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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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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瑜

姜瑜 (姜維, 202年 ~ 264年 )는 中國 三國 時代 蜀漢 將軍 으로 百藥 (伯約)이며 翁主 天壽群 寄顯(冀縣) 사람 이다. 위나라 의 管理였는데 諸葛亮의 第1次 北伐 때 촉나라로 歸順하였다. 諸葛亮에게 才能을 인정받아 촉나라에서 主要 職責을 맡으며 重히 쓰였으며 諸葛亮 , 장완 , 비의 , 동윤 觸한사영 이 世上을 떠나자 촉나라의 兵權을 잡아 大將軍이 되었다.

主로 外治를 擔當하여 主導的으로 北伐 實行했고 위나라 와 一進一退의 攻防을 펼쳤으나 當時엔 큰 功勞는 없었다. 비의 事後, 本格的으로 兵權을 잡고 나서 助手, 赤道에서의 大勝으로 한때 翁主 全體를 占領할 뻔 하기도 했고 農書에서 强族같은 異民族들에게 相當한 影響力을 行使했으나 短曲 戰鬪의 敗北 以後엔 別 다른 所得을 거두지 못하고 以後 잦은 北伐로 民生이 疲弊해졌다는 理由로 인해 中央政界에서 事實上 排除되었다. 蜀漢의 滅亡 後에는 위나라 占領軍 宗會 를 利用해 蜀漢의 再建을 꾀했지만 失敗로 돌아갔다.

倍잠론(裴潛論)에서 姜瑜(姜維)는 蜀漢에서 내세운 最後의 名將으로, 三國志演義에서는 나이가 너무 젊어 論難이 많았으나 諸葛亮의 後嗣(後事)를 받은 뛰어난 人材라는 評을 내리고 있다.

生涯 [ 編輯 ]

위나라에서 촉나라로 [ 編輯 ]

아버지 强勁(姜?)은 에서 共助(功曹)로 일했으며 剛柔가 어렸을 때 强族 으로부터 태수 를 지키다 戰死 하였다. 정현 學問 을 좋아했으며 立身揚名에 뜻이 있어 自身을 목숨 바쳐 따르는 무리를 養成하였다. [1] 軍에서 상계年(上計?)으로 勤務했고, 의 從事(―從事)도 지냈다. 아버지의 殉職으로 因해 中浪(中郞)李 되어 天壽群 의 群舞에도 參與하였다.

228年 ( 建興 6年) 蜀나라 丞相 諸葛亮 이 記事(祁山)으로 進出하였다 . 이때 翁主 自社 곽回 는 千水軍을 巡察 中이었고, 천수태수 마준 은 姜瑜, 共助 良書 , 主婦(主簿) 윤상 , 周忌(主記) 양건(梁虔) 等을 데리고 곽會를 遂行하고 있었다. 곽會는 緊急히 上규현(上?縣)으로 달려갔고 마준度 여러 들이 呼應한다는 消息에 곽會를 따라갔다. 剛柔는 寄顯으로 復歸해야 한다고 諫言했지만 마준은 姜瑜 等도 믿지 않았다. 剛柔는 어찌하지 못하고 태수와 떨어져 家族 이 있는 寄顯으로 돌아왔다. 寄顯 사람 들의 바람에 따라 諸葛亮의 陣營으로 가 會談하는데 장합 이 觸群 先鋒 마속 이 先占하고 있던 家庭(街亭) 을 뚫어냈다 . [2] 諸葛亮은 서현(西縣)의 1,000餘 가와 姜瑜 等을 끌고 退却하였다.

諸葛亮의 屬望을 받아 創造年(倉曹?)에 奉醫將軍(奉義?軍)을 겸하고 黨양정후(當陽亭侯)로 封해졌다. 230年 , 情緖將軍(征西?軍)에 任命되고 重減軍(中監軍) 或은 護軍(護軍)을 맡았다. [3] 234年 , 步韓將軍(輔漢?軍)으로 옮기고 禹減軍(右監軍)을 擔當했으며 平壤後(平襄侯)로 進封됐다. 238年 ( 演戱 元年) 大將軍 장완 을 따라 韓中群 에 駐屯하였다. 239年 장완이 大司馬 가 되었다. 剛柔는 그 사마 가 되어 小規模 分遣隊로 數次例 위나라 를 侵犯하였다. 243年 , 진서대장군(?西大?軍)으로 昇進하고 洋酒 自社를 겸하였다. 장완 은 剛柔와 함께 商用奇襲作戰을 企劃하나 장완 本人의 病勢 때문에 實行하지 못했다. [4]

244年 落穀 大戰 에선 왕평 이 時間을 끄는 사이 비의와 함께 中央軍을 이끌고 깊숙히 몰아쳐 위나라 軍隊를 몰아내었다. [5]

