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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風土病은 日常 子息 問題는 ‘禁忌語’|新東亞

테러, 風土病은 日常 子息 問題는 ‘禁忌語’

턱시도 입은 슈퍼맨? 外交官 世界의 거친 민낯

  • 박은경 客員記者 | siren52@hanmail.net

    入力 2015-09-22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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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映畫와 드라마 속 外交官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와인 盞을 들고 華麗한 宴會場을 누빈다. 그러나 包裝을 한 꺼풀 벗겨낸 外交官들의 日常은 크고 작은 戰爭의 連續이다. 內戰이라도 터지면 목숨을 건 脫出을 敢行해야 한다. 年間 海外 旅行客이 1500萬 名, 在外國民과 在外同胞가 700萬 名에 達하지만 外交官은 數百 名에 不過하다. 特權層度, 슈퍼맨度 아닌 現實 속 外交官의 世界.
    테러, 풍토병은 일상 자식 문제는 ‘금기어’

    박희채 前 밴쿠버 領事가 手段大使館 勤務 時節 孤兒院을 訪問해 奉仕活動을 하고 있다.

    박희채 前 캐나다 밴쿠버 領事(現在 NGO 월드셰어 代表)는 33年 外務公務員 生活 中 가봉, 리비아 等 이른바 ‘險地(險地)’ 主宰 韓國大使館 네 곳에서 勤務했다. 그는 마지막 勤務地 手段大使館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只今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2008年 5月, 수단 最大 叛軍 組織(JEM)李 政府 顚覆을 目標로 수도 카르툼을 向해 進擊하자 反擊에 나선 政府軍은 戰鬪機를 動員한 絨緞爆擊을 豫告하며 地域 居住民에게 待避令을 내렸다. 現地 僑民 保護에 非常이 걸린 韓國大使館이 緊迫하게 非常連絡을 取하던 中 攻襲 豫告 地域(옴두르만)에서 韓國人 宣敎師 1名이 미처 못 빠져나오고 숨어 있다는 連絡을 받았다.

    救出 2時間 뒤 激戰

    緊急 對策會議가 열렸고, 太極旗를 단 外交車輛을 利用해 宣敎師를 救出한다는 作戰을 세웠다. “내가 가서 데려오겠다”는 이병국 當時 大使를 挽留하고 朴 前 領事가 나섰다. 分秒를 다투는 狀況에서 一旦 그쪽 地理를 잘 아는 運轉技士부터 求해야 했다. 現地 (週)大宇에 付託해 20年 勤務 經歷의 運轉技士를 求하고, 서병화 待遇 專務에게 同行을 要請했다. 서 專務는 手段에서 15年間 生活해 現地 事情에 밝았다.

    大使館에서 옴두르만까지는 約 4㎞. 精神없이 달려가는 동안 一行의 눈에 들어온 光景은 戰爭映畫의 한 場面 그대로였다. 道路 곳곳에 부서지고 불붙은 車輛과 탱크가 널렸고, 길가 군데군데 조각난 屍體들이 나뒹굴었다. 機關銃을 들고 彈띠를 둘러멘 政府軍이 길목마다 檢問所를 차려놓고 지켰다.



    通行許可를 받고 數次例 檢問所를 通過한 끝에 宣敎師를 찾아낸 一行은 恐怖에 질린 宣敎師를 달랠 겨를도 없이 곧바로 車에 태워 出發했다. 檢問所를 지키던 政府軍이 “한 時間 內로 빠져나오지 않으면 出入이 不可能하다”고 警告했기 때문. 一行이 生死를 넘나든 救出作戰에 成功한 지 不過 두 時間 뒤 叛軍과 政府軍 間에 熾烈한 戰鬪가 벌어져 200餘 名이 死亡했다. 朴 前 領事는 當時를 回顧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戰爭터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니 죽을 수도 있었다. 大使館으로 無事히 돌아오고 나서야 얼마나 危險한 狀況이었는지 實感이 났다. 怯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外交官으로서 그게 내 일이었고, 다시 그 狀況이 닥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大多數 우리 外交官들도 나와 똑같이 行動했을 것이다.”

