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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일레븐! 그 안에 ‘이을용’ 있다”|신동아

“헝그리 일레븐! 그 안에 ‘이을용’ 있다”

靑春FC 이을용 監督

  • 이영미 | 스포츠 專門記者 riveroflym22@naver.com

    入力 2015-09-23 11: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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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忠北 堤川 ‘서울會館’의 ‘下流 人生’
    • “‘未生’ 選手들 ‘完生’으로 키워낼 터”
    • “하루하루 배우는 삶, 幸福해”
    • “프로 進出? 서너 名 눈에 띈다”
    “헝그리 일레븐! 그 안에 ‘이을용’ 있다”
    蹴球選手 이을용(40)은 華麗함과는 距離가 멀었다. 안정환, 황선홍, 김남일 等 내로라하는 스타플레이어 사이에서 默默히 自己 任務에 忠實했다. 主演보다는 助演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周邊에서 選手들의 골을 돕는 어시스트 任務에 滿足했다. 代表팀이나 所屬팀에서 한 拍子 빠르게 隱退한 後 또 다른 人生에 挑戰한 이을용. 그런 그가 요즘 淸州大 蹴球部 코치, KBS ‘靑春FC헝그리일레븐’ 監督으로 猛活躍 中이다.

    ‘靑春FC헝그리일레븐’(以下 靑春FC)은 한때 蹴球 有望株였으나 갖가지 事情으로 꿈을 접고 蹴球를 그만둔 이들의 敗者復活戰을 다룬 프로그램. 靑春FC는 청주대에서 選手들과 함께 合宿하고 있다. 처음엔 서울이나 京畿道에 宿所를 마련할 豫定이었는데, 淸州大와 靑春FC를 오가는 이을용의 事情을 考慮해 靑春FC가 아예 淸州大로 宿所와 訓鍊場을 옮겼다.

    午前에는 淸州大 選手들을, 午後에는 靑春FC 選手들의 訓鍊을 챙기며 눈코 뜰 새 없는 時間을 보내는 이을용은 放送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人生에 挑戰하는 靑春FC 選手들을 위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더 熱心히 選手들을 指導한다.

    ‘眞摯한 이을용’

    그는 日程이 빡빡하다면서 睡眠 不足을 呼訴했다. 그런 그를 9月 7日 청주대를 찾아가 만났다. 淸州大 캠퍼스를 함께 걸었는데, 그는 이미 學校의 有名 人士였다. 學生들이 그를 알아보고 달려와 사인 要請을 했다. 記者가 “人氣가 장난이 아니네요”라고 하자 “只今은 (案)정환이가 없어서 그래요. 정환이랑 같이 가면 애들이 난 쳐다보지도 않아요”라며 낄낄 웃었다.



    ▼ 얼굴 살이 쏙 빠졌네요. 먼저 放送 얘기부터 할게요. 이을용 監督이 放送에 出演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藝能과 다큐멘터리를 오가는 프로그램에서 始終 眞摯한 모습을 보이는 게 印象的이었어요. 왜 그렇게 熱心히 하는 거예요.

    “靑春FC 選手들을 처음 봤을 때 어린 時節 이을용이 그 안에 섞여 있더라고요. 家庭 形便이 어려워 蹴球를 그만둔 選手, 父母님 돌아가시고 동생들 키우느라 蹴球를 할 수 없었던 選手, 負傷으로 일찍 隱退한 選手 等 事緣도 各樣各色이었습니다. (案)정환이가 처음에 이 프로그램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躊躇 없이 ‘오케이’한 데는 率直히 奉仕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막상 選手들과 몸을 부대끼며 訓鍊하면서 느낀 것은 제가 그들을 위해 奉仕하는 게 아니라는 事實이었습니다. 오히려 選手들을 통해 제가 배우고, 깨닫고 있어요. 오랫동안 選手들과 同苦同樂하면서 程度 많이 들었고요. 放送을 통해 選手들의 안타까운 事緣이 알려졌습니다. 어려운 環境을 克服하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視聽者들도 共感하는 部分이 많은 것 같아요.”