非意의 時代 [ 編輯 ]

246年 , 장완이 病死한 以後 그의 權限은 諸葛亮이 生前 按排해 둔 後繼者인 비의 에게로 옮겨졌다. 246年 11月, 剛柔는 農書로 進擊하여 곽會와 하후敗를 이기고 돌아왔으며 [6] 247年 위將軍으로 昇進하고 大將軍 비의와 함께 綠尙瑞司에 오른다. 姜瑜 亦是 綠尙瑞司였지만 비의가 大將軍, 剛柔가 위將軍인만큼 實際的으론 비의가 剛柔의 上官이었다. 문산群 (汶山郡) 坪姜鋧(平康縣)의 反抗하는 異民族 들을 討伐하였다. 한便 農書群 , 南岸群 , 금성군 , 서평군 一帶의 强族 아하소과 , [7] 罰東(伐同), 아차새(蛾遮塞) 等이 위나라에 反旗를 들고 촉나라에 連絡을 取하였다. 楊州의 有名 號인(胡人)인 치舞臺(治無戴)도 이에 加擔하였다. 剛柔가 土觸護軍(討蜀護軍) 下朽敗 가 陣을 치고 있던 위시(爲翅)로 치고 올라갔으나 곽膾가 風中(?中)을 거쳐 내려오는 바람에 後退하였다. 곽會는 다음 해까지 對敵하는 江族들을 몽땅 掃蕩하였다. 剛柔는 敗走한 치舞臺를 江天(彊川)으로 나가 迎接하고, 音坪 태수 妖花 는 性中産(成重山)에 要塞를 쌓으면서 敗北한 江族들을 거둬들였다. 곽會는 部隊를 나눠 하후牌는 答中(沓中)에서 剛柔를 沮止하고, 自身은 妖花를 攻擊하였다. 剛柔는 위君의 뜻밖의 機動에 더 西쪽으로 가지 못하고 妖花를 救援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8]

249年 , 國産(麴山)에 依據해 두 個를 築造하고 具案 과 이흠(李歆)을 駐屯시켰다. 위나라의 新任 翁主自社 진태 는 그 補給路를 끊어 말려 죽이려 하였다. 具案 等은 진태를 挑發하는 한便 을 녹여가며 어렵사리 버텼다. 剛柔가 이들을 救하기 爲해 우두산(牛頭山)에서 나오자 情緖將軍 곽膾가 助手(?水)로 移動하며 剛柔의 退路까지 끊으려 하였다. 剛柔는 包圍網이 完成되기 前에 撤收하였고 孤立無援에 빠진 具案 等은 抵抗을 抛棄하였다. [9] 剛柔는 撤收하다 말고 다시 方向을 돌렸는데 남안태수 等愛 가 어떻게 알고 白手(白水) 北쪽에 陣을 치고 있었다. 이에 妖花로 하여금 맞은便에 陣營을 設置해 그 視線을 붙잡아두고 自身은 東쪽으로 60 거리 에 있던 造成(?城)을 襲擊했는데 등애는 或是라도 剛柔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먼저 와있어 虛事가 되었다. [10] 250年 , 다시 서평군으로 出陣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剛柔는 西方의 風俗에 익숙하고 그 無財度 自信했으므로 여러 강인과 好人들의 도움을 받아 農産(?山)의 西쪽 地域을 아우를 수 있다고 여겼다. 매양 大軍을 일으키고 싶어했지만 비의가 “우리는 제갈승床이 아니오. 丞相조차 中國 을 平定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야! 나라 를 지키고 百姓을 잘 다스려 辭職 을 保存해야 합니다. 大業은 能力者를 기다려야지 僥倖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11] 라며 制止하여 10,000名 以上을 運用하지 못했다.

本格的인 北伐 [ 編輯 ]

姜瑜

253年 正月, 비의가 被殺 當했다. 여름 , 드디어 數萬 名을 動員해서는 石英(石營)과 同情(董亭)을 지나 南岸을 包圍하였다. 진태가 樂門(洛門, 落門, 天壽群 寄顯 所在)으로 와 對峙하였고 剛柔는 食糧 이 바닥나 撤軍하였다. 254年 , 毒中外軍事(督中外軍事)를 더하였다. 農書群 赤道 現場 (狄道―) 離間(李簡)李 性을 들어 投降하였다. 이를 機會로 農書君을 휩쓸고 다녀 양무현(襄武縣)에서 서질 을 무찌르고 下棺(河關), [12] 赤道, 臨眺(臨?) 歲 玄의 住民들을 데려왔다.