    南北 公館員 合同 脫出作戰

    뜻하지 않게 小說처럼 劇的인 場面을 演出한 外交官이 또 있다. 소말리아 內戰이 한창일 때 그곳 大使館에 勤務한 강신성 前 大使는 1991年 1月 政府軍이 叛軍에 敗해 治安 能力을 喪失한 首都 모가디슈를 脫出하기 위해 公館 職員들을 이끌고 遑急히 空港으로 向했다. 하지만 미처 이탈리아 大使館의 許諾을 받지 못해 그들의 構造 飛行機에 搭乘할 수 없었던 强 大師 一行은 그곳에서 같은 處地에 놓인 北韓 大使 一行을 만났다. 軍事戰略知人 空港에선 언제 激戰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强 大師 一行은 北韓 公館員들을 說得해 함께 大使館으로 다시 돌아왔다.

    大使館에서 不安으로 잠 못 이루는 사흘을 보낸 뒤 劇的으로 飛行機를 求해 남 · 北韓 公館員 20餘 名이 함께 銃알이 빗발치는 ‘生地獄’을 뚫고 케냐로 脫出하는 데 成功했다. 그 過程에서 30代 初盤의 北韓 3等 書記官이 心臟에 銃을 맞고 絶命했다. 空港에서 大使館으로 돌아오던 一行의 車를 叛軍의 自動車로 誤認한 政府軍이 集中射擊을 퍼부은 것. 姜 前 大使는 公職生活을 마친 後 當時 經驗을 小說 ‘脫出’(漢江出版社)에 담아 펴냈다.

    최재근 前 總領事는 우간다 大使館에 勤務하던 1982年 2月, 大使館을 나서 캄팔라 市內로 車를 타고 가던 中 武裝强盜 4名의 攻擊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와 왼발에 全治 3個月의 貫通傷을 입은 그는 英國으로 後送돼 治療를 받고 歸國했다. 崔 前 總領事는 “끔찍한 過去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限死코 인터뷰를 拒絶했다.

    映畫와 드라마에서 흔히 그려지는 外交官은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와인 盞을 든 채 華麗한 宴會場을 누빈다. 많은 사람이 外交官을 特權層 乃至 적어도 一般 國民의 삶과는 距離가 먼 存在로 認識한다. 現實은 어떨까. 남상욱 前 大使(現 外交協會 事務總長)의 말을 들어보자.

    “外交官이라는 槪念은 中世, 近世 以來 이탈리아에서 생겨났는데, 그때는 外交官이 國家 間 親善뿐 아니라 戰爭에도 關與하는 重責을 맡다보니 最上類層 貴族이 外交官이 되는 境遇가 많았다. 只今도 大部分의 나라에서 外交官은 最高 엘리트다. 數字가 매우 적고 立部(外交部)하기가 힘들며, 接受國(駐在國)에서 免責特權 等을 누리다보니 一部 國民에게 特權層으로 비치는 傾向이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後進國, 開途國이었을 때는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의 在外空官이 大部分이었다. 그러니 當時 外交官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只今은 우리가 先進國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우리와는 比較가 안 될 만큼 劣惡한 形便의 在外空官이 훨씬 많다. 韓國이 잘살게 된 時期부터 逆說的으로 우리 外交官들의 苦難이 始作된 것이다.”

    外交部에 따르면 現在 우리나라 在外公館 數는 163個. 이 가운데 ‘特殊地’, 一名 ‘險地’로 불리는 公館은 61個로 3分의 1이 넘는다. 險地 分類 基準은 現地 治安, 氣候, 國民所得, 醫療 및 敎育水準 等이다. 險地 中에서도 리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예멘 4곳은 ‘危險地域’으로 分類됐다. 1~3年에 한 番씩 循環 勤務가 原則인 外交官들은 在外公館을 ‘冷湯’과 ‘溫湯’에 比喩한다. 外交官들은 “天國과 地獄을 折半씩 오가다보면 外交公務員 生活이 끝난다”고 말한다. 映畫 속 安樂하고 華麗한 生活과는 距離가 먼 劣惡한 環境에 둘러싸여 孤軍奮鬪하는 삶은 外交官이라면 누구도 避해갈 수 없다.

