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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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規 (賈逵, 174年 ~ 228年 )는 中國 後漢 말 ~ 三國時代 (魏)나라의 政治家이자 武裝으로, 자는 讓渡 (梁道)이며 河東郡 量陵縣(襄陵縣) 사람이다.

行跡 [ 編輯 ]

이름 家口(賈衢) → 家規(賈逵)
時代 後漢 ~ 三國 時代
生沒 희평 3年( 174年 ) ~ 泰和 2年( 228年 )
讓渡(梁道)
本館 · 出身 事例 河東郡 量陵縣
官職 軍吏(郡吏) → 江邑長(絳邑長) → 민지현令(?池縣令)
→ (下野) → 議郞(議郞) → 영(領) 홍농태수(弘農太守)
→ 丞相主婦(丞相主簿) → 諫議大夫(諫議大夫) → 丞相主婦祭酒(丞相主簿祭主)
→ 業縣令(?縣令) → 位郡太守(魏郡太守) → 예주자사(豫州刺史)
→ 예주자사 · 健胃將軍(建威將軍)〔曹操 ~ 位〕
作爲 管內後(關內侯)〔危〕
→ 良吏정후(陽里亭侯)〔危〕
→ 量梨熟後(陽里肅侯)〔危〕
所屬 曹操 조비 造詣

元氏 勢力과의 싸움 [ 編輯 ]

《偉略》에 따르면 元來 이름은 區(衢)였으나 逵路 고쳤다. 軍吏를 지냈고, 江邑의 場이 되었다. 建安 7年( 202年 ), 原狀 (袁尙)李 곽원 (郭援)을 派遣해 河東의 各 城邑을 陷落시켰으나, 家規가 지키는 性은 陷落하지 못했다. 곽원이 匈奴의 선우 難題濠洲千 까지 불러 誤字 性은 곧 무너지려 했으나, 父老들은 끝내 家規를 해치지 않았다. 邑을 무너트린 後 곽원은 家規를 쓰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죽이려 했으나 江邑의 衙前과 百姓들이 反對하여 赦免되었다. 家規는 피氏玄을 要衝地로 여기고 있었는데, 곽원이 쉽게 河東을 制壓하자 피氏賢異 곽원에게 占領될 것을 두려워하여 곽원의 模寫 軸誤(祝奧)를 疑心케 해 7日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無財로 薦擧되고, 민지현令에 除授되었다. 建安 10年( 205年 ), 固諫 (高幹)李 曹操 (曹操)에게 謀反을 일으키자 腸炎(張琰)李 이에 呼應하려 했다. 家規는 모르는 채로 腸炎을 만나다가 變故가 일어났음을 알았으나, 사로잡힐 것을 두려워해 거짓으로 腸炎의 便에 섰다. 玄의 치소가 있는 女性(?城)은 城壁과 垓子가 堅固하지 않은데, 腸炎에게서 兵士를 받아 城을 修理하고, 謀反을 꾀하는 者들을 全部 誅殺하고 腸炎에게 抗拒하니 腸炎은 敗北했다.

醴酒 自社가 되기까지 [ 編輯 ]

할아버지가 죽어 官職을 떠났다가, 使徒에게 招聘되어 속管이 되고 議郞으로써 事例軍事에 參加했다. 建安 16年( 211年 ), 曹操가 마초 (馬超)를 치러 가다가 홍농을 지나면서, 家規에게 홍농태수를 代行하게 했다. 家規는 屯田徒尉가 逃亡친 百姓을 숨기고 있다고 疑心했는데, 屯田度位는 群에 屬하지 않았으므로 言語가 不純했다. 家規는 憤怒하여 屯田徒尉에게 罪를 묻고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 일로 因해 免職되었으나, 曹操는 이를 좋게 여기고는 丞相主婦로 삼았다. 後에 諫議大夫가 되었고, 하후上 (夏侯尙)과 함께 軍事 計策을 長官했다. 建安 25年( 220年 ), 曹操가 죽자 曹操의 장사를 主管했다. 漕倉 (曹彰)李 長安 (長安)에서 와 玉璽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家規는 嚴히 對答하여 漕倉을 물렸다. 마침내 曹操의 管을 (?)으로 옮겼다. 이 해 6月, 祖妣가 大軍을 일으키자 家規는 丞相主婦祭酒를 맡았다.

