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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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 (金?, 1341年 ~ 1398年 )은 高麗 말, 朝鮮 初의 文身이다. 君號는 계림군(鷄林君), 本貫은 慶州 (慶州)이다. 新羅 第38代 列朝 원성왕 의 後孫으로, 高麗初 六衛將軍과 岸曙홀 성주를 歷任한 김순웅 (金順雄)의 13世孫이다. 1360年 成均試(成均試)에 合格하여 過去를 準備하다가 照準 (趙浚)을 알게 되었는데, 이 德分에 조준이 國政을 맡을 때 여러 番 薦擧되었고, 戰法判書(典法判書)를 지냈다. 1392年 照準의 說得으로 7月 17日 朝鮮 開國에 參與하여 太祖를 推戴한 功勞로 個國 3等功臣 에 책록되고, 中樞院 府使(中樞院副使)에 가자되고 翊戴開國功臣(翊戴開國功臣) 공信號를 받았으며, 계림군(鷄林君)에 封해졌다. 벼슬이 保國숭錄左贊成(輔國崇祿左贊成)에 이르렀다. 事後 제숙(齊肅)의 諡號가 내려졌다. 膝下에 김맹성(金孟誠)·김중성(金仲誠)·김계성(金季誠) 세子女를 두었다.

김균의 後孫으로 肅宗의 繼妃 仁元王后의 親庭 아버지 김주신, 舊韓末 總理大臣 金弘集이 있다.

김균先生墓 》는 京畿道 光州市 능평동에 있다. 墓域은 담으로 둘러져 있고 封墳은 아랫部分에 둘레石을 둘렀다. 墓 앞에는 床石·香爐石이 있고, 그 앞에 長明燈(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等)이 있으며 左右로 文人石 2雙, 夕陽(石羊)과 望柱石이 各 1雙씩 配列되어 있다. 上席의 왼쪽에 墓碑가 있으며, 墓域 앞쪽 約 80m 地點에는 神道碑(神道碑:王이나 高官 等의 平生 業績을 기리기 위해 무덤 近處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碑文은 송병선이 짓고 尹用求가 글을 써서 1905年에 建立한 것이다. 碑文의 內容으로 보아 現在 墓域의 建立 時期는 18世紀 後半으로 보이며, 墓碑는 그 後에 세워진 것으로 推定된다. 1987年 2月 12日 京畿道의 記念物 第105號로 指定되었다.

《계림군 不祖廟》는 全北 任實郡 삼계면 後天로 43에 있다. 계림군 김균의 8代孫 取水當 김성진이 任實 三界(當時 南原 牙山房)에 입향하면서 이곳에 옮겨졌으나, 祠堂의 面貌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1660年頃 參判公 김시진이 全羅監司 在任時節에 祠堂을 創建하였고, 1824年 重建하였다. 그리고 1996年 김진억 任實郡수에 依해 中搜되어 現在에 이르고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 할아버지 : 김기연(金起淵)
    • 아버지 : 김지윤(金智允)
    • 어머니 : 權現(權鉉)의 딸
      • 否認 : 貞敬夫人 權氏, 貞敬夫人 尹氏
        • 長男 : 김맹성(金孟誠)
          • 孫子 : 없음
        • 次男 : 김중성(金仲誠)
          • 孫子 : 김안민(金安民)
          • 孫子 : 김신민 (金新民)
          • 孫子 : 金人民(金仁民)
        • 三南 : 김계성(金季誠)
          • 孫子 : 김종순(金從舜) - 判尹(判尹) 塹壕공(?胡公) 淸白吏(淸白吏) 選定

같이 보기 [ 編輯 ]

  • 김균先生墓 - 京畿도 記念物 第105號
  • 慶州金氏 계림군派 - 계림군 김균을 罷朝로 하며, 任實郡 삼계면에 大宗家와 扶助墓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