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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라인’ 東쪽으로 美 몰아내는 게 中 目標|新東亞

‘하와이 라인’ 東쪽으로 美 몰아내는 게 中 目標

美國 vs 中國, 太平洋 霸權戰爭

  • 丈量(張良) | 中國靑年政治學院 客座敎授·政治學博士

    入力 2015-09-22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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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서태평양 統制權 넘기라” 要求
    • 中國 內海(內海)로 變하는 韓國 西海
    • 美, 서태평양에서 ‘後退’할 수도
    • 韓, 체스板 卒 노릇해선 안 돼
    ‘하와이 라인’ 동쪽으로 美 몰아내는 게 中 목표

    9月 3日 中國 베이징 톈안먼 廣場에서 열린 人民解放軍 항일전勝 70周年 記念 閱兵式.

    非武裝地帶(DMZ) 地雷 爆發에서 비롯한 危機가 絶頂으로 치닫던 8月 22日 正午. 國軍과 美軍 空軍 戰鬪機 各 1個 編隊 8臺가 東海 上空에서 만나 空軍 第16戰鬪飛行團이 駐屯한 慶北 醴泉 北方을 거쳐 午後 1時 京畿 烏山飛行場에 着陸했다. 小白山脈 바로 南쪽에 位置한 醴泉에서 休戰線까지는 戰鬪機로 2~3分밖에 걸리지 않는다.

    戰鬪機 合同 機動을 전후해 美國 航空母艦 傳單(戰團)과 B-2 스텔스 爆擊機 및 F-22 랩터 戰鬪機의 韓半島 展開를 豫測하는 記事가 報道되기 始作했다. 戰爭으로 치달을 것 같던 DMZ 地雷 危機는 南北 高位級 接觸 開始와 함께 수그러들었다. 우리 在來式 軍事力의 3分의 1, 經濟力의 50分의 1도 채 안 되는 北韓을 美國의 軍事 支援을 받고서야 制壓한 셈이다. 여기에서 보듯 우리가 安保 側面에서 依支할 가장 確實한 國家는 美國이다.

    美國은 G2로 浮上한 中國에 비해 相對的으로 國力이 弱化하고 있다. 우리가 安保를 굳건히 하고 統一을 이루려면 世界 情勢 變化에 能動的으로 對處하면서 最强大國 美國의 外交·安保 政策을 제대로 理解해야 한다.

    中國이 浮上하고, 日本에서 景氣沈滯와 政治 不安定이 나타나고, 韓國의 經濟力·軍事力이 工業化 進展 德分에 充實해진 2000年代 初 以前까지 美國은 韓國을 제대로 된 軍士協力 파트너로 看做하지 않았다. 韓國은 美國, 中國, 러시아, 日本 等이 主要 行爲者로 參加하는 東아시아 체스板의 卒(卒)에 不過했다. 美國은 韓國보다 核武器와 그 運搬手段인 미사일 開發을 追求해온 北韓의 動態에 오히려 더 많은 關心을 기울였다.

    한·美는 如前히 美·英, 美·이스라엘과 같은 程度의 血盟關係(staunch ties)가 아니며, 美·日關係보다도 緊密度가 낮다. 美國은 韓國의 國益과 直接 關聯된 몇 가지 重要한 問題에 對해 韓國의 處地를 配慮하지 않는다.



    代表的 事例가 韓國의 領土 統合과 直接 關聯된 獨島 問題에 對해 模糊한 姿勢를 取하는 것이다. 美國은 中國에 對한 對應과 關聯해서라도 더 强力한 同盟인 日本과의 關係를 念頭에 두지 않을 수 없다.

    美國은 韓國의 彈道미사일 能力 增進에도 否定的이다. 美國이 現在 800㎞인 韓國의 미사일 射距離 追加 延長에 否定的인 것은 大量殺傷武器 非擴散 政策 外에도 韓國이 美國의 統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울러 韓國의 미사일 射距離 延長에 同意하면 日本을 刺戟하는 것은 勿論, 中國의 抵抗을 誘發할 것으로 본다.

