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俳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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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出生 1970年 11月 17日 ( 1970-11-17 )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恩平區
死亡 2010年 3月 29日 ( 2010-03-29 ) (39歲)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江南區 論峴洞
國籍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職業 俳優 , 歌手
活動 期間 1990年 ~ 2010年
宗敎 改新敎 ( 浸禮敎 )
親戚 5寸 堂叔 최상현 [1]
6寸 兄 崔宰誠
兄弟姊妹 최진실 (누나)
配偶者 없음(미혼)

최진영 (崔眞永, 1970年 11月 17日 ~ 2010年 3月 29日 )은 大韓民國 俳優 利子 歌手 이다. 廣告 界, 映畫 界, 放送 界, 音樂 界, 演劇 契 等 多樣한 分野에서 活動했다. [2] [3]

高等學校 1學年 때부터 廣告 모델 等으로 活動하다가 映畫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1990年 )에 助演으로 出演하면서 本格的인 俳優의 길을 걷게 되었다. 以後 俳優로서 TV 드라마로 活動 領域을 넓혔고 演劇 舞臺에도 섰다. 1999年 부터는 歌手 로서도 活動하였다.

최진영과 최진실은 大韓民國의 代表的인 男妹 俳優였다. 이들은 남다른 友愛로 有名했고, 演藝界 生活을 먼저 經驗한 최진영은 俳優 최진실 의 成功에 決定的인 役割을 하였다. 최진실이 2008年 41歲 로 갑작스럽게 世上을 떠났고, 최진영 또한 2010年 40歲 로 갑작스럽게 世上을 떠나면서 大韓民國 社會에 큰 衝擊을 주었다. [4] [5] [6] [7]

生涯 [ 編輯 ]

學歷 [ 編輯 ]

幼年期 및 靑少年期 [ 編輯 ]

1970年 11月 3日 , 서울特別市 恩平區 에서 아버지 최국현과 어머니 정옥숙 사이에서 1男 1女 中 둘째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누나는 俳優 최진실 이다. 俳優 崔宰誠 과는 6寸 關係이고 최재성의 아버지이자 최국현의 四寸 兄인 최상현은 演劇 俳優 出身의 KBS 드라마 演出家였다. 경복고등학교 在學 時節 演劇 동아리에서 活動했던 최국현은 KBS 탤런트 公採 試驗에 合格하기도 했으나 警察 公務員이었던 최진영의 할아버지의 反對에 부딪혀 俳優의 꿈을 접었다고 한다. 최상현이 최국현을 돕기 위해 三寸을 說得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9] [10] 최진영의 外祖父는 朝鮮人民軍 에 協力했다는 嫌疑로 報國隊에 끌러가 몇일 동안 拷問을 받았다.

그의 外叔父는 小說家였다.

누나 慰勞 異腹兄弟가 두 名 있다. 創作과 그림에 素質이 있던 美容師 정옥숙은 1968年 9月 28日 9살 年上이자 택시 運轉士 최국현과 結婚 하였고 최국현에게 따로 子息이 둘이나 있다는 事實을 結婚 後에 알게 되었다. [7] 최진영이 태어나던 해에 최국현이 結核性 肋膜炎에 걸려 앓아눕게 되고 그러면서 所有하던 택시를 팔 程度로 家産이 急激히 기울게 되었다. 健康 回復 後 최국현이 中東에 勞動者로 나가 있는 期間에 부쳐오는 돈으로 정옥숙이 집도 장만하고 經濟的으로 暫時 安定되었는데 中東에서 돌아온 최국현이 노름과 事業에 빠지면서 家産을 蕩盡하게 되었다. 최진실은 偏愛하고 최진영은 虐待하던 최국현은 최진영이 中學校 3學年 때인 1985年 에 家出하였고 13年 後인 1998年 10月 에 정옥숙은 최국현과 離婚했다. 정옥숙은 子女 돌봄 勞動을 專擔하다가 최진실과 최진영이 社會的, 經濟的으로 安定되었을 때 非혼자 로 復歸한 것이었다. 이는 頂上 家族 神話가 澎湃한 社會에서 父母들이 흔히 보이는 態度여서 정옥숙만의 특별한 모습은 아니었다. 최진실과 최진영은 정옥숙의 寄與에 對해 充分히 補償했다. 최진영은 최국현의 正祖 義務 違反, 暴力, 兒童虐待 等에 對해 否定的으로 評價했고 그것을 보고 자란 自身이 或是 최국현을 따라할 수 있어 警覺心을 갖고 살고자 非혼자, 無子女子 포지션을 堅持했다. [10] [11]

돈을 벌면 그 돈 들고 定期的으로 短期 家出을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언제나 女子 하나 달고 나타나던 최국현이 1985年 에는 完全히 家出해버리자 정옥숙은 本格的으로 돈벌이에 나서게 되었다. 經濟共同體를 재결성하게 된 정옥숙은 化粧品 外販員, 布帳馬車 運營을 하게 되고 高等學校 2學年이던 최진실도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安定된 잠자리도 確保하지 못하던 時節이라 中學校 3學年이던 최진영度 露宿을 轉轉하다 暫時 工場에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 쇠를 깎는 機械에 다리를 다치기도 하였다. 以後 高等學校 1學年이 되면서 6寸 兄 최재성의 도움으로 廣告 모델 이 되었고 이 일을 하며 정옥숙이나 최진실보다 收入이 괜찮아 家族의 生計 를 책임진다는 姿勢로 모델 일에 성실하게 臨하게 되고 高等學校 3學年 때는 최진실의 演藝界 入門에도 좋은 助言者가 되어 주는 位置에 이르게 되었다. 暫時 노숙하던 時期에 주머니에 얼마間 돈이 있어 빵을 사서 먹고 있는데 周邊 露宿人들이 自身을 부럽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自身은 그래도 살만하구나라고 느꼈고 삶의 意志를 다졌다고 한다. [12] [13] [7]

