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묵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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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묵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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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紀 ~ 1206年 파일:White Sulde of the Mongol Empire.jpg
몽골 초원 통일 직후인 1207년경의 지도. 카묵 몽골은 북동쪽 구석에 해당한다.
몽골 草原 統一 直後인 1207年 京義 地圖. 카묵 몽골은 北東쪽 구석에 該當한다.
수도 케룰렌 江 近郊
政治
政治體制 選擧君主制

11世紀
1120年 ~ 1149年
1149年 ~ 1156年
1156年 ~ 1161年
1189年 ~ 1206年

카이두
카불 칸 (初代 칸)
癌바카이 칸 (2代)
쿠툴라 칸 (3代)
예수게이 바토르 (4代)
칭기즈 칸 (5代, 마지막)
立法府 쿠릴타이
人文
公用語 中世 몽골語
데모님 몽골人
宗敎
宗敎 텡그리校

카묵 몽골 (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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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muq Mongγol ,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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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muγ Mongγol )은 카마그 몽골 ( 몽골語 : Хамаг Монгол )이라고도 한다. 12世紀 몽골高原 에 存在한 不足 聯合體이다. 몽골 帝國 의 全身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 [2]

歷史 [ 編輯 ]

室韋 中에서 몽골族 의 先祖인 몽올室韋는 《 舊唐書 》와 《 新唐書 》 等에 記述된 20部 室韋의 하나였다. 《舊唐書》와 《新唐書》는 몽올室韋가 網巾下(望建河, 《新唐書》는 室建河로 記錄함)의 南쪽에 있다고 했는데 網巾하는 只今의 에르구네下 및 아무르江 (헤이룽江)에 該當된다. 이들은 本來 흥안령 의 西쪽인 에르구네하로부터 헤이룽江 上流의 山林과 草原이 交叉하는 地域에 居住하고 있었다. 9世紀 中葉 위구르 帝國 의 崩壞를 契機로 실爲人들이 大移動을 斷行하자, 몽올室韋 도 狩獵과 遊牧이 交叉하는 곳인 헨티산맥의 오논강 流域으로 移動해왔다. 몽골族의 起源에 關해 라시드 앗딘 은 이렇게 說明하고 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依하면, 다른 種族들이 몽골種族에 對해 勝利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慘殺視켰던지 두 男子와 두 女子를 빼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두 家族은 敵에 對한 두려움 때문에 險峻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周邊은 모두 山과 숲이었고 通過하기에 至極히 어려운 좁고 險한 길 하나를 除外하고는 어느 方向에서도 없었다. 그 山地 中間에는 木草가 豐富한 아름다운 草原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구네 쿤이었다. 쿤의 뜻은 峽谷이고 에르구네는 ‘가파르다’이니 곧 ‘가파른 산애(山崖)’를 意味한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後孫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婚姻을 통해서 (數字가) 많아졌다.

[3]

라시드 앗딘의 說明은 몽골族이 에르구네를 基盤으로 成長해왔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몽올室韋가 에르구네 一帶에 居住했다는 漢文 記錄과도 一致한다. [4] 몽골이라는 名稱이 가장 먼저 보이는 漢文 史料는 《舊唐書》「북적前(北狄傳)」으로 ‘몽올(蒙兀)’이라 했고, 《新唐書》「북적前」에서는 ‘夢窩(蒙瓦)’라고 했는데, 當時 音韻 通例上 올(兀)과 와(瓦)는 같은 音이다. 요·금시대의 漢文 文獻에서 ‘맹고(萌古)’ [5] , ‘맹골(萌骨)’ [6] 等으로 表記되다가 12世紀 末頃에 ‘蒙古(蒙古)’로 바뀌었다. 또한 《 몽골祕事 》에서는 “ 칭기스칸 의 뿌리가 되는 부르테 치노 와 孤兒 마랄이 ‘텡기스(Tengis)’를 건너와 오논강의 發源地인 부르칸 칼둔 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여기서 ‘텡기스’는 튀르크어 로 바다를 의미하지만, 內陸 한가운데 바다는 湖水 일 可能性이 크다. 實際 몽골人들은 큰 湖水를 바다를 의미하는 ‘달라이(Dalai)’로 表記하는 境遇가 많기 때문에 ‘텡기스’가 ‘쿨룬號’가 될 可能性이 濃厚하다. [7] 흥안령 西쪽地域의 에르구네와 쿨룬 部이르 草原에 居住하던 몽올室韋가 몽골의 直接 祖上이 된다는 것이 많은 史料를 통해서 立證되고 있다.