    獨島에서 限·日이 맞붙으면…

    美國은 이렇듯 軍事 部門에서 確然하게 差別한다. 韓國과 日本은 다 같이 록히드마틴의 F-35 戰鬪機 導入을 推進하는데, 美國은 日本에는 마하 4의 유럽製 長距離 空對空 미사일 미티어(Meteor)를 裝着하도록 許容한 反面 韓國에는 不許했다. 우리와 日本 空軍機가 獨島 上空에서 空中戰을 벌이면 우리 空軍機가 擊墜될 公算이 클 수밖에 없게 됐다.

    또한 美國은 日本과 달리 韓國에는 戰鬪機 機體만 팔고, 武裝 統合을 할 技術이나 소스 코드(source code), 整備 權限을 주지 않는다. 北韓에 急變事態가 發生해 中國軍이 北韓에 進入하고 우리가 이에 맞서 國軍을 休戰線 以北으로 展開할 境遇 美軍이 우리와 함께 中國軍에 맞서 싸우려 할지도 不明確하다. 美國은 1951年 1·4 後退 때 中共軍이 江原道 原州 以南으로 밀고 내려오려 하자 韓半島를 抛棄하려 한 前歷이 있다.

    世界의 帝國 美國은 分明한 外交 優先順位를 갖고 있다. 同盟國이 要請해도 美國의 國益에 合致할 때만 움직인다. 또한 에너지 安保 確保, 이스라엘 防禦 等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먼저 끄고 난 다음에야 行動하는 傾向이 있다.

    우라늄 濃縮 問題와 關聯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가 끈질기고 强力하게 反撥하는데도 지난 7月 이란과 妥協한 데서 보듯 世界 各地의 多種多樣한 問題에 同時에 介入할 힘도 줄었다. 北韓의 安保 威脅 沮止를 包含해 韓半島와 韓半島 周邊에서 發生하는 軍事安保 問題에 스스로가 어느 程度 影響力을 미칠 軍事力을 確保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東아시아 國際 政治판의 卒로 轉落할 것이다.

    美國은 太平洋과 大西洋 사이 北아메리카 大陸의 中心部를 領土로 하는 面積 982.6萬㎢(世界 3位), 人口 3億2000萬 名(世界 3位), GDP 16兆8億 달러(世界 1位)의 最强大國이다. 基軸通貨 發券力을 가졌으며, 國際通貨基金(IMF)과 世界銀行(WB)을 中心으로 한 國際金融體制度 掌握했다. 英語와 할리우드 映畫로 대표되는 莫强한 文化權力度 지녔다. 美國의 軍事力 透寫 範圍는 옛 몽골帝國이나 大英帝國보다 넓다. 東아시아, 유럽, 中東 等 大陸과 太平洋, 大西洋, 印度洋 等 大洋의 130餘 個 國家에 30萬 名 以上의 兵力을 展開하고 있다.

    太平洋과 大西洋 사이에 位置했으나 英國과 獨逸 等 유럽 文化를 起源으로 하는 美國은 18世紀 末 建國 以來 늘 유럽 優位, 卽 大西洋主義에 기초한 對外政策을 取해왔다. 2013年 겨울 베이징에서 만난 週中(駐中) 美大使館의 한 外交官(韓國 勤務 經歷도 있다)은 “美國 外交政策의 中心은 늘 유럽이었고, 中國이 負傷한 只今도 유럽의 重要性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美國 外交安保政策 目標 中 가장 重要한 4가지를 들었다.

    첫째, 本土를 外侵으로부터 防禦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大量破壞武器 擴散을 沮止해야 한다. 둘째, 유라시아 大陸에서 勢力均衡을 確保하는 것으로 이를 爲해서는 유라시아 大陸의 兩 날개인 北大西洋條約機構(NATO)와 함께 日本과의 同盟을 强化해야 한다. 셋째, 자유롭고 開放된 世界經濟 秩序를 確保하는 것이다. 넷째, 埋藏量이 豐富한 大規模 셰일가스戰을 갖고 있으나 安定된 에너지 供給線을 確保하는 것으로 이를 爲해서는 페르시아 灣 石油와 天然가스에 對한 다른 나라의 獨占的 地位 確保를 막아야 한다.

