鄱陽湖 大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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鄱陽湖 大戰 (?陽湖大戰)은 1363年 8月 30日부터 10月 4日까지, 中國 포양호 (?陽湖)에서 일어난 朱元璋 (朱元璋)과 陳友諒 (陳友諒) 사이의 護喪(湖上) 戰鬪이다. 이 싸움으로 陳友諒은 戰死하고, 朱元璋은 西方으로부터의 威脅을 除去하고 江南을 平定할 수 있는 基礎를 다졌고, 以後 원을 北쪽으로 몰아내고 名 王朝를 樹立하는 데 유리한 條件을 만들게 되었다. [1]

또한 鄱陽湖 大田은 中世 世界 最大 規模의 수전(水戰)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背景 [ 編輯 ]

100餘 年에 걸쳐 中國 大陸을 支配하고 있던 원 王朝는 14世紀에 이르러 차츰 기울었다. 원 指定(至正) 11年( 1351年 ) 有腹痛(劉福通)李 紅巾賊을 일으킨 것을 始作으로, 各地에서 떼를 지어 農民叛亂이 일어났다. [2] 江南 地域 各地에서 일어난 反元 武裝蜂起 亦是 잇따라 成功을 거두었다. 長江(長江) 中下流 流域에서는 호북(湖北)의 武昌(武昌, 只今의 우한市 )을 據點으로 한(漢)을 宣布한 陳友諒이나 응천부(應天府, 只今의 난징 )를 據點으로 하고 있던 誤國共(吳國公) 朱元璋, 平康(平江, 只今의 쑤저우市 )을 據點으로 吳王(吳王)을 自處하고 있던 張士誠 (張士誠)李 强大한 세 軸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의 管轄 區域은 서로 隣接해 있었고 서로 軍事力을 動員해 武力으로 合倂해 나갔다. [3]

指定 15年( 1355年 ), 이제까지 盜賊이나 다를 것이 없었던 朱元璋의 軍은 南쪽으로 내려와 長杠을 넘어 원 王朝가 支配하고 있던 太平(太平, 오늘날의 당투현 )을 빼앗고 이어 1356年 에 執耕(集慶)을 陷落시키고 응천부라 이름을 바꾼 뒤, 머지않아 그곳을 根據地로 삼았다. 그러나 1360年 講主(江州, 只今의 主張詩 )를 根據地로 하고 힘을 떨치고 있던 陳友諒에게 太平을 빼앗기고 말았다. 앞서 陳友諒은 指定 17年( 1357年 ) 9月 例文準(倪文俊)을 襲擊해 죽이고 宣慰使(宣慰使)를 自稱하면서 秋補乘(鄒普勝)을 太史(太師), 장필선(張必先)을 丞相으로 삼고, 兵士를 일으켜 南쪽으로 내려와 원의 江西(江西) 여러 로(路)를 陷落시켜 勢力을 불렸으며, 서수휘(徐壽輝)를 맞아 主君으로 삼고 首都를 講主로 옮긴 陳友諒은 곧 서수휘를 脅迫해 그 自身이 漢王(漢王)을 自稱하고 講主를 首都로 삼아 國號를 한, 年號를 代의(大義)라 宣布하였다. 指定 20年(1360年) 陳友諒은 東쪽으로 朱元璋을 攻擊하러 나섰고, 아울러 가는 길에 主君이었던 서수휘를 暗殺하고 自身이 皇帝가 되었다. 陳友諒은 朱元璋 勢力의 長江 太平의 防禦線을 뚫었고, 太平을 빼앗은 陳友諒은 나아가 응천부까지 밀고 들어 왔으며, 兩側은 응천부 西北쪽의 宂漫(龍灣)에서 戰鬪를 벌였다. 이때 陳友諒은 朱元璋에게 敗하고 물러났는데, 戰鬪 當時 工巧롭게도 江물은 썰물이었고 陳友諒이 거느렸던 1百 隻의 巨大한 戰艦들이 물 밑바닥에 걸리는 바람에 陳友諒은 敗하고 講主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제까지 優勢였던 陳友諒과 朱元璋의 立場은 逆轉되었다.