    ▼ 國家代表 選手生活을 같이 한 李雲在(42), 안정환(39) 氏와 함께 指導하는데, 두 사람도 選手들과 合宿하나요.

    “정환이나 運材 兄은 바쁘잖아요(웃음). 放送 外에 하는 일도 있고요. 靑春FC가 청주대에서 合宿하는 바람에 제가 할 일이 더 많아졌어요. 새벽 訓鍊부터 一一이 다 챙기다보니 정작 우리 學校 選手들이 서운해하더라고요. 그래도 조민국 監督님(청주대)이 많이 配慮해주셔서 別 頉 없이 두 집 살림을 잘 竝行합니다.”

    ▼ 다른 프로그램이라면 撮影할 때만 뭔가 演出해서 보여주면 될 텐데, 蹴球는 오랜 期間 選手를 만들고 다듬어 제대로 뛰게 해야 하니 카메라가 꺼진 뒤에도 끊임없이 챙겨야 하겠어요.

    “맞아요. 撮影할 때, 안 할 때를 區分하지 않아요. 그렇게 하는 게 제 스타일도 아니고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막 합니다(웃음). 奉仕하는 마음으로 始作했다고 했잖아요. 放送보다 더 重要한 건 ‘未生’의 選手들을 ‘完生’이 될 수 있도록 키우는 거예요. 撮影 與否는 全혀 考慮할 게 아니죠. 함께 苦生한 모든 選手가 이 프로그램이 끝난 뒤 ‘蹴球를 통해’ 돈을 벌고 安定된 生活을 하게 되면 좋겠어요. 이 選手들이 蹴球를 職業으로 삼고 뛰게 된다면 정환이나 運材 兄의 수고와 努力도 充分히 報償받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 벨기에, 프랑스로 轉地訓鍊도 다녀왔더군요.

    “訓鍊 集中力을 높이기 위해 必要했어요. 選手들뿐 아니라 指導者들도 ‘올인’하려면 韓國을 떠나야 했거든요. 靑春FC 選手들의 共通된 特徵은 基本技가 안 돼 있다는 點이에요. 그건 그들을 가르친 指導者의 問題가 아닙니다. 選手들이 어느 瞬間 스스로 成長을 멈춰버린 거니까요. 멈춰버린 어떤 것을 깨뜨리는 게 急先務였어요.

    벨기에에선 主로 體力訓鍊만 反復했습니다. 1年, 3年 以上 蹴球와 담을 쌓고 지낸 選手가 大部分이라 一旦 體力을 만들어놔야 戰術訓鍊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一週日쯤 强度 높은 體力訓鍊을 消化하고 나서 戰術訓鍊을 시키니까 選手들이 금세 따라오더라고요. 事實 指導者들에게 海外 轉地訓鍊은 韓國에서보다 더 힘들고 지치는 일이에요. 잠을 하루 서너 時間밖에 못 잤어요. 그걸 버텨내게 한 건 選手들의 熱情이었습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熱情이 그들에게서 넘쳐났거든요.”

    ▼ 프로 選手로서 可能性이 보이는 選手들이 있나요.

    “서너 名 程度 눈에 띕니다. 當場 프로에 直行하긴 힘들어도 K3리그나 챌린지리그 程度는 充分히 可能하다고 봐요. 只今은 可及的 演習競技를 많이 하려고 해요. 放送을 보고 여기저기서 連絡이 오더라고요. 이랜드FC나 챌린지리그 팀들이 演習게임 좀 하자고 電話를 해옵니다. 競技를 통해 우리 選手들의 可能性을 보여줘야 해요. 그래야 스카우트 擔當者들이 關心을 보이겠죠.”

    ‘媤어머니 안정환’

    ▼ 안정환 氏와는 役割을 어떻게 나눴나요.

    “정환이가 主로 媤어머니 役割을 맡고 있어요. 잔소리, 쓴소리를 專擔하죠. 저는 運動場에서 選手들을 이끌고요. 運材 兄이 없을 때는 정환이가 킥 練習도 시켜요. 서로 워낙 親해서 그런지 只今까지 정환이, 運材 型과 別 摩擦이 없었어요. 힘들 때는 燒酒 한盞 기울이며 서로 慰勞도 해주고요.”

