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帝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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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몽골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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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年 ~ 1368年
수도 아바르가 (1206?1235)
카라코룸 (1235?1260)
칸發리크 (1271?1368)
政治
政治體制 選擧君主制 (電氣)
世襲君主制 (後記)
大칸
1206年 ~ 1227年
1227年 ~ 1229年
1229年 ~ 1241年
1246年 ~ 1248年
1251年 ~ 1259年
1260年 ~ 1294年
1333年 ~ 1368年

칭기즈 칸 (初代)
툴루이 칸 (臨時)
오고타이 칸
귀위크 칸
몽케 칸
쿠빌라이 칸
土곤 테무르 칸 (말대)
국성 보르지긴
立法府 쿠릴타이
지리
位置 유라시아
1279年 어림 面積 33,000,000km (2位 巨大 帝國 目錄 )
人文
共通語 中世 몽골語 , 튀르크어 , 中國語 , 페르시아語
데모님 몽골人
民族 多民族
人口
1279年 어림 110,000,000名
人口 密度 3.33名
經濟
通話 銀貨, 紙幣 等
宗敎
宗敎 텡그리校 , 佛敎 , 儒敎 , 이슬람敎 , 景敎 , 샤머니즘 等 共存
기타
現在 國家
以前 國家
다음 國家
몽골部
메르키트部
케레이트部
나이萬部
타타르部
元나라
킵차크 칸國
우구데이 칸國
일 칸國
차가타이 칸國

大몽골國 (大蒙古國, 中世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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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케 몽골 蔚루스 , 몽골語 : Их Монгол улс 이흐 몽골 올스 ), 通稱 몽골 帝國 (蒙古帝國, 英語 : Mongol Empire )은 칭기즈 칸 이 1206年에 建國한 國家로, 13世紀와 14世紀의 몽골 帝國은 歷史上 가장 큰 陸地 帝國이었다. 몽골 帝國은 稱기스 칸의 中央 蔚루스를 中心으로 週値 카사르 (1164?-1219?) 以下 동생들에게 흥안령 地域을, 長男 週値 에게 알타이산에서 이르티시江 流域(킵차크 草原)을, 차가타이 에게 알타이산에서 周邊 츄江 流域( 카라 키타이 告知), 그리고 우구데이 에게 알타이산에서 于룽口腔 一帶( 나이만 告知)를, 막내아들인 톨루이 에게 몽골리아 地域을 分蜂했다. [1] [2]

國號 [ 編輯 ]

몽골人들이 自身들이 세운 나라를 몽골語로 ‘예케 몽골 蔚루스’ 卽 ‘大몽골國’라고 불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이러한 國號가 언제 公式的으로 宣布되었는지에 對한 明示的인 記錄은 찾아볼 수 없으나, 이같은 表現이 처음으로 公式 文書에 確認되는 것은, 1246年 11月에 作成되어 修道士 카르피니 (Carpini)에게 맡겨져 敎皇 人奴센트 4歲 에게 傳達된 귀위크 칸 의 書翰에 찍혀진 印章에서이다. 위구르 文字 로 새겨진 이 印章에는

原文

Mongke tngri-yin kuchun-dur Yeke Mongghol Ulus-un dalay-in khan-u jrlq

解釋

永遠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예케 몽골 蔚루스의 死海(四海) 君主의 勅令

이라는 句節이 보인다. 그렇지만 김호동 은 여기에 보이는 '예케 몽골 蔚루스'라는 表現이 꼭 ‘國號’로 보아야 할지는 斷言하기 어렵다고 指摘한다. 그 까닭은 ‘蔚루스’라는 말이 一次的으로는 ‘富民(部民), 百姓’을 뜻하기 때문에, ‘예케 몽골 蔚루스’를 하나의 固着된 用語로서의 國號가 아니라 그냥 그 뜻에 따라 ‘큰 몽골 百姓’이라고 理解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推定은 狗肉이 보낸 書翰의 첫머리에는 그것과 相應하는 句節이 투르크어 로 “모든 큰 百姓(kur ulugh ulus)”이라고만 되어 있고 ‘몽골’이라는 表現 自體가 빠져 있다는 點, [3] 또한 그보다 約 20年 앞서 칭기즈 칸 生前에 製作된 것으로 推定되는 所謂 ‘칭기즈 席(石)’에도 몽골語 로 “모든 몽골 百姓(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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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mu? Mong?ol Ulus )”라는 表現이 보인다는 點 [4] 을 생각하면 더욱 蓋然性이 있다. [5]