    이 가운데 우리와 가장 密接한 것은 ‘中國, 日本, 러시아, 印度, 獨逸 等 强國이 位置한 유라시아 大戮에서의 勢力均衡 維持’다. 유라시아 大陸에서 勢力均衡이 무너지면 美國의 霸權도 終末을 告할 可能性이 크고, 이는 韓國의 國家 安保에 致命的 影響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13億5000萬 人口의 招待國 中國의 負傷과 挑戰은 獨逸의 히틀러 帝國이나 日本帝國, 蘇聯의 挑戰과는 規模가 다르다. 美國은 只今껏 相對한 나라와는 判異한 規模와 文化를 가진 國家의 挑戰에 直面했다.

    美의 對日 愛憎 變奏曲

    美國은 1776年 大西洋 沿岸 13個 州에 나라를 세운 以來 繼續 西쪽으로 나아가 19世紀 中盤에는 太平洋 沿岸 캘리포니아에 到達했다. 1893年 하와이를 거쳐 1898年에는 타이완 南쪽에 位置한 필리핀까지 손에 넣었다.

    필리핀에 橋頭堡를 確保한 美國은 巨大 國家 中國에 對한 利權을 놓고 英國, 프랑스, 獨逸, 러시아 等의 유럽 國家 및 日本과 競爭했다. 當時 中國 沿岸에서 制動이 걸린 美國의 關心은 以後 유라시아 大陸의 特定 國家가 東아시아를 支配하는 것을 막는 것, 卽 勢力均衡 維持로 바뀌었다. 유라시아 大陸의 勢力均衡 維持라는 側面에서 美國의 敵國은 1900年代 初까지는 러시아, 1930年代 以後에는 日本이었다.

    日本이 19世紀 末, 20世紀 初 淸나라와 러시아를 次例로 擊破하고 東아시아 霸權을 掌握한 데는 러시아의 南進을 憂慮한 영·美(Anglo-Saxon) 勢力의 支援이 決定的이었다. 日本은 더글러스 맥아더 將軍의 아버지로 週日(駐日) 美大使館 武官이던 아서 맥아더도 參觀한 뤼순(旅順) 203高地 戰鬪 等에서 러시아軍을 擊破하고 戰爭을 勝利로 이끌었다. 그 直前 美國과 日本은 태프트-가쓰라 密約을 締結해 필리핀과 朝鮮에 對한 優越權을 맞交換했다. 英國은 2次例에 걸친 영일同盟을 通해 日本을 支援했다.

    美國은 러일戰爭 以後 뤼순과 다롄(大連)을 包含한 南滿洲 利權을 놓고 日本과 葛藤했다. 이로 인해 日本의 朝鮮 竝呑은 約 5年 遲滯된 1910年에야 完成됐다. 大恐慌(1929~1939) 發生 直後인 1930年代 東아시아에 對한 美國의 主要 關心은 日本의 膨脹을 沮止하는 것이었다. 滿洲와 中國 本土, 東南亞, 西太平洋 群盜를 놓고 벌어진 美·日 間 葛藤은 太平洋戰爭(1941~1945)으로 이어져 原子爆彈 投下와 함께 日本의 敗戰으로 끝났다.

    終戰 後 美國은 장제스의 中國을 支援해 러시아의 擴大版인 蘇聯의 南進을 沮止할 計劃이었으나, 1949年 10月 마오쩌둥의 共産黨이 內戰에서 勝利하자 日本을 東아시아 第1同盟國으로 選擇했다. 이에 따라 日本은 NATO와 함께 資本主義 世界의 堡壘인 美國의 兩 날개 中 하나가 됐다.

    2次大戰 後 美國의 東아시아 政策의 基礎가 된 것은 獨島 領有權 紛爭의 原因이기도 한 1951年 9月 샌프란시스코 條約 締結이다. 샌프란시스코 條約이 草案과는 달리 日本이 領有權을 抛棄해야 할 韓半島 圖書 中 하나로 獨島를 明記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불씨가 됐다. 美國은 샌프란시스코 條約에 日本이 抛棄해야 할 圖書의 例로 濟州島, 巨文島, 鬱陵島만 明記했다.

