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誇示보다 實속 地位보다 餘裕|新東亞

誇示보다 實속 地位보다 餘裕

川 ‘하늘의 庫間’

  • 글 · 寫眞 김용한 | 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5-09-23 10:42: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덩샤오핑과 쓰촨 料理의 共通點은 ‘實속’에 있다. 쓰촨 出身 덩샤오핑은 흰色이든 검은色이든 그저 ‘쥐 잘 잡는 고양이’가 되고자 했고, 쓰촨 料理는 돼지고기 · 豆腐 · 가지 等 흔한 材料로 한 끼 食單을 푸짐하게 만든다. 쓰촨의 ‘實用’은 效率보다는 삶의 ‘潤澤’에 가깝다. 來日의 中國에 重要한 힌트를 주는 것은 分明 쓰촨이리라.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

    청두市場 푸줏間에서 만난 商人.

    쓰촨 아가씨들은 무척 사랑스럽다. 美貌도 美貌지만 잘 웃고 性格이 시원시원해서 더 예뻐 보인다. 게다가 어떤 主題든 對話를 繼續 즐겁게 이어가는 재주가 있다. 宿所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 故鄕이 어디냐고 묻자 그女는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쯔궁(自貢)’이라고 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우리 故鄕은 恐龍이 發見된 것으로 有名한데, 中國에서는 못생긴 女子를 恐龍이라 부르거든요. 그래서 우리 洞네 女子들에겐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있어요.”

    그 말이 謙遜한 弄談으로 들릴 만큼 그女는 예뻤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나보다.

    “베이징에 가면 自身의 地位가 낮음을 깨닫게 되고, 쓰촨에 가면 自身이 너무 빨리 結婚했음을 깨닫게 된다.”



    天府之國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
    쓰촨 女子를 ‘촨메이쯔(川妹子)’라고 한다. 江가에 사는 누이同生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 別稱이 아깝지 않게 쓰촨 女子들은 江물이 흐르듯 豁達하고 냇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조잘거린다. 쓰촨省의 略稱 ‘내 千(川)’과 참 잘 어울린다. 쓰촨(四川)은 宋代 行政區域인 淺狹死로(川陝四路)의 줄임말이다. 長江(長江), 閩薑(岷江), 타강(他;江), 嘉陵江(嘉陵江)의 4줄기 江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說도 있다.

    쓰촨은 險峻한 山속에 巨大한 平野가 있는 盆地다. 豐富한 江물이 땅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氣候가 溫和해 온갖 動植物이 잘 자란다. 굳게 닫혀 있지만 막상 門을 열면 豐富한 物産이 넘쳐나는 곳이라 天府之國(天府之國), 卽 ‘하늘의 庫間’이라 불렸다. 얼마나 物産이 豐富해야 하늘의 庫間이 될 수 있을까. ‘戰國策(戰國策)’은 말한다. “田畓이 肥沃하고 좋으며, 百姓이 많고 財物이 豐富하며, 萬 勝의 電車를 具備해 떨쳐 일어나면 百萬大軍을 일으킬 수 있고, 肥沃한 曠野가 千 里나 뻗어 있고, 蓄積된 財物이 넉넉하며, 地勢가 便安한 곳을 일러 千部(天府)라고 할 수 있다.”

    이토록 좋은 땅에 鏃인(蜀人)들이 살았다. 쓰촨의 또 다른 略稱 ‘나라이름 燭(蜀)’은 벌레가 머리로 실을 吐해내는 模樣을 본뜬 글字로, 元來 누에를 뜻했다. 觸人들이 누에를 崇尙한 것에서 斟酌할 수 있듯 觸에선 일찍이 養蠶業이 發達했다.

