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묵 몽골
(
몽골語
:
?????
??????
Qamuq Mongγol
,
몽골語
:
?????
??????
Qamuγ Mongγol
)은
카마그 몽골
(
몽골語
:
Хамаг Монгол
)이라고도 한다. 12世紀
몽골高原
에 存在한 不足 聯合體이다.
몽골 帝國
의 全身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
[2]
歷史
[
編輯
]
室韋
中에서
몽골族
의 先祖인 몽올室韋는 《
舊唐書
》와 《
新唐書
》 等에 記述된 20部 室韋의 하나였다. 《舊唐書》와 《新唐書》는 몽올室韋가 網巾下(望建河, 《新唐書》는 室建河로 記錄함)의 南쪽에 있다고 했는데 網巾하는 只今의 에르구네下 및
아무르江
(헤이룽江)에 該當된다. 이들은 本來
흥안령
의 西쪽인 에르구네하로부터 헤이룽江 上流의 山林과 草原이 交叉하는 地域에 居住하고 있었다. 9世紀 中葉
위구르 帝國
의 崩壞를 契機로 실爲人들이 大移動을 斷行하자, 몽올室韋
도 狩獵과 遊牧이 交叉하는 곳인 헨티산맥의
오논강
流域으로 移動해왔다. 몽골族의 起源에 關해
라시드 앗딘
은 이렇게 說明하고 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依하면, 다른 種族들이 몽골種族에 對해 勝利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慘殺視켰던지 두 男子와 두 女子를 빼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두 家族은 敵에 對한 두려움 때문에 險峻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周邊은 모두 山과 숲이었고 通過하기에 至極히 어려운 좁고 險한 길 하나를 除外하고는 어느 方向에서도 없었다. 그 山地 中間에는 木草가 豐富한 아름다운 草原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구네 쿤이었다. 쿤의 뜻은 峽谷이고 에르구네는 ‘가파르다’이니 곧 ‘가파른 산애(山崖)’를 意味한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後孫들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婚姻을 통해서 (數字가) 많아졌다.
[3]
라시드 앗딘의 說明은 몽골族이 에르구네를 基盤으로 成長해왔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몽올室韋가 에르구네 一帶에 居住했다는 漢文 記錄과도 一致한다.
[4]
몽골이라는 名稱이 가장 먼저 보이는 漢文 史料는 《舊唐書》「북적前(北狄傳)」으로 ‘몽올(蒙兀)’이라 했고, 《新唐書》「북적前」에서는 ‘夢窩(蒙瓦)’라고 했는데, 當時 音韻 通例上 올(兀)과 와(瓦)는 같은 音이다. 요·금시대의 漢文 文獻에서 ‘맹고(萌古)’
[5]
, ‘맹골(萌骨)’
[6]
等으로 表記되다가 12世紀 末頃에 ‘蒙古(蒙古)’로 바뀌었다. 또한 《
몽골祕事
》에서는 “
칭기스칸
의 뿌리가 되는
부르테 치노
와 孤兒 마랄이 ‘텡기스(Tengis)’를 건너와 오논강의 發源地인
부르칸 칼둔
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여기서 ‘텡기스’는
튀르크어
로 바다를 의미하지만, 內陸 한가운데 바다는
湖水
일 可能性이 크다. 實際 몽골人들은 큰 湖水를 바다를 의미하는 ‘달라이(Dalai)’로 表記하는 境遇가 많기 때문에 ‘텡기스’가 ‘쿨룬號’가 될 可能性이 濃厚하다.
[7]
흥안령 西쪽地域의 에르구네와 쿨룬 部이르 草原에 居住하던 몽올室韋가 몽골의 直接 祖上이 된다는 것이 많은 史料를 통해서 立證되고 있다.
840年
, 위구르 帝國의 滅亡은 몽올室韋를 비롯한 실偉人들의
몽골리아
進出을 容易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移住한 실爲人들은 當時 大帝國을 建設했던
튀르크
와
위구르
의 先進文化와 遊牧經濟를 吸收함으로써 커다란 變化를 겪게 되었다. 이것은 실爲人들이 흥안령 西쪽의 에르구네下 一帶에서 狩獵과 若干의
牧畜
,
農耕
을 하던 經濟에서 騎馬 量 遊牧經濟로 本質的인 轉換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遊牧經濟로의 轉換은 흥안령 一帶의 狩獵과 原始農耕에 비해 보다 安定的인 生産을 保障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草原으로 移住한 狩獵民은 遊牧民이 되었고, 이들의 騎馬 量 遊牧民化는 몽골 草原의 새로운 變化를 豫告하고 있었다.
[8]
11世紀까지
에르구네 江
流域에 居住하던 몽올室韋는 거란의 統制가 사라진 틈을 타서 南下를 始作하여
[9]
12世紀에 이르러
부르칸 칼둔
地域에 定着했다.
[10]
몽골 草原이라는 生態環境에서 草原 騎馬 量 遊牧民으로 轉換한 몽올室韋는 向上된 機動力을 발板으로 크고 작은 不足 戰爭을 통해 强力한 勢力으로 急浮上했다. 以後 몽올室韋를 主體로 실爲人들이 漸次 몽골族으로 凝集되었다.
[8]
툼非나이 歲첸(Tumbinai Se?en)의 아들인
카불
은 未發達的인 狀態에 있던 몽골 社會를 統一해 스스로를 君主로 하는
君長國家
로 진전시켰고,
[11]
《
몽골祕事
》에서는 카불이 모든 몽골(
몽골語
:
?????
