 어떨까. 그와 더불어 소파를 다룬 名作 애니메이션이나 뮤지컬을 만들면 그 또한 大舶이 나지 않을까.

    그렇지만 安重根 義士 記念館을 새로 짓는다고 募金運動을 벌이고 있는 것과는 딴판으로 獨立運動家, 文學家, 社會·文化運動家, 童話口演가, 言論人, 出版人, 敎育者(京城·中央保育學校 出講), 兒童敎育 思想家로서 多方面으로 粉骨碎身한 소파를 기리는 記念館은 세우자는 사람조차 없다. 爲人의 記念館은 主로 어린 學生들이 많이 찾는데, 정작 永遠한 ‘어린이의 동무’인 소파의 記念館은 어디에도 없다. 소파는 우리에게 正말 이것밖에 되지 않는 人物이었나.

    ‘어린이’ 10周年 回顧에서 최신복(筆名 최영주·1906~1945)은 소파를 그리며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무척 가슴을 괴롭게까지 하며 생각키우는 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탄생시킨 産婆였고 길러준 어머니였고 또 ‘어린이’ 大將이던 小波 方定煥 先生의 생각입니다. 한 몸의 괴로움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뜨거운 熱誠과 끈氣를 가지고 盤石처럼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의 成長에 힘을 써주시었습니다.”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小波 方定煥과 그가 만든 개벽사 建物(危), 아래는 왼쪽부터 윤석중, 최신복, 이정호.

    그 최신복의 무덤이 소파 墓地 바로 아래에 있다. 碑石의 앞面에는 그가 지은 童謠 ‘호드기’가 새겨져 있다.

    ‘-호드기- 누구가 부는지 꺽지를 말아요 / 마디가 구슬픈 호드기오니 / 호드기 소리를 들을 적마다 / 내 엄마 생각에 더 섧습니다. -최신복 作-’

    뒷面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京畿道 水原에서 태어나신 先生은 火星少年會를 組織하여 少年運動에 힘쓰시고, 小波 方定煥 先生을 도와 ‘어린이’ ‘學生’ ‘소년’ 等의 雜誌 編輯에 從事하는 한便, 어린이를 위한 많은 글을 쓰시어 兒童文學에 寄與하시었다.’

    최신복은 배재학교를 거쳐 日本 留學에서 돌아와 水原에서 火星少年會를 이끌면서 소파와 因緣을 맺었다. 소파 事後 ‘어린이’에 실린 최신복의 追慕 글은 소파가 花成素年會의 招請으로 내려와 講演할 때 立會 巡査가 소파의 講演에 感動해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소파를 ‘先生’으로 모시게 된 逸話를 傳한다.

    ‘東亞日報’ 水原支局 記者로 일하던 최신복은 소파의 부름을 받고 1929年 개벽사에 들어갔다. 망우리公園에 소파의 무덤을 만들어준 이도 최신복이다. 무덤도 없이 홍제동 納骨堂에 남아 있던 소파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윤석중, 馬海松 等과 함께 망우리公園에 소파의 무덤을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募金運動을 벌인 끝에 소파의 墓를 망우리에 造成했다.

    최신복 3臺가 소파 곁에 묻힌 事緣

    최신복은 소파 10周忌 때인 1940年 박문서館에서 마해송과 함께 ‘小波全集’을 刊行하는 等의 記念事業과 소파의 維持를 잇는 일로 분주하게 보내다 1945年 38歲의 젊은 나이에 過勞로 幽明을 달리했다. 그의 遺言은 “尊敬하는 先輩 소파의 밑에 묻어달라”는 것. 소파에 對한 그의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최신복은 自身의 父親(그 또한 소파 崇拜者였다)이 1939年 他界하자 소파를 더 자주 찾아보고 싶다며 水原의 先山을 놔두고 父親의 墓所를 소파 아래쪽에 모셨고, 1942年에는 母親을 다시 그 옆에 모셨다. 또 自身의 갓난아이가 죽었을 때도 그 옆에 묻었다고 하며, 최신복의 否認도 後에 최신복 墓에 合葬됐다. 그리고 ‘오빠생각’의 作詞者 최순애는 최신복의 女同生으로, 後에 ‘故鄕의 봄’의 作詞가 李元壽와 結婚했으니 온 家族이 代代로 소파와 맺은 因緣이 깊고 크다.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김영식

    1962年 釜山 出生

    中央大 日文科 卒業

    韓國미쓰비시상사 勤務

    現 支援商社 代表

    2002年 系間 리토피아 新人賞(수필), 2003年 文藝振興院 選定 優秀文學사이트(日本文學趣味)

    曆書 : 기러기(모리 오가이, 리토피아)라쇼몽(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출판사)


    筆者가 지난 2月號 ‘신동아’에 쓴 ‘島山 安昌浩와 太虛 유상규’篇에서, 倒産이 臨終 때 平安道의 先山에 묻지 말고 子息처럼 사랑한 유상규 옆에 묻히기를 遺言으로 남긴 事緣을 紹介한 바 있는데, 여기 方定煥의 墓所에는 尊敬하는 先輩 소파를 따라간 後輩 최신복과 그의 家族 3代의 事緣이 있다. 社會에 나와 利害打算으로 交際하다 저마다 自身의 무덤을 홀로 찾아가는 요즈음, 尊敬하는 이와 죽어서까지 함께하고자 한 최신복의 事緣은 後代에 示唆하는 바가 크다.

    5月은 어린이를, 어버이와 先生님을, 나아가 世上 모든 사람과의 사랑을 다시 한 番 생각해보는 달이다. 소파의 무덤을 찾아 소파가 우리에게 준 ‘사랑의 膳物’을 되새기면서 최신복의 家族史를 통해 소파의 사람됨과 그들의 崇高한 人間關係를 돌아보기를 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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