    풍요로운 經濟 德分에 蜀은 尙州(商周) 時代에 이미 高度의 청동문名을 발달시켰다. 鏃의 三星堆 都城은 上나라의 初期 都城보다 크고 中企 都城과 비슷하다. 三星堆의 遺物은 중원의 遺物과 判異하다. 上의 遺物이 抽象化한 幾何學的 文樣의 提起(祭器)인 데 反해 鏃의 遺物은 사람, 새 等의 모습을 생생하게 表現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靑銅像 等 規模도 크고 造形美도 뛰어난 三星堆 遺物을 보면 鏃의 卓越한 藝術과 精巧한 技術에 感歎하게 된다. 부리부리한 눈의 靑銅像은 中院보다는 오히려 摩耶 文明을 聯想케 한다.

    이를 綜合해보면 鏃의 國力은 中原을 凌駕할 程度였고, 獨創的 文明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잠銃과 漁夫, 나라 세운 지 얼마나 아득한가. 그로부터 社萬八千 年 동안 秦나라와 서로 往來하지 않았네.” 李白의 노래가 誇張되기는 했지만, 鏃이 獨自的인 긴 歷史를 가진 것은 事實이다.

    項羽를 죽인 땅

    上나라는 周邊 나라에서 掠奪을 일삼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新興 强國 周나라는 이들과 同盟을 맺고 賞을 征伐한다. ‘上書(商書)’에 따르면 “武王이 賞을 征伐하는 데 파촉의 도움을 받았다. 파촉의 軍士들이 앞과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上군은 窓을 거꾸로 들고 降伏했다.”

    그러나 중원을 掌握하자 周나라는 咫尺에 있는 强國 鏃이 不便했다. 주는 賞을 征伐한 지 不過 37日 만에 鏃을 攻擊한다. 그러나 征伐하지는 못했고, 800年 뒤에 오히려 먼저 亡한다. 蜀은 春秋戰國時代까지 이어져 秦나라 때에야 復屬된다. ‘天下가 어지러워지기 前에 鏃에 먼저 亂離가 나고, 天下가 다스려져도 蜀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傳統이 이미 이때부터 確立된 듯하다.

    强兵을 자랑하던 珍島 鏃을 征伐하기는 쉽진 않았다. 傳說에 따르면 晉은 鏃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소 石像을 만들고 꼬리에 金을 입혀 ‘金똥을 싸는 소’라고 所聞을 내며 鏃의 國境 앞에 갖다놓았다. 觸왕이 소를 가져오느라 秦나라까지 길을 뚫자 진은 이 길을 통해 鏃을 征伐했다. 鏃이 스스로 길을 열어주지 않는 限 外部에서 뚫고 들어가기란 거의 不可能했음을 보여주는 傳說이다.

    鏃의 豐富한 物資는 津이 天下統一을 이룩한 原動力이 됐다. 史書에 따르면 “촉나라가 歸屬되자 秦나라는 더욱 强力해졌고, 財源이 豐富해 諸侯들을 우습게 여겼”으니 “秦나라의 6國 倂合은 촉나라로부터 始作됐다.”

    그러나 如前히 많은 中原因은 鏃을 山속의 奧地로만 여겼다. 項羽는 天下를 掌握한 뒤 눈엣가시인 乳房을 鏃으로 보냈다. 蜀은 ‘山勢가 險하고 낭떠러지에 에워싸여 나는 새들도 쉬지 않으면 넘지 못하는 곳’으로 ‘죽으러 들어가는 땅이니 아마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劉邦은 오히려 鏃에 숨어서 勢力을 키울 수 있었다. 項羽가 팽성戰鬪에서 3萬 精兵으로 劉邦의 六十萬 大軍을 박살냈을 때, 蕭何는 鏃의 物資를 最大限 活用해 劉邦이 빠른 時間 內에 再起하는 것을 도왔고, 乳房은 垓下戰鬪로 期於이 項羽를 制壓했다. 劉邦을 죽이려고 보낸 땅이 도리어 項羽를 죽인 꼴이 됐다.