최진영은 어린시절부터 기타 連奏 習得에 熱情을 보이는 等 音樂 에 興味가 있었고 노래에 素質이 있었으며 歌手 조용필 을 憧憬하였고 有名한 歌手들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것을 즐겼는데, 周圍 사람들로부터 허스키한 목소리가 魅力的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7] 최진영은 1992年 MBC 土曜日 土曜日은 즐거워 》에서 조용필을 만날 機會가 있었는데, 최진영은 俳優로서 舞臺에서 노래 한 曲을 하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본 조용필이 최진영에게 "너 노래할 생각 없니? 네가 노래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내가 製作을 하겠다"라는 提案을 하기도 하였다. [14] [15]

최진실이 노래는 잘 못하고 그림을 잘 그린 反面 최진영은 그림은 잘 못그리고 노래를 잘했다. 그래서 宿題로 그림을 그려야 할 때 최진영은 최진실의 도움을 받는 境遇가 많았고 최진실은 최진영의 노래를 듣는 것을 즐겼다. 최진영은 최진실의 그림 實力을 부러워했고 최진실은 최진영의 노래 實力을 부러워했다. 최진영은 試驗 期間에 놀 것은 다 놀면서도 成績이 좋아 試驗 準備하느라 바쁜 최진실은 최진영의 머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최진실은 최국현이 自身은 偏愛하면서 최진영은 괴롭힌 것을 否定的으로 評價했다. 하지만 최진영이 머리가 좋은 것은 최국현의 惡辣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보니 그렇게 된 面이 있다고 意味를 짚기도 했다. 최진실은 學校에서 빵을 받으면 半쪽은 꼭 집으로 가져와 최진영에게 먹이곤 했다. 최진영은 1988年 최진실의 프로필 寫眞도 찍어주고 그 寫眞들로 모델 에이전시에 弘報도 다니며 최진실 時代를 여는 데 決定的 役割을 했다.

최진영은 최진실과 演技를 하며 잘 놀았다. 그렇게 平素에 練習해둔 것을 名節 때 親戚들을 앞에 두고 公演을 하곤 했다. 최진영이 中學生일 때 최재성은 KBS 1TV 高校生 日記 》에 出演하고 있었다. 최진영과 최진실은 서로에게 좋은 演技 파트너였고 이에 둘은 1986年 KBS 탤런트 公採 試驗에 合格하기도 했으나 6個月 過程의 硏修費 38萬 원을 마련하지 못해 그 커리어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진영은 結局 4年 後에 俳優의 길을 걷게 되었다. 최진영과 최진실은 喜怒哀樂을 함께 나누면서 一生동안 精神的으로 깊은 交感을 나누었다. [7]

靑年期 以後 [ 編輯 ]

活動 槪要 [ 編輯 ]

死亡 [ 編輯 ]

최진영은 누나 최진실 의 生前에도 누나를 도와 조카들의 養育에 힘을 썼고 [42] [43] , 최진실의 死後에도 [44] [45] 어머니와 함께 최진실의 두 子女를 養育했다 [46] [47] [48] .

2009年 5月 28日 에 大法官 박시환 은 暴行과 輿論造作 被害者 최진실 한테 損害賠償請求를 한 訴訟의 原告 敗訴 判決을 내렸던 2審에 對해 破棄還送 判決을 내렸고 2010年 2月 9日 이대경 은 박시환의 判決 內容을 反映하여 原告 一部 勝訴 判決을 내렸다. 人權團體는 박시환이 최환희, 최준희를 攻擊하는 判決을 내렸다고 非難했다. 暴行犯이자 輿論造作犯 손을 들어준 셈이 된 이 判決이 있은 後 48日째가 되는 날인 2010年 3月 29日 최진영은 自宅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9] 直接 死因은 頸部壓迫窒息死이고 [50] , 遺族들의 要求로 剖檢은 하지 않았다. [51] [52] [53]

2010年 3月 31日 發靷式을 갖고 한양대학교 路祭를 거쳐 [54] [55] 京畿道 城南市立昇華원에서 化粧되어 競技도 楊平郡 양수리 에 있는 甲山公園 內 최진실 곁 家廟(假墓)에 安葬되었다. [56] 최진영의 影幀 寫眞은 俳優이자 寫眞作家인 조민기 의 作品으로, 演劇 《 한여름 밤의 꿈 》( 2009年 )의 弘報用 寫眞이었다. [57]

2010年 4月 2日 甲山公園에서 최진영의 三虞祭 가 있었다. [58] 2010年 5月 16日 甲山公園에서 최진영의 四十九齋 가 있었다. [59]

2010年 7月 6日 事後 100日째 되는 날을 맞아 正式墓에 재안장되었다. 家廟로 安葬된 곳에서 2m假量 자리를 옮겨서 최진실 곁에 좀 더 가까이 位置하도록 措置되었다. 各自의 碑石에 새겨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構圖로 配置되었다. 納骨墓 上段에 얹어진 최진영의 碑石에는 "나 언제라도 저 하늘이 날 부를 때 限없이 사랑했던 追憶만은 가져갈게"라는 최진영의 歌手 데뷔曲 ‘永遠’의 歌詞와 樂譜도 새겨졌다. [60] [61]