840年 , 위구르 帝國의 滅亡은 몽올室韋를 비롯한 실偉人들의 몽골리아 進出을 容易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移住한 실爲人들은 當時 大帝國을 建設했던 튀르크 위구르 의 先進文化와 遊牧經濟를 吸收함으로써 커다란 變化를 겪게 되었다. 이것은 실爲人들이 흥안령 西쪽의 에르구네下 一帶에서 狩獵과 若干의 牧畜 , 農耕 을 하던 經濟에서 騎馬 量 遊牧經濟로 本質的인 轉換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遊牧經濟로의 轉換은 흥안령 一帶의 狩獵과 原始農耕에 비해 보다 安定的인 生産을 保障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草原으로 移住한 狩獵民은 遊牧民이 되었고, 이들의 騎馬 量 遊牧民化는 몽골 草原의 새로운 變化를 豫告하고 있었다. [8]

11世紀까지 에르구네 江 流域에 居住하던 몽올室韋는 거란의 統制가 사라진 틈을 타서 南下를 始作하여 [9] 12世紀에 이르러 부르칸 칼둔 地域에 定着했다. [10] 몽골 草原이라는 生態環境에서 草原 騎馬 量 遊牧民으로 轉換한 몽올室韋는 向上된 機動力을 발板으로 크고 작은 不足 戰爭을 통해 强力한 勢力으로 急浮上했다. 以後 몽올室韋를 主體로 실爲人들이 漸次 몽골族으로 凝集되었다. [8]

툼非나이 歲첸(Tumbinai Se?en)의 아들인 카불 은 未發達的인 狀態에 있던 몽골 社會를 統一해 스스로를 君主로 하는 君長國家 로 진전시켰고, [11] 몽골祕事 》에서는 카불이 모든 몽골(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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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muq Mongγol )을 支配하는 으로 推戴되었다고 傳한다. [12]

몽골人들은 周邊 集團과의 戰爭을 통해서 조금씩 勢力을 强化시켜 나갔다. 女眞族 金나라 거란 을 멸망시킨 뒤 草原에 對한 統制力이 弱化된 틈을 타서 邊境 地域에 對한 掠奪顚倒 敢行하였다. 禁軍은 카불 칸의 侵攻을 抑制하지 못하고 連霸했다. 1147年, 金나라는 不得已하게 카불 칸과 强化를 맺고 케룰렌 江 以北의 27城을 割讓하고 每年 소·量·美·두을 주는 것을 約束하고, 카불 칸을 "몽골국週(朦骨?主)"로 冊封했다. 이때 카불 칸은 兆원皇帝(祖元皇帝)를 自稱해 천흥(天興)으로 開園했다고 한다. [13] [12]

카불 칸은 自身의 아들이 아니라 四寸 아우인 癌바가이 를 後繼者로 했고, 카불 칸 死後에는 癌바가이가 칸으로 卽位해 카묵 몽골을 統治했다. 그러나 癌바가이 칸은 타타르 蔚루스 의 謀略에 따라 딸의 媤집을 보내다가 사로잡혀 金나라 에 끌려가 그곳에서 處刑됐다. 以後 타타르 蔚루스는 몽골 蔚루스 最大의 怨讐로 戰爭을 繼續하게 된다. [14]

癌바가이 칸 事後 몽골 蔚루스는 카불 칸의 아들 쿠툴라 를 칸으로 推戴했다. 쿠툴라 칸은 카다안 타이시(Qada'an Tai?i) 等과 協力해 몽골 蔚루스의 復權과 타타르 蔚루스를 打倒하기 위해 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쿠툴라 칸의 治世에 카불 칸의 孫子이자 쿠툴라 칸의 조카인 예수게이 바투르 메르키트 蔚루스 에게 시집갈 豫定이던 호엘룬 을 拉致하고 自身의 夫人으로 삼았다. [15]

쿠툴라 칸 事後 몽골 社會에서 有力 集團 間의 對立이 繼續되면서 마침내 前 몽골을 統治할 수 있는 칸은 選出되지 못했다. 키야트 集團의 首長인 예수게이 바투르가 한때 有力했지만 예수게이 또한 타타르 蔚루스의 謀略에 依해 毒殺되고 말았다. 예수게이의 죽음을 契機로 몽골 蔚루스의 內部 分裂이 觸發됐으며 癌바가이 칸을 始祖로 한 타이치우트 集團과 카불 칸을 始祖로 하는 키야트 集團은 各各 勢力을 이끌게 돼 예수게이 바투르의 長男 테무진 麾下의 많은 百姓들이 흩어졌다. [16]

