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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關係 幕後 60年 최서면에게 듣다|주간동아

週刊東亞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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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關係 幕後 60年 최서면에게 듣다

  • 김학준 檀國大 碩座敎授

    入力 2020-04-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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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2권(나남/ 2020) [홍중식 기자]

    前 2卷(羅南/ 2020) [홍중식 記者]

    解放과 分斷 75周年을 맞이하는 이 해에 敎訓을 주면서도 興味를 刺戟하는 冊이 出版됐다. 최서면(崔書勉) 옹이 口述하고, 고하리 스스무(小針進) 日本 시즈오카현립대 敎授 等 日本 學者 4名이 採錄했으며, 東亞日報社 도쿄特派員을 歷任한 심규선(沈揆先) 前 동아일보社 編輯局長이 飜譯한 이 冊은 解放과 分斷 前後의 狀況, 特히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 以後 韓日關係의 裏面 等에 關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새로운 逸話를 담고 있다. 

    이 대목에서 꼭 追加하고 싶은 것은 採錄者들이 口述 內容을 그대로 받아쓰지 않고 事實 與否를 檢證했다는 點이다. 그리고 그 結果를 脚註에 담아 崔 翁의 口述 가운데 事實에 어긋나는 內容은 說明을 덧붙였다. 

    于先 崔 翁에 對해 簡略하게 紹介하기로 한다. 1928年 江原 原州에서 태어난 그는 17歲 때 연희전문학교 學生으로 解放을 맞으면서 金九 先生의 路線에 따라 大寒學生聯盟 委員長으로 信託統治反對運動에 參與했고, 그 一環으로 蘇聯軍이 占領한 北韓에 潛入해 亦是 信託統治反對運動을 이끌던 조만식 朝鮮민주당 委員長을 만났으며, 1947年 ‘장덕수事件’에 連累되기도 했다. 

    20歲인 1948年 8月 15日 李承晩 政府가 세워진 뒤 그는 自身의 宗敎인 天主敎의 가르침에 따라 이 大統領의 ‘政敵’이라 할 수 있는 天主敎徒 場面 副統領을 돕다 逮捕 危機에 直面하자 1957年 日本으로 亡命했다. 그 뒤 도쿄에 韓國硏究院을 設立했고, 이를 國際關係共同硏究員으로 發展시켰다. 이 過程에서 그는 ‘朝鮮=韓國’에 關聯된 冊을 10萬~20萬 卷이나 確保해 日本人에게도 硏究의 幅을 넓혀줬다. 그의 母校인 연세대가 그에게 名譽博士學位를 授與한 까닭이다.
     
    이렇게 도쿄에 30年 동안 머물면서 日本 政界·財界·言論界·學界 等 各界 人士들과 親交를 쌓았고, 朴正熙 前 大統領과도 가까이 지내며 韓日關係 幕後에서 일정한 役割을 遂行했다. 이러한 背景에서 그가 公開한 이야기들은 單純히 한 亡命客의 個人事가 아니라 韓日關係의 裏面史에 該當한다. 

    그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當時 日本 總理와 面談했다는 記錄을 내세우려 했던 韓國 要因들의 行態에 關해서다. 前職 문교부(現 敎育部) 長官을 비롯한 韓國 政界·官界·財界 要因들이 모두 朴 前 大統領으로부터 ‘點數’를 따려고 후쿠다 總理와의 面談을 崔 翁에게 懇曲히 付託한 事實은 韓國 政治의 한 斷面을 보여준다. 그들은 朴 前 大統領이 후쿠다 總理와 가깝다는 事實에 注目했던 것이다. 



    이것보다 書評者가 注目한 대목에는 다음의 事實들도 包含됐다. 


