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狀 (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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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狀 (袁尙, ? ~ 207年 )은 後漢 말의 群雄 元素 의 아들로 는 현보(顯甫)이며 醴酒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 이다. 元素의 寵愛를 받아 後繼者로 指目되지만, 元素가 죽은 後 四寸兄 원담 (原像의 異服兄이나 元素의 兄의 아들로 入籍되어 나감)과의 紛爭으로 內戰에 휘말려 河北 一帶를 曹操 에게 넘겨주는 結果를 招來했다.

內紛 [ 編輯 ]

後繼者 繼承 [ 編輯 ]

原象은 元素의 셋째 아들(或은 막내아들)로 庶子라고 記錄되어 있어 원담과는 異腹兄弟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原象은 兄들에 비해 크게 나이가 어렸지만 元素를 닮은 風貌가 있었고 또한 容貌가 아름다운 美少年이었다. 元素의 後妻 劉氏(劉氏)는 原狀을 甚하게 偏愛했다. 原象은 사람됨이 大膽하고 强靭한 性品이었다고 하며, 分明히 얼마間의 誇張이 있었겠지만 深杯 (審配)의 評價에 依하면 孝心이 極盡하고 鎭重한 性格으로 生活은 儉素하고 일을 行함에 있어서는 機敏하며 事物의 理致에 널리 通達해 있으고 書體가 뛰어나 이미 幼年期 무렵부터 神童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元素와 마찬가지로 점잖고 溫和한 外樣 뒤에 多少 모질고 冷嚴한 面貌가 있었던 것 같다.

元素 또한 平素 原像의 才能과 容貌를 아끼며 寵愛하고 있었으나 年齡 等의 問題 때문에 後繼에 擧論하는 데에는 아직 생각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當時 元素의 寵愛를 받고 있었던 兪氏는 袁紹에게 原狀을 거듭 稱讚하는 말을 하며 원소를 부추겼으므로 마침내 元素는 原狀이 長成하면 後繼者로 세울 뜻을 품었다. 이에 元素는 원담을 죽은 兄의 養子로 入籍시켜 自身의 戶籍에서 廢黜시켰고 淸州의 自社로 내보내 權力에서 疏外시켰는데, 이는 長子인 원담을 後繼 構圖에서 일찌감치 除去함으로써 어린 原像의 承繼에 最大 障礙物을 除去하려는 意圖였다.(195,6년 무렵) 貯水 (沮授)는 이에 對해 袁紹에게 간했으나 袁紹는 듣지 않았고 둘째아들 원희 (袁熙)와 조카 固諫 (高幹)도 各各 유주刺史와 甁注目으로 삼아 보냈다.

202年 5月 官道(官渡)에서의 敗北로 생긴 病을 이기지 못하고 元素가 죽었다. 元素는 後嗣를 定함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는데, 많은 무리들은 원담의 나이가 많다고 하여 원담을 擁立하려고 했고, 원담度 이에 呼應하여 軍士를 이끌고 (?)으로 向했다. 하지만 元素가 生前에 원담을 廢黜시켜 後繼에서 排除시켰던 點과 事實上 原狀을 後繼者로 公認한 것과 다름없던 點을 생각한다면 '元素가 後嗣를 定하는 것에 이르지 못하고 죽었다'는 記錄은 多少 의문스러운 部分인데, 當時 原像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經歷이 事實上 全無했던 데다가, 元素 亦是 原狀에게 權力을 承繼할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急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실제로 元素는 遺言조차 남기지 못했다.) 한便 平素 원담과 사이가 나빴던 深杯와 봉기 (逢紀)는 또한 柳氏와 가까웠는데, 이들은 원談이 政權을 잡으면 해를 當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원談이 到着하기 前에 元素의 有名(遺命)을 稱託하며 寄主를 掌握하고 원상을 擁立하여 原狀이 元素의 地位를 물려받게 하였다. 淸州에서 뒤늦게 到着한 원담은 이에 스스로 거기將軍(車騎將軍)이라 稱하고 軍士를 여양에 駐屯시키며 示威했다. 이로써 分裂이 始作되었다.