    項羽에게 連戰連敗하다가 單 한 番의 싸움으로 大勢를 뒤집자 後漢 末에 ‘어게인(again) 垓下戰鬪’를 꿈꾼 英雄들이 登場한다. 바로 諸葛亮과 劉備다. 一世의 梟雄으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변변한 勢力을 만들지 못하고 떠돌던 劉備는 三顧草廬 끝에 諸葛亮을 만난다. 物産이 豐富한 익주(쓰촨)와 戰略的 要旨인 형주(후베이)를 얻으면 曹操, 孫權과 능히 견줄 수 있다는 天下三分持戒에 따라 劉備는 蜀漢(蜀漢)의 皇帝가 됐다. 後날 蜀漢은 형주를 잃고 勢力이 크게 꺾였지만, 쓰촨 하나만으로도 중원을 차지한 위의 肝膽을 서늘하게 했다.

    內陸 깊숙이 位置한 ‘하늘의 庫間’은 近現代 中國에도 매우 重要하다. 日本이 滿洲, 상하이를 始作으로 中國을 急速히 蠶食해오자 國民黨은 충칭(當時 쓰촨省)에 臨時政府를 세웠다. 쓰촨은 日本軍이 쳐들어오기 힘들고 物産이 豐富하기에 든든한 後方이었다. 올해 中國이 抗日戰爭 勝利 70周年을 맞은 것도 쓰촨의 功이 크다.

    바보 셋이 諸葛亮보다 낫다

    後날 共産黨이 國民黨을 몰아내고 大陸을 차지했을 때, 中國의 重要 工業地帶는 모두 沿海에 있었다. 沿海는 韓國, 日本, 臺灣, 필리핀 等 美國의 勢力圈과 맞닿아 있기에 萬若 戰爭이 일어난다면 中國은 瞬息間에 모든 生産能力을 잃어버릴 판이었다. 그래서 共産黨은 沿海 生産基地의 一部를 쓰촨으로 옮겨 戰略工業地帶로 育成했다.

    마침 6 · 25戰爭, 베트남戰爭 等이 연달아 일어났기에 쓰촨의 軍需工場은 相當한 好況을 누렸고, 勞動者에 對한 待遇도 當時 中國 基準으로는 매우 좋았다. 磁場커 監督의 映畫 ‘24시티(二十四城記)’에 따르면, 3000萬 名 以上이 굶어죽은 文化大革命(大躍進運動) 때도 이 地域 勞動者에게는 每달 2根의 고기가 配給됐고, 勞動者 父母는 子息이 大學에 가지 말고 平生 이곳의 勞動者로 살기를 바랐다.

    戰略的으로 그처럼 重要한 땅이지만, 정작 쓰촨人들은 매우 平穩하다. 오랜 歲月 동안 산이 天下의 亂離를 막아주고, 戰爭이 나더라도 後方 포지션이었기 때문인가. 쓰촨 旅行 中 스페인 親舊 하비에르를 만났다. 그는 쓰촨에 反해 쓰촨에서 스페인語 講師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는 “普通 西洋人들은 中國人들이 시끄럽다고 싫어하는데, 나는 오히려 便해. 아마 스페인人들度 中國人들처럼 시끌벅적하기 때문인가 봐”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쓰촨認이나 스페인人이나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共通點이 있다. 社交的, 外向的, 樂天的인 性格도 비슷하다. 다만 華麗한 立서비스로 끝나기 일쑤인 라틴系보다는 쓰촨人들이 더 誠實하고 約束도 잘 지키는 便이다.

    中國의 큰 都市는 어디에나 人民公園이 있지만, 쓰촨省 聖徒(省都)인 청두(成都)의 人民公園이 가장 個性的이다. 구김살 없고 疏脫한 청두人들이 노는 모습이 무척 흥겹다. 싸이의 ‘江南스타일’에 맞춰 아저씨, 아줌마들이 말춤을 추다가 패션쇼 스타일의 音樂이 나오니 폼을 재며 레드 카펫을 밟는다. 新鮮하고 愉快한 패션쇼 워킹이었다. ‘나는 내 人生의 主人公’이라는 所信을 堂堂하고 유머러스하게 보여줬다. 한便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요가, 書藝, 合唱 等 自己만의 世界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勿論 이들을 한가롭게 바라보며 茶 한盞을 즐기고 按摩와 귀淸掃를 받는 사람도 많았다.

