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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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수
出生 1962年 3月 27日 ( 1962-03-27 ) (62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中區 明洞
職業 俳優
活動 期間 1985年 ~ 現在
宗敎 改新敎
所屬社 매니지먼트 율
父母 최무룡 (簿), 강효실 (某)
配偶者 강주은 (1994年 結婚)
子女 크리스찬 儒城 崔(長男),
벤자민 有進 崔(次男)

최민수 ( 1962年 3月 27日 ~ )는 大韓民國 俳優 로, 그의 아버지 최무룡 의 演藝人 2歲이다.

生涯 [ 編輯 ]

최민수는 서울 中區 明洞 에서 태어났으며 한때 京畿道 坡州市 에서 幼年期를 보낸 적이 있다.

최무룡은 1960年代하고 1970年代의 人氣 俳優로, 강효실하고는 演劇 舞臺에서 만났다.

최민수의 外할머니는 《눈물의 女王》으로 有名한 俳優 典獄 이고 外할아버지인 강홍식 無聲映畫 時期의 俳優이자 歌手이며, 北韓 最初의 映畫監督이다.

1985年 演劇 彷徨하는 날들로 데뷔하였다.

出演作/活動 [ 編輯 ]

映畫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演劇 [ 編輯 ]

  • 1985年 《彷徨하는 별들》

放送/藝能 [ 編輯 ]

그 外 放送/藝能 [ 編輯 ]

  • 12時 올스타쇼
  • 土曜日 土曜日은 즐거워 [1]
  • 演藝街中繼
  • 挑戰 推理特急
  • 集中 퀴즈테크
  • 쇼 파노라마
  • 밤으爐가는쇼
  • 土曜日7市價좋다
  • 이숙영의 水曜스페셜
  • KBS 빅쇼
  • 노영심이 여는 世上
  • TV데이트
  • 이소라의 프로포즈
  • 놀러와
  • 黃金漁場- 무릎팍道士
  • 追憶이 빛나는 밤에
  • 强心臟
  • 日曜日이좋다 - 런닝맨
  • 黃金漁場- 라디오스타
  • 엄마가 뭐길래

앨범 [ 編輯 ]

  • 2006年 최민수 록산밴드 - The Men′s Story
  • 2013年 36.5˚C - Smoky Mountain

團體 [ 編輯 ]

  • 2017年 本스타트레이닝센터 [2] 代表院長

廣告 [ 編輯 ]

弘報大使 [ 編輯 ]

首相 및 候補 [ 編輯 ]