過去 유라시아 草原의 遊牧民들도 그러했지만 몽골人들 亦是, 中國이나 다른 定住國家들의 境遇와는 달리 國號나 年號 를 定하여 宣布한다는 槪念에는 매우 익숙하지 못했는데, 몽골의 君主들은 그저 自身을 모든 몽골 百姓들의 統治者라는 程度의 意味에서 ‘모든 몽골 百姓’ 或은 ‘큰 몽골 百姓’의 君主라고 불렀고, 이것이 後日 漸次 寬容化되면서 一種의 國號처럼 使用되었을 可能性도 充分하다. 예케 몽골 蔚루스’가 처음부터 固定된 國號로 使用된 것은 아니었을 可能性이 높다. 그러나 時間이 흐르면서 이 表現은 漸次 國號처럼 使用되어 갔다. 《經世大典(經世大典)》?西麓·題號?에는 “ 쿠빌라이 칸 이 처음으로 大蒙古(大蒙古)라는 稱號를 바꾸어 隊員(大元)이라고 하였다” (世祖皇帝初易大蒙古之號而爲大元也)라는 句節이 그러한 事例이다. 샤오치稱(蕭啓慶)은 全廢(錢弊)·鼻紋·私的(史籍)에 나타난 用例들을 檢討한 結果, ‘隊員’이라는 國號가 頒布되기 前에는 ‘對照(大朝)’와 ‘大蒙古國(大蒙古國)’이라는 두 가지 漢字 國號가 使用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도 特히 電子의 使用頻度가 훨씬 높았는데, 이 두 가지 名稱이 모두 ‘隊員’에 依해서 代替됨으로써 使用中止된 것이라는 學說을 提示했다. [6] 이렇게 볼 때 《經世大典》의 ‘大蒙古’가 ‘大蒙古國’은 亦是 ‘예케 몽골 蔚루스’의 飜譯임에 疑心의 餘地가 없다. 따라서 쿠빌라이 以前에는 ‘예케 몽골 蔚루스’가 그 한譯語人 '大蒙古'와 함께 하나의 固定된 國號로 使用되었음을 알 수 있다. [7]

그러나 쿠빌라이 칸에 依해 '예케 몽골 蔚루스'라는 國號는 더 以上 中止된 것이 아니라 '隊員'이라는 國號와 一體化되었다. 1335年에 漢文과 그것을 飜譯한 몽골문으로 作成된 《張氏선영非(張氏先塋碑)》에서 漢文 '荒原(皇元)'은 몽골문 '예케 몽골 蔚루스'로 飜譯되어 있고, 1346年에 作成된 《칙건흥원각비(勅建興元閣碑)》에서 '亞元(我元)'이라는 漢文 句節이 '예케 몽골 蔚루스'로 飜譯돼 있다. 나아가 1338年에 作成된 《達魯花赤죽온태비(達魯花赤竹溫台碑)》에는 '隊員'李 '隊員이라 稱하는 예케 몽골 蔚루스'(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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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On qemequ Yeqe Mong?ol Ulus ) [8] 로 飜譯되어 있으며, 1362年에 세워진 《追封西寧王흔도비(追封西寧王?都碑)》에는 '隊員 예케 몽골 蔚루스'(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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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On Yeqe Mong?ul Ulus ) [9] [10] 로 나타나 있다. 이들 碑文은 모두 몽골式 國號인 '예케 몽골 蔚루스'가 몽골의 中國支配가 終止符를 찍을 때까지 使用되었음을 立證해 준다. [11] 몽골帝國의 正式 國號인 예케 몽골 蔚루스 라는 國號를 언제 公式的으로 宣布했는지에 對한 明示的인 記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예케 몽골 蔚루스’가 처음부터 固定된 國號로 使用된 것은 아니었을 可能性이 높다고 指摘된다. 그러나 時間이 흐르면서 이 表現은 漸次 國號처럼 使用되어 갔다. 1271年 以前에는 ‘對照(大朝)’와 ‘大蒙古國(大蒙古國)’이라는 두 가지 漢字 國號가 主로 使用되었다. [12] 1271年 쿠빌라이 카안 이 《建國好調》를 頒布함으로써 漢字 國號는 '隊員(大元)'으로 確立되었다. [13]

歷史 [ 編輯 ]

칭기즈 칸 [ 編輯 ]

1279年 몽골 帝國의 最大 疆域

1206年 카마그 몽골 을 다스리던 보르지긴 氏族 의 首長인 테무친 몽골 地域의 東部를 흐르는 아무르江의 支流인 오논 江에서 開催된 쿠릴타이 會議에서 칭기즈 칸 으로 推戴되면서 몽골 帝國이 始作되었다.

帝國 建國 以前 몽골에는 이란 地域과 아랍 文化의 火藥을 使用한 武器 等 先進 武器들이 몽골 地域의 民族들에게 퍼지기 始作했고 實利的 科學과 醫學 等이 傳해져 왔다. 이 칭기즈 칸 바이칼호 의 南쪽과 東南쪽의 草原 地帶에서 霸權을 다투던 여러 部族長 中의 한 軍人에 不過했으나 몽골 帝國의 建國과 함께 그의 權威는 더 以上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1219年부터는 호라즘 王朝를 征服하고, 캅카스 를 征服해 남러시아의 스텝 地帶를 征服했으며 1225年 歸還했다. 아시아 內陸 地方을 中心으로 몽골 帝國의 領土를 顯著히 擴大시킨 칭기즈 칸은 다시 西夏 帝國을 征伐하던 中 1227年 진 中에서 戰死했다. 그 以後 孫子 쿠빌라이 칸은 中國을 征服하였다. 칭기즈 칸 死後 當時 몽골 帝國의 影響力은 西쪽으로는 카스피해 에서 東쪽으로는 東中國海 에 이르렀으며, 南쪽으로는 파미르·티베트 高原을 中心으로 하는 中國 中央 平原에 接해 있었다. 또한 帝國은 다양하고 異質的인 民族과 文化를 包含하고 있었다.