    쓰촨人들은 諸葛亮을 崇尙하지만 ‘바보 셋이 모이면 諸葛亮보다 낫다(三個臭皮匠,頂個諸葛亮)’고도 말한다. 素朴한 生活 속에서 길러진 民草들의 自信感이 大陸의 歷史를 바꿔왔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

    古代 촉나라는 獨創的이고 精巧한 三星堆 文化를 꽃피웠다. 청두 眞藏(錦江)의 夜景, 人民公園에서 유머러스한 패션쇼를 벌이는 쓰촨 사람들(왼쪽부터).

    쓰촨의 文化 코드 ‘實속’

    쓰촨의 자랑 中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쓰촨 料理[川菜]다. 韓國人들이 中國에 와서 힘들어하는 것 中 하나가 너무 느끼하고 기름이 많은 中國 料理다. 그러나 매콤한 쓰촨 料理는 韓國人의 입맛에 잘 맞는다. 매콤함이 기름의 느끼함을 없애주고 告訴한 감칠맛을 살린다.

    쓰촨 料理는 材料가 싸고 求하기 쉬우며, 簡便하고 迅速하게 調理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맛과 營養까지 좋다. 家庭食으로도 最適의 條件이다. 여기서 쓰촨의 重要한 文化 코드인 ‘實속’을 發見할 수 있다. 珍貴한 中國 料理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둥 料理다. 中國의 料理 映畫에서 볼 수 있듯 곰 발바닥, 상어 지느러미, 원숭이 골 等 稀罕한 材料를 彫刻하듯 멋있게 차려낸다. 그러나 쓰촨 料理는 豆腐, 돼지고기, 가지 等 흔하디흔한 材料를 쓴 麻婆豆腐, 回果肉, 가지볶음 等이 代表的이다. 料理 初步者도 簡單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래서 中國人들은 말한다. “體面치레로 待接하려면 광둥 料理를 시키고, 實속 있게 먹으려면 쓰촨 料理를 시켜라.”

    中原이 내가 얼마나 잘나가는지를 天下에 널리 알리는 데 汨沒한다면, 山 속의 쓰촨은 天下가 알아주든 말든 조용히 實속을 차렸다. 매콤한 三겹살 볶음이라 韓國人이 特히 좋아하는 回果肉(回鍋肉)은 元來 먹다 남은 고기를 어떻게 새 고기 못지않게 맛있게 먹을까를 窮理하다 나온 料理다. 솥에서 나온 고기(肉)가 다시 솥(鍋)으로 돌아가니(回) 回果肉이다. 物産이 豐富해도 浪費하지 않고 誇示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內實 있게 살 수 있다.

    中原이 오랑캐들에게 自身의 힘을 誇示하는 萬里長城을 쌓은 反面, 쓰촨은 2200年 前에 巨大한 水利施設 渡江언을 만들었다. 萬里長城은 戰時 狀況이 아닌 平時에는 겉치레에 不過하지만, 渡江언은 2000年 넘는 歲月 동안 展示에도 平時에도 豐富한 作物을 膳賜했다. 中原이 龍이나 虎狼이를 崇尙할 때 鏃이 崇尙한 것은 누에다. 폼 나는 動物보다 보잘것없어 보여도 緋緞을 만드는 누에를 崇尙한 것도 實속을 重視하는 쓰촨人의 特性을 잘 보여준다.

    諸葛亮이 쓰촨人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實속과 無關하지 않다. 그는 天才 戰略家 以前에 名宰相이었다. 渡江讞議 水利施設을 補强해 “平年만 돼도 다른 곳의 豐年이요, 凶年도 다른 곳의 平年”李 되도록 했다. 諸葛亮은 鏃의 特産物인 非但 生産을 奬勵하고 染色 工程을 改良했다. 敵對國인 위마저 觸禁(蜀錦)을 輸入했으니, 위의 돈이 位를 치는 軍資金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諸葛亮의 祠堂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緋緞 職朝貢들이 모여 살던 緋緞마을 眞理(錦里) 距離인 것도 諸葛亮과 緋緞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준다.