追慕 [ 編輯 ]

2010年 3月 29日 최진영의 미니홈피 에 100萬餘 名의 네티즌 들이 訪問하였고, 많은 이들이 芳名錄에 追慕글을 남겼다. 트위터 에는 최진실 ·최진영 男妹의 온라인 合同 焚香所가 마련되어 네티즌의 온라인 追慕歌 이뤄졌다. 최진영은 20餘 年 동안 演藝界 生活을 하면서 크고 작게 虛僞事實 流布를 겪었는데, 누나 최진실의 死亡 後에도 惡性 루머와 惡性 댓글 等에 시달렸다. [62] [63] [64] [65] [66] [67] 그 일에 對해 뒤늦은 謝過의 글을 올리는 네티즌도 있었다. [68] [69] [70] [71]

최진영의 葬禮式場에 參席한 밴드 < 復活 >의 리더 金兌原 은 "個人的으로 아름다운 親舊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최진영을 回想하였고, 그의 죽음에 哀悼를 표했다. 김태원은 최진영에게 '白夜'라는 曲을 주었던 因緣이 있었다. [72] [73]

2010年 3月 30日 Mnet 와이드 演藝뉴스 》가 최진영을 追慕하기 위해 <최진영 히스토리>篇을 放送했다. [74]

2010年 4月 1日 歌手이자 寫眞作家인 빽가 (本名 백성현)는 최진영의 未公開 寫眞 18張을 自身의 미니홈피에 公開하며 최진영을 追慕했다. [75]

최진실 事後 發生한 事件 [ 編輯 ]

  • 2008年 10月 2日 누나 최진실 의 死亡으로 최진실의 두 子女는 遺産을 相續받게 되었는데, 조성민 이 그 遺産을 管理하는 것에 對해 權利를 行使하려고 하면서 조성민에게 그럴 資格이 있느냐를 두고 社會的 論難이 일었다. 過去 최진실이나 최진실의 子女에 對해 違法行爲를 저지른 事實이 言論 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을 뿐만 아니라 2008年 10月號 女性雜誌를 통해 최진실의 두 子女에 對해 面接交涉의 義務 를 履行한 바 없다고 말하고 履行하지 않겠다는 뜻을 積極的으로 表現하는 行爲도 하였는데, 이는 該當 兒童들의 面接交涉權을 公共財 機能을 하는 言論을 통해 侵害하는 行爲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이다. [76] [77] [78] [79] [80] 조성민은 言論을 통해 "流産 內譯을 알고 싶다. 遺産이 第3者에 依해 管理되기를 바란다"라는 自身의 立場을 밝혔다. [81] [82] 2008年 12月 8日 조성민은 自身의 立場을 撤回하는 記者會見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養育權, 法律行爲 代理權, 財産管理權 等을 辭退하는 法的 節次를 밟을 것이다"라는 自身의 立場을 밝혔다. [83] 이로써 이 問題는 司法機關 의 介入 없이 一段落되었다. 최진영의 어머니 정옥숙이 養育權, 法律行爲代理權, 財産管理權을 가졌다. [84] [85] [86]
  • 2004年 8月 1日 최진실은 조성민으로부터 家庭暴力 의 被害를 當했고 雙方暴行이라는 조성민의 主張에 解明·反駁하기 위해 自身의 멍든 얼굴을 言論에 公開하였으며 [90] [91] , 이로 인해 廣告主로부터 損害賠償請求訴訟을 當했다. [92] 이 事件은 최진실 生前에 1審에서 原告 一部 勝訴 判決을 받았고 2審에서 原告 敗訴 判決을 받았으며 2審 判決에 不服한 廣告主가 上告한 狀態라서 최진실 死亡時에는 3審 裁判이 進行 中이었다. 2009年 5月 28日 大法院 은 破棄還送 判決을 내렸으며, 2010年 2月 9日 서울高等法院 은 이 事件에 對해 原告 一部 勝訴 判決을 내렸다. [93] [94] [95] [96]

事後 發生한 事件 [ 編輯 ]

墓地 詐欺 [ 編輯 ]

2011年 7月 18日 , MBC 氣分 좋은 날 》은 최진실 과 최진영 男妹의 墓地가 强制 里長 危機에 處해 있는 狀況을 放送했다. 楊平郡 淸의 測量 結果, 최진실과 최진영의 墓地가 開發 制限 區域 內에 位置해 있다는 事實이 밝혀졌다. [97] 한便, 甲山公園 財團은 최진실이 安葬되어있다는 事實을 弘報에 利用하고, 이 廣告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不法 墓地 자리를 明堂 자리로 속여서 分讓하여 42億 원의 不當 利益을 챙겼다. 2011年 7月 12日 , 楊平 警察署는 이 詐欺事件의 加擔者들을 拘束하였다. [98]

影響 [ 編輯 ]

2012年 11月 25日 歌手 박완규 MBC 나는 歌手다 Ⅱ 》에서 최진영의 '永遠'을 選曲해 競演에 나섰고, 2015年 8月 15日 歌手 DK(本名 한대규)도 KBS 不朽의 名曲 》에서 同一曲으로 參與해 自身이 歌手가 되는 데 影響을 준 曲이라고 說明했다. [99] [100] [101]

人間關係 [ 編輯 ]