指定 21年( 1361年 ) 陳友諒은 眼鏡(安慶), 講主(江州), 男唱(南昌)이라는 據點을 朱元璋에게 빼앗기고, 武昌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戰鬪의 始作 [ 編輯 ]

朱元璋이 南東쪽으로부터 쳐들어오는 張士誠 (張士誠)에 맞서기 위해 出征한 指定 23年( 1363年 ) 4月, 陳友諒은 形勢의 逆轉을 노리고 大型 戰艦 數百 隻에 60萬을 일컫는 大規模 船團을 거느리고 紅島(洪都, 男唱)로 向했다. 陳友諒이 거느린 船團은 높이가 높지만 運航이 느린 淚腺이라는 大型 戰艦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丹漆」(丹漆) 卽 배를 붉게 옻漆하고 있었다고 한다. 陳友諒의 軍은 水陸 挾攻으로 紅島를 包圍했다. 朱元璋의 조카로 紅桃를 지키고 있던 주문정(朱文正)과 將軍 燈油(鄧愈)는 火力을 驅使하며 85日 동안을 버텼다. 그 사이에 朱元璋은 응천부로 돌아왔고, 7月에 이르러 흰色으로 漆한 船團과 20萬 兵力을 動員해 決戰에 나섰다. 陳友諒度 男娼을 包圍하고 있는 것이 不利함을 깨닫고 鄱陽湖로 君을 이동시켰고, 兩者는 드디어 衝突하게 되었다.

戰鬪의 展開 [ 編輯 ]

아흐레만에 朱元璋의 船團은 男唱에 到着했다. 鄱陽湖로 이동한 陳友諒의 船團은 大型 戰艦을 모아 배와 배를 사슬로 잇고 陣을 치고 있었다.

朱元璋의 船團은 모두 11個 部隊로 偏在되어 大選이 가운데 있고 小型 船舶들을 中心으로 火力을 重視하고 있었다. 나머지 步兵隊는 男唱에 上陸해 南昌의 守備軍을 支援하였다. 나아가 朱元璋은 決戰이 있기 나흘 前에 伏兵을 湖水 어귀에 숨겨 두었다. 7月 20日(陽曆 8月 29日) 兩軍의 主力 部隊가 鄱陽湖에서 對峙, 다음날 새벽에 戰鬪가 始作되었다. 이보다 사흘 前에 朱元璋側은 軍船이 작고 兵士도 적어서 劣勢에 處해 있었고, 陳友諒의 大型 戰艦人 淚腺이 높은 位置에서 돌을 날리며 주원場側의 軍船을 攻擊하고 있었다. 이 攻擊으로 朱元璋 自身이 탄 배도 破損되어 危險에 處하였으나 錦衣衛(錦衣衛) 所屬 前線에 依해 朱元璋은 無事할 수 있었다.

小型 船舶이 많았던 朱元璋의 船團은 이러한 陳友諒의 大型 戰艦의 攻擊에 두려움을 느꼈기에 싸움은 不利하였으며, 陳友諒의 部下로 勇將(勇將)으로 이름난 將軍 장정변(張定邊)李 一時에 朱元璋의 旗艦(旗艦)에 肉薄해 들어 오는 等 苦戰하였다. 그러나 陳友諒側은 앞서의 男唱에서의 長期 包圍戰으로 지쳐 있었고, 朱元璋이 곽興(郭興)의 建議를 받아들여 化工(火攻)과 投石器를 使用하기 始作했다. 流通해(兪通海)가 거느리는 火砲(火砲) 船團이 鈍重한 陳友諒의 船舶들을 次例대로 불태우는 等, 싸움의 主導權은 徐徐히 朱元璋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戰鬪 나흘째(陽曆 9月 2日)에 이르렀을 때 陳友諒側의 淚腺과 艦船 20餘 隻이 불탔고, 最小限 2萬 5千 名에 이르는 陳友諒側 軍士들이 戰死했다. 陳友諒의 동생인 진우인(陳友仁), 軫憂귀(陳友貴) 및 그 平章(平章) 進步略(陳普略) 等도 戰死했다.