    ▼ 靑春FC가 어떻게 마무리되기를 바랍니까.

    “아주 다양한 그림을 그려보고 있어요. 選手들을 챌린지리그 以上의 팀으로 보내는 것도 重要하지만, 아예 이 選手들을 한 팀으로 만들어 K3나 내셔널리그에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 다시 말해 靑春FC란 팀을 實際로 創團하는 거죠. 다만 經濟的인 部分이 重要하기에 深思熟考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選手들을 잘 가르치고, 정환이는 밖에서 돈을 모아오면 될 것 같은데(웃음)…. 이따금 想像해보는 그림이에요.”

    ▼ 아까 말한 것처럼 이을용 코치의 ‘靑春’도 만만치 않은 苦難의 連續이었잖아요.

    “江陵商高(現 江陵제일고)를 卒業하고 울산대 體育學科에 入學했는데, 蹴球팀 先輩랑 치고받고 싸우다 제 性質을 못 이겨서 짐을 싸들고 나온 거예요. 그러고는 忠北 堤川의 親舊 집으로 向했어요. 돈이나 벌겠다는 생각으로 ‘서울會館’이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일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웨이터 生活을 한 건 아니고요, 業所에서 이런저런 심부름하며 허드렛일을 도왔죠. 그러다 偶然히 그 業所를 訪問한 蹴球人이 저를 알아보고는 蔚山大 최만희 監督님에게 電話를 한 거예요. 어느 날 監督님이 서울會館에 딱 나타나셨더라고요. 無盡藏 혼난 뒤 다시 蔚山大로 끌려갔죠.”

    ▼ 붙들려가선 잘 버텼나요.

    “웬걸요. 얼마 안 있어 또 精神 못 차리고 팀을 뛰쳐나왔습니다. 8個月쯤 疾風怒濤의 時間을 보냈어요. 親舊랑 大邱로 내려가 가스 配管 줄을 만드는 工場에 就職한 적도 있고, 工事판에서 막勞動도 하며 돈을 벌었어요. 工事판 일이 收入이 꽤 괜찮았거든요. 하루 日當이 그때 돈으로 6萬 원이나 되고 그것도 現札로 바로 손에 쥐여줬으니까. 돈을 아끼려고 逆轉 化粧室에서 잠을 請하기도 했습니다.”

    이현창…監督이 아닌 아버지

    “헝그리 일레븐! 그 안에 ‘이을용’ 있다”

    이을용은 “未生 蹴球人들의 監督을 맡아 幸福하다”고 말했다.

    ▼ 彷徨은 언제, 어떻게 끝났나요.

    “그렇게 彷徨하고 있을 때 손을 잡아준 분이 當時 韓國鐵道 監督을 맡고 계시던 이현창 先生님입니다. 江陵商高 時節, 江陵으로 轉地訓鍊次 오셨다가 제가 뛰는 걸 關心 있게 지켜보셨다고 해요. 蔚山大에서 팀에 適應하지 못하고 彷徨하고 있다는 消息을 듣고 저를 찾아다니셨더라고요.

    結局 이 監督님 德分에 韓國鐵道에 入團해 實業팀 生活을 했습니다. 監督님은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차가운 宿所에서 혼자 生活하는 제가 안쓰러워 김치며 이불, 電氣壯版 같은 걸 챙겨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當時 한국철도에서 月給을 80萬 원 程度 받았는데, 그 돈을 제게 안 주시고 따로 管理하시다가 제가 常務로 갈 때 通帳에 넣어 건네주셨어요. 通帳에는 1000萬 원이 훨씬 넘는 巨額이 들어 있었어요. 그 通帳을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監督님이 아니라 아버지셨어요.”

    이을용은 韓國鐵道에 入團한 뒤 蹴球가 재미있어졌다고 한다. 蹴球하는 걸 즐기게 되면서 도망가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그러나 나이트클럽에서 일한 탓에 周邊의 誘惑이 끊이질 않았다. 特히 ‘組織世界’에선 이을용에게 繼續 ‘러브콜’을 보냈다. 蹴球에 빠진 이을용은 그들의 손짓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萬若 이현창 監督이 이을용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只今의 이을용은 없었을 것이다. 그 自身의 말마따나 “先生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繼續 ‘下流人生’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 이현창 監督과는 只今까지 因緣을 맺고 있다면서요.