툴루이의 攝政 [ 編輯 ]

칭기즈 칸이 西夏 諸國과 戰爭 하던 中 戰死한 後 넷째 아들 툴루이 칸 을 臨時 칸으로 推戴했다. 몽골의 貴族, 王公族들은 툴루이가 次期 大칸이 되기를 希望했으나 툴루이는 自身의 兄인 오고타이에게 皇帝職을 讓步하였다.

1229年의 쿠릴타이에서 正式으로 오고타이가 다음 大칸으로 推戴되었다.

오고타이 칸 [ 編輯 ]

2代 皇帝 오고타이 칸 은 金나라의 殘存 騎兵隊, 步兵隊와 大規模의 戰爭을 再開하여 金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236年에는 書房을 向한 새로운 征服 戰爭을 始作했다. 그것은 키예프 루스 와 中央 유럽의 占領을 위한 試圖였는데, 볼가 不可르 人들의 帝國은 1~2年 만에 滅亡했으며, 그 勝利는 키예프 루스 의 本土로 向하는 길을 연 셈이었다. 그 무렵 여러 소公國으로 分裂되어 있던 키예프 루스 는 몽골의 侵入으로 崩壞하였다.

발트海 까지 進擊했던 몽골軍이 겨울 추위로 인해 進擊을 멈춤에 따라 노브고로드 共和國 의 首都였던 노브고로드 를 비롯한 루스人 들의 一部 都市는 破壞를 면할 수 있었다. 以後 몽골軍은 더 나아가 폴란드 王國 의 一部를 征伐했으며 前衛 部隊는 슐레지엔 地方에까지 손을 뻗쳤다. 獨逸과 폴란드 王國 의 記事 聯合軍은 슐레지엔 의 헨리크 2歲 共의 指揮 아래 레그니차 近處 발슈타트에서 水夫타이의 몽골군에게 1242年 4月 9日 潰滅에 가까운 엄청난 打擊을 입었다. 몽골軍은 獨逸 東部를 侵入하는 代身 南쪽으로 方向을 바꾸어 헝가리에서 作戰中인 部隊에 合流했고, 1241年 4月 헝가리軍을 思潮 江 流域에서 完破한 몽골軍은 헝가리 王國 에서의 몽골 占領의 基礎를 構築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國土가 荒廢化되었다. 한便 그에 앞서 몽골軍은 이란·그루지아·아르메니아에서 長期間에 걸친 作戰을 繼續하고 있었다. 유럽과 西아시아에서의 몽골의 進擊은 1241年 12月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中止되었다.

귀위크 칸 [ 編輯 ]

오고타이 칸의 戰死 後, 새로운 칸의 選出은 몽골軍 軍司令官들이 모여서 戰爭과 皇帝 選出에 關해서 會議를 하는 軍事會議人 쿠릴타이 에서 意見 一致를 얻기 어려웠다. 當分間 攝政을 하던 오고타이 칸의 弟子 귀위크 칸 가 칸위에 오르기를 希望했으나, 칭기즈 칸 의 長孫으로서 自身이 適任者라고 自負하고 있던 바투 의 激烈한 反對에 부딪혔다. 바투는 오고타이 칸 生前의 西方 遠征에 귀위크와 同行하였으나, 귀위크는 바투를 侮辱했고, 兩者間의 葛藤의 原因이 된다.

오고타이는 後繼者로 孫子 시레門을 指名했지만, 退레게네 카툰 은 自身의 아들 귀위크를 推戴하려 했고, 바투 는 쿠릴타이를 反對하거나 不參하였다. 5年間의 闕位 狀態에서 結局 1246年 귀위크는 칸위에 오르는 데 成功했으나, 病弱한 귀위크는 3年 만에 킵차크 韓國 바투 를 征伐하러 軍士를 일으켰다가 遠征길에서 戰死하고, 다시 軍事 會議인 쿠릴타이 가 繼續되었다.

몽케 칸 戰爭 [ 編輯 ]

이처럼 칸위의 空白期가 繼續된 것은 오고타이 칸 一家와 툴루이 一家와의 對立이 熾烈했기 때문이었다. 誤굴 카미視 카툰 오고타이 카안 의 維持를 내세워 시레門을 推戴하려 했으나, 툴루이 一家 側에서는 오고타이 카안의 遺言을 어기고 구유크 칸 을 推戴한 것이 누구냐며 反撥하였다. 結局 두 軍隊는 內戰을 치렀고 여기서 툴루이 側이 勝利하면서,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 가 第4代 칸이 되었다. 몽케는 오고타이界 王族과 이를 支持하던 차가타이界 王族 및 오고타이 一家의 側近들을 肅淸, 處刑하였다. 그 後 몽골 帝國에서 元나라 에 이르기까지 칸位는 툴루이 子孫에 依해 獨占되었다.