    또한 諸葛亮은 製鹽, 製鐵業을 育成해 經濟를 발전시켰고, 公平無私한 法執行을 통해 賞을 줘도 猜忌하는 이가 없고 罰을 받아도 抑鬱해하는 이가 없었다. 諸葛亮이 軍事 天才이기만 했다면 決코 오늘처럼 뭇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淸나라 哲學者 王夫之(王夫之)의 評價대로 “軍士를 잘 統率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統率했고, 百姓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政治가 便安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便安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豐足하게 했다.”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

    동틀 무렵 我眉山의 金井(金頂), 쓰촨 어린이의 밝은 微笑.



    哲學 없는 哲學

    實속을 重視하는 쓰촨이 輩出한 또 다른 큰 人物은 바로 덩샤오핑(鄧小平)이다. 이름부터가 얼마나 素朴한가. ‘작고 平凡한 덩氏’라는 뜻이니. 이름값 하듯 덩샤오핑은 150cm의 雅淡한 키에 질그릇처럼 투박했다. 그에게는 後難人 마오쩌둥의 威風度, 장쑤人 저우언라이의 遵守함도 없었다.

    덩은 中國共産黨의 草創期 멤버로서 거의 平生을 共産黨과 榮辱을 함께했다. 그 過程에서 軍事, 政治, 外交 等 다양한 일을 해냈지만, 事實 어떤 分野에도 專門家가 아니었다. 改革 · 開放을 이끌었으니 經濟에 밝을 거라는 印象과 달리 덩샤오핑은 “나는 經濟學 分野에 門外漢”이라고 自認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大勢와 核心을 把握하고, 單 한마디의 슬로건으로 表現하는 일에 能했다. 抗日戰爭 時期에 덩은 “먹을 것을 가진 者가 結局 모든 것을 가진 者”라고 말했고, 經濟가 疲弊해진 大躍進運動 때는 “흰色이든 검은色이든 무슨 相關인가.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며 核心을 찔렀다.

    그의 政策은 複雜한 計算이 아니라 明快한 常識을 통해 나왔고, 適切한 人事管理를 통해 推進됐다. 모든 일에 大勢와 사람들의 欲求를 따랐고, 自身은 물꼬를 트고 水位를 調節하는 일에 힘썼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그리 힘들여 일하지 않고 周圍를 닦달하지 않으면서도 卓越한 成果를 거뒀다. 中國 帝王學에서 强調하는 ‘無爲의 치(無爲之治)’를 實踐한 셈이다.

    덩샤오핑은 政治的 安定을 重視해 “오직 社會主義만이 中國을 求할 수 있다”고 主張하기는 했지만, 其實 그 自身은 특정한 注意와 思想에 傾倒되지 않았다. 生死를 넘나드는 大長程 中에도 ‘資治通鑑’을 愛讀했고, 詩를 즐겨 지었으며, 思想的 武裝에도 透徹했던 마오쩌둥과 달리 덩은 歷史와 古典, 史上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社會主義에서 絶對的 權威를 지닌 마르크스, 엥겔스에 對해서도 留保的인 評價를 내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난 世紀의 사람들이다.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오늘날 우리의 모든 問題를 풀어줄 것이라고 期待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마오쩌둥의 故鄕 湖南省에서 社會主義 敎育에 힘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슬쩍 비꼬기도 했다. “社會主義 敎育이라고? 敎育에 參與하는 人民들을 먼저 잘 먹여서 굶주리지 않게 해주게.”

    덩샤오핑이 外交 路線을 闡明한 24字 方針에는 그 어떤 思想과 價値도 찾아볼 수 없다. 外交政策이라기보다 오히려 東洋 處世術의 核心을 要約한 듯하다. ‘狀況을 차분하게 觀察하고, 우리 自身의 立地를 지키며, 신중하게 對處하고 때가 이르기 前까지 自己를 露出하지 않으며, 굳게 지키고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런 點에서 實用主義가 ‘理論 없는 理論’인 것처럼 덩샤오핑注意가 ‘哲學 없는 哲學’이라는 評價는 꽤 適切하다. 덩 自身도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가 되기보다는 쥐를 잘 잡는 고양이이기를 바랐을 것이다.