    중국 랴오닝성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정근, 공근 두 동생과 홍석구 신부를 만나 유언 하고 있는 모습. [동아DB]

    中國 랴오닝城 뤼순監獄에서 安重根 義士가 情根, 恭勤 두 동생과 홍석구 神父를 만나 遺言 하고 있는 모습. [東亞DB]

    첫째, 崔 翁의 關心이 처음에는 舊韓末의 風雲兒이자 志士인 開化黨 領袖 金玉均에 쏠려 있었다. 舊韓末 歷史를 工夫하면서 金玉均에게 關心을 두는 이가 어찌 崔 옹뿐이었겠는가. ‘熱血靑年’의 氣像을 지녔던 그가 金玉均에게 愛情을 느끼면서 工夫했다는 것이 조금도 異常하지 않다. 더구나 金玉均은 日本印度 愛情을 느낀 人物이어서 日本人과의 共同硏究를 위한 絶好의 主題였다. 

    둘째, 그런데 崔 翁의 關心은 곧 安重根 義士에게 集中됐다. 우리 民族 不世出의 英雄 가운데 한 名인 安重根 義士에 關한 資料들을 日本에서 꾸준히 하나하나 發掘해 國內에 紹介한 그의 功勞는 인정받기에 充分하다. 特히 그가 日本 學者가 먼저 入手한 ‘안응칠(安應七) 歷史’(흔히 ‘안응칠 自轉’으로 알려져 있다)를 끈질긴 說得 끝에 찾아오는 過程은 感動的이다. ‘안응칠’은 ‘安重根’의 다른 이름인데, 그는 이 事實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우리 民族이 반드시 確保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같은 脈絡에서 그는 日王을 向해 爆彈을 던진 李奉昌 意思에 關한 資料도 發掘했다. 비록 日王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朝鮮人의 抗日獨立 意志를 널리 알린 이 義士의 義擧가 훨씬 더 仔細히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功이라 하겠다. 

    셋째, 崔 翁은 中國 滿洲에 있는 高句麗 廣開土大王陵碑에 關한 硏究에도 힘을 쏟았다. 廣開土大王陵碑는 廣開土大王의 아들이자 後任者인 長壽王이 지린省 지안에 세운, 글字 그대로 ‘偉大한 碑石’으로, 여기에 새겨진 碑文을 놓고 南韓, 北韓, 日本, 中國 사이에 激論이 벌어져왔다. 陵碑와 激論에 關한 그의 回想은 興味롭다. 特히 1960年代 紅衛兵이 朝鮮人의 碑石이 왜 中國 땅에 세워져 있느냐는 非常食的인 發想 아래 破壞하려 했을 때 當時 저우언라이 總理가 介入해 防止했다는 逸話는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한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서울대 규장각]

    婚日康里歷代國支道. [서울大 奎章閣]

    넷째, 崔 翁은 獨島가 아득한 옛날부터 ‘朝鮮=韓國’ 땅이었음을 立證하는 資料, 特히 地圖 發掘에 熱情을 바쳤다. 그 過程에서 朝鮮王朝 太宗 2年(1402)에 만든 ‘婚日康里歷代國道指導(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찾아낼 수 있었다. 現傳하는 東洋의 地圖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指導 自體로도 價値가 높다. 日本에서 이 地圖에 關한 硏究가 活潑해진 까닭이다. 

    그는 獨島에 關한 指導, 特히 西洋의 地圖들을 찾아내고 사들였다. 西洋의 地圖에 根據해 韓國 立場을 뒷받침하는 것이 國際的으로 더 說得力이 있을 것이라는 判斷에서였다. 

    다섯째, 崔 翁은 壬辰倭亂 때 咸鏡道 義兵大將 정문부의 勝利가 記錄된 ‘北關大捷碑(北關大捷碑)’의 實物을 야스쿠니 神社에서 1978年 確認했다. 大韓民國臨時政府 外交部長이었고 1948年 南北協商 推進者 가운데 한 名이었으며 2代 國會議員을 歷任한 趙素昻이 메이지대 學生일 때 朝鮮이 壬辰倭亂에서 升轉했다는 內容을 담은 傳承碑가 야스쿠니 神社에 있다고 쓴 글을 읽은 崔 翁은 마침내 그 비를 찾아 ‘北關大捷碑’인 事實을 알아낸 것이다. 