    애치슨 라인, 닉슨 독트린

    1948年 韓半島 北部에 이어 1949年 中國 大陸이 共産化했지만 美國은 韓半島의 戰略的 價値를 如前히 낮게 봤다. 美國이 38線 以北을 蘇聯에 넘겨준 것도 같은 理由에서다. 딘 애치슨 當時 美 國務長官은 1950年 1月 美國新聞記者協會 演說에서 美國의 西太平洋 防衛線은 알류샨 列島-日本 列島-오키나와 列島-필리핀 列島를 잇는 線이라고 宣言했다. 韓國과 臺灣을 美國의 防衛線 밖에 놓은 애치슨 라인은 北韓 共産勢力의 南侵 欲求를 刺戟했다.

    1950年 6月 25日, 6萬餘 名의 在蠻(在滿) 朝鮮人 兵力이 住公(主攻)이 된 北韓軍이 韓國을 侵攻하자 美國은 日本 防禦와 함께, 蘇聯의 西晉(西進) 試圖와 關聯해 西獨과 프랑스 等 西유럽 國家들이 美國을 信賴하지 않으리라는 憂慮 때문에 戰爭에 介入했다. 戰爭이 小康 局面에 들어간 1952年 美國은 中央情報局(CIA)을 動員해 ‘釜山 政治波動(直選制 改憲)’을 契機로 共産 側과의 休戰協商을 妨害하던 李承晩 除去를 試圖하기도 했다.

    ‘하와이 라인’ 동쪽으로 美 몰아내는 게 中 목표

    지난해 7月 16日 西海 公海上을 航海 中인 美國 航空母艦 조지워싱턴號에 F-18 호넷 戰鬪機가 着陸하고 있다.

    6·25戰爭 休戰 以後 美國은 東아시아 政策을 變更했다. 蘇聯의 南進을 막기 爲한 方案으로 △日本의 工業化를 加速化하고 △中國을 蘇聯으로부터 떼어놓으며 △韓國과 臺灣을 强化하는 方向으로 政策을 轉換한 것이다. 美國은 當初 中國 共産化 以後에도 마오쩌둥과 和解해 蘇聯의 南進을 防禦할 計劃이었으나 마오쩌둥이 뤼순과 다롄을 包含한 滿洲地域 統制權 確保 等을 위해 6·25戰爭에 介入하자 日本을 工業化하고, 韓國과 日本에 軍隊를 駐屯하는 方向으로 政策을 틀었다. 이에 힘입어 韓國과 臺灣은 工業化에 나서면서 軍事力을 强化할 수 있었다.

    韓國과 남베트남 等 東아시아 沿岸(rim)으로 軍事力 前進 配置를 追求하던 美國은 베트남 戰爭이 膠着 狀態에 놓인 1969年 7月 닉슨 독트린(第2의 애치슨 라인)을 發表해 다시 한 番 西太平洋 列島選(오키나와-괌)으로의 後退를 宣言했다. 닉슨 독트린은 1970年代 初 △美·中 및 中·日 修交 △오키나와 行政圈 日本 返還 △第7師團 韓國 撤收 △美軍의 남베트남 撤收로 이어졌다. 닉슨 독트린은, 中·蘇 紛爭을 利用해 國力을 回復할 時間을 提供해 蘇聯과의 冷戰에서 美國이 勝利하는 데 크게 寄與했다.

    中國의 ‘眞珠목걸이’ 戰略

    1991年 蘇聯 崩壞 以後 世界 唯一 超强大國으로 떠오른 美國은 2000年代 들어 財政과 貿易의 雙둥이 赤字가 累積되고, 中國의 負傷이 本格化하며, 9·11테러가 象徵하듯 極端主義 이슬람 勢力의 挑戰이 尖銳化하면서 一大 危機를 맞았다. 2001年 아프가니스탄 戰爭, 2003年 이라크 戰爭, 이란과의 繼續된 對立 等으로 인해 中國의 負傷에 제대로 對應할 餘裕를 갖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는 極端主義 이슬람 勢力의 挑戰도 挑戰이지만, 中國을 包含한 東아시아에 對한 傳統的 輕視도 큰 몫을 했다. 美國은 西部 러시아를 包含한 東유럽과 함께 豐富한 에너지 資源을 가진 中東-北아프리카 地域에 關心을 集中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戰爭, 이라크 戰爭, 2008年 經濟危機로 全 世界가 不安定에 處한 狀況에서도 中國의 經濟成長은 持續됐다. 2014年엔 購買力(Purchasing Power Parity) 基準으로 中國이 美國의 經濟力을 追越했다. 日本마저 ‘美國이냐, 中國이냐?’를 두고 苦悶해야 하는 處地가 된 것이다.