    “죽을 때까지 모셔야 할 恩師님이에요. 最近까지 K3리그 利川市民蹴球團 監督을 하셨는데, 올해 그만두신다고 하더군요. 제가 釜山에서 카파 풋살팀을 運營하고 있거든요. 그곳에서 總監督을 맡아주실 것을 付託드렸습니다. 用돈벌이밖에 안 되지만 이젠 年歲가 있어 예전처럼은 活動하기 어려우시거든요. 그래도 가만히 계시면 답답해하실 것 같아 釜山으로 모시려고요(웃음).”

    ▼ 한국철도에서 뛰다가 1998年 富川 SK에 入團했어요. 한때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던 사람으로선 엄청난 反轉이네요.

    “韓國鐵道 들어가서 뛰다가 이듬해 軍에 入隊했어요. 同期들이 大學을 卒業할 때 除隊했고요. 그때 정환이가 釜山 大宇로얄즈, 저는 富川SK에 入團했습니다. ‘이番이 마지막’이라는 覺悟로 蹴球를 했던 것 같아요. 새벽 訓鍊을 거르지 않고 每日 나갔습니다. 프로가 됐으니 돈도 벌어야 하고, 어려운 집안을 經濟的으로 도와야 하는 負擔도 있었죠. 率直히 제가 프로에 갈 거라곤 自信할 수 없었어요. 나라는 選手를 果然 어느 팀에서 뽑아줄까 싶었죠. 그래도 運 좋게 2順位로 富川SK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이을용은 데뷔 첫해 33競技에 出場해 3得點을 올렸다. 國家代表 데뷔戰은 1999年 3月 브라질과의 親善競技였다. 以後 꾸준히 代表팀에서 活躍하며 2002年 韓日월드컵 代表 選手로 뽑혔고, 폴란드戰에서 나온 황선홍의 왼발 발리骨, 美國戰의 안정환 헤딩골을 어시스트했다. 3, 4位戰으로 치른 터키戰에선 프리킥골을 터뜨리며 蹴球팬에게 짜릿한 戰慄을 안겼다. 이을용은 2004年 아시안컵을 거쳐 2006 獨逸 월드컵을 마치고 代表팀 隱退를 宣言했다.

    ▼ ‘월드컵’ 하면 어떤 記憶이 떠오르나요. 월드컵에서 ‘最高의 瞬間’은 언제였는지도 궁금하네요.

    “代表팀 生活을 11年 했는데, 가장 기억나는 瞬間이라면 아무래도 2002年 월드컵이겠죠. 그때 히딩크 監督님도 스타였고, 代表팀 選手들도 죄다 스타플레이어였잖아요. 只今도 美國戰 때 페널티킥 失蹴은 큰 아쉬움으로 남아요. 그래서 辱도 많이 얻어먹었지만(웃음)…. 代表팀 選手들도 韓國이 월드컵 4强까지 오르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어요. 競技를 치를수록 體力이 枯渴됐는데, 異常하게 신바람이 나더라고요. 率直히 韓國이 홈어드밴티지를 본 部分도 있었잖아요.”

    ▼ 히딩크 監督에 對한 追憶도 많겠네요.

    “그럼요. 蹴球 人生에서 決코 잊을 수 없는 분이죠. 귀네슈 監督을 비롯한 名匠들은 비슷한 面이 있더라고요. 選手들을 心理的으로 安定시키고, 選手들이 가진 能力을 120% 뽑아내는 能力이 있어요. 히딩크 監督님은 選手를 보는 눈이 卓越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남일, 박지성, 이천수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誕生했잖아요. 지성이는 選手들 사이에서 ‘빠꾸’로 불렸는데…. 理由요? 몰라요. 그냥 ‘빠꾸’라고 부르면 지성이가 쳐다봤으니까(웃음).”