  • 최진영은 平素 蹴球 를 즐겼고 演藝人 축구팀에서 活動하였다. [102] [103]
  • 2010年 10月 26日 , 俳優 성동일 演劇 契에서 放送 系로 活動 領域을 바꾸게 된 契機를 밝혔는데, KBS 김승우의 乘勝長驅 》에서 성동일은 "演劇 舞臺에 서면서 極甚한 生活苦에 시달렸다. 10餘 年 동안 演劇 俳優로 번 돈이 고작 120萬 원뿐이었다. 최진영이 ' SBS 라는 새 放送局에서 公債를 募集한다'라고 말해주었다. 최진영의 勸誘로 公採 탤런트 試驗에 應試했다. 公採에 한番에 合格했다"라고 말했다. 성동일은 親舊 최진영의 勸誘로 1991年 SBS 公採 1期 탤런트 試驗에 凝視하게 되면서 放送界에 入門하게 되었고, 公採 合格 直後 自身의 어머니에게 "이제 苦生 끝났다"라며 큰소리를 쳤지만, 그 後 7年 동안 端役을 主로 맡다가 SBS 《 銀실이 》( 1998年 )로 本格的으로 自身의 이름을 大衆에 알리게 되었다. [104] [105]
  • 2010年 12月, 최진영의 親舊들은 서울特別市 노원구 중계동 一帶에서 不遇이웃돕기 慈善行事人 '3.6 프로젝트'에 參與하였다. 이곳은 최진영이 한양대학교 合格 後 奉仕活動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 行事에는 歌手 빽가 , 俳優 김승현 , 피아니스트 이루마 , 코미디언 문세윤 , 골퍼 홍진주 , 俳優 이켠 , 俳優 손恩恕 , 몽드드 代表理事 유정환 等과 최진영의 두 조카인 최환희와 최준희 等이 參與하였다. 이들은 地域 零細獨居老人, 障礙家庭, 次上位貧困層 家具 等에 煉炭과 生必品 等을 傳達하고, 150人 分의 食事를 準備해 어려운 이웃과 함께 食事를 나누고, 작은 音樂會를 가졌다. 최진영의 어머니 정옥숙은 이 行事에 쌀과 라면 等을 協助하며 아들의 親舊들과 뜻을 함께 하였다. 이 모임은 최진영의 生前부터 이어져온 것으로서, 이 모임의 構成員들은 해마다 保育院과 障礙人 施設 等을 訪問하고 寫眞 展示會와 작은 音樂會 等을 열며 사랑나눔과 才能나눔 等을 實踐하였다. [106] [107] [108] [109] [110]

기타 [ 編輯 ]