    在外公館 3分의 1이 險地

    美國 뉴욕의 유엔代表部에 勤務하던 김연식 書記官(當時 參事官)은 ‘大使館 創設’이라는 重責을 맡아 2013年 3月 孑孑單身으로 모잠비크 首都 馬푸套로 向했다. 夫婦 外交官으로 함께 美國에서 勤務하던 아내는 브루나이 大使館으로 發令받고 딸과 함께 떠났다. 本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모잠비크로 發令이 나는 바람에 일을 도와줄 行政官도 뽑을 새가 없었다. 뉴욕 病院에서 急히 黃熱病 等 5가지 風土病 豫防注射만 맞고 現地로 向했다.

    마푸투에 到着해 호텔에 짐을 푼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廳舍와 官邸를 救하는 일이었다. 발품을 팔아 100군데 넘는 곳을 둘러보고 겨우 점찍은 廳舍의 賃借料는 月 2萬 달러로 豫想을 훌쩍 뛰어넘었다. 밀고 당기는 協商 끝에 1萬 달러로 契約했다. 當時 不動産 仲介人은 그에게 “當身 인디언이냐. 價格을 어떻게 그렇게 마구 후려치느냐”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金 書記官의 말에서 그때의 苦衷이 묻어난다.

    “現地 法律을 檢討해 廳舍와 官邸를 契約하고 本部에 要請해 通信施設을 設置하는 等 모든 일을 혼자 處理해야 했다. 廳舍와 官邸 修理 때는 工事 日程 等을 제때 안 지키는 現地 業者들과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美國과 日本은 在外公館을 創設하면 本國에서 建築專門家, 法律專門家 等으로 構成된 創設팀이 派遣돼 廳舍와 官邸, 外交官 私邸까지 全部 세팅해놓는다. 그 後에 外交官이 赴任한다. 우리의 國格(國格)을 勘案하면 안타까운 部分이다.”

    大使館 創設 準備와 함께 潘基文 유엔 事務總長 訪問, 모잠비크 大統領 訪韓을 準備하느라 東奔西走하면서 우리나라 對外經濟協力基金(EDCF)으로 지어진 病院 起工式에도 參席해 祝辭를 했다. 金 書記官은 “赴任하자마자 精神없이 뛰어다니느라 初期 適應期를 건너뛴 셈이다. 너무 힘들어서 (公館 創設 業務를) 두 番 하라면 못하겠지만 外交官으로서는 좋은 機會이고 해볼 만한 經驗이었다”고 했다.

    醫療施設과 生必品 不足, 무더운 氣候로 인해 猖獗하는 風土病 等은 險地에서 勤務하는 外交官뿐만 아니라 家族까지 괴롭힌다. 유창호 外交部 公報擔當官(當時 參事官)은 2009年 에티오피아 大使館으로 發令이 났다. 아내와 함께 1歲, 4歲 子女 둘을 同伴한 그의 現地 生活은 하루하루가 살얼음板 같았다.

    “에티오피아는 유엔이 指定한 最貧國 中 하나다. 막내에게 먹일 가루粉油價 없어서 서울에서 파우치(外交行囊)로 空輸해야 했다. 電氣施設이 劣惡해 날이 어두워야만 電氣가 供給되고, 물도 不足해 돈을 주고 물車를 불러야 했다. 무엇보다 낯선 環境에서 아이들이 頉이 날까 걱정이 많았다. 변변한 醫療施設度 없었는데 多幸히 韓國系 美國人 醫師 夫婦와 親해져 急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歡迎받지 않는 나라’ 外交官

    先進國에 勤務하는 外交官이라고 安樂한 나날만을 보내는 건 아니다. 3年 間 日本 고베 總領事로 在職하다 지난 8月 歸國한 이성권 前 總領事는 ‘歡迎받지 않는 나라’ 外交官의 苦衷에 對해 털어놨다. 그는 17代 國會議員,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常任監事, 靑瓦臺 市民社會祕書官을 지냈다.