    中國은 急速한 經濟成長에 힘입어 臺灣, 동남아국가연합(ASEAN) 會員國, 韓國 等 隣近 國家를 經濟的으로 包容하는 한便, 해·공군력 增强을 통해 南中國海에 對한 影響力을 强化하고 있다. 미얀마, 스리랑카, 몰디브, 파키스탄, 세이셸, 탄자니아 等의 印度洋 港口들을 목걸이 形態로 連結하는 軍事戰略, 이른바 ‘眞珠목걸이 戰略’으로 아프리카 東海岸을 包含한 印度洋에 對한 影響力도 强化했다. 우리의 西海, 東中國海, 南中國海는 中國의 內海(內海)로 變해가고 있다. 中·日 葛藤의 震源地인 센카쿠 列島(中國名 댜오위다오) 紛爭도 中國의 東進(東進) 推進과 密接하게 聯關된다. 中國은 센카쿠 列島 紛爭을 國家統合과 西太平洋 進出의 前提條件인 해·공군력 强化 機會로 利用한다. 또한 美國에 ‘新型大國’ 關係를 主張하면서 서태평양에 對한 統制權을 넘겨줄 것도 要求한다.

    美國은 中國의 負傷으로 東아시아에서 支配的 位置가 흔들리자 2009年 2月 힐러리 클린턴 當時 國務長官의 ‘아시아 소사이어티’ 演說을 통해 ‘아시아 回歸(re-balancing to Asia)’를 宣言했다. 레이 마부스 海軍長官은 2014年 6月 隻當 33億 달러에 達하는 1萬5000t級 스텔스 驅逐艦 3隻이 乾燥되면 太平洋 地域에 于先 配置할 것이라고 强調했다.

    ‘때늦은’ 아시아 回歸

    하지만 때늦은 決定이었다. 1980年 美國-東아시아 間 貿易額이 이미 美國-유럽 間 貿易額을 凌駕했으며, 2000年에는 東아시아로부터의 輸入額이 美國-유럽 間 貿易額을 追越했다. 超大國 中國의 負傷이 1970年代 末부터 始作돼 2000年代 初에는 跳躍 段階에 들어섰는데도 美國은 如前히 大西洋注意(유럽 優先主義)에 빠져 있었다. 美國이 同盟國과 友好國에 提供할 經濟·安保資産은 漸漸 줄어든다. 向後 美國의 最大 課題는 財政 不足과 東아시아 同盟國이 美國에 對해 갖는 信賴의 間隙을 메우는 일이 될 것이다.

    美軍을 ‘戰略的 柔軟性’ 槪念의 機動軍 形態로 改編하는 것도 海外 곳곳에 固定된 軍部隊를 駐屯시킬 財政 能力이 不足하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國家와 歷史’에 따르면 로마帝國도 國力이 衰退하는 末期로 가면서 戰略的 柔軟性에 기초해 라인 江, 도나우江, 브리타니아(英國), 다키아(발칸 半島) 等 곳곳의 戰線에 駐屯軍이 아닌 機動軍을 配置하는 方向으로 軍事戰略을 變更했다. 오스만투르크 帝國도 마찬가지다. 大英帝國이 1950年代 中盤 以後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 等을 除外한 수에즈 運河 隣近의 海外 軍事基地를 抛棄한 것도 結局 財政 不足 때문이었다.

    2013年 基準 每年 1500億 달러 안팎의 國防費를 支出하는 中國은 2014年부터 年 10% 넘게 國防費를 增額했다. 8~9年 後에는 美國과 類似한 水準의 國防費를 支出할 것으로 推算된다. 이렇게 되면 20年 後 中國은 적어도 規模 側面에서는 美國과 類似한 水準의 軍事力을 保有할 展望이다. 産業化한 超大國 中國의 軍事力 增强 速度는 그만큼 빠르다.