몽케는 이미 抒情에 參與하여 名聲을 얻었고 戰場에서도 功績을 쌓았다. 몽케는 1252年 훌라구 로 하여금 아바스 王朝를 滅하게 하고 이라크·이란 方面을 領土에 편입시켰으며, 쿠빌라이 等을 시켜 南宋을 征伐하게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中國化를 疑心하여 1257年 親히 南宋 征伐을 노렸으나 1259年에 쓰촨 省 近處에서 病으로 죽었다.

祭位 繼承 內戰 [ 編輯 ]

1259年 8月 몽케 칸이 南宋 征伐 途中 戰死했다.

카라코룸 에 있던 몽케 칸의 넷째 동생 아리크부카 는 甘菊을 하다가 1260年 3月 쿠릴타이 를 開催하고 칸이 되었다. 아리크부카는 自身이 正當한 後繼者임을 내세웠다. 몽케 칸의 戰死 消息을 側近들을 통해 들은 둘째 동생인 쿠빌라이 칸 은 回軍, 1260年 5月 臺도 (現在의 베이징 )에서 쿠릴타이를 開催하고 칸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軍士를 이끌고 몽골高原 으로 가 아리크부카와 싸웠다. 初期에는 아리크부카에게 有利하였으나 補給路가 끊기고, 支持하던 차가타이 韓國 의 背信으로 敗北, 4年 만인 1264年 8月 쿠빌라이에게 降伏한다.

쿠빌라이 칸 [ 編輯 ]

1266年 內戰에서 쿠빌라이가 勝利하였다.

그는 首都를 카라코룸 에서 臺도 (現在의 베이징 )로 옮기고 1271年 國號를 원으로 改稱하였으며 1268年 부터 大大的인 南宋 征伐 을 始作했고 1279年 礙産戰鬪 에서 비로소 南宋 을 征伐하여 歷史上 最初로 中國 全體를 征服하는 異民族 國家가 되었다.

한便 高麗 駙馬國 (駙馬國)으로 삼았으며, 1274年 1281年 에는 충렬왕 에게 强制로 出征 要求하여 日本遠征 에 나섰지만 颱風으로 失敗했고 그 밖에 1288年 大月 遠征 , 1292年 참파 遠征 等 수많은 征服 戰爭을 敢行하였다.

帝國의 內紛과 隊員 [ 編輯 ]

몽케 칸이 戰爭터에서 죽자, 帝國의 首都 카라코룸 에서 몽케 칸의 不在 中 代理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 는, 그의 軍人과 오고타이界 帝王의 支持를 얻어 皇帝에 오르려고 試圖하였다. 이에 쿠빌라이 는 南宋과 一時的인 和平措置를 取하고 急히 歸還하여, 그의 心腹들로 構成된 쿠릴타이 의 推戴를 받아 商道 에서 第5代 카안 에 올랐다. 그 後 아리크부카의 軍事 叛亂을 鎭壓하고 1271年 國號를 隊員 (大元,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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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 On )으로 改稱하였다.

한便, 쿠빌라이 칸에게 不滿을 품은 카이두의 軍隊는 오고타이 카안의 後繼者인 카이두 를 칸으로 推戴하여 쿠빌라이 칸과 軍事 對立함으로써 이때부터 30年에 걸친 內戰이 始作되었다. 內戰을 契機로 킵차크 칸國 차가타이 칸國 은 카이두의 軍隊篇에 서고, 일 칸國 은 쿠빌라이 칸의 軍隊 側에 加擔함으로써 全世界를 支配하던 臺 몽골 帝國은 分裂의 危機를 맞게된다.

特히 카이두 가 死亡(1301年)하고 車파르 의 投降과 歸順(1308年)으로 오고타이 칸國 이 元나라 안으로 移動한 14世紀 初가 되면, 몽골帝國은 4個의 大型 蔚루스가 定立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유라시아 東部의 元나라 , 中央아시아의 차가타이 칸國, 킵차크 草原을 中心으로 하는 킵차크 칸國, 그리고 西아시아의 일 칸國이었다. 그러나 이들 4個 蔚루스를 除外한 다른 蔚루스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4個 蔚루스 內部에는 如前히 여러 個의 小型 蔚루스들이 存在하고 있었다. [14]

팍스 몽골리카 [ 編輯 ]

大型 蔚루스에서는 自己들 나름대로 ' '을 推戴했고, 카간 은 특별한 事由가 없다면 그를 追認하였다. 그러나 如前히 蔚루스들 사이에는 相當한 程度의 '연대성'이 存在했고, 그것을 지속시키는 裝置들이 作動하고 있었다. 카간은 如前히 한 사람에 不過했고 여러 칸國의 칸들은 비록 名目上일지라도 그의 政治的 優位를 認定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카肝이 卽位하면 그는 帝國의 여러 蔚루스에 使臣들을 派遣하여 그 事實을 알렸고, 칸國의 칸들도 卽位하면 카간에게 使臣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카간은 中國 에서 거두어지는 財政收入의 一部를 如前히 칸들에게 보내주었고, 칸들 亦是 各 칸國에서 거두어지는 輸入의 一部를 카간에게 보냈다.