  • 2002年 12月 18日 午後 2時 조성민 은 記者들을 召集해서 최진영을 相對로 名譽毁損 行爲를 저질렀다. 조성민은 최진실 을 相對로 姦通질, 暴行質, 沙器質을 저지른 狀態에서 追加的으로 輿論造作질까지 저지른 것이다. 自身이 저지른 姦通질, 暴行質, 沙器質에 對해 各其 雙方過失을 主張하며 輿論造作질을 한 것이다. 하지만 離婚 타령하면서 被害者 行世를 아무리 熱心히 해봐야 家庭法院이 아닌 記者會見場에서 그런 것이라서 場所 自體로써 輿論造作을 하고 있음이 立證되었다. 이 沙器質과 輿論造作質은 정옥숙과 최진영을 相對로도 저질렀다. 조성민은 최진실, 최진영, 정옥숙한테 各各 1億 원씩 빌렸고 갚지 않았고 갚지 않겠다는 行動을 한 것이다. 조성민은 同時에 최진영이 최진실의 使嗾를 받아 自身의 肝通商奸女를 拉致한 것처럼 말하며 虛僞 捏造 情報를 流布하기도 했다. 債權者 최진영은 債務者가 自身들을 惡德私債業者人 것처럼 말하며 虛僞 捏造 情報를 流布하자 정옥숙과 함께 元金 回收에 나섰는데, 바로 法的 節次를 밟아 2年 後인 2004年 8月 23日 法院의 關聯 判決이 나왔다. 勿論 최진실도 2003年 10月 23日 債務 辨濟를 要求하는 離婚合意書를 조성민에게 傳達했고 조성민은 이 離婚合意書를 팩스로 記者에게 뿌림으로써 自身의 바닥을 또다시 드러냈다. 2002年 12月 18日과 2004年 8月 23日 사이에 조성민은 돈 없다고 울고 다니고 조성민의 아버지 조주형은 돈 있다고 하면서 自己 돈은 받지 않는다고 최진영 等을 非難하고 다녔다. 債權者는 債務者한테 直接 돈을 받는 것이 常識이라서 조주형은 그 돈을 아들한테 줘서 迅速하게 債務 辨濟하게 하면 되는데 아들의 債權者를 相對로 名譽毁損을 저지르며 조성민의 詐欺 行爲를 도왔다. 2004年 9月 1日 조성민은 3億 원을 갚는 代身 3億 원에 親權을 팔았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反省은커녕 面接交涉 義務 條項을 違反하며 繼續的으로 최환희와 최준희의 權利를 侵害했다. 최진실의 死亡 直後에도 돈에 換腸한 本性을 숨기지 못하고 날뛰다가 輿論의 뭇매를 맞았다. 최진실, 최진영, 정옥숙에 對한 輿論造作질도 反省은커녕 죽을 때까지 低質 記者들을 動員하여 이어갔고 그 低質 記者들은 조성민의 死亡 後에도 그 輿論造作질을 擴大再生産하는 데 血眼이 되어 매달렸다. 이러한 假짜뉴스 生産 메커니즘은 몇 年 後 非但 演藝人만의 問題가 아니라 社會 全 分野로 퍼져 共同體 곳곳을 썩게 만드는 地境에 이르르자 2019年 1月 8日 大統領 文在寅 도 國務會議에서 假짜뉴스에 對한 積極的인 對處를 公開的으로 注文할 程度가 되었기에 최진실, 최진영, 정옥숙이 받은 被害는 充分히 斟酌되고도 남았다.
  • 2006年 6月 8日 午前 5時 外製車(벤츠)를 몰고 가다가 信號 違反을 했다. 이 때 他人의 外製車(그랜저)에 輕微한 스크래치를 냈지만 그 事實을 認知하지 못하고 그대로 地方( 大邱廣域市 )으로 내려갔다. 그 狀況을 目擊한 營業用 택시 技士가 최진영의 車 番號를 確認한 後 警察에 申告하였다. 같은 날 午前에 地方에서 警察 出席 要求를 받았고 같은 날 午後 9時 30分에 江南警察署에서 3時間 程度 調査를 받았다. 警察 調査를 받으면서 血液 檢査도 받았지만 그 結果에 違法的인 側面은 없었다. 네티즌들의 飮酒 運轉 疑惑 提起에 '飮酒 行跡 調査'도 따로 實施했지만 이 調査에서도 飮酒 運轉은 立證되지 않았다. 警察署에서 交通事故 經緯 調査를 받기 直前 가진 인터뷰에서 최진영은 "相對方이 별다른 反應을 보이지 않아 接觸 事故가 난 줄도 全혀 모르고 地方에 갔다 왔다. 警察署에서 連絡을 받은 뒤에야 事故가 났다는 事實을 알게 됐다. 뒤늦게 警察 連絡을 받고서야 오른쪽 헤드 라이트에 까만 色 페인트가 묻어있는 것을 發見했다"고 말했다. 같은 時間 江南警察署의 交通事故調査係 構成員은 "思考 自體는 輕微한 事故로 큰 일은 아니지만, 演藝人이다보니 일이 커진 것 같다. 그렇지만 正確한 事故 經緯를 調査해 道路交通法上 信號違反, 特加法上 逃走 嫌疑 等이 認定되면 罰金刑 程度의 處罰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11] 최진영의 警察署 陳述 直後 인터뷰에서 江南警察署 構成員은 "飮酒測定 結果 飮酒는 하지 않은 것으로 判明됐다. 그 部分에 對해서는 따로 調査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一般的으로 12時間 ~ 16時間 程度는 술기운이 남아있는 狀態이다. 뺑소니(特加法上 現場措置不履行)에 對해서 최진영이 認定해 釋放하게 됐다. 調査는 繼續 進行된다. 被害者와 營業用 택시 運轉者를 불러서 對質 審問도 할 豫定이다. 事故 車輛에 스크래치가 輕微하게 났다. 被害 痕跡으로 봐서 運轉者가 안에서 琉璃窓을 닫고 있으면 모를 수 있다고 判斷된다"고 말했다. [112] [113] [114] [115] [116] 以後 被害者는 全治 3週의 診斷을 받았고 이에 車輛 損傷 費用과 人體 損傷 費用에 對해 被害者와 合意가 되어 民事上 法的 節次는 밟지 않았고 2006年 9月 28日 刑事上 罰金 500萬 원에 略式起訴되었다. [117] [118] [119] [120]
  • 2006年 8月 31日 演藝奇劃社 <미디어皇帝>로부터 '최진영은 契約期間 中 音盤 2張을 내기로 하고 契約을 맺었으나, 個人的인 事情을 핑계로 音盤製作과 活動을 疏忽히 했다. 최진영은 지난 2004年 9月 音盤 1張만을 發賣하면서 弘報活動을 제대로 하지 않아 會社는 音盤과 뮤직비디오 製作費와 매니저 費用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는 理由로 專屬契約金 3億 원을 返還하라는 訴訟을 當했다. 이에 對해 최진영은 "會社(미디어皇帝)와는 지난 2003年初 2年 專屬契約을 맺어 昨年 初 契約이 끝난 狀況이다. 契約期間 中에도 會社는 音盤낼 能力이 없어 支援도 제대로 못해줬고, 音盤市場도 안좋아 한참을 기다리던 끝에 지난 2004年 3輯 音盤을 내 필리핀에서 뮤직비디오까지 찍고 最大限 活動했다. 일도 못 잡고 코디도 나오지 않는 狀況에서도 最大限 活動했었다. 契約期間 中에는 勿論 契約이 끝난 以後에도 다른 일도 못하고 繼續 기다렸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고 말했다. [123] 이 訴訟은 2007年 11月 28日 1審 勝訴 判決이 났고 2009年 4月 2日 2審 勝訴 判決이 나서 최진영이 모두 勝訴했다. [124] [125]

家族 [ 編輯 ]

作品 [ 編輯 ]

텔레비전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演劇 [ 編輯 ]

廣告 [ 編輯 ]

敎養 및 藝能 [ 編輯 ]

뮤직비디오 [ 編輯 ]

앨범 [ 編輯 ]

최진영은 音樂 分類上 大衆音樂 分野에서 活動했다. 앨범에 담긴 音樂의 장르는 크게 락 音樂 , 팝 音樂 , 발라드 等으로 나뉠 수 있다. 下位 장르로 헤비 메탈 , 댄스 팝 等도 包含되어 있다.