    “3年 前 日本에 赴任했을 때 韓日關係는 最惡으로 치달았고, 日本 右翼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고베 總領事館에는 煙幕彈, 히로시마 總領事館엔 甓돌을 던지는 테러도 發生했다. 領事館 職員에게 대놓고 威脅을 加하기도 했다. 이처럼 韓國 外交官이 歡迎받지 않는 社會 雰圍氣에서 ‘人的 外交’를 펼치기란 如干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日本의 未來 世代를 많이 만나 그들에게 韓日關係에 對해 眞摯하게 說明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올바르게 定立해주는 公共領域에서의 外交가 必要했다고 생각했다.”

    李 前 總領事는 日本 大學生을 對象으로 올바른 韓日關係에 對해 1年에 20餘 回 講義를 했고, 이 講義를 들은 日本 某 大學 學部長의 付託으로 1年間 大學에서 講義를 했다. 外交官으로선 보기 드문 그의 活動은 現地 新聞에 報道됐고, 그는 지난해 10月 海外韓人媒體 ‘월드코리안新聞’의 ‘2014 베스트 公館長’에 選定되기도 했다. 그는 KOTRA 監査 때 50餘 個 나라로 出張을 다니면서 險地 外交官들의 苦衷을 지켜보거나 傳해 들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中東, 西南아시아 같은 劣惡한 地域에도 자주 出張을 갔는데, 이라크 出張 때는 市內에서 自殺爆彈테러로 40餘 名이 死亡했다. 그前에도 우리 大使館에서 700m 떨어진 호텔에서 自殺爆彈테러가 發生해 大使館 窓門이 깨지는 일이 있었다. 내가 갔을 때 大使館 職員이 그때 날아온 爆彈 破片을 보여줬다. 危險하고 劣惡한 地域에 單身 赴任한 外交官들의 苦生이 어느 程度인지 實感했다.”

    2012年 8月 아프가니스탄 韓國 地方再建팀(PRT) 副代表로 파르완 週에 派遣된 유창호 擔當官度 비슷한 體驗談을 들려줬다.

    “200餘 名의 우리 軍人을 비롯해 韓國國際協力團(KOICA) 要員, 警察, 醫療陣, 職業訓鍊講師 等으로 이뤄진 팀員 450名이 함께 派遣됐다. 처음에는 파르완 州에 있던 우리 軍 基地에 머물렀는데 탈레반들이 끊임없이 攻擊을 해왔다. 怯을 줘서 몰아내려고 했던 거다. 나중에는 美軍의 바그람 基地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도 隨時로 로켓砲彈이 날아들었다. 空襲警報가 發令되면 우리 팀 民間人들은 모두 待避所로 몸을 避했는데, 나는 民間人이지만 連絡官 任務를 遂行하느라 軍人들과 함께 作戰室을 지켜야 했다.”

    남상욱 前 大使는 네팔 大使館에서 勤務할 때 內戰을 彷彿케 하는 反政府示威를 겪었다.

    “어느 날 出勤길에 나서는데, 雇用人이 死色이 돼 달려와 못 나가게 막았다. 그 瞬間 銃소리가 들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大使館으로 向했다. 非常連絡網을 통해 僑民들의 安全을 確認하고 事態를 把握해야 했다. 집에서 얼마 안 떨어진 도랑에 銃에 맞은 屍體가 보였다. 王政에 反對하는 反政府 示威隊가 王宮 가까이 接近하자 軍人들이 示威隊를 向해 機關銃을 亂射한 것이다. 近處 호텔에서 그 光景을 지켜보던 日本人 한 名은 流彈에 맞아 死亡했다. 首都 카트만두 市內가 阿修羅場이 됐다.”

    테러, 풍토병은 일상 자식 문제는 ‘금기어’

    日本의 한 大學에서 올바른 韓日關係를 主題로 講演하는 이성권 前 고베 總領事.(危) 모잠비크 켈리灣에서 對外經濟協力基金(EDCF) 支援事業으로 지은 中央病院 起工式에서 祝辭하는 김연식 書記官.(아래)



    高山病 後遺症 앓는 夫婦

    南 前 大使는 “一般人이라면 平生 못 겪을 劣惡한 環境과 危險한 狀況을 外交官은 種種 겪는다. 避할 수 없다. 그건 外交官의 淑明”이라고 했다. 南 前 大使 夫婦는 에콰도르 勤務 때 얻은 高山病 後遺症을 只今도 앓고 있다. 空氣 中 酸素가 30% 不足한 海拔 2800m에 位置한 首都 키토에서 2年間 生活하면서 얻은 健忘症과 不眠症이 回復되지 않은 것. 現地에서 甚한 頭痛을 앓던 아내는 只今도 時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頭痛 때문에 아스피린을 끊지 못한다.