255年 , 以前에 歸順해온 거機張郡 下朽敗 等과 같이 또 赤道로 進擊하였다. 國家도 작고 百姓들도 힘들어한다며 武力을 濫用해선 안 된다고 反對하는 장익 도 帶同하였다. [13] 一旦 記事, 石英, 金星(金城) 세 군데로 進軍한다며 거짓 情報 를 흘리고는 數萬 名을 統率해 不한현(?罕縣) [14] 으로 갔다가 赤道로 내달렸다. 곽回 事後 情緖將軍을 이은 진태는 여기에 속지 않고 翁主自社 王卿 더러 赤道로 나아가 自身을 기다리라 命하였다. 剛柔는 時間 乙 주지 않고 潮水 西쪽에서 王卿을 大破하였다. 王京軍은 數萬 名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萬餘 名만이 敵都城으로 물러났다. 이에 等愛 마저 唐慌하여 翁主를 抛棄하는게 좋겠다는 發言을 했으나 진태는 이를 拒否하였다. 한便 장익이 只今의 크나큰 功績도 毁損될 수 있다며 作戰을 더 持續하는 것은 蛇足(蛇足)이라고 말렸지만 剛柔는 그대로 赤道를 에워쌌다. [15]

진태는 迅速하게 扶風群 진창현(陳倉縣)과 天壽群 常規玄을 經過하고 몰래 고성령(高城嶺)도 넘어 中에 赤道의 東南쪽 에 當到하였다. 진태의 軍隊가 갑자기 赤道 南쪽에서 나타나자 剛柔는 一部 軍事를 引率하여 山을 타고 진태의 軍士를 襲擊했으나 이미 高地에 자리잡은 진태에게 이길 수 없어 돌아갔다.

이어 楊州의 位君까지 錦城을 지나 赤道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王卿이 祕密裏에 날짜를 定하고 함께 剛柔의 退路를 막으려고 하자 이 計劃을 들은 江柳君은 卽時 退却했다. 救援받은 왕경은 "食糧은 열흘分도 못 남았습니다. 萬一 때에 이르러 救援兵이 오지 않았다면 性을 들어 潰滅해 翁主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라며 진태에게 感謝했다. 한便 剛柔는 위나라 領土 내 赤道 南쪽인 從弟(鍾提, 鍾題)로 君을 물렸다. [9]

短曲의 敗北 以後 立地가 좁아지다. [ 編輯 ]

256年 赤道 戰鬪의 공으로 大將軍 에 이르렀다. 이番엔 起算으로 出征했는데 안서장군(安西?軍) 等애가 미리 防備를 하고 있었다. 方向을 同情으로 틀어 南岸으로 疾走하니 등哀悼 무성산(武城山)에서 맞섰다. 이에 交戰해봤지만 뚫기 어려웠다. 진서대장군 互濟 (胡濟)와 東쪽의 常規에서 합치기로 約束하고 밤中에 衛戍 를 건너 재빠르게 起動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理由로 約束 날짜에 互濟는 제 時間에 到達하지 않았고 結局 상규 앞 短曲(段谷)에서 등愛 軍과 回轉을 하여 대패當했다. 長壽 十 數 名이 死亡 하고 千餘級이 斬首되는 等 많은 사람이 죽거나 흩어졌다. [10] 輿論은 剛柔를 怨望하였고 農書의 協力 勢力들도 요동쳤다. 스스로 後將軍 으로 官職을 깎되 大將軍의 業務는 그대로 보았다.

257年 (演戱 20年), 위나라 의 貞洞大將軍(征東大?軍) 第褐炭 이 淮南에서 叛亂을 일으킨 德分에 觀衆 의 兵力이 東쪽으로 빠졌다. 剛柔는 鎭川(秦川) 地方을 目標로 數萬 名을 이끌고 落穀(駱谷)을 나서 침令(沈嶺)에 다다랐다. 그 앞의 위나라 城砦 將星(長城)에는 備蓄된 穀物 萬 많을 뿐 守備兵이 적어 大多數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럼에도 진태의 後任 情緖將軍 私馬網 이 막아서고, 진서장軍으로 옮긴 [16] 等哀悼 農書로부터 支援을 왔다. 剛柔는 亡수(芒水)에 軍營을 設置하고 連거푸 싸움을 걸었으나 私馬網과 等애는 꿈틀도 하지 않았다. 이 해, 連이은 出兵으로 蜀漢사람들이 憔悴하니 初鑄 진지 의 協調下에 北伐을 쉬고 때를 기다리자는 內容의 <舊國論>을 짓는다. [17] 그런데 정작 初鑄의 舊國論을 當時 사람들이 注意깊게 살피지 않았다. [18]

258年 ( 輕擾 元年), 第褐炭이 敗亡했다는 消息에 聖徒 로 還軍하였다. 이 해, 內治를 總括하던 진지 가 죽고 宦官 황호 가 權力을 잡았다. 剛柔는 다시 代將軍 職位를 回復하였으나 262年까지 4年間 北伐을 쉬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防禦 作戰 計劃의 變更 [ 編輯 ]