受賞 [ 編輯 ]

歌謠 프로그램 1位 [ 編輯 ]

鳶島 受賞 內譯 (銃 7回)
2000年 (銃 7回)

關聯 記事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최진실. 《그래, 오늘 하루도 眞實하게 살자》. 책이있는마을. 1998年. ISBN   89-88086-15-5
  • 이창세. 《나는 映畫가 좋다》. 知識의숲. 2011年. ISBN   978-89-5797-896-2
  • 정옥숙. 《엄마가, 未安해 그리고 사랑해》. 熊進윙스. 2011年. ISBN   978-89-01-12433-9
  • 주진우. 《朱記者》. 푸른숲. 2012年. ISBN   978-89-7184-8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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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崔宰誠 의 아버지
  2. 허민녕. 최진실 뺨쳤던 청춘스타…歌手 活躍도 . 東亞日報. 記事入力 2010年 3月 29日. 記事修訂2010年 3月 30日.
  3. 김지윤. 故최진영 “최진실 동생 아닌 映畫俳優로 봐주세요” 生前映像 公開 . 뉴스엔. 2010年 4月 5日.
  4. 金榮煥. 최진실·최진영, 言論을 통해본 '애틋했던 男妹愛' . 이데일리. 2010年 3月 30日.
  5. 스타를 만든 힘의 發見 . 레이디경향. 2012年 4月 26日.
  6. 박종률. "每日 35名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韓國" . 노컷뉴스. 2010年 4月 19日.
  7. 《엄마가, 未安해 그리고 사랑해》(정옥숙, 熊進윙스, 2011年) 參考.
  8. 이지현. 누나 喪 中인 최진영, 눈물의 大學 '合格' 消息 . 노컷뉴스. 2008年 11月 3日.
  9. 6寸 오누이인 崔宰誠 최진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東亞日報. 1994年 2月 5日.
  10. 김민주. 故최진실 알려지지 않은 親아버지 최국현氏 單獨 인터뷰 . 레이디경향. 2008年 11月號.
  11. 김연지. 故최진실 男妹 父親 "내가 애들 죽을 이름을 지어줬나 봐" . 中央日報. 2010年 4月 29日.
  12. 이혜원. 최진영, 누나 최진실에 對한 不滿(?) 吐露 . 스포츠韓國. 2008年 7月 17日.
  13. 오미정. 悲劇으로 幕내린 최진실·최진영 男妹의 드라마같은 삶 . 노컷뉴스. 2010年 3月 29日.
  14. 이현우. 최진영 "조용필 先輩 提案으로 歌手 데뷔" . 뉴스엔. 2008年 7月 24日.
  15. 안효은. 최진영 "데뷔曲 '永遠', 김정민한테 뺏었다" . 마이데일리. 2008年 7月 24日.
  16. 1990年 6月 TV CF 모음
  17. 김민주. 누나 잃은 슬픔 克服하고 演劇으로 復歸하는 최진영 . 레이디경향. 2009年 7月號.
  18. 김성훈. 잘가요, 피터팬 . 씨네21. 2010年 4月 5日.
  19. 92 고래사냥 최진영 跆拳道 킥복싱 즐겨 . 京鄕新聞. 1992年 3月 26日.
  20. 1994年 2月 28日 306 補充隊에 入所하였고 以後 5師團 訓鍊所를 거쳐 5砲兵旅團으로 自隊配置되었다.
  21. 오미정. '民防衛' 최진영 · '豫備軍' 정민, 軍隊 얘기로 웃음꽃 . 노컷뉴스. 2007年 5月 15日.
  22. 박세연. 최진영 "軍將星들 앞에서 베드신 찍느라 津땀" . 뉴스엔. 2008年 8月 22日.
  23. 문미영. 최진영, 俳優로 歌手로 산 21年의 歲月 . 스포츠韓國. 2010年 3月 29日.
  24. 김원유. '覆面歌王'조장혁, 램프의 妖精이 부른 '永遠' 듣고 눈물…'왜?' . 아시아經濟. 2016年 5月 23日.
  25. 아나키스트 뮤직비디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6. 홍석민. 2% 不足, 市場 90% 席卷‥成功 祕訣은 . 東亞日報. 2000年 7月 11日.
  27. 유숙. 種種 터진 演藝 스타 拉致事件, 최진실-陳永 이지현 도지원 이희진 아나운서 A . 뉴스엔. 2006年 9月 14日.
  28. 朴洙賢. 최진실 出演 ‘서세원쇼’ 5位로 껑충 . 파이낸셜뉴스. 2002年 2月 4日.
  29. 카렌듈라 퍼밍 에센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0. 권태완. 최진영 '善行도 하고 패션도 보고' . 마이데일리. 2006年 7月 14日.
  31. 허상욱. 2006 '女性' 意識 캠페인 寫眞展 - 최진실 최진영 男妹 . 뉴시스. 2006年 12月 6日.
  32. 김영남. '사랑을 낳는 出産' 寫眞展 . 京鄕新聞. 2006年 12月 7日.
  33. 이지현. 최진영, 조장혁 '희재' 뮤직비디오 出演하며 눈물 쏟아 . 노컷뉴스. 2008年 11月 24日.
  34. 이미혜. 최진영, 親누나 잃은 슬픔克服 '煉炭配達 自願奉仕' 눈길 . 뉴스엔. 2008年 11月 24日.
  35. 이현우. 故최진실과 約束지킨 최진영, 베트남 奉仕活動 公開 . 뉴스엔. 2008年 12月 17日.
  36. 박준범. 2009年 새내기 大學生 申·區 스타 . 스포츠칸. 2009年 3月 2日.
  37. 오미정. 최진영, 成績 奬學金 · 演劇 興行…오랜만에 '기쁨' . 노컷뉴스. 2009年 7月 27日.
  38. 배선영. 최형인 敎授 "弟子 故최진영, 살기 위해 工夫할 거라 했는데…" . 뉴스엔. 2010年 3月 31日.
  39. 이은지. 김정민-최진영-최현우 所屬, 엠클라우드 記者懇談會 開催! . 티브이데일리. 2010年 3月 3日.
  40. (아츠뉴스TV) 최진영 活動 再開 Archived 2016年 3月 4日 - 웨이백 머신 . 아츠뉴스. 2010年 3月 3日.