원담과의 紛爭 [ 編輯 ]

202年 9月 曹操가 北上해 餘羊의 원담을 攻擊해 오자 마침내 원담은 原像의 正統性을 承認하며 原狀과 和解했고, 原象은 원담을 도와 直接 軍隊를 이끌고 曹操와 맞섰다. 또한 原象은 曹操의 背後 襲擊을 試圖하여 馬등 (馬騰)을 비롯한 官署의 여러 諸將들과 聯合하고 匈奴 鮮于 濠洲천을 움직여 河東(河東)을 攻擊하게 했으며, 部下 將帥 곽원 (郭援)을 보내 官署를 攻掠하게 했다. 곽원은 지나는 性마다 모두 陷落시켜 關西 一帶를 진동시키며 대단한 威勢를 떨쳤으나, 鍾繇 (鐘繇) 等의 活躍으로 마等이 背信하여 曹操軍에게 돌아서자 結局 마等이 派遣한 마초 (馬超), 방덕 (龐德) 等과 合流한 曹操軍에게 敗하여 戰死하는 바람에 바람에 最終的으로 關西 攻略은 失敗로 돌아갔다. 한便 原象은 여양 郊外에서 曹操와 約 半年에 걸친 大田을 벌였다. 戰況은 一進一退를 거듭했으나 203年 3月, 曹操軍의 總攻勢에 마침내 敗하여 女養成에서 籠城하게 된다. 원담과 原象은 曹操가 包圍網을 形成하자 이를 沮止하려고 하나 失敗했으며, 結局 밤中에 包圍를 뚫고 業으로 歸還했다. 曹操는 繼續 軍隊를 進軍시켰으나 原象은 오히려 反擊을 加害 曹操를 擊破했다. 結局 曹操는 虛度로 退却하게 된다.

이때 원담은 敗走하는 曹操軍을 追擊해 急襲하면 그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進言했으나 原象은 이를 믿을 수 없었으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曹操가 退却한 以後에도 繼續 業에 남아있던 원담軍에 對한 武器와 兵力의 補充을 中斷하며 淸州로 돌아갈 것을 慫慂했는데, 後繼에 如前히 未練을 가지고 있던 以後 원담은 이런 一連의 措置들에 激怒했다. 이에 더해 곽도 (郭圖), 申平 (辛評) 等의 부추김이 이어지자 마침내 원담은 軍士를 이끌고 原狀을 襲擊하기에 이르나 오히려 크게 敗하여 南피(南皮)로 逃亡간다. 이미 正統性과 勢力에서 크게 밀리고 있던 원담은 原狀과 和解하자는 淸州 內部의 反對 輿論까지 默認하고 戰爭遂行을 위해 百姓들을 擄掠질하며 盜賊떼와 異民族 無理까지 끌어들여 無理하게 內戰을 進行시켰으나. 또다시 原狀에게 慘敗하게 되는데, 이때 원담君의 흐르는 피와 쌓인 屍體는 헤아리는 것이 不可能할 程度였다고 한다. 한便 遊標 (劉表)는 원담과 原狀에게 各其 便紙를 보내 骨肉相爭을 말렸으나 원담과 原狀 모두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原象은 원담의 根據地인 平原(平原)까지 包圍하여 원담을 窮地에 몰아넣었으나 多急해진 원談이 曹操에게 降伏하고 曹操도 이를 받아들여 여양으로 北上해 오자 結局 軍事를 물려 曹操와 代置해야 했다.(203년 겨울)

204年 1月, 曹操는 一旦 黃河를 건너 撤收했다. 深杯와 原象은 원담에게 和解를 要請했으나 원담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原象은 深杯에게 業을 지키게 하며 直接 軍士를 이끌고 원담을 攻擊했는데 曹操는 原像의 不在를 틈타 再次 寄主를 攻擊했고, 마침내 業을 包圍해 審배를 窮地에 몰아넣었다. 204年 7月, 深杯의 危急함을 傳해들은 原象은 그를 救援하기 위해 基主로 遑急히 歸還했고 안팎에서 挾攻하여 曹操를 물리치려 했으나 도리어 크게 敗했으며, 部長들의 背信까지 겹쳐 거느린 軍士의 大部分을 잃고 短期로 逃亡쳤다. 原象은 中産(中山)으로 가서 勢力을 收拾했으나, 倂奏의 苦懇은 原狀에게 形勢가 不利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原狀을 배신해 獨立하고 칼을 돌렸으며, 再次 원담과 曹操의 攻擊까지 받았으므로 그 勢力이 完全히 潰滅되었고 原象은 하는 수 없이 幼主의 원희에게로 避身했다.(204년 8月 무렵) 한便 深杯는 曹操에게 城을 빼앗긴 後 處刑되었다.