    이 事實이 國內 媒體에 報道되자, 朴 前 大統領은 崔 翁에게 直接 電話해 그 비가 國內로 돌아올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提議했으며, 그는 여러 通路를 통해 結局 그 提議를 實現하는 데 成功했다. 이 過程에 關한 이야기 亦是 感動的이다. 

    여섯째, 1972年 7月 4日 서울과 平壤에서 南北共同聲明이 發表되자 日本 政界 一角에서 警戒心이 높아졌으며, 이것을 撫摩하기 위해 朴 前 大統領이 當時 최규하 外交安保特別補佐官을 派遣해 講演하게 했다는 祕話 亦是 印象的이다. 5·16 軍事政變 直後 朴正熙가 ‘빨갱이’가 아니냐는 疑惑을 提起했던 日本 政界의 ‘右翼’李 이것을 보고 그 疑惑을 再生시켰다는 事實은 韓半島를 바라보는 日本의 한 視角을 보여준다. 

    일곱째, 1973年 朴正熙 政權이 中央情報部를 통해 恣行한 김대중 拉致事件을 둘러싸고 韓國 政府와 日本 政府가 紛爭韓 事實에 對한 그의 觀察과 關與 亦是 많은 逸話를 담고 있다. 

    여덟째, 1979年 10月 26日에서부터 12月 12日로 이어진 歷史的 轉換期에 關한 그의 觀察 가운데 關心을 갖게 하는 대목은 自身의 4寸型인 최규하 前 大統領에 對한 것이다. 崔 翁은 崔 前 大統領이 12月 12日 전두환 國軍保安司令官 等이 大統領 官邸로 몰려와 鄭昇華 戒嚴司令官의 不法 逮捕에 對한 事後 裁可를 要請했을 때 拒絶했어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拒絶한다고 現職 大統領을 죽일 수 있었겠느냐고 反問했고, 拒絶했더라면 崔 前 大統領은 ‘民族 英雄’이 될 수 있었는데 機會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國內뿐 아니라 日本에 머물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對해서도 仔細히 回想했다. 거기에는 韓國天主敎의 盧基南 大主敎와 金壽煥 樞機卿, 李承晩 前 大統領 때 國務總理 祕書室長을 지냈으나 ‘國際共産黨資金事件’에 連累됐다는 嫌疑를 받아 日本으로 亡命한 선우종院, 동아일보社 編輯局長을 지내고 日本人 夫人을 따라 도쿄로 亡命해 韓半島中立化運動을 이끌었던 김삼규, 抗日獨立運動家로 동아일보社 社長을 歷任하고 韓國민주당(한민당) 首席院內總務로 活動했던 宋鎭禹를 暗殺한 뒤 監獄生活을 하다 6·25戰爭을 契機로 도쿄로 亡命한 한현우, 남로당願으로 越北했다 中國을 거쳐 日本으로 亡命한 박갑동, 朴 前 大統領의 妻男이자 國會議員을 지낸 육인수, 東亞日報社 도쿄特派員으로 後날 동아일보사 社長을 거쳐 金永三 政府에서 統一院(現 統一部) 長官으로 奉職한 권오기, 5共 實勢 가운데 한 名으로 꼽히고 國土統一院(現 統一部) 長官도 지낸 허문도를 비롯해 이호 前 駐日大使, 이규호 前 駐日大使 等이 包含됐다. 이어 詩人 김지하, 劇作家 한운사, 音樂인 길옥윤, 前 서울市 敎育監 김원규, 前 서울대 法科大學 學長 이한기와 그의 弟子 백충현, 그리고 前 서울대 師範大學 地理敎育科 敎授 伊飡 等에 對한 이야기도 나온다. 

    冊에는 陽明學의 代價로 抗日獨立知事였으며 大韓民國 初代 監察委員長을 歷任했다 6·25戰爭 때 拉北된 鄭寅普 先生이 北韓에서 別世했다는 事實이 도쿄를 訪問한 北韓 홍기문에 依해 確認되면서 國內에 알려진 經緯 等도 들어 있다. 홍기문은 小說 ‘林꺽정’의 作家로 大韓民國 政府 樹立 直前 越北해 副首相에 오른 洪命憙의 長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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