船主인 劉備 때부터 蜀나라 의 防禦 計劃은 敵을 境界서부터 겹겹이 막아 아예 韓中 盆地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왕평 祖上 을 相對로 大勝을 거두었던 落穀 戰鬪 의 基本 戰略도 그것이었다. 剛柔는 다음과 같이 建議하며 이를 改編하였다. “이 方法은 《 主役 》의 中門擊柝(重門擊柝)에는 符合하지만, 敵을 막기만 할 뿐 큰 利益을 꾀할 수는 없습니다. 敵의 攻擊 徵候가 捕捉되면 韓中 一帶의 軍士와 穀食을 漢城(漢城, 韓中群 面養賢 所在)과 落城(樂城, 性고현 所在)으로 集中시켜 敵을 平地 로 들이고, [19] 쓰촨 盆地 로 向하는 關門들을 强化하는 게 낫습니다. 有事時에는 遊擊兵을 投入해 빈틈을 노립니다. 敵들은 쓰촨 盆地로 進入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지기만 한 補給線에 苦痛받을 것입니다. 敵들이 總退却할 때 비로소 出城하여 한꺼번에 들이치면 敵들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毒韓中 互濟는 自動群 (재동群) 한수현(漢壽縣, 옛 加盟)으로 移轉하고, 減軍 王函(王含)은 落成에, 護軍 장빈(蔣斌)은 漢城에 머물렀다. 西安(西安), 健胃(建威), 武威(武衛), 石門(石門), 茂盛(武城), 乾脹(建昌), 任員(臨遠)에도 守備 據點을 마련하였다.

황호와의 對立 [ 編輯 ]

262年 , 황호 의 放恣함을 싫어하여 處刑 해야 한다고 有線 에게 아뢰었다. 유선은 “황호는 보잘것없는 臣下일 뿐이오. 지난날 동윤 이 齒를 떨던 것도 내 안타까웠었소. 그에겐 神經쓸 價値가 없소.”라 答하였다. 有線과 황호의 關係는 생각보다 끈끈했기에 剛柔는 아차 싶었다. 황호가 有線의 勅命을 받고 謝過하러 왔다. 剛柔는 答中에서 麥穀 農事 를 짓겠다는 口實로 성도를 빠져나왔다. [20] 同年 10月( 陰曆 ), 剛柔는 4年만에 朝陽(?陽)을 찔러봤다가 [21] 厚和(侯和)에서 情緖將軍 等愛 에게 격파당하고 答中으로 後退하였다. 短曲 以後 剛柔는 功績을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交替하자는 의론이 있었다. 황호는 剛柔를 내리고 平素 親密했던 優待將軍 廉隅 를 올리고 싶어했다. 剛柔는 일이 생길까 憂慮하여 性度로 歸還하지 않고 答中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263年 , 위나라 眞書將軍 宗會 가 蜀나라를 圖謀하고자 觀衆君을 訓鍊한다는 報告를 받았다. 그래서 左拒機張郡 장익 과 寓居機張郡 妖花 를 各各 量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에 未然에 配置해야 한다고 票를 올렸다. 황호가 무당 을 불러 을 치니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占卦가 나와 유선은 그 表文을 公論에 부치지 않았다.

蜀漢의 運命과 함께 [ 編輯 ]

가을 , 宗會가 落穀으로, 등애가 答中으로 大擧 南下해서야 朝廷에서는 妖花를 答中으로, 장익과 輔國大將軍(輔國大?軍) 東闕 을 兩岸管區로 派兵하였다. 翁主 自社 諸葛서 마저 件慰勞 南進했으므로 妖花는 剛柔의 主要 後退로인 音坪에서 對備하였다. 剛柔는 音坪으로 敗走하였다. 管區는 藏書 가 慣性을 나가 降伏하면서 附添 의 奮戰에도 不拘하고 好熱 에게 陷落됐는데 장익과 東闕은 이제야 한수현에 닿았다. 宗會는 漢城과 落成은 包圍만 해두고 바로 촉나라의 中心部를 向해 殺到하였다. 剛柔와 妖花는 音評을 抛棄하고 장익·東闕과 合쳐 檢角 에서 抗戰하였다. 剛柔는 宗會의 懷柔에 答하지도 않고 守備에만 臨하였다. 宗會는 檢角을 突破하지 못하고 무척이나 길어진 兵站線에 撤兵을 考慮하였다.