問題 (文帝)가 위왕이 되자, 業縣에 不法이 많으므로 業縣令이 되었고, 1달이 지나서 位郡太守 가 되었다. 問題는 초현에 이르자 家規를 裔胄自社로 임명했다. 當時 天下는 紀綱이 풀어져 있었는데, 家規는 法令을 嚴重히 執行하지 않을 수 없다고 宣言하고, 病操縱士가 옛 自社에게 休暇를 얻어 家規가 任命된 지 여러 달 後에야 나타나자, 이를 奇貨로 2千 席 以下 官吏들 中에서 放縱하여 法을 따르지 않는 者들을 모조리 免職시켰다. 問題는 家規를 '眞正한 自社'라고 讚歎하고, 天下에 布告하여 裔胄를 標準으로 삼았으며, 家規를 管內後에 封했다. 예주는 吳나라와 國境을 맞대고 있었는데, 家規는 斥候를 밝히고 戰爭 準備에 힘써 敵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한便, 堤防을 새로 쌓고 燒溺羊皮란 貯水池를 만들고 200里의 運河를 뚫었다. 이 運河는 나중에 '街後車'가 된다.

吳나라 方面 司令官 [ 編輯 ]

黃초 3年( 222年 ) 조휴 (曹休), 匠料 (張遼)와 함께 吳나라를 쳐, 오나라 大將 女犯 (呂範)의 軍隊가 暴風雨에 휩쓸린 틈을 타 攻擊하여 擊破했다. 이 功績으로 良吏정후에 封해졌고, 健胃將軍이 더해졌다. 泰和 元年( 227年 ) 命題 (明帝)가 卽位하였는데, 孫權 (孫權)은 이때 醴酒 南쪽이고 長江에서는 400里 떨어진 冬官에 駐屯하고, 위나라 醴酒 軍隊는 守備하고 있는지라 吳나라를 北쪽에서 威脅하는 軍隊가 없어 吳나라가 위나라의 侵攻을 받으면 東(여강)과 서(강하)의 軍隊를 合쳐 戰力으로 抗戰할 수 있었다. 家規는 이를 打開하고자 裔胄에서 長江까지 이르는 職通路를 뚫어 吳나라의 東西 軍隊가 서로 救援하는 形勢를 끊고, 要求(?口)로 나아가 駐屯하면 潼關을 取할 수 있다고 보았다. 命題는 이에 同意하였다. 이듬해, 兆休暇 吳나라의 罷養 태수 廚房 (周?)의 降伏을 받아 換縣으로 進擊하였고, 命題는 家規에게 前將軍 萬總 (滿寵), 동완태수 虎叱 (胡質) 等 4軍을 指揮하여 東쪽에서 조휴와 合流하게 했다. 그런데 冬官에 防備가 없었으므로 家規는 吳나라 軍士가 환縣에 集結했을 것이며, 兆休暇 이와 싸우면 必敗한다고 여겼다. 200里를 進軍하였다가 組休暇 敗戰했음을 알았다. 家規는 서둘러 進擊하고, 오나라 軍隊에 義兵을 보여주어 물러나게 해 조휴를 救助했다.

元來 家規는 조휴와 사이가 나빠, 黃초 年間 祖妣가 家規에게 절을 주려는 것을 組休暇 家規의 性格 問題를 들어 毁謗을 놓았다. 協席에서 組休暇 졌을 때 家規가 없었으면 조휴는 救援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偉略》에 따르면, 조휴는 家規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調整에 常住하여 家規를 謀陷했으며, 街規度 돌아온 뒤 常住했다. 朝廷에서는 비록 家規가 옳지만, 組休暇 種실로 中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 家規는 마침 病이 危篤해져 죽었다. 諡號를 내려 숙後(肅侯)라 했으며, 《魏書》에 따르면 享年 55歲였다.

親戚 關係 [ 編輯 ]

  • 加濕 (할아버지)
    • ? (아버지)
      • 家規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