    그러나 中國은 美國, 日本, 英國 等이 蓄積한 것과 같은 戰爭 經驗이 없다. 같은 尖端武器로 武裝해도 訓鍊만 한 軍隊와 實戰을 經驗한 軍隊의 差異는 크다. 中國의 軍事力은 이 點을 勘案해 評價해야 한다. 中國의 宇宙電力度 世界 最强 美國에 비해 크게 劣勢다. 傳統的 陸軍 國家인 中國의 해·공군력 亦是 美·日에 비해 脆弱하다.

    中國의 沿岸 地域을 直接 겨냥할 수 있는, 白翎島-平澤-濟州島를 連結하는 韓國 西海岸의 戰略的 價値가 上昇한 것은 이 때문이다. 美國과 中國의 戰略的 競爭과 關聯해 ‘沸騰點’은 東中國海, 南中國海와 함께 西海가 될 可能性이 크다. 우리에게는 中·日 間 衝突의 現場인 東中國海와 함께 國家 運命과 直接 關聯된 西海가 特히 重要하다. 現在의 國力 增强 速度를 勘案하면 中國이 超强大國이 되는 것은 時間問題이며 15~20年 後에는 적어도 東아시아-西太平洋 地域 霸權國家가 될 可能性이 적지 않다.

    ‘第2도련船’

    그렇다면 美國은 中國의 負傷과 挑戰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와 關聯, 지난봄 다롄에서 만난 中國 선양軍區 所屬의 한 將軍은 “美國과 같은 世界帝國이 霸權을 維持하는 方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며 이렇게 說明했다.

    “첫째, 挑戰國을 先制攻擊하는 것이다. 霸權國이던 티무르 帝國이 1402年 7月 앙카라에서 新興帝國 오스만투르크를 攻擊한 것이 이에 該當된다. 오스만투르크는 皇帝 바野지트 1歲가 티무르 帝國軍에게 사로잡히는 等 潰滅的人 打擊을 입었고 以後 國家 再建에 數十 年을 消耗했다.

    둘째, 挑戰國을 封鎖하는 것이다. 1940年代 末~1950年代 初 美國의 對(對)蘇聯 封鎖政策이 그런 例다. 美國은 이를 통해 蘇聯의 膨脹을 沮止하는 데 成功하는 한便, 以後 蘇聯과 中國 間 葛藤을 利用해 中國을 끌어들인 뒤 蘇聯을 무너뜨리는 데 成功했다.

    셋째, 挑戰國에 友好的이지 않은 國家들과 촘촘한 그물網을 形成해 挑戰國의 成長을 抑制하는 것이다. 現在 美國이 推進하는 韓國·日本·濠洲·베트남 等 東아시아-太平洋 國家들과의 同盟 强化, 日本, 濠洲, 베트남, 싱가포르 等과의 環太平洋自由貿易協定(TPP)을 包含한 經濟協力網 構築 試圖가 그런 類型이다.

    넷째, 後退해서 勢力을 保存하고 있다가 狀況이 유리하게 變化할 때 挑戰國을 膺懲하는 것이다. 中國 三國時代 位(魏)나라가 蜀漢(蜀漢) 諸葛亮이 攻擊해오자 一旦 後方인 衛戍(渭水) 流域으로 後退해 있다가 諸葛亮이 病死하고 蜀漢이 弱해지자 大君을 보내 一擧에 蜀漢을 멸망시킨 것이 그러했다. 닉슨 독트린度 여기에 該當된다.”

    美國은 相互確證破壞(Mutually Assured Destruction) 水準의 相互 核武裝과 經濟依存 때문에 挑戰國 中國을 向해 先制 軍事攻擊을 加하거나 經濟封鎖政策을 펼 수 없다. 經濟力을 背景으로 軍事力을 增强하는 中國의 膨脹을, 相對的으로 經濟力과 軍事力이 弱化하는 美國은 일정한 線까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現實이다.