겨울 , 等애가 側面의 無人之境인 溪谷 700餘 里를 開拓해 내려갔다. 姜瑜(江油)의 守備隊將 마幕 은 降伏하고 狂漢群 面죽현(?竹縣)을 死守하던 위將軍 제갈첨 은 敗死하였다. [10] 檢角에선 有線이 성도를 固守한다는 둥, 吳나라 로 亡命한다는 둥, 그게 아니고 南쪽의 件녕군 으로 避難간다는 둥 所聞만 茂盛하였다. 眞僞를 把握하고자 狂漢縣과 처縣(?縣) 方面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가 有線의 降伏 調書가 내려와 (戈)와 甲옷 을 내던지고 宗會가 있는 부현(?縣)으로 出頭하였다. 將卒들은 분하여 을 찍었다. 宗會의 왜 늦었냐는 물음에 을 바로 하고 눈물 을 흘리며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르다고 答하였다. 宗會가 非凡하게 여겼다. [22]

蜀나라 再建 祈禱 [ 編輯 ]

宗會는 剛柔를 厚待하여 出他할 때는 같은 수레 에 태우고 앉을 때도 同席을 내주었으며 중원의 名士인 太初 公休 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며 稱讚을 아끼지 않았다. 剛柔는 宗會에게 딴 마음이 있음을 알아채고 蜀나라 復興에 利用할 目的으로 바람을 더 넣었다. “듣건대 軍께서는 淮南에서부터 그 計策에 虛點이 없었다고 합니다. 秦나라 가 昌大해진 것은 모두 그 德澤입니다. 이렇게 촉나라까지 征服하여 그 威嚴과 德望이 世上 에 振動하니 百姓들은 그 功을 尊敬하고 君主도 그 智謀를 두려워할 程度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이대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阪神 한나라 를 배반하지 않았어도 天下가 平定되자 疑心을 받았으며 文宗 범려 의 助言을 듣지 않았다가 虛妄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利害關係가 그런 겁니다. 軍께선 이미 엄청난 功과 德을 이루셨으니 陶朱公(陶朱公=범려)李 를 띄워 九千 을 떠난 것을 본받아야지 않겠습니까? 功勳과 을 保全하려면 峨嵋山 (峨嵋山)에 올라 丈量 처럼 新鮮 赤松子(赤松子)를 따라가야지 않겠습니까?” [11] 宗會는 剛柔의 本心도 모르고 등애를 讒訴하였다.

264年 正月, 等애는 逮捕 되어 中央으로 押送되었다. 司馬所 는 燭 地方의 情勢가 심상찮음을 感知하고 兵士 10萬을 長安 으로 보내 對備하게 했다. 宗會는 사마소의 움직임에 壓迫을 느끼고 서둘러 익주 목을 稱하며 叛亂을 일으켰다. 宗會는 위나라 將帥들을 잡아들인 다음 數十個의 큰 구덩이를 파고 數千個의 몽둥이를 準備하여서는 外部의 兵士를 불러들이게 하여 次例대로 때려죽여 구덩이 속에 넣으려 하였다. [23] 한便 剛柔는 宗會가 위나라 將帥들을 죽이면 自身이 宗會를 誅滅하고 위나라 兵士들도 죄다 묻은 後에 有線을 復位시킬 속셈이었다. 유선에게 ‘며칠만 恥辱을 견디시면 神이 危殆로운 社稷을 다시 平安케 하고, 어두워진 일월을 다시 환하게 하겠습니다.’라고 密書를 傳했다. [20] 宗會는 剛柔에게 50,000名을 줘 先鋒으로 삼으려 했는데 마침 舊件이 飮食物을 傳해준다고 속이고 잡혀있던 好熱 을 만나 宗會의 計劃이 담긴 密書를 그의 아들 호연 에게 몰래 傳하니 남아 있던 위나라 將帥들과 兵卒들이 事實을 알고 憤怒하여 性度로 너나없이 몰려들었고 마침 武器를 配分하던 中인 宗會와 剛柔를 襲擊하였다. 剛柔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두려워하는 宗會에게 "오로지 敵을 擊退할 뿐."이라고 말하고 손수 위나라 軍士 대여섯名을 죽였으나 結局 戰死했고 種膾도 殺害당했다. [24] 이때 剛柔의 나이 63歲였으며 그 屍體는 慘酷하게 찢겨 毁損되었고 그 處子들도 誅殺되었다. [25]

評價 [ 編輯 ]