    히딩크의 ‘러브콜’ 拒絶

    “헝그리 일레븐! 그 안에 ‘이을용’ 있다”
    ▼ 2002年 월드컵 以後 히딩크 監督이 에인트호번으로 오라고 提議한 적 있다면서요.

    “맞아요. (李)令票나 (朴)지성이가 가기 前에 제가 가장 먼저 러브콜을 받았어요. 그런데 테스트를 받고 入團하라는 말에 테스트 받고 가진 않겠다며 協商을 拒否했죠. 그 後 피스컵 때인가? 에인트호번을 이끌고 히딩크 監督님이 다시 訪韓했는데 그때 하얏트호텔로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두 番째 러브콜이었죠. 그때는 에이전트 會社에서 拒絶했어요. 그쪽에서 提示한 協商案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봐요. 後悔요? 에이, 그런 거 없어요. 令票와 지성이가 가서 잘했잖아요.”

    ▼ 2006年 獨逸 월드컵 以後 隱退를 發表했을 때 周圍에선 너무 이른 거 아니냐는 意見이 紛紛했어요. 代表팀에서도 ‘選手 이을용’을 必要로 했고.

    “適當한 타이밍에 決定을 잘했다고 생각해요. 代表팀에서 나온 以後 單 한 番도 제 選擇을 後悔하지 않았으니까요. 事實 當時 運材 兄도 있었고, 남일이, 정환이가 모두 남았기 때문에 제 隱退가 빠르다고 보는 視角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내가 다들 같이 隱退하자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同參하지 않더라고요(웃음). 結局 다른 親舊들은 2010年 남아공 월드컵 以後 自然스럽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죠. 제가 隱退를 서두른 가장 큰 理由는 代表팀에서 더 以上 제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獨逸 월드컵에서 제대로 活躍하지 못한 탓도 컸지만, 남이 아쉬워할 때 물러나는 게 옳다고 본 거죠.”

    2002年 월드컵을 끝내고 이을용은 터키 트라브존스포르로 移籍했다. 터키에서 成功的인 活動을 이어간 그는 2006年 獨逸 월드컵 直後 프리미어리그 進出을 눈앞에 뒀지만 월드컵에서의 不振으로 큰 機會가 사라지는 아픔을 맛봤다.

    ▼ 2006年 獨逸 월드컵은 悔恨이 많은 大會日 것 같아요. 本選에서 뛸 機會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利敵 問題와 關聯해선 속상했죠. 월드컵 前까지만 해도 사인만 하면 될 만큼 完璧한 狀態로 契約이 進行됐거든요. 旣往이면 월드컵 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그다음 契約해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英國 쪽 에이전트들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월드컵에서 좋은 모습을 못 보여준 까닭에 入團 條件이 큰 幅으로 修正됐어요. 移轉 條件과 甚하게 差異가 나니까 決定을 못하겠더라고요. 굳이 이런 條件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그곳으로 가야 하나 하는 苦悶 끝에 抛棄한 겁니다.”

    所願대로 故鄕 팀서 隱退

    ▼ 프리미어리그行이 決裂됐지만 다시 터키로 돌아갈 수 있었잖아요. 트라브존스포르에선 再契約을 願했던 것으로 아는데….

    “터키뿐만 아니라 다른 리그에서도 提案이 들어왔어요. 며칠 苦悶했는데 韓國으로 돌아가고 싶더라고요. 때마침 FC서울에서 저를 懇切히 願했어요. 에이전트까지 나서서 K리그 復歸를 挽留했지만 固執을 피웠습니다.”

    이을용은 2002年 7月 트라브존스포르에 入團했다가 1年 만에 FC서울로 復歸했고, 以後 또 1年 만에 다시 터키로 移籍했다가 2006年 獨逸 월드컵을 치렀다.

    ▼ 2009年 江原FC 創團 멤버로 參與했죠.