  41. 조광형. "최진영, 아침 料理프로 MC 맡고 싶어했다" . 뉴데일리. 2010年 3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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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김지연. 최진영 "1年半만에 活動再開, 조카들 때문"(인터뷰) . 머니투데이. 2010年 3月 3日.
  48. 김지윤. 故최진영 “우結 出捐은 조카들 때문” “結婚은.. 아직” 그랬던 그가... . 뉴스엔. 2010年 3月 3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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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나지연·서보현. "누나, 傷處, 負擔, 自殺"…故 최진영, 스스로 마감한 39年 (綜合)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스포츠서울닷컴( 每日經濟 에서 記事 出庫). 2010年 3月 30日.
  51. 양지원. 최진영 擔當 敎授, “한쪽 귀 聽力 때문에 괴로워했다” . 일간스포츠( 中央日報 에서 記事 出庫). 2010年 3月 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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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문완식. 故최진영, 히트曲 '永遠'속 母校서 慰靈祭 . 머니투데이. 2010年 3月 3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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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송승은. 이영자의 아름다운 同行, "엄마 엄마 어디가세요" 嗚咽 . 티브이데일리. 2010年 4月 2日.
  57. 이다정. 故 최진영 影幀寫眞, 알고보니 조민기가 찍은 최진영 컴백作 모습 . 스포츠조선. 2010年 4月 15日.
  58. 박세연. 故최진영 三虞祭, 遺族-同僚 參席..家族墓 變化할듯 . 뉴스엔. 2010年 4月 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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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朴軫永. 엠넷 와이드 演藝뉴스, 30日 최진영 死亡 追慕 放送 緊急 編成 . 아츠뉴스. 2010年 3月 30日.
  75. 김지연. 빽가 "故최진영, 記憶해달라" 未公開 寫眞公開 . 머니투데이. 2010年 4月 2日.
  76. 高규대. "조성민, 최진실 財産 탐나 이런 일까지.." . 스포츠韓國. 2008年 10月 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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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이현아. 조성민 親權回復 論難, 政治權까지 흔들다! . 스포츠韓國. 2008年 11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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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김운회. 공用地의 悲劇과 디지털 公共財 . 프레시안. 2012年 12月 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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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김재범. 조성민 "아이들 將來를 걱정할 뿐" 말門 열었다 . 스포츠韓國. 2008年 10月 29日.
  83. 조성민 氏, "두 子女에 關한 모든 權利 抛棄" . YTN. 2008年 12月 9日.
  84. 이해리. 조성민, 親權 養育權 抛棄 최진실 遺族에게 讓渡 . 스포츠동아. 2008年 12月 8日.
  85. 장상용. 최진실 遺族-조성민, 養育 및 財産 管理 遺族이 하기로 合意 . 일간스포츠. 2008年 12月 8日.
  86. 오미정. 최진영 "조성민, 아이들과 만나는 것 願치 않아" . 노컷뉴스. 2009年 6月 23日.
  87. 김지연. 故최진실 遺族 "警察調査 焦燥하게 기다리고 있다" . 머니투데이. 2009年 8月 16日.
  88. 장아영. 최진실 遺骨函 竊盜犯 檢擧 . YTN. 2009年 8月 26日.
  89. 박세연. 최진영 "누나는 生前 이곳을 좋아했었다"(故최진실 1周忌) . 뉴스엔. 2009年 10月 2日.
  90. 곽인숙. 최진실, "그래도 아이들의 아빠인데…."(종합) . 노컷뉴스. 2004年 8月 2日.
  91. 유상우. 최진영, “조성민은 내 머릿 속에서 지웠다” . 뉴시스. 2004年 8月 2日.
  92. 강이종行. 최진실氏 訴訟, 辯護人團 25名 無料 辯論 나서 . 오마이뉴스. 2004年 12月 13日.
  93. 신종철. 大法 “家庭破綻 言論에 公開돼 廣告 購買 誘引 效果 크게 毁損” . 로이슈. 2009年 6月 2日.