  • 三國志 》의 著者 진수 는 '講伯藥은 文武를 갖췄고 公明을 세우려는 뜻이 있었으나, 人命을 輕視해 兵力을 함부로 消耗했다'고 敍述했다. 또 '어떤 問題든 事理分別이 明確했고 果斷性이 있었으나, 本性이 急하고 생각이 稠密치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나惡 等은 路資 의 《 道德經 》을 引用해, "큰 國家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물고기를 굽는 것과 같다. 하물며 작은 나라에 對해서야 여러 次例 소란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여러 次例 北伐에 失敗한 剛柔를 批判했다.
  • 克定 은 剛柔에 對해 江百藥이 上將軍으로 뭇 臣下들의 윗자리에 있었음에도 청렴했으며 집이 초라했다고 했다. 더우기 剛柔를 稱讚하길 '그와 같이 不斷히 배우고 素朴하며 청렴한 人物은 한 時代의 模範이다'라고 했다.
  • 干寶 는 '剛柔는 觸床이 되어 나라가 亡하고 賃金이 侮辱을 當했음에도 죽지 않았다가 宗會의 亂 때야 죽었으니 哀惜하구나! 죽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올바로 處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옛 烈士들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節義를 던지는 것을 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便安하게 하며 죽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실로 命이 길지 않음을 알고서 그 마땅한 바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라고 評價하였다. [26]
  • 손성이 映畫( 眞木製 의 年號 345-356年) 秒에 안서장군 환온 을 따라 鏃을 平定할 때에 여러 老人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剛柔가 이미 降伏한 뒤에 隱密히 유선에게 票所를 올려 '宗會에게 거짓으로 降伏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蜀 땅을 回復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滅絶되기에 이르렀으니 觸人들이 只今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 [27]
  • 손성 은 이에 對해 '생각건대, 옛 사람이 이르길 '시달릴 바가 아닌데 시달리면 이름이 반드시 욕되고 依據할 바가 아닌데 依據하면 몸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며, 욕되고 또한 위태로워지면 죽을 날이 將次 닥칠 것이다.' 하였으니 바로 剛柔를 일컫는 말이로다! 等애가 강유성으로 들어올 때 軍士들이 매우 적었으나 剛柔는 나아가서는 面죽 아래에서 節義를 떨치지도 못하고 물러나서는 다섯 長壽를 總帥하여 觸籌를 擁圍下地圖 못하였고, 뒷날 圖謀할 計策을 생각하다가 驛(逆)과 順(順)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며 期待하기 어려운 機會에서 物情에 어긋나는 것을 希望함으로써 나라를 衰弱하게 만들며 三振(三秦)에서 여러 番 軍勢를 誇示하였고, 이미 나라가 滅亡한 뒤에 理致를 넘은 대단한 成功을 바랐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라고 强力하게 非難하였다. [28]
  • 配送地 는 '손성이 剛柔를 非難하는 말이 또한 合當하지 않다. 當時 宗會의 大軍이 이미 檢閣에 이르자 剛柔가 諸將들과 더불어 軍營을 벌려세우고 險要旨를 守備함으로써 宗會가 進擊할 수 없어 이미 되돌아갈 計劃을 議論하였으니 鏃을 穩全히 지키는 공이 거의 이루어졌었다. 다만 等애가 側面으로 侵入하여 그 背後로 出兵하니 제갈첨 이 敗한 뒤에 성도는 스스로 무너졌을 뿐이다. 剛柔가 萬若 回軍하여 內部를 救援했다면 곧 宗會가 그의 背後를 틈탔을 것이다. 當時의 社勢로 어찌 兩쪽을 다 救濟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剛柔가 面죽 아래에서 節義를 떨치지 못하거나 觸籌를 擁衛夏至 못했다고 責望하는 것은 理致에 맞는 않는 말이다. 宗會는 僞裝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剛柔에게 大軍을 주어 先鋒로 삼고자 하였다. 萬若 魏나라 將軍들이 모두 죽고 兵士가 剛柔의 손에 주어졌다면 宗會를 죽이고 鏃을 回復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무릇 理致를 넘어 공이 이루어진 然後에 이를 가리켜 基(奇)라 하는 法이니 그 일에 蹉跌이 있었다고 하여 그리 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萬若 傳單 의 計策이 좋지 않은 때를 만났다면 또한 그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성의 非難에 一鍼을 加했다. [29]
