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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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預 (杜預, 222年 ~ 285年 )는 中國 三國時代 위나라 의 政治家로, 者는 圓蓋 (元凱)이며 京兆尹 두릉縣(杜陵縣) 사람이다. 傳한 御史大夫 두年年 의 11世孫 [1] 이며, 御史中丞 頭緖 의 아들이다. 四魔의 의 딸이자 司馬所 의 女同生인 高六公主(高陸公主)와 結婚해 駙馬 가 되었다. 以後 西進 의 將軍이 되어 동오 를 征伐하고 中國 再統一에 寄與했다. 《春秋》의 文章을 《左傳》과 묶고 註釋을 단 《春秋左傳集解》를 著述했고, 이에서 오늘날의 《春秋左氏傳》 形式이 만들어졌다.

生涯 前半期 [ 編輯 ]

杜預의 아버지 두서는 四魔의 와 政治的으로 對立 關係에 있었기 때문에 罪千되어 裝誣軍(章武郡)에 있다가 世上을 떠났다. 위나라는 私馬氏 一家에게 掌握되어 있었기 때문에 杜預는 官職을 얻지 못하다가 司馬所 의 女同生과 結婚한 뒤에야 비로소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진수 (陳壽)가 쓴 《 三國志 》 魏書(魏書) 두서전(杜恕傳)에는 257年 에 河東(河東) 사람 樂想(樂詳)李 두기의 功績을 기리는 글을 위나라 調整에 올린 일을 契機삼아 두例를 豐樂정후(豊樂亭侯)에 봉한 것으로만 記錄하고 있다.

司馬所 가 大軍을 일으켜 蜀나라 를 攻擊하여 끝내 멸망시켰는데, 이때 杜預는 진서장軍部(鎭西將軍府)의 장사(長史)였다. 當時 위나라의 眞書將軍은 宗會 (鍾會)였는데, 宗會 는 杜預의 同僚인 진서장軍部 軍事(軍司) 尉官 (衛瓘)과 더불어 司馬所 에게 等愛 (鄧艾)가 叛亂을 일으키려 한다고 謀陷하여 264年 等愛 富者가 죽게 만들었다. 杜預가 周邊 사람들에게 尉官 의 이같은 行爲를 批判하자, 尉官 은 杜預에게 直接 와서 謝過하였다.

秦나라 를 세운 司馬炎 (司馬炎)은 268年 하남윤(河南尹) 자리에 있던 杜預에게 官吏들에게 適用할 怵惕考課法(黜陟考課法)을 만들라고 하였으나, 杜預가 이에 反對하는 글을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施行되지 않았다.

270年 선비족 의 毒발繡機能(禿髮樹機能)李 好熱 (胡烈)을 戰士시키고 威勢를 떨쳤다. 當時 晋州(秦州)自社였던 杜預는 岸曙將軍(安西將軍)을 代行하던 石龕(石鑒)에게 선비족을 攻擊하라는 命令을 받았으나 現地의 軍士들이 窮乏하기 때문에 봄까지 기다렸다가 討伐하겠다고 하였다. 石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調整에 杜預가 軍士를 이끌 能力이 不足하다고 했기 때문에 轞車에 갇힌 채 불려와서 財物로 罪값을 치르는 罰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石鹼이 선비족 討伐에 失敗함으로써 杜預의 意見이 옳았다는 것이 立證되었다. 以後 度支相서(度支尙書)에 任命되었다.

274年 秦나라의 죽은 皇后 梁氏를 葬事지내고 朝廷에서 喪服을 벗자 蓁艽(陳逵)가 太子 私馬衝 (司馬衷)은 3年동안 喪服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杜預는 마음속으로 例를 갖추는 것으로 充分하며 굳이 喪服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主張했다. 結局 杜預의 意見이 받아들여졌으나, 司馬光 (司馬光)은 그의 著書 《 資治通鑑 (資治通鑑)》에서 杜預의 意見은 苦戰을 巧妙하게 引用했을 뿐 蓁艽의 意見만 못하다고 批判하였다.