鳶島 施賞式 部門 作品 結果
1987 第11回 黃金撮影賞 新人男優賞 神의 아들 受賞
1989 第25回 백상藝術大賞 映畫部門 男子 新人演技賞 그女와의 마지막 춤을 受賞
1990 第11回 靑龍映畫賞 男優助演賞 남부군 受賞
1991 第29回 大鐘賞 候補
第12回 靑龍映畫賞 人氣스타賞 아그네스를 위하여 受賞
男優主演賞 候補
MBC 演技大賞 男子 優秀演技上 고개숙인 男子 , 사랑이 뭐길래 候補
1992 第28回 백상藝術大賞 TV部門 人氣賞 사랑이 뭐길래 受賞
第13回 靑龍映畫賞 人氣스타賞 미스터 맘마 , 結婚 이야기 受賞
男優主演賞 結婚 이야기 候補
MBC 演技大賞 男子 優秀演技上 사랑이 뭐길래 受賞
1993 第29回 백상藝術大賞 TV部門 男子 最優秀演技賞 걸어서 하늘까지 受賞
第31回 大鐘賞 男子 人氣賞 結婚 이야기 受賞
男優主演賞 候補
第14回 靑龍映畫賞 人氣스타賞 가슴 달린 男子 受賞
MBC 演技大賞 男子 最優秀演技賞 걸어서 하늘까지 , 엄마의 바다 候補
1995 第16回 靑龍映畫賞 人氣스타賞 테러리스트 受賞
男優主演賞 受賞
第22回 韓國放送大賞 最優秀탤런트上 모래時計 受賞
第31回 백상藝術大賞 TV部門 男子 最優秀演技賞 受賞
SBS 演技大賞 男子 最優秀演技賞 候補
對象 受賞
TV저널 올해의 施賞式 탤런트部門 大賞 受賞
1996 第19回 黃金撮影賞 最優秀人氣男優賞 테러리스트 受賞
第34回 大鐘賞 男優主演賞 受賞
1998 SBS 演技大賞 男子 最優秀演技賞 白夜 3.98 候補
1999 第20回 靑龍映畫賞 男優主演賞 幽靈 候補
2000 第37回 大鐘賞 男優主演賞 受賞
SBS 演技大賞 빅스타上 사랑의 傳說 受賞
2001 第37回 백상藝術大賞 映畫部門 男子 最優秀演技賞 리베라 메 受賞
2003 대한검도회 功勞表彰 빈칸 受賞
SBS 演技大賞 連續劇 部門 男子 演技賞 太陽의 南쪽 候補
男子 最優秀演技賞 候補
2004 MBC 演技大賞 漢江水타령 受賞
2007 MBC 演技大賞 史劇部門 黃金演技上 太王四神旗 受賞
男子 最優秀演技賞 候補
2011 SBS 演技大賞 特別企劃部門 男子 最優秀演技賞 無事 백동수 候補
2013 KBS 演技大賞 男子 助演賞 칼과 꽃 候補
2014 MBC 演技大賞 男子 黃金演技上 傲慢과 偏見 受賞
2016 第5回 아시아太平洋 스타 어워즈 長篇드라마部門 男子 最優秀演技賞 大박 候補
SBS 演技大賞 候補
2017 第10回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演技大賞 죽어야 사는 男子 候補
MBC 演技大賞 미니시리즈部門 男子 最優秀演技賞 候補
對象 候補

論難 [ 編輯 ]

2003年 移民發言 및 訴訟 事件 [ 編輯 ]

2003年 8月 18日에 放映된 SBS 大河드라마 野人時代 》 111回分 가운데 李承晩 獨裁 政權에 關한 宣傳을 위해 演藝人 들을 불러모으자, 이에 反對하는 演藝人 들을 脅迫, 暴力을 加하는 場面이 나옴과 同時에 映畫 俳優 최무룡 임화수 에게 毆打를 當하는 場面이 放送되었는데, 이 部分에 對해 최민수는 한 달 뒤 9月 29日 午後 2時에 記者會見을 열어 "이 場面은 虛構이며 敗訴하면 이 나라를 떠나겠다."라는 發言 等으로 2億 원의 損害賠償 訴訟을 냈다. [3] [4] [5]

訴訟 結果는 2004年 1審에서 原告 敗訴 [6] [7] , 2005年 2審에서 調停調書로 合意하였다. [8] 그러나, 최민수는 自身이 勝訴는 勿論, 歷史的 事件마저 歪曲하는 行爲를 하기도 한다. [ 出處 必要 ]

萬若 敗訴하면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말씀드린 部分은 있다. 하지만 나는 敗訴하지 않았다. 勝訴했으니 移民 안 가도 되지 않겠냐고 말할 必要는 없어 조용히 묻어놨던 것이었는데 이番 事件을 통해 膾炙되기에 말씀 드리는 것이다.

? 《SBS '野人時代 '訴訟, "法院 調整에 敗訴안했다" 主張.》 2007年 5月 25日 記者會見 中 [9]

본 會員이 3年 前인가 演技者 최민수의 訴訟을 擔當했는데, 이길 수 없는 訴訟임이 거의 明白했으나, 1審 敗訴 後 抗訴하여 억지로 調整으로 誘導해 겨우 서울放送의 遺憾 表明을 받아 낸 事件입니다.
勿論 위 事件은 勝訴人 것도 아니고 敗訴人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99% 敗訴 事件입니다.
본 會員은 '謝過'를 强力 主張하였으나, 結局 '遺憾'으로 結論 났습니다.
請求金額에 戀戀하지 않는 최민수의 純粹함도 確認할 수 있었습니다. 여튼... 아래의 記事와 같이 서울放送의 자그마한 讓步가 結果的으로 移民을 가겠다고 公言한 최민수를 안 가도 되도록 도운 셈입니다.