이러한 느슨한 칸國들의 聯盟으로서 帝國的 連帶感과 一體性을 相當 部分 保存은 칸국들 사이에 活潑하고 頻繁한 政治, 經濟, 文化的 交流를 가능케 했고, 그리하여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탄생시켰다. [15]

'팍스 몽골리카' 時代에 人間과 物資의 廣域的인 交流를 可能하게 했던 가장 重要한 기반은 斷然 '驛站(驛站)' 制度였다. 오늘날 驛(驛)을 뜻하는 中國語 單語 '참(站)'의 起源이 된 몽골語 '잠(jam)'은 本來 草原을 지나다가 暫時 쉬어갈 수 있는 宿所 施設을 指稱했는데, 이것이 帝國의 交通 네트워크로 採擇되어 體系的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때부터였다. 그는 카라코룸 을 首都로 定하고 西쪽의 차가타이 칸國ㆍ킵차크 칸國과 連絡을 하기 위해 驛站制를 實施했다. 또한 몽골 草原과 北中國 사이에는 '나린(narin; 秘道)', '모린(morin; 馬道)', '테르겐(tergen; 車道)'이라는 세 驛路를 設置하였다. 以後 帝國의 領域이 漸漸 擴大됨에 따라 驛站網도 유라시아 大陸의 主要 部分을 連結하는 交通網으로 發展하여, 高麗나 러시아와 같은 속국에도 驛站이 設置되기에 이르렀다.

實際로 쿠빌라이 칸의 時代가 되면 원나라 內部에만 1,400餘 個의 驛站이 設置되었고, 이들 驛站을 管理하는 참호(站戶) 또한 35~70만 戶 程度가 배정되고 있었다. 참호에 配定된 이들은 마필ㆍ선박ㆍ수레 等의 交通手段과 使臣들이 머무는 宿所를 책임졌으며, 食糧과 飼料를 恒時 準備해두어야만 했다. 또한 역참을 使用하는 이들에게도 規定이 있어서, 역참 使用者는 신분을 證明하는 '敗者(牌子; paiza)'와 '抛馬車찰(鋪馬差札; belge)'이라는 文件을 所持하도록 定해져 있었다. 일반 事務와는 別途로 軍事的인 緊急 事務를 迅速하게 遂行하기 위해 '急遞鋪(急遞鋪; paykan)'라는 制度를 마련해두기도 했다. 當時 몽골人들이 運營했던 이러한 驛站 制度에 對해서는 有名한 마르코 폴로  또한 《 東方見聞錄 》에서 驚歎어린 語調로 詳細하게 描寫한 바 있다.

몽골 帝國 時代에 마련된 이와 같은 驛站 네트워크는 유라시아를 貫通하는 內陸 交通의 活性化에 크게 寄與했으며, 中央아시아에서 戰爭이 激化된 1280年代 末부터 10餘 年 程度를 제외하고는 大體로 圓滑하게 운영되었다. 이와 關聯하여 驛站 네트워크를 따라 칸國 間의 外交街 이루어지면서 使臣의 往來 以外에 군인ㆍ종교인ㆍ학자ㆍ기술자 等의 交流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 또한 注目할 만하다. 元나라에서 一 칸國으로 派遣되어 라시드 앗 딘 의 《 執事 》의 編纂을 도왔던 볼라드 稱賞(Bolad Chingsang)이나, 일 칸國에서 원나라로 派遣되어 쿠빌라이 칸 麾下에서 重用되었던 자말 앗 딘(Jamal al-Din)ㆍ理事 켈레메치(Isa Kelemechi) 等은 그러한 칸國 간 다양한 交流의 具體的인 사례들에 該當되는 人物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 帝國 支配層들의 財政管理 파트너가 되어 그들의 資本을 運營하던 '오르톡(ortoq; 斡脫)' 商人들의 存在 또한 '팍스 몽골리카'와 關聯하여 빼놓을 수 없는 重要한 要素이다. 오르톡 商人들은 陸路와 海路를 利用하여 遠距離 貿易을 遂行했는데, 그들의 任務는 自身들에게 資本을 提供한 帝國의 支配層들에게 最大의 利益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中國 方面에서는 高利貸業에 從事하여 高額의 利子를 要求하는 '알脫前(斡脫錢)'을 運用한 것으로 惡名이 높았다. 다른 한便으로, 몽골 帝國은 유라시아 大陸 次元의 經濟的 交流를 活性化하고자 은본위 制度를 施行하고 각 地域 間의 交換 單位를 統一하는 措置를 取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은괴 2kg은 中國에서는 '正(錠)', 中央아시아에서는 '야스툭(yastuq)', 西南아시아에서는 '발리視(balish)', 몽골 草原에서는 '쉬케(suke)' 等으로 指稱되면서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經濟 單位로서 通用되었다. 은 4g의 '前(錢)과 '40kg의 '良(兩)'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유라시아 大陸 間 交流의 活性化라는 觀點에서의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 帝國 時期 동안 여러 領域에서 그 樣相을 鮮明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16]