    職業 外交官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中 하나가 子女 問題다. 外交官 父母의 任地를 따라 生活環境, 敎育環境이 다른 地域을 隨時로 옮겨 다녀야 하는 未成年 子女들이 겪는 問題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때문에 外交官들 사이에 子女 問題는 公公然한 祕密이자 禁忌語라고 한다. 學院이나 課外는 꿈도 꾸기 어렵다. 國際學校가 있다지만 웬만한 先進國이 아니면 敎育水準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狀態로 國內에 들어오면 中·高校 適應이 어려울 뿐 아니라 大學 進學도 만만치 않다. 케냐와 수단 大使館 等에서 勤務한 이병국 前 大使는 이렇게 傳했다.

    “우리나라 敎育은 宏壯히 빡빡하다. 어릴 때부터 外國에서 자라 韓國말이 語訥한 아이들은 授業을 따라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以前과는 다른 敎育環境에 適應하기가 쉽지 않다. 外交官 子女 中에 ‘왕따’를 當하는 아이가 적지 않은 理由다. 요즘은 民間과 公共을 莫論하고 海外 派遣 職員이 워낙 많기 때문에 子女들의 特例入學을 둘러싼 競爭도 熾烈해졌다. 外交官 子女가 좋은 大學 나와서 좋은 職場에 就職하고 成功하는 境遇는 少數에 不過하다. 前職 外交官 中에 子女 問題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속을 끓이는 사람이 많다.”

    在外國民을 近接 相對해야 하는 外交官은 ‘24時間 待機’ 狀態일 때가 많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잠비크 大使館 勤務 時節 김연식 書記官은 午前 5時에 多急한 連絡을 받았다. 首都 마푸투에서 北쪽으로 2000㎞ 떨어진 都市 펨바에서 ‘韓國 靑年’李 拉致됐다는 電話였다.

    “알고 보니 보이스피싱 詐欺犯들이 父母한테 電話해 拉致劇을 꾸민 거였다. 남아공에서 神學校에 다니는 아들이 갑자기 拉致돼서 生前 들어본 적도 없는 펨바에 있다니까 電話도, 카톡도 안 되는 父母가 얼마나 놀랐겠나. 本部(外交部 在外國民保護과)와 連絡을 주고받으면서 2~3時間 만에 行方을 確認했다. 靑年이 말라리아에 걸려 苦生하던 時期에 벌어진 일이다.”

    長斫 사서 沙漠에서 火葬

    2000年代 中盤 手段에서 50代 中盤의 黃某 氏가 詐欺 事件으로 收監生活을 하다 獄事(獄死)하는 일이 發生했다. 박희채 前 領事는 家族의 連絡을 받고 病院으로 달려갔다. 寢臺 위 흰 천으로 덮인 屍身을 본 그는 憤怒했다. 監獄에서 차고 있던 커다란 쇠사슬이 발목에 그대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擔當 警察을 불러 當場 쇠사슬을 풀라고 소리쳤지만 矯正機關 擔當者는 “意思가 死亡診斷書에 사인을 해야 풀 수 있다”고 버텼다.

    “워낙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는 나라이다보니 亡者(亡者)에 對한 禮儀는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일을 機械的으로 處理했다. 火葬場이 따로 없는 나라인지라 沙漠에서 長斫을 사서 屍身을 化粧했다.”