    美國은 또 ‘後退’할 것인가

    中國의 改革·開放 以後 軍人 出身으로는 唯一하게 共産黨 政治局 常務委員을 지낸 海軍提督 류화칭(劉華淸)은 1980~1990年代 中國의 中長期 海洋 戰略을 樹立했다. 그는 世界 物動量의 90% 以上을 擔當하는 海洋의 重要性에 注目하고, 持續的인 經濟 發展을 위해서는 ‘大洋海軍’李 必須라고 생각했다. 오키나와를 起點으로 于先 臺灣, 필리핀, 보르네오에 이르는 線을 第1도련船(第一島聯線)으로 定하고, 2010年代에는 이 海域에서 美軍을 逐出한다는 것이다. 以後 2030年까지는 航空母艦 編隊를 構成해 오가사와라 制度에서 괌, 사이判, 파푸아뉴기니를 連結하는 第2도련船 海域에서 中國의 制海權을 樹立하는 것이 主要 글字다.

    第2도련船은 2次大戰 때 日本의 太平洋 最大 膨脹善과 相當 部分 겹친다. 2012年 中國 海軍의 羊이(楊毅), 人줘(尹卓) 除毒 等은 經濟力과 軍事力의 相關關係에 비춰볼 때 美國 海軍은 머지 않은 將來에 제2도련선 밖으로 後退를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고 主張했다.

    美國이 勢力 保存을 위해서라도 西海-오키나와 諸島-臺灣-南中國海 라인에서 中國이 主張하는 第2도련船 移動(以東)의 하와이 라인으로 後退하는 것이 全혀 不可能한 일만은 아니다. 로버트 카플란은 ‘中國의 地理學(The Geography of Chinese Power)’에서 美國이 國力을 回復하려면 中國에 서태평양을 讓步해 하와이로 後退하고, 日本이나 韓國 等 東北아시아보다는 印度洋에 重點을 둬야 한다고 主張했다. 美國이 앞으로 新(新)孤立主義를 採擇함으로써 中國이 主導하고 日本, 印度, 韓國, 濠洲, 베트남 等이 參加하는 새로운 體制에 아시아를 맡겨놓고, 活動範圍를 東太平洋과 大西洋, 印度洋으로 制限할 可能性이 있는 것이다.

    더 깊어가는 韓國의 苦悶

    美國은 東아시아-서태평양에서의 霸權을 抛棄하고 하와이 線으로 後退하더라도 유라시아 大陸의 西半部와 아메리카, 아프리카, 東太平洋과 印度洋, 大西洋 等 世界 陸地와 海域의 3分의 2 以上을 繼續 統制하면서 中國에 對해 優越한 地位를 維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 資源 不足이라는 弱點을 지닌 中國이 美國의 牽制와 日本, 러시아, 印度 等의 抵抗을 뚫고 東아시아-西太平洋 地域에서 確固한 霸權을 樹立할 수 있을지도 不分明하다.

    美國은 日本이 旭日昇天의 氣勢로 膨脹하던 1930~1940年代 初 짧은 期間 하와이 라인(line)으로 後退한 經驗이 있다. 日本은 1931年 滿洲, 1937年 中國 本土의 華北·火中 一部, 1941年 홍콩을 占領했고 東南亞를 거쳐 印度를 向해 進軍했다. 1941年 12月 航空母艦 機動隊를 앞세워 하와이 眞珠灣을 奇襲한 데 이어 1942年 4月에는 필리핀 마닐라灣(灣) 바타안 半島에서 필리핀 駐屯 美軍의 降伏을 받아냈다.

    全盛期 日本은 웨이크 섬, 솔로몬 諸島, 길버트 制度 等 하와이 李曙(以西) 西太平洋 거의 全域을 手中에 넣었다. 國土 面積, 人口, 經濟力 等 여러 側面에서 基本 國力이 弱한 日本은 比較的 짧은 期間에 戰爭을 통해 크게 膨脹했다가 結局 敗北하면서 現在 規模로 縮小됐다. 그러나 中國은 19~20世紀 前半期의 美國과 같이 巨大한 國土와 人口, 經濟力을 背景으로 徐徐히 膨脹해 나가기에 速度는 緩慢해도 一旦 膨脹하고 나면 勢力을 오래 維持할 것이다.

    9月 3日 베이징에서 열린 2次大戰 전승절 記念行事 때 드러났듯 우리 大統領과 國家安保室長, 外交長官을 包含한 外交·安保 擔當者들의 苦悶이 한層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 狀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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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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