沒落 [ 編輯 ]

몽골 王公 等으로부터 後援을 받고있던 佛敎 敎團을 母體로 할 것을 象徵하던 [17] 白蓮敎 도들이 組織한 紅巾群 의 首領 中 한 名인  朱元璋 은 다른 叛亂勢力을 制壓한 뒤 1368年 明나라 를 建國했다. 그는 북상하여 大道와 상도를 掌握하고 몽골 勢力을 將星 以北으로 몰아냈다. 土곤테무르 칸 은 應唱으로 避身했다가 그곳에서 死亡하고, 高麗 女人 기황후 가 낳은 아들 阿諛시리다르 카안 으로 卽位하여 根據地를 카라코룸으로 옮겼다. [18] 蔚루스들의 聯合體라는 構成的 原理인 '蔚루스 體制'는 이때 最終的으로 崩壞했다. [19]

社會 制度 [ 編輯 ]

몽골 帝國은 匈奴 以來의 몽골 帝國 遊牧 國家의 傳統을 따라 支配하던 遊牧民을 兵丁一致의 社會 制度로 編成하였다. 몽골에 있어 遊牧集團의 基本 單位는 千戶라고도 불린 千名 部隊라고 할 수 있는데, 1000人 程度의 兵士를 差出할 수 있는 遊牧集團을 다스리는 將軍이나 部族長을 그 首長, 卽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千戶 가운데 100人 程度의 兵士를 差出할 수 있는 白虎, 白虎 안에는 10人 程度의 兵士를 差出할 수 있는 十戶가 設置되어, 各各의 章에는 그 所屬 천호장의 近親 가운데 有力한 者가 指名되어 十戶 以上의 遊牧 戰士가 몽골 帝國의 支配層이었던 遊牧 貴族(老얀)을 形成하였다. 천호장 가운데 가장 有力한 者는 多數의 千戶를 거느린 萬戶腸이 되어, 展示에는 軍司令官職을 지냈다.

칭기즈 칸 의 氏族인 보르지긴 黃金氏族 (알탄 우룩)이라 불리며, 領地 百姓(우르스)으로 나뉜 千戶?白虎?십호 集團의 위에 上級 영주 階級으로써 君臨했고, 몽골 皇帝 卽 大칸은 크고 작은 우르스의 가장 큰 部分을 가진 盟主였다. 大칸이나 王族들의 幕營은 오르道라 하여, 有力한 后妃마다 오르度를 갖고 있었다. 各各의 오르도에는 게린 코우(게르 百姓)라 불리는 英敏이 있었는데 그 管理는 오르度의 首長인 皇后가 管理하였다.

行政 制度 [ 編輯 ]

몽골 帝國과 支配 땅
몽골 帝國의 領土와 屬領 그리고 從屬國들의 指導.

大칸의 宮廷에는 케式 이라는 側近 官僚가 있었는데, 이들은 大칸의 親衛隊 를 맡는 同時에 케式텐이라 불리는 家庭機關을 形成하였다. 케式은 코르치(화살筒知己), 우르두치(큰칼잡이), 시바우치(매부리), 非치크치(西紀), 바르價値(門지기), 바울치(料理師), 다라치(술 擔當), 우라치(수레몰이), 모리치(말치기), 스쿨치(옷 擔當), 테메치(낙타치기), 코니치(羊치기) 等 多樣한 職制로 나뉘어 老얀(貴族)의 子女와 大칸에게 個人的으로 起用된 者들이 任命되었다. 이러한 家庭制度는 다른 週値 家門이나 툴루이 家門에도 存在하였으며, 이들 職種을 맡았던 케式텐들은 各 王家의 黨酒格인 칸을 가까이서 섬기며 우르스의 여러 일들을 맡았다.

몽골 帝國은 遊牧民 聯合 國家였지만 中央 政府와 占領地 統治 機關은 大칸 直轄支配 아래 두는 것으로 이들은 케式 出身에 依해 形成된. 中央에서는 케式 內의 몽골 貴族이 任命한 쟈르구치(斷事官)李 놓여 行政 實務와 訴訟을 擔當했다. 그 頂點에 서는 것이 臺斷事官(예케?쟈루그치)으로 最初의 대단史觀은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의 養子가 되었던 時期 쿠툭이 맡았다. 地方에서는 大部分이 몽골人으로 任命되는 다루가치 (監督官)李 都市마다 놓여 占領地 統治를 管掌했다.