最近 본 會員의 四寸 妹兄도 8億원이 넘는 稅金을 賦課 當하자 租稅 訴訟에서 敗訴하면 移民가겠다고 公言을 하고 다녔는데, 다행스럽게도 1審에서 勝訴했습니다. 移民을 막은 게 벌써 2番째 입니다.

? 네이버 카페 mmoimm 김옥올닭님 (닉네임) [10]

임화수 李承晩 , 部 副統領으로 불리던 곽영주 , 自由黨 이기붕 等 絶對的 權力 庇護 아래 演藝界 分野의 이인자 노릇 하던 人物이었고, 權力을 위해서면 出身地와 나이를 속이기는 勿論, 男子 俳優들에게 暴力을 加하고, 女子 俳優들에겐 權力者들에게 上納하기도 하였으며, 女俳優들을 政治人들의 노리개로 삼은 演藝界 性上納 시스템을 만든 最初로 評價받기도 하다. [11]

側近에 따르면 '임화수는 弱한 사람을 발길로 차거나 그렇게 亂暴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女俳優에게 주먹을 날린 적도 적지 않았다. 運命의 손 에서 韓國映畫 史上 처음으로 키스신을 선보였던 윤인자는 "임화수 때 除名處分 當할 뻔했잖아. 임화수가 靑瓦臺 가면 쩍하면 女俳優들 불러가고 그랬는데 ‘난 못 간다. 男便 있는 女子가 그거 왜 가니’ 그랬더니 ‘윤인자는 除名處分을 줘야 한다’고 그랬다”고 傳한다. 6作品이나 가케모치(同時出演)하는 통에 製作者들의 事情으로 除名處分을 면했다는 尹氏는 半말을 지껄이는 임화수에게 대든 적도 있었다는데, “(내가) 소리를 질렀더니 (임화수가) 멋쩍어가지고. 쩍하면 주먹 나갔잖아”라고 덧붙인다. 목에 핏대 높였다가 목으로 피 吐하는 狀況이 非一非再했다고 한다. 또한 임화수의 祕書이던 눈물의 曲折이라는 別名으로도 有名한 차민섭은 24時間을 임화수 옆에서 온갖 暴力에도 奴隸 祕書로 일하기도 했다. 每日 暴力 當할 때마다 눈물을 흘려 '눈물의 曲折'이라는 別名이 붙여졌다.

임화수 에게 毆打당했던 이른바 김희갑 毆打事件 의 當事者 喜劇 俳優 김희갑 은 事件 當時 입을 다물었던 그는 病院 寢牀에 누워서야 "反共 藝術人團 主催 行事에 消極的이라는 理由로 毆打당했다."라고 말하였고 이어 “ 최무룡 , 김진규 임화수 에게 안 맞은 사람이 거의 없다.”라며 “權力과 暴力의 無防備地帶에 있는 自身들을 國民이 保護해달라”고 呼訴하였다. [12] 그러나 김희갑 毆打事件 곽영주 等이 權力의 壓迫을 받으면서 合意로 끝났다. 한便, 임화수 警察 에 불려다녔다는 理由만으로 關聯人들을 불러 責任을 물었고 이 자리에서 곽영주 는 “이봐, 임화수 氏로 말하면 韓國 藝術界의 代表的 人事요, 앞으로 文敎 長官이 되실 분이란 말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後 全治 2個月의 診斷書를 받았던 김희갑 은 2週 만에 病院을 나서야 했고, 關聯 警察 責任者는 파면당했다. [13]