??????
Qamuq Mongγol
)을 支配하는
칸
으로 推戴되었다고 傳한다.
[12]
몽골人들은 周邊 集團과의 戰爭을 통해서 조금씩 勢力을 强化시켜 나갔다.
女眞族
의
金나라
가
거란
을 멸망시킨 뒤 草原에 對한 統制力이 弱化된 틈을 타서 邊境 地域에 對한 掠奪顚倒 敢行하였다. 禁軍은 카불 칸의 侵攻을 抑制하지 못하고 連霸했다. 1147年, 金나라는 不得已하게 카불 칸과 强化를 맺고 케룰렌 江 以北의 27城을 割讓하고 每年 소·量·美·두을 주는 것을 約束하고, 카불 칸을 "몽골국週(朦骨?主)"로 冊封했다. 이때 카불 칸은 兆원皇帝(祖元皇帝)를 自稱해 천흥(天興)으로 開園했다고 한다.
[13]
[12]
카불 칸은 自身의 아들이 아니라 四寸 아우인
癌바가이
를 後繼者로 했고, 카불 칸 死後에는 癌바가이가 칸으로 卽位해 카묵 몽골을 統治했다. 그러나 癌바가이 칸은
타타르 蔚루스
의 謀略에 따라 딸의 媤집을 보내다가 사로잡혀
金나라
에 끌려가 그곳에서 處刑됐다. 以後 타타르 蔚루스는 몽골 蔚루스 最大의 怨讐로 戰爭을 繼續하게 된다.
[14]
癌바가이 칸 事後 몽골 蔚루스는 카불 칸의 아들
쿠툴라
를 칸으로 推戴했다. 쿠툴라 칸은 카다안 타이시(Qada'an Tai?i) 等과 協力해 몽골 蔚루스의 復權과 타타르 蔚루스를 打倒하기 위해 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쿠툴라 칸의 治世에 카불 칸의 孫子이자 쿠툴라 칸의 조카인
예수게이 바투르
는
메르키트 蔚루스
에게 시집갈 豫定이던
호엘룬
을 拉致하고 自身의 夫人으로 삼았다.
[15]
쿠툴라 칸 事後 몽골 社會에서 有力 集團 間의 對立이 繼續되면서 마침내 前 몽골을 統治할 수 있는 칸은 選出되지 못했다. 키야트 集團의 首長인 예수게이 바투르가 한때 有力했지만 예수게이 또한 타타르 蔚루스의 謀略에 依해 毒殺되고 말았다. 예수게이의 죽음을 契機로 몽골 蔚루스의 內部 分裂이 觸發됐으며 癌바가이 칸을 始祖로 한 타이치우트 集團과 카불 칸을 始祖로 하는 키야트 集團은 各各 勢力을 이끌게 돼 예수게이 바투르의 長男
테무진
麾下의 많은 百姓들이 흩어졌다.
[16]
예수게이가 타타르人들에게 毒殺된 뒤 테무진 一家는 부르칸 칼둔 산자로 숨어들어가 悲慘한 生活을 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兄弟들이 成長하면서 狀況은 조금씩 好轉되었다.
옹기라트
의 데이 歲첸의 딸
부르테
와 婚姻한 뒤 아버지의 義兄弟였던 케레이트의
土오릴 칸
을 찾아가 그의 家神이 되었다. 테무진은 이따부터 敵對勢力을 하나씩 擊破해 나갔다.
[17]
1186年, 테무진은 親族들의 代表가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支持를 받아 칸으로 推戴되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集團 및
滋茂카
陣營과의 激戰에서 敗北하여 自身이 指揮하던 11個의 陣營 中 10個의 陣營이 그로부터 離脫했다.
[12]
따라서 테무진은 自己 一族의 도움 或은 自身이 屬한 部族이나 氏族의 도움이 아니라, 아무런 血緣關係는 없지만 自身을 위해 自身을 위해 獻身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組織하고 그들과의 强力한 結束力을 통해서 創出되는 힘을 바탕으로
[12]
타이치우트, 메르키트, 타타르와 같은 蔚루스들을 擊破했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高原에서 가장 强力한 두 集團인
케레이트
와
나이만
을 擊破하고 服屬시켰다.
[17]
1206年 몽골人들은 오논 江 發源地 附近에 모여 9個의 흰 旗발을 세우고 테무진을 '稱기스 칸'으로 推戴하였다.
몽골帝國
이 誕生한 것이었다. 以後
투레게네 카툰
의 攝政 時期에 西아시아의 카프카즈 地方에서 鑄造된 貨幣에 카묵 몽골 蔚루스(몽골의 모든 百姓)라는 表現의 延長線에서 울룩 몽골 蔚루스(
몽골語
:
????
??????
????
Uluγ Mongγol Ulus
)
[週 1]
라는 表現이 使用됐고,
狗肉 칸
이
敎皇
에게 보낸 書翰에서는
예케 몽골 蔚루스
라는 表現이 使用되었다.
[12]
몽골의 君主들은 그저 自身을 모든 몽골 百姓들의 統治者라는 程度의 意味에서 ‘모든 몽골 百姓’ 或은 ‘큰 몽골 百姓’의 君主라고 불렀고, 이것이 後日 漸次 寬容化되면서 一種의 國號처럼 使用한 것으로 보인다.
[18]
各州
[
編輯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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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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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容主
- ↑
울룩(Uluγ)은
튀르크어
로 '큰'을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