그리고 實務에서 쟈르구치나 다루가치를 도와 末端 文書 및 財務 行政을 맡아보는 重要한 職責이 非치크치(西紀)였다. 非치크치는 現地 占領地의 言語에 通達한 字로 한족이나 西夏, 거란, 餘震, 高麗 等은 韓人, 위구르人, 무슬림(이슬람敎徒) 等의 色目人 出身者가 多數 參加하였다.

大칸을 섬기는 非치크치들은 케式의 一員으로서 君主의 側近에서 被支配者에게 내리는 命令인 勅旨(쟐리그)를 記錄하고 飜譯하여 文書로 發給하였다. 中央에서 나온 命令은 쟈無恥라 불리는 驛站制度에 따라 하루에 100km 以上의 速度로 帝國의 幹線路를 따라 迅速하게 帝國 구석구석에 미칠 수 있었다.

이어 몽골 帝國은 大칸뿐 아니라 皇族과 貴族, 皇后의 오르度에도 케式에 準하는 組織이 있어서 그 將校와 英敏, 出入하는 商人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出身의 사람들이 屬해 있었다. 그들의 小宮廷에도 大칸과 같은 行政機關이 생겨나고, 우게(말)라 불리는 命令을 내릴 權力을 지녔다. 14世紀 初까지 王族들은 自身의 領地로 分割된 定住地代의 都市나 農村에 自身의 宮廷에서 다루가치와 徵稅官을 보내 그 地方의 行政에 關與하고 있었다.

軍事 制度 [ 編輯 ]

몽골 帝國의 軍隊는 世界史에서 最初로 軍人들 間의 階級과 體系的인 軍事 制度를 導入하였다. 이는 世界 大戰 以後에서나 볼 법한, 오늘날의 大領 · 少領 · 中領 等과 같은 體系的인 階級을 갖춘 制度였다. 中世 時代까지 東西를 不問하고 兵士들은 다른 나라를 侵略하거나 掠奪하기 위해 모인 存在였다. 그러나 몽골 帝國은 그런 軍 編制 自體를 完全히 뒤바꾸었다. 그리고 몽골 帝國의 强點은 心理 戰術에 있었다. 中世 時代까지 世界의 軍隊는 白兵戰과 같은 卽發的人 戰鬪를 하는 程度가 거의 大部分이었다. 그러나 몽골 帝國은 心理 戰術을 덧붙였다.

몽골 帝國의 軍隊는 十進法 單位로 編成된 萬戶(土偶만)?천호(민한)?백호(쟈간)?십호(아르반)을 土臺로 形成되었다. 千戶는 遊牧民 君의 階級이기도 했는데, 日常에서 各 軍은 醬의 帳幕(게르)을 中心으로 麾下 軍人 게르가 모여서 둥근 陣을 짠 '쿠리엔'이라는 形態로 遊牧 生活을 하였다. 이들은 함께 遊牧 生活을 하고 때로는 集團으로 사냥 試合을 하여 團結과 規律을 强化하였다.

遠征(征服 戰爭)李 決定되면 千戶 單位로 一定한 徵集 머릿數가 配定되고, 各 兵士는 本人 負擔으로 말과 武器, 食糧, 軍需 物資 및 日用品 一切를 自費로 準備했다. 軍團은 嚴格한 上下 關係에 따라 兵士는 所屬 十戶長에게, 十戶長은 所屬 백戶長에게, 백戶長은 所屬 천호장에게 絶對的 服從이 要求되었고, 천호장 또한 自身을 支配하고 있는 칸이나 王族, 萬戶의 支配에 따라야 할 義務가 있었다. 軍律 違反에 對해서는 嚴格하게 處罰했고, 가죽으로 싸인 채 말이 그 위에서 罪人이 죽을 때까지 뛰어 다니게 한다거나 산 채로 가마솥에 삶기祈禱 했다. 한便, 反逆한 여러 武將이 斬首되는 事例도 있는 等 一律的인 處刑法은 採擇되지 않았다.

이렇듯 몽골軍은 基本的으로 遊牧民으로서 遊牧 生活을 基本으로 하고 있었고, 放牧에 適合하지 않은 南쪽의 多濕한 地帶나 西아시아의 沙漠, 受賞 戰鬪에서는 이를 補充하기 위하여 러시아나 아나톨리아, 이라크, 이란, 中央아시아, 킵차크 草原, 中國 等 被支配 定着民들을 適切하게 徵募하는 比率이 그만큼 늘어났다. 이들 被支配 民族의 軍隊는 元나라 의 境遇는 世襲 農地와 免稅 特權을 받은 軍號에 屬한 者들로 徵集됐다. 이는 千戶制를 定着民에게 맞춘 것으로, 君號는 百戶所 및 千戶所로 불리는 集團 單位로 만들어져 한 地方에 存在하는 千戶所는 萬戶府에 總括되었다. 兵士의 軍役은 軍號 몇 家口마다 한 名이 配定돼 兵士를 내지 않은 號에서 아우루크(후방대)가 되어 그 武器와 食糧을 充當했다.