거듭된 亡命과 再起 試圖 [ 編輯 ]

205年 1月, 원희의 部下將帥 超觸 (焦?)과 長男 (張南)李 원희를 배반하고 襲擊해 株를 掌握한다. 이에 原象은 再次 袁紹에게 友好的이었던 烏桓族 의 王 答돈 (?頓)에게로 달아나게 된다. 본디 曹操 陣營에서는 完全히 勢力을 잃어 한낱 亡命者에 不過한 原狀을 더以上 念慮할 必要가 없다는 視角이 支配的이었으나 原象은 答돈의 援助를 받으며 再起할 機會를 노렸고, 機會가 생길 때마다 曹操에 對한 叛亂을 使嗾하며 烏桓族을 이끌고 柳州 一帶를 攻擊해 被害를 입히는 等 曹操의 골칫거리가 된다. 이로 인해 結局 幼主는 擊破되어 數十萬의 百姓들이 烏桓으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曹操가 任命한 自社와 太守들은 次例로 殺害되기에 이른다. 元素가 죽고 그 勢力이 崩壞된 以後, 當時 曹操와 唯一하게 雌雄을 決할만한 勢力은 형주의 遊標뿐이었으나, 거듭된 被害에 곽가 (郭嘉) 等은 原狀을 유표 以上의 危險 人物로 評價, 이를 坐視하다가는 早晩間 幼主는 勿論 寄主와 淸州까지 原狀이 되찾을 危險性이 높음을 遊說하게 된다.

207年 마침내 曹操는 곽가 (郭嘉)의 進言을 받아들여 元氏의 再起를 뿌리뽑기 위해 烏桓을 攻擊했으며, 原象은 烏桓族과 함께 曹操에게 맞섰다. 當時 曹操軍은 武宗(無終)을 통해 烏桓을 攻擊하고 있었으나 큰 길은 비로 因해 끊겼던 데다, 여러 샛길들은 原狀과 答돈이 先占하여 徹底히 지키고 있었으므로 苦戰하고 있었다. 하지만 平素 烏桓에게 怨恨을 품고 있었으며, 獨自的인 勢力을 이끌면서 오랫동안 在野의 名士로 지냈던 全州는 曹操가 烏桓을 攻擊한다는 消息을 듣고는 무리를 모아 曹操에게 合流했는데 그는 2百年 동안 利用이 끊겨 있었던 고로를 案內하며 進軍할 것을 勸했고, 이를 받아들인 曹操는 作戰을 바꿔 撤收하는 것으로 僞裝한 뒤 盧龍(盧龍)方面의 길을 통해 烏桓의 本據地를 向해 暫行한다.

原狀과 答돈은 盧龍을 通한 샛길의 存在를 全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曹操軍이 사라지자 몇次例의 斥候 끝에 實際로 曹操가 撤收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總司令部人 儒城(柳城)에서 不過 2百里 支店에서 曹操의 大軍이 捕捉되자 驚愕한다. 遑急히 軍士를 끌어모아 曹操와 맞섰으나 마침 答돈은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偶然히 曹操와 마주쳐 交戰하다가 죽는다. 全혀 생각지도 못한 襲擊을 받은 데다 指導者까지 虛無하게 잃어버린 烏桓族은 完全히 瓦解되기에 이른다. 原象은 起兵 數千 氣를 이끌고 烏桓의 指導部를 糾合해 搖動의 軍閥 公孫康 (公孫康)에게로 달아났다. 한番 싸움에 烏桓族을 徹底히 붕괴시켜버린 豫想外의 結果에 刺戟받은 曹操 陣營에서는 餘勢를 몰아 搖動까지 進軍하자는 意見도 있었으나, 曹操는 여러 가지 無理數를 안고 始作한 烏桓 遠征이 成功으로 끝난 것은 事實上 徹底히 幸運이 따른 結果로 여겼고 또한 公孫康이 原狀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看破하고 있었으므로 搖動으로 도망간 原狀 兄弟를 더以上 追擊하지 않고 軍士를 물렸다. [1]

죽음 [ 編輯 ]