    “故鄕 팀이기 때문에 可能한 일이었어요. 選手 生活의 마지막을 故鄕 팀에서 뛰는 게 意味 있다고 생각했고요. 서른여섯의 나이에 所願대로 故鄕 팀에서 隱退式을 치렀습니다. 現役에서 隱退할 때도 代表팀에서 隱退할 때처럼 周圍의 灣流가 엄청났습니다. 제 생각은 하나였어요. 未練이 남았을 때 끝내자는 거였습니다. 體力이 남아 있을 때, 더 뛰고 싶은 欲心이 생길 때 접는 게 옳다고 判斷했습니다. 選手 生命을 1年 더 延長한다고 蹴球 人生이 얼마나 달라지겠어요. 選手 生活보다 그다음을 準備해야 할 때라고 본 거예요.”

    ▼ 隱退 後 指導者 硏修를 위해 유럽과 터키를 돌며 蹴球 工夫를 했다고 들었어요.

    “2011年 10月에 隱退했고, 이듬해 3月부터 獨逸 蹴球를 둘러봤어요. 獨逸에서 孫興慜·구자철, 英國에선 박지성 等 많은 後輩를 만났습니다. 京畿道 많이 봤고. 그 後 터키로 들어가 페네르바체에서 指導者 授業을 받았어요. 페네르바체를 이끄는 에르順 野날 監督(前 터키 國家代表팀 監督)과의 因緣이 그곳으로 저를 이끈 거죠. 길지 않은 時間이지만 큰 도움이 됐어요. 白手이면서 白手가 아닌 것처럼 生活했는데, 언제 또 그렇게 蹴球 競技만 보면서 유럽을 闊步할 수 있을까 싶어요.”

    터키에서 硏修를 마치고 돌아온 이을용은 江原FC 스카우터와 코치로 指導者 生活을 했다. 2年餘 동안 選手들을 가르치다 그만두고선 暫時 쉬는 時間을 갖기도 했다.

    청주대의 叛亂

    ▼ 프로 리그에만 있던 사람이 大學으로 눈을 돌린 背景이 궁금해요. 淸州大 코치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긴가민가했거든요. 그것도 監督이 아닌 코치로.

    “於此彼 指導者의 世界에 발을 들여 놓은 以上, 프로에만 머물기보다는 다양한 經驗을 하는 게 앞으로의 蹴球 人生에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前엔 내 것만 하기에 바빴어요. 周圍를 돌아볼 餘裕도 없었고요. 蹴球人들, 先輩 指導者들에 對해 알지도 못했고, 關心도 없었습니다. ‘프로’라는 울타리 안에서 便하게 生活했죠.

    只今은 大學팀 監督들, 高等學校 監督들과 交流하면서 情報도 주고받고, 아마추어 蹴球에 對해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淸州大에 오기 前까지만 해도 걱정이 많았어요. 그러나 只今은 淸州大로 온 것에 對해 自負心을 가질 程度입니다. 여기 안 왔으면 ‘往年의 스타 이을용’이란 타이틀에 執着하면서 그렇고 그렇게 살았을 거예요.”

    ▼ 조민국 監督이 이을용 코치에게 直接 電話했다면서요? 같이 일해보자고. 過去에 因緣이 있었나요.

    “全혀요. 監督님이 청주대를 맡고 나서 제게 連絡하셨을 때 저도 제 귀를 疑心했다니까(웃음). ‘왜 나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나 苦悶은 잠깐만 했어요. 經驗 많은 監督님 밑에서 뭐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에 곧바로 付託을 받아들였습니다. 監督님은 제게 많은 役割을 附與하셨어요. 큰 그림만 그려주시고 大部分은 제가 選手들을 이끌어나가길 바라세요. 그게 힘도 되고 負擔도 되더라고요.”

    청주대는 올해 1月 조민국 監督과 이을용 코치가 팀을 맡은 後 U리그에서 8錢 全勝을 내달렸고, 大學聯盟戰에서도 波瀾을 일으키며 乘勝長驅했다. 비록 8强에서 그 氣勢가 꺾였지만, 無名이나 다름없던 脂肪 팀의 叛亂은 蹴球 關係者들에게 新鮮한 衝擊으로 다가왔다.

    ▼ 짧은 時間 동안 敗北意識에 사로잡혀 있던 選手들을 變化시킨 部分이 印象的이었어요. 어떻게 해서 그게 可能했을까요.