當時 報道記事 [14] , 韓國軍事裁判社 ( 5·16 軍士政變 ) , 유지광 의 自敍傳 대명 等 임화수 가 暴力的이라는 證據는 수두룩하다. 特히 유지광 의 自敍傳 大明에서는 實名은 勿論 露骨的으로 임화수 를 評價하기도 한다. 한便, 當事者인 최무룡 이 亦是 證言하였다. [15] 또한 최민수는 生前에 父親인 최무룡 初等學校 6學年 때 2個月 동안 같이 살았으며,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도 有名하다. [16]

以後 최민수는 2004年 1審에서 敗訴 後 MBC 週末連續劇 《 漢江水타령 》으로 活動을 再開하였으며 2010年에 최민수는 默默不答으로 SBS 드라마 《 아버지의 집 》으로 活動하기도 했다. [17]

貸付業 廣告 論難 [ 編輯 ]

2000年에 이어 2007年 최민수는 아내 강주은과 함께 出演한 貸付業 業體 廣告로 論難을 낳았다. [18] [19]

老人 暴行 無嫌疑 [ 編輯 ]

2008年 4月 21日 서울 龍山區 이태원동에서 70代 老人과 실랑이를 벌이다 暴行한 嫌疑로 不拘束 立件된 後 老人 暴行과 脅迫 嫌疑를 調査한 서울 西部地檢이 無嫌疑 處分을 내렸다. 이 事件을 맡았던 서울 西部地檢 404號 擔當者는 스포츠동아와의 通話에서 “26日 밤 無嫌疑로 最終 結論 났다. 暴行은 被害者와 合意했고 處罰을 願치 않아 公訴權이 없고 凶器를 使用하며 脅迫한 部分이 無嫌疑로 決定됐다”고 말했다. [20] 최민수가 하얏트 호텔에서 볼일을 본 뒤 이태원 쪽으로 自身의 車를 直接 運轉하고 내려오다 벌어진 일이다. 한 飮食店 손님들의 道路 앞 不法 駐車로 交通 正體가 생기면서 최민수가 不法 駐車 車輛을 옮겨 줄 것을 建議하자 한 老人분이 먼저 挑發을 해왔다. 그는 바로 앞 建物의 業所 主人이었고, 나중에 그의 딸과 아들 等 家族들이 나와 加勢하면서 다툼으로 이어졌다. 當時 言論과 輿論은 老人의 말만 듣고 眞實 與否를 確認하지 않고 최민수에게 不利한 거짓 狀況들을 報道 하였고 그가 事件 當時 記者會見을 열고 무릎을 꿇은 채 對國民 謝過를 하였다. 그는 "어떤 理由로도 이番 일은 容恕받을 수 없다. 머리 숙여 謝罪드린다. 國民 앞에서 떳떳하고 正當해야 할 俳優가 그렇게 못했다. 내 自身이 나를 容恕 못하겠는데 누가 容恕하겠는가? 萬若 (暴行嫌疑가) 事實로 밝혀지면 나를 容恕하지 말라"고 했다. 70歲 老人과 말다툼을 벌린 일 自體만으로 고개를 숙였다. 追後 業所 主人이었던 70歲 老人의 言論 인터뷰 內容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졌음에도 어떤 言論도 그 事實을 報道하거나 최민수에게 謝過의 記事를 싣지 않았다.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 최무룡 (1928年 2月 25日 ~ 1999年 11月 11日)
  • 어머니 : 강효실 (1932年 2月 10日 ~ 1996年 11月 2日)
  • 配偶者 : 강주은 (1971年 4月 15日 ~ )
    • 長男 : 최유성 (1996年 ~ )
    • 次男 : 최유진 (2001年 ~ )

對人 關係 [ 編輯 ]

독고영재 , 허준호 , 朴浚圭 와는 各自의 아버지들( 독고성 , 최무룡 , 허장강 , 박노식 )끼리 서로 切親한 사이라서 그 아들들끼리도 親分이 있다. 한 때 사랑이 뭐길래 로 인해 이들 中에서 최민수 혼자만 스타덤에 오르자 나머지 構成員들은 아직 人氣가 없었는데 최민수는 親한 사람들끼리 같이 出演해보려고 엄마의 바다 에 主演으로 캐스팅되자 허준호 독고영재 를 같이 캐스팅하는 條件으로 캐스팅에 應했다. 옷긴 點은 作中에서 허준호가 독고영재를 엄청나게 毆打한다는 點이다.