編成 [ 編輯 ]

元君은 右翼(바르운 갈)?중군(코르)?좌익(쥬운 갈)의 3群團으로 나뉘어 中軍 가운데서도 各各의 右翼과 左翼이 存在했다. 이는 몽골의 平素 遊牧 形態를 基本으로 한 것이었고 中央의 칸이 南쪽을 向한 狀態에서 西部의 遊牧集團을 右翼, 東部의 遊牧集團을 左翼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各自의 軍團은 아르緊치(선봉대), 코르(中軍), 아우루크(후방 普及臺)의 세 部隊로 나뉘었다.

先鋒隊는 機動力이 뛰어난 輕騎兵 中心으로 編成되며 戰線에서 遭遇한 敵軍의 粉碎를 目的으로 한다. 中軍은 先鋒隊가 戰力을 무력화한 뒤 戰鬪 地域에 들어가 據點의 制壓과 殘存 勢力의 掃蕩, 그리고 戰利品 掠奪을 맡았다. 全軍의 끝에는 後方代가 家畜 放牧을 하면서 천천히 뒤를 이어 戰線을 뒤에서 밀었다. 後方대는 士兵들의 家族 等 非戰鬪員을 거느리고 征服이 進行되면 制壓이 完了된 地域 後方 據點에 待機하고 몽골 本土에 있던 때와 거의 變하지 않는 遊牧 生活을 보낸다. 戰線의 部隊는 일정한 軍事 活動이 된다고 一旦 後方臺의 大氣 後方에서 普及 받을 수 있었다. 部隊 사이에는 騎馬의 傳令이 오가고 王族, 貴族, 豪族이라도 傳令을 만나면 길을 讓步하도록 規定됐다.

軍人들은 모두 騎兵隊이며 速度가 빠르고 射程距離가 긴 複合弓을 主武器로 했다. 遊牧民은 어렸을 때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데에 익숙하여 强力한 窮氣病이 되었다. 軍人은 征服戰爭에서 1人當 7, 8마리의 말을 데리고 자주 갈아타는 方法으로 驚異的인 行軍 速度를 자랑하였으며, 景氣病이라면 하루 70km를 走破할 수 있었다(중세 유럽의 步兵의 行軍 速度는 하루 20km). 또 衰弱해진 말을 잡아 食糧(고기, 內臟, 피), 武器(뼈, 힘줄), 衣類(毛皮)로 徹底히 利用하는 等 編成과 食糧 調達에 오랜 時間을 割愛할 걱정이 적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호동, ?몽골帝國의 ‘蔚루스 體制’의 形成?, 東洋史學硏究 131 (2015), pp. 333-386
  2. 김호동(2010), 《몽골帝國과 世界史의 誕生》, 돌베개, pp.112~113.
  3. P.Pelliot, Les Mongols et la Papaute (Paris, 1923), pp.15~25
  4. L. Ligeti, Monuments preclassiques, vol. 1 (XIIIe et XIVe siecles) (Budapest, 1972), p.17.
  5. 김호동 (2006). “몽골帝國과 '大元 ' ”. 《歷史學報》 (192): 223~224.  
  6. ?說<大朝>: 元朝建號前蒙古的漢文國號? 蒙元史新硏 (臺北, 1994), pp.23~47.
  7. 김호동 (2006). “몽골帝國과 '大元 ' ”. 《歷史學報》 (192): 224~225.  
  8. 《蒙漢詞典》,內蒙古大學蒙古學?究院蒙古語文?究所編,內蒙古大學出版社1999年出版,第243頁。
  9. 陳得芝,「關於元朝的國號、年代與疆域問題」,北方民族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2009年第3期(總第87期)。
  10. Volker Rybatzki, Igor de Rachewiltz-The early mongols: language, culture and history, p.116
  11. 김호동 (2006). “몽골帝國과 '大元 ' ”. 《歷史學報》 (192): 225~226.  
  12. 김호동 (2006). “몽골帝國과 '大元 ' ”. 《歷史學報》 (192): 223~226.  
  13. 元士 』世祖本紀?七
  14. 김호동, 《蔚루스인가 칸國인가 - 몽골帝國의 카眼科 칸 稱號의 分析을 中心으로 -》, 中央아시아學會, 2016, 2쪽
  15. 김호동, 《碩學 人文講座 12: 몽골帝國과 世界史의 誕生》, 돌베개, 2010, 129쪽
  16. 김호동. 《아틀라스 中央유라시아社》. 四季節. 156~157쪽. ISBN   9788958289326 .  
  17. 野口善敬,「第2章 元?明の??」, 『新アジア??史 08 中?III 宋元明? 中?文化としての??』, ?成出版社, 2010.
  18. 김호동. 《아틀라스 中央유라시아社》. 四季節. 159쪽. ISBN   9788958289326 .  
  19. 김호동. 《아틀라스 中央유라시아社》. 四季節. 151쪽. ISBN   9788958289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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