본디 搖動의 공손氏 政權은 寒微한 家門이었으나 强壓的이고 殘酷한 統治로 强力한 君主權을 形成했으며, 中原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中央政府에 不服하면서 王과 다름없는 威勢를 누리고 있었다. 原象은 이를 믿고 공손氏에게 亡命을 要請했으나, 遼東地域의 割據에 中心을 두고 있었으며 苛酷한 統治로 內部의 不滿要素가 많던 공손氏에게는 曹操가 굳이 搖動으로 侵攻해 오지 않는 以上, 오히려 元素의 後光을 입고 있던 原狀이 더욱 두려운 相對였다. 이런 狀況이었으므로 危險을 感知한 原狀 亦是 公孫康을 만나러 가는 첫 會見 자리에서 選手를 쳐서 直接 公孫康 等을 죽인 뒤 搖動을 占據하고 再起해 중원으로 進出할 計劃을 세웠으나, 때마침 公孫康度 그 자리에서 原狀을 죽일 計劃을 세워 많은 伏兵을 配置시켜두고 있었다. 結局 原狀 兄弟는 殺害되었고, 목은 曹操에게 보내져 業의 著者에 내걸렸다. 이때 原像의 머리 앞에서 哭을 하는 者는 斬首한다는 曹操의 嚴命이 있었으나 全州 (田疇)와 犬初 (牽招) 等은 죽음을 무릅쓰고 原像의 祭祀를 지냈다.

元氏 兄弟의 죽음에 關한 記錄 [ 編輯 ]

  • 後漢書 :《後漢書(後漢書)》에 依하면 原狀이 公孫康을 만날 때 원희는 문득 두려워하며 疑心을 품고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大膽한 性格이었던 原象은 이를 剛하게 制止했으므로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고 한다.
  • 三國志 :《三國志》緯書 6卷 元素前의 主席 《戰略(典略)》에 依하면 原狀 兄弟는 公孫康의 軍士들에게 사로잡혀 묶인 後 얼어붙은 땅에서 審問을 받았는데 이때 날씨가 무척 추웠다. 原象은 앉을 자리를 要求했으나 이를 들은 원희는 ‘머리가 萬里길을 가게 되었는데, 자리를 求해 무엇하겠느냐!’고 했고, 뒤이어 公孫康에게 죽임을 當한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 後漢書 :《後漢書(後漢書)》 原狀 兄弟가 捕縛되어 얼어붙은 땅에서 審問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비슷하다. 하지만 原象은 '죽지 않는 동안의 추위를 참을 수 없으니, 앉아있을 자리나 마련해줌이 옳소.'라고 말한 것으로 나오며 戰略에 비해 比較的 描寫가 詳細한데, 이에 依하면 原狀이 자리를 求한 것은 自身의 죽음을 모른 것이 아니라 公孫康을 向한 이죽거림이나 或은 虛勢에 가깝다. '警의 머리가 萬里길을 가게 되었는데 자리를 求해 무엇에 쓰려는가!'는 말 亦是 이 비아냥에 對한 公孫康의 和答이다.
  • 三國志演義 》에선 原狀이 붙잡히기 前에 먼저 자리를 要求하고 이에 公孫康이 ‘警의 머리가 萬 里 길을 헤멜 것인데 자리를 求해 무엇하겠는가!’라고 꾸짖은 뒤 伏兵을 불러들여 原狀을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어 情況이 完全히 다르다.

《三國志演義》에서의 原狀 [ 編輯 ]

劉氏와는 親子關係로 設定되어 있으며, 元素가 生前에 원담을 廢黜시키고 後繼者로 指目한 事件은 言及되지 않는다. 官道 戰鬪 에서 曹操의 勝利가 거의 굳혀졌을 무렵, 曹操가 거짓으로 業을 攻擊하려 한다는 所聞을 퍼뜨리자 元素의 命에 따라 業을 救援하러 가는 것으로 처음 登場한다. 元素가 다시 창정(倉亭)에서 曹操와 싸울 때는 使喚 (史渙)을 日記吐露 죽이는 等 活躍하지만, 曹操가 女孃을 侵攻했을 때는 病床에 누워있던 元素 代身 總大將을 맡고도 自身의 舞踊에 陶醉되어 兄들의 援軍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싸우다가 匠料에게 慘敗하여 憤怒한 元素가 피를 吐하고 죽게 만든다.(물론 이는 演義의 創作으로 애初에 曹操는 元素 生前에 河北을 공략한 적이 없다.) 以後에도 深杯 等과 짜고 元素의 幽明을 造作해 後繼者가 되는 等 원담에 못지않은 不肖子息으로 描寫된다.

後날 曹操에게 쫓겨 搖動 으로 달아났을 때 公孫康과 만난 後 앉을 자리를 要求하는 內容이 먼저 나오며 그 後 軍士들에게 殺害되는 것으로 나온다.

섬긴 사람들 [ 編輯 ]

家計 [ 編輯 ]

關聯 人物 [ 編輯 ]

原器  원담  袁枚  圓峯  怨聲  元素  怨讐
原案  院外  圓窯  原油  元尹  원평  원희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