各州 [ 編輯 ]

  1. 토토즐 MC 交替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京鄕新聞 1992年 11月 13日
  2. bornstar.co.kr. “本스타트레이닝센터” . 2017年 10月 13日에 確認함 .  
  3. 金相万 (2003年 9月 29日). ' 野人時代' 놓고 최민수 이환경 氏 法廷 是非…SBS는 집안싸움에 안절부절” . 한국언론재단 . 2003年 9月 29日에 確認함 .  
  4. 전지현 記者 SBS '野人時代'에 2億 訴訟 낸 최민수 每日經濟 2003年 9月 29日 作成
  5. 허유신 記者 “父親 최무룡氏 名譽毁損” 최민수 ‘野人’ 告訴 京鄕新聞 2003年 9月 29日 作成
  6. 강훈상 (2004年 10月 28日). “탤런트 최민수, `野人時代' 損賠訴 敗訴” . 한겨레 . 2004年 10月 28日에 確認함 .  
  7. 徐昞基 (2004年 10月 29日). “敗訴한 최민수,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했는데…” . 헤럴드經濟 . 2004年 10月 29日에 確認함 .  
  8. 문영재 記者 (2005年 7月 12日). “최민수-SBS 調整成立..法廷다툼 一段落” . 이데일리 . 2005年 7月 12日에 確認함 .  
  9. 임이랑 (2007年 5月 25日). “최민수 "敗訴하지 않아 移民 안갔다 " . 마이데일리 . 2007年 5月 25日에 確認함 .  
  10. 김옥올닭님 (닉네임) (2007年 5月 25日). “移民 가지 마세요..” . 네이버 카페 mmoimm.  
  11. "빨갱이라고脅迫(협박)"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京鄕新聞 1960年 5月 12日 作成
  12. 씨네21 (韓國映畫 後面祕事) 球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時節 2007-06-01 作成
  13. 이영진 政治판까지 쥐락펴락한 1950年代 末 충무로의 無所不爲 帝王 임화수 Archived 2016年 8月 9日 - 웨이백 머신 씨네21 2007-06-21 作成
  14. 6大 主要 日刊紙에서는 김희갑 暴力事件 을 1週日間 大書特筆하였고, 임화수 에 關한 恥部에 對해 파헤치기도 하였다.
  15. 최무룡 證言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mbc 다큐멘터리 100年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認容
  16. 인터뷰365 家族 演藝人들, 사랑과 幸福 그리고 눈물의 飛火 ① 2008-05-26 作成
  17. 尹나래 記者 (TV오늘)최민수 復歸作 SBS '아버지의 집' 아시아투데이 2009-12-28 作成
  18. 김원겸 記者 최민수 貸付業 廣告, 네티즌 '猛非難' 스타뉴스 2007年 6月 13日 作成
  19. 이균성記者 貸付業 廣告에 對한 최민수 反應의 아쉬움 조이뉴스24 2007年 6月 14日 作成
  20. 이경호 記者 최민수 老人 暴行, 檢察 無嫌疑 結論 東亞日報 2008年 6月 27日 作成

外部 링크 [ 編輯 ]

SBS 演技大賞 《대상》
1994年 1995年
최민수
1996年
崔明吉 박근형
모래時計 박태수驛
MBC 演技大賞 《男子 最優秀賞》
2003年 2004年
최민수· 이서진
2005年
김래원 현빈 · 문정혁
漢江水타령 神率 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