  94. 이기범. 고(故)최진실 모델料 訴訟, 아이들이 遂行 . 노컷뉴스. 2009年 9月 29日.
  95. “최진실 모델品位 損傷, 廣告主에 賠償責任” . 京鄕新聞. 2010年 2月 9日.
  96. 破棄還送(破棄還送)은 原審 判決을 取消하고 다시 裁判하도록 原審 法院으로 事件을 돌려보내는 것을 일컫는다. 原審 判斷에서 問題 있는 部分에 對해 다시 心理하라는 意味이다. 破棄한 事件은 原審 判決 以前 狀態로 돌아간다. 반드시 破棄 還送 趣旨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被告 或은 被告人은 破棄還送審 結果에 對해 大法院에 上告할 수 있다.
  97. 권지영. 故 최진실-최진영 墓地 强制 里長 不可避… '죽어서도 便히 쉴 수 없다니'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티브이데일리. 2011年 7月 18日.
  98. 안진용. 故 최진실 安葬 墓地 財團, 詐欺 嫌疑 立件 . 스포츠韓國. 2011年 7月 12日.
  99. 이수지. ‘나歌手2’ 박완규 永遠, 故최진실-최진영 男妹 떠올렸다 . 韓國日報. 2012年 11月 25日.
  100. 손효정. '不朽' DK, 故최진영에 바치는 노래 '永遠'…눈물 먹먹 . TV리포트. 2015年 8月 15日.
  101. 박보라. '不朽의 名曲' DK, 고(故) 최진영 기리는 '奇特한 舞臺' Archived 2017年 12月 9日 - 웨이백 머신 . 스포츠투데이. 2015年 8月 15日.
  102. 김영찬. 蹴球狂 演藝人들 "競技場이 放送局" . 東亞日報. 2002年 6月 17日.
  103. 최보란. 김승현 "드라마서도, 人生서도 '反轉'노려요"(인터뷰) . 머니투데이. 2011年 3月 5日.
  104. 電源. 성동일, 故최진영 德에 公採合格 後 무명 10年 '울相' . 뉴스엔. 2010年 10月 27日.
  105. 이경남. 성동일 "故 최진영 勸誘로 公採 탤런트 試驗봤다" . TV리포트. 2010年 10月 27日.
  106. '3.6 프로젝트'는 幼兒用品 專門 쇼핑몰 '몽드드'에서 主催하는 希望나눔 캠페인으로서, '몽드드'의 代表理事 유정환은 최진영의 親舊이다. 유정환과 이루마 는 親舊로서 함께 '몽드드'를 設立하였다.
  107. 김성한. 백성현 "歡喜·준희 웃는 모습에 보람 느껴요" . 스포츠韓國. 2010年 12月 20日.
  108. 임세영. 이루마 '秋雲겨울 煉炭으로 따뜻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 뉴스엔. 2010年 12月 19日.
  109. 李孝貞. 故최진실 子女 환희-준희, 煉炭 奉仕活動 參與…薰薰한 손길 . TV리포트. 2010年 12月 29日.
  110. 최진실의 歡喜와 준희, 煉炭 나눔 奉仕 하던 날(여성중앙 2011年 1月號) Archived 2015年 9月 23日 - 웨이백 머신 . 國立中央圖書館.
  111. 안지선. 최진영,"接觸 事故 난 줄 몰랐다"‥음주는 無嫌疑 . 마이데일리. 2006年 6月 8日.
  112. 박성기. 최진영 "뺑소니 認定" 不拘束 立件 . 스타뉴스. 2006年 6月 9日.
  113. 이지현. 최진영 "事故 몰랐다(?)" . 뉴시스. 2006年 6月 9日.
  114. 典型化. 최진영, 飮酒行跡 調査 '無嫌疑' 判明 . 스타뉴스. 2006年 6月 13日.
  115. 이경호. 최진영, 飮酒 無嫌疑 確定! . 마이데일리. 2006年 6月 13日.
  116. 길혜성. ‘飮酒 無嫌疑’ 최진영,“演技 再開 미루고 自肅할 것”...單獨 인터뷰 . 헤럴드經濟. 2006年 6月 13日.
  117. 정지우. 歌手 兼 탤런트 최진영 '뺑소니 嫌疑' 罰金 500萬원 起訴 . 뉴시스. 2006年 9月 28日.
  118. 장시복. '뺑소니 思考' 최진영, 罰金 500萬원 略式起訴 . 스타뉴스. 2006年 9月 28日.
  119. 김원철. 交通事故 全治 2株와 3週의 差異는?…벌점제도 運轉者 不滿 高調 . 國民日報. 2007年 1月 26日.
  120. 外製車 接觸事故 修理費 '헉'...대책 없나? . YTN. 2015年 7月 28日.
  121. 졸피뎀 服用 유정환 前 몽드드 代表 上告 抛棄 . 韓國經濟. 2015年 10月 27日.
  122. 1930.痲藥, 痲藥類, 向精... 搜査할 수 있나? . 새가 날아든다. 2016年 12月 5日.
  123. 이규림. 최진영, 3億 被訴에 "일 다해줬는데 荒唐!" . 마이데일리. 2006年 8月 31日.
  124. 김태종. 최진영, 前所屬社와 訴訟에서 勝訴 . 聯合뉴스. 2007年 11月 28日.
  125. 김효진. 최진영, 專屬契約 訴訟 抗訴審도 勝訴 . 아시아經濟. 2009年 4月 2日.
  126. 후라보노 셀렉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27. 總 프로듀싱은 왁스 의 2輯 앨범으로 認定받은 신동우가 맡았다. 박성진, 김도형, 이경섭, 심상원, 유유진, 강은경 等 有名 作曲家·作詞家들이 參與하였다. <24時間의 神話> 뮤직비디오 美國 에서 活動 中인 韓國系 뮤직비디오 監督 조셉 칸 (本名 안준희) 監督과 大韓民國 有名 歌手들의 뮤직비디오를 多數 製作해온 조진모 監督이 함께 作業하였는데, 大韓民國 最初로 북극 알래스카 에서 莊嚴한 風景을 背景으로 製作되었다.
  128. 作曲家이자 프로듀서인 신동우, 復活 金兌原 , 作曲家 박성진, 터보 · 李孝利 의 앨범 프로듀싱를 맡았던 안정훈, 조성모 의 <不滅의 사랑>을 作曲한 양정승, 보아 · 핑클 · 神話 等의 앨범 作業에 參與한 이희성 等이 意氣投合하여 만든 앨범이다. <나는 너를>은 大韓民國 大衆 音樂의 巨匠 신중현 이 作詞·作曲한 曲인데, 최진영의 呼訴力 짙은 목소리와 어우러지도록 함으로써 曲의 完成度를 높였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