278年 中國 北部 地域이 洪水와 메뚜기로 因한 被害를 입었는데, 杜預의 解決策을 實行하자 百姓들에게 有益하게 되었다. 杜預는 博學多識했으며 7年間 度支尙書의 자리에 있으면서 處理한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기에 同時代 사람들은 갖가지 武器가 갖추어진 武器倉庫에 比喩하여 두無故 (杜武庫)라고 불렀다.

吳나라 征伐 [ 編輯 ]

276年 10月 正南將軍(征南將軍) 良好 (羊祜)가 吳나라 를 征伐하자는 上疏文을 올렸다. 그러나 杜預와 長靴 (張華)를 除外한 大部分의 臣下들은 오나라 征伐에 懷疑的이었다.

杜預는 용맹스러움과는 距離가 멀었지만 軍士를 統率하는 데에는 뛰어났다. 278年 良好 가 죽으면서 두例를 自身의 後任으로 薦擧하였기에 振男將軍(鎭南將軍) 兼 都督型主題軍事(都督荊州諸軍事)가 되었다. 杜預는 林地인 襄陽으로 내려가 吳나라 西陵毒(西陵督) 章程(張政)을 攻擊하여 大勝을 거두었다.

279年 익주自社 왕준 (王濬)李 吳나라를 치자 하고, 두例도 글을 올려 司馬炎 의 決斷을 促求하였다. 280年 마침내 司馬炎 이 大軍을 일으켜 吳나라를 치게 했는데, 杜預는 江陵(江陵)을 攻擊하게 되었다. 杜預가 江陵을 陷落시키고 吳나라의 江陵毒(江陵督) 五軟 (伍延)을 죽였다. 以後 형주 南部 地域으로 내려가면서 吳君과 싸워 乘勝長驅하니, 아직 陷落되지 않았던 吳나라 郡縣들이 降伏해 왔다.

형주를 平定한 後 어떤 사람이 <봄이 오면 江물이 불어나 오래 머물기 어려우니 겨울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攻擊하자>고 하였다. 杜預는 當時의 狀況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아 몇 마디만 쪼개면 全部 쪼개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建業 (建業)을 向해 進擊하게 했다. 여기서 有名한 四字成語 破竹之勢 (破竹之勢)가 생겨났다. 또 익주에서부터 吳君을 擊破하고 徐陵(西陵)에 到着한 왕준 에게 便紙를 보내 建業을 占領하라고 하였다.

征伐軍을 보냈음에도 不拘하고 秦나라 朝廷에서는 가충 (賈充) 等이 오나라 征伐이 成功하기 어려우니 軍士를 물려야 한다고 主張했다. 이것을 안 杜預 亦是 征伐을 繼續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면서 뜻을 꺾지 않았다. 마침내 왕준 이 建業을 占領하고 孫皓 (孫皓)를 붙잡아 洛陽 으로 보내니 吳나라는 滅亡하고 秦나라가 全 中國을 차지하게 되었다.

司馬炎 은 오나라 征伐 論功行賞 때 두例를 當陽縣侯(當陽縣侯)로 冊封하였다. 杜預는 天下가 統一되었음에도 不拘하고 麾下 軍士들의 訓鍊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형주에서 運河를 波高 灌漑를 통해 農事에 必要한 물을 끌어들였다. 285年 에 死亡했다.

杜預와 春秋左氏傳 [ 編輯 ]

杜預는 《 春秋左氏傳 》을 무척 좋아하여 左前壁 (左傳癖)으로 불렸는데, 春秋左氏傳의 가장 오래된 註釋書인 《春秋左傳集解》(春秋左傳集解)를 著述하였다. 韓國에서는 高麗 時代의 文人 林椿 (林椿)李 自身의 文學作品 《 麴醇傳 》에서, 술을 擬人化한 主人公 국순(麴醇)李 임금에게서 무슨 버릇이 있느냐는 물음을 받자 自身의 돈에 執着하는 버릇을 杜預가 左氏傳에 心醉하는 버릇에 비하면서 對答하는 것으로 表現하였다. 그의 左氏傳에 對한 다른 著書로는 《춘추석례》(春秋釋例), 《春秋張力》(春秋長歷)等이 있다.

家計 [ 編輯 ]

關聯 人物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王은(王隱), 《陳書》(晉書) [ 유의경 (劉義慶), 《 世說新語 》 방정(方正)에 主席으로 引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