    “大學팀은 처음이라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感이 오지 않았어요. 조민국 監督님의 도움이 컸죠. 監督님은 高麗大와 實業팀, 그리고 프로팀까지 經驗한 베테랑이잖아요. U리그 大會를 準備하면서 一對一 맞춤型 指導에 들어갔습니다. 選手들과 個別 미팅을 통해 長短點에 對한 對話를 나누고 解決 方案을 提示한 後 내가 提示한 解法이 그라운드에서 行動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잔소리와 激勵를 했습니다.”

    “하루 終日 蹴球만 생각”

    ▼ 어떤 解法이었나요.

    “지난봄 統營에서 春季大會가 열렸는데 3, 4學年 選手들을 除外하고 1, 2學年 爲主로 競技를 풀어갔습니다. 旣存의 主張까지 빼고 低學年 選手들 爲主로 大會를 치렀어요. 選手들은 勿論 學父母들의 反撥이 거셌습니다. 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1, 2學年 選手들이 게임을 못해도 繼續 뛰게 했습니다.

    大會를 마치고 돌아와서 主張을 비롯한 高學年 選手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프로 入團을 앞둔 選手들 處地에선 이런 變化가 不安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저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選手들에게 仔細히 說明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팀은 主戰 비(非)週前 區分 없이 모두가 競爭을 벌여야 한다고요. 安住하거나 變化를 拒否하는 選手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요. 그때부터 選手들 눈빛이 달라지기 始作했습니다.”

    ▼ 江原FC에서도 코치를 맡았는데, 그때와 比較하면 어떤 差異가 있을까요. 프로와 大學이란 環境의 差異 말고요.

    “只今은 選手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아요. 以前까지만 해도 ‘往年의 스타 이을용’을 내려놓지 못했어요. 허울에 갇혀 있었던 셈이죠. 只今은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자리 들 때까지 蹴球만 생각하며 지내요. 어쩌면 選手 때보다 蹴球에 對한 愛情이 더 많아졌는지도 몰라요. 實力이 不足한 選手들이 蹴球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指導者가 이래서 魅力 있는 職業이구나 싶기도 하고요. 淸州大로 잘 왔다니까요.”

    ▼ 하루빨리 監督이 되고 싶진 않나요.

    “大學 리그에 나가면 相對 팀 監督들이 같이 選手로 뛰던 先後輩들이에요. ‘柳 監督’(유상철 蔚山大 監督), ‘李 監督’(이상윤 建國大 監督), ‘설 監督’(설기현 성균관대 監督)…. 저는 ‘이 코치’이고. 그런데 저는 그 타이틀이 갖고 싶거나 부럽지 않아요. 언젠가는 저도 그 자리에 가 있겠죠. 그러나 只今은 段階를 밟아 올라가야 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는 運이 좋은 便이에요. 繼續 프로에만 머물렀다면 經驗하지 못했을 많은 것을 只今 배우고 있으니까요. 靑春FC도 프로에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죠.”

    남이 가지 않는 길

    ▼ 江陵商高가 最終 學歷이에요. 學緣이 重要視되는 韓國 蹴球에서 大學 看板 없이 活動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요.

    “淸州大에 와서 學緣에 對한 重要性을 느끼고 있어요. 高麗大 나온 조민국 監督님을 봐도 그렇고요. 選手 때는 몰라도 社會에서 活動하려면 學緣, 人脈, 이런 部分이 作用하더라고요. 事實 選手 때는 大學이 크게 重要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後悔가 돼요. 아무리 選手라고 해도 工夫는 必要한 것 같아요. 아는 사람이 別로 없고. 뒤늦게 명지대 體育學科에 登錄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來年에 卒業해요. 大學院까지 挑戰해볼 생각입니다.”

    이을용은 蹴球 選手로 이름을 알리기 前까지의 自身을 ‘雜草人生’ ‘下流人生’에 比喩했다. 只今의 이을용은 훌륭한 指導者가 되기 위해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걸으며 배움의 人生을 산다. 大學팀 코치로, ‘未生’ 蹴球人들의 監督으로 그는 充分히 幸福해했다. 이을용은 魅力的인 男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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