    眞正한 奢侈

    덩의 性格 亦是 쓰촨仁義 實用主義와 無關하지 않다. 덩샤오핑이 少年 時節 同鄕 親舊들과 함께 프랑스 留學을 갈 때 상하이 租界地에서 ‘中國人과 개는 出入禁止’란 牌말을 보았다. 한 少年이 激忿해 牌말을 떼어버리려고 했다. “여기는 中國 땅인데 中國人들을 개처럼 取扱하다니!” 그러나 다른 親舊 한 名이 말렸다. “바보 같으니라구! 그 빌어먹을 나무彫刻 하나 떼버린다고 問題가 다 解決되니?” 이름에 執着하지 않고 冷靜하게 現實을 바라보는 쓰촨人다운 態度다.

    그런데 쓰촨의 實用主義와 資本主義的 實用主義는 다른 側面이 있다. 資本主義는 最大限의 效率, 最大限의 速度를 强調한다. 일찍 改革 · 開放을 한 광둥省이나 상하이는 資本主義的 實用主義가 强한 便이다. 그러나 쓰촨의 實用主義는 삶을 보다 潤澤하게 만들기 위한 實用主義다. 무엇을 위해 잘살려고 하는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飮食을 먹고 즐거운 對話를 나누면 그만이다.

    따라서 쓰촨의 實用主義는 最大限 돈을 버는 것에 있지 않다. 주어진 與件에 따라 適當히 돈을 벌고 不必要한 浪費는 하지 않되 人生을 누릴 수 있는 일에는 아낌없이 紙匣을 연다. 史書에 따르면 觸人들은 예부터 “農事에 부지런하고 奢侈하기를 바라며 文學을 尊重하고 娛樂을 좋아한다” “音樂을 좋아하고 苦悶을 적게 하며 奢侈하기를 즐기고 虛荒된 稱讚에 기뻐한다”고 했다.

    그러나 쓰촨人이 鎭靜 奢侈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時間, 人生의 唯一한 資源인 時間이다. 旅行은 目的地에 到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旅程 自體가 重要한 經驗이다. 마찬가지로 人生 亦是 하나의 특정한 目的, 富貴榮華를 누리기 위해 살기보다 삶의 每 瞬間 瞬間을 즐겁게 보낼 때 한결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그래서 바쁘게 살아가는 中國人들은 쓰촨에 반한다. “이렇게 느긋할 수가(好安逸)?!”라며 왜 바쁘게 살아야 했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살던 自身의 人生을 되짚어본다. 中國은 그동안 急速한 成長을 이뤘지만 그 渦中에 疲勞와 고단함도 深刻하게 쌓였다. 이제 삶의 質을 되돌아보기 始作한 中國人들은 쓰촨省을 注目한다.

    ‘主觀的 指標’ 優秀한 都市

    2014年 베이징대에서 卒業生을 對象으로 가고 싶은 都市를 設問調査한 結果 청두는 상하이, 宣傳을 앞질러 3位를 차지했다. 아시아開發銀行의 居住 適合度 調査에서 청두는 中國 33個 都市 中 1位였다. 청두는 大氣, 水質, 環境管理 等 客觀的 指標와 快適함, 여유로움, 느린 生活리듬 等 主觀的 指標가 모두 優秀한 都市다. 쓰촨의 자랑인 料理는 두말할 나위가 있을까. 인터넷 포털 텅쉰(騰訊)李 2013年 1000萬餘 네티즌에게 幸福도 調査를 했을 때, 飮食 領域에서는 쓰촨이 斷然 1等을 차지했다.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
    김용한

    1976年 서울 出生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한 푼의 돈을 더 벌기보다 한 마디의 말을 사람들과 더 나누려고 하는 곳, 한 等級 위의 地位를 탐하기보다 茶 한 盞의 餘裕를 누리려 하는 곳. 쓰촨은 來日의 中國에 重要한 힌트를 줄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