  • 好三星 은 '剛柔가 數次例 戰爭을 하여 蜀나라를 亡하게 했으니 마침내 初鑄의 말대로 되었다.' [30] '險要를 내주고 疆埸을 開放하여 蜀나라를 亡하게 한 張本人이다.'라며 剛柔의 韓中防禦線 計劃을 批判했으나 [31] 宗會의 亂을 꾸밀때는 '말할 必要도 없는 다른 方道라는 것은 亂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剛柔가 實로 지혜로워 足히 宗會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程度였으나, 時勢에 逼迫黨하고 運命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했으며 [32] 剛柔가 觸후주에게 반드시 社稷을 부활시키겠다고 便紙를 쓴 것에 對해 '剛柔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恨을 위하였으니 千年의 歲月 동안 段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 손성, 干寶가 그를 貶下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며 앞선 評者들이 剛柔를 批判한 것을 全部 잘못이라며 批判하였다. [33]
  • 홍대용 은 '剛柔는 無後(諸葛亮)의 재주는 없으면서 無後의 事業을 하려고 했으니, 그 뜻은 충성스럽지만, 그가 自身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結局 滅亡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妖花가 이른바 '地貌圖 敵만 못하고, 兵力도 적보다 적으면서 用兵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니 어찌 生命을 保存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참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또한 模寫를 잘하는 者는 그 根本부터 먼저하고 끝은 나중에 하며, 안의 일부터 急히 하고 바깥일은 천천히 한다. 小人이 안에서 일을 周旋하는데, 장수가 밖에서 成功한 字는 있지 않다. 그런데, 剛柔는 政權을 제 마음대로 하는 황호를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저 억센 敵에게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 지혜롭다 할 수 없다.'라고 評價하였다. 그러나 好三星의 意見과는 달리 '剛柔는 襄眼科 音評을 防備하고자 했으나 황호에게 沮止 當했다. 萬若 剛柔의 計劃대로 했다면 등애가 音坪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等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宗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蜀漢이 이같이 빨리 滅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評價했으며 '剛柔가 죽을 臨時에 꾀한 것은 뜻만은 독하였으나 計劃은 疏漏했던 것이다. 그러나 漢나라에 충성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變함이 없었고 無後家 認定하던 것도 損傷시키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라고 評價했다. [34]
  • 女史面 은 '諸葛亮이 죽은 後 蜀漢은 29年間 더 維持됐다. 이 29年 中 앞의 12年 동안은 장완이, 가운데 7年 동안은 비의가, 마지막 10年동안 國政을 總括한 것은 姜瑜였다. 장완과 비의가 國政을 總括할 때는 위나라를 征伐하는 大大的인 出兵이 없었다. 剛柔는 累次 大兵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비의가 恒常 그를 막아서 많은 數의 病魔를 주지 않았다. 비의가 죽고 난 다음 剛柔의 일處理가 겨우 非意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亦是 큰 功이 없었고 오히려 이로 因해 曺國이 疲弊해졌다. 當時 그(糠油)를 剛하게 反對하는 사람이 있었다. 以後의 讀書家들度 亦是 蜀漢이 滅亡한 것은 剛柔가 兵士를 일으킨 責任이라고 했으나 實際로는 그렇지 않다. 위나라 帝王 朝房이 세워진 後부터 高歸鄕공이 被殺 當할때까지의 21年은 三國時代로 접어든지 21年에서 41年에 이르는 時間으로 실로 위나라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때로서 蜀漢이 北伐을 해야 한다면 그 機會는 絶對的으로 이 期間案에 있었으며 그 機會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는데 이르면 이를수록 魏나라의 國政이 더욱 不安定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時間 中 太半은 장완과 비의가 政權을 잡고 있었고 剛柔가 兵權을 掌握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므로 촉국의 滅亡을 剛柔의 責任으로 돌리는 것은 實로 抑鬱한 것이다. 장완과 비의에 이르러 應當 比較的 큰 責任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5]