예수게이가 타타르人들에게 毒殺된 뒤 테무진 一家는 부르칸 칼둔 산자로 숨어들어가 悲慘한 生活을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兄弟들이 成長하면서 狀況은 조금씩 好轉되었다. 옹기라트 의 데이 歲첸의 딸 부르테 와 婚姻한 뒤 아버지의 義兄弟였던 케레이트의 土오릴 칸 을 찾아가 그의 家神이 되었다. 테무진은 이따부터 敵對勢力을 하나씩 擊破해 나갔다. [17] 1186年, 테무진은 親族들의 代表가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支持를 받아 칸으로 推戴되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集團 및 滋茂카 陣營과의 激戰에서 敗北하여 自身이 指揮하던 11個의 陣營 中 10個의 陣營이 그로부터 離脫했다. [12]

따라서 테무진은 自己 一族의 도움 或은 自身이 屬한 部族이나 氏族의 도움이 아니라, 아무런 血緣關係는 없지만 自身을 위해 自身을 위해 獻身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組織하고 그들과의 强力한 結束力을 통해서 創出되는 힘을 바탕으로 [12] 타이치우트, 메르키트, 타타르와 같은 蔚루스들을 擊破했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高原에서 가장 强力한 두 集團인 케레이트 나이만 을 擊破하고 服屬시켰다. [17]

1206年 몽골人들은 오논 江 發源地 附近에 모여 9個의 흰 旗발을 세우고 테무진을 '稱기스 칸'으로 推戴하였다. 몽골帝國 이 誕生한 것이었다. 以後 투레게네 카툰 의 攝政 時期에 西아시아의 카프카즈 地方에서 鑄造된 貨幣에 카묵 몽골 蔚루스(몽골의 모든 百姓)라는 表現의 延長線에서 울룩 몽골 蔚루스( 몽골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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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uγ Mongγol Ulus ) [週 1] 라는 表現이 使用됐고, 狗肉 칸 敎皇 에게 보낸 書翰에서는 예케 몽골 蔚루스 라는 表現이 使用되었다. [12]  몽골의 君主들은 그저 自身을 모든 몽골 百姓들의 統治者라는 程度의 意味에서 ‘모든 몽골 百姓’ 或은 ‘큰 몽골 百姓’의 君主라고 불렀고, 이것이 後日 漸次 寬容化되면서 一種의 國號처럼 使用한 것으로 보인다. [18]

各州 [ 編輯 ]

  1. Bat-Ocher Bold (2001), Mongolian nomadic society: a reconstruction of the "medieval" history of Mongolia , Richmond, Surrey: Curzon, p. 176, ISBN   0-7007-1158-9
  2. History of the Mongolian People's Republic By Akademii?a? nauk SSSR, p.99
  3. 라시드 앗딘 지음, 김호동 譯註(2002), 『不足地』, 四季節出版社, 252~253쪽
  4. 《新唐書》 卷291, 「室韋傳」
  5. 《遼史》 卷24, 「道宗本紀」24, 도종 4年朝
  6. 《金史》 卷44, 志25, 兵制
  7. 周淸澍(2001), 『元蒙史札』, 內蒙古大學出版社, 21쪽
  8.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滿洲 이야기》. 東北亞歷史財團 . 54~57쪽. ISBN   978-89-6187-305-5 .  
  9. 白石典之『モンゴル帝?史の考古?的?究』同成社, 2002, 36~37쪽
  10. 김호동 (2016). 《아틀라스 中央유라시아社》. 四季節. 127쪽. ISBN   9788958289326 .  
  11. 村上正二?注(1970),『モンゴル秘史 1?』平凡社, 59~60쪽.
  12. 김호동 (2010). 《몽골帝國과 世界史의 誕生》. 돌베개. ISBN   9788971994047 .  
  13. 『大金?志』「皇統七年……是?、朦骨?平。初、撻懶?誅、其子勝花都?君者、率其父故部曲以叛、?朦骨通。兀朮之未死也、自?中原所?神臂弓手八万討之、連年不能克。皇統之六年八月、復遣蕭保壽奴?之和、議割西平河以北二十七團塞?之、歲遺牛羊米荳、且?其酋長熬羅?極烈、?朦輔?主、至是始和、歲遺甚厚。于是熬羅?極烈自?祖元皇帝、改元天興。大金用兵連年、卒不能討、但遣精兵、分?要害而還」
  14. 村上正二?注(1970),『モンゴル秘史 1?』平凡社, 66~67쪽.
  15. 村上正二?注(1970),『モンゴル秘史 1?』平凡社, 70~77쪽.
  16. 村上正二?注(1970),『モンゴル秘史 1?』平凡社, 99~102쪽.
  17. 김호동 (2016). 《아틀라스 中央유라시아社》. 四季節. 130쪽. ISBN   9788958289326 .  
  18. 김호동(2006), 《몽골帝國과 '大元'》, 歷史學報 192卷 192號, 223쪽.

內容主

  1. 울룩(Uluγ)은 튀르크어 로 '큰'을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