또한 戰鬪 사흘째, 갑자기 불어온 東北風에 朱元璋은 決死隊로 組織한 火船(火船) 일곱 隻을 陳友諒 艦隊로 突進시켰고, 때마침 불어온 强風으로 密集해 있던 大型 船舶들은 불타버렸다. 「煙氣와 불꽃은 하늘에 가득하고, 湖水는 여기저기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地獄道가 演出되고 있었다. 陳友諒의 軍은 斬首된 自家 2千餘 級에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은 者도 셀 수 없을 程度였으며 거의 潰滅的人 被害를 입고 물러나게 되었다. 나아가 陳友諒의 동생으로 勇猛과 智略이 뛰어나다는 評을 받고 있던 진우인이 이 戰鬪에서 死亡한 것은 陳友諒 軍隊의 士氣를 急激히 低下시켰다.

鄱陽湖는 가을 햇볕으로 因해 水位가 낮아져 있었고, 陳友諒의 軍이 거느리고 온 大型 船舶들은 濕氣를 많이 吸收해 무거워져서 湖水 바닥에 닿기도 하는 等의 理由로 물가에 닿을 수 없었다. 朱元璋의 船團에 屬한 배들은 작고 速度가 빨라 攻擊이 유리하였고 物價에 接岸해 오랫동안 버티며 싸울 수도 있었다. 8月 下旬에 朱元璋의 陸軍이 男娼을 救해냈으며 一部 주원場側의 軍士들이 감江(?江), 長江(長江) 等地로 撤收하고 一部 艦隊는 남아서 陳友諒의 軍隊와 繼續 싸우며 步兵이 와서 水陸(水陸) 包圍網을 完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8月 26日(陽曆 10月 4日) 陳友諒은 주원將軍의 包圍網을 突破해 武昌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朱元璋이 湖水 어귀에 숨겨 두었던 伏兵에 가로막혀 또 다시 며칠 동안 對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兵站線度 끊어지고, 陳友諒의 軍隊에서는 쓰러져 죽거나 달아나는 者가 續出하였다. 陳友諒은 湖水 어귀를 突破하려다 화살에 맞아 戰死했다. 陳友諒이 거느리고 왔던 軍勢 가운데 2萬 名이 죽고 50萬 名의 軍士들은 무너져 흩어져버렸다. [3] 一部가 武昌으로 돌아오는데 成功했으나, 大將을 잃은 空白은 컸고, 이듬해 2月 朱元璋은 軍事를 거느리고 武昌을 包圍 攻擊했다. 結局 그 아들 眞理(陳理)가 1364年 에 朱元璋에게 降伏하였다. 이로써 朱元璋은 陳友諒이 거느리고 있던 張姜 中流의 光大한 地域을 占領하게 되었다. [3] 그러나 이 戰鬪에서 주원長側도 7千餘 名의 兵士를 잃었다.

戰鬪의 結果와 意義 [ 編輯 ]

鄱陽湖 大田은 中國 戰爭史에서 少數 兵力으로 勝利를 거둔 有名한 前例였다. 朱元璋은 陳友諒의 大兵力이 堅固한 남창성을 오랫동안 攻擊하다가 挫折된 狀況에서 鄱陽湖 入口를 막아 退路를 遮斷하고, 兵力을 集中시켜 化工(火攻)으로 그 主力을 殲滅하며, 後方의 水陸 兩쪽 길을 遮斷하고, 包圍網을 뚫으려는 陳友諒의 大軍을 전멸시키는데 成功했다. 이 戰鬪로 朱元璋은 江南乙 統一할 수 있는 발板을 마련했다. [3] [1] 鄱陽湖 戰鬪로 陳友諒 勢力이 사라지고, 朱元璋의 主要한 적은 장사成果 원 調整만이 남게 되었다.

各州 [ 編輯 ]

  1. “??湖之?” (中國語). 中???事. 2013年 12月 1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月 5日에 確認함 .  
  2. “??湖之?” (中國語). 中???事 . 2014年 1月 5日에 確認함 .  
  3. “??湖之?” (中國語). 江西: 江西?防?育?. 2014年 1月 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月 5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