三國志演義 [ 編輯 ]

  • 諸葛亮의 第1次 北伐 에서 天壽에 머물던 剛柔는 諸葛亮 의 計略을 看破해 諸葛亮을 敗退시켰다고 描寫된다. 싸움을 避하려던 諸葛亮이 剛柔의 孝心을 利用한 計略으로 그를 사로잡아 굴복시켰다는 設定이었다. 說得에는 剛柔의 親母를 利用했다고 한다.
  • 234年 自身의 壽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直感한 諸葛亮이 하늘에 祭壇을 열고 祈禱를 하라는 剛柔의 助言을 받아들여 軍막내 7日間 촛불을 켜고 出入을 嚴禁했다. 하지만 위연 이 이를 어겨 諸葛亮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기 直前 剛柔에게 뒤를 맡기고 더불어 그의 兵法을 담은 冊을 傳受했다고 描寫된다.
  • 그렇듯 "鳶의" 에서는 諸葛亮의 信任을 받았고, 한마디로 諸葛亮이 가장 믿고 自己의 뒤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본다.

傳說 [ 編輯 ]

  • 剛柔가 檢角 으로 와서 陣營을 整備하고 要塞를 굳게 지키자, 宗會 의 10萬 大軍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등애가 性度로 迂廻 奇襲하면서 有線 이 降伏하였다. 有線의 降伏 調書를 받든 剛柔와 將卒들은 원망스럽고 火가 나서 憤痛을 참지못해 칼을 뽑아 옆의 돌을 베었다. 그때 그가 자른 돌은 只今도 檢角 峽谷 안에 位置해 있으며, 사람들은 이 돌을 「 感度席 」이라 부른다.
  • 抑鬱하고 鬱憤을 참을 수 없었지만, 剛柔는 有線의 聖地를 거역할 수 없었기에 兩面으로 된 軍紀를 거꾸로 걸게끔 命令을 내려 危局에 投降할 뜻을 표했다. 그 兩面으로 된 氣를 꽂았던 돌은 株價채의 바위 絶壁에 남아있는데, 이를 「 雙奇巖 」이라 부른다.
  • 그는 長壽와 兵士들을 召集하여 各其 지니고 있던 兵器를 모아 小劍山의 한 洞窟에 숨긴 다음, 此後에 때를 보아 軍士를 일으켜 漢나라 王室을 復興하고자 했다. 이 洞窟을 「 姜瑜 度倉庫 」라고 불린다.
  • 剛柔는 檢問官을 떠날 때 마고자를 벗고 손수 빨은 뒤, 이를 말리기 위해 山의 바위 위에 널며 반드시 돌아올테니 그때 다시 마고자를 입을 것이라고 盟誓했지만, 結局 한 해가 지나고 또 다시 다른 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옷은 돌로 變하였다는 傳說이 傳해지고 있다, 只今도 檢問官 20里 밖에서 큰 바위 위에 널려 있는 마고자의 模樣을 볼 수가 있다. 이를 가리켜 「 量義菴 」이라고 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부현(傅玄), 《富者》(傅子) ; 配送地 主席, 《三國志》44卷 蜀黍 第14 剛柔에서 引用
  2. 御患, 《 偉略 》 ; 配送地 主席, 《三國志》44卷 蜀黍 第14 剛柔에서 引用
  3. 《三國志》강유전은 重減軍, 相距 의 《 華陽局地 》7卷 유후주지는 護軍
  4. 《三國志》44卷 蜀黍 第14 장완에서 引用
  5. 《三國志》27卷 魏書 第27 王氣(王基) 配送地週 사마표 戰略.
  6. 《華陽局地》7卷 유후住持
  7. 아하와 小科라는 別個 人物일 수도 있다.
  8. 《三國志》26卷 魏書 第26 곽回
  9. 《三國志》22卷 魏書 第22 進軍 姿態
  10. 《三國志》28卷 魏書 第28 等愛
  11. 습착치 , 《 韓進春秋 》 ; 配送地 主席, 《三國志》44卷 蜀黍 第14 剛柔에서 引用
  12. 강유전 願問議 하간(河間)은 傲氣이다.
  13. 《三國志》45卷 蜀黍 第15 장익
  14. 抛한현이 아닌 부한현이라 發音한다. 耳峴 主席, 《 後漢書 》87卷 列傳 第77 西江 無益원檢(無?爰劒)
  15. 장익전은 士族이 剛柔의 發言으로 되어 있으나 《華陽局地》7卷과 《 資治通鑑 》76卷을 따른다.
  16. 《資治通鑑》77卷 甘露 2年條의 岸曙將軍은 傲氣이다. 《三國志》等애전을 따른다.
  17. 《資治通鑑》77卷 甘露 3年朝
  18. 《華陽局地》7卷 유후住持
  19. 강유전은 不得入平(부득立坪)이라 하여 平地로 못 들어오게 한다고 하였으나 《資治通鑑》77卷 危機 第9 甘露 3年調를 따른다.
  20. 《華陽局地》7卷 유후住持
  21. 《三國志》4卷 魏書 第4 三燒提起 진류王 弔環 慶源 3年
  22. 干寶(干寶), 《진기》(晉紀) ; 配送地 主席, 《三國志》44卷 蜀黍 第14 剛柔에서 引用
  23. 《三國志》28卷 魏書 第28 種回戰
  24. 《三國志》28卷 魏書 第28 種回戰
  25. 《三國志》44卷 蜀黍 第14 강유전
  26. 《三國志》44卷 蜀黍 第14 강유전 配送地週
  27. 《三國志》44卷 蜀黍 第14 강유전 配送地週《진양秋》
  28. 《三國志》44卷 蜀黍 第14 강유전 配送地週《진양秋》에서 觸人들이 그를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비웃으며 덧붙인 評價
  29. 《정사 三國志》강유전 配送地週《진양秋》에 쓰인 손성의 坪에 배송지가 덧붙임
  30. 好三星 主席, 《資治通鑑》77卷 危機 第9 甘露 2年
  31. 好三星 主席, 《資治通鑑》77卷 危機 第9 甘露 3年
  32. 好三星 主席, 《資治通鑑》78卷 危機 第10 慶源 4年
  33. 好三星 主席, 《資治通鑑》78卷 危機 第10 함희 元年
  34. 《담헌서》
  35. 《三國史火》

參考 文獻 [ 編輯 ]

  • 三國志 》44卷 蜀黍 第14 姜瑜
  • 《三國志》33卷 蜀黍 第3 後周 有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