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飯 (麗末鮮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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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飯 (趙?, 1341年 ~ 1401年 )은 高麗 朝鮮 初의 文身이다. 本貫은 配天 (白川)이다.

生涯 [ 編輯 ]

1341年 西海도 白晝 (白州) [1] 에서 조세경(趙世卿)의 아들로 태어났다. 12歲에 아버지를 따라 北京(北京)에 가서 매夫人 單平章(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漢文과 蒙古語를 배웠다. 以後 元나라 丞相 탈탈 (脫脫)의 認定을 받아 中書省歷史(中書省譯史)가 되었다. 1368年 (恭愍王 17年) 아버지가 늙어 換局하였다.

1382年(禑王 8年) 判圖判書(版圖判書)로서 賀正使 兼 州廳舍가 되어 明나라에 가서 諡號와 承襲을 請했고, 돌아와 密直副使가 되었다. 1385年 에도 謝恩使(謝恩使)로 明나라에 가서 諡號와 承襲을 請하고 돌아왔다. 이 때 高麗 朝廷에서 專橫을 일삼던 염흥방 의 종인 李珖(李光)이 自己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였다.

이에 염흥방 에 依해 投獄되었으나, 이 일은 政治的인 事件으로 發展하여 崔瑩 (崔瑩)과 事前 協議를 한 禑王 의 名으로 朝飯은 釋放되고 當時 專橫을 일삼던 임견미 (林堅味)과 염흥방 一黨이 處刑되는 無盡皮靴(戊辰被禍)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正月에 處罰했다고 正月支柱(正月之誅)라고 부르기도 한다. [2]

以後 高麗 朝廷에서 知密直司事(知密直司事)를 지내다가 1392年 陰曆 7月 17日 에 朝鮮 開國에 參與하여 2等功臣에 錄勳(錄勳)되고 知中樞院事(知中樞院事)에 任命되었으며 復興軍 (復興君, 복흥군)에 封해졌다. 千秋使(千秋使)로서 明나라와 朝鮮을 자주 오갔다. 判中樞院事(判中樞院事)와 參贊門下府使(參贊門下府事) 等을 지냈고 1401年 世上을 떠났다. 諡號는 宿衛(肅魏)라 하였다.

活動 [ 編輯 ]

朝飯은 염흥방 의 謀陷에 依한 誣告로 發生했던 1388年 의 ‘조반의 난’ 以後 동지밀직사사·開城尹에 除授됐다. 禑王과 昌王을 거쳐 1389年, 恭讓王이 王位에 오르자 순안군(順安君) 往訪(王昉)과 함께 明나라에 가서 王의 卽位를 알렸다. 이 때 尹이(尹彛)·이초(李初) 等의 本國에 對한 無故 事實을 明皇帝에게 잘 說明하여 疑心을 풀게 하였다. 다음해 돌아와 尹이와 이초의 事件을 報告하여 關聯된 人物로 알려진 異色(李穡) 等 數十 名이 被害를 當하는 獄事를 일으켰다.

1391年 空轉(公田)을 함부로 빼앗아 성헌(省憲)의 彈劾을 받고 官職이 削奪되어 竹林(竹林)으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나, 1392年 知密直司事(知密直司事)가 되었다. 朝鮮 開國 後에는 開國功臣 2等에 책록되고 복흥군(復興君)에 封해졌으며, 知中樞院事가 되었다. 또한, 百官(百官)의 狀聞(狀文)을 가지고 朝鮮 開國의 事實을 알리러 明나라에 갔다가 석달 만에 돌아왔다.

1394年 (太祖 3) 6月 李芳遠 (李芳遠)과 함께 明나라에 表文(表文)을 올렸고, 11月 에는 李芳遠을 遂行하여 再次 明나라에 다녀왔다. 1395年 判中樞院事에 除授되었다가, 相議門下府史(商議門下府事)를 거쳐 參贊門下府使(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1396年 1397年 에도 賀正使로서 明나라에 갔으나, 燈住(登州)에서 帝王(齊王)의 妨害로 다음해에 돌아왔다. [2]

朝飯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子孫 [ 編輯 ]

  • 조서로(趙瑞老)
  • 조서강(趙瑞康)
  • 조서안(趙瑞安)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現在의 黃海南道 白川郡
  2. 《韓國民族文化大百科》, 朝飯(趙?), 韓國學中央硏究院

參考 資料 [ 編輯 ]

  • 「다시 쓰는 奸臣熱戰」, 改革勢力에서 돈벌레가 된 奸臣(염흥방), 함규진 최용범 저, 페이퍼로드(2007年, 85~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