    黃氏의 아내와 함께 沙漠에서 돌아오자 靑天霹靂 같은 消息이 기다렸다. 詐欺 事件 債權者들이 債務者 黃氏가 죽자 代身 黃氏 아내를 告訴하는 바람에 法院이 朴 前 領事까지 法廷에 出頭하라고 命令한 것. 免責特權이 있는 外交官은 法廷에 안 나가도 되지만, 男便을 잃자마자 拘束될 危機에 놓인 夫人의 處地가 딱했다. 葬禮費도 못 낼 만큼 가진 게 없었다. 朴 前 總領事는 法廷 出頭 前날 緊急救難活動費로 夫人과 아이들 飛行機 티켓을 豫約한 뒤 外交官들이 利用하는 空港 VIP룸으로 家族을 데려갔다. 發覺됐으면 問題가 될 수도 있었다. 마지막 飛行機가 離陸하기 直前 VIP룸을 빠져나와 겨우 飛行機에 태워 보냈다.

    테러, 풍토병은 일상 자식 문제는 ‘금기어’

    서울 國立外交員 1層 로비에 있는 殉職 外交官 이름 銅版. 1972年부터 殉職한 外交官 40名의 이름이 적혔다. 별 하나는 各各의 殉職 外交官을 象徵한다.

    疏外感, 喪失感, 剝奪感…

    緊急救難活動費는 海外에서 大型 事件 · 事故가 發生했을 때 이를 收拾하기 위해서, 또는 緊急 狀況에 處한 在外國民을 支援하기 위해 在外空官이 活用할 수 있는 外交部 豫算이다. 豫算이 많지 않다보니 外交官이 私費를 털어야 하는 일도 種種 發生한다. 이병국 前 大使의 얘기다.

    “海外旅行客 中에 紙匣을 잃어버렸다며 大使館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外交官이 私費를 털어 남은 旅行 期間 동안 쓸 最少 經費나 飛行機 티켓 값을 마련해주면 ‘돌아가서 꼭 갚겠다’ 해놓고 實際로 갚는 사람은 많지 않다. 外交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外交官들에겐 지켜야 할 ‘領事助力範圍’라는 게 있다. 도와주고 싶어도 限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規定을 알려주면 ‘國民 稅金’을 들먹이며 亂離 치는 사람들이 있다. 在外公館 外交官들이 宏壯히 좋은 待接을 받고 駐在國에 相當한 影響力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外交官도 現地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決코 슈퍼맨이 아니다.”

    남상욱 前 大使는 時時刻刻 ‘銃聲 없는 外交戰爭’이 벌어지는 美國을 비롯해 一部 先進國을 除外한 險地 外交官들은 ‘잊힌 存在’라고 말한다.

    “相對的으로 外交 比重이 떨어지고 큰 이슈가 거의 없다보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本部에서도 關心을 덜 쏟는다. 그래서 疏外感과 喪失感을 갖게 되고, 外交官 自身뿐 아니라 家族까지 劣惡한 環境에서 苦生시켜야 하기에 相對的, 心理的 剝奪感에 빠지기도 한다.”

    2009年 6月, 카메룬 大使館에 勤務하던 40代 初盤의 유홍근 參事官이 公務로 一時 歸國했다가 過勞에 依한 心筋梗塞으로 殉職했다. 當時 30代 中盤의 아내와 2歲, 8歲의 男妹를 두고 떠났다. 두 달 앞서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總領事館에 勤務하던 40代 後半의 박호정 領事가 僑民行事 參席 中 心臟痲痹로 死亡했다.

    이들을 包含해 1990年부터 只今까지 殉職한 外交官은 21名에 達한다. 法에 따라 殉職 處理는 되지 못했지만, 지난 4年餘 동안 本部 出張 中 死亡하거나 現地에서 交通事故 等으로 숨진 外交官도 5名에 이른다. 같은 時期 現地에서 박테리아 感染, 低體溫症으로 숨지거나 國內에서 癌으로 숨진 外交官 배우자는 4名이다.

    年間 海外旅行客이 1500萬 名을 넘어섰다. 在外國民과 韓國系 外國人을 合한 在外同胞 數는 700餘萬 名에 達한다. 이들을 위해 在外公館에서 일하는 外交官은 數百 名에 不過하다. 목숨을 건 危險을 甘受하고 적은 人力과 豫算으로 밤낮없이 뛰어야 하는 그들의 어깨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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